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에는 두 달 가까이 경주 왕릉 전체를 돌아봤고, 2017년 봄에도 경주의 들판이나 산을 가리지 않고 서 있는 석탑을 찾아다녔다. 그러고 2018년 가을에는 경주 남산을 골골샅샅 오르내렸다. 난분분 벚꽃이 흩날릴 때면 끝이 날까. 올해도 2월부터 경주에 널린 폐사지(廢寺址), 곧 절이 있다가 허물어져 버린 절터를 찾아다니고 있다.

절터들도 대개 대여섯 차례씩 머물렀던 곳들이며 수십 차례나 드나든 곳도 부지기수다. 그렇게 뻔질나게 경주에 드나든 지 35년,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경주는 여전히 나를 매료시키고 또 흥분시키며 놀라게 만드는 경이로운 도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흥분과 놀라움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에는 환희에 찬 놀라움이었지만 21세기가 되면서부터는 앞에 말한 놀라움과는 결이 다른 당황스러운 적이 더 많았으며 올해는 많은 곳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2006년 봄이었다. 벚꽃이 질 때쯤이면 찾아가던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을 그 해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암자를 지나 고개를 드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사각형 바위의 네 면에 각각 아름다운 불국토를 표현한 마애조상군의 북쪽 면 앞에 있던 벚나무가 없어져 버린 때문이다. 유독 꽃 질 무렵에 그곳에 갔던 까닭은 키 큰 벚나무의 꽃잎이 천개(天蓋)를 쓴 부처가 새겨진 바위를 어루만지며 나풀나풀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이른 아침이면 맑은 볕을 머금은 꽃잎은 투명하게 빛을 발하였으니 서로 다른 종교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감동적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맘때 나는 나라 안 마애불 답사를 얼추 마친 후였다. 그럼에도 굳이 그곳을 찾았던 까닭은 봄마다 유독 아름다운 헌화공양을 받는 마애불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탑골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장면을 찾아간 것이었지만 나무는 이미 잘려 나가고 없었다. 망연자실이었다. 유적이란 그것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주위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빛나는 경우가 많다. 마애불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마애불은 움직일 수 없는 붙박이인 부동산이어서 주위의 자연환경 덕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나무건 허공이건 서로 어우러져야만 더욱 빛나는 것이다. 물론 관리의 어려움을 말할 수는 있다. 나무로 인하여 생기는 그늘 때문에 바위에 이끼가 쉬이 자란다든지 하는 등의 이유로 잘랐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했는지 되묻고 싶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의 경우도 달라졌다. 겨우 방문객들의 안전을 위한 울타리를 쳤을 뿐인데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아름다움은 디테일이 엄격하다. 그곳은 토함산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고 바위 위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 붉은 동살을 머금은 보살상을 바라보려 컴컴한 어둠도 마다않고 올랐던 곳이다. 새벽놀이 짙은 미명에 보살상 앞에 앉아 바라보던 중중무진의 허공은 천변만화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었다. 곧, 신선암 마애보살상의 아름다움은 보살상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허공에 있는 것이다. 이른 새벽 그의 아래에 앉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며 잠시라도 가부좌를 하면 머릿속 묵은 먼지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 그 자리에 다시 앉았더니 눈앞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렇듯 경주의 아름다움은 나무 한 그루나 말뚝 하나로도 달라질 만큼 섬세하다. 그런데 올해 경주를 쏘다니며 몇 차례나 되뇐 말은 ‘아!’라는 탄식조의 감탄사와 ‘굳이’ ‘구태여’ ‘왜’와 같은 부사들이다. 불현듯 마주친 모습이 예전과 달라진 곳에서는 감탄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고 돌아설 때는 부사들이 혼잣말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런 일이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경주가 변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변화로 인하여 도시가 발전을 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변한다는 것이 반드시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시마다 제각각의 성격이 있고 그 개성으로 인하여 주목을 받는다. 개성은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경주처럼 나라 안 여느 도시가 결코 흉내 내지 못하는 인문조건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경주는 도시 한가운데에 왕릉이 수십 기나 솟아있고, 거니는 곳곳에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유적들이 즐비하다. 또 도심과 맞닿은 남산은 한발 한발 뗄 때마다 불교 유적과 마주치니 환희에 찬 곳이다. 경주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올해 봄 가장 놀랐던 일은 천관사터(天官寺址)로 향할 때였다. 김유신이 말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는 잔혹한 이야기가 서린 절터에 무엇인가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복원하고 있는 삼층석탑이었는데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이형(異形) 석탑으로 손꼽힐 사각형의 기단에 팔각형 지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앞에 말했듯 너무도 달라진 절터의 모습이 서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관사터는 약과였다. 머뭇대다가 몸을 돌리니 찬란한 월정교(月淨橋)가 남천에 걸려 있었다. ‘아!’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벅수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과연 저것이 신라의 양식으로 만든 다리일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전 단박에 꼴불견이었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신라의 아름다움은 지독하리만치 정밀하여 엄격하다고 말이다.

경주시에 묻고 싶다. 과연 저 월정교가 신라의 다리가 맞느냐고 말이다. 복원을 핑계 댄 어설픈 재현으로 마치 신라인 듯 포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지난해도 그랬고 지난해도 그랬지만 올해 봄 경주는 모내기를 하려고 물을 대 놓은 논과 같다. 그래서 걷기가 불편하다. 빠진 발은 천근만근이고 천관사터와 월정교 앞에서 허물어진 마음이 고약하게 불거지는데 달랠 방법이 없다. 종일 꽃나무 아래에 앉아있으면 괜찮아지려나. 얼른 벚꽃이라도 활짝 피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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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2018년 10월4일 유은혜 장관 취임과 더불어 유치원 방과후 과정에서 ‘놀이 중심 영어’를 허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는 이전 김상곤 교육부 장관이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금지에 관한 법 시행을 1년 유예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이러한 중요한 영어 관련 정책들이 충분한 학술 및 현장 연구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제한하기로 하였다가 허용되는 등 체계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특히, 현재 초등학교 1·2학년은 선행학습을 금지하고 있는 공교육정상화법에 따라 2018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서 영어교육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관련 법안 또한 국회에 여전히 계류 중이다. 당장 이번 주부터 신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유치원에서 영어를 접한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과후에도 영어를 여전히 배울 수 없게 되어 있다. 결국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학원 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책을 내놓은 교육행정의 결과가 학교 영어교육을 갈팡질팡하게 하고, 학부모들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사립유치원 개학연기 사태에 대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행정절차도 문제이지만, 교육적 관점에서도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 많다. 그동안 10세 이전에는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교육부의 유치원 방과후 ‘놀이 중심 영어’ 허용을 통해, 영어 시작 연령이 5세(만 3세)로 낮춰졌다. 교육부가 학부모들의 의견 수렴과 요구를 통해 허용하였다고는 하지만, 5세 아동의 언어적, 인지적, 심리 및 정의적 영역 발달에 대한 교육적 연구를 얼마만큼 기반으로 하여 이 정책을 내놓았는지도 의심스럽다.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허용과 관련하여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부분이 놀이식 교육이다. 유아교육에서 놀이교육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놀이 중심 영어’는 놀이교육이 중심이 되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야 한다. 아동의 언어 및 전체적인 영역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아동의 연령에 따른 방법론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교육부의 방향대로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가 허용된다면, 이를 어떤 철학을 가지고 개념화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유치원 ‘놀이 중심 영어’와 초등학교 3·4학년 영어과 교육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 과정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교육적 큰 틀의 개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고, 없다면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문가들이 해야 할 또 다른 시급한 일들이 있다. 우선, 유치원의 방과후 특성화 프로그램에 대한 조사와 각 유치원의 영어프로그램에 관련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5세부터 7세까지 연령별 수준에 맞는 놀이식 영어교육에 관한 세부 운영기준을 이론적·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놀이식 영어교육과 관련해서는 영어전담 회화강사와 같은 제도보다는 현 유치원 교사의 연수가 우선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성격과 교육방법이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유은혜 장관의 말대로 교육에 있어 중요한 주체가 학부모와 학교일 수 있고, 이들과 활발한 소통을 통해 정책을 시행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의 대상인 학생들이다.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영역의 교육은 루소의 철학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아동들이 배움의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면 효율이 떨어지고,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교육에서 무언가 가르치는 것을 제한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적절한 시기에 호기심을 갖고 배움을 쌓아가도록 환경과 내용,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선호 | 서울교대 교수 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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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선수가 되길 바라는 운동부 학생이 꼭 교실에 들어가야 되는가?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업을 따라가기도 어렵고, 그래서 아마 책상에 엎어져 잠을 자는 수가 많을 텐데 굳이 교실에? 이렇게 또 반문해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다. 그렇기는 해도 일단 교실에 ‘들어가야만’ 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현행의 학교 또 교실이 어떤 풍경인가를. 이른바 전인교육은 찾아보기 어렵고 결국은 바늘끝만 한 입시 지옥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 그래서 꽤 많은 학생들이 정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 채 잠을 자는 수가 많고 심지어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도 부분적으로는 학원에서 맹진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다들 교실에는 들어간다. 운동하는 학생이라고 해서 교실 밖을 전전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거창한 교육적 가치나 숭고한 이념이나 적절한 현실적 이유 등을 다 떠나서, 오로지 단 한 가지 이유뿐이다. 기존의 온갖 스포츠 제도가 반강제로 강요하는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기에 학교에서 고립되면 어른이 된 후 사회에서도 고립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러면 안된다. 한 인간이 운동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학교로부터 고립되고, 장차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이른바 ‘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오해와 편견에 갇혀 살아서도 안된다. 수학을 조금 잘하는 친구들, 피아노를 조금 잘 치는 친구들, 과학을 조금  더 좋아하는 친구들. 그들은 모두 학교에 있다. 학교에서 여러 교과목을 배우면서 저마다의 진로 또한 준비한다. 그런데 왜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은 고립되어야 하는가.

나는 조재범 전 코치의 폭행 및 성폭력 사건을 비롯하여 숱하게 발생하는 스포츠계의 수많은 문제들은 이렇게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와 사회라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부터 이탈하고 고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학창 시절’에서 이탈한 선수들은 성인이 되어 ‘국가대표’라는 비좁은 통로로 들어가서는 점점 이 사회의 폭넓은 관계와 정서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오직 국위 선양의 국가주의 패러다임에만 몰두했던 수십년 한국 스포츠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이 ‘사회화’ 과정을 이루지 못했다. 반강제적인 ‘이탈’과 ‘고립’에 의하여 스포츠계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리그에는 그 사회의 기본적인 상식이나 관념이나 정서가 스며들기 어렵다.

비록 현실의 학교가 부족한 구석이 많고 더러 비교육적인 파행이 벌어지는 곳이기는 해도 일단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교육적이다. 잠을 깨워주는 친구도 있고 어울려 밥을 같이 먹는 친구도 있다. 성격도 다르고 희망도 다르고 감수성도 다른 친구들, 그 생활의 공동체 안에서 사람은 성장한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 나왔을 때도,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감수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무엇보다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은 기본적인 언어 활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집과 학교에서, 특히 ‘교실’에서 수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체득하는 것이다.

박찬호 선수는 미국에 진출했을 때 코치들이 쉼없이 자기에게 질문을 했고 자신은 그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만 반복했음을 떠올린 적 있다. 실은 잘못을 추궁한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던졌는가’를 질문한 것이고,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들의 뜻을 자연스럽게 피력하는 모습에서 박찬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기성용 선수는 중학교 때 호주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의 또래 친구들이 심지어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코치 선생님들과 팔짱을 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박찬호나 기성용 정도면, 이미 성장기에 출중한 기량을 드러냈을 텐데, 국내의 스포츠 ‘훈육’ 환경에서는, 스스로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스포츠야말로 생활 공동체에 긍정적인 기운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포츠는 현대 사회의 거대한 고립을 해체하고 서로 능동적으로 섞여서 일상을 활기차게 만든다. 적극적인 신체활동과 교류는 날로 피폐해지고 고립되어 가는 현대적 삶의 불안을 치유한다.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혹은 같은 종목을 선호하는 사람들끼리 스포츠를 통해 활력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교류를 하는 것, 오늘날 한국 사회가 스포츠계에 바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새로운 지도자상이다.

스포츠 문화를 ‘혁신’한다는 것은 폭행 및 성폭력의 조건을 개선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를 고쳐서 ‘고립’의 시대를 끝내는 데 있다. 이로써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 씻어질 것이며 스포츠가 사회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각 종목의 지도자들은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내자’는 나의 호소를, 여러 현실론을 근거로 얼핏 외면하기는 해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학교로부터 고립되고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몸소 체험했던 대다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제자와 자식들이 폐쇄된 위계질서에 편입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공동체에서 적절한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존중을 받았으면 하는 그 애틋한 마음들, 그것의 현실화가 스포츠계의 혁신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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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내가 방송사 시험을 보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PD 지망생들은 방송사 작문 시험을 위해 스터디를 만들어 대비해왔다. 작문 스터디는 나름 전통 있는 준비법이다. 그런데 나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그 흔한 작문 스터디는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강권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작문 스터디에 들어가면 모일 때마다 글을 한 편 쓴다. 부원들이 돌아가며 주제를 내면 대략 한 시간 동안 글을 써서 내야 한다. 낯선 주제를 소화하기 위해 끙끙거리다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만족스럽지 못한 원고들을 모아 복사해 읽고 돌아가며 피드백을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원고를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원고는 늘어나지만 실력은 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학생이 많다.

약간의 변형은 있겠으나 이런 패턴은 스터디마다 대동소이하다. 사실 작문 준비를 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이유는 스터디 방식이 글 쓰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말하고 싶은 얘기를 간절하게 전하는 과정을 통해 향상된다. 연애편지와 비교해보자. 우선 구애라는 목적이 있다.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인다. 너무 늦게 편지를 주면 인연을 놓칠 수 있고 급히 주면 글이 한심하여 부끄러울 수 있다. 그래서 글을 마치는 시간도 고민 끝에 정한다. 나름 최상의 글을 쓰기 위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다. 관련 서적도 뒤져본다. 그러다보면 대충 봤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신(2막2장)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왜 이 작품이 세기를 거듭하며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다. 한편 자신의 글은 전보다 더 작아 보인다. 그만큼 보는 눈이 열린 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작문의 결과 역시 현실적이다. 편지가 모든 것을 좌우하진 않지만 그 역할이 어땠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퇴짜를 맞으면 글을 다시 곱씹으며 다음 기회에 더 나아지길 바란다. 그런 과정에서 글은 조금씩 늘어간다. 어떤 목적을 두고 글을 쓰다보면 글 좀 쓴다는 소리도 머지않아 들을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자료를 찾는 것부터 글을 쓰고 다듬고 또 다듬으며 냉정한 독자 앞에서 벌거벗겨져 평가를 받는 모든 과정이 글을 쓰는 일이다. 준비도 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이나 욕망 없이 쓰고, 거기에 동료의 피드백을 받은 후 다시 쓰지도 않은 글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문 스터디는 시험을 모사하고 있다. 결국 시험이란 환경 아래서 글을 써야 하니 그런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보편화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경쟁률이 지망생들을 숨 막히게 만든다. 열에 하나가 필기시험에 통과한다니 대단한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고수들의 혈투를 예상하겠지만 사실 ‘어느 정도 말만 되면 통과’하는 게 작문 전형이다.

시험 문제가 상당히 어려운 것도 시험 대비에 집착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가끔 출제자가 개인의 창의력을 과시하고자 현직 PD도 못 풀 문제를 내놓기도 한다. 곡예를 하려면 남다른 훈련이 필요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기본 실력이 없는 사람이 시험장에서 마술을 부릴 수는 없다.

사실 이런 스터디 문화가 수십 년 이어진 이유는 보다 깊은 곳에 있다. 학생들은 시험이 아닌 때에 글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니 글은 원래 시험 보듯 쓰는 것이라 착각한다. 어릴 적부터 글은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그리 해도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D들 중에 언론고시생 생활을 하지 않고 단박에 입사한 이들이 꽤 많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쓴다고 헤매고, 평론가 되려고 끙끙거리다 어느 날 시험장 갔다 덜컥덜컥 합격하는 거다.

PD 지망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좀처럼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들은 시험이라는 게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듯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라고 하면 등에 식은땀부터 난다. 시험으로 글쓰기를 공부하며 생긴 내상 때문일 것이다. 글은 잘 쓰는 사람만 쓰는 것도 아니고,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쓰려면 시험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 앞으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도, 아주 오래전 시험을 봤던 사람도.

<김신완 MBC PD·<아빠가되는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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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들을 기회가 있었다. 교사 모임에서 들은 말은 두려움, 걱정, 불안, 막막함, 설렘, 기대, 희망 등의 단어였고 학생들에게 들은 말도 비슷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떤 단어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가였다. 개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과 두려움 사이 긴장을 견디며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 좀 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작하는 3월이고 싶다.

올해 혁신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업무와 회의가 많아 힘들다고 가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고, 동료 교사들과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힘든 만큼 성장과 보람도 있다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민이 될 때는 어려워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후회를 덜 남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혁신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개학을 앞두고 전체 교사가 일주일 동안 신학기 준비 연수를 하면서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학교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고 일년 교육과정을 전체, 학년, 교과 등의 다양한 얼개로 짜맞춰 갔다. 힘든 만큼 개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이 가시고 그 공간에 기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1월 28일 개학한 서울 강서구 공항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방학 동안 자란 키를 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학교마다 독특한 분위기에서 업무분장과 한 해 준비를 하는데 아쉬운 것은 늘 일 중심으로 먼저 다가가는 것이고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누가 무슨 일을 맡을 것인가?’가 우선이다 보면 존재로 다가가기보다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학생부장 등 기피하는 업무는 전입, 신규, 기간제 교사에게 맡기는 것을 묵인하게 되고, ‘나도 전입 첫해에는 그랬어’라고 자위하지만 그 결과로 미안함 속에 자신을 가두며 서로 외로워져 간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배정하고, 기존 구성원들이 전입, 신규 교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일을 조정한다면 감사의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행히 그러한 바람을 올해는 경험할 수 있었다.

개학하기 전 함께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개학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학기 초부터 업무와 수업에 쫓겨 정작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쏟기 어려워진다. 그동안 개학 준비 기간이 필요함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한마음 한뜻으로 실행하는 데는 구성원들의 입장 차이가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새 학교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연수를 함께하고 나니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하니 좋은 것을’ 하는 마음이 든다.

‘환대란 본질적으로 문턱을 넘게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이반 일리치는 말했다. 공동체가 새 구성원을 맞이할 때 말로 하는 환대가 아니라 배려와 존중이 느껴지는 환대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낯섦으로 망설이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새 학기를 맞아 아이들은 어떤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게 될까? 나를 어떻게 여길까? 받아들여질까?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등굣길에 오른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새로운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구성원들에게 연결감을 느끼고 서로 받아들여진다는,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학교가 낯선 타자들의 삭막한 공간이 아니라 따뜻하고 존중과 배려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환대해야 할까? 낯선 환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에는 긴장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환대가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할지라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손연일 월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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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의 지니가 짠 나타나 “소원을 말해봐~!” 했다면 뭘 빌겠습니까? 로또 1등? 만수르 아들? 김태희와 한가인을 합친 외모? 지니가 그러겠네요. “소심하긴. 지구 정복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하찮아. 없던 걸로 해.”(펑! 뭉게뭉게) 갑작스레 소원을 말해보라 하면 많은 이들이 평소 생각해둔 것밖에 말 못합니다. 그게 자기 일생에서 당장 꿈꿔볼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소원을 말해보라는 것은 꿈을 이루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소원이 로또 당첨이라면 그저 놀고먹고 즐기는 게 인생의 목표요, 평생 품은 꿈이란 말밖에 더 되겠습니까?

어느 날 진이란 성을 가진 갑부 양반이 마을을 걷다 거지와 마주쳤다고 합시다. 측은해서 묻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내 꼭 들어주겠노라.” 거지가 이 무슨 횡재냐며 감격에 겨워 고합니다. “아이구 나으리, 쇤네는 누룽지라도 배 터지게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요.” 이걸 듣고 다들 ‘아유, 저 바보!’ 할 겁니다. 하지만 거지가 당장의 배부름 이상을 생각 못하듯, 많은 이들도 자기가 처한 상황과 감히 올려다보는 수준밖에 소원을 못 떠올립니다.

꼴찌만 하는 학생의 소원이 전교 1등일 리 있겠습니까? 반타작이라도 했으면 좋겠다죠. 목표가 반타작이니 반타작도 못합니다. 반타작만큼만 노력할 테니까요.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바라는 게 너무 하찮을 때 쓰는 말입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감히 청하진 못했으나 꼭 바란 것)이오만… 하길래 잔뜩 긴장하고 뭐냐 물으니 “엄마, 나 100원만!” 면접 때 비전을 왜 묻겠습니까. 소원(小願)인지 대원(大願)인지, 품은 기대치에 따른 의욕을 보자는 거죠. 당신은 평생소원, 어디까지 빌어봤습니까? 쫌! 돈 말고요!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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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시청역 1번 출구를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정동교회를 지난다. 그 길 끝에 경향신문이 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바닥을 수놓는 아름다운 출근길이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한 숙연함이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혼란스러웠던 구한말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길에는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있고, 아관파천의 무대였던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고, 을사늑약을 맺은 중명전이 있다. 또 유관순 열사 동상이 교정을 지키는 이화여고가 있다.

얼마 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하얀 천이 쳐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종황제의 국장을 재연한 것이라고 했다. 고작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에 왕이 있었고, 주권 잃은 왕의 타살 의혹에 민중들은 분노했다. 이 땅은 일제 치하였고 우리글과 우리말을 맘껏 쓰지 못했다. 언제 광복이 될지, 아니 광복이 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1919년 그날 태극기 하나 들고 맨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한 용기다.

3·1 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난달 24일 덕수궁을 흰 천으로 둘러싸 고종 장례를 재현하는 <백년 만의 국장> 전시 준비가 한창이다. 이석우 기자

어쩌면 올 3·1절은 한반도의 축제가 될 뻔했다. 앞선 2월27~28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긴 진통 끝에 성사된 만남이었기에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은 경제적으로 큰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덕담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넬 때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합의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따리가 부족했을 수도, 김 위원장의 요구가 과했을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담대한 성과를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결과다.

반면 북·미 회담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은 “나쁜 결과보다는 결렬이 낫다”며 빈손 결과를 환영하고 있다. 놀랄 일은 아니다. 100년 전에도 ‘그런다고 광복이 될 줄 아느냐’며 독립운동에 냉소적인 사람들은 있었다. 심지어는 일제에 붙어 부역을 한 조선인 순사도 있었다. 미래는 단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역사는 언제나 절실한 자들의 몫이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직전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하는데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생각보다 난제가 많아 큰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렇더라도 실망하지는 마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다시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또 한발 전진한 것”이라고 했다. 나라 밖에서 보는 한반도 정세는 냉정했다.

북·미 정상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진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트위터에 올렸다는 시 한 편이 올라왔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이던 2015년 10월28일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에 2 대 15로 대패하고 올린 안도현 시인의 시다.

‘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 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3·1운동 이후 광복까지도 26년이 걸렸다. 한두 번의 훈풍으로 70년간 굳어진 고드름이 단번에 녹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일지 모른다. 고약한 꽃샘추위에 조금 녹다가 다시 얼고, 다시 얼었다 또 녹으면서 고드름은 봄을 맞는다.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도, 남북 철도 연결도 그렇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덕수궁 돌담길 은행나무 끝에 움이 살짝 텄다. 제비 한 마리 온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제비가 와야 봄이 온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지지배배 웃으며 헤어졌다. 봄은 올 것이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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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허공의 한 자리를 차지하신 외할머니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은 공일(空日)이다. 거문고에 능한 친구와 휴일의 오후에 인왕산으로 향했다. 지하에서 올라와 선바위를 향하는데 굿당 벽에 무학대사의 오도송이 적혀 있다. 靑山綠水眞我面 明月淸風誰主人(푸른 산 푸른 물은 나의 참모습이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은 누가 주인인가).

칠언절구 중에서도 열한 번째의 바람 풍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건 최근의 한 생각 때문이다. 바람 풍(風)에 벌레 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벌레하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제야 그 빤한 사실을 접수하게 되었을까. 바람에 벌레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바람소리가 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사물들과 부딪쳐 내는 소리다. 세상 만물에는 무언가 꿈틀거리고자 하는 벌레들이 숨어 있고 그래서 그들을 일깨우면 그것들이 일어나 이 세상을 발효시킬 것이라는 생각.

둥둥둥. 바람결에 실려오는 건 국사당에서 굿하는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궁리에서 펴낸 <만신 김금화>의 저자이신, 며칠 전 허공으로 거처를 옮기신 김금화 선생님(1931~2019)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면서 인왕산으로 내처 올라갔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귤과 삶은 계란을 건넸다. 배경으로 단가 ‘죽장망혜’를 틀어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미세먼지가 물결처럼 띠를 이루며 출렁출렁 시내를 훑으며 지나갔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다. 희미한 실핏줄 같은 등산로 옆 날망에 표지판이 있다. ‘위험해요.’ 암벽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주의사항을 설치해놓은 것이다. 위험이란 게 어디 지금 이 자리, 인왕산 정상에서만의 일일까. 정작 위험한 곳은 오히려 저곳이라고, 위험한 서울을 지그시 가리키는 팻말 옆에 나무가 있다. 바위를 거처로 삼아 자라는 날씬한 소나무 옆의 싸리였다. 가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나무. 작년의 잎과 작별하지도 못한 채 전신이 배배 꼬여 비를 기다리고 있는 싸리. 나무 안에 웅크린 벌레여, 잠시만 기다리게. 이제 곧 경칩(驚蟄)이네! 싸리, 콩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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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법원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의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법원의 송사에 이르게 되는 현실을 빗대어 생긴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의 뒷받침 없이 개혁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망했던 촛불의 힘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 어느덧 2년여가 되어간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전직 대통령은 수감되었고, 전직 사법부 수장 역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법적 제도와 구조적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15일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국정원·검찰·경찰 개혁은 정권의 이익이나 정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입법을 통한 개혁의 법제화와 제도화”를 요청했다. 대통령이 요구한다고 여소야대 국회가 쉽게 움직일 리 없고, 대통령부터 야당과 더 많은 대화와 타협을 시도해야 할 시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국회의 역할이 중요한 상황에서 국회가 보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방안 검토와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의 1월 임시국회 합의 처리 등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국민의 80%가 찬성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국정원 개혁 등 권력기관 개혁도 한국당의 발목잡기에 막혀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4월이면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진행될 것이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정치판의 모든 이슈가 선거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입법 개혁을 나 몰라라 하고, 불필요한 정쟁만을 반복하며 재판청탁, 채용청탁, 불필요한 외유와 성희롱, 심지어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5·18 망언’까지 일삼았지만, 반성하는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국회는 모든 개혁 법안이 집결되고, 논의되어 처리해야 하는 장소지만, 단 하나의 법안도 통과할 수 없는 적폐의 철옹성이 되어가고 있다. 대화와 타협은커녕 논의의 장 자체가 열리지 않는다. 이러고도 국회가 스스로 개혁의 주체를 자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무기력과 태만이다. 한국당은 애초부터 선거법 개혁 자체를 거부해왔지만,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었던 2015년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했고, 2017년에는 이 제도를 권역별로 도입한다는 대선 공약을 내걸었다. 그런데 여당이 되고, 당 대표가 새로 뽑히고 나자 무슨 계산인지 선거제도 개혁에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개혁에 애를 태우는데 집권여당이 이처럼 몸을 사리는 것은 아마도 당내 공천권을 행사하려는 세력의 노림수와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의원이 많은 탓일 게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 중 하나는 조조와 유비, 손권이 함께 자웅을 겨룬 ‘적벽대전’이다.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계책이 유난히 돋보이지만, 내게는 노숙이라는 고지식한 신하가 가장 돋보였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손권에게 항복을 권고했을 때, 동오의 장수와 신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천자를 앞세운 조조의 명분과 백만 대군의 위세에 짓눌려 그에게 항복을 권했다. 오로지 노숙만이 항복을 만류하며 분을 참지 못하고 손권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조조에게 항복하더라도 돌아갈 고향 땅이 있고 그곳에서 말단 관직이나마 차지할 수 있습니다만, 장군께서 항복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국민의 염원과 개혁의 열망을 뭉개고 앉아 지역구 예산만 챙기고, 공천 받아서 배지만 달면 되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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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의 ‘집단휴원’을 선언했던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한유총은 4일 오후 “개학연기 사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개학연기 투쟁’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한유총 지도부의 강행 방침에도 불구하고 이날 개학연기에 참여한 유치원이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교육부 집계 결과 실제 개학을 미룬 유치원은 전국 사립유치원 3875곳의 6.2%인 239곳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들 유치원도 90% 이상이 자체 돌봄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돌봄 대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독단과 아집으로 벼랑 끝 전술을 택한 한유총 지도부가 소속 회원들로부터 불신임당한 형국이다. 자업자득, 사필귀정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3월5일 (출처:경향신문DB)

한유총의 개학연기 투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한유총은 ‘집단휴원’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정부를 압박해 요구사항을 쟁취해왔다. 정부는 그때마다 보육대란을 우려해 타협책을 제시하며 갈등을 봉합했다. 하지만 상당수 사립유치원의 회계비리가 드러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사태 초기부터 정부가 ‘무관용’을 선언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했다. 서울시교육청은 한유총의 행태를 ‘공익을 해하는 행위’로 판단하고 법인 설립허가 취소를 결정했다. 교육부는 한유총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는 한편 시정명령에 따르지 않는 개별 유치원들도 형사고발하기로 했다. 여기에 시민의 80% 이상이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등 한유총의 집단이기주의에 등을 돌렸다. 학부모들이 집회를 열고 손해배상 소송인단을 모집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선 점도 한유총의 백기투항에 영향을 미쳤다. 시민과 정부의 단호한 대응이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은 것이다.

개학연기로 인한 혼란이 하루 만에 마무리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한유총이 개학연기를 철회하면서도 “유치원 3법과 유아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그대로 수용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걸 보면 불씨는 남았다고 봐야 한다. 정부는 사립유치원들이 다시 문을 여는 데 안도하지 말고, 유아교육의 새로운 틀을 짜는 작업에 진력해야 한다. 민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유아교육 현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학습권 침해 사태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오랜만에 정상화된 국회도 유치원 3법부터 조속히 통과시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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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보상 중재안에 합의한 이후 추가로 피해를 제보한 사람은 227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141명은 삼성전자로부터 어떠한 피해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중재안이 정한 대상 질병·사업장 요건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가 산재 신청도 어렵고, 설령 신청해도 보상 산정기간이 짧아 실익이 없다. 이 때문에 신청 포기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반올림은 14명에 대해서만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일하다 질병에 걸렸다면 사업주와 국가가 치료하고 보상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보상이 원천 봉쇄되고, 산재 신청조차 어렵다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3월 6일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던 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당시 23세)씨의 12주기 추모 행사가 지난 2일 속초 설악산 울산바위가 마주 보이는 신선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12년 전 설악산 울산바위에 딸의 유골을 뿌려 딸을 이곳에 잠들게 했다. 반올림 제공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반올림의 싸움은 2007년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씨 등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 등으로 사망한 사건이 계기였다. 반올림은 지금까지 43명의 산재 인정과 대법원의 ‘삼성 직업병’ 확정 판결 등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11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하면서 11년간 이어온 양측의 다툼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중재안은 대상 질병을 백혈병 등 74종으로, 대상자도 ‘삼성전자 반도체 LCD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및 사내협력업체 현직자와 퇴직자’로 한정했다. 협약 당시 반올림과 피해자 측은 “배제 없는 보상”을 요구했으나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삼성전자와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라”는 조정위의 압박으로 협약이 체결됐다고 한다.

조정위의 중재안은 삼성전자의 보상과 사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중재안으로 인해 보상 대상 밖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삼성전자 전·현직 노동자나, 삼성전자 외 사업장 피해자의 보상길이 막혔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사업주도 일터에서 발생하는 질병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인과관계가 드러나고 사고를 막을 대책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노동당국도 노동자가 일터에서 얻은 직업병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얻은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할 때 ‘제2의 황유미’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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