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난 아들과 함께 집에 있던 상준은 문득 낯선 신호음이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지만 상준과 가족은 약 50종의 크고 작은 전자제품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신호음이나 경고음을 내는 기기는 자동차를 제외해도 40종이 넘었다. 상준은 낯선 신호음을 내는 기계를 직접 찾지 못하고 결국 스마트홈 앱을 실행시켜보았다.

경고음을 내는 기계는 아들 준영이의 건강 상태를 늘 점검하는 ‘아이지킴이’였다. 준영이의 목에 목걸이처럼 걸린 지킴이는 빨간 LED를 깜빡거리고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상준이 아들에게 물었다.

“준영아, 어디 아파?”

준영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그리고 아직 어눌한 “아니, 안 아파”라는 대답이 뒤를 따랐다.

상준은 조금 마음을 놓으면서 스마트홈 앱을 다시 띄우고 아이지킴이를 선택했다.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 진단’ 항목을 누르자 시커먼 느낌표가 튀어나왔다.

‘서버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에러 코드 699.’

상준은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선 인터넷을 이용하는 다른 가전제품이나 스마트홈이 전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문제는 어디까지 아이지킴이 자체에 있었다. 상준은 앱을 몇 번 재실행하면서 아들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아들은 조금도 거북하지 않은 모습으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준은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인터넷을 뒤져 아이지킴이 사용팁을 검색해보았다.

‘아이지킴이 에러 699 간단해결법.’

상준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인터넷 글을 찾았다. 한때 아이지킴이 제조사의 직원이었다는 사람이 이곳저곳에 남긴 글이었다. 작성자에 따르면 사실 에러 699는 서버 연결과 관계가 없고, 제조사가 네트워크 연결에 책임을 돌리려고 마련해둔 가짜 경고라고 했다.

작성자는 집에서 손쉽게 고칠 수 있는 방법까지 안내하고 있었다. 상준은 아이지킴이의 고정장치를 풀고 작성자가 만들어놓은 시연 동영상을 따라 순서대로 분해했다.

“아빠, 목이 간지러워.”

“이걸 벗기니까 어색해서 그래. 조금만 참아. 아빠가 고쳐줄게.”

상준은 가느다란 아이지킴이를 반으로 나누어 열고 빨간 전선과 가느다란 콘덴서를 찾아냈다. 콘덴서 아래에는 더 작은 접점들이 늘어서 있다. 동영상에 따르면 접점 가운데 한 쌍을 강제로 분리하기만 하면 앞으로 다시 699번 에러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상준이 동영상 시연을 정확히 따르고 아이지킴이를 재조립하는데 갑자기 준영이가 헐떡거렸다.

“아빠, 가슴이 답답해.”

상준이 손본 지킴이는 아무 경고음도 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했지만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갈 만큼의 분별력은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뒤 응급실 의사들은 준영이의 증상을 신속하게 해결해주었다. 준영이는 초미세먼지 알레르기 때문에 비강에 박막필터를 끼고 있었고, 지킴이가 처음에 보낸 경고는 필터 손상 때문에 발생했다. 제조사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동영상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에러 699는 정말로 아이지킴이 서버가 응답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상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응급실 출구에서 손을 끌어당기며 장난치는 아들을 보면서, 근거 하나 없이 낯선 이의 가짜 동영상에 아들 목숨을 걸었던 어리석음을 속으로 한 번 더 질책했다.

‘폭스밋베어’는 팔로어가 13만2000명인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이 계정에는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사진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사진은 거의 대부분 전원생활을 누리는 한 가족의 모습이다. 이 가족은 한결같이 행복한 표정으로 숲속에 살고, 직접 채집한 자연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적어도 사진만 보자면 그렇다.

계정 주인은 숲에서 직접 채집한 음식재료가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는 책을 출간했다. 책이 아마존에 모습을 드러내자 5점 만점에 1점짜리 평점이 쌓이기 시작했다. 저자가 날로 먹어보라고 권하는 야생 버섯이 실은 그리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검증하지 않은 정보가 너무 많이 담겨서 위험했기 때문에 출판사는 결국 문제의 책을 전부 회수했다. 하지만 아마존 사용자 다수가 항의한 다음에야 회수한 것으로 볼 때, 결국 독자의 건강을 지켜낸 건 출판사가 아니라 독자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차고 넘치는 인터넷 자원에 힘입어 아주 많은 정보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가 많고 신속하게 전달된다는 사실이 정보의 질이나 진위를 보장하진 않는다. 아무리 팔로어와 ‘좋아요’가 많아도 그 사람들이 내 배 속에 들어가버린 유해물질을 해독해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이 전부 언급하고 동의한다고 해서 가짜뉴스가 진짜로 변하지도 않는다. 가짜뉴스와 유해한 정보를 안일하게 받아들이면 결국 그 독소는 뇌까지 스며들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고통을 심고 말 것이다.

이 시대에, 일상생활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과학적인 의심과 합리적인 검토가 더욱 중요한 이유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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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더위가 그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날빛 쨍쨍한 동안의 더운 기운이 9월 상순까지 아주 사그라들 리가 없다.

처서를 지나서도 이어지는 더위는 한반도에서 살다 간 옛사람들에게도 견디기 힘들었다. 한겨울에 강 한가운데서 캐, 초가을까지 석조 또는 목조 빙고(氷庫)에 보관한 얼음 한 조각이 그나마 구원이었다. <삼국사기> 등에 남은 신라시대 여름 얼음의 기록, 고려시대 ‘반빙(頒氷)’의 기록 등은 유구한 이 땅의 더위를 증거한다. 반빙이란 여름부터 입추 앞뒤로 관리나 퇴직 관리에게 사흘, 이레, 열흘 주기로 얼음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뿐만 아니라 성균관 학생, 환자, 투옥된 죄수에게도 얼음이 돌아갔다. 그때 한여름의 얼음이란 입만 즐겁자고 먹는 식료일 수가 없다. 몸의 열기를 식히고, 더위에 잃은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온열질환에 쓰는 약이었다.

이 귀한 얼음을 즐겁게 먹어치운 사람들도 물론 있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시 ‘착빙행(鑿氷行)’ 가운데 한 대목이 이렇다. “으리으리한 집에서는 오뉴월 푹푹 찌는 날(高堂六月盛炎蒸)/ 미인이 하얀 손에 얼음을 내어 와(美人素手傳淸氷)/ 장식 아로새긴 멋진 칼로 얼음을 깨 여기저기 드리니(鸞刀擊碎四座)/ 느닷없이 대낮에 안개처럼 부서지는 새하얀 얼음 가루(空裏白日流素霰)”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도 유명한 한국식 빙수의 원형이 여기 있다. 힘있는 사람들을 위한 빙수의 원형, 또는 얼음 음료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은 여기저기 보인다. 얼음을 이만큼 쓰는 사람들이 여기서 그칠 리 없다. 냉장냉동 시설 없던 시절 여름이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변변한 식료를 마련하기 어려운 철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있는 사람들은 참 잘 먹었다.

19세기 양반가에서 전해진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의 ‘외장아찌’ ‘무장아찌’ 조리법을 보자.

오늘날의 한국어로 풀어 읽으면 이렇다. 먼저 어린 오이의 속을 파내고 젓가락 윗마디만큼 끊고 닷 푼(약 1.5㎝) 길이로 정리한다. 이것을 잘 묵어 농도 짙고 감칠맛도 더한 진장에 절였다가 두세 번 달인다. 여기에 가늘게 썰어 두드린 쇠고기를 넣고 볶는다. 그러고는 표고버섯, 석이버섯, 고추, 파, 마늘을 채 썰어서 더해 맛을 낸다. 끝으로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마지막 양념을 한다. 무도 마찬가지로 다룬다. <시의전서>에 따르면 이야말로 “하절(夏節) 반찬 진품”이었다. 반찬이라니,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일품요리 한 접시 아닌가.

또 다른 19세기 조리서인 <음식책(飮食冊)>을 보면 여름에 더 신이 나는 듯도 하다. 여름철 웃기, 곧 음식의 장식으로 쓰는 음식 또는 식료는 병과와 식물 둘로 구분된다. 병과로는 방울 모양으로 앙증맞게 빚은 증편, 깻가루에 굴린 인절미, 주악을 쓰라고 했다. 식물로는 연꽃잎, 국화잎, 승검초잎, 석이버섯을 들었다. 연꽃잎을 쓰고 싶은데 시기를 놓쳐 못 쓰게 되면 장미꽃잎으로 대신하라는 부기도 남겼다. 이렇게 준비해 교자상 한 상을 차릴 때, 색색을 맞추어 꼬치에 꿴 전인 화양누르미, 편육, 담쟁이잎을 깔고 찐 뒤 잣가루로 장식한 우무, 여름 채소 만두 등을 곁으로 놓고는 닭찜 또는 생선찜 또는 추포탕을 반드시 일품요리로 준비한다. 음료로는 수정과나 보리수단이 뒤따른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식료를 구하고, 이만큼 요리를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정약용은 여름철 농민의 식생활을 “상추쌈에 보리밥을 둘둘 싸 삼키고는(葉團包麥飯呑)/ 고추장에 파뿌리 곁들여 먹는다(合同椒醬與)”라고 했지만 이쯤이면 그래도 꽤 잘 먹은 편이다. 홑으로 고추장이 서민대중에게 으뜸가는 별미였고, 반찬으로는 오이와 부추와 무가 여름에 그저 무난했다. 간장도 귀해서 채소에 찔끔 뿌려 먹거나 그마저 안되면 소금으로 숨을 죽여 먹는 수밖에 없었다. 참외만은 서민대중에게도 돌아갔지만 유실수에서 거둔 잘 익은 과일은 도성 사람 차지였다. 복달임도 별것 없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논이나 둠벙의 미꾸리, 천렵으로 거둔 민물 잡어가 가장 만만한 단백질원이었다. 얼음, 얼음 음료, 과일, 장식용 꽃잎이란 거둘 겨를도 먹을 여지도 별로 없었다. 진부한 말이겠지만 구체제와 프랑스대혁명을 아울러 겪은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한마디가 새삼스럽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한여름 하늘 아래, 얼음과 꽃잎과 과일을 기다리던 사람이 살았고, 고추장에 파뿌리가 고마운 사람이 살았다. 여름은 이전에도 상하귀천을 갈랐다. 갈라도 이렇게 극명히 갈랐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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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누군가는 드라마 <셜록>의 배경인 런던 베이커가(街)를, 현대미술의 성지인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을 권했지만 정말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다. 술꾼인 내게는 펍(pub)이 그랬다. 매일 아침과 점심을 포만감 있게 챙겨 먹었는데, 그건 펍에서 맥주, 정확히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주조한 지역 수제 맥주(크래프트 비어)만 줄곧 마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5박6일 머무는 동안 런던과 옥스퍼드의 펍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락날락거렸다.

펍. 퍼블릭 하우스의 약자다. 서민과 여행자들의 술집이다. 예전 펍들은 숙박을 겸해 ‘여관(taver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도 많다. 단층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2층 이상일 경우 위층에서는 요리와 간단한 맥주 한두 종이나 와인을 내놓는다. 1층 바(bar)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맥주와 간단한 마른 안주만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푸짐한 안주에 술을 곁들이는 한국인의 술상에 비하면 단출하다. 펍은 오래됐다. 수백년 된 펍도 찾아볼 수 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사람들이 더 좋아하기에 새로 연 펍이라도 일부러 골동품을 진열한다고 한다. 펍은 캠퍼스 안이나 근처에도 있다. 대학생들은 런치 메뉴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강의실에 들어간다. 아이들도 낮에는 부모를 따라 펍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곤 한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람과 사귀는 법을 펍에서 배우는 셈이다. 펍에서는 밴드가 공연을 하기도 한다.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 산업도시의 펍은 노동자들이 정치를 논하고 행동을 약속하는 공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 펍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수줍고 무뚝뚝한 영국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펍에는 ‘먹고, 마시고, 사교적으로(Eat, Drink, Social)’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처음 갔던 펍에서 놀란 건 초면에 그들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허풍, 빈말, 짓궂은 장난과 진지함이 교차했으나 수다는 내내 유쾌했다. 진짜 ‘스몰 토크’였다. 웨스트민스터 앞의 펍 바텐더는 내게 프로게이머 임요환을 아냐며, 플레이를 따라하는 데 쉽지 않다면서 와인 한 잔을 서비스로 줬다. 웨스트민스터 청소부 여성은 언제든 그곳을 구경시켜주겠단다(농담이었을 것이다). 런던 중심가 피카딜리 서커스의 펍에서는 아일랜드 남자가 내게 “어이, 친구”라 부르면서 다가와 자신들의 ‘펍 친구들’을 소개시켜줬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에 대해 실컷 토론하다가는, 각 나라의 건배 구호가 뭐냐고 묻는다. 술에 취한 한 남성은 내게 “백인들 얼굴 구분할 수 있냐”고 묻더니 “나는 동양인들을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다 똑같잖냐”면서 인종주의 발언을 뱉기 시작한다. 한 여성이 곧 위트 있게 핀잔을 준다. 남자는 “미안”을 외치고 군말을 안 한다. 다른 남성은 어색함을 넘길 유머를 건넨다. 이른바 사회적 음주(social drinking)의 공인 장소인 만큼 나름의 규칙이 공기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여행과 사교를 좋아하는 글로벌 청춘들은 그래서 영국을 찾아 ‘펍 투어’를 즐긴다.

물론 한국에도 ‘펍’은 많이 있다. 영국 에일 맥주와 아일랜드 기네스 흑맥주 맛을 알아버린 애주가들은 ‘크래프트 비어’가 써 있는 강남역, 신사, 합정, 이태원, 서촌, 북촌의 ‘펍’을 찾아간다. 그 ‘펍’들은 다양한 ‘보통 사람들’이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기보다는 세련된 입맛의 식도락들이 찾아가는 ‘맛집’이자, 칸막이가 쳐 있는 자리에서 친구, 지인과 취향을 공유하고 ‘인스타’ 사진을 찍는 공간에 가깝다. 펍에서 파는 술과 안주는 바다를 건너 넘어 왔지만, ‘펍 문화’는 함께 넘어오지 않은 셈이다.

실은 영국에서도 펍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중이다. 2000년대 중반 실내 금연이 큰 영향을 끼쳤단다. 주세가 올라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서 집에서 마시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한다. 일부 젊은이들은 나이든 느낌의 펍보다는 클럽이나 맛집을 선호하게 됐다. 15년간 런던의 펍 중 4분의 1이 문을 닫았고, 지금까지 30년간 사라진 펍이 전국적으로 3만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에도 한 주에 29개꼴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글로벌 여행자가 많은 런던을 벗어나면 펍의 풍경은 확실히 달랐다. 옥스퍼드 주택가 펍의 바에서는 노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바텐더와 객쩍은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퍼즐을 풀고 있었다. 모처럼 말 걸 이방인을 발견한 칠순이 넘은 노인은 자신이 경험한 싱가포르와 홍콩의 풍경을 길게 풀어주었다. 젊은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혼자 맥주를 홀짝였다.

펍이 좋았던 이유는 맥주 때문만이거나, 영어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외려 언젠가부터 ‘잘 아는 사람’ 말고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거나 보증을 받지 않고서는 얼굴을 마주 보고 말을 섞는 것이 ‘위험해진’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식당 직원과도 대화하기를 꺼려 키오스크로 버튼을 눌러 음식을 ‘비대면 주문’하는 걸 편하게 느끼게 됐다.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이불 밖은 위험해”라며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로 하려는 세상, ‘비대면’이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친근한 표정과 유머를 통해 쉽사리 이방인에게 ‘친구’라며 다가오는 영국의 ‘펍’이라는 공간은, 낯설지만 반가운 ‘상상’을 불러낸다.

도시화의 진척,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확산, 개별화를 지향하는 개인주의 윤리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이다. 나 역시 사람과 대면하기보다 메신저 채팅이 편하고, 회식 자리보다는 친구 몇 명이 편하게 갖는 술자리가 좋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수다를 떨어본 경험의 부재, 회식을 하더라도 맥주 한 잔을 들고 다니면서 ‘스몰 토크’를 하고 간단히 즐겁게 헤어지는 경험을 갖지 못함 때문 아닌가 싶었다. ‘동네’가 살아있던 시대에서 자라 참견을 하고 오지랖을 떨던 세대가 사라지고 개인주의자들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좀 더 배려하며 수다를 떨고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펍이 아니라도 좋으니, 술집이 아니라도 좋으니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서로 불편하지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이 이곳저곳에 생기면 좋겠다 싶었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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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지난 10일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라’ ‘동물도살금지법 지지’ 등 두 가지 청원에 답변했다. 우선 청와대는 현행 축산법상 가축에서 개를 제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정부가 ‘식용견’ 사육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측면도 있어 가축에서 개를 제외하도록 축산법 관련 규정 정비를 검토하겠다”고 말해 개가 더는 소득을 위해 사육하는 축산동물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동물의 임의 도살을 금지하기 위한 동물보호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임의적 도살이 주로 개 식용을 위한 ‘개’의 도살임을 의식한 듯 “점진적으로 추세에 맞춰 나가야 한다”고 했다. 또 지난 6월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조사결과(개고기 식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에 대해 찬성 39.7%, 반대 51.5%)를 토대로 “사회적 논의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도가 개선될 것”이라고만 하여 큰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청와대의 답변은 번번이 찬반 논쟁에 그쳐온 개 식용 문제에 대해 ‘종식’으로 국가적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새로 임명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개 식용 종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언급한 것도 분명히 변화된 태도다.

하지만 청와대는 “관련 종사자들의 생계대책 등도 함께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논의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겨우 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개식용금지법 제정 반대 의견(51.5%)에 궁색하게 기댔다.

개농장에서 소위 ‘식용’으로 키워지는 개를 식탁에 올리기까지 동물보호법, 식품위생법, 축산물위생관리법 등 현행 법률 최소 4~5개를 위반하게 된다. 개들은 더럽고 좁은 뜬장에서 평생 음식쓰레기를 먹으며 고통 속에 살다 임의로 도살된다. 이 세상 어떤 동물에게도 용인될 수 없는 학대가 일상인 곳이 바로 한국의 개농장이다. 개 식용은 잔인하고 노골적인 폭력과 얽혀 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체에 대한 어떠한 검사도 거치지 않은 채 전통시장이나 보신탕집에서 ‘음식쓰레기’를 먹여 키우고 아무데서나 도살한 개의 지육이 무제한 유통 판매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구체적인 개 식용 종식 계획 제시나, 개 식용 산업의 불법성에 대한 척결 의지 표명이 없다보니 “추세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말에 힘이 붙지 않는다.

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이 개를 축산법에서 확실히 제외하는 축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 현재 소관 상임위 논의단계에 있다. 1973년 축산법에 개가 등재된 이래 개는 법적으로 축산동물로 남았고, 소위 ‘식용’ 공장식 개농장이 확산돼왔다. 식용 개를 키우기 위해 대규모 개농장을 조직적으로 운영하며 개를 음식쓰레기 처리 도구로 여기면서 착취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축산법에서 개가 제외되면 개와 우리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의 패러다임이 전화(轉化)되고 식용 ‘개공장’의 근거가 사라져 개 식용 종식이 본격화될 것이다.

청와대는 “마침 식용 전면 금지를 포함한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만큼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며 “정부도 필요한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추가 논의 여지를 열어두었다. 홍콩, 대만,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에 이어 며칠 전 인도네시아 정부도 과단성 있게 개고기 유통을 막겠다고 세계에 공언했다. 우리는 정부가 “식용 전면 금지를 포함한 필요한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공언한 약속을 ‘언제 어떻게’ 지킬 것인지 다시 묻고자 한다.

<전진경 동물권행동 카라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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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는 물론 타국의 도시 정보를 꿰뚫는 사람,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지도부터 챙기는 사람, 지도 한 장으로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맵헤드라고 한다. 지도 마니아다. <맵헤드>(글항아리)의 저자 캔 제닝스 같은 사람이다. 제닝스는 어린 시절부터 지도를 끼고 살고 있단다. 아홉 살 때 전 세계의 수도는 물론 주요 도시를 달달 외웠다. 그는 지도를 펼치고 지명뿐 아니라 땅의 위치, 모양까지 읽는다. 스웨덴과 미국 미시간호, 그리고 탄자니아와 미 위스콘신주가 닮은꼴임을 발견한 것도 그다. <맵헤드>는 지도 마니아가 지도와 함께했던 이야기를 모은, 별난 책이다.

사람들은 왜 지도에 빠질까. 지도의 사전적 의미는 ‘지구 표면의 상태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 이를 약속된 기호로 평면에 나타낸 그림’이다. 지도가 공간의 축소라면 지도를 본다는 것은 기호를 풀어 공간을 펼쳐내는 일이다. 지도가 그림이라는 사실은 지도 보는 일에 낭만성을 더해준다. 영국 작가 엘리자베스 비숍은 “역사가들의 색보다 더 섬세한 것은 지도 제작자들의 색이다”라고 했다는데, 확실히 색채 지도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맵헤드들이 회화적 요소가 강한 고지도에 더 빠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나는 맵헤드와 거리가 멀다. 지도는 즐겨본다. 흥미 있게 들여다보는 지도는 ‘중국지형(中國地形)’이다.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지형을 요철로 표시한 입체지도인데, 처음 보는 지도여서 바로 구입했다. 울퉁불퉁한 이 지도를 보면 에베레스트산이 얼마나 높은지, 쓰촨성이 어떤 형태의 분지인지, 1500여m에 불과한 태산을 왜들 높다고 했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고지도에서는 ‘대동여지도’와 ‘해동지도’를 좋아한다. 1985년 지도제작자 이우형씨는 대동여지도를 실제 크기로 복원해 책자로 발간한 적이 있다. 이후 경희대 전통문화연구소가 대동여지도 축쇄판을 냈다. 지금은 모두 품절이다. 그나마 지난해 나온 <해설 대동여지도>가 지도 보는 재미를 안겨준다. ‘해동지도’는 1750년대 초에 제작된 조선시대 군현지도이다. 8도 지도와 전국 군현지도 수백장을 묶은 지도책이다. 회화미가 뛰어나 마치 지도 연작 그림책을 보는 것 같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원본을 1995년 영인본으로 발간해 대학·도서관 등에 보급했다. 가끔 회사 근처 서울역사박물관에 들러 ‘해동지도’를 펼친다.

대규모 고지도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난주 광복절 공휴일에 용산의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일단 전시된 작품의 양이 놀라웠다. 지도 130점을 비롯해 지리지, 목판 등 모두 260여점이 출품됐다고 한다. 국내 지도 전시 사상 가장 큰 규모다. 전시장에 나온 지도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 자료가 많다. 대동여지도는 22개 첩을 이어붙여 바닥에 누이니 가로 6.7m, 세로 3.8m나 돼 전시실 한 칸을 온전히 채웠다. 대동여지도 목판, 인출본 등도 선보여 지도 제작과정을 살필 수 있다. 대동여지도 탄생의 밑거름이 된 정상기의 동국대지도는 강과 산은 물론 감영, 성곽, 산성, 봉수 등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빼어나다. 영조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해동지도’가 나오지 못해서인지 경주읍내전도, 무장현지도(전북 고창), 철옹성전도(평북 영변)와 같은 읍현지도에 더 관심이 갔다. 철옹성전도를 보면 왜 영변을 철옹성이라고 불렀는지, 북한이 왜 그곳에 핵시설을 만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박물관 측의 설명대로, 전시장을 둘러보면 조선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빼어난 지도들을 만든 ‘지도의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대표하는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강리도)’이다. 1402년 제작된 강리도는 세계 학계에서 이미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로 평가를 받았다. 지도 역사의 권위자 제리 브로턴은 <욕망하는 지도>에서 강리도를 12대 세계지도로 꼽으면서, ‘새롭게 태어난 조선을 제국의 반열에 올린 지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앙박물관의 지도 특별전의 이름은 ‘지도 예찬’이다. 역사가 시간을 파악한다면 지도는 공간을 인식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이해하는 편리한 도구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지도는 가치가 있다. 조선 시대 국방, 외교, 교양을 목적으로 만든 빼어난 옛 지도들은 상찬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지도의 나라’는 이제 먼 나라의 일이 되었다. 경주읍내전도와 무장현지도와 같은 아름다운 시·군 지도는 더 이상 없다. 온통 도로·관광·맛·등산지도와 같은 실용·상업용 지도뿐이다. 역사와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정부나 지자체가 지도 제작에 나서보자. 구글어스와 구글맵,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무슨 지도 타령이냐고 타박하면 더 할 말은 없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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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전도사들은 기가 막힌 형편에도 긍정하라고 권한다. 불상과 십자가가 요즘 미꾸라지들 때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그 원인이 되는 이들에겐 찍소리도 못하면서 한 명이라도 어떻게 종교생활을 그만둘까봐 염려의 소리. 엄밀히 말하면 헌금을 그만 낼까봐 걱정인 게다.

긍정전도사들과 적폐시대에 머물러 살 요량이 아니라며 손에 묻는 때나 좀 닦을 일이 아니라 매연을 뿜는 굴뚝을 통째 손봐야 한다. 준엄한 법을 세우고 약속들을 지키고 건강한 틀을 갖춰나가야 한다. 무한 긍정은 세계를 망친다. 부정과 의심은 고정된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간첩은 친구·가족들 안에 있으니 늘 조심(훗~). 의심하고 살펴보고,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매일 께름칙한 힐링의 글보다는 교양이 되는 책을 한 줄씩은 읽자.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면 비싼 값을 치르면 된다. 한 치과병원에 앓는 이를 뽑으러 온 손님이 따졌다. “몇 초면 뚝딱 뽑는데 뭐가 이리 비싸요.” “네 손님. 우리 병원은 손님 같은 분을 위해 아주 저렴하게도 해드려요. 한 시간 정도 아주 느리게 뽑아드릴 수 있습니다.”

나만 보아도 당장 ‘아니요’를 못해 질질 끌려다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용돈벌이 일도 그렇다. 싫어, 아니야만 몇 초 말했어도 가난하나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으련만.

여행 중에도 만사를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주의하면서 걸어야 노상강도를 피할 수 있다. 궂은일을 자주 당하는 오지 여행. 조금만 방심했다간 카메라 가방을 도난당한다. 나도 거금을 주고 산 카메라를 인도 오지에서 잃어버렸다. 책 속에 있는 현자들이 사는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미안하지만 이후로 누구에게도 등짐을 맡기지 않고 내가 진다. 그러다보니 짐을 줄이게 되고 어깨는 가벼워졌다. 카메라 욕심도 버렸고, 김치통조림도 가져가지 않는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아. ‘싫어, 아니야’라는 말을 단호하게 잘해야 하겠다. 부정적인 놈으로 찍히니 자주 할 말은 못되지만. 이 지독한 늦더위에게도 말해주고 싶고 북상 중이라는 태풍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하늘이 날더러 어쩌라는 거냐 하겠지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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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통한을 역사로 증언하는 흑백의 사진이 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된 1985년 9월 ‘남북한고향방문단’ 행사 때다. 마지막 상봉을 마치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 버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마주한 남북 형제의 절절한 모습이 반도를 울렸다. 당시 언론들은 이 장면에 ‘언제 다시 만나나 …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이라고 가없는 회한을 전했다. 그랬다. 30여년 전이니 ‘직계’ 상봉이 대부분이었던 이산가족들은 너무도 짧은 만남 뒤에 또다시 생이별을 해야 하는 무참한 현실 앞에 무너졌다. “아바지, 아바지, 또 만날 수 있게 오래 사시라요”라는 속절없는 인사만 가득했다. 팔순의 어머니는 북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만나기 힘들 것이니 하늘에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자”라는 손편지를 꼭 쥐여 줬다. 그 어머니와 아들은 하늘에서라도 다시 만났을까.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1회차 마지막날인 22일 금강산호텔에서 작별상봉을 마친 뒤 버스에 탑승한 남측 한신자씨(99·왼쪽)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북측의 딸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금강산 _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그리고 30여년이 흘렀다.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간헐적으로 이뤄진 ‘상봉 행사’ 때면, 어렵게 상봉한 이산가족들은 또 다른 고통을 안아야 했다. 서신 교환도, 재상봉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짧은 만남의 기억을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이다. 차라리 만나지 말고 그리움 속에 살 걸, 하고 후회하는 이산가족들이 많다고 한다. 2014년 상봉 행사 때, 북의 아들·딸을 만난 남의 아버지는 상봉 40여일 만에 건강악화로 숨지기도 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8월21일 (출처:경향신문DB)

3년 만에 성사된 이산 상봉, 금강산에서 북의 혈육을 만나 꿈만 같던 시간을 보낸 남측의 이산가족들은 22일 어김없이 ‘작별상봉’ 절차를 밟았다. 작별상봉장은 예의 “오래 살아 다시 만나자”는 허허한 다짐과 안타까운 눈물로 먹먹했다. 65년의 기다림 끝에 겨우 12시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기약없는 헤어짐을 위한 ‘작별상봉’, 너무도 잔인하다.

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극”(미국 CNN)을 끊기 위해 이제는 근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 전면적 생사확인을 하고 서신이나 전화, 화상으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설면회소 설치와 상봉 정례화가 절실하다. 이번에도 남의 어머니와 북의 딸은 버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비비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천륜을 저버리는 이 잔인한 광경을 언제까지 두고 볼 텐가.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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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7일 치러진 전기 중학 입학시험에 나온 자연과목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항이 있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다. 그런데 일부 학부모들이 문제의 보기로 나온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녀가 이 문제를 틀려 시험에 떨어진 이 학부모들은 서울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와 시위도 했다. 결국 디아스타아제와 무즙 둘 다 정답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무즙으로 정답을 써서 시험에 떨어진 학생 38명은 경기중학교에 재입학했다. 이 파동으로 당시 서울시 교육감 등 8명이 사표를 냈다.

일명 ‘무즙 파동’이다. 이는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입시경쟁이 얼마나 과열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무즙 파동이 일어난 지 3년 뒤 같은 입시에선 ‘창칼 파동’도 일어났다. 미술 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은 어느 것인가”라는 문항이 출제됐는데 경기·서울중학교 낙방생 학부모 549명은 정답이 두 개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안은 무즙 파동과 다르게 패소했고 낙방생들은 불합격 처리됐다.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3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학입시와 관련해 정시 45% 확대와 수능상대평가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최근 ‘정시 30% 확대’를 골자로 한 2022학년도 대입제도개편안 발표를 지켜보면서 이 두 개의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은 문제 하나로 상급학교의 당락이 결정되고, 합격하면 인생이 달라지는 우리 사회의 씁쓸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서열화된 중학교 입시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해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극심한 과외공부에 시달렸다. 1967년 부산에선 5학년 초등학생이 밤 10시 즈음 과외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 반향이 컸다고 한다.

지난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때만 해도 여러 면에서 사회적 변화가 있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특히 교육 문제와 관련해 새 정부는 학생 줄 세우기로 대표되는 수능의 폐해를 없애고자 모든 과목을 절대평가하고 학교 수업은 고교학점제를 임기 내 시행해 토론 수업을 안착시키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 아이들은 보수정권 시절보다 더한 입시경쟁에 내몰리게 됐다. 입시 변별력과 공정성을 높이라는 일부 여론을 받아들여 점차 감소하던 정시비율을 다시 확대키로 했기 때문이다.

전국 198개 대학 중 교육부의 정시 확대 권고를 받는 대상은 35개로 최상위 학교가 대부분 포함돼 있다. 이 대학들이 정시를 30%로 늘릴 경우 총 5354명이 수능 전형으로 추가 입학하게 된다. 2022년 대학 입학정원 41만여명 중 1.2%에 해당되는 수치다.

1.2%에 포함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교육현장과 입시학원가에선 그동안 내신의 불리함을 호소하며 정시 확대를 요구해온 외고·자사고 등 특목고 학생들이 절대적인 수혜자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사교육 중심지인 강남 지역의 학교들도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교육부가 국가교육회의 권고안에 따라 정시 비율을 확대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이달부터 서울의 아파트 값은 강남을 중심으로 다시 폭등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누가 (개천에서) 용이 될 것인가를 가려내는 선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시가 확대되면 앞으론 과거와 달리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나마 학생부종합전형(수시)일 때에는 공부는 다소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게 확실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정시 확대 기조 속에선 이마저도 어렵기 때문이다.

1년 만에 정책 기조가 180도 바뀐 부분에 대해 설명 한마디 없는 청와대와 정부를 향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눈엔 1.2%를 뺀 98.8%의 학생들은 더 이상 학생들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

<문주영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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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전자제품 제조회사인 세일전자 공장에서 지난 21일 오후 불이 나 노동자 9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화재 당시 현장에는 소화기 26개, 실내 소화전 4개, 비상구 2개, 완강기 4개 등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방화 시설을 갖춘 곳에 화재 발생 4분 만에 소방대가 도착했는데도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선 화재 발생 직후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회사 측은 현장에 스프링클러 32개가 설치돼 있었고 지난 6월 말 소방 점검 결과에서도 지적 사항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스프링클러에 대해서는 감식이 진행되고 있다며 정상 작동했는지 여부를 자신하지 못했다. 15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현장에서 화재 초기 진압에 가장 중요한 시설이 작동되지 않았다면 심각한 문제다. 인화성이 강한 단열재와 제품 포장용 상자가 현장에 쌓여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런 의심이 사실이라면 이번 화재도 인재(人災)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21일 오후 인천 남동구 논현동 남동공단에 있는 전자제품 제조공장에서 불이 나 소방대원들이 화재 진압과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번 화재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사망자 9명 가운데 4명이 세일전자 협력업체 직원이었으며 1명은 세일전자 소속 비정규직원으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사망자의 반 이상이 현장 노동자 중에서도 회사의 보호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번 화재 현장에 휴대전화 부품 등을 세척할 때 사용하는 시너가 있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전자회로기판을 시너로 닦으면 새것처럼 깨끗하게 보여서 썼다는 유족의 증언이 있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화재에 취약한 물질을 썼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 회사 대표는 “우리 공장은 시너나 인화성 물질을 쓰지 않고 외주업체는 일부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협력업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가 아닌지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제천과 밀양 화재참사 후 방재시설을 대대적으로 점검했지만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번 화재가 난 건물처럼 수많은 공장이 샌드위치 패널 구조에 가연성 위험물질을 취급하고 있다. 소방당국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공단의 화재방지 시스템을 중점 점검할 필요가 있다. 회사 규모가 작을수록 비용 절감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비용을 아끼려다 대형참사가 발생하면 더 큰돈이 든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격이다. 방재에 대한 기업의 각성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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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22일 발표한 ‘2017년 출생통계’를 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35만7800명으로 전년보다 4만8500명(11.9%) 감소했다. 인구통계를 시작한 1970년 이후 가장 낮다. 부부가 평생 낳는 아이 숫자를 뜻하는 합계출산율도 1.05명으로 사상 최저다.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이 2.1명은 되어야 하는데 절반 수준이다. 더욱 암담한 건 올 2분기 합계출산율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이 기간 합계출산율은 0.97명을 기록했다. 올 하반기에는 더 하락할 것으로 보여 올 전체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명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평균 1.68명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은 물론 가장 낮다. ‘인구절벽’이 재앙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병원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22일 간호사들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 앞쪽에 보이는 아기침대는 비어있는 침대다. 김영민 기자

2006년부터 역대 정부는 3차에 걸쳐 출산율 제고 기본계획을 만들어 지난해까지 126조4720억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2000년 1.47명이던 출산율이 0명대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왕의 출산정책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바로잡겠다던 현 정부의 정책도 미흡하다. 지난 5월 일과 생활의 균형, 아동 성장지원, 차별 해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대책을 내놓았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간다. 비혼 출산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고, 육아휴직 급여 등 일부 지원금을 올려주겠다는 대책에 그쳤기 때문이다. 출산율 제고에만 초점을 맞춘 보수정권의 정책도 문제가 많았지만 출산율 제고보다 출산환경 조성에 치중한 대책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 돈 준다고 누가 아이를 낳겠느냐’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한국 사회가 거대한 저출산 부작용의 파도를 맞이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길은 두 가지다. 우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저출산은 청년 취업난, 양육·교육비 부담, 주거난 등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어려운 문제다. 시간도 충분치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구태의연한 대책은 버리고 효율적이고 혁명적인 방안을 짜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층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또 저출산 시대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저출산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이에 적응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는 10월 정부가 내놓을 저출산 대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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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22일 당·정 협의를 거쳐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근로장려금과 신용카드 매출 세액공제 확대, 일자리안정자금 증액, 사회보험료 지원 강화 등의 재정 지원은 물론 상가임대차보호법 보완, 신용카드 수수료 감액, 가맹점 갑질 방지, 초저금리 대출 지원 등 다양한 분야와 방식이 총망라돼 있다. 기왕의 경기 악화로 어려움을 겪어온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자 가용 가능한 대책들을 모두 동원한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전에 선제적으로 나왔어야 하지만 뒤늦게라도 종합 대책이 나온 것은 평가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서민 창업 업종으로 꼽히는 음식점이 새로 생기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폐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에는 경기 부진 등 영향으로 음식점 사업 신규 신고 대비 폐업 비율이 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승했다. 사진은 19일 서울에 위치한 한 건물에 붙은 임대 현수막. 연합뉴스

당·정은 이번 대책으로 내년에 올해보다 약 2조3000억원 늘어난 7조원 이상의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실제 혜택이 어느 정도인지 예시를 들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면서 연평균 매출 5억여원, 종합소득 6000만원 이하로 직원 3명을 고용하는 무주택자 편의점주와 음식점주의 경우 연간 최대 600여만원의 혜택을 받는다. 물론 예시로 든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가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이중 몇몇 조건이 맞아 혜택을 볼 수 있다면 어려운 형편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관건은 정부가 이번 대책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며 최대한의 지원이 더욱 많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면밀한 집행을 할 수 있느냐다. 그동안에도 정부가 일자리 창출이나 긴급복지 예산 등으로 수십조원을 책정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는 했지만 막상 집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연말이면 불용액이 상당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실제 올해부터 시행된 일자리안정자금의 경우 현재 집행률이 당초 계획의 37%에 불과한 실정이다. 정부 정책은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아야 의미가 있다. 화려한 정책 발표로 악화된 여론을 잠시 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집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국민들의 신뢰를 잃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이번 대책에는 세제지원과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등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 이번 대책에 대해 야당은 또다시 ‘혈세’만 퍼붓는다며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포기하라고 공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대책이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야당의 협조를 유도해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야당도 지금까지 공언해온 대로 진정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면 최저임금 탓만 할 것이 아니라 협치정신을 살려 정부·여당과 진지한 협의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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