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청년의 죽음으로 비정규직 제도가 첨예한 사회적 의제로 다시 떠올랐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답인지 알지만,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하청 노동자들에게 몰리는 산재 사망사고의 근본 대책으로 비정규직의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지만, 검토하겠다는 말만 들려온다. 누구나 돈보다 사람이,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반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며칠 전, 정부는 총사업비 24조1000억원 규모의 23개 재정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하는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정부는 예타 면제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는 4대강사업을 의식한 듯, “지역 전략산업 육성 관련 사업”이 다수 포함되었고, 중앙정부가 아닌 지역주도 방식의 사업이라며 과거와 다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어떻게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으려는 예타의 면제 사유가 되는지 모르겠다. 사업 내용을 보면 도로와 철도 건설에 20조원 정도가 투입되는 전형적인 토건 사업이다. 정말 이 프로젝트로 국토균형발전이 이루어지고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까? 단기간의 경기부양에 그치고 남는 건 결국 예산 낭비와 환경 파괴만을 남겼던 과거가 되풀이되는 건 아닐까?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자본의 논리가 압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현실이 ‘철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철벽으로 보면, 현실은 ‘원래 그런 것’이다. 현실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것, 그저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식한 현실에 희망을 위한 자리가 있을 리 없다. 현실의 부당함도 원래 그런 것이려니 여기고 체념할 뿐이다. 기존의 부당한 현실과 잘못된 관행을 바꾸려는 의지는 꺾여버리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은 잘려나간다. 하지만 만연해 있다고 해도,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인식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현재는 과거와 다르다. 그 차이는 나와 우리의 노력과 헌신이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다.

철벽과 대조적인 현실 인식도 가능하다. 현실을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약속으로 보면, 현실은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는 미완의 가능성이다. 현실에 내재하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 인식은 아무리 강고한 현실도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의 못자리가 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은 완전하지도 않고 부족한 점도 많다. 그렇다고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에서 희망을 길러낸다.

현실이 약속보다 철벽으로 보일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현실을 변화의 가능성이 내재된 약속으로 보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리는 현실의 어떤 부분들이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비현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당장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다양한 굴곡을 그리며 진행되어 서로의 인과관계를 알아차리기 힘들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실패와 패배와 좌절을 통해서 성공하고 승리하고 전진해왔다. 오늘의 변화된 현실이 바로 그 증거다. 여기에 현실을 약속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의 강고함에 굴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철벽같은 현실 앞에서 다짐해본다. 첫째,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기. 둘째, 현실에 압도되지 않기. 셋째, 현실을 바꾸기 위한 최선의 길을 식별하기. 넷째, 식별한 길을 전력을 다해 걸어가기. 그러고는 진인사 대천명! 희망의 설, 보내시길 빕니다.

<조현철 신부 녹색연합 상임대표>

 

'주제별 > 녹색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상과학과 수소자동자  (0) 2019.02.22
시민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  (0) 2019.02.15
현실, 철벽과 약속 사이  (0) 2019.02.01
수소경제와 에너지민주주의  (0) 2019.01.25
에너지전환 걸림돌, 원전  (0) 2019.01.18
고양이 손이라도 잡아라  (0) 2019.01.1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떤 삶이 있다. 거대한 폭력이 그 삶을 평범할 수 없게 만들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오랫동안 수치와 침묵 속에 살아야 했다. 세월이 바뀌어 그 삶은 정의를 향한 용기를 상징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피해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동시에 개인적 삶을 넘어서는 추상적 의미 속으로 수렴되면서, 공적 담론 속에 있으되 그 언어를 빗나가게 됐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 영면하셨습니다. 흰 저고리를 입고 뭉게구름 가득한 열네 살 고향 언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청와대가 게시한 추모의 글이다. 청와대뿐 아니라 김복동님의 소천 소식을 보도하는 언론은 하나같이 그분을 투사가 된 ‘할머니’로 묘사하면서도 양산 출신의 순박한 열네 살 소녀를 소환한다.

일본군 위안소로 징발되어 가는 소녀의 이미지는 제국주의의 침략, 군국주의적 폭력에 주권을 빼앗겼던 국가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역사와 ‘진실’의 문제에 대한 우리 국가적 자의식의 한 측면을 가리킨다. 주권을 침탈당한 국가를 연약한 ‘소녀’로 표상하는 수사는 피해와 박탈, 취약함과 종속을 여성적 속성으로 못 박음으로써, 국가의 본래적 성별을 ‘남성’으로 설정하면서도 그 국가의 실패는 여성의 이미지로 환치하는 이념적 장치이다. 또 이 이미지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모종의 전제를 집약하여 일반화한다. 피해, 상처 이전의 어떤 완전한 순수에 대한 향수 속에서 피해자를 국가의 이미지와 등치하여 숭고하게 만드는 이 수사는, 어쩌면 국가와 역사를 내세워 개인 김복동의 존재를 지우는 동시에 그분이 평생 입은 피해와 고통에 연루된 국가의 실패를 간과하는 것이다.

김복동님이 66세에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피해 사실을 공개한 1992년 이후 위안부 피해 문제에 헌신한 것은, 오랜 세월 상처를 품고 자신의 감정과 감각에서 유리된 채로 살아야 했던 그분의 생존의 선택이자 또 다른 희생이었을 터이다. 생전에 그분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맨날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 테레비고 신문이고 입이 아프도록 죽도록 말해 놓으면 그 말은 다 어디 가삐고 한두 마디 나오고 그저 ‘김복동 위안부’ ‘위안부 김복동 할매’ … 이기 머, (내가) 위안부라고 선전하는 거밖에 더 되나 말이다. 안 그래?”(‘이진순의 열림’, 한겨레신문 2014년 2월21일자) ‘위안부 할머니’라는 호명 속에서 소략하게 평면화된 자신의 공적 존재가 자신의 힘겨운 발화와 처절히 불일치한다는 이 암시는, 국가의 역사적 상흔으로 상징화됨으로써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상처에 대한 고백이다.

위안부 피해자와 국가의 관계는 그야말로 껄끄러운 것이다. 국가는 그분들의 평범한 일상을 애당초 지켜주지 못했으며, 해방 후 수십년 동안이나 그분들의 피해에 침묵했다. 그분들을 손상된 국가 위상의 표상으로 삼으면서도 일본과의 외교적, 정치적 교섭에서 상징적 정의의 제스처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위안부’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를 거의 조장하다시피 직접 관리하며 그들의 인권을 외면했고,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폭력과 성범죄에 대해 아직도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검찰 등 국가기관들의 성불평등,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개혁의 요구도 거세다. 연로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죽는 날까지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불가역적” 합의 따위에 동의하면서 국가가 실패를 거듭했다는 증거이다. 순박한 소녀와 투사가 된 할머니. 이 상투화된 두 기호로 김복동님을 기리는 애도는 그래서 한없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고단한 여정을 마친 김복동님의 장례가 오늘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썼다. “심지어 이런 곳에서도 사람은 살아남고, 그러므로 살아남기를 원해야 한다. 이야기하기 위해서. 살아 증언하기 위해서.” 살아남았던 사람의 죽음은, 언어에 저항하는 역사를 몸에 새기고 있었던 사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의 상실이다. 이 상실을 어떻게 애도해야 좋단 말인가. 남은 이들의 몫은 그분이 요구했던 사과를 받아내는 일만이 아니라, 그분이 살아 견딘 삶과 세계가 망각의 지평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치유는 가능하지 않으며,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존재를 비인간화한 폭력을 보상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억하는 일, 즉 그 피해의 치유 불가능성을 상기하는 일, 돌이킬 수 없는 국가의 실패를 복기하는 일이다. 그 불가능과 그 실패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런 폭력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고 우리가 인간을 인간으로 지키는 유일한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 김복동님, 그리고 같은 날 소천하신 이씨 성의 다른 한 분의 명복을 삼가 기원한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에 일본 축구 대표팀의 간판 선수였던 나카타 히데토시에게 일본의 한 우익 신문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 대표팀 평가전 성적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가 일본 선수들에게는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데, 다음 평가전에 당신이 기미가요를 부르면 선수들과 관중들이 감동을 받아 축구의 신이 경기장에 강림할 것이다. 기미가요를 부를 텐가? 나카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기미가요, 너무 장엄해서 축구하기 전에 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죠.” 실제로 그는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고, 그날 평가전에서 유일하게 기미가요를 크게 따라 부른 선수는 브라질에서 귀화한 산토스였다.

한국의 축구 대표팀은 경기 전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 부른다. 군 복무 중인 선수들은 거수경례로 태극기를 향한다. 조국을 대표해서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들은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전사들이다. 특히 한·일전에 나설 때 선수들의 마음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다. 일본에만큼은 질 수 없다는 정신력은 적어도 역대 일본전의 압도적인 승리의 원동력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투혼은 아마도 우리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압축하는 언어일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방송 인터뷰를 할 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지금까지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로 시작한다. 간혹 국가에서 지원한 태릉선수촌에서 맘 놓고 운동한 것이 금메달을 따게 된 큰 힘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과거 사회주의국가에 있었던,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합숙 훈련소인 태릉선수촌은 한국형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생산기지였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생각한다. 태릉선수촌은 현재 진천으로 이전했지만, 조국이 나를 호명한 것을 인증하는 장소이자, 금메달 꿈을 펼칠 수 있는 꿈의 성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조국이 부른 태릉선수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격리돼 성폭력과 반인권적 폭행의 비밀장소가 되었다. 쇼트트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선수는 조재범 코치로부터 상습적인 폭행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장소로 지목한 곳이 바로 태릉과 진천 선수촌, 한국체육대 빙상장 라커룸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숙하는 장소는 외부와 격리돼 일반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빌미로 체벌과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게 다 너희들 금메달 따게 하려는 것이고, 국위선양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협회는 코치들의 만행을 알면서도 금메달이란 지상과제를 위해 묵인한다. 금메달과 국위선양은 선수들의 인권 위에 군림한다. 심석희 선수에게 금메달은 개인의 값진 영광이 아니라 강압과 폭력의 대가로 얻은 국가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와 고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시민단체에서 기자회견을 하니, 빙상 체육인들은 다음 올림픽에 금메달 못 따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냐고 겁박을 한다. 금메달로 최종 수렴되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코치와 협회가 폭력을 조장하고 공모하게 만드는 어둠의 속이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조국 근대화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가난한 시절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국가 이데올로기는 스포츠를 통해 대중들을 단결시킨다. 베트남 국민들의 최근 축구 열풍도 그 신화에 해당된다. 그런데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대중의 광기와 폭력을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정당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것은 선수들의 인권을 짓밟고,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주술이다. 제2의 심석희 선수 사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괴물 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내파해야 한다. 대표선수들이 합숙하는 선수촌을 해산시키고, 선수 코치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며,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주는, 이른바 “금메달이 아니어도 괜찮아, 너희들만 행복하면”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한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립유치원 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유치원 3법’을 저지하기 위해 특정 국회의원에 대한 후원을 알선했다는 서울시교육청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임 이사장 등 지도부가 공금을 유용·횡령한 정황도 포착됐다. 서울교육청은 1월31일 전·현직 지도부 5명을 횡령·배임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하고 한유총 법인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고발·수사의뢰키로 했다. 한유총은 지난해 말 비리 사립유치원 명단이 공개된 이후 유아교육의 공공성 강화 요구는 외면한 채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만 챙기려는 후안무치로 비판받아왔다. 이제는 단체 운영의 비위 의혹까지 드러나며 법인 설립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는 위기에 몰렸다. 미래 세대의 학습권을 볼모로 위법적 행태를 자행해왔다니 어처구니없다.

서울시교육청이 한국유치원총연합회를 검찰에 고발하고 수사 의뢰한 31일 서울 용산구 한유총 입주 건물 복도에서 한 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한유총은 전국 사립유치원의 70%가 넘는 3000여곳을 회원으로 둔 최대 유치원 단체다. 그러나 교육청 조사 결과를 보면 ‘적폐의 온상’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한유총은 지난해 11월 사립학교법·유아교육법·학교급식법 개정안 등 ‘유치원 3법’을 막기 위해 회원 3000여명이 속한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의원 후원계좌를 올리고 ‘10만원가량 후원하라’며 독려했다고 한다. 한유총 법인과 지도부, 일부 회원들의 회계 부정도 다수 적발됐다. 회원들에게 한유총 회비를 교비회계에서 내도 된다고 안내했는데, 이는 학부모 부담 교육비는 유아교육에 직접 사용돼야 한다는 원칙을 어긴 것이다. 또 전 이사장과 전 지회장들이 ‘지회 육성비’ 명목의 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횡령한 정황이 드러났고, 물품 구매·용역 계약 과정에서 3억5400여만원어치의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않은 사실도 파악됐다.

검찰은 한유총과 관련된 모든 비위 의혹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에게 불법 로비를 시도하고, 학부모들이 부담한 교육비를 마구잡이로 전용하는 행태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한유총은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고 검찰 수사에 성실하게 임해야 옳다. 명확한 해명이나 사과 없이 ‘법적 대응’ 운운해서는 시민의 시선만 더 싸늘해질 것이다. 교육청은 수사 결과 위법 사실이 확인될 경우 한유총의 법인 설립허가를 취소해야 마땅하다. 국회는 지난해 처리되지 못한 채 신속처리안건(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유치원 3법’을 조속히 통과시키기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경수 경남지사의 1심 유죄 판결 및 법정구속과 관련, 여야 정치권의 대응이 저열한 진영 싸움으로 얼룩지고 있다. 판결대로 김 지사가 ‘드루킹’ 일당과 공모해 대선 국면에서 댓글순위를 조작하는 등 여론조작에 가담했다면 중대한 범죄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민의의 공론장을 유린하고,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반민주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급심 절차가 남아 있지만, 대선 당시 댓글조작 공모 혐의가 인정된 1심 판결만으로도 여권은 사안의 심각성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대처를 하는 게 마땅하다.

드루킹 일당과 공모해 포털사이트에서 댓글을 조작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김경수 경남지사가 3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한데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 ‘재판 불복’을 선동하고 “적폐세력의 보복 판결”이라며 정쟁화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민주당은 ‘사법농단 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란 공식기구까지 꾸려 재판부를 ‘손보겠다’고 나섰다. 특정 판결을 두고 공당이 ‘판사 탄핵’까지 거론하며 사법부를 겁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심각하게 해치는 처사다. 재판을 담당한 성창호 부장판사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2년간 비서실 판사로 근무한 이력이 문제된다고 판단했다면 사전에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기라도 했어야 한다. 막상 재판 결과가 기대와 다르게 나오자 ‘보복 판결’ 운운하는 것은 무능과 태만을 호도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성 판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특활비 수수 등과 관련해 8년 실형을 선고할 때는 ‘용기 있는 판결’이라고 환영하더니, 불리한 판결이 나오자 ‘적폐 판사’라고 한다. 이율배반이다. 민주당의 논리대로라면 사법부를 온통 자기편으로 구성해 재판이 전부 자기들 뜻대로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사법농단이다. 여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이고 억울한 결과일 수 있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일단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항소심에서 진실을 가리는 게 순서다.

자유한국당이 대선 불복의 프레임까지 꺼내들고 있는 것 역시 꼴사납다. ‘드루킹 사건’은 민간 차원에서 댓글조작을 했다는 점에서 국가 권력기관이 직접 벌인 과거 정권의 사건과는 궤를 달리한다. 청와대 앞으로 달려가 의원총회를 열고, ‘대통령 특검’을 운위하는 것부터가 정략적 이용이다. 정치적 이득에 눈이 멀어 정쟁을 부추긴다면 역풍만 불러올 뿐이다. 집권당 시절 국가기관의 댓글공작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않은 한국당은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

여야 공히 진영 논리에 매몰돼 ‘김경수 판결’을 정쟁화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관련 책임자를 낱낱이 가리기 위해서도 그렇다. 아직 1심에 불과하다. 최종심까지 증거와 법리를 통해 진실을 다툰 뒤 그 결과에 승복하면 될 일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내 경험의 차이는 너무 커서 설명이 아예 안되는 것들이 태반이다.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아 볶아 먹었다거나, 개구리 다리를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엄마를 원시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농촌에서 계절마다 잡아먹을 것들은 제각각이었다.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다슬기를 줍는 일은 여름, 겨울의 큰 놀이였다.

1월5일부터 시작된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가 27일 막을 내렸다. 2003년 처음 열릴 때는 화천군민 수만큼인 2만명만이라도 왔으면 한 축제였다. 하지만 개최 첫해 22만명 정도가 찾았고, 올해는 184만명을 화천으로 불러들였다.

한때 ‘축제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함량 미달의 지역축제가 넘쳐나던 때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지역축제는 있어왔다. 춘향이나 논개, 이순신 등 국가 이념에 맞는 관변 축제를 만들어 관이 주도하고 주민이 동원되었다. 관 주도의 농촌 지역축제는 풍물장터와 연예인 공연을 하고 ‘특산물 아가씨’ 선발대회를 여는 식의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러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국정지표에 ‘문화진흥’이 등장하면서 지역축제의 활성화를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지자체마다 축제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화천 산천어축제’와 ‘함평 나비축제’를 꼽는다. 

‘산천어’는 1급수에 사는 담수어로 화천이 산천어를 축제 테마로 내세운 것은 청정한 자연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산천어는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멸종위기에 놓인 물고기였다. 열목어나 쉬리와 함께 자연다큐의 주인공 역할을 맡아왔다. 1970년대부터 당시 수산청 주도로 양식이 시도됐다. 이는 생태적 이유라기보다는 ‘고급 식재료’로 주목했기 때문이다. 1974년에는 관광 낚시터에 풀어놓기 위해 산천어와 송어를 교배해 ‘산천어 F1’이란 어종을 개발했고, 1990년대 들어서 본격 양식에 들어갔다. 화천 축제에 쓰인 산천어도 당연히 양식을 해서 풀어놓은 것이다.

결국 올해는 산천어축제가 동물학대와 생명경시를 부추기는 일이라며 축제를 막아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여러 환경단체와 동물권 단체의 반대성명도 이어졌다. 양측의 주장도 팽팽하게 부딪친다. 물고기 잡기가 ‘생명경시’인지 ‘추억의 동심’인지로 갈린다. 축제의 규모가 개최 초기보다 훨씬 커졌고 관심도 높기 때문에 개선할 점이 분명 있고 새겨들을 만한 지적이다.

다만 화천에서 ‘산천어’를 테마로 축제를 꾸렸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군사지역이어서 ‘군인 상권’으로 먹고살아야 하지만 남북관계가 꼬여 군인들의 외출이나 면회가 제한되면 지역경제가 어려워진다. ‘평화의 댐’으로 대표적인 관광지였던 파로호가 마르면서 관광객도 줄었다. 산과 물, 공기, 추위가 고장의 자산인 이곳에서 ‘산천어’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농한기에 주민 일자리가 생기면서 소득에 도움을 주고, 농산물 판매로 이어지면서 이 축제가 화천군민들에게는 중요한 행사가 된 것이다. 참여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 또한 높아졌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 사람의 일은 복잡다단하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다.

농촌에서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다. 오래전부터 ‘향토축제’란 이름으로 축제를 부추긴 이유는 뭐라도 해보란 뜻이었다. 나비를 길러서 날리고, 산천어를 길러 얼음 강물에 풀 수밖에 없던 속사정이 풀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디에서든 또 잡고 먹고 할 것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