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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위기의 징후를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의 강도가 다소 커져도 풍향이 일정하면 새 기운을 포착하는 감각이 무뎌진다. 미·중 대결을 보는 작금의 한국이 그렇다. 어느새 두 강대국의 패권 경쟁을 마치 남의 일인 양 바라보고 있다. 정부 대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 수준도 낮아지고 있다. 정말 이래도 될까.

미국은 이미 남중국해와 중국 해안에 대한 정찰비행을 기록적으로 늘려가고 있다. 미국이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를 통보한 날, 남중국해와 황해에 미국 정찰기가 떴다. 그러자 대륙에서 날아오른 중국 군용기가 야간에 공습하듯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고, 대만 전투기가 맞대응 출격했다. 다시 미 공군 정찰기가 선을 긋듯 대만해협 상공을 통과했다. 급기야 지난 26일엔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가 푸젠성 연안 중국 영해기선에서 약 76㎞ 떨어진 해역까지 바싹 접근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양국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언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일 당장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의 함포나 전투기가 불을 뿜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2001년 중국 하이난섬으로 접근한 미 해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 중국 조종사가 사망하고 미군 정찰기는 하이난섬에 비상 착륙했다. 그러나 이번 충돌은 그때처럼 우발적이지 않을 것이다. 충돌 국면이 일시적이지 않을 위험성도 있다.

한국이 당면한 안보 형세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중하다. 110년 전 우리는 일제에 강점당하면서 처음으로 중국(대륙) 세력으로부터 강제 분리되었다. 이후 일제에 이어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됐다. 그리고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경제를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양국 간 교류를 늘려왔다. 중국보다 더 강한 나라를 동맹의 파트너로 삼아 중국을 상대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오천년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유례없는 상황이다. 한 발짝도 가벼이 움직일 수 없는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의 엄중함에 한국의 대응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외교 철학과 자기 역량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앞길을 찾아야 하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지피지기하면서 미·중을 상대로 이익을 구현할 전략·전술을 마련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도리어 우리 능력만으로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다. 정권에 따라 정반대의 정책과 즉흥적 대응을 반복하며 미·중 사이에서 불안하게 표류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한 군사력평가기관은 한국의 군사력을 세계 6위로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 외형에 걸맞은 전략 수립과 전쟁 수행 능력이 절대 부족하다. 외교전략은 물론 군사 능력 부재에 북핵까지 겹친 지금 상황은 6·25 이후 최대 위기다.

미·중 갈등에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몇 개의 시나리오가 있다. 우선 남중국해에서 미국 함정이 중국군 공격을 받을(또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미국이 동맹으로서 작전 참여를 요구할 것이다.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중거리 미사일 배치 압력을 가해올 수도 있다. 이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설치 때와는 다른 차원의 미·중 양측으로부터 압박 요인이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인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도널드 트럼프가 한국 사정을 이해해줄 리 없다. 중국 역시 한·미 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국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부터 중국 군용기들이 동해와 이어도 인근 한국방공식별구역을 유린하고 있다. 2018년 말 일본의 해상자위대 초계기가 저공비행으로 함정을 위협할 때 한국군은 이미 허점을 노출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중국군과 함께 비행 훈련을 하던 러시아 전투기가 울릉도 인근 영공을 침범해 공군이 대응 사격한 바 있다. 중국의 다음 도발 수위가 훨씬 높아질 것은 불문가지다.

북핵은 우리에게는 만성질환과 같은 존재다. 화급한 것은 북핵이 아니라 미·중 갈등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다. 고조되는 미·중 양국 간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은 더 이상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미·중 갈등에 따른 안보위기는 현재적이다. 외교와 국방 당국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대응 지침을 줘야 한다. 당장 공군과 해군을 중심으로 군 대비태세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도 정치권은 국내 현안으로 공방을 벌이고, 정부는 미·중 군사 대결을 아직도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하고 있다.

<이중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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