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반성장을 위한 정책들을 법률화하려는 움직임이 2년여 만에 다시 대두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익공유를 비롯해 동반성장 방책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업은 이익만 극대화하면 되는데 웬 딴소리냐며 반발하고 있다.

기업은 과연 이익만 극대화하면 되는가, 기업의 다른 역할, 즉 사회적 책임(CSR)은 외면해도 되는가? 이 기회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개진하고자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올리는 것이다.” 1970년 밀턴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이익을 올리는 것 말고도 고용을 제공하고, 공해를 피하는 일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들에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로운 사회의 토대를 잠식하는 지적 세력의 꼭두각시들이라고까지 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태두였고 <자본주의와 자유> <선택의 자유>라는 저작으로 자유주의를 설파했다. 그는 평소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주장으로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공짜 점심을 제공하라는 의미에서 시장원리와 자유를 해치는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프리드먼이 맹활약했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대두된 개념이다. 당시 미국의 기업들은 환경 공해, 독과점 지배 등으로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한 보상으로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주로 기부형태로 이루어진 자선사업은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좁게 해석하는 오점을 남겼다.

오늘날 기업은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기업활동의 투명성과 윤리성을 요구받고 있다. 나아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 등에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참여를 요구받는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따라 국제표준화기구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산하기 위해 2010년 ‘ISO 26000’을 제정했다. 성과의 측정을 위해 지배구조, 인권, 노동, 환경, 공정거래, 소비자, 사회와의 관계 등 7대 핵심과제를 설정하고 국제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흔히 CSR의 핵심내용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는 7대 과제 중에서 가장 끝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기부나 사회적 공헌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CSR에 불과하고 적극적인 CSR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ISO 26000’에서는 이미 제시하였다.

적극적 CSR이라 할 수 있는 노동, 환경, 공정거래 분야에서의 CSR의 특징을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 프리드먼이 비판한 ‘공짜 점심’을 제공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동 분야의 CSR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적정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 공정거래 분야 CSR은 협력사에 적정단가를 보장하고 불공정 거래를 해소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CSR 활동은 결국 기업 생태계를 살리는 상생협력활동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기업 간 상생협력은 기업 간 동반성장으로 연결된다.

적극적 CSR 관점에서 볼 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의 기본은 ‘좋은 제품을 경제적으로 만들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협력사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글로벌 경쟁이 ‘개별기업(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대 개별기업(예를 들면 도요타자동차)’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Biz Ecosystem)들(현대 + 협력업체들과 도요타 + 협력업체들) 간의 경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고 브랜드 가치를 높여 지속가능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한 CSR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 동반성장이라는 관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대단히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이해관계자의 역할 및 참여가 증대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생산관점에서 벗어나 기업들이 이해관계자 관점(stakeholder view)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란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의사결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 집단을 총칭하며 경영진, 종업원, 소비자, 투자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미디어, NGO, 정부 등을 포함한다. 기업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이윤 창출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경영활동이 필요하다. 즉 주주 이익 우선의 경영철학인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공존공생을 모색해야 한다.

최근 공급망 CSR 개념 강화에 따라 중소기업 CSR의 당위성 또한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중요해지면서 수출중소기업 성장전략에 대해 CSR은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수출중소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GVC)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CSR에 대한 국제적 표준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키려면 CSR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일류국들은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규제를 통해 자국 기업들의 책임 있는 기업 관행을 촉구하는 동시에, 자국에서 지속 가능하고 책임 있는 공공조달 비중을 늘림으로써 CSR 국가 브랜드 제고 노력을 하고 있다.

근래에는 기업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적극적 책임론’이 등장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동반성장 CSR 모델의 개발은 중요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기업 자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사회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는 비유가 있다. 이것은 사회의 지지를 얻어야 기업도 지속 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업이 있어 소비자가 행복해지고 종업원과 그 가정이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는 공짜가 없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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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시청하며 마음이 부셔서 행복하다. 이 드라마는 시간을 잃어버린 여자와 시간을 버린 남자가 같은 시간에 살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대기업 사장이나 세상을 휘두르는 권력자는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미장원을 하는 엄마, 택시기사를 하다가 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고 의족을 사용하게 된 후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 직업 없이 무위도식하며 컴퓨터 앞에서 1인 방송을 하며 별사탕을 위해 엉뚱한 행동을 하는 오빠, 자장면을 배달하는 친구들, 성공과는 거리가 먼 무명가수 등 우리 서민들이다.

홍보관이라는 노인유치원에서 이런 저런 사연을 가진 노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버느라 펼쳐지는 에피소드가 재미와 함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한때는 재산도, 지위도 있었지만 남편이 죽은 후 미국으로 떠나는 아들을 위해 집을 팔고 자신은 모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면서도 홍보관 노인들과 어울리기 싫어 까칠하게 구는 샤넬할머니는 아들의 배신을 확인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장례식장도 아들이 아닌 할머니의 죽음으로 조사를 받던 운 나쁜 남자가 지킨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화장터로 가는 마지막 골목길에서 영정을 아들이 들고 나가게 설정하여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일흔여덟 김혜자의 몸에 스물다섯 한지민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늙음’에 대한 독백을 담은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잔잔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극중 혜자와 젊은 친구들의 교감은 편견 없는 사회에서라면 세대 간 우정과 연대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JTBC 제공

홍보관 사람들이 보험금을 노리고 효도관광을 가장하여 사고를 내려 한다는 사실을 안 25세 할머니인 주인공 혜자는 구출 작전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시청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무리 늙었어도 잘할 수 있는 장점은 누구나 한 가지씩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내를 받지 않으면 이동이 어려웠던 시각장애 할아버지는 정전이 되자 눈 뜬 사람들보다 훨씬 활발히 움직였다. 흰 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면 방의 위치나 방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냈다. 시청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전문용어로 에코로케이션(eco-loc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소리의 반사를 통해 주변 공간의 상태를 지각하는 감각체계이다.

워커를 사용하는 할머니가 악당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등 구출 작전에 민폐가 될 것 같았던 노인들도 마음을 모으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관현맹인에게 벼슬을 주며 한 말이 생각난다. 바로 ‘세상에는 버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늙어가기 때문에 젊음을 서서히 잊어버리지만, 하루아침에 늙어버린 주인공은 젊음이 얼마나 에너지 넘치고 아름다운지를 절감하게 된다. 젊음은 눈부심 그 자체이다. 이 찬란한 젊음을 갖고 있는 청년들이 실업의 늪에 빠져 빛을 발하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할머니를 25세로 만든 것은 알츠하이머였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이다. 할머니는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하였다.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그 모든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에서는 알츠하이머와 같은 치매 노인이 많아질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요양원으로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치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노인은 처음부터 노인이 아니었다. 노인에게도 눈부신 젊은 날이 있었다. 주인공 혜자는 “너희도 늙어봐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하던 말인데 이것은 경험해야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경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눈부신 시절이 지나면 마음이 부신 시절이 온다고 생각하면 노년이 덜 외롭고 덜 초라하지 않을까?

<방귀희 |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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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교복’. 서울시교육청에서 숙의민주주의 방식으로 진행된 공론화 의제 제1호다. 추첨으로 선정된 229명의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온종일 토론했다. ‘교복 결정 시, 학생 의견 반영비율’에 관해 토론 후 생각을 바꿨다는 시민참여단이 64%나 됐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생각의 변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각종 토론 현장에서 보면, 토론자로 나온 사람들은 대화하러 나온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모두 ‘빠떼루’ 자세를 취하고 있는 레슬러 같다. 한쪽은 ‘빠떼루’ 자세로 바닥에 사지를 붙이고 바짝 엎드려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상대쪽은 그를 바닥에서 떼어내 뒤집으려고 한다.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와 그것을 들어 뒤집으려는 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토론과 대화의 모습이 아닌가?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비통한 자들’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을 요구한다. 나의 마음을 부숴버린 타자에 응대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념과 타자의 신념이 충돌하여 일어난 모순과 긴장을 가슴속에 품고 더 크고 넓은 해결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생각 바꾸기의 가능성’이 없는, ‘체제와 제도의 집합체로서만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생각 바꾸기를 패배로 여겨서는 안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설득당할 용기>가 진열되어야 한다. 토론 이후에 생각을 바꾼 64%는 용기 있는 진정한 민주시민이다.

<송재범 |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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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광고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서 옥션’ ‘결혼해 듀오’는 귀여운 편에 속하고, ‘이것만 기업해’는 무리한 발상이다. 처음 접하면 ‘아재개그’ 같지만, 어느 순간 뇌에 둥지를 틀고 시시때때로 지저귄다. 멋진 모델 없이도 뇌를 점거하니, 성공적인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뜻밖의 영역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구가 등장했다. 요사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승리, 용준형, 정준영 등의 이름과 함께 소설 제목에 빗댄 ‘위대한 승츠비’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예능프로와 아이돌 그룹에 대해 무지한 나는 ‘용준형’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보았을 때, “배용준씨마저 사건에 연루됐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도 ‘빅뱅’을 모를 수는 없지만, 멤버 중 하나가 ‘승리’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급기야 ‘승츠비’라는 별칭을 접하게 되었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나 상표출원까지 했다는데, 이게 웬 구시대의 작명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개츠비에 대한 모욕이다.

개츠비는 젊은 부자이고 마침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점 외에는 ‘승리’와 거의 공통점이 없다. 개츠비가 계속 성대한 파티를 연 것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의 참석을 고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끝내 개죽음이라는 극적 패배를 겪지만, 그의 흠결 때문이 아니라 속물적 여인에게 과분한 낭만적 사랑을 바쳤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워낙 유명한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를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작가 피츠제럴드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처음에는 당신이 술을 마시지만,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그다음에는 술이 당신을 마신다”는 말이 그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와 관련한 내 첫 번째 기억은 20대 중반에 친구가 영문판을 선물한 것이다. 1974년 제작된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레드퍼드와 미아 패로의 스틸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매료되었는데, 소설을 영어로 편히 읽을 실력이 못되어 읽지는 못했다. 다만, 나중에서야 개츠비가 위대한 인물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씁쓸하게 살해당하는 이야기임을 알고 당황했다.

실제로 소설을 읽은 것은 훨씬 뒤였다. 나는 개츠비를 지켜보는 소설 속의 화자인 캐러웨이처럼 개츠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성공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은 옛 연인을 다시 만나려는 낭만적 열정과 포개진다. 젊은 그가 어떻게 부를 거머쥐었는지 의심스러우나, 그는 어디까지나 신사였다. 대공황 이전 뉴욕 동쪽의 롱아일랜드에 모여든 숱한 속물들 속에서 드물게 순수했던 개츠비는 결국 파멸할 운명이었을까. 나는 그를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옛 연인 데이지와 그 남편의 부조리함이 미웠다. 그들의 심성은 어떤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함 또는 진부함’의 일종이리라.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와 같은 한 이상적 낭만주의자를 그려냈다. 그러나, 낭만주의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몰락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아이러니한 비애를 자아낸다.

2013년에 제작되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한 영화도 기대를 가지고 보았는데, 매우 화려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것이 온전히 영화의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디캐프리오는 비슷한 나이의 리버 피닉스가 요절한 뒤 지금까지도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나는 어쩐지 그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감정이입하는 데 자주 어려움을 느낀다. 지금의 사태 때문에 개츠비가 입길에 오르내리면서 뒤늦게 1974년도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었는데, 나로서는 훨씬 받아들일 만했다.

파티광이 아니며 한 여인에게 순정을 바치는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막대한 부의 출처가 범죄와 연루된 의심이 있고, 속물적인 여인에게 사랑을 바친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부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비현실적 낭만성이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는 ‘위대한’이라는 말이 적절하기도 하다. 우리가 모르는 놀라운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지금 회자되는 문자메시지만 보더라도 ‘승리’에게는 이 수식어를 붙일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승츠비’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 겨우 소설 속 인물 때문에 모욕감을 느끼느냐고? 아니다. 개츠비는 그럴 자격이 있다. 비록 피와 살이 없는 가상의 존재지만, 개츠비는 생기를 잃고 살아가는 우리 중의 어느 누구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피가 뜨겁고 존재감이 있다.

사랑이 호르몬 분비의 문제거나, 정신분석의 문제거나, 또는 경제적 교환의 문제임이 점점 뚜렷해지는 세상에서, 개츠비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개츠비는 그래서 위대하다. 믿으면 존재하고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의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한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목숨까지 바친 인물이다. 그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거나 물건처럼 다루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여인이 나라면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더 유명해지고 그로 인해 부자도 되는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건 대체 뭘까. 애초에는 어떤 재능이 유명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유명한 허깨비일 뿐인데도, 스스로 공인으로 생각하며 인기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분주한 사람이 즐비하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은 ‘유명인이란, 유명하다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펄쩍 뛸 일이 많지만, 스피노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는 걸 안 이후로는 가능하면 참으려 한다. “비웃지도 말고, 개탄하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라. 오로지 이해하라.” 그런데, ‘위대한 승츠비’라는 난감한 조어와 그들이 주고받았다는 메시지는 스피노자를 무색하게 한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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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현대문학, 2019)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와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 이 소설은 삼대(三代)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여성으로서 해당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삶은 신산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엄마들은 딸이 앞으로 살아갈 삶은 훨씬 더 나았으면 한다. 나와 같지 않은 삶을 꿈꾸는 일은 나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비단 엄마와 딸 사이뿐만 아니라 많은 관계에서 감정은 평면적이지 않다. 좋으면서도 싫고 한없이 고마워하면서도 못내 서운하고 사랑하면서도 틈틈이 미워한다. 이 모순된 감정들은 방패로 칼을 찌르는 것만큼이나 이상하지만, 우리는 어찌어찌 그 상황을 모면하면서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단출해졌을지언정, 그 관계 속에는 이미 역사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면서 ‘그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굳이 이전을 톺아보는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서 서로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응당 해야 하는 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가족이어서 더 말 못하는 일도 있고 가족이기 때문에 애써 숨겨야 하는 일도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가족에게는 자국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 자국은 불에 덴 자리처럼 바라볼 때마다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예전에 있었던 일, 그때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거의 매일, 남겨진 자국을 바라보며 동시에 새로운 자국을 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봐라, 인아야.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관계도 마찬가지다. 결이 안 맞는다고, 취향이 다르다고 외면하기 일쑤였던 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또한 쉽게 부서지는 사람, 취약한 사람이어서 내게 적대적인 사람을 만나면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럴 때면 관계를 낫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아왔는데도 단둘이 남겨지면 어색한 사이가 있다. 나는 지금껏 그런 순간을 피하려 잔머리를 굴리던 사람이었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전화할 데가 문득 떠올랐다고 말하며 잠시 자리를 뜨기도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낫게 하려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때도 있었다. 가족에게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감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 중 상당수가 실언이었다. 이해받으려고만 했지 정작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녹두전은 번번이 부서졌다.

친애한다는 것은 친밀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친밀한 사이, 그러니까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은 상대를 궁금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친밀함이 친애함으로 가닿기 위해서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귀담아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친애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토닥이며 관계를 노릇노릇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서로 좋은 말만 주고받아서는 형성되기 어렵다. 상대의 못난 점이나 부족한 점까지 내가 받아들여야 관계는 다음 단계를 맞이할 수 있다.

백수린은 소설 제목에 ‘친애하다’라는 동사를 두 번 썼다. “친애하고”와 “친애하는” 사이에는 다름 아닌 쉼표가 있다. 나는 그 쉼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랑하기 위해서, 마침내 친애하기 위해서 들이쉬는 심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참는 태도인가, 이해하기 위한 안간힘인가. 누군가를 친애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빽빽한 쉼표가 담겨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상대를 아로새기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만간 고향에 가서 엄마에게 물어봐야겠다. 엄마의 인생에 대해 들어둬야겠다. 엄마 인생에 촘촘히 난 자국들을 헤아리며 고백해야겠다. 엄마를 친애한다고. 친애하고, 친애한다고.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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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올지 모르는 시내버스는 불안하다. 그러나 도착시간을 알면 불안이 해소된다.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서비스가 호응을 받는 이유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입시제도는 불안하다. 미리미리 알고 있어야 불안을 덜 느낀다. 입시제도 3년 예고제가 지지받는 이유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불안을 부르는 입시다. 다른 입시도 마찬가지라 하지만 다른 입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입시운영 자체가 불확실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교과 성적, 즉 내신은 학종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런데 내신은 학종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도대체 그것은 학종의 최종합산점수에 얼마만큼,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대학과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애매하고 모호하게 추상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구체적 숫자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학생부 비교과, 즉 학생의 수많은 학교활동 또한 학종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학종 전체에서 그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점수로 환산되는 것일까? 역시 대학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역시 추상적 언어의 뒤로 숨을 뿐이다.

내신과 비교과만 그런 게 아니다. 자기소개서(자소서)도 그러하고, 면접도 그러하고, 구술고사도 그러하다. 그러나 대학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훌륭하고 좋은 일인 것처럼 말한다. 정성평가라는 그럴듯한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대학의 입장일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 입장에서 그것은 대학 맘대로 하는 평가, 대학 멋대로 하는 입시일 뿐이다.

대학이 이렇게 많은 것을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입시에서 학부모와 학생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물고기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물을 펼쳐야 하는 어부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하나하나의 입시요소에 대해 입시의 그물을 무작정 넓게 펼쳐 보는 수밖에 없다. 내신에 대응할 때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비교과를 준비할 때는 그것이 또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끝없이 조바심치지 않을 수 없다.

자소서만 해도 그렇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자소서라는 게 정말 별것 아닐 수 있다. 자소설이란 조롱까지 받는 게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대다수의 학부모와 학생은 자소서 하나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마치 그것이 입시의 전부인 것처럼 대한다.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수십 번 고쳐 쓰고도 결코 안심하지 못한다. 교사들도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섣불리 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소서마저도 이러한데 다른 것은 오죽할까?

입시의 세계는 나쁜 놈들의 세계다. 존재하는 것은 온통 나쁜 입시들뿐, 착한 입시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입시의 숙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학종은 유별난 존재다. 입시의 영역을 학생생활 전반으로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위선과 거짓의 행위마저 입시경쟁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자기(대학)들 마음대로 하는 평가로 학부모와 학생을 끝없는 불안 속에 빠뜨렸다. 대학과 입학사정관의 자의와 주관이 학생의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입시, 그 속에서 학부모와 학생은 물론 국민 다수가 불안해하고 있다. 학종은 불안을 먹고사는 입시다.

<이기정 서울 구암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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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은 높은데 손이 낮다(형편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으로는 ‘시렁 눈 부채 손’(또는 ‘실없는 부채 손’)이라고 하죠. 시렁은 옛날의 선반으로, 눈보다 한참 높아 키 작은 사람은 까치발을 해야 겨우 손이 닿았지요. 그러니 ‘시렁 눈’이라 함은 안목이 자기 주제보다 높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손은 또 ‘부채 손’입니다. 안타깝게도 안목만큼은커녕 남들만큼도 못하는 물갈퀴같이 조악한 손재주를 타고난 겁니다.

무엇이든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뚝딱 그리고 만들어내는 손을 요즘 금(金)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채 손’처럼 망치기만 하는 손을 금-은-동 해서 동손, 아니 똥손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림에 똥손이라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세상 제일 부럽고, 셈도 느려서 암산 척척 계산기 타다닥 두드리는 사람이 멋져 보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타고난 제 눈썰미와 기막힌 정리 능력에 탄복하며 어쩜 그렇게 전기며 배관, 도배에 기계와 컴퓨터 수리까지 못하는 게 없고, 흐트러짐 없는 책상을 늘 유지할 수 있느냐 궁금해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어?”

답은 하납니다. “잘!”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고 그냥 잘하는 게 바로 재주죠. 우리는 늘 남이 가지고 내가 못 가진 능력을 부러워하며 낙심합니다. 그것이 유행하고 인기 있을수록 못 가진 그것이 더더욱 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분명 있습니다. 노력해서 다 되면 세상에 천재가 왜 있겠습니까. 최근의 연구 결과도 ‘1만시간의 법칙’은 터무니없다며, 타고난 천재는 결코 못 따라잡는다 하죠. 그래서 요즘 그러잖아요. “안 되면 되는 거 해라.”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듯, 손발만 좋아서 머리는 고생할지 누가 또 아나요. 유행이 돌고 돌듯 빈천하다 여긴 내 것도 갈고닦으면 때를 만나 재주꾼 될 날이 있을 겁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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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고구마를 캐다가 금맥을 찾았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고구마인 줄 알았는데 펄떡이는 심장을 캐낸 형국이다. ‘버닝썬 사건’은 가수 승리의 성접대, 약물 강간, 불법 동영상 촬영과 공유, 공권력과의 유착 의혹까지 그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여성의 몸을 물건 취급하고, 성폭력 범죄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는 ‘남성연대’의 심장 말이다. 권력과 부가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는 자리에선 어김없이 드러나는 낡은 심장.

이 모든 게 연결돼 있다는 게 놀랍진 않다. 승리는 버닝썬에서 불법 약물을 유통하고, 이를 통해 여성을 강간하고 성접대에 이용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이 버닝썬의 범죄행위를 눈감고 비호해준 의혹도 드러났다. 이런 일들이 승리가 벌인 사업의 영역에서 벌어졌다. 승리와 친한 연예인들의 사적인 대화방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나. 가수 정준영은 성관계를 불법촬영해 공유했고, 참여자들의 대화에선 약물에 의한 강간이 있을 가능성도 드러났다. 2016년 여자친구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입건됐던 정준영은 ‘죄송한 척’을 한 후 경찰의 부실수사에 힘입어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

폭행과 마약, 성범죄 등 각종 논란에 휩싸인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이 지난달 17일 영업을 중단한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석우 기자

이들의 일터인 방송은 어땠을까. 정준영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줬다.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현재 드러난 ‘불법촬영 범죄’와 연관된 듯한 일을 언급하고, 남성 연예인들이 농담거리로 삼는 장면이 공중파를 타고 나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정준영의 ‘황금폰’에 있는 ‘도감’, 승리의 ‘외장하드’에 있다는 ‘야동’엔 이들의 대화방에서 오갔던 불법촬영 영상들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대중의 성의식을 왜곡시키는 데 일조했다.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연예인의 부와 권력으로도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현행법을 조롱하고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긴 했다. 그동안 봐왔던 유사한 사건의 주인공들은 유력 재벌이나 고위 공무원쯤의 감투는 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정도의 부와 명성만으로도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이것에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토대이며, 남성연대로 다져진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지금 승리-정준영 사건은 필연적으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과 ‘장자연 사건’과 만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유희나 여흥으로 여기고, 공권력과의 유착으로 범죄를 무마했다는 점에서다. 때마침 ‘장자연 리스트’의 목격자 윤지오씨가 10년간 해외에서 체류해오다 최근 귀국해 공개증언에 나섰다. 장자연 사건의 공소시효를 연장하고 재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도 60만명이 넘게 참여했다. 김학의 전 차관과 관련해서도, 부실수사를 입증하는 새로운 증언이 나오고 있다.

희망적인 것은 우리는 이제야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보는 법을 익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피해자 리스트가 떠돌고, 동영상을 찾는 움직임도 있지만, 동시에 SNS에선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는 포스터가 널리 공유됐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과거였다면 ‘남성 연예인의 일탈’ 정도로 넘어갔을 사건이 범죄로 정의되고 가해자가 중심의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을 가시화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킨 ‘미투 운동’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강간이 권력과 폭력의 범죄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문화적으로 강간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남성연대’(male bonding)의 실체를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는 “불균형을 바로잡고 우리 자신과 남성들을 강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여러 층위에서 함께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작은 문이 열렸다. 이제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힐 차례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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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회 답변에서 ‘치졸한 방식’이라고 꼬집었지만, 청와대가 창안한 ‘출생지 대신 출신 고교 표시’ 방식은 분명 분식 효과를 냈다. 7명의 새 장관 후보자는 출신 고교 기준으로 분류하면 서울 4명, 인천 1명, 경북 1명, 강원 1명이다. 지역 논란에서 비켜선 서울과 수도권 출신의 우위가 두드러진다. 덕분(?)에 박근혜 정부에서 전북 출신으로 호명된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는 경기고 졸업을 앞세워 ‘서울’로 돌아왔다. 역대 정권 중 편파 인사가 가장 극심했던 박근혜 정부는 조각 당시 호남 출신 장관을 2명으로 발표했다. 선대 고향이 전북 고창인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을 포함시킨 결과다. 태어나고 자란 것은 물론 전북도 정무부지사까지 지낸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금오공고를 다녀 ‘경북’ 포장이 씌워졌다. 이명박 정부 때 유인촌을 연상시킨다. ‘뼛속까지’ 서울 사람인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 조각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 내정되면서 전북으로 출신지가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북 완주 피란지에서 태어났다는 설명을 달았다. 정권마다 탕평을 꾸미려 변화무쌍한 세탁 방법을 개발해온 셈이다. “지연 중심 탈피”(김의겸 청와대 대변인)라는 어설픈 명분을 제쳐두고, 종전의 출신지 기준으로 재분류하면 호남 4명, 부산·경남 2명, 강원 1명으로 바뀐다. ‘고교 기준’으로 지역 분포가 확 바뀐 셈이다. 놀라운 탕평 기술이다.

정권마다 고위공직 인사를 하면서 ‘고향 세탁’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탕평의 대의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인사 공약’의 앞줄에 지역 탕평을 내세우는 이유다. 분명 능력이나 전문성보다 출신지를 중시하는 전근대적인 인사 관행의 고리를 끊어가야 한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살아 출신지 자체가 모호해진 시대 변화를 감안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탕평 인사를 팽개칠 수 없다. 지나친 편중 인사가 초래하는 폐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균형발전과 사회적 탕평을 통해 지긋지긋한 지역주의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악마적인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는 인화성 높은 사안이 인사 차별 시비다.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정치 세력에 발판을 마련해 주고, 지역주의 선동의 자양분이 되기 일쑤다. 실제 사실과 유리된 ‘참여정부 호남홀대론’이 어떻게 악성으로 진화해 2016년 총선에서 작동했는지를 돌이켜보면 된다.

지역균형 인사를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분석 모델이 있다. 인구 대비 차관급 이상 정무직 진출 비율을 비교분석한 연구다.(<행정논총, 제56권 3호> ‘정무직 공무원의 균형인사’) 정무직 숫자가 인구에 비해 많으면 우대지역(+), 적으면 홀대지역(-)으로 분류된다. 노무현 정부는 영남 3.93%, 호남 2.06%로 영호남이 크게 차이가 없는 우대지역으로 나타난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영남 4.76%, 호남 -7.43%로 바뀌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영남 5.68%, 호남 -10.09%로 편중이 극심해졌다. 특정 지역이 지나치게 ‘과소대표’되는 -10% 이하가 나온 것은 이승만 정부 때 호남(-12.42%) 이후 처음이다. 다른 지역의 역대 정부에서 -10%대를 기록한 적이 없다.

민주화 이후 어렵게 진척시켜온 지역차별과 인사편중 개선 지표를 물거품으로 만든 박근혜 정부의 역주행 탓에 영정조 시대의 화두였던 ‘탕평’이 5G 시대에도 과제가 되었다. 문 대통령도 대선 기간 수없이 탕평과 통합의 인사를 공약했다. 이런 다짐까지 했다. “장차관 인사 때마다 지역별 비율을 국민께 보고 드리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편중 인사의 유혹을 끊어 내겠다는 뜻이었을 터이다. 실제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 정권의 극심한 지역편중은 빠르게 전복되어 정상화되었다. 앞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 1기 내각 당시 문재인 정부는 호남 6.54%, 영남 5.33%였다.

편중 인사 유혹을 버려야 하는 것은 이제부터다. 정권 후반으로 갈수록 충성도와 지지기반에 집착하는 인사 수요가 커지기 때문이다. 출신지를 ‘고교 기준’으로 바꾸고서야 ‘3·8 개각’의 탕평을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위험신호일지 모른다. 출신지를 분식한들 명분은 사라지고 세탁의 의도만 뾰족해질 뿐이다. TK(대구·경북)와 충청권 언론 등에서 나오는 뾰족한 언어들이 자극적이다. 탕평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악인 박근혜 정부와 비교해 개선된 것만으로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치졸하게” 출신지 세탁까지 하게 된 지금이 초심을 돌아볼 때다. “현 정부 인사에 대해 국민들이 역대 정권을 통틀어서 가장 균형인사, 탕평인사, 통합적인 인사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주고 계신다. 앞으로 끝날 때까지 그런 자세로 나가겠다. 지역탕평, 국민통합 이런 인사 기조를 끝까지 지켜나갈 것을 약속 드리겠다.”(취임 100일 기자회견)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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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노랗게 제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산수유에 벌 한 마리가 악착같이 들러붙어 귓속말을 전한다. 집요한 중매쟁이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보라지만 꽃은 아무런 흥미가 없다. 그저 올봄의 꽃밥을 만드는 데 열중할 뿐이다. 바람을 불러 도리질을 해 보지만 잉잉거리는 벌은 막무가내다. 꽃가루 대신 탄력이라도 달라고 찰거머리같이 덤빈다.

따뜻한 봄볕에 등을 지지는 감나무 아래 암탉이 동생 둘을 데리고 ‘뒤안’을 뒤지고 있다. 땅에게 뭘 좀 먹을 걸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낙엽을 뒤집고 흙을 쪼으며 여린 부리로 먹이를 찾는 닭. 아직 땅이 제대로 안 녹았는지 가끔 고개를 들고 먼곳을 보며 공중에 부리를 닦는다. 최선을 다하는 닭들의 거룩한 식사.

ⓒ최영민

참 열심히 산다. 그 옆에는 이런 먹이를 광고하고 있다. 닭백숙/흑염소/오리/연회석완비/010-XXXX-XXXX. 지금 옹골찬 암탉 한 마리 잡아서, 뜨겁게 삶으면, 기름기가 좌르르르…. 입맛을 다시며, 고인 침을 닦으며, OO농장의 전화번호를 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나는 참으로 속(俗)되도다. 시냇가 한쪽에 개구리 알이 수북하다. 어떤 건 제법 성숙해서 눈알이 뒤룩뒤룩하다. 곧 올챙이로 쏟아져 나올 기세다. 옆 잘록한 웅덩이에는 올챙이들이 바위로 올라가려고 발 없는 꼬리로 발버둥친다. 용수철처럼 상승하려는 기운이 물씬! 이 세상의 봄은 이런 연약한 것들의 기운과 동작이 모이고 모인 집합일 테다. 21일은 춘분(春分)이다. 춘분은 수상한 봄이 봄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서 봄은 비로소 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여기는 경주와 포항이 맞붙은 운제산(雲梯山) 산여계곡이다. 혼자 특출하게 높지는 않아도 원효를 비롯한 신라 고승들이 구름의 사다리처럼 데리고 다닌 산이다. 모두들 어깨를 걸고 있는 형제처럼 다정하다. 낙엽더미 풍성한 곳에 날개현호색이 있다. 지체없이 몸을 풍덩 던졌다. 잎은 댓잎처럼 가늘고 꽃잎 옆에 날개 모양이 뚜렷하다. 낙엽들이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흙으로 녹아들 때 그 어디로 비상하려는 듯! 날개현호색,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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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반기문씨가 유엔 제8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 뜻밖에도 중국의 반(潘)씨들이 들썩였다. 그들은 반 총장이 중국 반씨의 후예라며 유엔 사무총장 배출을 반씨 종친의 영광이라고 기뻐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중국 허난성 싱양시의 반씨 시조마을 반요(潘窯)였다. 이곳 반씨들은 “중국 반씨의 시조의 63세손 반문절·반문장 형제가 고려 때 한반도에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국의 반씨 종친회 대표를 초청해 시조묘에 합동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2009년 푸젠성 고고학계는 “반 총장 조상의 원적지가 푸젠성 취안저우(泉州)”라고 밝혔다. 싱양에서 갈라져 나온 반씨가 취안저우 반산(潘山)에 뿌리를 내린 뒤 한 지파가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또 한국 반씨의 원적지가 푸젠성의 취안저우가 아닌 푸톈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국 반씨의 뿌리로 푸톈, 취안저우, 싱양 등으로 갈리지만 중국이란 점은 일치한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글로벌지속가능발전포럼(GEEF)'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 중국의 반씨들은 반기문씨의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을까. 중국인의 핏줄이 유엔의 수장이 됐다는 혈연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반기문 총장에 대한 시각과 기대가 투영됐다고 보는 게 옳다. 당시 노무현 참여정부 때의 한·중관계는 호전상태였다. 중국으로서는 라이벌 국가인 인도의 후보보다는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적격이라고 여겼다. 중국이 반 총장을 적극 밀었던 이유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반기문 총장은 중국의 인권문제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2015년 중국 인민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이듬해에는 중국 국민에게 중국어 신년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지난 17일 문재인 정부의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미세먼지 해결의 구원투수로 나선 셈이다. 한반도의 미세먼지 문제는 국가적 난제 중의 난제다. 주변국, 특히 중국의 협조와 이해 없이는 풀어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외교에 밝고 중국인들에게 친숙한 반기문 전 총장은 적격으로 보인다. 유엔 사무총장 시절 기후온난화 해소 등 기후환경 분야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 반 전 총장이 미세먼지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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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여야 4당 지도부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선거제 개편안 단일안에 합의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이들 4당은 선거제 개편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처리하기로 하고, 당내 추인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바른미래당과 평화당 일각에서 선거제 개편안과 패스트트랙 법안을 놓고 이견이 표출되고 있다. 제1야당인 한국당은 아예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법안을 모두 막겠다고 나섰다. 시민적 요청에 따라 어렵사리 도출된 선거제 개편안이 기로에 섰다.

4당 간 합의된 선거제 개편의 핵심은 ‘지역구 225석·권역별 비례 75석 고정, 연동률 50% 적용’이다. 현재의 의원 정수 300명을 그대로 둔 채 지역구를 225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를 75석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이는 각 정당의 득표율을 100% 연동시켜 비례대표를 뽑자는 시민들의 요구와 거리가 있다. 의원을 늘리는 데 반대하는 여론을 감안하면서도 득표율과 의석수 간 편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짜내다 궁여지책으로 낸 타협안이다. 이 개편안이 채택되면 전국 단위가 아닌 권역별로 득표율과 비례대표 의석수를 연동함으로써 그나마 사표를 줄여 소수의견을 반영할 단초는 마련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한국당은 이런 선거제 합의를 정의당 등 좌파 정당만 키워주는 정치적 야합이라며 개편을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수처 법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도 독재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이라면서 통과시킬 수 없다며 막아섰다. 한국당은 그동안 선거제 개혁안을 두고 당의 안조차 내놓지 않은 채 버텨왔다. 그런데 한국당을 제외한 정당이 뜻을 모으자 뒤늦게 모든 정당 간 합의처리를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후안무치하다. 한국당이 선거제 개편에 반대하는 것은 영남 등 강세지역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뜻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시민들을 바보 취급하는 공당답지 않은 주장을 접어야 한다.

선거제 법안은 모든 정당 간 합의로 처리하는 게 원칙이다. 선거제를 다른 법안들과 연계해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반드시 선거제 개편을 이뤄내야 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거대 양당의 극한대결이고, 이는 지역주의와 소선거구제에서 기인하고 있다. 한국당이 이런 시민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4당만으로 패스트트랙을 추진하는 게 옳다. 바른미래당과 평화당 내 반대파들도 대의와 현실을 존중하는 자세로 선거구제 개혁에 힘을 보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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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이 둘은 상충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가집니다. 법원은 언론의 힘이 약했던 1980년대까지 언론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을 했습니다. 서울 올림픽 후로 언론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리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는 인격권 보호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국가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칠 공론의 장이나 공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을 위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책임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대법원 판결에 표현의 자유에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표현의 자유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위축 효과를 없애려는 배려입니다. 역사는 언로(言路)를 터서 보장하고 시민과 언론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꾸준히 암시해 왔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반(反)공산당 기류가 정국을 휘감았습니다.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선언한 후의 일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미국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온전한 표현의 자유는 없었습니다. 1960년대 워런 대법원장 시절로 불리던 시기에 접어들며 미국 연방대법원은 현실적 악의를 증명하지 못하면 언론은 면책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국 언론은 날개를 펼칩니다. 현실적 악의론을 선언한 뉴욕타임스 판결이 1964년 선고됐습니다. 그때부터 딱 10년 후에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리며 퇴임합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지속적인 보도가 이어지면서 언론이 민주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2002년을 전후하여 대법원 판결에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숨 쉴 공간’ ‘위축 효과’처럼 사상의 자유 시장을 염두에 둔 표현들이 판결에 등장합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숨 쉴 공간’을 찾아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년 정도 지난 2016년에 현직 대통령과 측근의 비리를 알리는 보도가 고개를 들었고, 언론은 시민들을 광화문광장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공적 인물을 희화하거나 논평할 자유도 포함합니다. 희화와 논평에는 때때로 모욕적인 표현, 불쾌한 표현이 섞일 수 있습니다.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세 가지 중 하나 같습니다. 외면하거나, 웃어넘기거나, 화를 내거나. 대중은 공적 인물에 대해 이 가운데 어떤 반응을 기대할까요?

“정치 만평은 공격 무기이자, 냉소와 조소와 야유를 위한 무기이다. 만평이 어떤 정치가의 등을 두드려 칭찬하고자 하는 때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보통은 벌침과 같은 때에 환영받고, 항상 상당 부분 논란을 야기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8년 허슬러지 사건 판결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허슬러지는 광고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저명한 인물을 상대로 심각한 모욕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판결은 대중이 저급한 패러디 광고를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제합니다. 정치 풍자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시원하게 한 번 웃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공격 대상과 그 측근에게는 풍자나 논평을 외면하거나 같이 웃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대처입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대중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요새는 위축되기보다는 의아해할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집단 인식을 가진 대중이 공적 인물보다 더 현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화가 난다면 허슬러지 광고에 나온 말을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패러디입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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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가업상속공제 대상과 공제액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상속·증여세법 개정논의가 진행 중이다. 가업상속공제란 중소·중견기업의 승계과정에서 상속세가 경영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깎아주는 것이다. 논의되는 주요 내용은 대상기업을 현재의 연매출 3000억원 미만에서 1조2000억원 미만으로 확대하고, 공제한도도 5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대폭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상속세를 공제받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의 완화도 들어있다. 정부와 여당도 가업상속공제의 완화에 긍정적이다. 과도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완화함으로써 가업승계를 활성화하고, 경제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공제요건 완화는 자칫 과도한 혜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07년 가업승계제도가 도입될 당시 대상은 중소기업이었고 공제한도도 1억원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대상과 공제한도가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번에 공제대상 기업을 3000억원 미만에서 1조2000억원 미만으로 완화하는 것은 대기업에까지 혜택을 주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당초 중소·중견기업에 가업승계를 돕겠다는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 고액자산가와 대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은 조세정의에도 어긋난다. 지나친 상속세 혜택은 기업혁신을 저해하고 부의 세습만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회에는 가업상속공제와 관련해 “현재의 과세체계가 일부 기업인들에게 과도한 혜택을 주고 있다”면서 이를 줄이자는 내용의 법안도 올라와 있다.

국회와 정부는 가업승계세제의 논의에 앞서 운영실태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가업상속공제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이용실적이 저조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370만개 중소·중견기업 가운데 이용하고 있는 곳은 연간 60곳에 불과하다. ‘엄격한 사후관리’ 요건이 가장 큰 원인이다. 공제를 받으려면 피상속인의 경영기간, 가업용 자산의 유지, 정규직 노동자 수 유지 등을 충족해야 한다. 이 조건들은 현실적으로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먼저 현 제도의 보완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다. 공제대상과 공제액을 확대하는 것은 나중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차제에 실증적인 자료 분석을 통해 가업승계세제 전반에 대한 장기적인 개선방안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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