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었음을 얼마나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으니! (…) 뒤쪽이 진실이다! ….”

오래 지니고 있는 책 <뒷모습>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2002년 출간되었으니 어느 새 17년 묵은 책,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진집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저명한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와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가 공동 작업으로 펴냈다. 국내에는 불문학자 김화영이 옮겨 현대문학에서 출간했다.

에두아르 부바는 일상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남녀노소 50여명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가 등을 보이고 있다. 뒷모습이 핵심이다. 곰 인형을 등에 업은 소녀, 키스하는 남녀, 소를 앞세우고 쟁기를 메고 가는 농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등이 굽은 할머니, 엎드려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 홀로 또는 여럿이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 부바의 사진작품마다 투르니에는 시적인 문장을 곁들였다.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사진과 시적인 글이 짝을 이루다 보니 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읽는 즐거움까지 준다. 그래서 문득 생각날 때마다 편하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뒤쪽이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앞쪽은 얼굴로 온갖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손짓은 물론 발짓과 어깻짓으로도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뒤쪽은 앞쪽에 비해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그저 넓적한 등과 어깨, 엉덩이가 있을 뿐이다. 꾸며내거나 거짓말을 할 방법이 없으니 솔직하고 정직하고 또 진실할 수 있다. 투르니에가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천명한 것을 보이지 않는 이면, 숨겨진 진실을 보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화제가 된 사건들이 있다. 공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의구심을 가지는 사건들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 장자연씨의 죽음, 이제는 ‘사건’에서 ‘게이트’로 변하는 ‘버닝썬’이 대표적이다. 의구심은 앞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뒤쪽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실제 김 전 차관과 장자연씨 사건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여러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얼굴이 아니라 등에,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것 같은 진실을 주목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 이 사건들을 콕 집어 철저한 진상규명을 지시했다. 법무부 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은 득달같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 마치 검찰과 경찰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실토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명확한 규명, 가려진 진실이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들 사건은 우리 사회의 권력층 인사들, 검찰과 경찰까지 얽혀 있어 더욱 그렇다.

이 사건들과 관련된 뉴스를 접하면서 <뒷모습>을 다시 펼쳤다.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투르니에의 말이 새삼 다가온다. 가수이자 방송인인 정준영과 ‘제2의 정준영’들이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주고받은 문자들을 보면서는 더 절감했다. 팬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준영은 성관계 동영상을 몰래 촬영해 거리낌없이 단톡방에 공유했다. 공유가 아니라 자랑했다. 다른 인기 연예인들은 그 영상을 보며 히히댔다. 스스로들 ‘쓰레기짓’임을, 범죄임을, 부도덕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공범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방송 카메라 앞이나 무대 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진정한 실체는 정면이 아니라 뒤쪽의 단톡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투르니에의 말이 맞다. 이제 그들은 각자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고, 부도덕성을 질타받는 게 마땅하다. 물론 그들의 소속사인 연예기획사,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으로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들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세웠던 방송사들도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오고간 그 단톡방 문자들을 보면서 그들만의 행태일까라는 자문도 한다. 여성의 성이나 신체를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의 뒤쪽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단톡방 문자가 공개된 이후 거리낌없이 벌어지는 2차 가해를 본다. 왜곡된 성의식과 성문화, 관음증까지 내면화되는 한국 사회의 솔직한 뒷모습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단톡방을 한번쯤 살펴보자. 어쩌면 나의 진정한 실체도 앞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지 성찰할 때다.

<도재기 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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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열렸다. 3인 가족이면 1억원 넘게 벌었다는 얘기다. 선진국 진입의 징표라는 이 기준을, 인구 2000만명을 넘는 국가 중에서는 아홉 번째로 달성했다.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성장’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정부는 이 호재가 남의 나라 일인 양 조용하기만 하고, 오히려 국민은 정부의 경제무능을 하염없이 탓하여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탄 수구세력은 국가위기라 선동하며 극복을 위해 기업의 효율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 김용균씨, 고 황유미씨는 그들의 기억에 없다. 최저임금을 낮춰야만 하고 사람의 생명을 돈 몇 푼으로 바라보는 저열한 기업의 노동환경개선 속도를 늦춰야 한단다.

미세먼지와 폭염의 고통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감내해야만 한단다. 기업이 지금보다 돈을 더 잘 벌어야 국민이 잘산단다. 그래서 규제를 타파해야 한단다. 급기야 정부는 타당성도 없는 토건사업에 수십조원을 쏟아붓는단다. 기업만 배불린 ‘4대강사업’은 ‘고향의 강’ ‘생태하천’사업으로 둔갑하여 더 빠른 속도로 하천을 유린하고 모든 산에 케이블카를, 모든 지자체에 공항을 건설할 기세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진다. 개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이고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설명하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경제는 더욱 그렇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한국은 자원이 없어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럼 수출이 잘되면 국민이 잘살아야 하는 것이 기본 이치이다. 작년 한국의 수출은 역사상 최초로 6000억달러를 돌파했고 경상수지 흑자는 80개월 넘게 연속되고 있다. 2008년까지 많아야 200억달러 수준이었던 연간 흑자규모는 2009년을 시작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2013년부터는 매년 700억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에도 저축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무를 늘려 2013년 500조원이 채 안되던 빚이 작년에는 700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부터 작년까지 무역 흑자는 5000억달러를 넘었고 빚은 200조원이 넘게 증가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고, 정부가 돈을 뿌렸는데도 정작 대다수 국민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피폐해지고 빚만 늘어갔다. 대기업의 재산은 주체할 수 없이 늘었는데 일자리는 줄고 실업자가 늘어난다. 파이가 커지는데 국민에 돌아오는 양은 더 작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업을, 자본을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하고 자본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전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면, 오염물질을 덜 배출하게 하면 기업이 힘들고, 돈이 정체되고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위기가 온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좀 솔직해지면 안될까? 규제 완화 정책은 극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이다. 오죽하면 무노동의 건물주가 최고 선망의 직업이 되었겠는가?

낙수효과는 없다. 이제 경제성장이 우리를 잘살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기업의, 자본의 효율성 강화라는 명목으로 시행된 각종 규제 완화로 서민은 더욱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만 할 때이다. 지금 주장하는 효율성 강화는 쉬운 해고와 낮은 임금체계로 노동을 착취하거나 환경파괴행위를 용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강화된 효용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지만 정작 국민의 삶과 국토는 유린된다. 미국의 리먼사태 이후 경제부양에 쏟아부은 돈의 90%는 정작 위기를 초래한 1%의 부자에게 돌아갔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다. 경제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예비타당성조사도 없이 퍼붓는 토건비용은 부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언어모순에서 벗어나, 촛불정부의 초심으로 돌아간 ‘나눔주도성장’이 절실해 보인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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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민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매일 새롭다. ‘신행정수도’의 우여곡절 논쟁을 거쳐 2007년 건설의 첫 삽을 뜬 지 불과 10년 만에 인구 30만명이 정주하게 된 이곳은 경이로운 ‘순간’ 도시이다. 최근에는 국회 분원 입지연구가 시작되고, 대통령 제2집무실 태스크포스(TF)도 구성되어 향후 세종시의 진화 양상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

현재 건축전문가 대다수는 세종시에 대해 별로 좋은 소리를 안 한다. 건물 디자인에서부터 가로환경 디테일까지 긍정적 언급이 드물다. 도시계획가도 비슷해, 토지 이용은 물론 교통 및 주차 체계에 대해 아쉬워한다. 지표면적의 절반 이상이 공원녹지인 도시인데, 조경가 역시 오픈스페이스의 경관에서부터 바닥재질까지 흡족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불만에 공감하는가? 세종시 환경에 대해 어떤 근거로 설명하는 게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을 가질까?

국토교통부의 2017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세종시에 대한 건축·도시계획·조경 전문가들의 부정적 의견에 비해 주민들의 주거환경에 대한 평균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그리 낮지 않다. 공원녹지, 보행 안전, 치안, 주변 청결, 지역 유대 등과 같은 항목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한다. 오히려 문화시설과 의료시설에 대해서 큰 아쉬움을 보인다. 특히 문화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표출하고 있다.

세종시를 처음 구상할 때, ‘세계적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대규모의 국립박물관단지가 계획됐었다. 이에 대한 마스터플랜도 국제공모를 거쳐 2016년 말 선정되었다. 이후 개별 박물관의 건립 준비작업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도시건축박물관만 하더라도 몇 차례 초기 스터디와 콘텐츠 및 전시기획 기초연구가 있었지만, 적절한 후속작업은 미흡했다.

도시도 변하지만, 박물관 자체도 변하고, 전시 대상으로서의 도시건축 콘텐츠 역시 크게 변한다. 흔히 고지도, 고문서, 계획 초기 도면, 오래된 사진, 문헌, 모형 등이 도시건축박물관의 고전적인 콘텐츠로 여겨지지만, 이것으로 새로운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을 채울 수 없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전적이라 때론 새롭지 않다고 폄하되기도 하는 이 귀한 역사자료들 자체가 우리에게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모순적 이유로 우리에게는 획기적인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 전통뿐 아니라 일상의 도시건축 콘텐츠가 신기술과 만나, 신개념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도시건축박물관 내용으로 새롭게 대상화하지 않고서는 다른 해법이 현재 희박한 상황이다. 서울 성공회성당 앞의 도시건축박물관,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도시건축센터, 그리고 정동의 국토발전전시관보다 훨씬 더 심화, 진화한 방식으로 세종시의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획을 위해, 이제껏 국립박물관단지 실행계획이 다소 늦어지고 있는 점이 역설적으로 다행일 수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건설속도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급속의 압축성장시대를 견뎌온 우리 사회가 이제는 차분히 우리 도시건축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그곳에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미래 삶의 모습으로 향해 가고 싶은지, 새삼 새로운 공부와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학습이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의 실행 기반으로 작동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명품 신도시, 국민통합과 균형발전의 친환경 도시, 상생과 도약의 지속가능 도시’ 등 세종시에 붙여진 공식 명칭이 여전히 공허하다. 국회 분원과 대통령 제2집무실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이즈음, 세종시와 우리 도시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채워줄 국립박물관단지의 논의가 함께 구체화되길 바란다. 미국 워싱턴시가 자랑하는 그 도시의 정주성과 정체성은 행정, 사법, 입법의 기능과 함께 큰 축으로 작동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군의 다양한 문화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박소현 건축도시공간연구소장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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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은 범죄자의 죗값을 고통으로 치르게 하는 거다. 가장 확실한 고통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자유를 제한하여 고통을 주도록 설계된 제도이니 갇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신체의 자유 제한에는 가족 관계의 단절, 생계 박탈, 사회적 평판의 추락 등 따라붙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만4774명이 감옥에 갇히는데,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구금자는 1만8867명으로 전체 수용자의 34.5%다. ‘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면 상당한 숫자를 줄일 수 있다. 예산도 줄이고, 피고인의 방어권도 보장하며 진짜 범죄자인지를 가리기 전에 형벌을 주는 왜곡도 막을 수 있다. 구속은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칠 것 같은 사람을 잡아두기 위한 이례적 절차이지만, 현실에서는 유무죄 판단보다 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나쁜 범죄자, 기각되면 죄가 없거나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된다. 간편한 도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기관들은 구속에만 매달린다. 자기들의 수사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법원에는 거센 여론과 맞설 배짱 같은 것이 부족해 보인다. 구속영장을 발부하지만, 억울하면 나중에 재판받을 때 얼마든지 소명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부담감을 덜어내는 식이다.

형사사건의 핵심은 감옥에 가느냐 아니냐로 갈리지만, 이게 꼭 공정한지는 늘 의문이다. 재벌들에게 적용된다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법칙’이 보여주듯, 감옥행이 죄질에 따라 갈리는 것도 아니다. 당장 김학의 사건 등 여러 낯 뜨거운 사건들만 해도, 결국은 누구는 힘이 있어서 다른 누구는 어떤 배경이 있어서 감옥에 가지 않았고, 기본적인 수사조차 피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특권층과의 유착에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유독 흉악하거나 매우 위험해서 반드시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당장 중요 범죄의 발생 건수 자체가 줄고 있는데, 감옥은 연일 과밀수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만 해도 그렇다. 지난 10년 동안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범죄 자체가 줄어드니 수용자도 줄어드는 당연한 결과다. 2013년 절도사건으로 갇힌 사람은 4650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3858명으로 줄었다. 놀라운 성취다. 반면, 사기, 횡령 등 경제사범으로 구금되는 사람들은 같은 기간 5024명에서 7630명으로 크게 늘었다. 결국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갇히는 사람들만 잔뜩 늘어난 셈이다.

법정 구속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과밀수용의 원인이 되었다. 2013년에는 연간 753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만2378명이었다. 법의 준엄함을 보여준 것은 좋지만, 범죄 발생 건수 등에서 별다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고 주요 범죄 발생은 큰 폭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유독 법정 구속만 늘고 있다는 것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각급심의 재판기간이 계속 늘어나는데 법원이 구속재판을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입구가 활짝 열린 감옥 문제, 특히 과밀수용 때문에 교정교화든 재사회화든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구 전략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감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감옥에서 나오는 길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 정해진 형을 다 마치고 만기 출소하는 경우, 아니면 가석방을 통해 조금이라도 일찍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가석방은 출구 전략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만, 무엇보다 교도소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감옥생활은 더딘 시간과의 싸움이 핵심이다. 그러니 수용자 입장에서 가석방은 기대볼 만한 유일한 희망이다. 교정당국 입장에선 확실한 유인책이기도 하다. 질서를 잘 지키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를 열심히 한다는 차원에서 자격증이라도 따면,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교도소 운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교정당국이 수용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당근이다. 징벌을 주거나 심한 경우 추가 범죄로 단죄하는 등의 채찍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회도 채찍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형벌을 주는 것이지만, 세상 어떤 나라도 단순한 응보적 형벌만으로 감옥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다시는 범죄로 빠지지 않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방도를 마련하는 게 교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가석방은 교정활동의 실질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석방 여부를 정하는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수백명의 심사자료를 한꺼번에 검토할 뿐이다. 얼굴을 맞대고 수용자의 재활의지를 직접 묻고 확인하는 일은 없다. 음주운전, 마약, 성범죄 등 가석방 제한 사범을 정해두는 식으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법원, 검찰, 학계와 교정관계자가 참여하는 지금의 틀을 유지하되, 각 교도소마다 가석방심사위원회를 두고 실질적인 심사를 해야 한다. 수용생활을 하면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 사회에 나가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 믿을 만한 근거는 뭔지 묻고, 직접 답을 듣는 가석방심사가 되어야 한다.

감옥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대폭 늘려야 한다. 그저 가둬두는 것만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석방을 활성화해서 수용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든 희망이 없는 곳은 그저 지옥일 뿐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그 위험이 해소될 때까지 격리하는 게 맞지만,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감옥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공간이다.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고이고 썩게 된다. 지금 한국의 감옥 현실이 그렇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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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KBS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방영하고 있는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생존주의 시대답게 청소년 100명이 50문제를 풀면서 매 순간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포맷이다. 50문제를 모두 맞힌 사람은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하다보면 중간에 학생들이 대거 탈락하는데, 패자부활이란 이름의 매우 간단한 게임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50번 문제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탈락한다. 가끔 최후까지 살아남은 한 명이 50번 문제에 도전할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한 명이구나.’ 일상의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한 지금 사회 전 성원이 모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 좌절과 냉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달래어 다시 생존경쟁에 복귀시켜야 한다. 패자부활 게임이 필요한 이유다. 힐링을 시켜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생존경쟁에 복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도 문제지만, 문제의 수준도 그에 못지않다. 2016년 나온 문제다. “다음 중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닌 사람은? 1) 톨스토이 2) 타고르 3) 앙드레 지드 4) 펄 벅 5) 헤르만 헤세.” “멘델스존 <결혼 행진곡>은 요정들과 청춘남녀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입니다. 어떤 작품일까요?” 도대체 이따위 문제를 풀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읽지도 않은 책, 감상하지도 않은 음악 ‘제목’을 알아맞힌다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장학금 주고 명예의전당에 이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오른 어느 최후 생존자의 고백이다. “방송 퀴즈라는 게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생각나지 않으면 절대 맞힐 수가 없거든요. 여유 시간을 5초 더 준다고 하여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50문제 모두 제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왔으니 정말 행운이었던 거죠.”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을 해야 하는 문제를 잘 맞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이 골든벨 최후 승자는 대학 들어간 지 몇 년 채 되지도 않아 사법시험에 붙었다. 도대체 시험문제가 어떻기에?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나온 역사 문제다. “다음 중 고려후기에 閔漬가 편찬한 史書는? 1) 古今錄 2) 千秋金鏡錄 3) 本朝編年綱目 4) 史略 5) 編年通錄.” 응시자가 읽어보지도 않았을 역사서 이름 알아맞히기 퀴즈다. 대부분 이름만 전하는 역사서라 접할 수조차 없다. 엘리트가 치르는 사법시험이니 한자(漢字) 읽기 능력 검증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쨌든 골든벨 퀴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제를 잘 푼 사람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언론계의 특권층이 되어 온 나라를 쥐락펴락해왔다.

그나마 이제 사법시험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사정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시험문제를 보면 대부분 정보의 옳고 그름을 묻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다. 기껏해야 암기한 단순 지식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추론하는 논리 문제다. 인지능력 테스트인 셈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에는 참과 거짓을 순식간에 인지적으로 식별해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이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자극-반응에 몰두하다보면 자아가 축소되기 마련이다. 보다 일반화된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대상화해서 타자들과 정서적·도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감퇴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현재 ‘온 나라 공무원 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퀴즈풀이 결과로 한 줄 세워서 극소수의 승자에게는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특권을, 나머지 대다수 패자에게는 지나친 열패감과 차별을 평생 각인시키는 ‘골든벨 사회’. 2018년 9급 공무원 한국사 문제다. 자, 다 같이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다음 해외 견문 기록을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표해록 ㄴ. 열하일기 ㄷ. 서유견문 ㄹ. 해동제국기”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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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수 세계 1위’ ‘휘게 라이프의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구시청 청사 로비에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 4명의 동상이 서 있다. 그중 한 명은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원자물리학의 교황’ ‘양자역학의 아버지’인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이다. 그가 설립한 코펜하겐 대학의 닐스 보어 연구소는 1920년대부터 2차대전 후까지 세계 물리학의 중심이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보어 자신이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그의 아들 아게 보어(1975년)를 포함, 노벨상 수상자를 4명 배출했다. 1939년 세계 최초로 핵분열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원자력 연구의 중심이었던 덴마크에는 지금 원전이 없다. 1985년 덴마크 의회가 원전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일어나자 석유에너지 의존도 95%(석탄 포함 99%)에 이르렀던 덴마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대안으로 원자력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이때부터 12년 동안 논의한 끝에 원전 포기를 국가정책으로 확정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비추면 덴마크의 탈원전 결정은 동화 같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국내 원전주의자들이 덴마크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연구 역량까지 갖고 있다면 탈원전의 탈자도 꺼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의 원전주의자들은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고 하지만 실상은 반대이다. 원전을 새로 짓는 나라는 중국과 몇 나라 외에는 없다. 지난해 착공한 원전도 전 세계적으로 단 2기뿐이다. 탈원전 비판 논리도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다 무너진다. 최근 탈원전 정책 때문에 미세먼지가 심각해졌다는 주장은 완벽한 가짜뉴스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원전 가동 중단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원전 발전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부실공사가 드러난 데 따라 원전에 대한 안전을 점검하느라 벌어진 결과일 뿐 탈원전 정책 때문이 아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해외 원전 공사 수주를 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왜곡이다. 지난해 영국 원전 수주에 실패한 것은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수주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영국 가디언지 기사에서 맨 뒤에 잠깐 언급됐다. 이것을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해 핵심 요인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탈원전 정책 탓에 핵 공학 관련 학과에 학생이 줄었다는 주장도 코미디다. 대학에서 영원히 잘나가는 학문·학과는 없다. 원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원전주의자들이 목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깨어진 원전 불패 신화의 조각을 붙들고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탈원전 12년 토론은 치열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집착한 보어의 이상과 학문적 전통을 포기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원전은 짓지 않지만, 원자력 연구는 계속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은 그 산물이다. 원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연구는 이어가자는 것이다. 사시사철 균질하게 부는 질 좋은 바람이 풍력이라는 대안 에너지에 힘을 실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토론에 가장 기여한 것은 덴마크의 정치다. 덴마크는 지금도 좌우 정당 간 의석수가 1석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한 뒤 결론이 나오면 인정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정치문화가 건강한 원전·탈원전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탈원전 법안을 통과시킨 이듬해 체르노빌 사고로 전 유럽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덴마크 사람들은 “원전을 짓지 않기로 한 우리 결정이 옳았다”며 안도했다.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기존 3개의 원자로를 차례로 닫았다. 원전 셧다운을 실현하면서 전기에너지의 70%를 풍력으로 대체한 최고의 친환경 에너지 국가로의 변신을 완성했다.

현 정부의 정책대로 간다고 해도 완전한 탈원전에 이르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원전 정책을 놓고 토론할 60년이라는 시간을 받아놓은 것이다. 미래를 전망할 근거가 부족하면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는 게 과학하는 자세다. 원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억지 주장이 합리적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자유한국당도 탈원전 비판에 올인할 게 아니라 향후 원전 공약을 고민해야 한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쪽도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탄소를 덜 배출하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전의 효용도 무시할 것만은 아니다. 빌 게이츠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신원전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50년 전 덴마크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겐 불가능한 것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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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 ‘여성 재판관 3인 시대’가 열리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성인 이미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신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면 이선애·이은애 재판관과 함께 3인의 여성 재판관이 동시에 재직하게 된다. 전체 재판관 9명 중 3분의 1로, 헌법기관의 여성 비율이 30%를 넘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헌재의 고유한 역할과 성평등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 인선으로 환영한다.

헌법재판은 사인(私人) 간 권리 다툼을 다루는 일반 재판과 달리 헌법적 분쟁을 해결해 국가 공권력 작용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일반 소송에서는 재판 결과가 소송 당사자에게만 미치지만, 헌법재판에선 심판 대상 법률에 위헌을 선고할 경우 그 법 조항을 적용받던 시민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헌법재판의 규범적·정책적 기능과 공동체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헌법재판관 구성의 다양화는 절실한 과제다. 한목소리, 같은 색깔, 비슷한 얼굴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균형 있게 반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 법관) 위주의 헌재 구성이 비판받아온 이유다.

이 내정자는 여성이자, 40대이며, 지방대(부산대) 출신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 노동 관련 사건을 주로 맡았다. 함께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문형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도 기존 재판관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서울에서 재판한 적이 없는 ‘지역법관’이며, 노동·아동학대·가정폭력 사건 등에서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해왔다. 이들이 취임하면 헌재의 스펙트럼은 보다 다채로워질 것이다. 과거 ‘이용훈 대법원’의 ‘독수리 5형제’(김영란·김지형·박시환·이홍훈·전수안)가 법원의 변화를 견인해냈듯, 이들이 헌재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한다.

문·이 내정자의 지명은 긍정적이나, 이들로 충분치는 않다. 헌재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더 많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 지역 출신, 비서울대 출신, 변호사·법학교수 출신이 늘어나야 한다. 연령대도 젊어져야 한다. 가치관의 다양성도 확보돼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신뢰받으려면 그들의 모습이 주권자들과 닮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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