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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오백 번의 아픔은

경향 신문 2020. 9. 16. 10:53

학위 받은 후 어느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일하던 때였다. 전공은 다르지만 연구관심을 공유하던 동료 셋이 공동강연을 한 꼭지 기획했다. ‘무작정 상경: 서울역의 사회·문화사’라는 주제였는데, 전날 오후에 합을 맞춰보니 내가 준비해온 부분이 가장 재미가 덜했다. P선생님이 강연의 뼈대를, K선생님이 강연의 심장을 담당한다면, 나는 청중의 졸음을 도맡을 듯했다. 그래도 짧은 기간 동안 함께 만들어낸 결실에 뿌듯해져 힘이 났다.

힘이 너무 나서였는지 리허설 마치고 합동연구실로 내려오는 도중 층계를 힘차게 헛디뎠다. 여러 번 구르다 돌계단 모서리에 등과 허리를 부딪쳤다. 혹시 척추가 건드려져 마비되는 건가 하며 겁을 집어먹었지만 팔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이기에 괜찮은가보다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보니 팔에서 피가 송골송골 나고 있었다. 다리도 여기저기 긁혔고, 말끔히 다려 입고 온 치마에는 온통 흙물이 들었다.

혼자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나를 부축하여 두 분이 의무실에 함께 가주셨다. 그 상태로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면 안 된다며 K선생님은 슬리퍼도 빌려주셨다. 나란히 오솔길을 걸어 학생회관풍 건물에 위치한 의무실로 찾아가자니, 어릴 적 체육시간에 뜀틀하다 넘어져 친구들과 양호실 가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노란 풍선 같아졌다.

달달한 걸 먹으면 기운날 거라며, 들어가는 길에 P선생님이 팥빙수를 사겠다고 했다. 허름한 빵집 테라스에 셋이 동그랗게 머리 맞대고 앉아 다디단 팥과 찹쌀떡과 프루트칵테일 얹은 옛날식 빙수를 먹었다. 흙물 묻은 흰 치마를 입은 채 ‘깔맞춤’하듯 팔다리에는 하얀 거즈를 붙이고서 뭐가 그리 재미났던지 자꾸 웃음이 났다. 머리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지도 않던, 그저 그런 후덥지근한 오후였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찬란한 볕으로 남을 것을 나는 예감했다.

빵집에서 돌아와 각자 마무리작업을 하다 뭘 좀 배달해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복도로 나가서 중국집에 전화하고 들어오니  맞은편 책상에 앉은 P선생님의 뒤통수가 보였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분 특유의 학자다운 반듯한 뒷모습을 한 채 구글 검색창의 짬뽕 이미지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계신 것 아닌가? 세상에, 얼마나 배고프셨으면.

“예? 짬뽕요?” 내 말을 들은 그분이 가까이 와보라며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셨다. 짬뽕은커녕 음식사진조차 아닌, 식민지시기 경성역 이미지들이었다. 강의  자료사진을 찾고 있는 모습이 왜 좀 전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이소영 선생님 배고팠네, 배고팠어.” 두 분이 놀리셨다. 짜장면과 짬뽕과 군만두를 나누어먹은 우리는 자정 무렵까지 함께 일했다.

나는 원체 잘 넘어지는 편이다. 그 후로도 다섯 번은 꽈당 하여 무릎 깨지고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피학성 쾌감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면서, 매번 상처를 소독하여 약 바르고 거즈 붙이는 동안 마음이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처럼 기분 좋게 데워지곤 했다. 흐리든, 비 쏟아지든 머리 위로는 해가 쨍한 느낌이었다. 그런 날엔 으레 팥이 든 찬 것이나 중국집 배달음식이 생각났다. 그것이 내겐 ‘아플 때 엄마가 만들어준 치킨수프’가 된 셈이다.

이렇듯 나한테만 의미를 갖는 사소한 장면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백 가지는 된다. 한 기억을 다섯 번씩 불러낸다 하더라도 살아가며 오백 번의 아픔은 견뎌낼 수 있을 테다. 그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썼으니 여전히 아흔아홉 개 남았다. 그러니 어디서 칼을 날리고 독화살을 쏘더라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 잃지 않을 것이다. 속살의 속살 같은 기억을 한 아름 품은 나는 그 순간 햇살 가득한 언덕을 뛰고 있고, 포도밭을 지나 양떼를 넘어 저녁 종소리에 달려가 하얀 달 하얀 별 새하얀 식탁에서 하얗게 웃고 있을 테니까.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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