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수수 및 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석방됐다. 구속된 지 349일 만이다. 이 전 대통령의 항소심을 맡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1부는 구속 만기인 4월8일까지 선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주거 제한 등을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했다. 재판부는 “구속 만료 후 석방되면 주거·접촉 제한을 고려할 수 없어 오히려 증거인멸의 염려가 높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거액의 돈을 내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는 광경은 시민적 상식과 법감정에 어긋난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항소심이 시작된 이후 증인을 무더기로 신청하는 등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키려는 행태를 보여왔다. 당초 항소심을 맡았던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 측 꼼수를 분명히 차단하지 못한 채 4개월을 사실상 허송했다.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변경되면서 항소심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새로이 구성된 재판부는 결국 구속 만기 전 선고를 포기하고 이 전 대통령을 풀어주는 쪽을 택했다. 재판부도 형평성과 공정성 논란을 의식한 듯 보증금 10억원 납입, 자택으로 주거지 제한, 배우자·직계혈족·변호인 외 접견·통신 제한 등의 조건을 달기는 했다. 수면무호흡증 같은 건강상태는 보석 사유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법리적으로는 큰 흠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힘없는 시민의 눈에는 ‘유권무죄, 유전무죄’로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6일 오후 조건부 석방을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동부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은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처럼 무거운 범죄 혐의를 받는 이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경우에도 해당한다. 보석으로 불구속 상태가 된 이 전 대통령은 재수감을 면하기 위해 어떻게든 선고를 지연시키려 할 가능성이 크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에 휘둘리지 말고 단호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엄정하고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 중대 범죄 혐의자의 ‘외출’은 짧으면 짧을수록 정의에 부합한다.

정치권 인사들도 이 전 대통령이 풀려난 것을 기화로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거론하는 등 무분별한 주장을 제기해서는 곤란하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서 “2년간 장기 구금돼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석방도 기대한다”고 했는데, 가당치도 않다.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 재판을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은 보석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석방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별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이미 징역 2년이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자제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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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6일 최악의 미세먼지 사태에 대해 “중국에서 오는 미세먼지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협의해 긴급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했다. 한·중 공동으로 미세먼지 예보시스템을 운영하는 한편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도 함께 진행하라고 주문했다.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는 중국과 함께 인공강우를 실시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정부간 협의를 전제했지만 대통령이 직접 중국발 미세먼지 해결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바람직하다.

미세먼지가 지속된 6일 서울 서초구 한강시민공원을 지나는 시민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연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국내 미세먼지에 대한 중국 책임은 40~50% 정도로 추산된다. 이번 미세먼지 사태도 국내 대기가 정체돼 오염물질이 축적된 상태에서 미세먼지가 중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된 것이 주요인이다. 그러나 정부는 역대로 중국의 책임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지 못했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지난 5일 “중국이 한국의 미세먼지 상황 악화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했지만 중국은 이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중국 책임론을 입증할 근거를 내놓지 못한 탓이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국내에 얼마나 유입되는지를 알 수 있는 장거리 이동 대기오염물질(LTP)에 대한 이렇다 할 연구 결과가 없다. 별다른 오염원이 없는데도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제주도의 사례를 연구하는 등 중국 책임론을 입증할 수 있는 연구부터 서둘러야 한다. 중국과 인공강우를 공동 실시하는 것은 단기 처방이다. 그보다 중국의 과감한 미세먼지 조치를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은 2013년부터 대도시 차량 통행 제한과 석탄 난방 금지 등 강도 높은 대기오염방지 5년 계획을 실행해 성과를 거뒀다. 주요 도시 초미세 먼지 농도를 32% 떨어뜨렸다. 중국은 미세먼지 저감 대책을 요구할 대상이자 협력자인 셈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3월6일 (출처:경향신문DB)

중국을 상대로 실효성 있는 조치를 요구하되 국내 대책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 중국 당국자의 입에서 “우리는 대폭 개선됐는데 서울은 거꾸로 나빠졌다. 따라서 서울 미세 먼지는 중국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 문 대통령은 30년 이상된 석탄 화력발전소를 조기 폐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며 추경을 긴급 편성해 미세먼지 감축에 집중하라고 당부했다. 전 부처가 나서 총력 대응해야 한다. 정치권도 법령과 예산으로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미세먼지 문제 해결에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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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사회안전망개선위원회가 ‘한국형 실업부조’를 포함한 고용안전망 강화를 위한 합의문을 채택했다. 실업부조는 저소득층 구직자에게 취업 프로그램 참여를 조건으로 현금 급여를 하는 제도다. 정부는 내년 1월부터 한국형 실업부조를 시행할 계획이다. 합의대로 시행되면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던 중위소득 50% 이하 저소득층은 최저생계비 수준인 50만원을 6개월 동안 받게 된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일터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게 됐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합의문에는 ‘실업급여 현실화’ ‘고용서비스 인프라 확충’ 등 노동계 요구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 출산·육아 휴직자의 임금지원 확대와 소득기준 고용보험제도 개편 등도 추진키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안들이 시행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하위권에 있는 한국의 ‘탈상품화’ 수준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탈상품화는 국민이 노동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 복지국가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활용된다.

그러나 실업부조의 대상, 지원 수준 등은 기대에 못미쳐 아쉽다. 노동계는 “평균 임금의 25~30% 수준인 70만~85만원을 최대 24개월까지 지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축소된 것이다. 월 50만원의 보조금으로 6개월간 취업을 준비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부터 의구심이 든다. 설령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좋지 않은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정부 예산으로 직업훈련까지 받고 취업한 5명 중 4명이 1년도 못 버티고 그만둔 것도 짧은 준비기간 등 탓이었다. 특히 급여 대상은 ‘중위소득 60% 이하’였던 정부안보다도 후퇴했다. 사회안전망개선위는 “도입과정에서의 불확실성 때문에 안전하게 출발하겠다는 취지다”라고 설명했으나, 참사 수준의 고용현실과 사상 최대로 벌어진 빈부 격차 등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한국은 실업자의 재취업에 도움을 주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지출 비중’이 2016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0.37%로 OECD 평균인 0.54%에 크게 모자란다. ‘한국형 실업부조’의 시행까지, 논의할 시간은 남아있다. 고용 확대를 통한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하려면 노동시장정책 지출부터 과감하게 늘리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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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했던 사립유치원들의 ‘집단 개학연기’ 사태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부가 여론과 공권력을 등에 업고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를 몰아붙인 게 주효했다. 싸움의 핵심은 ‘소유권’이었다. 한유총은 일관되게 사립유치원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사적으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토지 사용료와 건물임대료를 정부에서 내야 한다고 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면, 국가 회계관리시스템인 에듀파인을 못 받겠다고 했다. 교육부는 펄쩍 뛰었다. 사립 초·중등학교에도 지불하지 않는 시설사용료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대신 학교처럼 유치원에도 취득세·재산세 면제 등의 혜택은 준다고 했다. 싸움은 교육부의 한판승으로 마무리됐다.

정부와 사립유치원 간의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한유총은 여전히 사유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에듀파인 가입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교육부가 될 것이다. 한유총이 해체의 위기에 있어서가 아니다. 국민들이 사립유치원을 바로 보게 됐기 때문이다. 사립유치원은 법률상 학교다. 영업이익을 내는 시설이 아니다. 앞으로 돈벌이를 위해 유치원을 짓고 운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가져다준 최대 성과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설립 허가 취소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유치원은 학교다. 유아교육법은 유치원을 ‘유아의 교육을 위하여 설립·운영되는 학교’로 정의한다. 유치원은 교육시설이다.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시설과 구분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관할 정부 부처가 다르다. 그러나 운영에서 두 시설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입학 대상 연령도 6세 미만으로 겹친다. 실제 유치원을 못 간 유아가 어린이집으로 가는 일은 흔하다. 일부 학부모들은 유치원을 어린이집과 같은 탁아시설로 생각한다. 심지어 사립유치원 설립자들조차도 유치원을 학교로 인식하지 않는다. 한유총의 인식이 보여주듯, 그들에게 유치원 운영은 경영이다. 유치원을 학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는 정부의 책임도 없지 않다. 교육부 관리들의 정책 순위에서 유치원은 초·중등학교에 밀린다. 아직 유치원을 교육 주체로 보는 시선은 많지 않다.

유치원의 역사는 1840년 독일 교육가 프뢰벨이 4~6세를 위한 예비학교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킨더가르텐은 ‘어린이 화원’이라는 뜻. 우리는 일본인들이 번역한 ‘유치원(幼稚園)’으로 수용했다. 프뢰벨은 유치원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유아교육론을 정립했다. 이처럼 유럽의 유치원은 시작부터 교육기관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유치원 시설과 함께 유아교육의 철학·내용·과정을 고민했다. 교육 과정과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지만, 유치원이 학교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1940년대 초 유치원을 다녔던 미국인 목사 로버트 풀검은 어른이 돼 자기계발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삶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유치원은 인생학교였다.

한국의 유치원 교육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다. 유치원 교육이 확산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부터다. 이후 유아 원생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교육시설과 교사 양성에 대한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사립유치원은 기하급수로 늘었다. 2004년 1월 유아교육법이 제정되면서 유치원은 법적으로 교육기관이 됐다. 교육 재정, 교원 지위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시설, 교사, 법령 등 하드웨어가 마련되면서 유아 학교로서의 체계를 갖췄다. 그러나 놓친 게 있었다. 유치원 교육에 대한 철학과 밑그림이다. 유아교육이 초등교육과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지, 유치원 교육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유치원의 정체성이 없으니 교육시설과 보육시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타박할 일은 아니다. 현행 유치원은 영어유치원, 놀이학교 등 유사 유치원과도 차별성이 없다.

유치원은 학교다. 학교는 학교다워야 한다. 유아교육에 대한 철학을 갖고 유치원에 어떤 가치를 담을지 고민해야 한다. 유아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살펴야 한다. 양질의 유아교육을 위해서는 유치원 교사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유아학교’로 바꾸는 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명칭 변경은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유아 교육의 정상화에도 부합한다. 한국 유치원 역사는 100여년을 헤아린다. 역사의 대부분을 유치원의 확충과 관리에 치중했다. 유치원 교육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시설확충이나 투명한 재정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유치원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교육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는 유아 교육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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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은 공포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유토피아를 향한 꿈도 불멸이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를 다스린 위대한 왕 길가메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모험에 나선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시두리라는 여인은 말한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습니다.” 생명은 인간의 것이되 죽음은 신들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후 세계를 믿었던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자(死者)들이 안전하게 내세로 갈 수 있도록 가이드북을 넣어 두었다. 그것이 ‘사자의 서’다. 죄가 많으면 아뮤트에게 잡아먹히고, 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 사자의 서는 영생의 꿈을 담은 것이다. 생명체의 생존본능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생명체의) 유전자는 절멸하지 않는 생존기술의 명수”라면서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라고 단정했다. 이에 따르면 인간에게 생존은 본능이며, 자살은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조력자살을 돕는 국제단체인 디그니타스에서 2명의 한국인이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서울신문은 조력자살이 허용된 스위스에서 2016년, 2018년 1명씩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곳을 포함한 2곳의 조력자살 기관에 한국인 회원이 107명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사망 내역이 밝혀진 1명은 공무원 출신의 40대 남성 말기암 환자다. 그는 외국인 조력자살이 이뤄지는 취리히의 ‘블루 하우스’라는 2층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조력자살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에서 허용된다. 특히 스위스에서는 말기암 환자뿐 아니라 장애자, 노인, 정신질환자도 가능하다. 조력자살을 허용한 이유는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삶을 끝낼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환자에게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생명존중은 문명사회의 토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위엄과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도 있다. 생명존중과 자기결정권 사이의 충돌이다.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정의해야 할지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박종성 논설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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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라 삼짇날, 새 풀을 밟으면 꽃바람이 난다지. 아침부터 부지런한 농부 말고 군인들이 보였다. 옆 동네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데, 콩 볶는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한 달에 두어번 이질적인 총소리. 그래도 축사의 냄새보다는 낫지 싶어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그치기를 기다려본다.

우리나라는 한·미연합훈련을 하지 않아도 이미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 길거리에 가보면 ‘대포집’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선 폭탄주를 아무나 제조한다. 건너편 식당은 부대찌개. 길에 보면 총알택시가 쓩쓩 날아다닌다. 미세먼지 연막탄은 한 치 앞도 분간 못할 만큼 자욱하다. 무슨 가공할 미사일이 있어 미세먼지를 헤치고 명중을 하겠는가. 또 모두가 핵가족으로 각지에 흩어져 산다. 핵가족은 독재 아니라 독재 할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는다. 여기다가 공포의 흉가들이 마을마다 버티고 있다. 세기의 강심장들도 나가자빠진다.

우리 동네도 흉가에 폐가가 한 집 건너. 앞 동네는 너른 평지라 부자들이 별장을 짓고 난리 브루스인데 고갯마루 접어들면 노루 사슴이 기웃거리고 멧돼지가 괄괄거리는 산촌. 게다가 혼불이 출몰하는 빈집, 흉가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린다.

귀신은 자기 말만 한다. 할매들도 귀신이 되려고 자기 말만 하고 산다. 나는 글을 쓰니까 해소라도 하지만 말동무가 없으니 그러시는 거겠지. 귀신도 누가 들어주질 않으니 혼잣말로 시부렁거린다. 흉가에서는 씨부렁씨부렁 묘한 소리가 난다.

다행히 봄이면 그 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꽃바람 봄바람에 귀신도 참하고 순해지는 모양. 아가씨가 방구가 마려워 “자기야! 사랑해!” 큰소리를 지르며 동시에 뿡 싸질렀는데, “뭐라고? 방구 소리 때문에 안 들렸어.” 무안하게시리. 귀신 소리도 봄이 오는 소리 때문에 들릴락 말락. 금방 귀신의 계절 여름 칠팔월이 올 테고 그땐 살맛나게 떠들어대려무나. 흉가라도 있어 귀신도 살고, 어쩌면 다행이지 싶다. 귀신도 못 사는 세상이 더 무서운 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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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의 전성기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936년부터 1964년까지 29시즌 동안 월드시리즈에 22번 올랐고 16번 우승했다. 1940년대 양키스 감독이었던 조 매카시의 별명은 ‘테일 건’이었다. 비행기 뒤에 달린 기관총이다. 1970년대 양키스를 우승으로 이끈 빌리 마틴 감독의 별명은 ‘히틀러’다. 그 시절 야구 감독은 ‘권위’의 화신이었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재팬시리즈를 우승했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의 전후 부흥시기와 맞아떨어지며 요미우리는 ‘국민 구단’으로 떠올랐다. 그때 감독이 가와카미 데쓰하루였다. 일본 프로야구 첫번째 ‘제왕적 감독’이자 ‘관리야구’의 시초였다.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했다. 보안을 이유로 취재를 제한했고, 선수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 귀가시간을 확인했다. 뭘 하고 있는지는 물론 뭘 먹고 있는지도 감시했다.

관리야구는 한국야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엄한 표정과 카리스마로 스타 선수들을 장악할 수 있어야 팀워크가 유지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는 신화였다. ‘자율야구’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1994년 LG 트윈스의 우승 때였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야구를 보고 돌아온 이광환 감독은 관리 대신 선수들의 자율에 방점을 찍었다. 이 감독의 ‘파이브 스타 시스템’은 매 경기 감독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선수 기용이 아니라 정해진 틀 속에서 선수들이 자기 역할을 맡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그해 신인 3인방(유지현, 서용빈, 김재현)이 펄펄 날 수 있었던 것은 관리가 아니라 자율 덕분이었다. LG는 ‘신바람 야구’ 열풍과 함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25년 전의 일이다.

새해 들어 쇼트트랙 심석희의 용기 있는 ‘미투’로 스포츠계가 발칵 뒤집혔다. 전근대적인 합숙훈련이 문제의 이유로 지적됐다. 스포츠계는 반발했다. 합숙훈련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단체경기만이 아니라 개인경기도 합숙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경쟁함으로써 자극이 되고 이를 통해 실력이 는다는 논리였다.

논리는 빈약하고 근거는 부족하다. 합숙의 효과는 경기력 향상이 아니라 감시를 통한 권위의 확립, 유지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빌리지 않더라도 합숙은 통제를 낳고, 통제는 감시와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지켜보는 이와 감시받는 이의 위계는 엄격하다.

지난달 말, 쇼트트랙의 김건우는 동료 김예진에게 감기약을 전해주려 여자 선수 숙소에 들어갔다가 3개월 퇴촌, 국가대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훈련 관리지침’ 21조 일반수칙 1항 6 ‘남·여 지도자 및 선수는 남자 또는 여자 전용 숙소에 출입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위반했다. 성폭력 예방을 넘어 오래된 관리와 통제의 냄새가 짙다. 1항 5는 ‘촌 내에서는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착용을 원칙으로 하며, 생활 질서를 해치는 언행과 복장은 허용하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 심지어 관리지침 8조 2항 1은 국가대표 선수의 임무로 ‘촌 내외 생활과 훈련 중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을 규정했다. 이번 시즌 월드컵 금3, 은2을 딴 김건우와 전국동계체전 금3을 딴 김예진은 이번 징계로 대표선발전에도 못 나간다.

엘리트 스포츠 스타들의 경기력은 과학적 트레이닝 방식의 발전으로 임계점에 다다랐다. 한계를 넘게 하는 것은 통제를 통한 집중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통한 창의적 접근이다. 수영 박태환과 피겨 김연아는 되레 ‘선수촌’으로 상징되는 합숙과 통제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다. LPGA 무대를 주름잡는 한국 여자 골퍼들이 단체 합숙을 통해 실력을 키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부디, 효율을 핑계로 관리와 통제를 통해 제 권위를 지키려는 ‘꼰대’ 짓은 그만하자.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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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骨董)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미술품 또는 우아한 소품이란 뜻이 있지요. 그런데 자질구레해서 무어라 분류하기 어려운 옛날 물건이라는 뜻도 있어요. 골동에서 ‘예술적 가치’나 ‘우아함’이 빠지면 엿이랑 바꾸어 먹을 폐품에 가까운 고물이죠.”

새봄, 새순 올라오는 철이라 그런가. 비빔밥 이야기를 해달라는 분도 부쩍 늘었다. 어떤 분들은 비빔밥에다 굳이 오색오미, 오방색의 철학, 한식의 도(道) 등등 넘칠 지경의 수사(修辭)를 이미 깔고 물어온다. 이때 비빔밥의 한자 표현인 ‘골동반(骨董飯)’이 비빔밥의 가치와 우아함을 단박에 드러낼 마법의 어휘로 보이기도 하나 보다. 아마도 ‘골동’이란 말이 훈련된 취향과 점잖은 취미의 후광을 뿜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그 후광이 너무 세, 골동품과 고물 사이가 아주 좁다는 점은 또 생각지 못할 수도 있긴 하겠다.

논의를 한국 음식 문화사 속 비빔밥에 맞추면 19세기 홍석모의 저술 <동국세시기>가 참고가 될 만하다. <동국세시기>는 오늘날의 비빔국수 방식의 국수를 ‘골동면’이라고 했다. 아울러 중국 강남 사람들이 ‘반유반(盤遊飯)’을 잘 만든다고 했다. 반유반이란 찬합의 바닥에 생선식해, 육포, 회, 구이 따위를 깔고, 그 위에 밥을 퍼 담아 들고 나가는 도시락이다. 이것을 놀던 자리에서 비벼 먹는다. 홍석모는 골동면에 견줄 만한 밥의 ‘골동’이라고 했다. 이 뒤로 골동반이란 말은 많은 문헌에 등장한다. 일상의 말과 일상의 실제 행위로 비빔밥의 속성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

“대저 부빔(비빔)의 출처는 골동에서 나왔다. 장사꾼이 무슨 물건이든지 오래되고 파상(망가진)난 헌 넝마까지 벌려놓고 팔고 사는 곳을 골동가게라 한다. [중략] 부빔밥(비빔밥)은 여러 가지 잡되게 섞은 것을 말한다.” 근대의 스타 요리인 이용기가 1924년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실린 ‘부빔밥(비빔밥)’ 항목의 한 구절이다. 역시 충분하다. 음식에 관한 논의는 엄연한 물리적인 실제의 한 그릇에서 출발할 일이다. 말은 그 뒤를 따라오면 된다. 가령 홍석모와 동시대를 살다간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골동반 항목에다 나물, 생선회(숭어/갈치/준치), 생선구이(전어), 마른 새우 가루, 새우젓, 새우알, 게장, 달래, 오이, 구운 김 가루, 잘 익힌 매운 장 등 당시 사람들이 잘 먹는 비빔밥 재료를 소개했다.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비빔밥은, 밥상에 놓인 밥에다 어떤 재료고 숟가락, 젓가락, 손에 걸리는 대로 섞어 만든다. 만들기도, 먹기도 만만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요식업에 등장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 꼬막이든, 멍게든, 상추든, 콩나물이든, 심지어 물기 자작한 불고기를 더해서든 온갖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오히려 이규경의 기록에 이어지는 오늘날의 비빔밥 풍경이다.

유래도 기원도 어휘도 오늘날 내 앞에 놓인 구체적인 비빔밥의 입장에서 살핌이 옳다. 이때에도 그 음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관한 설명과 이해를 빠뜨리면 허무한 정보 나열을 벗어나기 어렵다. 비빔밥에서 간장, 고추장, 기름장,  기타 별미장이 한껏 풍미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라. 밥의 상태와 특정 재료에 맞는, 섬세한 장의 안배는 비빔밥 고도화의 가능성을 다시 연다. 생선회비빔밥에는 겨자장을 쓰기도 했다. 섬세하게 감각하면 참기름의 미각도 새삼스럽다. 참기름을 적절히 다루는 데서 진짜 향신유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재료와 재료가 따로 놀지 않도록 하는 달걀의 쓰임은 어떨까. 기름에 지질 뿐만 아니라 수란을 쓰기도 했다. 19세기 한글 조리서 <시의전서>에 따르면 비빔밥에다 양지와 갈비 육수를 바탕으로 해 끓이고 고명을 얹은 잡탕국을 붙여 한 상을 만들기도 했다. ‘걸리는 대로’라고 했지만 이를 ‘지역’과 ‘제철’과 ‘나의 기호와 취향’으로 바꿀 때, 비빔밥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쥔 음식이 된다. 번잡한 수사보다, 내 앞에 놓인 한 그릇 잘 살피기. 음식에서 이를 앞설 일은 없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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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한국이 빠른 경제성장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해온 석유화학산업은 지난해 수출액만 501억달러에 달해 총 수출액이 6000억달러를 돌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석유화학산업은 거의 모든 산업에 기초가 되는 국가 기간산업이자 전략산업이다. 그러나 석유화학산업의 원료가 되는 원유, 천연가스 등 화석원료는 고갈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어 왔다. 현재 속도로 쓴다면 원유는 약 51년, 천연가스는 53년 정도 사용할 양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물론 탐사기술의 발전으로 채굴 가능한 원유와 천연가스가 늘어남에 따라 현재 예측되는 사용연한이 확정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꺼내서 쓰는 속도가 생성속도보다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언젠가 고갈된다는 것이다. 현재 인류가 죽을 때까지는 고갈되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땅이나 바다 속에 오랜 기간 잘 묻혀 있던 원유와 천연가스를 꺼내 사용하여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급격하게 많이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전 세계가 미래의 화학산업인 바이오화학산업에 주목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바이오화학산업은 자연계에서 재생 가능한 형태로 자라고 번식하는 식물이나 미세조류와 같은 바이오매스를 원료로 우리에게 필요한 화학물질들을 생산하는 산업을 말한다. 즉 원유나 천연가스를 원료로 하는 대신 바이오매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다만 바이오화학산업을 발전시킨다고 식량자원을 원료로 사용하면 안되기 때문에 비식용바이오매스를 원료로 써야 한다. 원료가 확보되었으면 석유화학공장에 해당하는 바이오화학공장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문제와 안전 문제에서 자유로운 미생물이 이 역할을 한다. 즉 바이오매스로부터 유래한 포도당이나 설탕 등을 미생물 먹이로 주면 미생물이 대사활동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화학물질들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분리한 미생물들은 화학물질들을 효율적으로 생산하지 못한다. 이를 해결하는 공학기술이 대사공학(metabolic engineering)이다. 대사공학은  화학물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등의 목적을 가지고 생명체(바이오화학산업의 경우에는 미생물)의 대사회로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목적을 달성하는 행위 전체를 통칭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미생물의 대사회로도 여느 생명체처럼 자신에게 꼭 필요한 양만큼의 대사산물들을 만들어서 활용하다 보니 우리가 원하는 제품을 미생물들이 경제성이 있도록 효율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사공학을 통해 미생물 전체 대사회로를 이해하고,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도록 대사회로를 만들어 넣기도 하고, 최적화할 뿐 아니라, 세포는 원하더라도 우리는 원하지 않는 대사회로의 경우 없애버리거나 약화시키는 등 일련의 작업을 수행한다.

최근 문제가 크게 부각된 미세플라스틱 같은 경우 회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계에서 생분해되면 좋겠다. 미생물 중에는 천연 폴리에스터를 합성 축적하는 것들이 있다. 자연계에 포도당과 같은 탄소원은 풍부하고 질소나 인과 같이 필수 성장인자가 부족한 경우, 미생물 입장에서는 소중한 탄소원을 다른 미생물들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자신의 세포 안으로 얼른 들여와서 보관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탄소원을 세포 안으로 계속 들여오면 삼투압 문제가 생기므로 들여온 탄소원을 고분자로 바꾸어 보관하는 대사회로가 진화적으로 생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연 폴리에스터인 폴리하이드록시알카노에이트(PHA)라는 고분자이다. 나중에 필요시 세포 내에 축적했던 고분자를 분해하여 자라는 데 사용하므로 100% 생분해성이 있다. PHA를 합성하지 못하는 우리 장내세균인 대장균에 대사공학을 통해 세 가지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들을 생산하게 하고 대사회로를 최적화하면 PHA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 후 만들어진 대장균을 발효하면 우리가 원하는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강철보다 강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원료도 바이오화학 공정으로 생산할 수 있다. 양쪽 끝에 아민기가 붙은 다이아민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중요한 원료 중 하나다. 자연계에 있는 미생물들은 이 다이아민들을 자기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 사용하므로 생산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생물 내에서 대사회로를 조절하여 어느 이상 못 만들게 하는 조절인자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다이아민 생성에 관여하는 반응들을 강화시키고, 다이아민 생성과 경쟁하는 대사회로들을 없애버리는 대사공학을 통해 다이아민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양쪽 끝에 카르복실기가 붙은 다이애시드 경우도 유사한 방법으로 미생물을 대사공학적으로 개량해 생산할 수 있다. 미생물 발효로 생산한 다이아민과 다이애시드를 화학공정을 통해 중합하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100% 바이오 기반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4,858,000,000,000. 이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의 뒤에 ‘달러’만 붙이면 현재 전 세계 연간 화학산업 시장의 규모가 된다. 화석원료의 고갈과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바이오화학산업은 필수적이다. 에너지는 태양광, 풍력, 조력 등 다양한 재생 가능한 형태가 있지만, 화학물질은 태양과 바람, 물을 아무리 쳐다봐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산업의 쌀을 제공하며 우리나라의 국가기간산업인 석유화학산업은 미국발 셰일가스 기반의 화학산업과 원유만 공급하던 중동에서의 석유화학산업 확대 등으로 인해 나날이 심화된 경쟁에 처하고 있다. 당장은 바이오화학산업이 석유화학산업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기술개발 완성도가 낮은 바로 지금이 핵심 기술력을 확보할 때이고 미래 화학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래를 보고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 산업의 쌀을 모두 수입에 의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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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김용균씨가 사망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지난 4일 또 발전소 운전업무를 하는 하청노동자가 작업 중 장치에 끼여 전치 6주의 중상을 입었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김용균씨 사망 이후 생긴 2인 1조 근무수칙이 사람을 살렸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과 부상자 ㄱ씨(48)가 소속된 하청업체 한전산업개발이 사고 처리 과정에서 보인 행태를 보면 이곳이 불과 석달 전 온 나라를 슬픔에 빠뜨렸던 사고가 난 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ㄱ씨는 2호기 내에서 작업하던 중 석탄분배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보행로가 아닌 곳으로 피하려다 기계에 몸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고, 동료가 장치를 멈추는 풀코드를 당겨 구조하며 살 수 있었다. 김용균씨 사망 이후 서부발전이 안전시설을 대폭 보강했지만 사고 지점에는 출입금지 울타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원청인 서부발전은 책임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서부발전은 사고 다음날인 5일 “재해자가 보행공간이 아닌 곳으로 피하면서 사고가 났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다.

2월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영결식에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하지만 안전시설은 현장 작업자가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산업재해 발생위험 장소에서 작업할 때는 안전·보건 조치를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서부발전은 기자들에게 공개한 보도자료에 ㄱ씨의 동의 없이 실명을 기재하기까지 했다.

ㄱ씨가 소속된 한전산업개발의 대처도 허술했다. 한전산업개발은 사고 직후 ㄱ씨가 외관상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인다며 병원으로 이송하지도 않은 채 사고보고서를 썼다. 사고 1시간40분 만에야 ㄱ씨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매뉴얼에 따라 구급대원의 안전조치를 받도록 하지 않고 직원 승용차로 이송했다. 태안화력 3호기에서는 2017년 11월 40대 하청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개인차량으로 이송했다가 결국 사망에 이른 일이 있었다. 반복된 사고에서 누구도,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셈이다.

이번 사고 수습과정을 지켜본 한 정부 관계자는 “큰 사건을 겪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남지원 | 산업부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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