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주 목요일(1월31일)에 임명 사실을 발표한 국립현대미술관장 이야기다. 당시에 기사를 썼지만, 이번 칼럼을 통해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문체부가 기대한 바와 달리 설 연휴 기간에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장 인선 절차의 문제점을 잊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11월 공모를 시작한 지 2개월여 만이었다. 공식 발표는 임명이 결정된 이날이 아니라 다음날(2월1일)이라고 했다.

‘꼼수’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1일은 설 연휴를 하루 앞둔 금요일이었다. 독자들이 더 잘 알겠지만 금요일이 되면 뉴스를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여기에 설날까지 있으니 뉴스 수요는 더욱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새로 뽑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31일 오전 윤범모 관장에게 내정 통보 사실을 확인한 뒤 부랴부랴 기사를 썼다. 문체부는 내정 사실 보도가 이어지자 이날 오후 새로운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선정됐음을 발표했다.

윤범모 신임 관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1979년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전시기획자 겸 비평가로 발을 넓혔고 가천대(옛 경원대)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큐레이터협회장,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장 등도 지냈다.

민중미술 계열과 활발히 교류했다. 1980년대 새로운 미술운동을 일으킨 소집단 ‘현실과 발언’ 창립 멤버였고, 민족미술협의회 산하 ‘그림마당 민’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2014년에는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책임 큐레이터로 일했다. 훌륭한 경력을 지닌 기획자이자 미술사학자다.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은 없으나 원만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알고 있다. 취재원들은 대부분 ‘좋은 분’이라고 평했고 미술기자를 한 선배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평가일 뿐이다. 무엇보다 윤범모 관장은 미술관의 관장을 맡아본 적이 없다. 다른 행정경험도 없다. 과천, 서울, 덕수궁, 청주관 등 4개관을 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예산은 632억원이고 직원도 100명이 넘는다.

이전에 관장 경력이 없다고 해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 수행을 못하란 법은 없다. 정부가 행정업무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고위공무원 역량평가’라는 제도도 있다. 그런데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윤 관장을 포함해 최종후보로 오른 3명에게 역량평가를 면제시켜주려 했다. 윤 관장을 제외한 2명은 전직 미술관장으로 행정경험이 이미 있었다. 경향신문 등이 ‘내정된 특정 후보를 위해 문체부가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문체부는 역량평가를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해 12월 진행된 역량평가에서 최종후보 3명 중 윤 관장 등 2명이 낙제점을 받았다. 정상적이라면 나머지 1명이 ‘단수후보’로 도종환 문체부 장관에게 추천되어야 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떨어진 2명에게 재평가 기회를 부여했다. 윤 관장은 이번에는 통과했고 최종 낙점을 받았다. 윤 관장은 “역량평가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절차를 다 밟았고 다 잘됐다”고 말했다.

윤 관장은 지난 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벌써 ‘코드 인사’란 말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코드 인사’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정권과 호흡이 맞는 인사가 기관장직을 더 잘 수행할 수도 있다. 문제는 ‘코드 인사’가 아니다. ‘꼼수’로 공모절차를 통과한 것이 더 큰 흠이다.

윤 관장이 앞으로 3년간 보란듯이 관장직을 해내길 기원한다. 진심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기억하겠다. 절차적 정당성에는 분명히 하자가 있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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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에 갔다. 서울과 구리에 걸쳐 있는 망우리묘지가 공원으로 탈바꿈한 지는 꽤 됐다. 서울시와 내셔널트러스트 등이 역사인물을 발굴하고 인문학 길을 조성해 명소로 만들었다. 이제 망우산은 공동묘지가 아닌 나무가 울창한 생태 공원이다. 설 전날, 망우리묘지 인물 발굴기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지음)를 길잡이 삼아 집을 나섰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명인사는 시인 김상용·박인환, 소설가 계용묵·최서해, 화가 이중섭·이인성, 가수 차중락, 독립지사 한용운·오세창 등 50명이 넘는다. 70여만평의 공원에 흩어져 있는 이들을 다 만나려면 족히 하루는 잡아야 한다. 이날은 독립운동가로 한정했다.

망우리공원 초입의 역사인물전시장에서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가면 ‘망우리 사잇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15분쯤 오르면 능선에서 도산 안창호의 묘지 터를 만난다. 도산은 독립운동의 밑그림을 그린 임시정부 지도자였다. 살아서 해방을 맞이했다면, 초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큰 인물이다. 1938년 숨진 도산의 유언은 소박했다. 먼저 간 제자 유상규 옆에 묻어달라는 그의 말을 따라 망우리에 묻었다. 그러나 유언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남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이장됐다. 유상규의 묘지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의사였던 그는 도산의 비서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도산 묘터 옆에는 흥사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영학의 묘소, 도산의 사위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김봉성의 묘터가 있다. 강북의 ‘작은 도산공원’으로 불러도 좋겠다.

유상규 묘소 아래 아스팔트 산책로를 따라가면 소파 방정환 묘소가 있다. 방정환은 아동문학가, 교육자, 출판인 등으로 살다가 31세에 요절했다. 3·1운동 때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됐고 뒤에는 청소년 계몽운동에 앞장선 독립지사였다. 묘소는 망우리에서 가장 아름답다. 자연석의 질감을 살려 쓴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과 ‘동무들이’라고 적은 글씨가 정감이 있다. 이곳에서 50m 남짓에 묘소가 있는 위창 오세창과 호암 문일평은 서화와 역사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독립지사들이다. 오세창은 3·1운동에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고, 문일평은 상해 비밀결사에서 활동하고 3·1운동 때 독립청원서를 낭독하며 시위를 벌였다. 문화예술인답게 두 애국지사의 비석과 비문은 조형성이 뛰어나다.

망우리공원에는 이들 이외에 한용운, 오기만, 서광조, 서동일, 오재영 등 9명의 독립운동가가 묻혀 있다. 이 가운데 독립지사로 대한민국장을 받은 만해 한용운의 묘는 최고의 훈격에 걸맞게 일찍 조명을 받았다. 구리시를 굽어보는 산 언덕에 자리한 만해의 묘는 망우리 독립지사들의 묘지를 거느리는 듯하다. 만해의 묘는 2012년 망우리공원에서 유일하게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5년 뒤 나머지 8명의 독립지사 묘들도 가세했다. 묘지가 집단으로 문화재가 된 사례는 드물다. 망우리에 묻힌 죽산 조봉암과 박희도의 사연은 안타깝다. 조봉암은 일제 때 항일운동으로 8년을 복역했으며 해방 후에는 진보당 창당을 벌이며 주도하다 사형당했다. 박희도는 3·1운동 기독교대표로 참여해 2년간 투옥됐으며 이후 필화사건으로 2년을 더 복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애국지사 서훈을 받지 못했다. 조봉암은 일제에 국방헌금을 낸 사실이 발목을 잡았으며, 박희도는 친일 행위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9월 망우리공원 이태원합장비 옆에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가 들어섰다. 1920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태원공동묘지에 매장됐다. 그러나 1935년 이태원묘지가 개발되면서 지금껏 행방불명 상태다. 일제는 이태원의 무연고 묘 2만8000기의 유해를 화장한 뒤 신설된 망우리묘지에 합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망우리의 이태원합장묘에 유 열사의 유해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적·과학적 확인도 없이 표지비를 세워 사실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망우리공원에는 3·1운동 종교계 대표뿐 아니라 훗날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람은 이들뿐이 아니다. 3·1운동이 평가받는 것은 지역·계층을 초월한 민중운동이기 때문이다. 당시 운동에 참여한 백성은 200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에는 망우리에 묻힌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망우리공원이 현충원·효창원 등 애국지사 묘역과 다른 점은 유명인사와 무명인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공동의 묘지이자 시민의 공원이라는 점이다. 오는 3·1절에는 망우리공원에서 이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마련됐으면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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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오랜만에 사람 소리가 담을 넘는 집집들. 영화 <정무문>에서 이소룡이 한 놈씩 덤비면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격파(?)해가는 것처럼, 첫째부터 막내까지 우르르 몰려온 ‘가족 난리’를 잘 치러냈다. 대개 할아버지들은 손주 사랑이 각별한데, 늘 그렇듯 두 번 고맙다. 한 번은 와주니 고맙고 두 번은 가주니 고맙다.

배며 사과며 통조림, 식용유까지 오랜만에 선물세트로 살림이 늘었겠다. 나는 그런 걸 사올 은인도 없고, 그냥 친구들이랑 떡국이나 쑤어 먹었다. 명절을 대가족과 보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피차 고달플 것 같아서 나부터 혼자 잠수를 타고는 했었다.

옛사람들은 세 가지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첫째는 조상 자랑이다. 조상님을 존경하는 것이야 아름다운 미덕이나 그걸 자랑 삼는 순간 조상님 얼굴에 먹칠이 들어간다. 예수를 자랑해야 할 교회가 배후를 알 수 없는 선교사들과 목사를 자랑한다. 오늘날 개신교의 초대박 붕괴 원인이 이게 아닐까. 둘째는 자식 자랑이다. 자식은 잘되어도 고민, 못 되어도 애물단지다. 두고 봐라. 자식 잘된 집치고 행복한지. 자식은 무덤에 누울 때까지 잠재울 수 없는 시련의 파도와 같다. 셋째는 재물 자랑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이가 가진 재산을 자랑하는 인간이렷다. 사돈네 팔촌까지 벌떼처럼 손 벌리고 몰려올 것이다. 방송에서 집 자랑 돈 자랑 하는 치들을 보면 어리석기가 짝이 없다. 사람들은 그때 환호하는 듯싶으나 쫄딱 망해버리기를 또 바라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자랑해야겠다. 첫째는 눈물이다.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이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비칠 수 있는 사람은 친구로 삼아도 후회 없다. 당신과 헤어지면 눈물을 흘릴 사람이겠기에…. 둘째는 미소다. 미소가 예쁜 사람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 항상 은인이 생긴다. 맑은 미소를 가진 사람은 또한 진실하다. 셋째는 친구다. 여럿이 말고 단 한 명의 친구. 둘도 필요 없다. 그런데 이걸 막상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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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의 연차총회, 일명 다보스포럼에 다녀왔다. 다보스포럼 직전에 발표된 올해 전 세계 위협요인들에는 예년과 유사하게 기후변화, 자연재해, 데이터 사기, 사이버 공격 등이 포함되었는데, 특이하게도 가능성은 낮지만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감염질환의 전파가 거론되었다. 필자가 토론자로 참여했던 여러 세션 중에는 ‘질병X(disease X)’가 있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정의한 질병X는 현재는 사람에게 감염이 안되거나 거의 안되는 질병 요인인데 만약 이들이 변이를 일으켜 사람을 감염시키게 되면 예방백신이나 치료제가 없어서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질병을 말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지구상 인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억명을 감염시키고 적어도 50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스페인 독감은 우리가 예방이나 치료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감염질환이 발생해 전파되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2015년 메르스(MERS) 사태를 겪은 한국으로서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그 당시 메르스에 180여명이 감염되어 38명이 사망에 이르렀고, 1만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격리되었다. 그보다 12년 전인 2003년에 있었던 사스(SARS) 사태도 기억할 것이다. 8000여명을 감염시켰고 774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여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 외에도 잊을 만하면 발생하고, 최근에는 감염빈도가 높아진 에볼라 바이러스는 전파가 그나마 느려 다행이지만 감염 시 치명적이고, 몇 년 전 임산부 등 우리를 걱정시킨 지카 바이러스도 계속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감염질환의 발생빈도가 높아지고 전파도 점점 더 넓게 빨라지고 있다. 질병X 세션에서는 이들 감염원의 전파가 최근 왜 더 빠르고 넓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원인을 도출해 토론했다. 첫째는 지구촌이 여행, 무역 등 모든 면에서 연결이 너무 잘되어 있고, 둘째는 옛날에 비해 도시를 중심으로 고밀도로 모여 살아서 전파가 잘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후변화에 의해 모기와 같은 바이러스 매개체의 활동영역이 높아진 것과 지카 바이러스나 에볼라 바이러스의 경우 무분별한 벌목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여행이나 무역을 줄일 수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도시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기후변화 문제는 많은 나라가 공감은 하고 대응은 하고자 하지만 빠른 시간에 되지도 않고 뭐 한 가지 만만한 것이 없다. 현재로서는 위생 및 청결상태 유지에 의한 바이러스 감염 확률 저감, 백신 개발과 접종에 의한 예방 강화, 발생 시 전파 최소화, 항바이러스제 등을 이용한 감염자의 신속한 치료가 해답이다.

우선 백신의 경우를 보자. 세계보건기구는 2015년 우선순위 질병들(priority diseases)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이들에 대한 대비와 연구·개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2018년에는 이 리스트에 질병X도 추가했다. 예방에 가장 중요한 바이러스 백신의 경우 보통 개발에 5~10년이 걸리는데, 우선순위 질병 도입 후 에볼라 백신의 경우 1년 만에 개발하게 되었다. 또한 전 세계 공동대응체인 전염병 준비혁신 연합체(CEPI)도 발족해 앞으로 백신 개발 등에서 좀 더 효과적이고 빠른 대응이 기대된다.

백신의 접종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감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모든 바이러스에 대해 백신을 맞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반드시 맞아야 할 예방백신을 맞지 않는 경우 일어나는 위기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유아에게 특히 위험한 홍역은 홍역 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해 일어나는데 전염력이 매우 높다. 우리는 생후 12~15개월, 만 4~6세에 한 번씩 두 번 백신접종을 해서 예방해 왔다. 하지만 여행 등을 통해 일부 동남아, 유럽 국가에서 감염되어 귀국하는 사례들이 종종 보고되어 왔다. 올해 들어서는 공중보건 여건이 우수하다고 알려진 일본과 미국에서 수십명의 홍역 발생이 보고되었고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 워싱턴주는 비상사태를 선포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 환자의 대다수가 홍역 백신접종을 하지 않아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방백신을 맞지 않아 홍역 등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본인이 아프고 괴로운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가에서 정한 혹은 권장하는 백신접종은 반드시 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도 적극 활용해 전파와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지금부터 10년 전 구글은 독감의 발병을 예측하는 독감트렌드(flu trends)라는 서비스를 했다. 이는 구글의 강력한 검색기능을 이용해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을 때 주로 검색하는 약 40가지 단어들을 기반으로 예측하는 기술인데, 자체의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보완적인 용도 정도로의 사용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KT에서 주창한 글로벌 감염병 확산 방지 프로젝트도 있다. 휴대폰 위치정보를 통해 감염국가를 한번이라도 거친 사람은 질병관리본부 등에 통보함으로써 감염병에 대한 대응을 철저히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다양한 빅데이터를 이용한 보다 정교한 대응시스템의 개발도 기대된다.

우리는 이미 알려진 바이러스뿐 아니라 질병X에 해당하는 바이러스들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과학, 공학 및 의학기술의 융합을 통한 효과적인 백신과 치료제의 빠른 개발, 개인 위생과 생활환경의 청결, 권장된 백신의 접종, 정보통신기술 등을 활용한 관리와 확산 방지 등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야 점점 더 위협적인 바이러스 감염질환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개개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감염이 되지 않도록 평소 주의를 기울이고, 감기나 독감에 걸렸을 때 기침 예절을 지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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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돼지고기 사랑’ 운운할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고, 게다가 상대적으로 싼 식료를 결국 사랑하게 되긴 하겠지요.”

설까지 지났다. 제대로 기해년(己亥年)이다. 12지의 동물로 치면 돼지의 해다. 그래서인가, 돼지와 돼지고기에 관해 묻는 전화며 이메일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사랑한다’를 똑 떨어진 명제로 삼는 분들을 겪다가 굳이 위와 같은 답변까지 따로 준비하게 되었다.

인류는 자원을 다음 대에 전수하며 사랑과 기호와 상징을 한 자원에 부여하게 마련이다. 묻는 분께 어깃장 놓기가 아니다. 성심껏 답하느라 앞뒤가 바뀐 소리에 굳이 토를 달고,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하려는 뜻이다. ‘황금돼지의 해’까지 운운하면 더욱 난감하다.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 오행(五行)의 토에 엮인 것은 10간 가운데 ‘무(戊)’와 ‘기(己)’이고 그 상징색은 황색이다. 금에 엮인 것은 10간 가운데 ‘경(庚)’과 ‘신(申)’이고 그 상징색은 백색이다. 신해년(辛亥年)이 돌아오면 ‘백금돼지의 해’라 하든지, 외국어 쓰기들 좋아하니 플래티넘(Platinum) 가져다가 말을 만들든지, 암만해도 기해년은 황토색, ‘누렁돼지의 해’가 아닌가 싶어 이 글 쓰는 내내 갸웃거리는 중이다.

‘한국인의 사랑’에 이어 ‘황금돼지’에도 어깃장을 놓고 나면 중국 사람 진수(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三國志)>까지 찾아 사전 질문지를 만든 분은  울상이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제주도에서 돼지를 많이 키운 기록이 있다면서요?”

있긴 있다. 그때에는 제주라고 하지 않고,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라 했으며, 거기 ‘주호(州胡)’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들이 “소와 돼지를 잘 기른다[好養牛及猪]”라고 했다. 제주 목축, 목장의 역사는 방목지가 넉넉한 조건과 뗄 수 없다. 몸집이 큰 소도 한때 방목해 키웠을 수 있다. 풀 뜯어 먹게 방목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기르기’의 조건이기도 하다. 돼지는 어떨까. 3세기 양돈의 실제, 모른다. 저때에도 제주의 주호는 배를 타고 한반도를 오가며 장사를 했다는데, 멧돼지를 생포해 일정 규모의 방목지에서 순치했다가, 시세 좋을 때 뭍으로 싣고 가 팔았는지 모른다. ‘잘 기른다’는 그쯤을 견문한 결과일 수 있다. 그 한마디에는 양돈의 자연 조건, 사회 조건, 기술과 종의 문제 등에 대한 세목은 담기지 않았다. 한편 제주 사람들이 20세기 이후 동물성 단백질을 얻기 위한 가축으로 돼지에 집중해 독특한 돼지고기 음식 문화를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안타깝게도 제주 고유종 돼지가 사라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질문자가 순대까지 들고나오면 다시 말을 보탤 수밖에 없다. 지구상 어느 민족도 살코기만 먹은 적 없다. 어느 민족에게도 선지와 창자는 알뜰살뜰 먹을 만한 귀중하고 맛난 식료다. 선지의 양분과 풍미, 그리고 창자의 기름기와 물성과 질감을 결합한 음식은 지구 곳곳에서 먹어온 바다. 서울 종로통에서 보이는 아바이순대나 전주 남부시장 피순대와 구분하기 어려운 소시지도 세계 곳곳에 있다. 영어권의 블랙푸딩, 블러드소시지, 프랑스의 부댕, 중국의 쉐창 등이 좋은 예다. 선지빛깔 아롱진 순대의 기획은 지구 공통이다.

관련한 어깃장 가운데 최악은 아마 ‘추억의 돼지고기 음식’에 대한 답이었을 테지. 개업 60년을 뽐내는 서울 시내 한 돼지고기 음식점에서였다. 아뿔싸, 탄식이 절로 나왔다. 육고기와 내장을 다루는 집에서, 식료는 길가에 방치된 채였다. 직사광선 아래, 가로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채소를 쌓아 올린 붉은 고무통과 음식물쓰레기통이 나란했다. 60년 업력으로 이미 건물을 몇 채나 샀다는 이른바 노포였다. 나는 답했다. 여기 사랑이나 추억을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결별할 것과는 결별하고 새로이 사랑과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새해에 이토록 야박한 순간을 지어냈음을 굳이 고백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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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노동자의 장례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점검 도중 숨진 지 58일 만인 7일부터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유가족과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가 요구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공식사과 등을 정부와 여당, 사측이 수용한 결과다.

김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사실상 방치했던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도 28년 만에 이끌어냈다. 내년 1월 시행될 김용균법은 수은·납·카드뮴 등을 사용하는 작업과 유해물질의 제조·사용 등 위험·유해성 높은 작업의 사내도급이나 하도급을 금지하고, 안전·보건 조치 위반에 따른 산업재해에 대한 사업주의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 故김용균씨의 빈소가 마련돼있다. 故김용균씨의 장례식은 7일부터 9일까지 3일장으로 치뤄진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그러나 법 통과에도 불구하고 김씨 빈소를 태안에서 서울로 옮기고, 집회와 단식농성을 통해 ‘도급범위 현실화’ ‘진상규명 및 처벌강화’ 등을 호소해 왔다. 정부와 여당은 이런 호소를 받아들여 ‘진상규명위원회의 운영’ ‘공공기관 연료·환경설비 운전 분야 정규직 전환’ ‘사과문 발표’ 등 후속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번 대책에도 불구, 아쉬움은 많다. 당정이 내놓은 안을 보면, 김용균씨가 하던 연료·환경설비 운전분야 업무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는 ‘핀셋 대책’에 머물렀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정규직 전환도 발전소 직접고용이 아닌 5개 발전사의 통합자회사나 한전산업개발을 공기업화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고 한다. 이는 원청의 의무를 하청에 떠넘기는 위험의 또 다른 외주화와 다를 바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구조적 원인과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할 진상규명위가 오는 6월 말까지 가동된다는 점이다. 김용균법 국회 처리 과정에서 빠졌던 350만명에 달하는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도급 금지업종 확대와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보장할 사용자 벌칙규정 도입, 부당노동행위에 대항할 하청노동자에 대한 노동조합 활동 보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생명·안전 업무기준의 수립·이행 등을 이제라도 살펴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한 해 수만명에 달하는 산업재해 피해 책임만 하청에서 원청으로 바뀔 뿐 사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누구나 안전하게 일할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고 김용균씨가 남긴 과제도 영원히 풀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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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지난 2년 동안 100년 전쯤의 역사를 더듬었다. 우리 근대사는 들어갈수록 어둡고 습했다. 더욱이 ‘3·1독립선언’ 부근은 쉽게 지나갈 수 없었다. 숱한 죽음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의 어떤 진혼가로도 잠들게 할 수 없는 죽음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표현대로 3·1만세시위는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로 대신한 창세기 이래 미증유의 맨손혁명’이었다. 지도자도 없고 주도세력도 없었다. 모두 ‘대한 독립 만세’만을 외쳤다. 망국의 땅에서 백성들이 서원한 ‘육자진언(六字眞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주문이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취조를 받던 양한묵(梁漢默) 민족대표가 급사했다. 아들은 고문으로 숨진 아버지 시신을 받아 인력거에 실었다. 눈물을 뿌리며 집으로 가던 아들은 종로 네거리에서 인력거를 세웠다. 그리고 홀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버지가 왜 죽었느냐고 소리치던 아들도 결국 맞아죽었다.   

전라도 남원에서는 수만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흰옷이 물결을 이뤄 삼십리에 뻗쳤다. 왜경의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흰옷이 붉게 물들었다. 방(房)씨 성을 가진 사내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비보를 접한 아내가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갔다. 왜병에게 붙잡힌 아내는 칼을 물고 자결했다.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노모 또한 하늘을 원망하며 목숨을 끊었다.  

“하느님이시여, 이 지경이 되도록 어찌 가만 계십니까.”

평안도 철산에서 만세를 부르던 열네 살 소년이 총상을 입었다. 소년은 홀어미의 외아들이었다. 어머니 품 안에서 숨을 거두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 가슴속의 피가 불덩이가 될 것이니 저들의 섬나라를 불태우겠습니다.”

온 마을과 산하가 피로 물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이름을 남긴 사람은 그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못했)다. 유일하게 박은식만이 바람이 전하는 소식을 모았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그야말로 피에 젖은 혈사(血史)이다. 늙은 학자는 ‘오장을 칼로 에어내는 듯하고 말보다 눈물이 앞서’ 붓 든 손을 떨어야 했다.

그는 유일하게 당시 피해상황을 집계해서 역사에 남겼다. 독립선언 이후 3개월 동안 202만명이 넘게 집회에 참가해서 죽은 자가 7509명, 다친 자가 1만5961명이었다. 그러나 남모르게 죽어간 사람들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박은식은 조선인이었기에 죽어야 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경배하고 있다. 피를 닦아내고 역사 속에 누였다. 누군가 죽어서 만세시위는 혁명이 될 수 있었다.

‘저 풀을 보라. 들불이 다 불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난다.’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죽어서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결국 죽은 자들이 세상을 끌고 왔다. 죽은 자들이 낸 길을 따라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이름 없는 무덤, 허물어진 무덤을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독립투사 후손은 극소수이고, 친일파 자손들도 소수이다. 우리 대다수는 현실에 둔감하거나 용기가 없어서, 또는 운이 좋거나 비겁해서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다. 죽은 자들이 대신 죽어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무덤을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살아도 죽은 이들이었다. 아픔과 한이 가득했던 무덤을 헤치고 나와 진실을 말하고 야만의 시간을 증언했다. 특히 김복동 할머니는 진정한 용서와 평화가 무엇인지를 우리 가슴에 심어주었다. 혼자였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무덤 속에 있는 전쟁 위안부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단단해졌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들을 대신하여 주먹을 쥐고 당당히 외쳤다.  

산 자들이 김복동 할머니를 묻었다. 이제 할머니는 소원대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 혼자만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는 아직 해방을 맞지 않았다.”

그 말이 어찌 일본만을 향한 것이겠는가. 실상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긴 말이다. 아직도 제 나라와 민족이 귀한 줄 모르는 대한민국에 남긴 말이다. 할머니는 모두가 함께 날아오를 그날을 위해 자신의 날개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 날개는 맑고 고울 것이다. 저 차디찬 무덤 속의 할머니들이 모두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날은 언제인가. 수없이 많은 날갯짓으로 하늘이 열릴 날은 언제인가.  

봄이 오고 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100번째의 봄, 죽은 자들을 기억하라. 그들의 말을 들으라.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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