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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 작은 방에 대한 동경은 언제부터였나. 아마도 <소공녀>. 그중에서도 반복해서 읽던 장면은 다락방에 펼쳐진 황홀한 식탁을 발견하는 순간. 신분의 추락이냐 회복이냐 횡재냐의 리드미컬한 서사가 아니라, 우연찮게 놀러온 원숭이가 줄줄이 사탕으로 가져온 마법과도 같은 만찬의 순간이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식탐의 대마왕이시다. 그래서 가끔은 새벽에 당도한 음식박스를 풀며 소공녀의 만찬을 떠올리곤 한다. 비록 반 조리 즉석식품을 담은 종이박스지만, 그걸 또 지붕 위까지 끌고 올라와야 하지만, 쌓여가는 박스와 일회용품에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클릭 몇 번으로 당도해 차려지는 이 간편한 식탁이라니, 자의로 타의로 격리된 시절에 고마울 따름이다.

새롭게 가까워진 풍경들이 있다. 지붕 위의 세상이어서 가능한 풍경들. 안테나들 환풍기들 굴뚝들 장독들 화분들 빨래들 전선들 전봇대들 십자가첨탑과 나무우듬지들. 낮게 뜬 구름과 비를 품고 몰려가는 구름과 태풍이 지나간 후의 청명한 구름들. 먼 곳의 봉우리들과 더 먼 곳의 낮달과 밤의 보름달. 꽤 괜찮은 혜택이다. 그리고 새로운 벗들도 생겼다. 지붕 위 세상과 가깝게 살아가고 있는 새들.

참새들은 아침 회합 소리로 존재를 드러낸다. 때론 아침을 여는 낭만적인 음악소리로, 때론 아침잠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인사한다. 난간 위에 잠시 앉았다 가는 녀석, 조심스럽게 와서 목 축이고 가는 녀석, 맹랑하게 블루베리 열매를 갈취해가는 녀석, 전깃줄에 앉아 꼭 시선을 맞추고 사라지는 멧비둘기는 호기심이 좀 많은 편이다. 앞집 벽면의 돌출 부위는 비둘기들의 단골 데이트코스. 춤추고 으스대고 과시하고 졸라대는 애절한 몸짓하며, 아는 척 모르는 척 무심한 척 거드름 피우는 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까치와 까마귀는 목청이 지나치게 좋은 녀석들인데, 가까이서 울면 정말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 시끄럽다. 특히 예고 없이 울리는 까마귀 울음소리에는 매번 적응이 안 된다. 요즘 부쩍 까마귀들 방문이 많아졌는데, 빨랫줄이나 전깃줄에 참새들이 주르르 앉아 있을 땐 교회당 의자에 줄지어 앉은 것처럼 안정감이 있지만, 까마귀가 올라타면 줄이 휘청휘청하는 게 영 불안해 보인다. 얼마쯤 지나면 우아하게 중심을 잡고 어딘가를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는 눈빛인데, 무얼 낚아채려고 저러나 가만 두고 봐야 하나 말려야 하나,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문제적 친구다.

물로 가득 찬 세상이 펼쳐진 꿈
새 세상 도래를 기대한 것인가
소공녀의 다락방이 아름다운 건
꿈꾸고 사귀고 넘나들 수 있는
창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곳에서 가장 귀를 기울이는 건 기상예보다. 유독 긴 장마와 태풍 때문이기도 했지만, 날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비가 길어지니 화초를 들여놔야지 보일러를 틀어 습기를 없애야지, 해가 나면 화초를 다시 내놓고 빨래를 해야지,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시시각각 확인한다. 그리고 태풍이 올라오면 온몸으로 맞아야지 했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어떤 고난 같은 것을 몸소 체험해야지 했다. 그래서 태풍 소식이 들렸을 때, 나는 기대를 안고 기다렸다. 과연 태풍이 오고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무언가 엎어지고 부서지고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꿈속이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세상이 다 뒤집힌 것인지, 대홍수가 지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지붕들도 지붕 위의 풍경도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물로 가득 찬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물탱크는 방주처럼 물 위에 홀로 떠서 넘실거리고 있는데, 물 위로 고요히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으니, 세상이 뒤집혀 숨겨져 있던 다른 세상이 부상한 것이라고도 하고,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라고도 하는, 온갖 기기묘묘한 생명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마나 아름답고 애틋하던지, 제발 꿈에서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국 그것들을 따라 하늘을 날아다니다 깨고 말았는데, 두 팔은 여전히 자유형 자세로 쭉 펼친 채였다.

요 달콤한 동화적 꿈은 무엇이더냐. 세상이 홀딱 뒤엎어지길 바란 것이냐, 어떤 고난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 기대한 것이냐, 해몽인지 뭔지 곰곰 생각하다가 문득,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데 왜 매번 수영 자세를 취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지붕 위 까마귀나 까치처럼 날개를 퍼덕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물속을 나는 펭귄처럼 물질을 하고야 마는 걸까. 헤엄치는 법은 알아도 나는 법은 알 수 없어서. 나의 경험치가 거기까지여서. 꿈에서조차 딱 그만큼. 제 경험치만큼만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참 무서운 일이었다. 소공녀의 다락방이 아름다웠던 건, 하룻밤 차려진 환상의 식탁이 아니라, 견디고 꿈꾸고 이웃하여 사귀고 넘나들 수 있는 창문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까마귀에게 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할 수는 없어도 까마귀를 이해할 수는 있게 되기를. 태풍이 지나는 지붕 위에서 꿈을 꾸다 문득, 나는 창문을 여는 원숭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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