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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2년 반 동안 ‘공통의’ 경험을 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절대 ‘공통’의 경험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최근 발간된 책 <가장 외로운 선택>(김현수·이현정 외, 북하우스)은 2020년 상반기에 발생한 20대 한국 여성의 ‘외로운 선택’-자살-의 결과를 보여준다. 당시 20대 여성 중 자살 시도자는 3005명, 자살사망자는 296명으로 전년 대비 각각 32.1%, 43% 증가했다. 필자들은 팬데믹 자체가 주요한 촉발요인임이 분명하지만, 2011년부터 전체 인구의 자살률이 점차 감소하는 상황에서 지난 10년 동안 가장 낮게 유지되던 20~24세 청년 여성의 자살률이 2017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사실에 주목한다. 실제로 1997년생 청년 여성은 1951년생(부모 세대)이 청년일 때보다 자살사망률이 7배나 높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똑같은 ‘코로나’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코호트’(cohort) 속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코호트’란 통계학에서 ‘공통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뜻한다. 코호트는 cohort의 라틴어 어원 chortem(울타리)이 보여주듯 사회로부터 경계선이 그어진 집단이다. 최근 20대 여성의 자살 시도 급증은 이들 집단의 공통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코호트 효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후반 출생 여성들은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2014년 ‘세월호 사건’이라는 사회적 재난을 목격했으며, 성인이 된 직후에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n번방 사건’ 같은 젠더폭력과 여성혐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20대 여대생의 안타까운 죽음마저 마주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그녀들이 속한 한국이라는 거대한 코호트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독특한 인위적 (경제의) 빈곤과 (기호의) 풍요 속에 놓여 있다.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자신의 성장을 위해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어 왔다고 역설한다. 즉 노동자가 생계를 위한 자원이 부족해야만 조금의 남김없이 노동력을 발휘한다고 본 것이다. 히켈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불안정한 고용과 부족한 사회복지체계가 불가피한 것이 아닌 ‘인위적’ 선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분명한 건, 이것이 졸업과 취업을 앞둔 20대 여성에게 자신의 인생이 아닌 ‘현생’을 살게끔 일상의 ‘외로운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들의 일상적 감정(혹은 정동) 속으로 불안, 불신, 무력감, 자괴감이 쉽사리 전파되고 있다.

한편 이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각종 ‘기호’(즉, 미디어 정보)의 풍요 속에 노출되어 있다. 이탈리아 미디어 이론가인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기호자본주의’ 시대라 칭하며 이로 인한 정신병리(외로움, 실존적 고통, 우울증 등)의 증가를 역설한다. 그의 지적대로 현대인은 자본주의의 인위적인 (경제적) 빈곤과 (기호적) 풍요 속에서 공감보다는 개인의 생존과 성과를 더욱 도덕적으로(시험에 의해 ‘공정’하기만 한다면) 받아들일지 모른다.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지적처럼 공동체 중심의 연대와 공감보다는 개인 중심의 분열과 원자화가 디폴트인 ‘고립의 시대’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는 20대 여성들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지만, 공통의 경험을 위한 공통의 울타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 누군가와의 구별을 위한 울타리, 즉 혐오가 덧씌워진 코호트를 목격하기가 쉬운 현실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 시기에 ‘리투얼의 종말’을 외친다. 그는 리투얼(ritual), 즉 의례의 핵심이 ‘상징적 지각’이라 말한다. 상징의 그리스어 어원인 symbolon은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우호적인 표식을 뜻한다. 즉, 환대의 표식이다. 한병철은 타인을 자신의 집 안으로 들이는 환대의 상징이 사라졌다 역설한다. 그가 복구하고자 하는 리투얼이란 바로 코호트 간에 놓인 울타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분열과 고립을 위해 각자의 울타리를 올리는 ‘루틴’들이 난무한다. 그 루틴을 침범하는 타인은 환대의 상징이 아닌 혐오의 상징, 즉 ‘낙인’(烙印, stigma)이 찍히곤 한다. 결국 외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선 이들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징표는 낙인이 아닌 환대의 상징일지 모른다. 가격표가 아닌 징표 말이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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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이인 왜 이렇게 어렵게 쓰세요? 좀 쉽게 쓰면 안 되나요?
    코로나시대에 여성자살률이 늘어난 것은 다른 코흐트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경제의 빈곤과 기호의 풍요가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리투얼이 필요하다.
    이 정도가 요지라면 20대 여성들이 얼마나 빈곤한지, 기호의 풍요가 왜 여성들을 고립시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제시해야 않을까요? 다른 나라 학자의 말만 인용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2022.07.26 15:24
  • 프로필사진 김광규 글의 근거가 너무 부족함
    20대 여성만의 특별한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명확치 않음
    20대 남성이나 30대 여성은? 다른 연령이나 성별에 대한 비교가 없음 다 비슷한 사회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아닌가요?
    결론부터 내놓고 원인을 억지로 찾은 글인것 같습니다
    2022.07.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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