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의하면, 연일 계속되는 이번 폭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북아메리카, 북유럽, 아프리카 등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상이변인데,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고 한다. 고도 10㎞의 상층 대류권에 기압 차이로 서에서 동으로 부는 강한 바람띠(편서풍, jet stream)가 형성돼 있어 대기 순환에 기여하는데, 이 바람이 약화되어 고기압의 흐름이 정체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열대 서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높아져서 상승기류가 활발해진 것도 고기압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호주의 한 대학 연구팀은 20개국 412개 지역에서 2031~2080년 열파(Heat Wave)로 인한 사망자를 예측할 수 있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들어 분석했는데 2031~2080년의  열파로 인한 사망자수는 1971~2010년 대비 4배 이상 20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산화탄소(CO2)의 배출로 온실효과(Greenhouse Effect)가 발생하여 지구표면의 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지구온난화라고 불러왔는데, 최근에는 미국 과학학술지 논문에서 핫하우스 지구(Hothouse Earth)라는 개념이 소개됐다. 지구온난화가 돔(dome)이 씌워진 것 같은 현상의 임계점을 이미 넘어서서, 더 이상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더라도 지구가 온실이 되는 것을 막기 어려울 수 있다고 예상한 것이다. 대체로 기후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이산화탄소 배출만 줄이면 마치 산술적으로 온실효과도 진행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미 일어난 현상이 지구의 안정된 질서를 깨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어 예측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해수면 상승이 그 실례이고, 기후변화 관측을 담당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을 경우를 든다. 빙하가 녹으면 지구 평균 해수면을 7m 이상 높이게 되고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반이 잠기고, 상하이도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태국, 메콩강 하구도 지대가 낮은 편이라 해수면 상승 시 위험하다. 폭염과 혹한, 홍수 등 극한현상은 진작부터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관측돼왔다. 식량과 물부족, 기후난민, 빈곤심화 등의 사태도 기후변화의 결과로 초래될 것으로 보고 있다.

2015년에 파리기후협약을 통해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195개 국가들이 산업화 이전 시기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2도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지켜야 하는 공동의 의무를 부담하기로 했다. 그 후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적 인식도 상당히 제고됐지만, 이것이 단순히 에너지 공급원인 화석연료를 줄이는 것만으로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게 이미 나타난 사태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이다. 지구 평균기온은 2016년 현재 1.1도 올랐고 바다도 계속 더워지고 있는데 한번 더워지면 열이 잘 식지 않기 때문에 수온은 계속 상승할 것으로 본다.

그런 가운데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기후변화는 화석연료를 사용한 산업문명이 초래한 것이어서 미국은 역사적 책임이 가장 큰 국가이지만, 실제로 기후변화의 피해는 미미한 편이다. 기후변화에서는 원인제공을 한 선진국 국가군과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개발도상국 간의 불균형도 문제해결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우리나라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4위에 속하는 책임이 큰 나라다.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급변하리라는 예측을 하면서도 신속하게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데에는 구체적인 피해를 겪기 전에는 좀처럼 문제를 실감하기 어렵고 관행대로 흘러가는 게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의 고통스러운 장기간의 폭염을 겪으면서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보다 절실한 각성의 계기가 주어진다면 그나마 다행일 수 있겠다.

기후변화는 산업문명의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다. 지구적 규모로 거대화한 물질적 성장과 혜택을 공유하기에 한 국가나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실천할 방법들이 마땅치 않고 효과도 미미하다는 점에서 개인으로선 속수무책에 가까운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물론 개개인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을 나누면서 적합한 생활방식을 찾아 사소한 실천이라도 해나가야 한다. 이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생각이 든다.

기후변화는 산업문명의 시작 때부터 드리워져 있던 어두운 이면이다. 이제 포화상태의 표면을 뚫고 드러나는 놀라운 진실은 우리 스스로 공동의 집 지구를 폭행하고 망가뜨려 집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지구를 파괴할 정도로 가공할 만한 힘을 부려본 경험이 이전에 없었기에 무분별한 과오로 인해 초래됐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 저변에는 왜곡된 문명의 관점으로 ‘이기심’이 깔려 있다. 탐욕이 인간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지구와의 관계에서 배려와 신중함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이다. 인간중심주의는 대체로 두 형태로 나타난다. 과오를 알게 된 상황에서도 거짓말과 조작을 동원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경우이다. 일찍이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으로 화학제품의 문제를 폭로했을 때부터 산업의 이익을 누리는 측에서는 항상 그런 반응을 반복해왔고, 지금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근저에는 과학을 발전시켜서 자연을 지배하고 그리해서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성찰능력에 대한 위대한 자부심이 놓여있다. 그러한 의식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동력이기도 했다. 이제 인본주의의 가치를 나누는 사람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지점에서 다시 연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구와의 관계 재정립이 이 문명의 가장 커다란 숙제이며, 이 문제와의 상호연관성 안에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바다가 육지를 삼키고 하늘이 두꺼운 온실공간의 뚜껑으로 갇혀버려 산천초목이 죽어간다면, 밀폐된 지구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으랴.

<강금실 | 사단법인 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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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이가 든 사람들을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소.” 알래스카 극지방의 유목민인 그위친족의 족장은 부족회의를 거친 후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부족과 운명을 같이해왔던 두 늙은 여자 칙디야크와 사는 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알래스카의 얼음 위에서 단둘이 남아야 했습니다. 칙디야크는 80세, 사는 76세일 때의 일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척박한 환경에 둘만 남아 스스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두 여자는 버려진 순간부터 놀라운 잠재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몸은 노쇠해졌지만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같은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래전에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그걸 말리기 위해 저장고까지 만들어야 했던 개울을 찾아 나섭니다. <두 늙은 여자>(벨마 윌리스, 이봄)는 여성의 잠재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사다 지로의 소설 <천국까지 100마일>(산성미디어)에서 나이가 마흔인 주인공 야스오는 사업 실패 후 버는 돈 모두를 이혼한 아내에게 양육비로 보내야 하는 거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칠순을 맞는 그의 어머니는 한시라도 약을 투입하지 않으면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어머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쿄에서 100마일 떨어진 카모우라의 한 병원에서 ‘신의 손’을 가진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복한 생활에만 관심이 있는 형들과 누나는 청상과부가 되어 40년이나 뼈가 빠지도록 일만 하며 4남매를 키워낸 어머니를 냉담하게 대합니다. 오직 파산자인 막내 야스오만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혼자의 힘으로 그곳으로 모셔 가려 합니다. 야스오는 빌린 고물 자동차의 조수석에 어머니를 앉히고 100마일을 달려갑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함으로써 막내아들의 재기를 돕겠다는 놀라운 의지를 보여줍니다. 모자는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네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야. 부자인 네게 버림을 받고 싶은 거지!”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 넘어간다/ 어머니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전병석, 어른의시간)에 실린 시 ‘역모’의 전문입니다. 나이 마흔에 혼자가 된 어머니는 4남1녀를 반듯하게 키워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모시겠다는 자식이 없자 저승길로 ‘알아서’ 떠나줍니다. 이후 막내아들은 2년 동안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시로 써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죽어서까지 자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존재입니다.

흔히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정상이나 중심만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는, 즉 수직적 위계구조에 적합한 ‘계단식 사고’(남성적 사고)의 시대가 가고, 주어진 모든 정보를 연결해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즉 수평적 네트워크에 적합한 ‘거미집 사고’(여성적 사고)의 시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성들의 삶은 어떤가요?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페이퍼로드)의 저자 바버라 화이트헤드는 “골드미스의 연애는 왜 항상 실패로 끝이 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하는 건 벼락 맞기보다 어려운 일”인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평생 함께 살 사람’이나 ‘영혼의 동반자’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이 되니 비혼이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초솔로사회>(마일스톤)의 저자인 아라카와 가즈히사는 2035년이 되면 “일본 인구의 절반이 솔로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라고 다를까요? 제 주변을 살펴보아도 30대 여성의 절반 이상은 비혼을 꿈꾸고, 기혼 여성의 대부분은 비출산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소설의 키워드는 ‘페미니즘’과 ‘퀴어’뿐이라고 합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이 사회 이슈가 되었는데 올해 초부터 ‘미투’ 운동이 전개되면서 그 움직임이 더욱 거세진 바람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지구상의 마지막 모계사회인 모쒀족에서 찾고자 합니다.

추 와이홍은 <어머니의 나라>(흐름출판)에서 “인류의 절반을 억압하고도 이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제를 채택한 대다수의 사회에 필요한 교훈을 얻었다. 모계제와 가모장제를 채택한 모쒀 사회가 가진 원칙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볼 만한, 더 평등하고 더 나은 멋진 신세계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고 주장합니다. 

모쒀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부재합니다. 모쒀인들은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연인을 찾을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물론 이 모든 선택은 여성들이 주도합니다. 누구나 아샤오(연인)를 은밀하게, 공개적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삼아서, 혹은 부부로, 혼인증명서가 있거나 없는 형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선택은 평생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선택은 시기와 횟수에 구애받지 않고 열려 있습니다. 연달아, 동시에, 삶의 어느 국면에서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며 무제한으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곧 이런 세상이 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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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시를 전공한 그는 문학의 자율성 안에서 자족할 법도 하지만, 언제나 문학과 현실과의 관계를 묻는 일에 각별했다. 가령,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 현실을 무한히 제거하며 순수를 지향하는 뺄셈의 시학이라고 칭하고, 한용운의 ‘임’을 들어 무한히 긍정하는 덧셈의 시학이라고 부를 때, 또는 초현실주의자의 소량현실론을 언급하고 사실주의자들의 인식의 전복을 강조할 때 그는 문학이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해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낯선 시들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도 그들이 “자신들의 말로 현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이나 드라마가 현실을 지우는 것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문학이 다른 현실을 꿈꾸고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에 희망을 거는 진정한 문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문학적’이라는 상투화된 문법, 혹은 키치화된 문학을 경계했을 뿐 아니라 세상의 거창한 이론과 체계들을 구체적 경험이 깨부술 수 있다고 믿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순진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는 이러한 희망이 언제나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실패의 자리에서 변화와 함께 피어난다고 설파했던 견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실패의 그 구체적 경험은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난초분을 기를 때의 무의식과 자식을 키우는 무의식, 혹은 투표의 무의식처럼 완강한 현실에 스며들어 다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 변화를 후천개벽이나 혁명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종교나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죽이지는 않는” 사회의 도래에서 보았고, 전쟁이나 5·18민주화운동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그 누구도 해줄 수 없지만, “그들이 바라던 세상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것만이 복수라면 복수”라고 믿는 희한한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밤마다 깨어 달의 시간과 타자를 품는 몽상가였지만 낮과 밤의 시계를 재는 엄정한 학자였고, 그 낯선 것들을 이끌고 와 낮의 대지 속에 끊임없이 빚어넣기를 마다하지 않는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문학이 현실을 더하고 빼면서 현실을 교정하고, 현실이 봉인된 문학을 열어젖히면서 풍요롭게 한다는 믿음을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사소한 부탁> 서문)

그는 문학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구체적 현장에서 포개지는 그 은혜의 시간을 칼럼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다. 가령, 보들레르의 악마 이야기를 세월호의 악마에 겹쳐놓을 때,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세상 끝으로 향한 청년 뱅상을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의 식민주의를 비판할 때 그의 글에는 여러 층의 현실과 인식이 함께 포개진다. 나는 이러한 겹의 글쓰기를 그의 말을 좇아 ‘종합적 언어’라고 칭한 바 있다. 과거-현재-미래, 혹은 한국과 프랑스, 밤과 낮, 문학과 현실이 순차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공존하는 것, 그의 칼럼은 <컨택트>의 외계인의 동시성의 언어를 닮아있다. 거기에서 랭보와 말라르메, 그리고 봄의 소금인지 가을 소금인지를 아는 소금 맛의 귀신들, 곤반불레와 만주 오리찜이 이물스럽지 않게 다정히 앉아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현실을 들려준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시인은 랭보와 김수영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랭보의 시가 “현실을 지우는 황금빛과 황금빛을 지우는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았고, 김수영의 시가 “현실의 언어로 현실을 진솔하면서도 절박하게 그리는 가운데 다른 삶을 전망하고 끌어당”겼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이 현실을 몰라도, 현실을 받아쓰기’해도 안된다고 했으나 인간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정치적이고, 문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몸소 이행하던 실천가였다. 무엇보다 그가 김수영에게 바쳤던 헌사의 한 자락, ‘그는 현실을 직설하였지만, 그가 맨땅에 내던진 말에는 심정의 특별한 깊이가 아닌 것이 없었다’는 그 자신, 황현산이라는 비평가의 순정한 언어에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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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수업>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와 인격을 보여준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의 안과 밖에서 배우고 민주시민성을 갖고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배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새로운 것을 연결하고 맥락화하거나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스스로 읽고 쓰고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근 몇 년간 학생중심 교육과 공교육을 마치 소비재처럼 보게 하는 수요자중심 교육이라는 용어가 강조되었다. 학습자의 흥미와 관심에 맞추고 학생이나 학부모의 의견대로 교육활동을 하는 것이 학생중심 교육의 핵심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학생들이 재미를 느끼고 지루해하지 않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고 학부모의 요구대로 교육과정을 짜면 교육적인 것일까?

학생중심 교육은 교육자인 교사가 학습자의 특성과 흥미와 요구를 고려하여 교육적 효과가 있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교사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며 그들이 어떤 시민으로 자라기를 바라는지에 따라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수업목표를 정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학생들에게 배움이 있도록 매 수업을 디자인한다. 다시 말해 교과교육 목표와 성취기준에 따라 수업과 평가 방식을 정하는 것이다.

성취기준은 학생들이 교과를 통해 배워야 할 내용과 이를 통해 수업 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능력을 결합하여 나타낸 수업활동의 기준이다. 많은 교사들은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고 잘 배우는 수업을 고민하는데 쉽지 않다. 매년 여름 열리는 전국 배움의 공동체 세미나에서는 전국에서 1000여명 교사들이 모여 학생들의 배움이 있는 수업에 대해 서로 토론한다. 이 외에도 협동학습, 토론학습, 프로젝트수업 등 다양한 수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교사연수나 모임이 학기 중이나 방학 때 활발하게 진행된다.

최근 많은 교사들이 중요한 미래역량인 협력능력을 학생이 길렀으면 해서 협동적 활동을 포함한 수업과제를 고민한다. 이는 공교육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다. 공교육은 학생들이 인간의 존엄을 알고 사회경제적 배경과 개인차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교육격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텍스트를 통해, 친구와 교사를 통해 세계와 타자와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어야 공교육의 공공성이 확보된다.

교사 개인이 수업의 한 시간, 한 시간을 디자인하는 것도 결국 국가교육과정의 큰 틀과 뗄 수 없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적은 모든 학생들이 인격을 도야하고 민주시민으로 크게 하는 것이다. 교사로서 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존중하고 배려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힘을 키우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교육과정도 문서로만 민주시민 육성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정책도 교육의 목적에 맞게 추진해야 한다.

수업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다. 학생들이 재미를 느끼는지, 어떤 학생이 점수를 더 받는지가 수업 목표를 좌우하지 않는다. 수업 한 시간도 목표가 명확지 않으면 산만하고 가르침은 있으나 배움은 없는 시간이 된다. 공교육 개혁에서 우리 교육의 목적이나 개혁의 지향점에 따라 추진전략을 수립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논의과정에 교사들의 교육적 고민과 의견은 담고 있는가.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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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스개가 있습니다. 한 손님이 와서 며칠 묵었다 돌아가려니 마침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바깥양반이 운치 있게 그럽니다. “더 있으시라고 이슬비가 내리는군요.” 그러자 안주인이 후다닥 우산 들고 뛰어나옵니다. “아유, 곧 가랑비 되겠어요!” 이슬비가 더 있으라는 거면 가랑비는 그만 가라는 거죠. 언제나 손치레에 힘든 건 안주인이니까.

손님이란 적당히 돌아갈 때를 알아야 한다는 속담이 ‘가는 손님은 뒤통수가 예쁘다’입니다. 옛날엔 상투 틀어 올려 뒤통수가 더욱 도드라지게 둥글었겠죠. 이제나 저제나, 대관절 언제 가나 싶던 손님이 드디어 저만치 돌아가니 그 뒷모습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아니겠습니까. 분위기 파악 못하고 눌러앉는 객이 오죽하면 이런 속담까지 나왔을까요. 게다가 먹고살기 힘들던 옛 시절에, 아침저녁 손님상 내려면 뻔히 뒤로 누구누구 돌아가며 굶었을 텐데요.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오래 머물면 그 집 식구들에게 폐도 그런 폐가 없습니다. 말 한마디 조심스럽고 더운데 꼭꼭 여미며 속옷바람에 돌아다니지도 못하니 내 집에서 내가 불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붙잡는다고 눈치머리 없이 주저앉는 객이 꼭 있습니다. “벌써 가려고? 저녁 먹고 가지, 그래.” “그럴까?” “과일로 입가심이라도 하고 가.” “그럴까?” “시간도 늦었는데 자고 가는 게 어때.” “그럴까?” 어휴, 안주인은 속이 터집니다. 바깥양반도 주인 된 예의로 한 소린데 정말로 궁둥이 깔고 앉으니 아내와 식구들 보기 미안해 냉가슴만 끙끙입니다. 처음엔 식구들끼리 ‘저분 언제 가시나’ 하다 종국엔 ‘저놈 언제 가’ 눈짓과 입속말로 욕을 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저도 이형기 시인의 ‘낙화’ 한 구절로 운치 있게 마무리하고 ‘아냐, 됐어’ 달싹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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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요새 웬 비옷이 그리 비싸우.”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청계천 빨래터에서 청어(비옷) 값을 탓하는 아낙네의 푸념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벌이가 변변찮은 서민들이다. 5전짜리 동전을 잃어버리고는 주인에게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한약국집 점원 ‘창수’, 이발소 ‘재봉이’, 남의집살이를 하는 ‘만돌이네’….

구보는 <천변풍경>에서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서민의 삶을 카메라로 찍듯이 소상하게 묘사했다. 당시 청계천변은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청계천이 복개공사로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전기세가 걱정이고, 숨 막히는 뙤약볕 아래서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열기를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는 종일 에어컨을 트느라 늘어난 전기세 걱정이 배부른 소리다.

일제 때 청계천변이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면, 1960년대 이후 서울에서 못사는 동네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는 삼양동이다. 삼양동이라는 이름에는 원래 ‘삼각산의 양지 바른 양쪽 동네’라는 정겨운 의미가 배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달동네’ 이미지가 굳어졌다. 최근 삼양동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옥탑방살이’로 뜻밖에 핫플레이스가 됐다. 박 시장이 지방선거 때 공약했던 강남·북 격차를 줄일 방안을 찾겠다며 지난달 강북구 내에서도 기반 시설이 취약한 삼양동에 옥탑방을 얻어 거처를 옮기면서다.

그의 옥탑방살이에 ‘보여주기 쇼’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하루라도 살아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마련이니 탓할 일만은 아니다.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그도 땀이 줄줄 흐르는 옥탑방에선 맥을 출 수 없고, 삼양동 오르막길을 ‘따릉이’로 다니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았을 테다. 동네 구멍가게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 ‘솔샘시장’처럼 점포 수가 적은 시장은 ‘전통시장’으로 등록할 수 없단 점도 알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에어컨 아래서 머리로 상상만 했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박 시장은 옥탑방 입주 19일째를 맞은 지난 8일 “대한민국 99 대 1 사회를 실감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혔다. 마침 그날은 박 시장의 옥탑방 옆집에서 6급 장애를 지닌 40대 남성이 숨진 지 수일 만에 발견된 날이기도 하다. 박 시장은 한달살이가 끝나는 날에 답을 내놓겠다고 했다. “큰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라고 했던가. ‘원순네 옥탑방’에서 그는 ‘열쇠’를 찾았을까.

지도자가 갖춰야 할 조건 중의 하나로 공감 능력을 꼽는다. 하지만 권력자일수록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2008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하계올림픽 때 미국 국기를 거꾸로 든 일 역시 이를 보여준다. 박 시장은 옥탑방을 나오면서 자기 시선에 맞게 국기를 거꾸로 드는 것 같은 답을 내놓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훔친 가난’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정책으로 녹아들어야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가지 않는 몇몇 집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솔샘시장이 전통시장으로 등록될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 싱겁게 막을 내려선 안된다. 폭염에 왜 누군가는 에어컨이 있는 쉼터로 갈 수 없었는지, 고독사한 남성이 서울시 ‘찾동’ 사업에서 왜 소외됐었는지를 답해야 한다.

오늘도 원순네 옥탑방은 민원인들로 북적인다. 어떤 부탁은 ‘사소’하고, 어떤 부탁은 ‘중’하다. 딜레마는 그 부탁을 다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박 시장은 “쇼면 어떤가. 나는 삶에서 피어나는 선한 영향력을 믿는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쇼. 그런 쇼라면 얼마든지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순씨의 한 달’이 서민의 고충을 아는 데 그쳐선 안될 일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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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우주에는 굳이 중심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너는 너로, 모두가 다 중심이다. 죽음에도 중심은 없다. 떠나는 순서가 태어난 차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한 것처럼 죽음도 한결같은 빠르기로 사방에서 늘 달려들고 있다. 내 나라에서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도착하지 못할 바다란 없다. 큰 나라처럼 무식하게 넓지 않아서 좋다.

어느 곳에서인들 저 무량한 하늘과 곧장 내통하지 않으랴만, 고흥은 우주와 직방으로 통하는 한 입구라는 생각에 몸이 들뜬다. 마음 한쪽에선 어딘가에 두고 온 심장과 연결되는 듯 쫄깃한 느낌도 일어난다. 소금을 품고 있어서일까. 멀리 낭떠러지 아래 길게길게 헤엄쳐온 시퍼런 바닷물이 해안을 짚으며 하얗게 포말로 부서진다. 세파를 헤치고 한 고비에 도착한 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것도 같은 현상일까. 이제 곧 어느 저편 언덕에 닿아 부딪혀 부서지라는 신호인 셈이겠다.

소금 때문에 바닷물이 상하지 않듯 죽음 덕분에 삶은 썩지 않는다. 우리가 연속적으로 사는 동안 옆구리가 늘 허전한 건 애인을 못 만나서가 아니었다. 생년월일에 열어둔 괄호를 아직 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많은 분들이, (생년∼2018), 이라고 그간의 살림살이를 단출하게 꾸러미한 뒤 언덕 너머로 이사했다. 아니다. 그분들을 두고 우리만 몽땅 오늘로 옮겨왔다고 해야 함이 옳겠다. 시금치 같은 시, 해바라기 같은 소설을 읽을 때 혹은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벼랑길을 걸을 때 떠오를 어른들의 얼굴도 있다.

멀리 내나로도의 야트막한 산머리에 흰 구름이 걸려 있다. 언제쯤 닫히는 괄호의 기슭에 도달하여 포옹하듯 그러안아 나를 보따리할 것인가. 흰머리를 쓰다듬는데 해안에 핀 참나리가 들어온다. 짠맛과 칼바람을 다스리며 위엄있게 바깥을 내다보는 참나리. 살아있는 이와 살아있지 못하는 이들의 명복을 모두 빌어주는 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 흔들리는 참나리. 꼿꼿하고 붉다. 참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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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남포 출신 박영심 할머니. 1938년 3월, 그녀는 일제의 ‘처녀 공출’에 걸려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중국 난징에서 3년을 보낸 뒤 미얀마의 라시오, 윈난성 쑹산(松山) 등의 위안소를 전전했다. 6년 동안 많은 날은 하루 30~40명씩 일본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연합군 포로가 됐다. 그녀는 미군의 신문에 게재된 위안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 속의 여인은 만삭이었다. 2000년 그녀는 “사진 속 여인이 나”라고 밝혔다. 또 난징과 윈난의 옛 위안소에 가서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외쳤다. 2015년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옛터에 기념관이 들어선 데는 그녀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기념관 마당에는 임신한 위안부의 동상이 세워졌다.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한장면.

충남 논산 출신 송신도 할머니. 16세 때 시집간 그녀는 무서워 첫날밤 도망쳤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에게 ‘위안부’ 중개인이 접근했다. 도착한 곳은 중국 후베이성 우창(武昌)의 위안소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러 차례 임신을 했다. 사산한 적도 있었다. 이후 한커우(漢口), 웨저우(岳州) 등 여러 위안소를 거쳤다. 총탄이 날아오는 중에도 군인을 상대했다.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1993년 4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0년간 법정 투쟁의 끝은 패소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2009년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그녀의 법정 투쟁 기록이다.

일본군성노예 피해자 20여만 명 중 남북한 정부에 신고 된 피해자 수는 500명에 불과 합니다. 위안부 기림일인 14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정의기억재단이 신고된 500명을 기리는 소녀상 500개를 전시하여 이름 없이 사라져간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전시된 소녀상은 8시간 14분 동안 전시된 후 사전 신청자들에게 전달 됩니다. 이상훈 기자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떳떳하지 못한 몸’이라며 쉬쉬했다. 40년 넘게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위안부 문제에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었고, 일본은 부인했다. 한 증언이 오랜 침묵을 깼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는 TV에 나와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파장은 컸다. 용기를 얻은 ‘위안부’ 생존자들이 하나둘 증언에 합류했다. 피해 신고자는 남한 기준 240명, 이 중 생존자는 28명이다. 피해자들의 기억과 투쟁이 한국 현대사를 새로 썼다. 그들의 기억을 평화와 인권 증진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뒤늦게 정부가 동참했다. 오늘, 8월14일은 올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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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손톱 밑 가시, 암 덩어리’에서 이제는 ‘붉은 깃발법’이 등장했다. 규제를 이르는 전·현직 대통령의 화법이다.

규제완화가 또다시 화두다. 규제를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낙인찍었다. 국가경쟁력을 갉아먹으면서 신성장 산업과 일자리 창출 등 혁신성장의 발목을 잡는 해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규제완화의 부작용은 감춰둔 채 기업은 물론 보수언론과 정부·여당도 규제완화의 깃발 아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규제가 왜 생겼는지, 왜 존속하고 있었는지, 규제를 없애면 어떤 부정적 효과가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규제 때문에 일자리가 창출되지 못하고 경제성장이 뒤처진다고 보는 것이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붉은 깃발을 들라는 법이 없었더라면 자동차의 속도에 감이 없었던 시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허둥대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동차 산업의 선두였던 영국이 독일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규제를 탓하고 있다.

왜 일자리 숫자와 경제지표에 급급하나. 지지율이 조금 떨어졌다고 조급해하는가. 경기가 둔화되고 각종 지표가 나빠지자 재벌에 기대던 과거 정부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몰래 만나 주고받던 지난 정권과 다르다면 공개적 만남이라는 것과 금전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일 뿐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특정 기업 봐주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투자와 고용을 압박하는 수법은 이전 정부 판박이다. 하라는 재벌개혁은 제쳐 두고 재벌에 구애하는 모습만 드러내고 있다. 역시 권력을 잡고 보니 먹고사는 것이 제일이던가. 개혁하라고 쥐여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경제를 외치는 언론과 재벌에 끌려가고 있다.   

지금의 지지율 50%대가 정상이다. 공약이행과 개혁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집권 초반의 70%대에서 한참 빠졌다고 방향을 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초심 그대로 나가야 할 때다. 이제는 지지기반마저 이탈할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역대 최저 지지율은 은산분리 원칙 공약파기와 삼성 껴안기로 개벌개혁이 물 건너가는 것은 아닌지 불만을 느낀 진보 지지층의 거리두기다. 실망한 촛불시민이 하나둘 표심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집권 2년차다. 개혁을 마무리하고 공약을 실천해야 할 때다. 일자리와 혁신성장에 밀려 기업이 하자는 대로 하다보면 규제의 댐은 무너지고 지지층도 균열이 간다. 정부가 약점을 보이면서 기업에 매달리니 벌써 온갖 기업 민원이 쇄도한다. 고용과 투자를 늘리겠으니 대가를 달라고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한다. 경제부총리가 기업총수를 만난 날 미래먹거리인 바이오에 대한 투자와 혁신의 대가로 복제약가를 올려달라는 민원을 들이밀었다. 은산분리 완화는 규제파괴의 서막이다. 개인정보에 관한 규제와 원격의료를 포함한 의료 관련 규제, 규제샌드박스 5법, 규제프리존특별법, 서비스발전산업기본법 등 소위 붉은 깃발 리스트가 대기하고 있다. 찬반의 논란이 적지 않은 분야들인데 너무 성급하다. 혁신 친화적 경제환경을 조성하고 신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 산업이 가져올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규제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이익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제는 악이며 규제혁신은 성장과 먹거리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규제만 풀면 혁신성장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규제는 국민의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화학물질관리법’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을 규제하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그 예다. 기업에는 비용부담의 규제이지만 넘지 못할 규제의 벽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규제완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세월호 참사, 여전히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 라돈 침대 사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거의 대부분 규제를 완화해준 정부나 국회의 책임이거나 있는 규제를 피해가려는 탈법적 기업운영의 탓이다. 참사로 인한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은 규제완화로 얻을 이익보다 훨씬 크다. 자본의 이익 앞에서 규제는 무력해지기 마련이지만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된 규제는 경제논리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규제가 완화되어 기업 활동이 법률과 국민의 감시를 피해간다면 언제 참사의 위험이 현실화될지 모른다. 국민의 생명은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국가가 생명보호의무를 뒷전으로 밀어두고 자본의 이익, 일자리, 성장 논리에 밀려 규제혁신에 드라이브를 걸면 경제지표도 끌어올리지 못한 채 지지층 이탈의 원심력만 커진다.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에 관한 규제의 장벽이 견고해야 국정운영의 지지기반도 더 단단해질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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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특수활동비가 드디어 폐지되게 됐다. 여야 원내대표는 13일 문희상 국회의장과의 주례회동에서 특활비를 폐지하기로 합의했다.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주도해 지난주 특활비 ‘양성화’ 방침을 내놓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폐지’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본래 목적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통제와 감시 없이 ‘쌈짓돈’처럼 사용해온 특활비의 달콤한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꼼수’를 부렸다가 심상찮은 여론에 직면해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꼴이다. 여하튼 국회 특권의 상징처럼 여겨진 특활비를 폐지키로 한 건 늦었지만 다행이다. 바닥에 떨어진 국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스스로 약속한 ‘특권 내려놓기’부터 실천하는 게 첩경이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문희상 국회의장, 자유한국당 김성태·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왼쪽부터)가 13일 국회의장실에서 회동을 하기 앞서 손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국회는 특활비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어야 한다. 여야는 특활비 폐지에 따른 제도개선 방안을 국회의장에게 일임, 16일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특활비 폐지의 대의에 걸맞은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 제도개선이란 명목으로, 없어진 특활비를 업무추진비 등으로 전환해 고스란히 보전한다면 ‘이름만 바뀐 특활비’란 비난을 면치 못할 터이다.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회 차원의 특활비는 총액을 줄이되 영수증 처리 등으로 양성화하는 방안마저 운위된다. 국회 특활비의 태반을 차지하는 국회의장단과 상임위 특활비가 어떤 식으로든 존속할 경우, ‘꼼수 폐지’라는 공분만 살 뿐이다.

특활비 수술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개혁과제이다. 국회 특활비 규모는 전체 국가기관 특활비의 1% 규모다. 특활비가 집중된 국가정보원·검찰·경찰·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특활비는 오랫동안 통제와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를 상납받아 사적 용도로 사용한 이명박·박근혜 청와대의 실상은 특활비의 암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활비는 지출 내역 확인이 불가능한 탓에 원초적으로 불투명성과 오용의 문제를 안고 있다. ‘기밀을 요하는 국가안보’ 등 취지에 부합하는 특수영역을 제외한 특활비 예산은 모두 없애는 게 길이다. 특활비 예산 편성과 집행에서 기본적인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각 국가기관의 특활비의 필요성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조정하고, 특활비가 오용되지 않도록 할 책무 역시 예·결산 심의권을 갖는 국회에 있다. 국회의 ‘특활비 폐지’가 특활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의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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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3일 혁신성장 추진 방안으로 ‘플랫폼 경제’ 카드를 내놓았다. 정부는 ‘데이터·블록체인·공유경제’와 ‘인공지능(AI)’ ‘수소 경제’ ‘혁신인재 양성’을 전략투자 분야로 선정했다. 플랫폼 경제는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등 여러 산업에 걸쳐 꼭 필요한 인프라, 기술, 생태계를 말한다. 이를 통해 혁신성장을 가속화하고 경제체질개선·생태계 혁신을 촉발하겠다는 게 정부의 비전이다. 그러면서 바이오헬스를 스마트공장, 에너지 신산업, 핀테크 등과 함께 8대 선도산업으로 선정했다. 정부는 내년에 전략투자 분야에 1조5000억원, 8대 선도산업에 3조5000억원 등 모두 5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혁신성장을 위한 산업정책을 펼치겠다는 의미다.

정부의 혁신성장을 위한 기업 지원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혁신성장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당초 혁신성장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일자리 창출력이 높은 중소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차 산업혁명에 관련된 미래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미래 8대 산업 육성’으로 이름표를 바꾸어 달더니, 이제는 ‘플랫폼 경제’라는 말로 갈아탔다. 혁신성장의 목표가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혁신성장의 하나의 축인 중소기업의 성장동력화는 보이지 않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답습하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 게다가 삼성이 연관이 있는 바이오헬스가 8대 산업에 포함된 배경도 개운하지 않다.

혁신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함께 문재인 정부가 목표로 하는 성장의 두 축이다. 혁신성장의 뒷받침이 없으면 소득주도성장은 길을 잃는다. 혁신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자리의 창출이다. 그런데 이번 ‘플랫폼 경제’ 발표에는 중소기업 혁신성장은 물론 일자리에 대한 전망치도 없다. 혁신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일자리도 늘어날 수 있도록 추진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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