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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타도 그 사진은 있었으면 싶어.” 그제 통화하면서, 이금섬 할머니(94)는 서울 아파트에 큰불이 났다고 했습니다. 손녀와 함께 살다 다리가 아파 지방의 아들 집에 잠깐 와 있던 차였습니다. 온갖 게 타고 물로 범벅됐다는 말에 할머니는 아들 사진부터 걱정됐다고 합니다. 2018년 8월 금강산호텔에서 67년 만에 만난 아들 리상철씨(당시 71세)가 주고 간 것입니다. 옷장 속에 깊이 넣어놓고, 보고플 때마다 꺼내봤답니다. “경황이 없어서인지 손녀딸이 사진은 이렇다저렇다 말이 없네.” 어제 통화에서도, 할머니는 기다리다 목이 빠질 참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1·4후퇴 때 함경남도 갑산에서 흥남부두로 피란가던 길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 네살 아기가 할아버지로 나타난 거지.” 눈물 그렁그렁한 채 뺨을 비비던 모자의 금강산 상봉 사진은 그날 신문 1면에 실렸습니다. “주름진 아들 얼굴만 생생하고, 나눈 얘긴 기억이 안 나.” 한숨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고 싶어.”

이인영 통일부 장관께.

91세를 망백(望百)이라고 하죠. 3년이 훌쩍 더 지난 이 할머니와의 통화로 글을 시작합니다. 90세 할아버지는 “좋은 소식이 있느냐” 되묻고 인터뷰는 사양했습니다. 2년 전 금강산에서처럼 묻는 말에 다 답하던 기분과 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가 있습니까.” 76세 할머니는 북쪽 오빠와 서신이라도 주고받고픈 맘이 간절했습니다. 그래도 상봉의 꿈을 이룬 분들은 ‘2%의 기적’이라고 하죠. 28번 이뤄진 대면·화상 상봉에서 생사 확인과 추첨을 거쳐 한을 푼 사람은 손에 꼽습니다. 남쪽에선 2414가족, 북쪽에선 2433가족입니다. 시간과의 싸움도 버겁지요. 지난 7월까지 32년간 접수된 남쪽 상봉 신청자 13만3353명 중 생존자는 5만3887명(40%)뿐입니다. 90대가 25%, 3명 중 2명은 80세를 넘었습니다. 2년 전 금강산에서도 부부는 없고 부모·자식 간 만남도 7가족뿐이었죠. 촌수가 멀어지는 상봉은 다들 10년이 고비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이 정부에선 상봉이 단 한번밖에 없었습니다. 화상 상봉이 더해진 노무현 정부에서 17번, 김대중 정부에선 6번,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2번씩 한 상봉이었습니다. 한반도가 ‘종전선언’ 목전까지 거보를 내디딘 정부에서의 무참한 역설입니다. 이 처연한 5만명의 추석앓이를 누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벌써 50일이 됐네요. 통일부에 처음 출근한 게 정전협정일(7월27일)이었죠. ‘먹·아·죽’은 이인영 브랜드가 됐습니다. 먹는 것, 아픈 것,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은 인도적으로 풀어가자고 입에 달고 사는 걸 봅니다. 남북 간에 물물교환을 구상하고, 한·미 워킹그룹 역할 조정을 공론화하고, 추석 화상 상봉을 제의했습니다.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습니다. 수해 지원도 받지 않겠다는 북한은 개성연락사무소를 폭파한 6월에 서 있습니다. 2017년 ICBM 발사 시험으로 앙앙대다 그해 말부터 해빙된 북·미관계는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얼어버렸습니다. 코로나19가 덮고 있지만, 모두 압니다. 변곡점은 11월 미 대선 후에 온다는 것을. 이인영이 말하는 ‘남북의 시간’도 그때 갈림길에 설 것입니다.

기억나세요. 2008년 총선에서 지고 이인영은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800㎞를 걸었습니다. 통일과 복지를 화두로, 그 아득한 길도 걷고 걸으니까 끝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여름마다 4년째 민통선을 걷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미간 전쟁 대치가 있었다고 한 2017년, 이인영이 민통선에서 외쳤습니다. “평화가 밥이다.” “평화가 포탄을 이긴다.” “북한도 핵과 미사일로는 겨레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대화로 돌아오라.” 이 세 마디는 얼마 전 통일부 장관 이인영이 말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CVIP)’에도 녹아 있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외교·통일·국방은 일의 선후가 다릅니다. 한반도의 협착은 열리면 한번에 열릴 것입니다. 그날까지 누군가는 ‘평화의 소’를 키워야 합니다. 북한도 미국도 보고 있겠죠. 운명처럼, 걷던 대로 이인영이 할 일입니다.

남북관계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나라답게’를 거울삼는 남쪽도, ‘정상국가’를 꿈꾸는 북쪽도 이산가족 앞에선 국격이 설 수 없습니다. 나흘 뒤가 이산 상봉 정례화를 약속한 9·19 평양선언 2주년입니다. 그 이틀 뒤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을 합니다. 다시 어르신들 맘 콩닥거리게 하는 ‘희망고문’이 될지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습니다. 6주를 준비한다는 상봉이 어려우면, 영상편지나 서신 교환 소식이라도 전해지는 추석이길 바랍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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