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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남극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지 대부분이 빙하로 덮인 부베섬을 향해 항해하던 선원들은 혈색이 흰 물고기를 발견한다. 남극해에 사는 이 얼음물고기는 붉은빛 적혈구가 거의 없는 유일한 척추동물이다. 차가운 물에 산소가 넉넉히 녹아 있는 까닭에 얼음물고기는 혈관의 표면적을 넓히는 방식만으로도 너끈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는 끈적한 적혈구를 없애는 것이 추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모든 척추동물은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를 갖는다. 사람은 약 20조~30조개의 적혈구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전체 세포의 60%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단이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의 적혈구는 색다른 전략을 써서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만 남기고 세포 안 소기관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세포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다. 적혈구에는 유전자를 보관하는 핵도 없고 핵이 없으니 단백질을 만드는 공장도, 거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세포 발전소도 필요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을 버리는 일은 세포의 일관된 경제정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적혈구의 역할은 오롯이 산소를 운반하는 지루한 일뿐인가? 그렇지 않다. 적혈구가 하는 일은 무척 많다. 이런 질문에 천착하는 진화학자들은 보통 최초의 혈구세포가 했던 일을 살핀다. 유기체의 크기가 작으면 대개 피부를 확산해 흡수하는 산소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몸집이 커지면 산소와 소화관을 통해 들어온 영양소를 운반하는 순환계를 따로 설계해야 한다. 이런 장치를 운영하면 불가피하게 외부 미생물이 범접할 것이기에 최초의 혈액세포는 면역 기능도 담당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면역이란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 면역 반응은 유기체가 세균이나 기생충 혹은 음식물을 통해 들어온 독소 같은 물질을 탈 없게 처리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면역계에서는 타자를 인식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스스로를 건드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세포 표면에 촘촘히 박힌 단백질은 이런 과정을 전담한다. 적혈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혈액형이라고 말하는 ABO는 적혈구 표면을 장식하는 단백질의 조합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적혈구는 훨씬 복잡해서 세포막에 50종이 넘는 단백질 집단이 있다. 사람마다 적혈구 레퍼토리가 모두 다르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적혈구 표면에 더피(duffy)라는 단백질이 없다. 평소 이 단백질은 우리 면역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지 않도록 조절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득을 포기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이 얻는 반대급부는 무엇일까? 짐작하다시피 이들은 말라리아 감염에 강한 내성을 보인다.

생존하는 데 반드시 숙주 세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바이러스는 말라리아 열원충과 비슷한 생활사를 영위한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표면의 ACE2 단백질을 관문처럼 통과해 인간의 세포 안으로 들어온다. 심장과 폐, 콩팥 등을 구성하는 여러 세포가 저 단백질을 발현하는 데다 사람마다 조합이 제각각이라서 코로나19와 관련된 상황은 한층 복잡해진다. 세포 안으로 들어온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체를 복제하고 외피 단백질을 만들어 천문학적으로 숫자를 늘린 다음 세포를 터뜨리고 나와 주변의 다른 세포를 공략한다. 이런 바이러스의 생활양식을 차단하는 방법은 없을까?

앞서 언급했듯 적혈구 안엔 헤모글로빈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침투한다고 해도 적혈구 안에선 유전자를 복제하거나 단백질을 만들 수 없다. 이론적으로 적혈구가 바이러스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적혈구에 어떻게 바이러스를 유인하는 덫을 설치하느냐 하는 점이다. 골수에서 분리한 조혈모세포에 ACE2 단백질을 발현시킨 후 이들을 적혈구로 분화시킬 수 있다면 코로나19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리적 거리 두기가 더욱 요구되는 요즘 나는 홀로 질문하고 공상한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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