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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낡고, 국민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판이라지만, 과거 대통령 선거 때는 최소한의 기본 선은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선거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었고, 유력 후보들이 내세운 국가비전을 둘러싼 토론도 벌어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 권위주의와 군부독재 잔재 타파 등의 대의가 있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와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워 바람을 일으켰다. 하다못해 이명박 전 대통령도 “(나처럼) 부자 만들어 드릴게요”라는 메시지로 표심을 홀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를 외쳤다.

그런데 지금 정치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내년 3월 대선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어떤 선거가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다. 여권은 실체도 불분명해진 개혁 구호를 외치고, 야권은 ‘문재인 정부’ 심판에만 올인한다. 같은 편끼리도 서로 죽일 듯 싸운다. 안팎으로 ‘저를 뽑아주세요’가 아니라 ‘쟤는 안 돼요’라는 말만 난무한다. 후보들이 저마다 나름의 비전을 제시한다지만, 눈길은 싸움에만 쏠리는 법이다. ‘쥴리의 남자’가 어떻느니, 특정 후보 가족의 국민의례가 어떻느니 하는 뉴스가 등장하는 것도 여야가 제대로 된 공론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 못할 일들투성이다.

무엇보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아직까지 여론조사 선두권을 유지하는 것은 의아하다. 윤 전 총장은 각종 실언, 현안에 대한 공부 부족 등으로 자질 논란에 휩싸였고, 최근 고발 사주 의혹에까지 휘말렸다. 문재인 정부에 맞서 싸운 ‘공정의 표상’이란 후광도 많이 걷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각종 여론조사 선두권에서 버티고 있다. 야권 2위 후보로 부상한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어떤가. 막말과 설화로 야권 내에서도 부정적 시선이 많지만, 그는 20~30대 남성의 지지를 얻으면서 예상 밖 반등을 이뤄냈다. 한계가 뚜렷한 두 사람이 야권 주자 1·2위를 차지한 현실은 달갑지 않다. 그만한 대안도 찾지 못한 유권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야당이 정상적 환경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도 그닥 다르지 않다. 네거티브에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경선은 도를 넘었다.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멱살잡이까지 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측은 이재명 경기지사의 도덕성과 인성을 문제 삼았고, 이 전 대표는 8일 의원직 전격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면서 “부끄럽지 않은 후보를 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이 지사 측은 이 전 대표가 총리와 민주당 대표 시절 무능했다고 공격한다. 상대방을 ‘부끄러운 후보’ ‘무능한 후보’로 낙인찍었으니, 후유증은 불가피하다. 한 여론조사에선 이 전 대표 지지층 40%가 대선에서 이 지사를 찍지 않겠다고 했다. 이러고도 민주당이 말한 ‘원팀’이 가능할까.

더 기가 찬 건 여야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여당은 내로남불·위선 등으로 4·7 재·보궐 선거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하고도 오만하다. 민심 이반과 지지율 하락이 가짜뉴스 탓이라도 된다는 듯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였다. 국제사회의 우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한 송영길 대표의 발언에는 여권의 오만이 투영돼 있다. 시민들이 설마 적폐덩어리 국민의힘 후보를 찍겠느냐는 낙관에 빠진 것 아닌가. 국민의힘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게 나오는 정권교체 여론에 취해 비틀거린다. 당 선관위가 유력 주자 한 사람 보호하겠다며 명분 없는 경선룰 변경을 시도하고, 지도부가 문재인 정부 반대로만 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막무가내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야권의 현실 인식과 실력을 의심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이꼴저꼴 다 보기 싫다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다’는 어르신들 입버릇과 차원이 다르다. 내로남불과 오만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사람들을 적잖게 봤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흐름이 확인된다. 김봉신 리얼미터 수석부장은 “20대 청년층의 무당층 비율을 볼 때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가 확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권심판론과 개혁 구호가 난무하는 정치 과잉의 시대에 정치혐오 여론이 늘어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것도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예를 자처하는 촛불정부하에서 정치혐오를 논하게 될지 몰랐다. 이대로라면 내년 대선은 비호감 경쟁으로 전락할 것이다. 여야에 묻는다. 정치혐오, 언제까지 부추길 건가.

이용욱 논설위원

댓글
  • 프로필사진 참참7 정치혐오보다 언론혐오가 더 크게 와닿는 지난 한해가 아니었나요. 본질보다는 지들 보고싶은대로 써대는 통에 피해자들은 울분을 토했습니다. 언론중재법이 진짜 필요했던 때였습니다.언론이나 잘 하세요. 2021.09.0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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