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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는 말이 있다. 널리 사랑을 베풀어서 많은 이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인(仁)하다고 인정할 만한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어찌 인에 그치겠는가? 성(聖)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요임금 순임금이라도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이 문제라고 여기셨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내 눈앞의 문제들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나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홍수나 지진 등 특정 지역의 이재민을 구제하는 일과 달리, 너나없이 생업과 일상에 지장을 받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의 것을 내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비교적 방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고 있긴 하지만, 이 시점에 더 어려운 국가들을 위해 수천만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고도로 발전시켜 온 교통과 물류 수단들이 없었다면 감염병이 특정 지역을 넘어 이렇게 급속도로 전 세계에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팬데믹은 ‘연결’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분리’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적, 물적 교류의 단절로 그 연결에 금이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방역 체계가 취약한 제3세계로 감염병이 더 크게 확산될 경우 종식을 선언할 길이 요원해지고 제2, 제3의 유행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가 공동운명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나의 형제라느니, 심지어 천지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느니 하는, 다소 허망해 보였던 말들이 이 지점에서 조금 이해된다. 신체 일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마비 상태를 한의학에서 불인(不仁)이라고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인(仁)은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그 아픔을 느끼는 데에서 출발한다. 대단한 이타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코로나19에 더 취약한 개인 및 국가들과 연대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존 문제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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