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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교회가 성경적 근거도 없이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反)정부’를 실천하려는 것도 헌금 수납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목사님들에게 거울이 필요해서는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두 배 더 크게 비춰주는 여자라는 거울 덕분에 최악의 순간에도 자기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냉소했다. 어떤 목사들은 신도라는 거울 앞에서, 두 배가 아니라 신만큼이나 거대해진 자신을 비춰보는 만족감을 누려왔을 것이다. 아멘, 언제나 당신이 옳다는 외침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했으리라. 감히 정부가 행정명령 따위로 제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불쾌했으리라. 아마도 그런 교회일수록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도 카리스마라면 말이다.

아니, 그것만큼 카리스마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카리스마(charisma)는 카리스(charis)에서 왔는데 은총(grace)이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들은 카리스마는 신이 준 선물(은총)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풀이한다. “카리스마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우쭐대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바보라는 표현은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노력이 외부인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신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처럼 보여서다. 종교적 믿음의 본질은, 신의 뜻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 속에서 여하튼 그 신의 뜻이라는 게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간절함이지, 신의 뜻을 내가 안다고 믿는 의기양양함이 아닐 텐데 말이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폭주 자동차 운전대 잡은 사람은
자신을 폐하라고 믿는 어떤 아기
고난의 원인 찾다가 적대가 시작
고난 자체의 소통이 필요한 때

그런 의기양양함의 소유자가 발설한 말 하나를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이를 그저 신성모독이라고만 하면 이 말의 충격이 정확히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에 의해 신이 죽다니. ‘유한’이 ‘무한’보다 크고 ‘상대’가 ‘절대’보다 확실한, 그런 기이한 차원의 우주가 열리는 기분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말은 카리스마 창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저 말은, 프로이트가 어느 영국 그림에서 제목을 빌려와 재치 있게 ‘아기 폐하’(his majesty the baby)라는 말로 지칭한, 유아기 아이들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전능함의 천진한 표현처럼 보인다. ‘있잖아, 난 다 이겨. 아빠도, 대통령도, 하나님도!’ 아멘, 아멘. 옳지, 옳지. 그래서 나라가 망한다고 선동하면서도 당사자는 늘 행복해 보였던가. 가족에게 둘러싸인 아이처럼.

‘아기 폐하’는 무해하지만 ‘아기’가 정말 ‘폐하’가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재앙의 진원지인 광화문 집회 무대에는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유명한 말이 적혀 있어 보는 이를 무참하게 했다.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주최 측은 이 정부를 나치에 비유하고 싶었겠지만, 자신을 나치에 비유하도록 내버려두는 나치는 없다. 그들이 집회에서 어떤 말을 해도 불법 체포, 투옥, 고문, 살해를 당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 조심하다가 원성을 듣는 정부 당국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들을 견뎌내고 있는 국민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 문구는 본의 아니게 자기 지시적 풍자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 폭주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자신을 폐하라고 믿는 어떤 아기다.

지금 본회퍼를 더 적절하게 인용하려면 ‘10년 후’(<옥중서신>)라는 글에서 골라야 한다. 그는 사악함보다 우매함이 더 위험하다고 단언했다. “우매함에는 백약이 무효다.” 그리고 우리가 ‘확증편향’이라 부르는 것을 이렇게 진단하기도 했다. “우매한 자는 제 선입견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에 우매한 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우매한 자는 그러한 경우를 피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무의미한 특수 사례로 여겨 배제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우매한 자는 악인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매한 자는 감정이 상하면 쉽게 공격성을 띠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김순현 옮김)

비난조의 글은 언제든 쓰고 싶지 않지만, 공동체에 재앙을 가져온 이에게는 어떠한 비난을 퍼부어도 정당방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를 따르는 이들까지 경멸하는 건 마음 편치 않은 일이다. 본회퍼도 저 대목 다음에 “인간을 멸시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고 금방 덧붙였다. “설령 우리가 멸시하는 것이 다른 사람 안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완전히 낯선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도 완벽히 우매하지 않지는 않다. 그럼 어째야 하나.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로 그들을 평가하기보다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삶은 쉽지 않다. 고난의 원인을 서로 다른 데서 찾는 순간 편이 갈리고 적대가 시작될 뿐이다. 고난 그 자체의 소통은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병실의 환자들처럼 말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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