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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던 첫날, 입학식을 마친 후 어머니가 내 손을 끌고 간 곳은 서점이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간 종로2가의 종로서적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까까머리 풍덩한 깜장 교복을 입고 서점 앞에 얼이 빠져 서있는 1학년 중학생이라니. 책으로 가득한 6층 큰 건물에서 그날 어머니는 국어와 영어 사전 하나씩을 사주고, 한 권은 마음대로 고르라 하셨다. 책보다는 짜장면이 더 좋은 나이였지만, 아마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당시 베스트셀러를 골랐던 듯하다.

그 후 중고생 시절을 보내며 종로서적을 제법 드나들었다. 그때 산 주부생활판 <코스모스>, 미하엘 엔데의 <모모>,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같은 책들은 아직도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그만 전쟁이 터져 중학교 구경밖에 못한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소중한 경험이다.

서점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1980년대 말까지 종로는 지금의 강남역, 홍대 앞처럼 젊은이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었고, 종로서적은 그런 젊은이들이 약속을 잡는 단골 장소였다. 지금은 교보문고 광화문점 정도가 그나마 비슷한 역할을 할까? 그렇게 서점은 그냥 생활 속에 늘 존재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일부러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희귀 아이템이 되었다.

출판사를 일산의 한 서점 내로 옮긴 지 일 년이다. 이름을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한양이 아닌데 ‘한양문고’라는 이름으로 일산의 한 중심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서점이다. 10여개의 문화 관련 단체들이 입주해 있고, 강연장과 세미나실을 갖추고 연중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서점인지라, 출판사와 서점의 협업도 가능하리라는 판단에 결심을 굳혔다. 출판사를 방문한 저자와 지인들이 저마다 잘했다는 평가를 내려줘서 만족스러운 마음이다.

그런데 최근 이 서점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오후 대여섯 시 퇴근 무렵이면 중고생들이 삼삼오오 서점에 들어와 책을 펼치거나 계산을 하는 모습이다. “서점에 중·고등학생들이라니!” 이 말이 우습거나 기이하신가. 그러나 전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참고서와 문제집도 아니고 일반도서 코너에 청소년이 북적이는 모습.

지역신문인 고양신문은 새 소식으로 “북페이 사업 2주 만에…동네서점 학생들로 북적”이라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고양시가 최근 기획한 ‘친구야 책방가자!’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양시는 지역 중·고등학생 5만7000명에게 1만5000원의 도서교환권(북페이)을 지급해서 지역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당연히 참고서나 문제집은 제외,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도 제외다.

프로젝트 기획 당시 관계자에게 조언을 했다. 권장도서나 교육효과 같은 것은 고려하지 말고, 도서쿠폰을 현금화하는 등의 부작용도 걱정하지 말라고. 시 예산의 극히 일부인 8억6000만원으로 5만명 넘는 아이들이 서점이라는 곳을 처음 가보는 경험, 생애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직접 책을 사는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 기획은 대성공이라고. 아마 5만여명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고, 적어도 1000명은 자기 용돈으로 다시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올 것이다. 8억원으로 이보다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또 무엇이 있을까.

동화책이나마 읽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자마자 성인의 경력단절 못지않은 독서단절 상태에 접어들어 성인 이후까지도 변변한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회에서, 이 사회를 이끌 양식 있는 시민의 탄생을 꿈꿀 수 있는가. 선거일이 막 지난 오늘, 새로 당선된 서울과 부산 시장은 부동산 말고 이런 관심을 한 번이나마 가졌는지 묻고 싶다. 그 점은 유권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080300115&code=990100#csidxfae2e519c072b759afc940d27d103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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