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은 대학교 2년 선배인 철민의 전화를 받았다.

“너, 송 교수님 알지? 송 교수님이 이번에 정년퇴임하시잖니.”

철민 선배의 말인즉슨, 학과 동문회에서 송 교수의 정년퇴임식을 광역시에 있는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제가요? 제가 그런 자리에 왜….”

정용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런 자리는 성공한 제자들이나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던가. 화환도 보내고, 꽃다발도 들고 가고, 지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봉투에 돈도 넣고…. 직업이라곤 택배 상하차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있는 처지인데…사촌여동생 결혼식도 부조금이 없어서 못 갔는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거야. 그런 행사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제자들 몇 명 왔나,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 경비는 다 채워졌으니까 넌 그냥 와서 밥만 먹고 가면 되는 거야.”

철민 선배는 학과 내 소모임 회장을 2년 연속 맡으면서도 평점 4.0 아래로 한 번도 내려간 적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던 그해, 학과 교수 추천을 받아 지역인재전형으로 공기업에 입사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 바로 송 교수였다. 정용은 철민에게 노력해볼게요,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송 교수보다도, 철민을 보는 게 어쩐지 정용에겐 더 자신 없는 일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학부 시절, 송 교수에 대한 추억은 별다른 게 없었다. 송 교수는 허리가 좋지 않아 늘 왼쪽 허리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강의를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강의 시간을 꽉꽉 채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휴강도 없었고, 중간고사 기간이나 축제 기간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과 무람없이 지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송 교수는 학술답사나 엠티 같은 학과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학생들과 둘러앉아 술자리를 함께하진 않았다. 늘 밤 9시만 되면 소리 없이 숙소로 사라지곤 했다. 세상에, 엠티에 양복 입고 오는 교수님은 전 세계적으로 저분밖에 없을 거야. 그게 바로 송 교수였다.

“그래서? 갈 거야?”

진만이 정용에게 물었다.

“뭐 일도 없고…가서 밥이나 얻어먹고 오지, 뭐.”

정용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자리 가는 제자가 따로 있고, 갈 수 없는 제자가 따로 있나? 오기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까?”

“넌 송 교수님한테 배우지도 않았잖아?”

“과는 달라도…뭐 어쨌든 동문이니까….”

정용은 갑자기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퇴임식은 오후 5시부터 시작되었다. 호텔은 정용이 생각한 것보다 크지 않았고, 연회장도 일반 식당 정도로 작았다. 정용은 연회장 앞에 코르사주를 단 채 서 있는 송 교수를 보고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양복을 입고 있는 송 교수는 불과 2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이었지만, 마치 오래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어어, 그래. 자네들도 왔는가?”

송 교수는 악수를 청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교수님, 새 출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만이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정용은 그 옆에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송 교수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퇴임식은 동료 교수와 제자 대표의 축사, 그리고 송 교수의 퇴임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이거 봐라, 이거. 마지막까지 강의하신단다.”

연회장 같은 테이블에 앉은 철민 선배가 프린트된 유인물을 나눠주며 말했다. 유인물 맨 위에는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진만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TV프로그램 ‘짤방’을 소리 죽여 보았다. 정용은 송 교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회장에 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구두를 신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진만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진지하게 송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그래, 사는 게 팍팍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 궁금하기도 하겠지. 최저임금이니 고용상황이니 하는 것들보다,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도 만만치 않게 중요한 거겠지. 정용의 마음은 점점 더 뾰족하게 변해갔다. 정용은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정용은 음식을 한 번 갖다 먹고 난 후, 연회장 밖 주차장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연회장 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송 교수였다. 정용은 황급히 담배를 감췄다.

“같이 한 대 피우세.”

송 교수는 정용의 옆에 섰다.

“정용군, 박정용군 맞지? 4학년 때 내 강의 C학점 받은….”

정용은 말없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송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한심하지, 이런 자리?”

“네? 아니, 저는 저기….”

송 교수는 한 손으로 계속 허리를 짚고 있었다.

“나이 들면 이런 자리 아니면 젊은 사람들을 잘 못 만나.”

정용은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죽기 전에 자네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겠나? 그 생각하면서 오래 말했네.”

연회장 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은 모양이었다.

“정용군.”

“네, 선생님.”

“와줘서 고맙네. 늙은이들 말 귀담아듣지 말고, 우리 서로 얼굴만 기억함세.”

정용은 계속 자신의 운동화만 내려다본 채 서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기용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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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부의 대입제도 개편안 발표로 대통령의 교육공약 이행은 어렵게 되었다. ‘창의적 사고력과 표현력을 평가하기 위한 논·서술형 수능 도입’에 대한 답은 아예 없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교육 관련 공약 중 초·중등교육에서의 민주시민교육 확대 한 가지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 같다. 대통령 취임 1년2개월이 지나고 있다. 이번에도 청와대가 좌고우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학교 민주시민교육은 건국 이래로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포기되거나 중단된 적이 없는 교육 목표였다. 이승만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까지는 민주시민교육의 이름으로 반공교육을 했고, 김대중 정권 이후 지난 박근혜 정권까지는 교육과정의 수많은 범교과학습 주제 중 한 가지로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 교육부가 교육법이나 교육기본법에 규정된 중요한 교육 목표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 만에 교육부에 의해 ‘민주시민교육’을 교육기본법에 의한 국가의 교육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 시도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교육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청소년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주관적 행복지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관계 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의 점수가 모두 최하위다. ‘더불어 사는 능력’ ‘정부를 신뢰’하는 학생의 비율, ‘학교를 믿는다’는 학생의 비율도 바닥이다. ‘정당에 대한 믿음’은 18%, ‘학교와 미디어에 대한 믿음’은 각각 45%와 51%이며, ‘공공기관에 대한 청소년들의 신뢰도’는 최하위 수준이다. ‘총체적 불만자’ 유형이 25.2%로 조사 대상국 평균(13.8%)의 약 2배로 나타났다. 작년과 올해 연이어 나타나는 청소년들의 폭력은 해가 갈수록 끔찍해지고 있지만 정부는 처벌 위주의 대책 마련에만 집중하고 있다.

청소년들만 이런 상황일까? 법원이 정의를 부정하고, 군대가 국민의 안전을 부정하고, 공정위가 공정성을 부정하고, 국회가 민의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엘리트들의 집단이기주의와 공적 책임의식의 부재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국가 기관의 단순한 부패가 아니라, 전면적 자기부정이다.

유럽의 국가들 대부분은 학교 시민교육을 과목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5년부터 학교 시민교육을, 독일은 1970년대부터 정치교양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늦었다는 영국조차도 2002년부터 초등학교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중등교육에서는 필수과목으로 적용했다. 이 과목을 통해 학생들이 ‘시민’으로 인정받으면서 어른의 ‘동료·동반자’로 그 사회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유치원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자율, 존중, 연대를 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청소년들은 시민인가? 지난해 촛불을 들 때만 동료, 동반자였나? 어린 시민들은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사회적 책임을 느끼며, 해결책을 토론하기에는 아직도 미성숙한가? 그들이 학교에서 공적인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고 연대하면 불편한가? 학문을 중심으로 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잘 부탁한다고 하면 해결될 일일까? 모든 교사의 책임이라는 말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아닐까? 프랑스·독일·영국 등에서 학문 중심의 기존 교과들이 민주시민교육의 요소를 잘 반영(필요조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교육 과목(충분조건)을 갖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경우 과목 설치를 결심하고 준비하여 학교에 정착됨으로써 청소년 범죄를 현저히 낮추는 데까지 8년이 걸렸다고 한다. 영국 사례를 보면 우리는 지금 준비해도 학교 시민교육의 효과는 약 10년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국가교육의 목적인 민주시민교육에 대해 적폐를 더 이상 쌓지 말자. 문재인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답해야 한다.

<김원태 서울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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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를 살면서 지금까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20년 전의 네이버 지식인. 그리고 요즘의 유튜브. 어느덧 네이버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유튜브 시대’라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었지만 이제야 그걸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우연히 유튜브로 ‘씽씽’을 본 것이 일주일 전. 놀라워라. 한창 때의 글램록을 연상시키는 여장 남자 둘과 여성 보컬이 분명 타령조의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내 눈과 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세계를 만난 듯 좋아했다. 우리나라 민요가 이렇게 펑키하고 사이키델릭하게 들릴 수 있다니…. 우리 민요가 해학과 정제미마저 갖춘 ‘솔 음악’ 혹은 월드뮤직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느낌이었다. 이름하여 민요록 밴드 씽씽(Ssing Ssing)이라 불리는 6인조 밴드였는데, 유튜브에 씽씽이라고 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15분짜리 라이브 동영상의 조회수가 이미 200만을 훌쩍 넘었다.

록밴드 ‘씽씽’(Ssing Ssing) NPR 홈페이지

내친김에 인기 동영상 카테고리에 있는 ‘저스트 절크’라는 댄스팀 동영상도 봤다. 세상에 뭐 이런 기막힌 춤이 다 있다니….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보고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감탄이 절로 나오다가 어떤 부분에서는 기가 막혀 감탄사조차 잘 안 나왔다.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럽게 오래도록 연습했을까? 그 시간을 벌기 위해, 그 안무를 짜기 위해, 그 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절로 들기에 문득 감동받고 숙연해지는 춤이라고 할까? 맞다, 한마디로 레벨이 다른 춤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내 생활의 중심에 유튜브가 있다는 사실을.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에 언젠가부터 뉴스를, 주로 설거지를 하며, 유튜브로 듣게 된 나. 잡다한 살림의 잔기술을 대부분 유튜브에서 배우는 나. 검색, 무료 영화 감상, 영어 공부는 물론 패티 스미스나 레이먼드 카버의 오디오북을 유튜브에서 찾아 듣고 있으니 심지어 독서조차도 아이러니하게도 유튜브 동영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유튜브는 놀랍거나 신기하거나 재미난 시청각적 오락거리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궁금한 게 있으면 포털사이트 검색창을 이용하거나 네이버 지식인을 찾아봤지만 지금은 검색도, 과외 공부도, 취미 생활도, 자기 계발도 유튜브로 하는 세상이 됐다.

검색시장에서 유일하게 구글을 꺾은 한국이었지만 지금은 국내 포털 중 어느 것도 유튜브에게 ‘턱도 없는’ 시대가 됐다. 유튜브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전 세계인 4명 중 1명이 유튜브 영상을 보는 등 유튜브 이용시간은 점점 압도적으로 길어지는 가운데 한국의 경우 네이버보다 유튜브 이용 시간이 무려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 됐다. 당연히 광고주들도 유튜브로 몰려든다. 유튜브의 동영상 광고 같은 경우 네이버와 다음을 합친 것보다 3배가량 높다. 그러다보니 ‘갓튜브(GodTube)’ ‘유튜브(YouTube) 쇼크’ 같은 말들도 생겨났다.

나만 해도 네이버를 이용하는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며칠에 한 번 잠깐 사용하는 네이버 메일, 그 편리성과 포인트 누적 때문에 인터넷 쇼핑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는 네이버 페이가 전부다. 예전에는 네이버와 함께 하루 업무를 시작하고, 무엇이든 네이버에게 물어보고, 오랫동안 네이버 블로그 페이지에 머물며 함께 놀고 먹고 공감하며 기꺼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지만 이젠 아니다. 텍스트 뉴스가 보고 싶을 때는 ‘그게 그거지만 그나마 낫다’는 생각에 다음에서 챙겨 보고, 검색은 구글·유튜브를 이용한다. ‘네이버 맛집’이라면 대놓고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러 네이버 블로그 광고에 나오지 않은 식당만 골라서 다닐 정도다.

네이버는 이렇게 조금씩 사용자의 신뢰감을 잃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사이 스마트폰 시장과 함께 성장한 유튜브가 텍스트만으로는 부족했던 검색의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고. 물론 그 이면에는 유튜브의 망 사용료 면제와 조세 회피, 불공정하게 계약된 광고 시간(유튜브 5초, 네이버 15초)에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신뢰도 및 콘텐츠 질의 하락, 기득권의 정치적 영향력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플랫폼들이 함께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튜브 시대를 맞아 유튜브만 탓할 게 아니란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함께 전망하고 고대하던 ‘방송국 시대’가 이제 진정 도래한 것인가? 조중동보다 더 막강했던 네이버 독식 시대를 지나 한결 개인의 힘이 커진 유튜브 시대가 된 오늘에서야 난 무언가 확실히 바뀌었고 그 변화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느끼고 있다. 시대의 변화. 그것은 비록 느리고 더뎌 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어느덧 훌쩍 커버린 신(God)과 괴물 그 사이의 무언가와 같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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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행사가 된 누진제 논란이 꽤 후진적이다. 누진제의 본래 취지는 팽개치고 돈 이야기만 하기 때문이다. 누진제를 시행하는 이유는 전기소비를 억제하고, 전력예비율을 조절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논란은 소비억제가 아니라 요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요금폭탄’을 방지하기 위해 누진제를 완화해주자거나, 누진제를 없애면 1400만가구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거나, 누진제 완화로 한국전력의 수익만 수천억원 감소했다는 주장만 들릴 뿐, 누진제가 정말 제 구실을 하는지 따져보자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누진제는 원래 취지에 비추어볼 때 실패했다. 전기소비가 인구나 소득 증가보다 훨씬 가파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가정용 전기소비는 20% 이상 증가했다. 일반용의 28%, 산업용의 46%보다 적지만, 선진국들 중 최고 수준의 증가율이다. 혹자는 누진제가 적용되었기에 산업용 증가율보다 낮은 20%로 묶어둘 수 있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산업용 소비가 터무니없이 높게 늘어난 것일 뿐이지 누진제가 효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정부의 폭염에 따른 전기요금 지원 대책이 발표된 7일 한 우체국 직원이 세종시 조치원읍 한 다세대주택 우편함에 한국전력공사가 발송한 7월분 전기요금 청구서를 넣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 등지 선진국과 비교할 때 한국의 가정용 전기소비는 낮은 수준이 아니다. 가구당 전기소비는 연간 3500kwh(킬로와트시)로 유럽연합 평균과 비슷하다. 일인당 소비로 비교하면 낮다는 주장이 있지만, 유럽에서는 전기를 난방온수용으로 사용하는 가구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용으로 넘어가면 증가율이나 소비량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이다. 사실 산업체나 서비스업체들의 전기 오남용은 심각하다. 

전기소비 억제라는 누진제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 한다면 산업용과 일반용 전기소비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이들 부문의 전기요금을 크게 올리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중소업체 등이 중심이 되어 거세게 반발하고, 그 결과 요금이 찔끔 올라가는 선에서 정리되고 만다. 그렇다고 누진제를 적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규모 차이가 크지 않은 주택과 달리 업체들의 규모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기소비를 줄여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요금 인상만이 아닌 창의적인 제도가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고려할 만한 것이 ‘인센티브제’이다. 해마다 연간 사용량을 비교해서 감소나 증가에 비례해 요금을 인하해주거나 인상하는 것이다.

역진과 누진을 동시에 도입하자는 것인데, 연간 전기사용량의 변동이 크지 않은 일반용에 적용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무실에서 지난 5년간 평균 1만kwh를 사용했는데, 다음해에 사용량이 2만kwh로 두 배 증가했다면 요금을 크게 올려받고, 그 절반인 5000kwh로 줄어들면 요금을 깎아주는 것이다. 이 제도는 정교하게 고안하기만 하면 산업체에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연간 전기사용량과 생산량의 증감을 비교해 요금을 올리거나 낮추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체에서 생산량은 2배 증가했는데 전기소비는 10% 늘어났다면 전기요금을 크게 깎아주고, 반면에 전기소비가 3배 증가했으면 요금을 2~3배 높이는 것이다. 물론 전기 오남용 관행에 젖어 있는 기업체에서는 반발이 심하겠지만, 이렇게 인센티브를 주는데도 전기소비를 줄이지 못하는 기업은 퇴출되는 것이 마땅하다. 

누진제를 없애라는 요구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400만가구가 누진제 덕을 보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한전의 가정용 고객 수가 1500만 정도이니 93%가 평균보다 낮은 요금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거의 모든 국민이 누진제 혜택을 받고 있다는 건데, 이런 누진제가 존속될 필요가 있을까? 장관 발표에 따르면 누진제 1단계 적용을 받는 가구 수가 800만이라고 한다. 이들 중 전기요금 지원을 받아야 할 저소득층은 얼마나 될까? 아마 그들 중 상당수가 1인 가구일 터인데, 이런 점을 알고 발언했을까? 이제는 그런 낡아빠진 이야기는 그만!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제안을 듣고 싶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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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계의식은 엄숙함을 넘어 장엄하다. 10계를 받는 사미·사미니의 수계든, 250계 비구계와 348계 비구니계를 받는 비구·비구니의 구족계 수계의례든 마찬가지다. 수계의식 때면 밤을 꼬박 새워 3000배를 한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세속의 질긴 인연을 끊고 스님으로 살아가려는 다짐의 결정체다. 연비의식도 치른다. 촛농을 물들인 삼베실의 불이 살갗을 태운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발원의 상징이다. 부모도 속세도 등진 불제자가 초발심을 잊지 않게 연비는 팔뚝에 귀한 상처까지 남긴다.

아무나 스님이 되진 못한다. 인간의 본능마저 거스르는 ‘독한’ 이들이다. ‘우파니샤드’ 경구처럼 버림으로써 영원하고 청정한 진리를 얻는 이들이 스님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실천자들이다. ‘잡아함경’에서처럼 마음의 밭을 갈기에 불자들은 기꺼이 시주하고 두 손 모아 고개 숙인다.

이 땅의 스님이라면 누구나 초발심을 내고 운수납자의 길을 잡았다. 그 스님들의 공동체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이 볼썽사납다. “견지동 정치가 여의도 정치를 뺨친다”는 뒷말이, “해도 너무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총무원장이 ‘탄핵’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빚어졌다. 스님의 근기(根機)가 문제이든, 조계종 정치의 희생양이든, 이름난 문중 선승의 민낯이 보였다. 중앙종회는 총무원장으로 뽑을 때는 언제고 한마디 참회의 말도 없이 내쳤고, 원로회의는 속된 말로 사퇴를 ‘확인 사살’까지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21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을 감고 있다. 연합뉴스

총무원장 사퇴 직후 조계종 제도권은 기존처럼 간선제로 뽑는 새 총무원장 선거일을 결정하는 등 선거체제로 전환했다. 종단사에 새겨질 부끄러운 일이 왜 벌어졌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관한 토론도, 문제의식도 없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재야 측에서는 제도권의 선거체제가 자승 전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의 전략이라고 반발한다. 결국 양측은 26일 ‘전국승려대회’와 ‘교권수호 결의대회’라는 대규모 맞불 집회를 연다. 1990년대 분규 때 스님들의 ‘칼부림’이 떠올라 걱정이 앞선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말씀이 거꾸로 읽힌다.

26일을 기점으로 조계종단은 제도권의 의지대로 나아갈까, 아니면 전국승려대회에 힘이 실릴까. 애써 전망할 필요가 없다. 금권화, 정치화, 세속화된 종단이 청정승가를 회복하지 못하면 희망 자체가 없어서다. 돈을 향한 물욕, ‘닭벼슬만도 못하다는 중벼슬’ 권력을 향한 집착, 종단·사찰 재정의 불투명성과 운영의 비민주성…. 탐진치(貪瞋癡)의 종합세트가 그동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신도와 출가자의 급감, 신뢰의 급락 등 종단이 처한 현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종단이 거듭나지 못하면 불자들마저 등을 돌릴 수 있다. 총무원장 사퇴를 이끌어낸 이번 과정에서는 기존과 다른 구도가 엿보인다. 과거엔 ‘기득권 스님들’ 대 ‘비기득권 스님들’ 구도였다면 이번엔 ‘기득권 스님들’ 대 ‘재가불자들’의 대응이다. 설조 스님의 단식에, 종단개혁을 내건 촛불집회에 재가불자 외에 스님이 몇 명이나 보였는가.

출가자 스님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재가불자들이 나설 수 있다. 최근 월정사에서 열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전국동문대회에서는 “종단의 무능함을 보았다”며 “파사현정의 정신으로 범계비리승을 축출하고 권승카르텔을 해체하는 인적청산과 사부대중의 평등한 참종권 부여, 수행과 재정의 분리, 총무원장 직선제 등 제도개혁”을 추진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무엇보다 한국불교의 갈 길을 ‘승가공동체’가 아닌 ‘재가공동체’에서 찾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정의평화불교연대가 연 포럼에서는 “대만의 거사불교운동처럼 종단 바깥에 청정한 불교를 만들고, 종단에 대한 불복종운동, 시주 거부운동 전개”까지 제안됐다. 청나라 말 중국에서 일어난 거사불교운동은 기득권 스님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거사들이 나섰다. 그 영향을 받은 대만불교는 지금 다양한 재가공동체가 활성화돼 대승불교 정신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 재가불자가 스님에게 종속된 게 아니라 불법을 펴는 불교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몫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출가자 중심이 아닌 재가자 중심의 ‘종단’이 세워질 수도 있다. 종교적 청정성, 도덕적 정당성이 더 반듯한 쪽으로 사람들은 모인다. 신심 깊은 불자가 만나고자 하는 것은 ‘스님’이 아니라 ‘부처’요, 얻고자 하는 것은 ‘스님법’이 아닌 ‘부처법’이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으로 귀촌한 불교신자 지인이 전화를 했다. “신도증 반납했어요. 이젠 절, 스님 말고 서산 마애삼존불을 찾으려고요.”

<도재기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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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대학은 자유의 최후 보루로서 국가폭력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곳이다. 당시의 지식인을 대표했던 대학생과 교수들이 모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대학에서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바뀌었고,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폭력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있다. 아직도 가끔씩 고개를 쳐드는 국가폭력의 유령이 어른거리기는 하지만 이제 대학에서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가 국가적 이슈가 되는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갑질과 성희롱 등 다른 직장에서의 폭력과도 닮아가는, 대학 내부의 생활폭력으로부터의 자유가 문제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지나간 시대의 문제인 것인가? 과연 우리 대학은 쟁취한 자유를 가지고 마음껏 대학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자들은 치열하게 논리를 세우고 검증을 하지만 새로운 영역을 자유롭게 개척하고 새로운 발견에 가슴 뛰고, 새로운 대안과 상상을 제시하는 자유로운 지적 탐험을 즐기고 있는가? 그를 위해 교수들은 학생들과 지적인 대화와 토론을 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학자들의 비판과 창의적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캠퍼스 문화와 지식인 문화를 만들어 왔는가? 지금 우리 대학에서의 시간은 일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지적 탐구와 상상력과 낭만의 시간인가? 과연 우리 대학은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여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물론 민주화투쟁 시기의 대학과 지금의 대학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때와 달리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국가적 폭력을 상시적·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또한 그때와 다르게 대학의 수업도 비교적 성실히 진행되고 있고, 못 구하는 교재와 논문도 거의 없다. 교수들도 정년보장과 승진을 위해 수많은 논문을 매년 쏟아내고, 여기저기에 자유롭게 기고하고 출연을 하면서 다양한 대상을 향하여 솔직한 의견을 제시하고 비판을 날리기도 한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하지만 대학은 이제 당연시된 사상과 학문의 자유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건 바로 학문의 자유 속에서 시대의 고민을 가장 먼저 머리와 가슴으로 끌어안고, 시대를 선도해야 하는 대학이 그 시대 안에서 매몰·침몰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대학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교수들이, 자본주의사회의 단순한 생업종사자가 되면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문제에 당면하여 자유롭게 새로운 지적 실험을 하기보다는 생활영위를 위하여 기계적으로 일하면서 월급받는 보통의 월급쟁이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 현실은 새로움과 창의성과 실험정신이 사라진 대학과 대학원의 강의실과 연구실, 그리고 심사자 이외에는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기계적인 논문들, 대학 강의와 전공과 상관없이 취직에만 골몰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안을 아직도 외국의 유명 스타 학자에게만 의존하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다. TV나 인터넷의 인문학 강좌나 통찰을 얘기하는 강의를 들어봐도 시대를 선도하는 독창적인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흥미 위주의 역사 이야기나 외국 것에 대한 소개, 아니면 역경을 극복한 체험담 위주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문제, 특히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나타나는 제반 문제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지적 터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대안 담론을 모색하는 지식세계가 사라지고 있다.

인문사회 쪽에서는 언젠가부터 구조적 변화를 보는 거대담론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거대한 변화를 읽어내는 지적 풍토가 사라지고 대학이나 학계는 테크니컬한 문제만 다루는 기술자의 학계로 보수화되기 시작하였다. 자유로운 지적 탐구의 대학이 기계적 논문생산의 대학으로 변해왔다. 아직도 대학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자유로운 곳이어야 한다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학과 출퇴근의 자유가 아닌, 자유로운 지적 실험과 자극과 시대를 선도하는 대안을 연구하는 자유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학은 충분히 진보적이지 못하고, 충분히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래서 죽어간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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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슈퍼리그. 말레이시아 프로축구리그의 이름입니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총관중이 87만2108명이었습니다. 경기당 평균 6607명이 관람한 셈이죠. 2014년부터 우승을 휩쓸어온 조호르 다룰 탁짐(JDT)의 수치를 보면 작년 총관중이 18만7557명으로 경기당 1만7051명의 관중을 불러모았습니다. 비슷한 팀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FC서울로 총관중 수 31만61명, 경기당 평균 1만6319명이었죠. 흥행이 비슷하다 싶지만 속사정은 너무 다릅니다.

서울 인구는 990만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500만명입니다. JDT의 근거지 조호르바루 인구는 160만명, 조호르주는 300만명 정도입니다. 광역인구를 비교해 보면 서울이 8배 큰 셈이죠. 한국과 말레이시아 축구 열기가 비슷하다면 서울 평균 관중 수가 지금의 8배여야 맞습니다. 즉 13만명이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단순한 계산이지만 한국 축구 열기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대로 말레이시아의 축구 열기를 상상해 볼 수 있죠. 한국대표팀이 말레이시아에 진 것이 놀랍지만 예상할 수 있었던 미래가 온 셈이죠. 

사실 텅 빈 축구장과 꽉 찬 골프장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점입니다. 축구를 하지 않는 나라에서 축구 관중 수가 급감하는 것이 이상할 게 하나 없죠. 오히려 이상한 것은 축구 열기입니다. 월드컵 때만 되면 광장이 들어차고 ‘치맥’이 동이 납니다. 평소에 축구에 전혀 관심 없고, 심지어 규칙도 모르는 이조차 온몸을 빨갛게 물들이고 소리를 지릅니다. 축구에 대한 애정은 이미 식었으니 그 열기의 뿌리는 아마도 축구는 아닐 테죠.

이는 민족주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근간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그 뿌리입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긍정적 에너지였을지 모르지만 21세기 한국에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민족주의는 우리가 특별하다는 환상을 만들어주는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양궁, 태권도, 한글, 김치, 첨성대, 직지심체요절, 삼성. 세계 최고, 동양 최고라는 자부심에 감격합니다. 사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랑스러운 유물과 전통 없는 나라는 없죠. 다들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무도 최고는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은 중요치 않죠.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인 것만 자랑스러워할 뿐 그 배경인 고려말 불교의 망국적 행태는 논하지 않습니다. 당시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직지심체요절과는 반대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유럽 전체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일으켰죠. 하지만 ‘우리가 더 빨랐다’는 데에만 만족해할 뿐입니다.

민족주의는 남을 비하해서 우월감을 충족시켜주기도 합니다. 똑같은 동포라도 미국에서 오면 교포고, 중국에서 오면 조선족이 됩니다.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이 아니면 누구라도 낮게 보죠. 심지어 미국인도 흑인은 ‘깜둥이’라고 비하해 부릅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는 무자비합니다. 선장은 선원을 바다에 빠뜨리고, 농장주는 노동자 가슴팍에 니킥을 날립니다. 성추행도 다반사고, 다치면 버려집니다. 휴일·휴식도 제때 보장하지 않고 임금체불도 흔하죠. 심지어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권력기관에 의한 폭행과 불법감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가게에서 나가라고 고함치기도 하고, ‘쟤들은 뭐야’라는 빈정거림은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 집단을 향한 공공연한 증오발언·폭행 등 이른바 혐오범죄를 규제할 법조차 없습니다. 상식과 인권의 차원은 물론 실질적 이유에서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2013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는 25만여명. 매해 2만건이 넘는 국제결혼으로 2017년 전체 혼인 중 다문화 혼인의 비중은 7.7%. 다문화 학생은 2017년 10만명을 돌파해 5년 사이 2배 증가. 이런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은 이민자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연금 고갈도 마찬가지죠.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근본적 해결책은 젊은 노동력의 증가이고, 여기에 이민 문호 확대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민 확대, 이민자 보호, 전반적 노동권 확대 등 정부가 할 일이 산적합니다. 게다가 민족주의적 반대와 두려움과도 다퉈야 할 겁니다. 정책을 마련하고 사회 인식을 바꾸는 노력에도 공을 들여야 하죠. 비정부기관의 활동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국민연금 위기 같은 근본적 위기가 폭발할 한국의 미래는 이미 문 앞에 와있으니까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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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지난 22일 사회적 대화 기구인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복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복귀를 놓고 내부 논쟁을 벌였으나 국민연금 등 사회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대화에 나섰다고 한다. 정부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반발하며 모든 사회적 대화를 끊은 지 3개월여 만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민주노총의 복귀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기로 하면서 사회의 핵심 문제를 풀어갈 대화의 물꼬가 다시 열리게 됐다. 노사정위를 대체해 오는 10월 첫발을 떼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출범에 탄력을 받게 됐다. 경제사회노동위는 양대 노총, 경총·대한상의 등 노사 대표가 참여했던 노사정위와 달리 비정규직, 여성, 중소기업, 소상공인 등 사회 각 분야 대표가 폭넓게 참여하는 범사회적 대화기구다. 민주노총이 경제사회노동위 참여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노사정 대표자회의 복귀는 좋은 신호임은 분명하다.

민주노총이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복귀하면서 업종별 고용대책, 비정규직 철폐, 노동관계법 개혁,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등 노동 현안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 개편, 사회보장 강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제조업 위기 극복 방안, 재벌체제 개혁 등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노사정위를 계승한 경제사회노동위의 활동이 기대된다.

민주노총은 노사정 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면서도 투쟁과 교섭을 병행한다는 입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적 대화에는 참여하되 필요하면 정치투쟁도 벌이겠다는 것이다. 노사정 복귀를 최종 결정한 날 노동적폐 청산, 사회개혁을 위한 11월 총파업 투쟁을 결의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대화의 장에 나서는 민주노총은 투쟁을 말하기에 앞서 공공 단체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성찰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간 민주노총은 청와대 초청 노동계 간담회 불참, 노사정 대표자회의 무력화 등 사안마다 정부와 갈등을 빚어왔다. 스스로 대화의 문을 걸어 잠갔다. 민주노총이 노동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사회적 공공의식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 사회단체이기도 하다. 대화와 화해를 주선하는 조정자 역할도 필요하다. 다시 사회적 대화기구에 합류하는 민주노총이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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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다음주 중 장관 4~5명을 교체하는 중폭의 개각을 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개각은 지금도 늦었다.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 없이 출범하면서 조각이 서둘러 이뤄졌음에도 1년이 넘도록 개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쉽게 교체하지 않는 문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이다. 그동안 능력과 자질이 의심되는 장관들의 실명이 거론된 지도 오래다. 국방부 장관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 방치를 비롯해 구설에 휘말렸던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민망하다. 교육부 장관은 대입제도 개편안 등 오락가락 정책을 놓고 무책임하고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쓰레기 대란, 미투 운동, 노동개혁을 놓고 제대로 역할을 못한 환경부·여성가족부·고용노동부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의 주요한 역할인 갈등 조율은 기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은 장관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인 50%대로 떨어진 것도 여러 현안에서 빚어진 실망이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는 고용·성장·가계소득 등 모든 지표가 악화일로에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경제·민생을 이유로 지지층의 이탈 현상이 나오는 것은 수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민들은 집권 2년차에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구호나 슬로건이 아닌, 정책으로 승부하고 성과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양한 집단의 이해가 상충되는 현안을 해결해내는 역량도 바라고 있다.

이제 얽히고설킨 현안을 풀고 시민의 힘을 한데 모아 국정운영의 새로운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개각은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 공직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책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급선무다. 새 내각은 정책 성과를 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책만 발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 결과까지 책임질 수 있는 추진력과 소통능력, 책임감이 중요하다. 개혁을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뚝심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문재인 정부 첫 개각은 국정을 다잡고 내각 분위기를 쇄신하는 쪽으로 과감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가급적 시기를 앞당기고 개각 폭과 인재풀을 넓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때보다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정치권의 협력을 끌어내고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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