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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디지털 교도소

경향 신문 2020. 9. 15. 10:24

한 여성이 재판정에 올랐다. 그녀의 혐의 중 하나는 근친상간이었다. 자기 아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재판은 이틀 만에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시민은 범죄자를 즉시 처벌하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남자 경비원이 보는 앞에서 흰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가 깎이고, 양손은 뒤로 묶였다. 광장은 분노한 군중으로 가득했다. 수치와 굴욕 속에서 사형대에 올랐다.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았다. 여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고의로 밟은 것이 아닙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사적 제재, 즉 사형(私刑)은 흔히 공개적인 망신주기를 포함한다. 뭇사람 앞에 죄인을 보여주는 회시(回示)는 일종의 명예형인데, 우리말로는 조리돌림이라고 한다. 등에 북을 매달고 죄목을 적어 붙인 후 마을을 몇 바퀴 돌게 하는 것이다. 부락의 규약이나 풍속을 어지럽힌 자에게 자주 행해지던 형벌이다. 1921년 5월,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강원도 통천군에서는 농민들이 패륜 박승윤이란 자를 붙잡아서 등에 북을 지워가지고 조리를 돌리는 중에 중상을 당하게 한 까닭으로… 조리돌리는 것도 폐지할 일이다.”

같은 사건은 조선일보에도 보도되었는데, 제목은 ‘모욕범 집행’이었다. 물론 조리돌림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을의 장로가 죄인을 묶어 곤장을 때렸다. ‘수절하는 과부와 바람이 난 죄’였다. 순검이 출동했지만, 총독부 법에 ‘바람난 죄’는 없었다. 순검은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며 경찰서로 돌아가 버렸다.

사적 제재와 조리돌림은 전통 사회에서 아주 흔한 관습이었다. 조선 시대 향약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과실상규(過失相規)다. 서로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그냥 점잖게 말로 타이르는 것이 아니다. 율곡 이이가 시행한 서원향약에는 예규를 어긴 백성을 40대까지 때릴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중형이다. 음행을 저지른 여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마을에서 추방하기도 했다.

공개적인 굴욕형은 현대 법치 국가에서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재판 중 수갑을 채우거나 포승으로 결박하는 등의 잔재가 남아있으나, 더 이상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거나 광장 한가운데 묶어두지 않는다. 지명수배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흉악범이나 성범죄자를 포토라인에 세우기도 하지만, 그 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공적 처벌 외에는 모두 불법이다. 하지만 원초적 정서가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자기 이득과 무관하더라도 위반자에게 가하는 도덕적 공격을 제삼자 처벌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사실 처벌은 인간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꿀벌이나 문어에서도 관찰된다. 사회적 동물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냉정한 이성이나 사려 깊은 판단이 아니라, 원시적 충동과 본능적 감정이 추동한다는 말이다.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제멋대로 폭주하기 쉽다. 분명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덟 살 아들과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은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가 저질렀다는 천인공노할 죄목을 들으며 공분했다.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온라인 조리돌림 사이트, 일명 ‘디지털 교도소’에 수감된 대학생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다. 누가 어떻게 혐의를 입증하고 판결을 내렸단 말인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주장으로 멀쩡한 젊은이 한 명을 희대의 패륜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수감자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공통점은 단 하나다. ‘누구라도 분노할 만한 혐의.’ 너무 역겨운 범죄니까, 그깟 진위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어린 시절 읽은 옛날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사또가 판결했다. “비록 저자는 결백하나, 그 죄명이 너무 중하니 곤장을 매우 쳐서 돌려보내라.”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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