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한국사회에서도 ‘인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식이 넘쳐난다.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인문학 강좌, 인문기행, 인문콘서트, 인문 콘텐츠 등 인문이란 단어와 연관된 행사에 관한 소식이 제법 많다. 대학에서는 기존 인문학과가 아예 퇴출되거나 통폐합되는데, 대학 밖에서는 오히려 인문학과 관련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줄지어 열리고 있다. 내용도 동서고금의 고전강독에서부터 미술관, 박물관, 사적지 탐방, 나아가 디지털 시대의 여러 문화장르 간의 새로운 접목 시도까지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독일 현대회화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전을 찾았다. 관람객이 너무 많이 몰린 까닭에 시간대에 따라 예약된 관람객만 입장시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문은 동양에서 주로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지칭했고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논어>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세계를 도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양에서 통상 ‘후마니타스’라 불렸던 인문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신을 중심으로 구성된 중세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었고 신의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았던 고대 로마의 문예를 부흥하면서 근세의 시작을 알렸다. 후에 괴테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아예 세속과 타락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바로 그 로마를 찾아 떠난 이탈리아 여행이 이 의미를 다시 확인했다.

물론 신을 전제하지 않는 인문정신은 계몽기의 유럽에서도 위험한 지적 모험이었다. 유교에 심취했던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는 <중국인의 실천철학> 속에서 신에 대한 개념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인 삶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가 프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정작 유교적 인문세계에서는 이 같은 내적인 도전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성리학의 형식에 치우친 윤리관에 대하여 인간의 생명력과 그 심연에 놓여 있는 ‘마음’을 강조한 심학(心學)이나 양명학(陽明學)의 도전도 있었지만 유럽의 문예부흥이나 계몽철학처럼 인문정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서양과 접촉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동양의 인문세계는 대체로 수구적인 자기방어, 동도서기(東道西器)식의 절충주의, 아니면 아예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근대주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흐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사상적 혼미 속에 나타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근대의 초극(超克)’이었다. 쇠락해가는 서구적 근대보다 더 훌륭한 근대를 일본은 건설할 수 있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이는 미국 헤게모니에 도전하여 중국식 사회주의 가치 위에서 위대한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중국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제 동서양은 과학, 기술, 정보시대를 거쳐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에서 인간 대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시대의 문턱을 함께 넘어서고 있고, 지니는 문제의식도 상당히 비슷해졌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인문정신의 역할과 관련된 논의다. 과학, 기술, 정보가 마치 인류의 마지막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지금까지 인문정신이 심어왔던 가치체계가 앞으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인문학이나 예술창작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데도 여전히 전시회나 음악회는 관객들로 붐빈다. 이러한 현상을 해명하려는 논의도 많이 있다. 이 중 하나가 이른바 ‘보상이론’이다. 우리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정신과학이나 예술이 더 필요한데, 이는 현대화로 인해 손상된 삶의 세계를 위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문학이나 이에 근거한 인문정신의 수동적인 역할에만 주목하고, 결국에는 목적합리성만을 추구하는 ‘도구적인 이성’을 정당화한다. 인문정신은 바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계몽의 과정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비판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요즘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이른바 ‘힐링’처럼 현대화가 남긴 고통과 상처를 그저 어루만지는 데에만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정신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과제도 있지만 구체적 조건에 따라 이에 접근하는 인문정신의 폭과 깊이를 헤아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민족문학’이나 ‘민족예술’에 대한 논의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문학’이라는 단어를 아예 삭제하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하였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이유는 문학이란 보편적인 인문정신이 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제약받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민족시’의 경계를 넘어 페르시아의 시세계와 연결된 <서동(西東)시집>을 통해서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괴테를 ‘독일적인 사건’이 아니라 ‘유럽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던 니체도 ‘탈(脫)독일’이 바로 진정한 독일의 정신을 되찾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비독일적인 문명문학’과 ‘독일적인 민족문학’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토마스 만(1875~1955)은 전자, 에른스트 융거(1895~1998)는 후자의 흐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작가였다.

비록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패전이 남긴 독일사회에서는 절망감과 복수심, 우리에게는 분단의 상처가 민족문학과 민족예술의 존재와 그의 당위성 강조로 나타났다. &lt;광장&gt;의 작가 최인훈 선생의 서거 소식을 나는 최근에야 들었다. 민족분단에 기인한 반인간성을 직시하지 않고 디지털 시대의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대량정보의 그물망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우리 인문정신의 현주소도 동시에 생각났다.

지구적 범위에서 이제 기술과 문화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문화소비양식도 네트워크 안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인문정신이 지니는 비판적 기능과 자기정체성의 확인작업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문정신의 보고로서 추앙받았던 책을 비롯한 인쇄매체의 운명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책을 결코 대신할 수 없듯, 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비판정신과 함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건강한 인문정신은 우리 삶의 영역으로부터 결코 추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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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더워도 너무 더웠다. 더위도 더위지만, 여름 내내 걱정스러웠던 것은 오존주의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혹한과 미세먼지는 그나마 반비례했지만, 폭염과 오존은 그렇지 않다. 수도권 기준으로, 폭염일의 오존 ‘나쁨’ 이상 발생 비율은 비폭염일 대비 2.3배, 오존주의보 발령 비율은 비폭염일 대비 5.5배로 나타났다. 이는 높은 기온과 강한 자외선, 공기 흐름의 정체라는 기상 조건이 오존 발생의 3박자로 딱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산화탄소나 이산화질소, 이산화황, 미세먼지마저도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것에 비해, 오존은 해를 거듭할수록 현격하게 증가하고 첫 발령일도 빨라지고 있다. 오존주의보 발령 횟수는 2012년 66회에 비해 지난해 276회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첫 발령일 역시 4월로 빨라졌고, 특히 올해는 지난해(4월30일)보다 11일이나 빨리 첫 주의보가 발령됐다.

왜 오존 관리가 잘 되지 않을까? 일단 발생원에 대한 파악이 미흡해서이다. 이론상 오존은 자동차나 공장에서 배출된 질소산화물(NOx)과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등이 강한 자외선과 광화학반응을 일으켜 생성된다. 그런데 현재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배출원 및 배출량이 불명하다. 자동차, 대규모 사업장의 경우는 어느 정도 관리가 된다 치더라도 도장시설, 세탁소, 인쇄시설 등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서는 관리는커녕 파악조차 미흡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황사의 경우 노랗고 미세먼지의 경우 뿌옇다. 그러나 오존은 무색의 자극성 기체로, 냄새(인쇄소의 금속성 냄새)가 있다고는 하나, 유기용제 사용 시설이 아닌 공간에서는 맡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착한 오존’에만 익숙하지 ‘나쁜 오존’에는 낯설다. 착한 오존이라 함은, 대기권 밖 성층권 내 고도 25~30㎞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태양에서 방출하는 해로운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표로 도달하는 것을 막아 생명체를 보호하는 오존층을 말한다. 우리는 오존층이 파괴되지 않도록 프레온 가스 배출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에는 익숙하지만, 지표면의 ‘나쁜’ 오존을 없애야 하고 피해야 한다는 인식은 하지 않는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두 얼굴을 간과하다 보니, 오존주의보가 발령되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0.08ppm의 오존에 하루 8시간 노출될 경우 사망률이 3∼5% 늘어날 수 있고, 6시간 이상 노출되면 젊고 건강한 성인에게도 염증성 폐질환이 나타날 수 있다. 미세먼지에 비견되는 무서운 독성가스인 셈이다. 더구나 미세먼지와 달리 기체성이라 마스크로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오존의 배출원을 파악하고 감축하는 노력을 함에 앞서 ‘오존’의 이중성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외출을 자제시키는 것 외에도 시민들이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이를 홍보해야 한다. 환경부 매뉴얼에 따르면, 여름철에는 한낮에 주유를 피하는 것이 좋다. 뿐만 아니라 오존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득 채워 주유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당장 오존 감축이 힘들지라도, 상세한 대응 매뉴얼이 시급하다.

<지현영 | 환경재단 미세먼지 센터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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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시는 ‘저출산’이라는 단어에 인구감소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함의가 있다는 시민 의견을 수용하여, 이를 ‘저출생’으로 바꿔 쓰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최근에는 ‘저출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몰상식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그렇지만 ‘태어나는 아이’가 아니라 ‘아이 안 낳는 부모’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으니, 독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개인 단위, 가족 단위 또는 국가 단위로든, 출산을 억제하려는 의지를 품었던 기간은 극히 짧으며,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던 기간은 그보다 더 짧다. 근대 이전의 인구 구조는 다산다사(多産多死) 현상에 규정됐다. 기근, 전염병, 전쟁 등으로 인해 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한 뒤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특별한 시기가 있기는 했으나, 평시의 인구 증가율도 연평균 2%를 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 증가 속도가 더뎠던 것은 주로 높은 영·유아 사망률 때문이었다. 한 부부가 평생에 걸쳐 출산하는 아이는 평균 6~7명에 달했으나, 이들 중 2~3명만이 가정을 꾸려 후손을 봤다. 그래서 국가의 인구 문제 대책도 늘 영·유아 사망률을 줄이는 데에 집중됐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 정부가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을 발간·보급한 것도 초보적인 의술이라도 보급해 갑작스레 죽는 아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계시장이 형성되어 식량의 원격지 이동이 활발해지고 우두를 필두로 한 각종 백신이 널리 보급된 이후에야 영·유아 사망률은 획기적으로 줄었다. 출산 관행은 그대로인데 사망률이 줄어드니,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0년 한반도 인구는 1300만여명이었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통계에서 누락된 인구가 많았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2000만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 무렵에는 남북한 합쳐 3000만명을 넘었고, 지금은 남한만 해도 5100만여명, 북한까지 합쳐 7500만여명에 달한다. 50년마다 거의 두 배씩 인구가 급증한 셈이다.

인구가 급증하는 시대는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다. 집도, 식료품도, 의복도, 학교도, 직장도 인구 증가 속도에 맞추어 늘어나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사람들의 의식 안에 경쟁력 지상주의가 깊이 자리 잡은 것은 자본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구 증가 때문이었다. 둘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1960년대까지 많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혹독한 경쟁체제 아래 놓이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누구나 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근거 없는 옛말을 믿고 구시대의 출산 관행을 답습했다. 출산율을 억제해야 한다는 범국가적 캠페인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1960년대에 접어든 뒤였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에 이르기까지 불후의 명문 표어들을 낳으면서 진행된 ‘가족계획 운동’은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 캠페인이 성공하자마자 다급히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인구 감소에 대한 두려움이 국가와 사회를 엄습했다. 작년 출생아 수는 35만여명, 올해 출생아 수도 그보다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런 추세에서 현재의 병역체제가 유지된다면, 20년 후 대한민국 국군 병력은 20만명을 넘을 수 없다. 그에 앞서 보육시설과 유치원, 학교들이 차례로 문을 닫게 될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이 전 재산을 묶어두다시피한 주택 가격이 어떻게 될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역사상 처음으로, 각 개인의 선택으로 세계를 축소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우리는 축소되는 세계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난 10년간 저출산 대책에 지출한 정부 예산은 100조원이 넘는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보육시설 등 금세 과잉화할 게 뻔한 시설들을 만드는 데 쏟아붓지 않았던가? 우리 정부가 산아제한 정책을 중단한 게 1995년, 정부 내에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가 설치된 게 2005년이다. 인구 추이가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의 결과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 감소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 단위로까지는 파급되지 않는다. 개인에게는 오히려 인구 감소가 ‘압력 완화’로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개인 또는 가족 단위의 선택은 또 다른 근시안적 태도를 양성한다. 혹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DNA의 자기 복제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하는데, 아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시선은 자식과 손자와 후손을 통해 먼 미래에까지 닿는다. 자식 없이 사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가끔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나 죽은 뒤에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다. 자기 생존 기간까지만 내다보는 사람과 자식과 손자가 살 세상까지 걱정하는 사람의 시간관과 가치관이 같을 수는 없다. 당장 국민연금 고갈 시점과 관련해서도 자기 노후만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자식 세대의 부담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앞으로 자식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사이의 가치관 차이는 사회 갈등의 한 축을 이룰 것이다.

저출산 시대가 불러올 또 하나의 위기는, 미래가 짧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야에서 ‘영원’이 사라지면, ‘영원한 가치’에 관해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인구가 줄어들어 많은 시설이 비어가는 상황도 두렵지만 ‘현세밖에 없는 근시안의 시대’가 더 두렵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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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읽던 책을 지하철에 두고 내린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책을 읽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내려야 할 역이었다. 얼른 가방을 챙기고 문이 닫히기 전에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간발의 차로 해냈다며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나 자신이 조금 대견하기도 했다.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방을 챙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읽던 책을 앉아 있던 곳에 그대로 놔둔 것이다.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은 카페에 두고 나왔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부랴부랴 자리를 뜨다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돌아간 카페에서는 분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아끼던 볼펜을 분명 테이블 위에 두었는데, 그 테이블이 어떤 테이블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은 일이 많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날이었다. 테이블이 있던 장소를 헤아리다 이내 포기했다. 잃어버린 날이 그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산과 칫솔과 신용카드를, 자주 메고 다니는 에코백을, 에코백 안에 들어 있던 자잘한 물건들을 죄다 잃어버린 날도 있었다. 저것들을 다 다른 장소에서 분실했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넋이 빠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소한 것들이라 다행이네”라고 친구가 위로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소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손때가 많이 묻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주말에는 약속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약속 날짜를 달력에 표기할 때 실수를 했던 것이다. 다음 주를 다음 달로 알아들은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실 주간’이라고 웃으며 넘기려 애썼지만, 뒷맛은 내내 씁쓸하기만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는데,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때마침 코피가 터졌다. 이번 주에만 세 번째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들을 되찾거나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 국면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속도와 완결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껏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것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해주었을 테지만, 저지른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심어주기도 했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긍정은 일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여러 개의 일들을 수행해가면서 몸은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잘했다는 칭찬과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심신의 건강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잘했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맡은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더 잘하기 위해 몸을 혹사시켰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매번 실수가 발견되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나 “이건 실수도 아니야”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쉬 내려가지 않았다.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에 대해 자책하는 시간은 길고도 짙었다. 언제인가부터 밤은 늘 후회하는 시간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외출을 하려고 짐을 챙기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천천히 해.” 그 말을 듣는데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어깨에 놓인 보이지 않는 짐들이, 머릿속의 복잡한 상념들이, 나를 혹사시키곤 하던 쓸데없는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신속 정확한 게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동안의 내 모습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거기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잘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천천히 해”라고 말한다. “잘할 수 있어”라는 말 대신 “천천히 하면 될 거야”라고 말한다. 천천한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시야가 넓어졌다. 주위를 둘러볼 시간과 돌볼 여유가 생긴 느낌도 들었다. 농담을 던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다. 거짓말처럼 코피도 멎었다.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걷게 되니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속도와 완결성의 끝을 생각한다. 속도의 끝에는 머무름이 있을 것이다. 완벽함의 끝에는 여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무르고 비우는 일은, 다름 아닌 천천함에서 비롯한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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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사학위와 관련해 화제가 된 두 인물이 있다. 천재소년으로 불렸던 송유근씨(21)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 불합격 소식과 유호정씨(22)의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 소식이다. 송유근씨는 여섯 살에 대학 미적분을 깨쳤고 여덟 살에 인하대에 합격했던 영재로 워낙 유명해서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지만, 유호정씨는 공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대학교까지 독학으로 끝낸 흔치 않은 과정을 거쳐 최연소 박사가 됐다. 최연소 박사의 기록은 이전까지 학위 취득 당시 만 23세였던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는데, 이 기록은 송유근씨가 깰 것이라고 예상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송유근씨에게 불합격 판정을 내린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유호정씨가 최연소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때문에 더 큰 화제가 된 것이다. 과거에도 화제가 된 영재가 있었다. 아이큐 210으로 유명했던 김웅용씨는 일곱 살에 일본에서의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아 천재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영재들에 대한 관리와 육성(?)의 문제로 논쟁이 커지기도 했다.

이러한 영재들에 대한 관심은 최근 영재고등학교의 인기로 커지고 있다.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중학교 성적이 상위권이라면 한번쯤 영재고 진학을 고려하곤 한다. 물론 이런 정도라면 영재고 진학은 단순한 진로의 문제다. 그런데 아직 학업 역량이 드러나기 전인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모들에 의해 진로가 ‘영재’로 결정되는 경우도 많다. 영재가 되기 위해서는 영재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격을 얻는 길이고, 이 길을 통해 명문대에 합격하는 것이 영재임을 확인받아 사회적인 기득권을 확보하는 통로가 된다는 발상이다. 진로상담을 하는 적지 않은 학부모들의 첫 번째 질문도 ‘우리 아이가 영재고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이다. 영재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포털사이트의 각종 후기를 보면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 커리큘럼 일부까지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영재학교에 합격했다고 하니 욕심이 있는 학부모들은 그런 준비를 도와주는 사교육을 찾게 마련이다. 물론 영재고에서는 공교육 과정만 충실하게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을 학부모나 학생들이 얼마나 믿을지는 의문이다.

우리나라 영재학교의 학년 정원은 860명이고, 과학고는 1638명이다. 영재가 매년 2498명씩 공인돼 배출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외국어고나 국제고, 자사고와는 다르게 영재고와 과학고에 대한 국민 감정은 상당히 우호적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선행학습이 합격 여부를 좌우하는 영재고 입시는 문제가 있다. 지난해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가 지적했듯이 선행학습으로 번아웃된 인재를 대학에 보내는 것은 4차 산업 시대에 맞지 않는다. 본질적으로는 매년 수천명의 ‘만들어진 영재’를 배출하는 영재고와 과학고 체제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화끈한 선행학습이 아닌 소소한 나 홀로 학습으로 최연소 박사가 된 유호정씨의 사례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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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욕심이나 허황된 꿈보다 자기 능력과 분수를 알고 그에 맞춰 삶을 살아가라는 속담이 ‘뱁새가 황새걸음을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입니다. 그런데 왜 꼭 뱁새와 황새가 짝을 이뤄 등장할까요. 이유는 둘 다 ‘걷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황새걸음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라는 뜻인데, 황새는 정말 그렇게 크고 육중하게 걷습니다.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 ‘한’이 붙은 ‘한새’에서 유래한 만큼, 껑충한 백로조차 씨름선수 다리를 붙든 어린애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황새는 정말 엄청 큽니다. 크고 위압적인 날갯짓 서슬에 웬만한 큰 개도 꼬리 끼고 내빼지요. 반면 뱁새는 참새보다 작습니다. 하지만 뱁새는 달리기 선수입니다. 참새, 까치처럼 모둠발로 종종거리지 않고 두 다리 엇갈려 걷고 필요하면 무서운 속도로 뛰어가는 새입니다. 나무도 수직으로 타고 올라갑니다.

뱁새더러 하지 말란 건 안 어울리는 황새걸음이지 황새 가는 길을 가지 말란 게 아닙니다. 짧은 컴퍼스로 뒷짐 지고 양반걸음이면 뱁새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꿈이 황새처럼 크다면 자기 다리에 맞게 열심히 뛰어 황새를 앞질러야 합니다. 황새 컴퍼스 부러워 백날 다리 찢어봐야 그 다리로 보조 못 맞춥니다. 가만히 내 몸 훑어보면 그 안에 제 능력과 제 장점이 보이는 법입니다.

휴가철 보내며 뭐 했는지도 모르게 날아간 한 해의 절반이 마음 한편 묵직도 하겠지요. 초조한 마음에 유명인사의 성공스토리를 집어듭니다. 그 책 내려놓으세요. 그 기다란 컴퍼스들과 여태 걸어봤잖습니까. 내 방식대로 가봅시다. 보폭 좁으면 속도를 올리면 됩니다. 짧으면 뛰면 됩니다. 일장일단, 우리는 달릴 수 있지만 가진 거 많은 황새는 무거워 못 뜁니다. 괜한 곁눈질로 고달프지 말아요. 나대로, 생긴 대로 푸닥거리고 날고뛰며 열심히 삽시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결국은 죽습니다. 사는 동안 나로서 열심히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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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보니 선견지명이다. “박원순 시장에게 시민들이 기대한 건 소프트웨어나 사람에 대한 투자인데 박원순 3기로 가면 하드웨어 투자가 될 것이다.”(2017년 12월13일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 기자간담회)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시장(이하 경칭 생략)은 그렇게 바뀌었다. 단순 하드웨어 투자 수준이 아니다. 박원순 1·2기 상품인 생태와 재생이 희미해질 정도로 ‘개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서울의 사방을 헤집을 대규모 개발 계획을 선보이며 서울 집값을 ‘미치게’ 만들고 있는 박원순은 분명 낯설다. 1·2기에서 했던 것처럼 ‘소프트웨어와 사람에 대한 투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에게는 능히 배반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족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게 여의도ㆍ용산 마스터플랜 추진을 보류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 기자

박원순은 3선 도전 출사표에서 1·2기 7년의 공적을 스스로 지목한 바 있다. 친환경 무상급식, 시립대 반값등록금, 채무 8조원 감축과 2배 늘어난 사회복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12만호 임대주택 공급, 재개발·뉴타운의 정리와 도시재생, 서울로7017과 보행친화도시 등이다. 개발이란 팻말을 붙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굵직한 개발 한방”이 없었어도, 뉴타운이나 청계천이 없었어도 박원순은 과반의 득표(52.8%)로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 됐다. 돌이켜보면 6·13 서울시장 선거는 개발과 집값이 쟁점이 되지 않은 최초의 선거였다. ‘박원순의 3선’은 개발·토건 대신 사람·재생·복지에 중심을 둔 서울시정에 대한 신임으로 매김해도 틀리지 않는다.

박원순의 표변이 그래서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다. 3선의 박원순은 극적인 방식으로 개발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도시행정의 노벨상’이라는 리콴유상을 수상하면서 여의도와 용산 통합개발을 발표하고, 삼양동 옥탑방살이를 끝내면서 취임 이래 최대 재정이 투입되는 ‘강북 플랜’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서울의 풍경을 바꿀, 10년 이상이 소요될 매머드 개발사업이다. 예고된 개발 프로젝트도 넘친다. 서울역 마스터플랜, 삼성동 현대차 신사옥과 대규모 마이스(MICE) 단지, 영동대로 지하공간 종합개발, 서부간선도로 지하화 등이 대기하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때 추진되었다가 ‘박원순 시장’이 뒤집었던 개발사업들도 들어 있다. 확실히 ‘개발’이 박원순 3기 시정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박원순은 옥탑방살이를 끝내면서 가진 ‘강북 개발 플랜’ 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여러분. 강남·북의 재산의 격차가 이렇게 큽니다. 집값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 불균형의 잣대를 재산 격차와 집값의 차이로 설정했으니 강남·북 균형개발은 결국 강북의 집값을 올리는 대책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집값의 격차를 줄여 강남·북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신기루다. ‘강북 개발’ 발표로 강북 변두리까지 집값이 상승하고 있지만, 강남·북의 집값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토건식 개발 처방으로 집값의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는 실패를 잉태한다. 박원순의 강남·북 균형발전 정책발표문에는 ‘세입자’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값 올리기가 목표가 되는 개발은 세입자 등 주거 약자들을 대상에서 배제한다. 이런 개발은 ‘사람이 행복한 서울’을 내세우는 박원순의 밑동을 흔들기 마련이다. 여의도·용산 통합개발에 대해 버티던 박원순이 끝내 “보류하겠다”며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자가당착 때문이다. 지금 서울의 집값은 ‘욕망의 정치’를 불붙인 2000년대 뉴타운 열풍을 연상시킨다. 한번 움튼 욕망의 정치는 쉬 사그라들지 않는다. 개발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 다시 타오른다. 불씨를 진화하려면 박원순의 개발 기조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박원순은 재선 출마선언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그럼에도 간혹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큰 프로젝트 하나 해야 하지 않냐는 말에 저 자신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토목과 외형에 기초한 수직적 랜드마크가 아니라 서울이 가진 자연, 역사, 사람의 가치가 어울린 수평적 랜드마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서울시장 재선, 3선을 목표할 때와 달리 이제 ‘큰 꿈’을 위해 수직적 랜드마크를 세우고 싶은 유혹은 더 강렬할 터이다. ‘박원순표’ 수직적 랜드마크를 세우려 야심차게 꺼낸 ‘용산·여의도 통개발’은 무너졌다. 박원순 ‘큰 꿈’의 허술한 밑천만 드러낸 꼴이다. 박원순 시장의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다는 2011년 시장 출마선언문을 인용하자. “이명박,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만든 서울은 천만 시민의 서울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권 꿈이 커가는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의 꿈과 희망은 오히려 축소되고 실종되었습니다.” 분명 박원순의 대권 꿈이 커갈 앞으로 4년에 대한 이만한 계언이 따로 없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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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이 범람하고 있다.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어지러운 건 아닐 것이다. 거리의 간판처럼 아우성치는 말들. 신호등이 많다고 교통사고가 안 일어날까. 긴 계급장 같은 횡단보도를 건널 적에도 발목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 너무 많은 교훈이 전기처럼 흐르는 세상이다.

예전 산에 드물게 갈 적엔 언제 저 꼭대기를 다 다녀오나, 한숨과 함께 출발을 했다. 이젠 그 지경은 벗어났다. 중앙선도 없는 산에 가면 동물이 되지 않겠다는 식물들, 모음만으로도 저희들끼리 잘 통하는 빼어난 새소리, 그조차도 무의미로 구겨버리는 바위의 침묵을 만난다. 높은 깔딱고개를 오를 땐 몸에서 끓어나오는,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내뱉는 재미도 덤으로 얻는다. 아이들이 장난감에 몰두하는 건 제 하자는 대로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따라주기 때문이다. 최근 산이 부쩍 좋아진 건 그곳에는 말이 그리 필요치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덕분이다.

그림ⓒ이해복

얼마 전 열하일기 탐사를 다녀오고 난 뒤, 요동벌판을 지날 때 사방에 산이 정말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가차없이 이런 반응이었다. 산이 없다면 꽃도 없기에 슬프겠군요. 산의 높이가 세상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굳게 믿는 나의 꽃동무. 그이는 가없는 벌판을 두고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호곡장론(好哭場論)을 설파하는 중인 듯했다. 꽃이 산을 일으켜 세운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평지의 알통처럼 솟은 산. 산은 지하 저 중앙에서 누군가가 꽂아놓은 압침 같다. 우리 사는 세계가 이나마 유지되는 건 저 산이 저곳에서 자리를 잡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제는 산에 가서 금강애기나리를 보았다. 올 더위에 호되게 당했는지 갸름하던 잎들은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다. 주근깨투성이의 꽃잎 6장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듯 뒤로 확 젖혀지는 게 특징이었다. 오늘은 이미 지고 없는 꽃 대신 이름에 주목해 본다. 왜 애기 앞에 금강을 얹어두었을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있어야 할 것만이 있는 그런 상태의 비유적인 말이 금강이기도 하다. 해서 경이나 산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금강. 말로서 말을 끊어버리는 금강이다. 말없는 산속의 말없는 금강애기나리 앞에서 괜히 울적해졌다. 금강애기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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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에 따르면 65세 인구의 약 8~10%가 치매를 앓고 있으며 이 중 절반은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한다. 15분마다 1명씩 치매 환자가 새로 발생한다는 통계도 있다. 2025년에는 국내 치매 환자 수가 1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추산된다. 여성과 저학력자 등에서 알츠하이머가 많이 발병한다고 했지만 반론도 많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노벨상 수상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이 병으로 말년을 보냈다. 맨부커상 수상자이자 영국의 지성이었던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후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를 넋을 놓고 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8월28일 (출처:경향신문DB)

알츠하이머병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데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1911~2004)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94년 담화문을 통해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음을 고백했다. 미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레이건이 대통령 재임 기간(1981~1989)에 병을 앓고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이 추정했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증세가 재임 때부터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 10년간 레이건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여생을 보냈다. 그의 업적이 치매로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부인 낸시의 결정이었다. 미국인들이 그의 발병을 안타까워하며 이 병의 정체를 밝히는 데 관심을 기울인 데는 이런 적극적이면서도 시민을 배려하는 공개가 한몫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87)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며 5·18 재판 출석을 거부했다. 2013년부터 약을 복용했다고 하니 재판을 회피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면서 자서전 등을 통해 5·18에 대해 그토록 많은 거짓 변명을 한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당초 그는 5·18 북한군 개입설이 터무니없다고 했다가 지난해 자서전에서는 맞다고 말을 바꿨다. 이런 증언 번복이 알츠하이머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옥중 단식과 검찰 압수수색에 따른 충격으로 알츠하이머 증세가 시작됐다는 설명은 더욱 당혹스럽다. 5공의 피해자들은 그로부터 진심어린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다음달 중순에는 5·18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이 예정돼 있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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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대표 경제정책이라 알려진 소득주도성장이 사면초가에 처했다. 언론은 연일 이전보다 더 나빠진 고용과 분배지표를 거론하며 맹폭에 나서고 있다. 야당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경제정책 담당자를 교체하라며 으름장을 놓는 와중에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최저치를 경신했다.

지표만 놓고 보면 할 말이 별로 없게 된 것도 사실인데, 대통령은 “우리는 올바른 경제정책 기조로 가고 있다”고 단호한 입장을 재확인하는가 하면, 장하성 정책실장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더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청와대의 이런 입장에 대해 ‘국민과의 전면전 선포’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뒤)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인사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 더 세밀한 검토와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특히 외국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이라고 불리는 정책이 한국에서는 자영업 비중이 높은 점을 고려해 ‘소득주도성장’으로 변형되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자영업자가 1차적 피해자가 된 점. 소득주도성장의 선순환 효과가 수학적으로는 발견되지만 실제 시장에서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나타나게 되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미흡한 점.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의 극히 일부라고 말하지만 다른 정책수단들은 무엇이며 얼마나 잘 시행되어 왔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소득주도성장은 단순한 성장정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경제·사회정책의 종합 패키지인데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의 노력이 지지부진한 점. 이런 것들은 시급히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득주도성장이 단칼에 폐기되어야 할 정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 투자가 성장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난무하지만 대안은 마땅치 않은 형국이다.

소득주도성장 논란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의 거버넌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주요 정책을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설계하고, 토론을 거쳐 정책에 합의하고, 일단 합의가 이루어지면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정책현장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능력 말이다.

우리가 성장률 하락을 겪어온 것은 어느새 25년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해마다 0.2%, 한 정부의 임기 5년이 지날 때마다 1%씩 법칙적으로 떨어져왔다. 25년이 지나는 동안 9%대 성장률은 2%대로 추락했다. 단기적인 경기하락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 추세이고 구조적 문제이다. 이것을 반전시키지 못하면 2030년대 마이너스 성장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월별·분기별 지표를 놓고 일희일비할 일도 아니고, 정권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 옹호하거나 정권의 힘을 빼기 위해 무조건 트집 잡을 일도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걱정스럽다. 일차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필요한 시대적 배경과 진정성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주류 성장이론에 비해 검증이 부족한 이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세심한 준비와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했다. 장기적 하락 추세를 뒤집기 위해 결단이 필요한 시기임을 알리고, 예상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어떤 대책들을 세울 것인지 미리 설득하고 합의해야 했다. 정책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각 정당들의 반응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나간 정부들에서도 늘 그래왔듯이, 대선에 진 야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 정부의 정책실패가 드러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공격거리가 생기면 그 부분만을 선정적으로 부각하면서 최대한 상처를 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불장난’ ‘세금중독’ ‘소주방(소득주도성장 3인방)’ ‘무데뽀’와 같은 비판들은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입에 착 붙을지는 모르지만 합리적인 정책을 만드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대안과 예상되는 정책효과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차기 집권의 가능성을 높여줄지는 모르겠지만 25년 장기 하락추세를 뒤집는 데는 방해가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당대표 선출이라는 커다란 정치적 이벤트가 있었다 하더라도 문재인 정부를 지키자는 것 이외에 어떤 자기 성찰이 있었는가.

정치인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비토 세력과 무조건적 지지 세력이 낳고 있는 폐해를 이제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사회적 합의의 산실이 되어야 할 노사정대표자회의는 4개월 동안 서로 만나지도 않았다. 사회적 합의 없이 소득주도성장은 성공할 수 없다. 합리적인 정책을 만들고 합의하는 능력이 절실하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정책도 25년 장기 하락 추세를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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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27일 발표한 ‘2017년 인구주택 총조사’를 보면 한국의 15~64세 생산연령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나라를 꾸려갈 ‘일꾼’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65세 이상 인구는 급속하게 늘어 14%를 넘어서면서 ‘고령사회’로의 진입이 확정됐다. 유엔은 65세 이상 인구비율에 따라 ‘고령화사회’ ‘고령사회’ ‘초고령사회’로 구분하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아기 울음이 끊어진 사회에서 생산연령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가속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고령인구(65세이상): 712만명 생산연령인구(15~64세): 3620만명

생산연령인구를 늘리고 고령화를 늦추는 최선의 길은 합계출산율을 높이는 것이다. 역대 정부는 지금까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왔으나 효과는 매우 저조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진단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 무엇보다 임신·육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지난 26일 직장 내 부당행위를 제보받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에 올라온 내용을 보자. 육아휴직에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퇴사통보를 하는가 하면, 퇴사를 압박하기 위해 원거리 발령을 내는 등 불이익을 주는 사례가 허다했다. 유산 위험이 있어 육아휴직을 요청했지만 ‘20년간 유산한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거부해 퇴사한 경우도 있었다. 한 유치원 교사는 사전에 ‘임신하면 그만두겠다’고 알린 뒤 임신이 돼 퇴사신청을 했다가 “머리채를 잡아서 흔들겠다”는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산전·산후 휴가와 육아휴직은 보장되지만, 현실에서는 마치 특혜나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출산율이 오르길 기대하는 게 가능할까.

한국의 고령화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합계출산율은 올해 2분기에 0.97명으로 떨어져 0명대로 추락했다. 지금의 추세대로 진행되면 인구절벽을 넘어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출산과 육아는 그 자체로 축복받을 일이다. 나아가 저출산 문제를 고려하면 사회적으로 박수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사회인식은 이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130조원에 가까운 돈을 쏟아붓고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임신·육아휴직을 금기시한다면 ‘활력 잃은 한국’을 피할 길이 없다. 사회 전반적인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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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킹’ 김동원씨 일당의 댓글조작 사건을 수사해온 허익범 특별검사팀이 60일간의 활동을 종료하고 27일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검은 김경수 경남지사가 김씨와 댓글조작을 공모했다고 결론내리고 김 지사를 불구속 기소하는 등 12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드루킹과 김 지사의 주장이 엇갈리는 만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제는 법원으로 넘어갔다.

드루킹 댓글조작 의혹을 수사 중인 허익범 특별검사가 15일 서울 특검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검 수사는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수사를 통해 명쾌하게 밝혀진 의혹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특검이 도입된 목적은 드루킹 일당과 정치권의 공모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사 초기 특검은 댓글조작의 본류보다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 등 곁가지 수사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특검은 노 의원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뒤 김 지사에 대한 강제수사에 돌입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 지사는 드루킹 일당의 댓글조작을 몰랐으며 ‘킹크랩’ 같은 매크로 프로그램 시연을 본 사실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특검이 김 지사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도 법원에서 기각됐다.

특별검사 제도는 검찰과 경찰 등 기존 수사기관의 중립성과 독립성에 대한 불신에서 도입됐다. 고위공직자 등 유력인사가 연루된 사건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역 없는 수사를 맡길 주체가 필요해서다. 하지만 특검 역시 태생부터 정치적 요소를 띨 수밖에 없다. 국회의 특검법 제정을 통해 출범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외풍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번에도 여야 모두 특검을 정쟁의 도구로 삼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정치 특검”, 자유한국당은 “나약한 특검” 등으로 허익범 특검팀을 몰아붙였다. 허 특검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정치권에서 지나친 편향적 비난이 계속돼왔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특검은 수사기간의 제약 등으로 인해 조기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보면 별건수사나 과잉수사의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특검 무용론’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권력형 비리 수사를 언제까지 정치권 합의에 의한 특검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독립적 상설기구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신설하는 것이 정도라고 본다. 공수처 설치·운영 법안은 이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야는 공수처 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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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희망을 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이제는 여성들의 삶이 바뀌겠구나!’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올해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품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폭력을 증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떤 어려움과 파장을 가져올지 알면서도 여성들은 용기를 냈다. 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으니까.

여성의 삶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꾸리는 등 범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경찰청 등 문제가 제기된 핵심부처에서도 별도의 대책기구를 만들고 발 빠르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26일 여성단체 ‘페미당당’ 등이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주최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한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1년3개월, 미투 운동 6개월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가? 하나의 사안이 발생할 때는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유사한 ‘하나’들이 생기고 그 양이 늘어나면 이는 개별 현상을 넘어 ‘기조’이고 ‘방향’이 된다.

미투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폭력 규범 정립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 미투 운동의 후속 대책으로 마련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추진체계 인력과 예산에 대한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제동. 하루에도 수백명의 여성들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의료 환경에서 심지어 처벌에 대한 두려움까지 떠안고 임신중절을 하는 상황임에도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다른 중요한 사안을 이유로 차기 재판부로 미룬 헌법재판소.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고 특히 임신중절과 관련한 주요법안인 모자보건법의 주무부처임에도 헌법재판소 낙태죄 심리과정에서 ‘의견 없다’며 책임을 방기한 보건복지부. ‘임신중절수술은 비도덕적 진료행위’라고 규정한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날치기 고시. 불법촬영과 촬영물 유포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와 무수한 법원의 편파판결. 개각 대상에 3명의 여성장관과 미투 운동 핵심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청와대….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문재인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과 행정을 퉁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이 기막히다.

모 방송에 출연한 불법촬영물 삭제업체 대표는 삭제를 의뢰했다가 자살해 연락이 끊기는 사례가 100건 중 3~5건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유조차 모른 채 가족들은 딸, 누나,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고시로 의사들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금지하겠다 한다. 얼마나 더 여성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는 입에 발린 수사와 이벤트가 아닌 구체적인 인력과 예산정책, 그리고 실질적인 법집행으로 답해야 한다. 올 한 해에만 거리에 나선 수십만명의 여성들. 국가에 대한 복수로 비혼·비출산을 선언하는 20~30대 여성들. 직장 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항해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여성들….

문재인 정부는 그들을 똑똑히 봐야 한다. 그들은 분명한 변화가 보일 때까지 결코 물러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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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일, 8592시간, 51만5520분. 지난해 9월4일부터 전주시청 앞 조명탑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택시노동자 김재주를 상징하는 숫자들입니다.

그는 비닐 한 장으로 추위를 버텼습니다. 110여년 만에 찾아온 폭염과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습니다. 스트레스와 운동제한 등으로 인한 위장장애로 소화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에도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두 번째 가을을 하늘 감옥에서 맞이하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전액관리제 쟁취”를 염원하는 그의 외침에 대한 우리들의 침묵이 너무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 번째 굴뚝에 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69일간의 고공농성이었습니다. 노조할 권리를 쟁취하면,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라 택시기사가 번 돈을 회사가 취합해 나누는 법인택시 전액관리제(월급제)가 도입되어 자신을 포함한 택시노동자의 삶이 개선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2016년 2월5일 노사정(전주시청, 전주시 21개 법인택시,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은 지난해 1월1일부터 월급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다시 하늘에 집을 짓고 살고자 했을 겁니다.

저도 철탑 고공농성을 두 번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당해고에 맞서 싸웠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노동자 류기혁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 하늘에 올랐지만 태풍 나비를 버티지 못하고 하루 만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불법파견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296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습니다. 답답함과 외로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김재주도 겪었을 감정입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우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그 힘으로 문제 해결의 불씨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힘이 모인다면 택시 전액관리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액관리제는 2000년 1월28일부터 시행됐습니다. 강행 규정인 전액관리제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물고, 1년 이내에 3번의 시정명령을 받으면 면허 취소도 가능합니다. 그만큼 행정관청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주시청은 노사정 합의 당사자로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다가 김재주의 고공농성 1년이 다가오자 2018년 8월2일 19개 택시사업주에게 전액관리제 위반으로 과태료를 청구했습니다. 상식적인 행정집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택시업주는 소송을 걸었고, 전주시는 소송이 끝나기 전까지 추가적인 처분은 어렵다고 합니다. 어떠한 압박도 받지 않는 택시업주는 불법적인 사납금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전액관리제 실시에 미온적인 전주시와 택시업주들은 김재주의 고공농성 중단을 압박합니다. “법을 지키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봉쇄하려 합니다. 김재주는 자신의 몸이 망가져도 이번만큼은 전액관리제가 시행될 때까지 고공농성을 유지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그의 고통을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다음달 1일 오후 3시 전주시청 앞에서 전국의 노동자 시민들이 함께 “전액관리제 쟁취”를 택시노동자 김재주와 함께 외치려 합니다. 김재주가 하루라도 빨리 그리운 땅을 밟을 수 있게 많은 분들의 참여를 호소합니다.

<최병승 | 현대자동차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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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끝나간다. 용광로 같은 낮과 한증막 같은 밤이 교차하던 날들이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온열질환자가 4000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48명에 이르렀으니 가히 재난이었다. 그런데 이 4000명과 48명 사이, 그 생사의 문턱에 우리 야학의 학생 한 분이 누워있었다.

최중증 뇌병변 장애인 김선심씨. 서울의 대낮 온도가 40도를 육박하던 날, 그녀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으로 발견됐다. 아침에 그녀를 발견한 활동지원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야학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체온이 39도였는데, 의사가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했다고. 열사병이었다.

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는 틀지 않았다. 아니,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은 활동지원사 없이 혼자 지내야 하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퇴근하는 활동지원사에게 콘센트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누전사고가 날 수 있으니 선풍기를 꼭 꺼달라고. “불나면 나만 죽는 게 아냐. 이 아파트가 다 죽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최중증 장애인인 그녀는 작은 사고가 나도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그의 룸메이트였던 김주영씨는 활동지원사가 없던 밤에 원인 모를 화재로 숨졌다. 야학에 함께 다닌 송국현씨도 달력의 날짜만 다를 뿐,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렇게 방치된 채로 혼자 지내는 똑같은 밤이 그녀에게도 일주일 중 3일이나 되었다.

사실 그녀가 콘센트를 뽑아서 막을 수 있는 것은 누전이나 합선으로 인한 화재뿐이다. 한쪽을 닫으면 다른 쪽이 열리는 문처럼 그녀의 삶에는 치명적 사고가 언제든 종류를 바꾸어 찾아들 수 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몸이 불덩이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죽음이 그녀의 11평 작은 집을 거침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건 콘센트 구멍 때문이 아니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구멍은 사람의 빈자리, 즉 활동지원사가 떠난 자리였다. 그녀에게 활동지원사가 없는 밤은 이를테면 ‘죽을 것 같은 날씨’에서 ‘같은’이라는 말이 없는 것과 같다.

혼자 사는 최중증 장애인들에게는 24시간의 활동지원이 꼭 필요하다. 이들의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몇몇 지자체에서 몇년 전 24시간 활동지원을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사회보장 정비방안 지침’이라는 걸 만들어서 복지부 사업과 중복되거나 유사한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서비스의 신설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그렇게 제도들이 ‘정비된’ 탓에 김선심씨의 ‘죽음의 구멍’은 여태 그대로 있다.

현재 장애인들은 심사를 거쳐 복지부가 제공하는 활동지원시간에 지자체가 자체 예산으로 더한 시간만큼의 활동지원을 받는다. 지자체 예산 사정이 좋거나 해당 지역에 서비스를 요하는 장애인이 적으면 구멍이 조금 메워지는 식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김선심씨에 대한 긴급구제를 신청하던 날 진정인 중 한 사람인 장희영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구청에서 자신에게 활동지원시간을 한 달에 75시간 더 지원해주겠다고 했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반가운 시간은 다른 장애인에게 지원되던 것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었다고. 정부와 지자체는 예산을 할당하고, 예산은 시간을 할당하며, 시간은 생명을 할당하고, 한 장애인은 기껏해야 다른 장애인에게 할당된 생명을 제 것으로 당겨쓰는 식이다.

행정적 정비의 대상이자 행정적 여력에 달려 있는 생명. 그런 생명들이 있다. 어떤 이들의 생명과 자유는 국가 행정의 존재 이유지만 어떤 이들의 생명과 자유는 국가 행정의 여력에 속한다. 어떤 생명과 자유는 즉각 보장되는데, 어떤 생명과 자유는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약속에서만, 그리고 미래 복지국가의 이념 속에서만 보장된다.

김선심씨 문제를 심층 취재한 장애인 전문 언론 ‘비마이너’에 따르면,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복지부 담당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시에서 여유 예산이 있으면 하는 거지 제한적인 국비로 ‘24시간 지원’은 어렵다.” 그러니까 국가로서는 지금 이런 생명까지 돌볼 여유가 없으며 만약 한다면 ‘여유 예산’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뒷이야기를 전하자면 김선심씨에 대한 긴급구제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인권위는 복지부와 서울시, 해당구청장에게 24시간 활동지원을 그녀에게 속히 제공할 것을 권고했고 해당 기관들은 모두 이 권고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김씨 한 사람은 긴급 구제되었다. 여력을 모아 한 사람을 긴급 구제한 것이다.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김모 할아버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80대 시각장애인인 할아버지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울면서 상봉 포기 각서를 썼다고 한다. 동행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 할아버지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을 하나하나 챙기기 어렵다. 그분을 모시러 포천에 갔다가 다시 속초로 갈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하다.” 68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국가 행사 자리에 그의 손을 잡고 갈 인력이 없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명도 행정의 여력에 달려 있는 판이니 상봉이라고 다르겠는가. 여유 예산, 여유 인력이 없다지 않은가.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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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이 한창 진행되던 초여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찬 바쁜 현장에 초로의 숙녀 한 분이 찾아오셨다. 자원봉사자에게 내 이름을 대며 찾는 것을 들어 고개를 돌리니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연락 한 번 없는 무심한 제자를 보시겠다고, 도서전 일을 한다는 신문기사 한 줄만 믿고 찾아오셨다. 이산가족들이 떨어져 있던 70~80년 세월보다는 짧지만, 그 절반은 넘는 세월을 지나 만나 뵌 셈이다. 반가웠지만 송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갓 부임했던 새댁 선생님이 어느새 정년퇴직을 하고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선생님과 함께 가출한 친구들을 찾아 산길을 헤맸던 일부터 정성스레 써 주셨던 손편지의 기억까지,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가 만드는 잡지를 챙겨 드리고 배웅하면서 선생님께 ‘물상’ 과목을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물상’이라는 이름이 좋았다. 물건·사물을 뜻하는 ‘물(物)’이라는 글자와 모양, 형상을 의미하는 ‘상(象)’이라는 글자를 조합해 만든 과목은 그 뜻대로 사물의 형태, 모양, 그리고 그것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내게는 그 내용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심심하면 한자를 끄적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쓴 글자가 아마도 ‘물상’이었을 것이다. 네모 안에 꽉 차는 두 글자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한몫 했겠으나 그 뜻에 강하게 이끌렸다.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그 과목에서 배웠다. 그 이해가 미래에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배운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더하고, 빼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세상의 사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어떤 힘으로 결합했다가 떨어지는지 배웠다. 그리고 그 원소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그 기원으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별들이 만들어진 것을 알았다.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우주를 탐구하는 방법을 배운 것도 이 과목을 통해서였다. 포세이돈이 화가 나 풍랑이 일고, 옥황상제의 웃음에 바람이 잦아드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의 모든 천체가 돌고 있다고 믿으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와 어긋나는 생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중학교에서 배운 표준적인 이해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과학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새로운 기술들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자력,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등 현상들도 결국은 내가 중학교 때 배웠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때쯤 배운 수학도 제법 요긴하게 써먹는다. 간단한 셈은 초등학교 몫이지만 그래도 복잡한 도형들을 그릴 줄 알고 거리도 가늠하는 것은 중학교 때까지 배운 수학이 그 기초를 다져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로봇과 우주선이 등장하거나 의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만화, 영화, 그리고 소설들을 즐기는데 그때 배웠던 수학과 과학이 큰 도움을 주었다. 탐정 이야기의 추리도 이때 배운 지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꾸준히 익힌 기초가 없었다면 신문 한 줄을 읽거나 뉴스 한 토막 귀동냥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 엄하게 가르쳐 주셨던 먼 옛날의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에서 익힌 수학과 과학은 세상을 사는 데, 그리고 즐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었다. 원소 이름 하나 더 알고, 성질을 이해한다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 정도 계산이나 지식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는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과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개인의 삶은 지워질 것이고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 어려운 수학과 과학 내용을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계속해서 배우고 훈련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은 큰 문제와 맞닥뜨릴 것이다.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과 인공지능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나 인공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전공이나 직업과 무관하게 수학이나 과학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나를 이리로 이끌어 주셨던 선생님께 내가 만든 과학 잡지를 계속 보내드리려고 마음먹은 까닭이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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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성복(195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서해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진 갯벌에는 게들이 살고, 또 밀물이 올라오면 서해는 질퍽하고 평평한 갯벌에 몸을 뒤척인다. 서해가 내 마음에도 펼쳐져 있다. 늘 파도가 치는, 붉은 낙조가 아름다운, 까마득한 서해 바다가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곳 서해에 끝내 가지는 않겠노라고 말한다. 혹여 그곳에 사랑하는 당신이 계실지 모르는 까닭에. 내가 다 가보면 당신이 계실 곳이 줄어들 것이기에. 당신에게도 당신이 계실 자리와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당신에게도 어떤 여지가 필요하기에.

우리 마음속에는 파도치는 바다가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서해 바다가 있다. 시인은 이 감정을 시 ‘거울’에서 “하루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라고 썼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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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서열이 있다는 거 알아?” 캐나다에 살러 온 직후에 만난 어느 선배가 대뜸 나에게 물었다. “서열이라뇨?” “캐나다에는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서열이 있어. 어린이, 여자, 노인, 강아지, 그다음이 남자야.” 처음에는 물론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나라에 살아보니 한국에서 온 보통 남자의 눈에는 이런 서열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약자를 우대하고 우선시하는 사회여서 그런지 남자들은 이리저리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이런 판국에 성추문을 만들기라도 하면 남자는 진짜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게 된다.

캐나다에서도 성폭력 뉴스는 심심치 않게 터져나온다. 최근 10년간 토론토 한인 동포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떠들썩했던 사건도 두 건이 있었다. 첫번째 사건은 20대 남성 6명이 같은 교회 내 또래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기소(캐나다 경찰은 기소권을 가지고 있다)하면서 피의자들의 신상을 바로 공개했다. 언론 매체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1면 머리기사에 올렸다. “추가 피해자들이 있으면 신고하라”는 경찰의 요청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다름 아닌 교회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어서 파장은 더 컸다. “증거가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담당 경찰은 “복수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이 증거”라고 답했다.

두번째 사건은 어느 학원에서 발생했다. 10대 여중생이 남성 학원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었다. 미성년자가 관련되어 사건의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기소 이후 두 사건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진술이 번복되고 엇갈리는 바람에 무고로 판명났다. 두 번째 사건은, 학원 안에 설치된 CCTV 덕분에 원장이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공통점은 더 있었다. 두 사건 모두 피의자의 잘못이 없다고 밝혀졌지만 그 남성들을 음해하려 했거나 오해를 해서 신고한 여성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캐나다에는 한국의 무고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허위 신고자와 경찰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이들이 성폭력으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언론매체 가운데 ‘무혐의 처분’을 보도한 곳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은 죄가 없는데도 ‘성폭력으로 기소되었다’는 기록은 삭제되지 않고 경찰 파일에 그대로 남았다. 그 기록 때문에 당사자들은 취업 등을 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 무혐의로 밝혀져도 이러하니, 진짜 범죄자들에게 어떤 중벌이 내려지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반 직장에서는 ‘성희롱했다’는 지적을 받으면  직장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개인 컴퓨터로 미성년자 포르노를 본 흔적만 있어도 직장에서 바로 잘린다. 식당에서든 술집에서든 성희롱·추행 등으로 경찰에 일단 신고가 되면 인생이 피곤해지는 것을 넘어 평탄한 인생을 살기가 어려워진다. 기소되자마자 얼굴과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온갖 창피를 다 당하고, 벌금과 징역 등의 중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허위 신고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데도 성폭력을 다루는 캐나다 시스템은 요지부동이다. 부작용이 따른다 하더라도 강력한 대처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진짜 피해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자도 좋아서 한 거 아니냐?” “꽃뱀 아니냐?” 따위의 이른바 2차 가해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가는 성희롱으로 즉각 기소될 수 있다. 한국에서 40년을 남자로 살다온 내 눈에는, 캐나다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나라로 보였다. 그런데 십수년 살면서 보니 알겠다. 약자를 이런 식으로 보호하니까 선진국 소리 듣는 것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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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잔치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음식은 맵고 짰으며, 싸움까지 벌어졌다. 잔치에 초대됐던 손님 일부는 현기증과 배탈을 호소했다. 동네방네 소문났던 잔치가 망한 것이어서 흉흉한 소문은 더 빨리, 더 멀리 번졌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그랬다. 중반기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할 집권여당 리더를 뽑는다는 점에서 최근의 다른 행사와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하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음식은 맵고 짰다

잔치의 메인 셰프 격인 세 후보들이 내놓은 음식은 간이 엉망이었다. 왜 자신이 대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수긍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각자 ‘강한 정당’(이해찬 후보) ‘경제대표’(김진표 후보) ‘세대교체’(송영길 후보)를 내세웠지만 뚜렷한 비전과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보수정부 10년의 적폐를 씻어내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촛불민심’의 염원을 실행해야 한다는 책임의식과 역사인식도 절실하지 않은 듯했다.

후보들이 고작 ‘내가 진짜 친문이다’를 놓고 싸웠다. 이 후보는 “(문 대통령과) 격의 없는 사이”라고 했고, 송 후보는 “셋 중에 (제가) 가장 친문”이라고 했다. 김 후보는 이른바 ‘3철’ 중 한 사람인 전해철 의원을 포함한 친문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며 ‘문심은 나에게 있다’고 했다. 유명 셰프와 친하니, 무조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 대표가 2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윈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긴밀한 당·청 관계는 중요하지만 ‘내가 대통령과 더 친하니 뽑아달라’는 식은 곤란하다. 문재인 대통령에 의지하느라, 그간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여당의 현실만 부각시킬 뿐이다. 게다가 고용상황 등 경제지표 악화로 문 대통령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닥쳤고, 이제는 당이 청와대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상황이 됐다. 그런데도, 후보들은 앞으로도 청와대에 잘 업혀가겠다고, 내가 더 잘 업힐 수 있다고 경쟁을 벌인 것이다.

#싸움판이 된 잔칫집

세 후보들이 서로를 ‘몹쓸 사람’으로 만들면서, 잔칫집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이 후보는 경쟁자들로부터 ‘독선적’ ‘불통’이라는 집중공격을 받았다. 김 후보는 ‘자유한국당에나 어울릴 정체성’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송영길 후보에게는 ‘거만하다’는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이 후보가 유세 도중 연단에서 내려오다 휘청거리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상대 후보 측에서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유포했다는 논란까지 빚어졌다. 아무리 경쟁이지만, 정치적 동지라는 사람들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행동인가 의문이 들었다. 쟁반 깨지는 소리가 잔칫집 담장 밖으로 새어 나간 꼴이다.

분위기가 흉흉한데 잔치에 흥이 날 리가 없다. 안 그래도 맵고 짠 음식들은 더 맛없게 느껴졌다. 당 지지율이 전대 이후 계속 하락한 것이 그 증거다. 경제지표 악화도 잔칫집 마당에 그늘을 드리웠겠지만, 비호감 경쟁을 벌인 세 후보의 책임도 크다. 이런 상황을 그저 목도하거나, 물밑에서 유력 후보에게 줄대기에 바빴던 의원들도 크게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맛으로 증명하라

이 글을 마무리하던 25일 밤 이해찬 후보가 대표로 선출됐다. 집권여당 대표는 영광된 자리지만, 그는 상처만 잔뜩 입고 링에 오르게 됐다. 싸움꾼 이미지는 덧씌워졌고, 건강 문제는 언제든지 쟁점화될 수 있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의 반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당 관계자는 “적폐청산, 보수궤멸을 내세운 이 대표 등장으로 보수들이 결집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한국당으로선 생큐”라고 했다.

이 대표 측은 억울해할 수도 있다. 경쟁자들의 집중공격으로 이미지가 지나치게 왜곡됐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당 등 보수야당이 아니라, 같은 당에서 나온 비판인 만큼 ‘근거 없는 음모’ ‘헐뜯기’라는 간단한 말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후보 등록 때부터 예견됐던 상황 아니냐. 이 대표가 유능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성격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있다”고 했다.

결국 경쟁자들의 비판이나, 야당의 은근한 환영이 틀렸음을 증명해야 할 사람은 이 대표 자신이다. 독선·불통 등 성격 논란이 더 불거져서는 곤란하다. 전대로 찢어진 당 수습은 물론 야당과의 협치도 어려워질 것이다. 청와대 국정운영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전대 과정에서 불거졌던 여러 논란들을 곱씹어 볼 것을 권한다. 그래야 이 대표가 내놓는 음식들이 맛있다는 평가를 받고, 취임 일성인 ‘민주 정부 20년 집권’도 가능해진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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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문학의 오래된 소재이다. 누군가가 떠날 때 아쉬움에 술을 마시고, 격려와 당부의 말을 건넨다. 차마 못한 말을 글로 적으면 시가 된다. 고려 시인 정지상은 ‘송인(送人)’에서 “대동강 저 물결은 언제나 마를 건가/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해주니”라고 헤어짐을 노래했다. 이별시의 절창이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에서 헤어짐을 앞에 두고서 꽃을 뿌리겠노라고 말한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역설의 시다.

추석계기 남북이산가족 2차상봉 마지막 날인 5일 마지막 상봉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 남측 왕소군(81) 할머니가 북측 여동생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가장 슬픈 이별은 가족과 헤어지는 일이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외직을 떠돌던 소동파는 추석날, 술에 대취해 동생 소철을 떠올린다. 떠오른 보름달에 동생의 얼굴을 겹쳐 보면서 “달에게 그 무슨 이별의 한(恨) 있으랴만/ 어찌하여 늘 이별해 있을 때만 둥근가”(‘수조가두’)라고 달을 원망한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한날한시에 나란히 남도의 유배지로 떠난다. 나주 율정점의 삼거리 주막거리에 이르렀을 두 사람은 이별과 맞닥뜨렸다. 형은 신안으로, 동생은 강진으로 가야 한다.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서 동생 정약용은 오열한다. “초가 주점 새벽 등불 깜박깜박 꺼지려 하는데/ 일어나서 샛별보니 아! 이제는 이별인가/(…)/ 흑산도 머나먼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형님이 어찌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율정에서의 이별’)

26일 끝난 금강산 이산가족 2차상봉에서도 그리움에 사무친 이별시가 쓰여졌다. 남측의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은 북측의 사촌동생을 만나 어릴 적 함께 놀던 기억이 떠올라 시를 지었다. “그때 그날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외갓집 마당가/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서 다시 만나자.”(시 ‘사랑하는 동생 종주야’) 북측 상봉단에도 시인이 있었다. 남측의 언니, 동생들과 만난 북측 량차옥 시인은 자매들 앞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지었다는 자작시를 들려줬다. “우리 집에 코스모스/ 담장 밑에 코스모스/ 빨간꽃은 피었는데/ 우리 엄마 어데가고/ 너만 홀로 피었느냐/ 너만 보면 엄마생각/ 너만 보면 고향생각.”(시 ‘우리집에 코스모스’) 둘 다 이별시이지만, 동생을 남기고 온 오 시인의 시는 유별시(留別詩)이고, 자매를 다시 남으로 보낸 량 시인의 시는 송별시(送別詩)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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