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광화문광장 인근에 갈 때는 마음을 단단히 해야 한다.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는 이스라엘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안된다. 또 고성능 스피커에서 나오는 연설은 듣지 말고, 깃발에 쓰인 구호는 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5·18은 북한 인민군의 폭동” “민족반역자 문재인 끌어내리자!” “박근혜 무죄 석방” “탄핵 무효”와 같은 주장과 구호는 이곳에서는 매우 점잖은 것들이다. 군인들에게 내란 선동하는 구호들도 튀어나오고, 누구누구를 찢어 죽이자는 험한 말도 난무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만 한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의 경연장을 찾기 힘들 것이다.

시대를 착각하게 하는 군가들도 들린다.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넘쳐나고, 그들 중에는 박정희 흉내를 낸다고 선글라스를 낀 이들도 많다. 황교안 대표의 당선을 축하하고 벌써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게 하소서”와 같은 목사의 기도 소리도 들린다. 성적인 설교로 유명해진 정광훈 목사가 대표로 있는 한기총이 태극기부대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북·미회담이 실패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공산주의를 무찔러야 한다는 주장은 단골 메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전하는 유튜브 채널만 믿는다. 1000만 유튜버들을 조직해서 승리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확증편향이 지배하는 게 이들의 세계다. 그러니 탄핵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며, 그것도 헌법재판소의 음모이므로 탄핵 결정 2주년 집회는 당연히 헌재 앞에서 열렸고, 헌재는 당장 사라져야 할 악마 기관이라 한다.

2년 전 헌재의 박근혜 탄핵 결정에 눈물 흘리며 승리를 자축했던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탄핵 결정 뒤에 잦아들 것이므로 무시하자고 했던 이른바 ‘태극기부대’가 촛불항쟁의 중심지인 광화문광장 일대를 매주 주말 점령하고 있다. 2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들은 지치지 않고 나오고 있고, 최근에는 오히려 세력이 더 강화되고 있다. 서울역, 대한문, 동아일보사, 동화면세점, 종각, 교보문고 앞 등에서 보다 극우적임을 경쟁하던 각각의 세력들은 집회 뒤에는 꼭 광화문광장을 한 바퀴씩 돈 다음에 해산한다. 매주 주말 광화문 일대는 이들의 집회와 시위로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그런 광화문광장의 초입에 세월호 천막이 있다. 세월호 참사 3개월 뒤인 2014년 7월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맨바닥에 앉아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40일간 단식을 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서 격려했던 곳이다. 교황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떼라는 한국 천주교 성직자에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뒤에 몽골 텐트가 들어섰고, 분향소와 전시관, 시민들의 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들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펼쳐지는 소중한 장소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항쟁은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발화된 항쟁은 끝내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요즘 매주 주말마다 이곳을 지키는 유가족과 시민들은 태극기부대 대오에서 날아오는 온갖 악담과 모욕들을 견뎌내야 한다. 지겹다, 이제 그만해라에서 빨갱이, 종북좌파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혀를 끌끌 차면서 “죽은 애들 앞세워 돈 뜯어내는 떼쟁이”라고도 한다. 경찰이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당장 천막 쪽으로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다. 어떤 때는 태극기부대 시위 대오 중에서 쇠구슬이 날아오기도 했고, 지난해와 올해 3·1절 때는 일부 시위 대오가 난입해서 전시물을 부수고 촛불조형물을 불태웠다. 태극기부대의 공격 대상이 되어 버린 세월호 천막은 4년7개월 만인 이번 주에 철거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단장된 기억공간이 들어선다.

주말 이곳에 나와 보면, 이런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그해 겨울 꼬박 촛불을 들고 이 광장을 지켰나 회의감이 밀려온다. 저들이 석방을 주장하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도 할 수 없었다. 청와대로 가는 길엔 몇 겹의 경찰 차벽이 들어섰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장착한 경찰들이 막아섰다. 촛불항쟁 덕분에 지금 광화문을 거쳐 행진해서 청와대로 가고, 그 앞에서 집회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넘실대는 촛불 바다의 감동은 가뭇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개혁이 지연돼 이런 정치판이 만들어졌다. 탄핵 이전에 구성된 20대 국회는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아왔다.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적폐세력들은 개헌, 선거법, 권력기관의 개혁법안들을 모두 막아섰다. 국회는 촛불항쟁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 책임은 한국당에만 있지 않다. 정부는 이벤트와 레토릭만 근사하게 하면서 국민들의 기대감을 높여만 놓았지 촛불정신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책임 있는 개혁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요즘은 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하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경사노위가 대표적이다. 경사노위는 경영계의 요구를 수용해서 사회적 대화를 제기하고, 노동계의 양보를 형식적으로 완성하는 기구로 활용한다. 정해진 답에 청년, 여성, 비정규직 대표를 들러리 세우려 한다. 초기부터 다부지게 적폐청산과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한 탓에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제의 효과는 사라지고 있다. 경사노위를 통해 노동권이 후퇴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아니라 지금도 무권리 상태에서 신음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이들만 더 골병들게 된다.

그러니 주말 광화문광장은 정치 실패를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준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가짜뉴스와 혐오가 판치는 주말 광화문광장에 나와 보기를 권한다. 답은 현장에 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요양원·요양병원 등 노인 관련 시설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환자 등 자력으로 피난이 곤란한 다수의 어르신들이 수용되어 있다. 그 때문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급격한 연소와 다량의 유독가스 발생으로 인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취약성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침상 이동이 원활하지 않고 출입문에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구조의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야간시간대에 병실 당직인원이 소수여서 다수의 환자를 안전한 곳으로 신속히 피신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들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대규모 인명피해가 생길 우려가 매우 높아 관계자에 의한 신속한 인명대피와 초기 화재 진압이 매우 중요하다.

이들 시설에서는 화재 시 119 신고, 인명대피, 초기 소화 등 관계자 개인별로 부여된 임무가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록 종사원 주·야간 근무여건을 반영한 자위소방대를 편성하고 반복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또 평소 소화기 등 소방시설 사용법을 숙지하고 소방시설이나 비상구 등 피난·방화시설의 유지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취사, 난방 등 화기 취급 시 위험요소는 없는지도 꼭 살펴야 한다.

아울러 층별로 소방시설 등 위치도와 대피 안내도를 비치하고, 환자의 현실적인 대피동선을 확보해야 한다.

층별로 요양실을 배치할 때 재실자별 대피능력을 감안해야 하며, 어르신들이 신속히 화재현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경사로나 미끄럼대 등 피난설비를 설치하는 등 시설물에 대한 안전환경 조성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김용호 | 여수소방서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근 최악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온 국민에게 마스크는 생필품이 되어버릴 정도로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가 커지다보니 그 피해와 위험에 대한 논란이 크다.

지난 88올림픽 때부터 미세먼지를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미세먼지에 대한 위험이 과장되어 있거나 거짓이 진실인 양 알려지고 있어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한 언론사에서 나온 서울 시내에서 1시간 동안 돌아다니면 디젤차 매연을 3시간40분 동안 마시는 것과 같다는 보도가 사실은 가짜뉴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세먼지가 아닌 담배의 유해성을 청소년들에게 알리기 위해 진행되었던 연구의 결론을 과도하게 미세먼지의 위험성으로 인용하는 데서 생긴 오류였단다. 이런 식으로 과학적인 분석과 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위험을 과장하는 목적의 정보가 난무하다보니 진짜 필요한 정책을 세워서 집행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에 드러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시안적인 정책들만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간 미세먼지 농도를 낮추기 위해 오염원을 줄이는 것인데,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위험이 과장되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도 적지 않게 마주하게 된다.

최근 일부 사립유치원에서 급식 문제 등이 터지자 수많은 흥미 위주의 보도와 왜곡된 정보가 유통되어 격앙된 학부모들로 인해 정부와 사립유치원 간의 힘겨루기만 남았다. 사립유치원들을 무릎 꿇리는 것이 교육당국의 목표가 되어버려 지금은 국공립유치원은 선이고, 사립유치원은 악이라는 구도만 남았다.

그러나 실제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막상 공립유치원에 보내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부와 사립유치원 간의 감정적 대립은 긴 방학과 짧은 교육시간, 밍밍한 프로그램 등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한 사립유치원들과 그렇지 않았던 국공립유치원들에 내재된 문제들은 어떤 것이고, 유치원 교육을 통해 국민들이 바라는 것과 미래교육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2010년 8월10일자 한 시사 주간지의 머리기사는 ‘나쁜 방학’이었다. 이때의 악은 수능이었고,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선행학습과 족집게 과외 같은 입시의 난맥상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수능 준비는 어린 학생들에게 잠시의 휴식이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학습노동의 지옥도였다는 교육특구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극적인 기사가 가득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액의 사교육비와 교수 부모의 논문에 이름 얹기가 문제라고 소논문이 악으로 치부되어 일반고 과정에서는 퇴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은 극히 일부의 행태일 뿐이고 대다수의 평범한 부모나 학생들은 그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다.

다수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정책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자극적인 모습들을 찾아 단기 처방을 만들다 보면 교육당국의 백년대계가 과연 만들어질 수 있을까?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보다 더 뿌연 우리 교육의 미래가 암울한 날들이다.

<한왕근 청소년지도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중국 당나라 때 누사덕(婁師德)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남이 욕하면 못 들은 척 지나가고, 지인이 찾아와 누가 당신 욕을 하더라 하면 “저 말고 누사덕이 또 있나 보죠. 내가 맞더라도 굳이 전해주는 건 그 욕을 제가 두 번 듣게 하는 일입니다” 하고 끝냅니다.

훗날 그의 동생도 높은 자리에 임명됩니다. 형제가 나란히 출세한 것이지요. 그러자 누사덕은 동생을 불러 관심과 시기도 두 배가 될 터이니 각별히 몸가짐을 조심하라 이릅니다. 동생이 걱정 말라면서 “누가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잠자코 닦아 내겠습니다” 하니 누사덕이 말합니다. “그게 내가 염려하는 바니라. 침 뱉은 사람 앞에서 침을 닦으면 그 사람 기분을 건드릴 것 아니냐. 침이야 놔두면 금방 마르니 그대로 두거라.”

침 맞은 얼굴쯤 저절로 마른다는 타면자건(唾面自乾)의 고사입니다. 어떤 모욕이나 봉변을 당하든 꿈쩍도 않는, 무심하고 의연한 처세술을 말하지요. 우리라면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잠자코 닦고만 있겠습니까? 당장 마주 침을 뱉어주든가 멱살을 잡겠지요. 막장드라마에서 가장 흔한 모욕법은 맞은편 얼굴에 물을 끼얹는 겁니다. 모욕의 고전이자 뻔한 클리셰죠.

물세례 모욕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개구리 낯짝에 물 붓기’ 속담이 있으니까요. 사람 얼굴에 물 끼얹으면 대판 싸움 납니다. 개구리 낯짝엔 물 끼얹어도 무반응 꼼짝을 않습니다. 보호색 띠고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에 노출되는 걸 개구리도 아는 겁니다.

욕 전해 듣고 속 좋을 리 없지만, 벌컥 반응해봐야 아까운 시간과 내 기분만 날립니다. 못 들은 척 가만있는 건 호구가 아니라 태연자약의 승자입니다. 상대는 욕하고 다니다 언젠가 죽어나니까요. 그러니 막장 기대하고 욕 전한 사람을 김새게 해줍시다. 누가 뭐라 하든 ‘뭐 어쩌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기자들에게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논쟁’의 영역이다. 홍 전 대표가 페이스북에 직접 노출한 ‘센’ 발언이 기자에게 고민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쓸까? 말까?’

홍 전 대표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자들은 왜 고민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고민이 시작되는 이유는 ‘쓰는 것’의 몇 가지 효용 때문이다. ① 발언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직접 판단할 수 있게 한다. ② 온라인에서 잘 팔린다. 반대로 ‘쓰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유도 있다. ① 요즘 같은 실시간 소통 시대에 굳이 왜 기사로 워딩을 그대로 전달하나. ② 발언 자체에 대한 판단과 검증이 필요하진 않을까.

취재원에게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관의 자세가 필요했다. 객관성, 중립성 등 거리를 유지한 건조한 사실 전달이 언론의 가치였으며 ‘전달자’ ‘매개자’로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했다. 지금도 누군가의 발언과 사진 등이 고스란히 기사화되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주요 인사의 발언, 셀럽의 SNS 등은 발화와 거의 동시에 ‘속보’라는 이름으로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사실 온라인 경쟁만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 관행과 가치는 유효한 측면이 있다. ‘뭐 이런 걸 기사로 쓰느냐’는 악플이 달릴지언정 클릭은 해봤다는 얘기니까.

그렇다보니 아이러니가 생긴다. 독자들이 디지털 시대의 기자와 기사에 기대하는 가치는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독점하던 정보나 인물에 대한 접근 장벽은 사실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나만의 뉴스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이제 기자는 따옴표 속에 담긴 ‘말’(text) 자체를 넘어 따옴표 너머의 ‘맥락’(context)을 짚어주는 사람으로 진화해야 한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한 현장을 종합적으로 비춰보고 사실이 아닌 진실이 무엇인지 ‘판정을 내리는’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어떤 발언이나 행위가 소수를 향한 혐오이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 언론의 검증 절차, 기자의 독자적 해석과 판단을 전제한, ‘진실의 판정자’로서의 적극적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성소수자를 인정하게 되면 근친상간, 소아성애, 시체성애, 수간까지 비화될 것 “5·18민주화운동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 등의 발언을 따옴표 속에 묶어 그대로 전달만 하는 것을 독자들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2016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라는 공화당 후보를 만났는데, 당시 뉴욕타임스 짐 루텐버그 기자는 기사를 통해 “당신이 트럼프 후보가 가장 최악의 인종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방향으로 선동하려는 사람이라고 믿는 저널리스트라면 어떻게 그를 보도할 것이냐고 묻는다. 문제 발언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과연 저널리즘의 가치에 맞느냐는 질문이다. 이후 미국에선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체크’해 전달하는 ‘팩트 체크’ 보도가 나타난다. ‘트럼프가 A라고 말했다’고 보도하는 게 아니라 ‘트럼프가 A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틀린 발언이며 B가 맞다’고 보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검증 방법은 사실에 입각해야 하고, 검증의 기반이 된 정보나 발언인의 출처도 투명해야 한다.

당연히 이 같은 역할에는 부담이 따른다. 미국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팩트 체크 기사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기자가 판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묻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가 신문과방송 2월호 기고에서 쓴 문장을 빌려 말하고 싶다. “이 몫을 감당하지 않은 저널리스트,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한 기사는 고작해야 ‘발언의 진실성’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한 결과물일 뿐이다. ”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현직 부장검사가 검찰총장과 검사장급 고위간부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대국민 고발’을 했다. 한국 검찰 사상 최초일 터다. 2월18일자 경향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는 칼럼을 쓴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이야기다. 임 부장검사는 검사장 3인이 2015년 서울남부지검의 성폭력 사건을 덮었고, 문무일 총장은 이들을 징계·처벌하지 않았다며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없는 검사들을 고발합니다. 주권자 국민 여러분이 고발 내용을 판단하여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이후다. 시민 반응은 뜨거웠으나, 검찰은 조용하다. 어떠한 공식 반응도 없다. 검찰 내부망에도 수사관 2인이 글을 올렸을 뿐, 검사의 글은 한 건도 없다고 한다. 임 부장검사는 전화 통화에서 “반응이 전혀 없어 당혹스럽다. 검찰 조직의 불건강성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참담하다”고 말했다. 지금 임은정은 ‘투명인간’이다.

검찰 내 성추행과 은폐 의혹 등을 제기한 임은정 검사가 참고인 진술을 위해 2018년 2월6일 검찰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이 꾸려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검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의 서울남부지검으로 가본다. ㄱ부장검사가 여성 검사를 아이스크림에 빗대 성희롱했다가 사표를 냈다. 감찰이나 징계 없이 ‘명예퇴직’ 처리됐다. 2억원 가까운 명퇴수당까지 챙겼다. 곧이어 같은 검찰청의 ㄴ검사가 퇴직했다. 전직 검사장의 아들이자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귀족 검사였다.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역시 징계를 받지 않고 옷을 벗었다. 미스터리는 지난해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계기로 풀렸다. 검찰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조사단이 재조사에 나서 두 검사를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것이다. 하지만 대검 감찰라인의 은폐 의혹은 규명되지 못했다. ㄱ부장검사는 벌금 500만원이 확정됐고, ㄴ검사는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 재판 중이다.

검찰 수뇌부는 뒤늦게나마 이들을 기소했다며 안도했을까. 그랬다면 성급했다. 검찰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온 임 부장검사는 사건 당시 은폐 의혹에 연루된 간부들에 대한 감찰을 요청했다. 대검찰청은 비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임 부장검사는 김진태 전 총장 등 전·현직 간부들을 직권남용·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 10개월이 지났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임 부장검사가 칼럼을 쓴 이유다.

1999년 서울지검 동부지청에서 한 검사가 여성 기자를 성추행해 물의를 빚었다. 법무부는 ‘경근신’ 25일의 징계를 내렸다. “견책보다 무겁고 중근신보다 가벼운 것으로 매일 반성문을 쓰며 과오를 뉘우쳐야 하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미 전주지검으로 ‘좌천성 전보’된 점을 감안했다고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솜방망이 징계였다.

스무 해가 흘렀다. 대통령이 네 번 바뀌었다. 국민소득은 1만282달러에서 3만1000달러(2018년 추정치)로 늘었다. 검찰은? 달라지지 않았다. SBS에 따르면, 임 부장검사가 실명을 언급했던 한 간부는 “(해당 칼럼이) 사건이 잊히길 원하는 피해자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피해자를 그토록 염려했다면, 사건 발생 직후 신속히 감찰·수사했어야 옳다. 그때는 제대로 조치하지 않고서 이제 와 피해자 뒤에 숨으려 하나.

검찰이 제자리걸음인 건 젠더감수성뿐이 아니다.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의 조사 대상 사건에 관여했던 일부 전·현직 검사들은 조사를 거부하거나 민형사 불복 가능성을 거론하며 반발해왔다. 용산참사나 김학의 전 차관 ‘별장 성폭력’ 사건의 진상조사 지연은 이와 무관치 않다. 검경 수사권 조정도 검찰의 자치경찰제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검찰의 수사·기소·영장청구권은 주권자가 위임한 권력인데, 검사 개인이 누리는 천부인권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만의 성채는 여전하다.

<PD수첩> 관련자 기소 지시를 거부하고 검찰을 떠난 임수빈 전 부장검사는 <검사는 문관이다>라는 책에서 고백했다. “검찰은 ‘무오류’ 신화 속에 산다. 검찰에 몸을 담았을 때는 전체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정치적 사건의 처리에만 문제가 있어 비판받는다고 치부했다. 떠난 뒤 깨달았다. 검찰권은 업무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었다. 검사들이 ‘버티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는 것 같은데 이제 그렇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 검찰은 안대희 대검 중앙수사부장의 대선자금 수사로 지지를 받았다. 검찰은 ‘국민검사’를 향한 갈채를 등에 업고 ‘개혁당할’ 위기를 돌파했다. 그 결과는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박연차 게이트 수사였다. “세계 최대 검찰청”(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이끄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어록으로 유명하다. 차용하면 “시민은 더 이상 ‘국민검사’를 믿지 않는다”. 믿을 건 법과 제도와 시스템이다.

<김민아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밥처럼 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옆구리를 열고 내리니 신경주역이다. 이곳은 언제나 다른 역보다도 곱절의 묵직한 기분이 어깨를 두드린다. 천년도시와 가깝기도 하지만 역사 바깥으로 나오면 묘한 기물이 있어 과연 경주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그네의 출출한 속을 달래주는 튀김, 해장국 따위의 간판이 마구 달려드는 여느 역과는 달리 광장에 무덤이 앉아 있다. 살아 있음의 엄숙함을 새삼 일깨워주기라도 하려는 듯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경주 방내리고분군 1호 돌방무덤’. 오늘은 버스나 승용차의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맞추겠지만 그 언젠가는 나하고 꽉 궁합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경주에서 출발해 포항 운제산 오어사(吾魚寺) 부근의 봄꽃을 관찰하는 탐사는 하루로 그쳐야 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하늘이 몹시 찌푸르르하더니 드디어 비가 내렸다. 봄을 풀어놓고 미세먼지를 진압하는 달콤한 봄비였다. 산으로 못 가는 아쉬움을 흠뻑 달래고도 남을 만큼 반가웠다. 그냥 귀가하기가 서운해서 경주 남산 자락의 경북산림환경연구원에 들렀다. 야생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나무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무마다 특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경주라서 그런가. 상투적이지 않은 알찬 정보들이 빼곡하다. 내 고향에서 목탁으로 만든다는 살구나무를 두고 “살구(殺狗)란 의미는 개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 살구씨를 달여서 먹으면 독을 중화시킨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희미한 빗줄기 사이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우뚝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설명문이 붙은 낙우송(落羽松)이다. “잎이 깃털처럼 떨어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 주변에서 흔히 공기뿌리를 볼 수 있으며 잎이 어긋나게 달리는 점이 메타세쿼이아와 다르다. 4~5월 수꽃은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지고 암꽃은 둥그스름하게 핀다.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비 사이로 남산의 능선을 본다. 앞으로 낙우송을 만나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말도 꼭 따라 나오겠지, 궁합을 맞추듯! 낙우송, 낙우송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 산수유마을의 산수유  (0) 2019.03.26
날개현호색  (0) 2019.03.19
낙우송  (0) 2019.03.12
인왕산 정상의 싸리  (0) 2019.03.05
거문도 등대의 까마귀쪽나무  (0) 2019.02.26
바위손  (0) 2019.02.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우리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달라지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본인에 관한 농담과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이다. 과장하고 축소하고 생략하고 점프하고 덧붙이며 스스로를 위한 진실을 세공한다.

2015년의 어느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아는 탄생 설화 중 몇 가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한라산에 걸터앉아 제주도를 창조한 설문대 할망과, 알껍데기를 깨고 태어난 주몽과, 갈라진 제우스의 머리에서 황금 무장을 한 채 등장한 아테나의 이야기 따위를 손발 휘저으며 설명했다.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나는 칠판에 ‘나의 탄생 설화’라고 적었다.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었던 건 각자의 기원(起源)에 관한 해석이었다, 자기 몸과 영혼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어떻게 믿고 싶은지 궁금했다. 낳아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것이며, 혹시 그 의미를 찾았는지도 궁금했다.

칠판에 적힌 글감을 보고 열 살 조이한은 글 한 편을 휘리릭 완성했다. 제목은 ‘조이한의 탄생 신화’. 전문은 이렇다.

‘난 하늘에 있었다. 내 앞에는 부처님과 하느님과 오방신, 저승사자, 예수님, 할락궁이, 터주신, 제우스, 알라신, 자연신 등 여러 신이 있었다. 난 신들한테 말했다. “저기요.” 그러자 신들이 내게 말했다. “가라.” “어디로요?” “너희 엄마 뱃속으로.” 갑자기 문이 내 앞에 생겨났다. 들어가자 우리 엄마 뱃속이었다. 신들이 말했다. “이제 너의 수명은 예전과 다르다.” 그 순간 내가 태어났다. 태어나자 우리 엄마가 보였다. 좋아서 “응애 응애” 하고 울었다.’

원고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이 글을 열 살의 조이한과 킥킥대며 읽었다. 본인에 관해 마음에 드는 루머 하나를 막 창조한 그는 무엇이든 쓸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또 다른 버전의 탄생 신화도 한 편 더 써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엄마와 아빠를 인터뷰한 뒤 완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다음 주에 조이한은 이런 글을 써왔다. 

‘옛날에 엄마랑 아빠는 63빌딩에서 커피를 마셨다. 엄마가 전해준 말이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엄마가 아빠에게 “너 시간 있니?”라고 물었다. 아빠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그러자 아빠의 영혼이 찬물에 적셔진 것처럼 놀랐다.’

나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에 대한 느낌을 아빠께서 이렇게나 멋지게 설명해주신 거냐고. 조이한은 딴 데를 보며 “그냥 제가 상상한 다음에 써봤어요”라고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쓰다가 그는 얼떨결에 자기 아닌 다른 존재로 잠시 확장되었던 것이다. 아까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시간이 지나고 둘은 쇼핑, 싸움, 사랑 등등을 하게 됐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될까?” 내가 묻자 조이한은 “이제 끝났죠?”라고 묻더니 부리나케 놀러 나갔다. 원고지랑 연필도 안 챙기고 뛰쳐나갔다. 나는 책상에 혼자 남아 그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었다. 제목은 ‘거짓말’이었다.

‘언젠가 방귀를 뀌었는데 안 뀌었다고 거짓말했다. 엄마가 잘 해줬는데 잘 안 해줬다고 거짓말했다. 거짓말 안 했다고 거짓말했다. 그밖에도 이상한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아빠한테도 있고 엄마한테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모두한테 있다. 그러니까 모두 쓰는 말이라는 거다.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이한은 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학생이었지만 나는 글쓰기 교사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거짓말을 수호하는 과목은 글쓰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저 각자 몫의 삶만 산다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죄다 이해하기가 벅차서 허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좋은 거짓말에는 빛도 어둠도 풍부하게 담겨있다. 그와 함께 지어낸 거짓말로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한 일이란 무엇인가?  (0) 2019.03.21
친애하고, 친애하는  (0) 2019.03.19
탄생과 거짓말  (0) 2019.03.12
천의 얼굴을 지닌 음식 ‘비빔밥’  (0) 2019.03.07
글을 잘 쓰기 위해 잊어야 하는 것  (0) 2019.03.05
20대 남자라는 문제  (0) 2019.02.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피고인 신분으로 광주 법정에 섰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진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기소됐다. 5·18이 일어난 지 39년 만에 역사의 현장인 광주 법정에 선 그를 바라보는 심경은 각별하다. 그가 두 차례의 재판 불출석에 “광주에서는 공평한 재판이 이뤄질 수 없다”는 등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10개월 가까이 재판을 거부해온 것도 이런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법정에 선 것도 법원의 강제구인영장에 굴복한 결과일 뿐, 제 발로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전씨 측은 “국가기관 기록과 검찰 조사를 토대로 회고록을 쓴 것이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이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다”라면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어 “5·18 당시 광주에서 기총소사는 없었으며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해도 조 신부가 주장하는 시점에 헬기 사격이 없었다면 공소사실은 인정될 수 없다”고 했다. 광주 희생자를 모독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거짓과 궤변으로 일관하는 작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3월 12일 (출처:경향신문DB)

그간의 증언과 자료에 비춰보면 그가 5·18 때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최종 책임자라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인 헬기 사격만 하더라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 조사와 검찰 수사 결과 광주 전일빌딩 10층 외벽 등에서 외부에서 날아든 탄흔이 다수 발견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고 감정했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조 신부는 민주화의 증인으로서 ‘광주의 양심’으로 불릴 만큼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그런 성직자가 학살 주범에게 고인이 된 뒤에도 ‘거짓말쟁이’ ‘사탄’이란 모욕을 들어야 하니 이런 불의가 없다.

전씨는 1997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데 이어 특별사면됐다. 국민대화합이란 명분으로 김영삼 정부가 대다수 반대여론을 외면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풀려났음에도 그는 그동안 단 한번도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되레 자신은 5·18과 무관하다는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했다. 그의 부인 이순자씨는 “전두환은 민주화의 아버지”란 망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5·18 폄훼가 결국 ‘북한 특수부대설’ 같은 5·18 망언으로 이어지며 지금까지 희생자와 유족의 상처를 후벼파고 있는 것이다. 5·18 망언 징계를 질질 끌며 진상조사위 발목을 잡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행태도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우리는 끝까지 단죄해야 할 역사적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결과, 어둠의 역사가 다시 발호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격한 단죄뿐이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등 여러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 진행형이다. 전씨는 88세 인생 말년에 5·18 희생자와 광주, 시민 앞에 참회할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찼다. 오히려 온 시민에게 정신적 테러를 가하고 있다. 그에게선 털끝만 한 진정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이번에는 추상같은 사법적 단죄와 함께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수십년간 광주를 고립시키고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장해온 망언과 궤변이 더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자유한국당이 마지못해 내놓은 선거제 개편안이 실로 가관이다. 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야 3당이 선거법 패스트트랙 추진을 가시화하자 지난 10일에야 자체 개편안을 내놨다. 현행 300석인 국회의원 정수를 27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를 아예 없애는 내용이다. 내각제 개헌이 선행되지 않는 한 연동형 비례제 도입에 반대한다는 입장도 천명했다. 지난해 12월 여야 5당 원내대표의 선거제 개편 합의를 파기한 것은 물론 비례성을 강화하는 개혁의 대의를 허무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은 현행 무자비한 승자독식 선거제가 국민주권의 행사 결과를 심각히 왜곡하고, 대립적인 정치문화를 구조화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민심 그대로’ 선거제를 위해서는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 비례대표 의원 수를 확대하면서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는 방향이 선거제 개혁의 뼈대가 된 배경이다. 한국당의 ‘비례대표 폐지’ 주장은 선거제 개혁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반동이자, 현행 선거제의 빈약한 비례성마저 무너뜨리는 개악이다.

지난 5개월 동안 한 번도 협상안을 내놓지 않고 버티던 한국당이 정치혐오 여론에 편승해 ‘의원정수 축소·비례대표 폐지’ 역제안을 하고 나선 속셈은 뻔해 보인다. 우선 협상안을 제시한 것을 내세워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명분을 희석시키려는 술책이다. 그리고 개혁은커녕 현행 승자독식의 선거제를 극단화하자는 ‘청개구리안’을 내놓은 건 선거제 논의 판 자체를 깨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여야 4당은 선거제 단일안을 마련해 15일까지 패스트트랙에 올리겠다고 한다. 한국당 제안이 ‘몽니’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다. ‘패스트트랙’이 최후의 합법적 수단으로 강구된 것이지만, 끝내 선거법 개정이 제1야당을 빼고 진행되는 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사태를 예까지 끌고온 것은 전적으로 한국당에 책임이 있다. 한국당은 이제라도 실행하지도 못할 “의원직 총사퇴” 운운하는 겁박을 거두고 진정성 있는 선거제안을 내놓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패스트트랙 절차가 시작되더라도 협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조정하고 타협할 시간은 남아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이 11일 위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편할 뜻을 강하게 밝혔다. 의결 구조 개편은 여성·청년·비정규직 계층 대표들이 경사노위에 불참하면서 본위원회 회의가 잇따라 무산된 데 대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문 위원장은 의결 방식의 구체안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위원회의 파행을 막기 위해 계층별 대표를 본위원회 회의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 위원장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지난달 19일 경사노위의 첫 합의안인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은 계층별 대표들이 불참함으로써 매듭을 짓지 못한 상태다. 의결 구조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탄력근로제 합의안은 무위에 그칠 수 있다. 경사노위로서는 의결 구조를 개편해서라도 파행을 막겠다는 절박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대책이 소외계층 대표를 의결 구조에서 배제하자는 것이라면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경사노위는 지난해 6월 노사정위원회를 확대해 청년·비정규직·여성·중소상공인 등 다양한 사회 주체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며 출범했다. 경사노위가 의결 효율성을 내세워 청년·여성·비정규직을 배제한다면 과거 노사정위원회와 다를 바가 없다.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들은 경사노위 불참 사유로 탄력근로제에 대한 보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결 구조에만 참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들었다. 거수기가 아닌 진정한 대화 주체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다. 사회적 대화는 여성·청년·비정규직 같은 미조직 노동자에게 더 절실하다. 경사노위는 소외계층을 배제하는 의결 방식 개편보다는 계층별 대표들이 대화기구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내부 운영 방식부터 고치는 게 순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피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보석결정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보석허가율이 40%를 밑돌고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인데 전직이 고려되어 구치소 담장이 낮아진 것 아닐까 하는 의혹 때문이다. 보통 피고인들은 보석을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데, 권력이나 돈 있는 피고인은 심심찮게 보석으로 풀려난다. 주로 병보석이다. 자유를 만끽하던 권력자나 재벌총수들이 좁디좁은 교도소 독방에 갇혀 생긴 병인데 여느 피고인은 상상도 못하는 사유로 풀려나는 것이다.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 보석 여부가 갈린다고 ‘유권무죄’ ‘유전무죄’라는 말도 유행이다.

피고인 이명박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보석신청은 기각된 것을 보면 권력자라서 특혜를 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의혹의 눈초리와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보장이 형사법의 대원칙이지만 1심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의 보석은 시민적 상식과 정의감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 재벌총수들이 감방생활을 피하는 수법인 병보석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법 앞의 평등은 권력 앞에서 맥을 못 춘다는 비판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보석사유가 있으면 석방해서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결정이지만 그동안 보석을 재벌총수와 정치인처럼 막강한 변호인단의 조력을 받는 자들에게 선별적이고 예외적으로 허용해 온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이다.

누구든 법 앞에서 똑같이 대접받기를 원한다. 누구든 형사소송법상 구속사유가 있으면 구속되어야 하고, 구속 이후라도 보석사유가 생기면 석방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 피의자·피고인이 대통령이었든, 재벌총수로서 국가경제를 위해 애썼든 그런 사정들이 고려되어서는 안된다. 법과 원칙이 흔들려 나라가 휘청거렸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면 피의자·피고인이 전직 대통령이나 전직 대법원장이라고 달리 대우해서는 안된다. 그들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할 피의자 또는 피고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만 인권이 있고 방어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이 피의자로 소환되고 수사대상이 되면서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이 화두가 되었다. 피고인 이명박의 보석결정에서 판사가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을 근거로 제시한 것처럼, 피의자 양승태가 검찰청 포토라인을 무시하자 이를 옹호하기 위해 포토라인 세우기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허무는 야만적 행위라는 비판이 사법부 내에 있었다. 그에게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자 비로소 영장남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법농단 수사에서 밤샘조사의 반인권성도 부각시켰다. 전직 대통령, 전직 대법원장과 고위법관, 정치인 등의 수사와 재판에서 비로소 기존 관행이 이슈가 되고 인권감수성이 생긴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리 주장해도 듣지도 보지도 않다가 자기 식구들이어서 갑자기 눈과 귀가 트인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실무관행에 대한 자기비판이나 성찰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식구 감싸기와 조직방어의 이기심으로 비칠 뿐이다. 전직 대법원장의 포토라인 관행 무시행위나 보석허가의 근거로 판사가 제시한 방어권 보장 등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결정하거나 행동하고도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아 욕을 먹거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법과 원칙이 사람 봐가면서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은 심판대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지켜야 정의가 세워짐을 상징한다.

전직 대통령의 보석을 허가한 판사도 안대로 눈을 가렸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힘이 보석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법과 원칙에 따른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고인 이명박의 보석결정이 특혜라며 비판할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 결정이 보석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구속된 거물급 정치인 피고인이 불구속재판을 청구하면 일응의 잣대가 될 것이다. 구속사유인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더라도 방어권 보장을 위해서 석방하되 거주지 및 통신제한과 같은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면 된다는 취지이므로 보석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듯 보석허가결정의 기준이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돌연사 위험성까지 주장했는데 병보석사유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이제 웬만하면 병보석은 어려워졌다고 봐야 한다. 구치소 내 의료진이 충분하다는 이유다. 나아가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재판상 방어권은 권력자나 재벌총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다. 사법부가 실천하는 법 앞의 평등이 헌법에 생명을 불어넣고 불신의 사법부를 살려내는 길이 될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