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근대사 문제를 풀어보자.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일어난 3대 독립운동은? 정답은 3·1운동(1919),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이다. 이들 운동은 모두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날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3·1운동, 광주학생운동은 국가기념일이지만 6·10만세운동은 아니다. 현재는 그날의 거사를 주도한 학교 중 하나인 서울 중앙고가 해마다 기념식을 여는 날짜일 뿐이다. 일반인들은 6·10만세운동을 1987년 ‘6·10민주항쟁’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중앙고 동기인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로부터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6·10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이 아닐 수 있지? 황당했다. 6·10만세운동이 천대를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6·10만세운동은 왜 국가기념일이 되지 못했을까?

먼저 일제의 축소 왜곡을 꼽을 수 있다. 3·1운동으로 혼쭐이 난 일제는 순종의 장례를 앞두고 전국에서 군인과 경찰을 차출해 서울 곳곳에 배치했다. 시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시위가 일어나자 축소하려고 노력했다. 서울에서 잡힌 학생·시민이 210여명에 달했지만 실제 실형을 내린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레드 콤플렉스’다. 많은 사람이 6·10만세운동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일제의 술책 결과다. 일제는 재판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시위로 몰고 갔다. 

엄청난 왜곡이다. 6·10만세운동은 세 갈래로 기획됐다. 첫째가 고려공산청년회 권오설의 노총계다. 권오설은 천도교와 함께 시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3일 전인 6월7일 경찰에 검거됐다. 둘째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성향 학생들이 참여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사직동계다. 연희전문 이병립, 중앙고보 이선호·류면희 등이다. 셋째는 민족주의 성향의 통동계다. 중앙고보 박용규, 중동학교 곽대형 등이다. 

시위를 주도한 것은 사직동계와 통동계다. 노총계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일본의 교묘한 빨간색 덧씌우기가 여전히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 분단이라는 현실도 한몫했다. 우리는 이념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가 애써 외면했다고 하면 지나칠까.

6·10만세운동이 비록 규모 면에서 3·1운동 등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의미와 파장은 이들 운동에 못지않다. 특히 극단적 분열과 대립이 자심한 요즘 현실에서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출범부터 이념과 방법론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1926년 무렵에는 분열이 최고조였다. 한마디로 임시정부는 식물상태였다. 

그러한 와중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임정에 통합의 메시지를 주었다. 7월 상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주의와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하자고 주창했다. 조선공산당 김단야는 6·10만세운동이 천도교와 노동계, 학생조직이 통일전선을 이뤄 추진됐다며 사회주의 운동이 아닌 순연한 민족적 독립운동이라 규정했다. 6·10만세운동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독립세력에게도 통합의 계기가 됐다. 이듬해 2월 탄생한 신간회가 그것이다. 안재홍·이상재·신채호 등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이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신간회를 만들었다. 6·10만세운동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연결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말에 이어 어제 발표한 올해 업무계획에서도 6·10만세운동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을 밝혔다. 보훈처는 국회에 계류 중인 지정 촉구 결의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대통령령으로 하는 것인 만큼 정부가 의결하면 되는 것이다. 정쟁에만 매몰된 국회의 움직임만 기다리는 정부의 태도가 미덥지 못하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6·10만세운동 복권의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출발조차 하지 못하고 정부의 조치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승철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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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사를 했다. 1000가구쯤 되는 단지의 아파트로,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살던 노후 아파트를 재건축한 곳이다. 온몸을 더럽히며 놀던 흙 운동장도, 큰 슈퍼마켓도 그 과정에서 사라졌다. 

어린 시절 나는 형과 함께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당시 포켓몬 빵 안에 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게 유행이었는데, 길바닥에 떨어진 스티커를 찾으러 다닌 것이다. 특히 비 오던 어느 날, 한 골목길에서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주운 기억 덕분에 그 골목이 주는 그날의 분위기와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최근 종로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다. 어떤 집단은 지역의 활성화와 수익성 향상을 위해 재개발을 찬성하고, 어떤 이들은 산업생태계가 훼손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 박원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을 전면 유보한 상태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지켜야 할 것은 문화적 소프트웨어이지 낡아빠진 하드웨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단지 허기를 채울 냉면 한 그릇일까? 노포를 찾은 수십년 단골 중년은 파릇했던 청년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휘황찬란하게 리모델링된 식당에서는 왠지 옛날 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한 골목길에서 추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누군가에겐 낡고 허름한 곳이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이 깃든 장소일 수 있다. 문화는 소프트웨어에도 있지만 하드웨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단지 오래되고 낡았다는 이유로, 주변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그것이 품은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다.

<전정원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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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를 밀어내고 들어선 신도시에 살던 때, 가장 먼저 들어선 카페는 ‘파리바게뜨’였다. 동네에서 제일 일찍 여는 상점이기도 했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이 손에 쥐여주던 빵도 파리바게뜨 빵이었으니 내게 그럭저럭 좋은 기억으로 남은 빵집이다. 

지방의 군 단위 작은 고장에도 어김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리바게뜨를 보면 늘 의아했던 것이 저 많은 빵과 케이크는 대체 어떻게 갖추는지였다. 본사에서 공급하는 양산빵도 있지만 분명 매장에서 직접 굽는 빵도 파는데 과연 누가 빵을 굽는 것일까.

훗날에야 전국 파리바게뜨에서 똑같은 빵을 팔 수 있는 이유는 매장 한쪽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빵을 구워내는 ‘제빵기사’가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외식 프랜차이즈의 속성은 음식을 직접 만드는 원천 기술이 없어도 가게를 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국에 3000개가 넘는 파리바게뜨의 점주들이 빵을 직접 만드는 게 아니다. 본사에 용역비를 내고 파견된 제빵사들이 매뉴얼에 따라 빵을 만드는 체제다. 제빵사들은 파리바게뜨 유니폼을 입고 빵을 만들지만 소속은 파리바게뜨 본사가 아니다. 오래도록 파리바게뜨 제빵사들의 소속은 인력을 파견하는 도급 업체였다. 하지만 이 제빵사들을 좌지우지하는 건 파리바게뜨 본사였다. 케이크를 꽉 채우란 지시가 내려오면 수당도 못 받고 일찍 출근했고, 신제품을 예쁘게 진열하란 지시도 본사에서 내렸다. 신제품을 점주들에게 많이 팔라는 영업지시도 본사에서 받아왔다.

가맹점주들이 본사의 눈치를 보는 곳이 프랜차이즈의 속성이긴 하지만 본사 입장에서 가장 큰 고객은 또 가맹점주이기도 하다. 프랜차이즈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제품들을 떠안는 곳도 가맹점들이고 그래서 가맹점 늘리기에 혈안이 되곤 한다. 그런데 파리바게뜨 본사와 가맹점주들 사이에 끼어 이중 갑질을 당한 사람들은 제빵사들이다. 아침 일찍 여는 제과점 특성상 새벽에 출근해서 매장을 꽉 채울 만큼의 빵과 케이크를 만든다. 상상 이상으로 센 노동 강도와 저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제빵사들도 여전히 많다. 제빵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점주들도 많지만 갈등을 일으키는 점주들 매장은 험지로 분류될 정도다.

빵이 못생기게 나왔다며 제빵사들에게 빵을 다시 사가라는 지시는 제빵사들 대부분 당하는 일이고, 재료를 많이 썼다고 욕을 먹는 이들도 제빵사였다. 소속 회사에 매장에서 당한 부당한 조치에 대해 보고하고 개선을 요구했지만, 파리바게뜨 본사 눈치를 봐야 하는 하청업체는 제빵사들에게 참으라고만 했다. 

그렇게 불법 파견된 자신들의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전국 8도에 흩어진 제빵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파리바게뜨 본사가 제빵사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노동부의 지시에도 본사는 버텼고, 겨우 ‘PB파트너스’라는 계열사에 제빵사들은 고용되었다. 여러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한다는 약속과 임금인상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사측의 입장에 가깝게 움직이는 복수노조가 설립되어 노노갈등의 양상으로 몰아가며 파리바게뜨는 여전히 방관하는 중이다. 롤케이크를 사들고 고향 부모님께 찾아가는 설날에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은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파리의 아침’을 열던 제빵사들의 손에는 크림주머니가 아니라 팻말이 들려지고 위생모자 대신 머리띠가 둘러져 있다. 오늘 우리가 먹은 파리바게뜨의 빵은 눈물 젖은 빵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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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사검증에서 한 장관후보자가 학벌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낸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그는 책에서 ‘행복은 성적순’이라면서 명문대에 진학하라고 썼다. 비난이 쏟아지자 “책 집필 후 20여년이 흘렀고 그동안 생각도 바뀌었다”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좋은 학군을 찾는 ‘맹모’들의 행렬을 보면 세상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입시부정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유명 배우가 연루된 입시부정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들끓고 있다. 예일대, 스탠퍼드대,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등 명문대 부정입학에 입시컨설턴트, 학부모, 학교관계자가 가담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들은 시험감독관을 매수해 ‘대리 시험’ ‘답안지 바꿔치기’를 하거나 체육특기생 제도를 악용했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실력으로 합격하는 ‘앞문 입학’과, 부모들이 거액을 내는 ‘뒷문 입학’이 공식화돼 있다. 그런데 제3의 방법을 만든 것이다. 주범인 입시컨설팅업체 대표는 “나는 ‘옆문 합격’ 루트를 만들었다. 학부모도 매우 만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미국판 SKY 캐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를 쓰고 명문대 진학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성적순일까.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에서 인생사례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다. 1937년 하버드생 남학생 268명을 대상으로 72년간 조사했다. 최고의 대학이니만큼 대통령(존 F 캐네디)과 상원의원 도전자, 소설가, 유명 언론인도 배출됐다. 그러나 마약을 하거나 술독에 빠져 살다가 죽는 등 기대했던 삶을 살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 조사 대상의 3분의 1은 정신질환을 겪었다. 이를 보도한 ‘애틀랜틱 먼슬리’는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적었다. 연구진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한국 학부모들은 대학 이후의 진로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SKY 캐슬>을 보면서 비정상적인 입시교육을 개탄하지만 드라마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글래디에이터’가 된 자녀를 생사가 걸린 아레나로 떠민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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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문제 하나 낼까 한다. 다음 중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① 건물 내 금연 ② 커피 매장 내 일회용컵 사용 금지 ③ 종량제 봉투로 쓰레기 버리기 ④ 고농도 미세먼지 발생 시 차량 강제 2부제. 아마도 적지 않은 독자들은 ④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① ② ③ 모두 관련 제도 시행 초기에는 반발이 없지 않았다.

며칠 전, 몇 년 전에 나온 한국영화를 보다가 음식점에서 흡연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영화 제작연도를 찾아보니 2013년이었다. 건물 내 흡연 금지가 2015년부터 실시되었으니 그때로서는 자연스러웠으련만. 건물 내 금연제 도입으로 영업이 어려워질 거란 반발이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지난주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매장에 들렀는데 일회용컵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작년 플라스틱 폐기물 대란 이후 일정 규모 이상 매장에서는 머그잔 사용이 필수가 되었기에 일회용컵 사용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했다. 제도 시행 초기 기사를 찾아보라. 머그잔 사용이 세척공간이나 인력고용문제로 영업에 지장을 줄 거라거나 세척이 잘 안되어 위생문제가 발생할 거란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지금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방독면을 착용한 녹색연합 활동가들이 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석탄발전 OFF 미세먼지 BYE'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더 멀리 가보자. 처음 쓰레기 종량제가 도입되었을 때 사회적 반발이 적지 않았다. 돈 주고 산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버려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 환경부를 비난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너무 당연한 일로, 재활용품 분리배출도 기본 상식이 되었다. 전국 동시 쓰레기 종량제 시행 국가는 우리가 유일하다. 그래서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이런 거다. 한때 당연하게 생각한 일도 상황이 바뀌면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된다. 우리 시민은 이런 실천으로 문화를 바꿔낸 이력이 있다. 시민을 믿고 정부는 좀 더 강력한 대책을 세우면 어떨까? 미세먼지는 이제 사회재난으로 비상 상황에 걸맞은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배출가스 5등급차량 운행제한은 이미 당연한 일이 되었다. 공공기관에 대해서는 비상시 차량 2부제를 넘어 대중교통이 닿는다면 아예 자가용 출퇴근 금지도 고려해볼 일이다. 민간차량 2부제도 비상시엔 채택할 만하다. 도시 미세먼지의 주요 배출원이자 1급 발암물질 배출원인 경유(승용)차 감축과 퇴출을 위해 경유의 상대가격 조정에 나서야 한다. 흡연권만이 아니라 혐연권이 존중되듯 경유차 배기가스를 마시지 않을 권리도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시민도 미세먼지 문제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 개개인이 미세먼지 피해자일 뿐 아니라 배출원이기도 하다. 전력의 40%가 석탄화력인 상황에서 전력 소비를 줄이면서, 봄철 석탄발전소 전면 일시정지에 따른 일정 수준의 전기요금 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스크 구입이나 공기 청정기 구입·운영 비용보다 더 적은 비용 부담으로 사회 전체 공기를 맑게 할 수 있다. 경유차 운전자라면 지난 정부의 클린디젤정책을 탓할 수도 있지만 비상상황에선 협조가 필요하다.

이틀 전 국회에서 미세먼지 대책 관련법 8개가 본회의를 통과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들이 친환경차를 일정비율 이상 생산·판매하지 않으면 과징금을 부과하는 친환경차 의무제 도입 조항이 대기환경보전법에서 빠진 건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국내 자동차업계 현실을 고려한 조치라는데 참으로 근시안적이다. 세계는 경유차를 넘어 내연기관차 퇴출로 가고 있기에, 친환경차 생산시장에 확실하게 진입하지 못하면 자동차산업에 위기가 올 수 있다. 더 기본적으로는 소비자에게만이 아니라 생산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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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8일 국회에서 ‘저작권, 지식의 공공성, 출판산업’이라는 제목의 저작권 법규와 제도 개선 공청회가 열렸다. 한국작가회의,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문학번역원이 우상호 의원(더불어민주당)과 공동주최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후원한 이 행사는 작가와 출판계가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공동으로 꾀한 첫 자리다. 덕분에 국회의원 두 사람을 포함해 청중으로 꽉 찬 행사장은 토론의 열기로 뜨거웠다.

국제 작가조직인 펜(PEN)이 2016년 저작권 보호 선언에서 “저자의 경제적 독립과 자율성은 표현의 자유에 핵심적이며, 그것은 다양한 목소리를 장려하고 다양한 목소리는 민주주의를 촉진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저작권,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는 긴밀하게 얽혀 있다. 또 작가의 권리, 즉 저작권 보호는 작가와 협력하며 저작물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역할과 뗄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로 저자와 출판사는 함께 고초를 치렀다.

그럼에도 저작자와 출판사의 권리를 대립관계로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개별적 차원에서 작가와 출판사 간 갈등은 자주 벌어진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양자가 상생관계이며 서로 협력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본질을 가릴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의 저작권 관련 기구들은 이 중요한 진실을 오인하거나 일부러 외면한다. 토론자로 진작 섭외한 저작권위원회 소속 변호사가 별 이유 없이 불참을 통보해와 급히 토론자를 교체한 것도 하나의 방증이다. 사실 그 배경에는 저작권 보호를 위한 작가들의 조직적 노력이 부족했던 역사가 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맞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부터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한국작가회의도 뒤늦게 작년에야 저작권위원회를 신설했던 것이다.

우리 출판산업은 위기이며, 작가의 경제적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그 으뜸가는 원인은 낡은 정부 정책이다. 문체부가 2017년 초 발표한 ‘4차 출판문화산업 진흥 기본계획(2017~2021)’에는 콘텐츠산업 총 매출의 약 20%로 가장 큰 “출판산업 규모를 고려, 타 산업과 유사한 예산 확충 절실”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실제 2017년 정부 지원은 “게임 641억원, 영화 656억원, 콘텐츠기업 육성 637억원, 출판 367억원”이었다. 그만큼 출판산업은 문화정책도, 산업정책도 없는 사각지대에 방치된 가운데 시대에 뒤진 사양산업의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다. 그러나 책을 쓰고 만들어 유통하며 읽고 토론하고 즐기는 삶은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문화국가’라는 현 정부 국정과제의 핵심이며, 출판산업은 사양산업이 아닌 국가 기간산업이다.

저작권 선진화에 가장 긴요한 것은 저작권자와 출판계의 연대이지만, 도서관, 독서운동과도 탄탄한 소통과 협력이 구축되어야 한다. 나아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상징하는 지식정보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교육정책과 학술정책을 포함하는 한층 광범위한 지식·문화 정책 일반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주제가 복잡하고 어려운 저작권이라서 이날 토론은 저작권법 개정, 공공대출권 도입 등에 관해 다분히 학구적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작가의 저작권 피해 사례 발제에서 잘 드러났듯이, 이날 일부 작가들의 출판사에 대한 깊은 불신이 확인되었다. 토론 과정에서 작가와 출판사 사이에 다소 감정적인 언쟁이 있었고, 행사 종료 후에도 옥신각신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와 출판계 간 대화와 공동행동을 위해서는 양측이 서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필요를 절감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갈등이 드러난 것은 오히려 성과였다.

이날 첫 발제를 맡았던 나는 한국작가회의의 오랜 회원이자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출판정책연구소장으로서 거듭 작가와 출판계 간 연대를 강조하고 싶다. 가령, 작가의 눈에는 수업목적보상금에 대한 권리를 작가에게만 인정하는 현행 저작권법을 개정하여 자기 몫을 찾으려는 출판계의 노력이 ‘푼돈’이나 다름없는 보상금에 숟가락을 얹는 추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출판계의 요구는 작가의 권리 보호를 강화한다는 전제를 당연히 깔고 있다. 문화 선진국처럼 작가와 출판사의 당연한 권리가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쥐꼬리만 한 ‘푼돈’인 보상금이 현실화될 수 있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쌓여가는 미분배보상금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공공의 목적을 내세워 전용함으로써 작가에게 갈 물질적 혜택을 빼앗지 못한다. 우리의 뒤엉킨 저작권 현실은 법과 제도 개선에서 항상 출판사와 작가를 배제해온 잘못된 정책이 주범이다. 작가와 출판계가 오해와 불신을 넘어 연대함으로써 제도 전반의 혁신을 함께 성취할 수 있다고 낙관하는 이유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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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대표적 정신질환으로 꼽히는 조울증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13~2017년 건강보험 진료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17년 조울증 환자는 8만6706명으로 2013년보다 21.0% 증가(연평균 증가율 4.9%)했다. 전체 인구의 0.2%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8만6000여명은 전체 질환자가 아닌 병의원에서 진료받은 환자이므로 실제는 더 많다고 봐야 한다. 인구의 2~3%를 조울증 환자로 보는 학계 연구에 따른다면, 국내 전체 환자 수는 적게 추산해도 100만명에 이른다.

통계에서 주목할 대목은 20대 청년층과 60~70대 노령층의 증가 속도다. 70대 이상 조울증 연평균 증가율은 12.2%로 전체 평균 증가율을 크게 웃돌았다. 특히 20대 연평균 증가율은 8.3%, 60대는 7.2%로 뒤를 이었다. 20대 청년층과 60~70대 노령층에서 환자가 크게 발생하는 ‘조울증 쌍봉’ 현상이다. 한국의 20대는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가는 시기다. 스펙을 쌓아도 취업을 보장받지 못하며, 열심히 노력해도 행복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이 청년들의 우울증을 키운다. 전문가들은 20대의 조울증 증가 원인으로 학업·취업 스트레스를 꼽는다. 노년층의 조울증은 가족 사별, 건강 악화, 빈곤 등이 겹쳐 크게 늘고 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노년의 조울증 증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양극성 기분 장애’로 불리는 조울증은 기분이 들뜬 상태인 조증과 울적한 기분이 계속되는 우울증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정신장애다. 공황장애, 조현증과 함께 현대의 대표적 정신질환이다. 심리질환인 만큼 명확한 진단은 없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좌절, 실패 등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일찍이 앨빈 토플러가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와 기회를 획득하는 대신 피로와 우울을 얻을 것이다”(<미래의 충격>)라고 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울증은 현대인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의 감기’로 불린다.

조울증은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조울증이 사회적 심리질환인 만큼 약물치료와 함께 대인관계·사회적 갈등을 다루는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근본적으로는 조울증 의 사회적 병인(病因)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무한경쟁, 학력만능주의, 취업 불안, 빈곤 등이다. 조울증 예방 책임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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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누구나 복지제도의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어떤 복지국가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아동과 청년수당이 대표적 사례다. 각 정책 모두 도입 초기 사회적 논쟁이 많았다. 개별 정책 모두 시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나 구조조정이 발생하면 실업급여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그 실업급여제도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지 않고 적용자도 일부에 한정된다. 이런 현실에서 빈곤 및 재취업 등을 위한 다양한 사회수당을 생각하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그런데 지난 3월5일 노사정 합의로 ‘한국형 실업부조제도’가 발표되었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에게만 적용이 가능했던 실업급여를 저소득 구직자와 자영업자에게까지도 확대한다는 것이다. 내년부터 저소득층 대상 매월 50만원씩 6개월간 지급된다. 그간 도움을 받지 못한 미취업 구직자는 물론 전직 자영업자와 경력 단절자까지 혜택을 받게 된다.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생계지원과 고용서비스가 결합된 형태다. 일정한 소득을 기준으로 대상자가 좁혀진 한계가 있지만 사회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위험과 고용불안정은 몇몇 지표들이 확인해 준다. 일터에서 비정규직이나 자영업 노동시장은 매우 심각하다. 1년 미만 근속자(31.3%)가 많다보니 사회보험(37.8%), 교육훈련(38.4%), 유급휴가(24.5%) 적용자는 10명 중 3명이 고작이다. 직장에 취업해도 1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비율은 20.1%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나라와 비교하여 1인 자영업자도 2배(15.4%)나 많다. 이런 현실에서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국가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고 사회적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지방정부의 몫도 있다. 최근 서울시에서 발표한 시민의 사회적 안전망들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서울시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에게 유급병가를 지원한다고 한다. 생활임금 수준으로 10일 정도 지원한다고 하니 아파도 병원에 가기 어려운 저소득 시민에 대한 소득지원 성격을 담고 있다. 특히 열심히 일했음에도 사업을 접게 된 소상공인의 폐업 지원을 위한 채무감면이나 지원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필요한 정책 중 하나다.

게다가 올해 7월부터 비정규직 대상 휴가비 지원(25만원)도 시행한다. 중앙정부가 시행하는 중소기업 휴가비 지원제도(20만원)가 정규직이 주 대상인 반면, 서울시는 저임금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노동자가 대상이다. 서울지역 비정규직 휴가사용률이 1주일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가 있다. 1936년 처음으로 2주간 누구나 연속으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에 비하면 80여년의 격차다. 그 밖에도 프리랜서 지원이나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한 청년수당과 같은 제도는 “어떤 신분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철학을 담은 것으로 봐야 한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라는 영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에서 고용센터 공무원은 질병수당을 신청하러 온 주인공에게 오로지 원칙과 기준 그리고 절차만 강조한다. 고용센터에서 질병수당을 제공하는 데 있어 개인의 ‘잘못’과 사회의 ‘잘못’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서울시 정책들은 시민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다른 지방정부에서도 다양한 정책들이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더 구체적으로’ 전달되면 좋겠다. ‘평등한 시민권’은 소득, 거주지 등의 기본적 욕구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다만 정책 설계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도 있다. 시민의 안전망은 시혜와 배려의 관점이 아니라 권리와 평등의 관점이어야 한다. 몇 년 후 한 지방정부에서 시민보험을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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