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기념사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그래서 나도 전문을 읽어 보았다. 전체로 보아 흠 잡을 곳이 별로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가. 해방 후 ‘반민특위’를 통해 우리 안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이 ‘빨갱이’의 분열책동으로 부당하게 몰려 탄압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시비는 시작되었다. 반민특위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논리는 현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정치공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역사인식마저 팽개쳤기 때문에 ‘토착왜구’라는 거친 비난의 소리도 듣게 되었다.

실패한 일제잔재청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종종 반면교사인 프랑스의 예를 들게 된다.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기간에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프랑스인, 이른바 ‘콜라보’라 불린 부역자 1만여명이 처형되었다. 1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비시’ 정부의 수장으로서 나치와 협력했던 페탕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령 때문에 후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4년여의 점령기간에 이렇게 많은 프랑스인 나치부역자가 생겼는데 한 세대 넘게 우리 땅을 강점했던 일제의 지배 아래서 그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조선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과연 이들 가운데 누가 합당한 처벌을 받았는가. 이들의 자손들은 대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야만 했는가. 여기서 나는 장준하 선생의 기구한 가족사를 떠올리게 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작하지도 못하고 좌절된 우리 안의 일제잔재청산 문제는 북핵 문제를 빌미로 이제 다시 면죄부를 받고 있다.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해치는 행위는 북한만 이롭게 한다는 게 논리의 핵심이다.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나치잔재청산을 단행했던 프랑스는 후에 당당하게 독일과 함께 유럽통합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오늘의 일본이 있기까지는 바로 우리 안의 일제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좀 더 지속된다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와 일장기를 흔드는 부대가 서울거리에 나타날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이른바 ‘뉴라이트’가 지핀 역사교과서 논쟁이 있다.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를 우리 땅에 그대로 옮긴 이들은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투쟁했던 임시정부의 정통성 대신 8·15를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는 논지도 폈다.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이러한 동향은 물론 서독에도 있었다.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가 히틀러 치하 아우슈비츠의 원형이라며 나치독일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상대화했던 보수적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촉발된 ‘역사학자 논쟁’이 1980년대 중반에 있었다. 그러면 역사는 뚜껑 없는 동네 우물을 지나가다 아무나 두레박을 던져 길어올린 물로 오물을 씻을 수 있는 것처럼 과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면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를 말하면 우리는 먼저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역사의 유용성을 떠올린다. 이런 관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처럼 역대를 통하여 치도(治道)의 거울이라는 뜻으로 역사를 해석했던 동아시아문화권의 역사인식은 물론 ‘역사는 삶의 선생이다’(historia magistra vitae)라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내려오는 서양의 전통적인 역사 이해도 같은 선상에 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과거에 설정된 도덕과 정치적인 규범의 지속성은 많이 제약받았으며 교훈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회의도 뒤따랐다. 이 문제는 특히 우리 현대사를 보는 데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친일하면 가문이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반대로 망했다는 것이 오히려 교훈이 되어, 회의 정도가 아니라 냉소적으로 역사를 대하게 된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오늘 이 문제에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이런 역사인식이 이른바 ‘탈(脫) 사실’(post factum)까지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정보화시대에 더욱 힘을 얻기 때문이다. 역사를 중요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계몽의 작업이 아니라 흡사 벼룩시장에서 골동품을 찾는 가벼운 기분으로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처럼 여기는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가 바로 그렇다. 작년에 사망한 미국의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는 이른바 ‘메타 역사’라는 명제 아래 역사를 문학의 서술형식에 기대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역사가 전혀 허구였거나 상상력에 의거했을 수도 있고 진실과 허구, 사실과 상상력이 교묘하게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 안에 복잡하게 서로 얽힌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이야기처럼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도 민족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갈등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굳혀줄 수 있다고 믿고, 이에 모든 것을 거는 과잉기대 또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공통성과 지속성도 있었지만 많은 이질성과 애매함도 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무감각을 지적하고 자성을 촉구했던, 나무랄 데 없는 문 대통령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가 이념대립을 부추기는 ‘관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노증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는 오로지 역사에 대한 불감증이나 과민증만 있어서 합리적인 역사이해에 바탕한 계몽은 기대하기 힘든가.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레크는 우리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 서로 얽힌 구조가 역사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유럽중세까지는 기독교가 이 두 인식범주의 차이를 줄일 수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계몽의 문을 연 근대에 들어서서 이 사이에 큰 괴리가 생겼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생긴 긴장이 오히려 역사의 추동력이 되었다. 이런 역사이해에 따른다면 어느 나라보다 과거체험과 미래에 거는 기대 사이에 심한 간극이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역동성도 설명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을 남겼던 영국의 역사학자 카는 “사회가 너무 병들었기에 역사도 병들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앓고 있는 역사불감증이나 역사과민증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역사병’이다.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먼저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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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는 258명의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했다. 당시 경제사절단에는 110개 벨기에 기업이 참여했다. 이후 한국과 벨기에 간 교역은 2년 연속 연간 16~17% 성장했다. 2년 만에 필립 국왕이 동생에 이어 180여명과 함께 다시 방한한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벨기에의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 벨기에는 3개 언어권과 3개 지역권 등으로 나뉘어져 있어 많은 타협과 조정이 필요했다. 인구 1100만명에 남한의 30%인 국토면적을 가졌지만 연방제를 채택한 것도 지방분권의 결과이다.

한·벨기에 협력은 자동차, 반도체, 의약품, 건설, 초콜릿과 맥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 건설에 양국 기업이 협력했다. 국왕을 수행하는 90여명의 벨기에 기업 총수들은 양국 간 협력을 더욱 넓힐 것이다.

벨기에는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다. 6·25전쟁 당시 연 3500명을 파병했다. 우리가 금융위기를 겪을 때인 1998년엔 유럽 국가로는 처음으로 투자조사단을 파견했다. 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벨기에는 1936년 이래 최대의 대표단을 보냈다. 수교 역사도 118년에 이른다. 대한제국은 1901년 3월23일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고종 황제는 벨기에와 같이 중립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벨기에 외교관은 고종 황제의 개인고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주일 벨기에 공사는 일본의 통치기간 누적된 실망과 불만에서 발단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벨기에 외교문서가 필립 국왕의 문희상 국회의장 면담을 계기로 소개될 예정이다.

벨기에는 오드리 헵번, 장 클로드 반담의 나라이며 우리가 즐기는 초콜릿의 생산국이다. 벨기에 과학자가 발명한 플라스틱은 우리 주변에 있다. 벨기에 신부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치즈가 처음 생산되었다. 필립 국왕이 방문할 예정인 전진상의원에서 보듯 벨기에인들은 한국인을 위해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는 늘 두각을 나타낸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올림픽 찬가를 부른 황수미 성악가는 2014년 1위 수상자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는 작년 6만3000명의 방문객을 맞았다. 벨기에가 처음 외국에 대학 캠퍼스를 연 것은 2014년 겐트대학교 인천송도 글로벌 캠퍼스이다. 유럽 최초의 한국 석좌는 2017년 브뤼셀 자유대학에 설치되었다. 이번에 16명의 벨기에 대학 총장 등이 함께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벨기에는 유럽의 전쟁터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전쟁을 겪었다. 이는 벨기에가 국제협력과 타협을 적극 추진해온 배경이다. 국내는 물론 유럽연합, 나토를 통해 타협과 조정을 이루어온 벨기에의 경험은 한반도 화해와 통합과정, 동북아시아 협력과정에서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김형진 | 주벨기에 EU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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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글자 그대로 일본과 친한 일파 또는 정파(政派)라는 뜻이다. 이 말을 처음 만든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조선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이를 친일파 대 친청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규정하여 본국에 보고했고, 일본 언론들도 이런 인식을 공유했다. 그들은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일파를 친일파, 독립파, 개화파로, 나머지 조선 정부 내 주류 세력을 친청파, 사대파, 수구파로 구분했다. 그들은 친일을 독립과 개화, 친청을 사대와 수구에 연결시킴으로써 자기들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한 선의의 협력자인 양 행세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도 주한 일본 공사관은 개혁 주도 세력을 친일파로 분류했다. 그러나 일본의 왕후 시해와 내정 간섭에 반대해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음에도, 이 무렵까지 한국인들은 ‘친일파’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열강이 한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친일 친러 친미 친청 등을 모두 선택 가능한 태도로 보았거나, 그들 사이에서 시비를 따질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인들이 ‘친일파’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 즉 ‘자기 일신과 일족만의 영달을 위하여 일본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면서 동족을 괴롭히는 자’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을사늑약 이후, 특히 1907년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 이후였다. 1907년 8월 공립신보는 친일파를 이렇게 정의했다.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나라를 팔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황상폐하를 능욕하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동포를 학살하며, 잔인하고 악독하여 사람의 낯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 친일파와 같은 뜻으로 ‘토왜(土倭)’라는 말도 썼다. 근래 모 당 대변인이 사용한 ‘토착왜구’라는 말 때문에 새삼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 말은 해방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 종종 오르내렸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는 ‘토왜’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1) 일본과 각종 조약을 맺을 때 세운 공을 내세우며 이권을 얻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자, (2) 흉계를 숨긴 각종 성명을 내어 백성을 선동하는 자, (3) 일본군에 의지하여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4) 일본군의 밀정이 되어 무고한 양민을 죽음으로 이끄는 자, (5)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자로서 누군가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면 허무맹랑한 말로 모함하여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자, (6) 일본어를 조금 안다고 가짜 채권을 꾸며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자. 친일 고위 관료, 친일 언론인과 교육자, 일진회 등 친일단체 회원, 일본군 밀정, 기타 일본을 배후에 둔 사기 범죄자 등을 두루 ‘토왜’로 지목한 것이다.

‘친일파’라는 단어에 토왜, 매국노, 민족반역자, 사익 지상주의 모리배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로 인해 새로운 대일 관계 위에서 친일의 개념을 재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친일에 결부된 온갖 부정적 의미가 과거의 망령이 되지 못하고 현존하는 권력으로 남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반민족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의식이 지배적 지위를 점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의식은 다음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도덕 관념이 결여된 힘 숭배의식이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힘이 약했기 때문이며,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담론이 횡행했다. 이런 의식에서는 침략자와 그에 협력한 자의 불의와 부도덕성은 감지되지 않는다. 자기 힘을 과시하며 약자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현대 한국의 ‘갑질 문화’도 이런 의식의 소산이다.

둘째는 약자 혐오와 엘리트의식이다. 힘 숭배의 짝이 약자 혐오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사회 문제를 약자들이 분수에 넘는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자들이 일본 통치의 야만성은 외면하고 한국인의 저항만을 문제 삼았던 것이나, 현재의 기득권세력이 재벌의 전횡은 외면하고 최저임금만을 문제 삼는 것은, 완전히 같은 의식의 소산이다.

셋째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 구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시아 각국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생각을 바꾸어 일본인은 스스로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유럽인의 관점에서 다른 아시아인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명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다.

이후 일본은 자기 편리한 대로 아시아의 대표 국가가 되었다가 비(非)아시아 국가가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친일 엘리트들은 일본인의 이런 아시아관을 축소해 자기들 나름의 ‘한국관’을 만들었다. 그들은 일본을 대할 때는 한국인의 대표로, 한국인 일반을 대할 때는 준(準)일본인으로 행세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오늘날 한국 기득권층 중에 의도적 이중국적자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의식의 소산이며, 자칭 애국세력이 성조기, 이스라엘기, 일장기까지 들고 시위하는 것도 정체성 혼란의 발로이다. 빈곤한 자의식을 보강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권위를 외부에 의탁하려 드는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친일’이라는 단어가 욕으로 쓰이는 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들이 과거 반민족 행위자들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대중의 눈에 그런 사실이 보이는 한, 친일파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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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희정입니다. EBS <까칠남녀> 종방 후 1년 만입니다. 공중파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 여전히 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유튜브로 돌아왔습니다. 퀴어와 퀴어 앨라이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본격 퀴어 토크쇼 <손희정의 TMI>.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2019년 1월 초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기획, 제작하는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론칭한 <손희정의 TMI> 첫 녹화 날이었다.

전문 방송인도 아닌데 토크쇼 진행이라니.

이 어색한 만남의 시작은 201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육방송 EBS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보수 기독교를 필두로 반동성애 진영의 사람들이 “교육방송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방송사 앞에 모여 한 달 가까이 EBS 규탄 집회를 지속하고 있었다. EBS로서는 개국 이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증오와 악의를 대면하는 순간이었을 터다.

그들은 심지어 “EBS가 음란 방송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당근에 콘돔을 씌워 방송사 로비에 세워져 있는 (EBS 최고의 인기 캐릭터인) 방귀대장 뿡뿡이에게 던지기도 했는데,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음란한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그토록 홀리한 분들이 어쩌다 이토록 음란한 행위를 하시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EBS에서 제작하고 있었던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가 2017년 12월25일과 2018년 1월1일 이틀에 걸쳐 <성소수자 특집 - 모르는 형님>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레즈비언(L),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인 게이(G), 양성애자인 섹스 칼럼니스트(B), 그리고 변호사인 트랜스젠더(T)가 출연하여 LGBT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쾌활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말이다.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반동성애 진영이 강하게 반발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 때문에 <까칠남녀>에 출연 중이던 양성애자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이 하차당하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공영방송이 혐오 선동에 이처럼 쉽게 넘어갈 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결국 은하선 하차에 불복한 일부 패널이 출연을 거부하면서 방송은 애초 계획된 회차를 다 채우지 못하고 허망하게 종영되었다.

당시 <까칠남녀>에 출연하고 있었던 나는 2017년 12월26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 지면에서 성소수자 특집 방송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때때로 “성소수자가 도대체 무슨 차별을 당하느냐”고 묻지만, 성소수자가 한국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썼다. 그리하여 칼럼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백래시가 시작되기 전에 썼던 글이었지만, 결국 <까칠남녀> 케이스는 안타깝게도 내가 칼럼에서 했던 말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어버렸다. “당신들이 뭘 하고 살아도 상관없지만, 내 눈에만 띄지 말아라.” 성소수자 특집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그로부터 1년이 훌쩍 지난 오늘. 큐플래닛을 소개하기 위해 쓰고 있는 이 칼럼의 제목은 <‘보이는 것’이 들려드릴 이야기>다.

우리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로부터 한 사회의 한계를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회가 지우려고 하는 존재들이 부득부득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보이는 것’이 들려줄 이야기의 힘은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직 그 가능성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큐플래닛의 또 다른 프로그램 <퀴어 업데이트>에는 <까칠남녀>의 은하선 작가와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신필규 활동가가 출연한다. 이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와 오해를 차근차근 풀어보는 방송이다.

‘보이는 것’을 통해 비로소 듣게 될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이 큐플래닛의 ‘구독’ 버튼을 누르실 시간이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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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페로의 동화 중에 <장화 신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착한 막내아들은 고작 고양이 한 마리만 물려받고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옷 다 벗고 물속에 들어가 있으라 한 뒤 왕의 마차를 막아서서 주인님이 영주인데 목욕하는 사이 도둑이 옷을 훔쳐갔다고 하여 얻어 입힙니다. 그러자 물레방앗간 아들은 진짜 영주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고양이가 또 여차저차 해서 평민 출신과 공주가 결혼해 해피엔딩. 여기서 고양이가 쓴 첫 번째 수가 바로 ‘옷’입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멋진 옷을 입으면 그 옷만큼의 지체로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어린 왕자>에서도 터키 천문학자가 전통 복장으로 세계천문학회에 새로 발견한 별을 보고하니 믿음이 안 간다고 무시당합니다. 이후 터키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양복을 강제한 까닭에 이를 입고 다시 발표하니 그제야 발견을 인정받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편견에 대한 이야기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럴 듯한 차림새가 살아가는 데 꽤 크게 작용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속담 ‘옷이 날개다’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옷을 잘 입으면 멋있어 보이는 것으로만 압니다만, 아닙니다. 날개의 목적은 저 위로 훨훨 날아오르는 데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꾀한다면 옷부터 투자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자리에 걸맞은 차림을 못하면 파티에 못 가는 신데렐라 됩니다. ‘말끔한 옷은 훌륭한 소개장’이란 외국 속담도 있으니,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 그 자리로 올라서고 싶다면 그들과 어울릴 차림부터 갖춰야겠지요. 멋진 팬티 하나만 입어도 왠지 하루 종일 골반에 힘 들어가는데, 잘 차려 입으면 누가 봐도 ‘존잘’로 안 보이겠습니까? 주저앉고 정체되었다면 고치 같은 후줄근 평상복 벗고 날개옷으로 새봄을 걸어봅니다. 옷은 당신의 날개입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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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시작하기 전 ‘어제 나에게 조금이라도 좋았던 일’ 한 가지를 떠올려보는 시간을 갖곤 한다. 교사의 질문에 아이들은 서로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선생님이 먼저 말해볼게. 어젯밤에 자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나서 잠이 깼어. 시간을 보니 한시 반이었어. 잠이 다시 안 올 것 같아서 화를 내고 들어와 누웠는데 5분도 안되어 다시 잠이 들었어. 아침까지 푹 잘 잔 거야.” 선생님이 좋았다는 건지, 나빴다는 건지 아이들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선생님, 그게 좋았던 일이었어요?” “그럼~ 잠을 못 잘까봐 걱정했는데 정말 잘 잤거든. 너희들도 조금이라도 좋았던 어떤 일이 있었어?” 하고 물어도 여전히 아이들은 주저한다.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 선생님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준다면 모두에게 기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니, 한 학생이 목소리를 낸다. “라면을 먹었는데 아줌마가 만두 2개를 넣어주었어요.” 아이들이 같이 웃는다.

“와~ 저 정도 좋은 일이라면 나에게도 있었어요, 하는 사람 있니?” 하고 물으니 또 다른 학생이 목소리를 낸다. “어제 학원에 안 갔어요.” 아이들의 말은 짧지만 그 속에는 그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담겨 있다. “와우, 정말 좋았겠다. 어떤 점이 좋았어?” 하고 더 물어주니 “잠을 푹 자서 안 피곤해요”라는 말도 해준다. 이제 학생들은 조금씩 자신에게도 고맙고 좋았던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무섭고 떨렸는데 처음으로 헌혈을 해봤다는 얘기, 가족들이 밥을 각자 먹을 때가 많은데 어제는 가족이 저녁을 같이 먹었다는 얘기, 어릴 때부터 안고 자던 낡은 인형하고 거의 똑같은 인형을 어제 드디어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교실은 조금씩 따뜻하고 풍성해진다.

이 짧은 활동에는 교실의 배움에 관해 탐구해볼 만한 여러 요소가 담겨 있다. 어른들은 수시로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 말하게 되는데 의무나 금지가 많아질수록 아이들의 자아는 쉽게 위축되고 상처받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는 고함을 치며 떠들다가도 막상 수업이 시작되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정답이 아니면 그리 환영하지 않는 선생님, 조금만 실수해도 웃거나 놀리는 친구들, 아이들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교실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있었던 조금이라도 고맙고 좋았던 일’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의무와 금기라는 긴장과 두려움의 에너지에서 벗어나 기쁨의 에너지로 향하도록 초대해준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기쁨이 서로에게 퍼지면서 타인과 외부세계에 대해 닫혀 있던 우리의 의식이 점점 열리게 되고 이렇게 자아가 개방된 상태에서 아이들은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이제 누군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를 만나게 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은 더욱 넓어진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아이들은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자신을 아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두려움과 위협의 요소를 없애고 서로 믿고 존중하며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교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릴케의 말처럼 지금 당장은 그 답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게 된다면 날마다 그 답은 조금씩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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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름들은 추억과 결부돼 있다. 미국 프로야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 이름이 AT&T 파크에서 오라클 파크로 바뀌었다는 기사를 읽고 얼마간 섭섭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AT&T 파크는 직접 가 본 첫 메이저리그 야구장이었다. 그날 샌프란시스코 선발투수는 지금은 은퇴한 맷 케인이었고 상대팀 LA 다저스의 선발은 류현진이었다. 우리 일행은 AT&T 파크 간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고,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가 끝난 후엔 도시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30여분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AT&T 파크는 우리 일행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했다.

이방인인 나조차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니 샌프란시스코 열혈 팬들이 느끼는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까. 샌프란시스코 구단이 통신업체 AT&T에 구장 명명권을 판매한 것이 2006년이었다.

21일 대전시청 대회의실 스크린에 대전 새 야구장 부지 결과 발표를 알리는 화면이 떠 있다. 대전 _ 연합뉴스

지난해까지 13시즌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세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배리 본즈가 통산 756호 홈런을 치고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31년 만에 갈아치운 곳도 2007년의 AT&T 파크였다.

지난 1월 샌프란시스코는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에 20년간 구장 명명권을 양도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향후 2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기록과 명장면을 생산할 것이고, 팬들은 저마다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을 새롭게 쌓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AT&T 파크라는 이름이 팬들에게 불러일으킬 기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야구장 하나가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기대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7년 폐장된 동대문야구장이 대표적이다. 이 야구장은 1982년 프로야구 역대 첫 개막 경기가 열렸던 곳이고 프로야구 출범 전에는 고교 야구의 메카였던 곳이다. 그 시절 이곳과 관련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동대문야구장이라는 이름은 기억과 감정을 자극하는 특별한 힘을 갖는다. 2013년까지 프로야구 KIA의 홈구장이었던 광주 무등구장, 지난해부터 ‘이승엽 야구장’으로 불리는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도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 개장한 ‘창원NC파크 마산구장’의 명칭 논란은 안타깝다. 야구장을 뜻하는 영어 ‘파크’ 뒤에 또 ‘구장’이 붙은, ‘역전 앞’처럼 문법적으로도 어색한 이름이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부터 떠올리게 만들어서다.

창원시는 새 구장 명칭을 둘러싼 이견을 조율하고자 명칭선정위원회를 발족해 ‘창원NC파크’로 최종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창원시의회는 명칭을 ‘창원NC파크 마산구장’으로 변경한 조례 개정안을 처리하며 위원회 논의 결과를 헌신짝처럼 폐기했다.

마산은 2010년 창원에 통합돼 창원시 2개구의 이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NC의 과거 홈구장인 마산구장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구 마산지역 정치인들이 새 구장 명칭에 ‘마산구장’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마산의 이름을 야구장 간판에 박제하고 이를 의정활동보고서에 한 줄 넣어야 구 마산지역 유권자들의 향수와 감정을 자극하고 표심을 잡는 데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새 구장의 이름은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기 위해 언성을 높이고 핏대를 세우는 투쟁의 장이 돼 버렸다.

창원이 야구장 이름을 두고 골머리를 앓는 사이 대전의 신축 야구장 부지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발표됐다. 대전 역시 부지가 결정되기까지 만만찮은 과정을 겪었다. 구의회 의원들이 야구장 유치를 위해 삭발했고, 구청장 비서실장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야구장은 새로운 간판을 달고 첫 경기를 치르기까지 어떤 기억을 대전시민들에게 남기게 될까. 창원의 선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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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외곽의 산청 인근에서 흐드러진 히어리 군락을 조사한 뒤 구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수유 축제가 벌어지는 원좌마을을 찾았다. 지리(智異)의 훤칠한 이마 아래로 내리닫는 널찍한 들판에 자리한 마을이다. 올해의 산수유 꽃은 바로 오늘이 절정이라서 한적했던 골목이 번화한 거리처럼 북적댄다. 모처럼 속마음을 저 나무처럼 활짝 터뜨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춘객들. 돌담 아래 길목에는 할머니들이 쑥, 도라지, 머위 등등의 봄나물로 구색을 갖춘 임시가게를 열었다.

물론 산수유 마을에는 산수유가 많았다. 마을의 입구에서 노란 물감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흠뻑 든다. 산수유가 층층나무과에 속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면서 산수유 마을 풍경을 일별해 본다. 파란 하늘에 비행기의 흔적이 땅속을 쏜살같이 더듬는 두더지 자국처럼 뚜렷하다. 저 하늘과 맞닿은 곳에는 장엄한 지리산의 능선이 뚜렷하다. 바로 한 칸 아래에는 기쁜 혹은 슬픈 소식을 전하는 전깃줄이 윙윙윙 뻗어나간다. 그리고 작은 텃밭에는 두더지의 자취를 지우며 새로 두둑을 세우고 비닐로 덮어놓았다. 무슨 맛있는 씨를 뿌려놓았는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라나는 채소들.

봄빛이 휘황한 시멘트 길을 걸어 동네 한 바퀴를 하다가 문득 안 사실이 있다. 원좌마을에는 의외로 무덤이 많았다. 밭은 물론 집 근처에도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 무질서한 묘지 조성으로 인하여….” 구례군수 명의의 안내판이 있을 정도였다. 밀짚모자를 쓰고 된장가게를 운영하시는 분께 무덤에 대해 물었더니 한마디 해주신다. 여긴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죠. 무덤? 하이고 무덤이 우리보다 먼저재. 무덤 사이로 집이 들어서고 자투리땅을 개간한 것이라요. 또 무덤을 만났다. 그 흔한 석물은 없고 산수유로 둘러싸인 무덤이다. 생전의 금실을 반영하듯 둘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저 첩첩 지리산을 배경으로 아득히 해 지는 쪽을 나란히 보고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 웬만한 집에는 대문 옆에 달린 게 있다. 나중의 일을 예감하듯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문패.

층층나무과의 산수유 그늘에서 하늘, 구름, 산, 전깃줄, 나무, 무덤, 문패로 연결되는 층층의 풍경을 오래오래 감상했다. 산수유, 층층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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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논문 두 편을 소개할까 한다. 하나는 2016년 말 ‘시민과 세계’에 실린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한국에서 결손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라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달 ‘한국사회학’에 실린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논문이다. 신진욱의 논문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에 이미 결손민주주의 개념을 통해 사태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발 빠르게 분석해낸 통찰력이 돋보이고, 이철승의 논문은 필자가 평소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고 부르던 현상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문제의식을 정교화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두 논문을 교차해서 보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대선불복인가요?” 2013년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칼이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 의혹을 문제 삼으려 하면 새누리당은 대선불복 프레임으로 모든 비판을 억눌렀다.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역대 어느 대선에서도 선거사범을 문제 삼아 대선불복의 길을 걸은 일이 없다”고 했고,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선불복의 유혹은 악마가 야당에게 내미는 손길”이라고 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은 위헌이고, 선거법 위반이고, 국정원법 위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변변히 힘 한 번 못 써보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신진욱의 논문이 말해주는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더 퇴행하여 여러 결함을 가진 ‘결손민주주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흔히 1987년은 민주주의 원년으로 불린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라는 ‘제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정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를 판별한다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 혹은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치 컴퓨터의 알고리즘처럼 0과 1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1987년 이전에는 0(권위주의), 87년 이후에는 1(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세력은 민주주의적 선거제도라는 껍데기만을 뒤집어쓴 채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모두 훼손한다. 언론장악, 민간인 사찰, 정치적 의사표현에 대한 검열과 처벌, 마침내는 선출되지 않은 비선실세에 대한 권력 위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모두 훼손되었지만 선거체제라고 하는 바로 그 껍데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진다.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야당이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민주주의의 내용적 요소 중 정치적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인 수평적 책임성, 즉 권력의 상호견제에 있어서는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박상훈의 책 <청와대 정부>가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철승은 “386세대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에 대항하여 시민사회로부터 국가를 점유해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386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더 내적으로 응집된 ‘세대의 권력자원’을 시민사회, 시장, 국가를 가로질러 수립”했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시작이다. 언론 부문에서 이 현상에 일찌감치 주목해온 ‘주간경향’ 정용인 기자가 ‘장기 386’이라고 부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여러 실증자료를 통해 근거를 제시한 뒤 이철승은 ‘세대 간 형평성의 정치’를 촉구한다. 나 또한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뜨거웠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 전 일이고, 386세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1990년대 이후 20년에 걸쳐 보상받았다. 젊은 세대 일부의 극우화 경향이 처음 관찰되던 몇 년 전, 나는 이것이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태도를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자기절제 없이 젊은 세대의 우경화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논문을 교차하면 한국 정치의 보이지 않는 난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386세대는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직선제 쟁취라는 체제변화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데에는 지지부진했던 386세대에게 남아있는 소명은 무엇이고, 그들의 아성에 들어오지 못했던 젊은 세대와 여성에게 넘겨야 할 소명은 무엇인지 구분하는 자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쟁취하는 민주주의’가 아닌 ‘실천하는 민주주의’를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인가. 30년 만에, 그들은 다시 한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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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지면을 빌려 쓴 ‘사회주택, 개미지옥에 맞서는 바보 같은 노력’이라는 글이 엉뚱하게 읽혀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까운 지인은 개미지옥이나 바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쓸 필요가 있냐는 핀잔을 놓았다. 의도와 다른 반응이 있을 때마다 글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일각에서는 불편하겠지만, 현재의 주택시장에 대해 개미지옥이라는 비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바보 같은’이라는 제목만 보였는지, 사회주택을 비판하는 글이라고 정반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제목을 달면서 처음에는 사회주택 분야의 어려움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처절한’이라고 쓰는 것을 고민했다. 그런데 어렵지만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기에, 지나치게 암울한 이미지는 적절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비영리 사회주택이 순진하다고 비웃음을 사는 게 떠올랐다. 이윤을 좇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 없는 사업자들은 판 흐리지 말고 제발 떠났으면 좋겠다.” 사회주택 관련 민간주체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던 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려고, 주택시장의 모순과 부조리를 없애고 토지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어렵게 버티는 비영리 주체가 졸지에 판을 흐리며 민폐를 끼치는 능력 없는 사람이 되었다. 손해를 보며 사회주택 정책에 바보처럼 협조하는 것이 공공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의 지원을 받아오는 데에 걸림돌이라는 이유였다. 심정은 이해되지만, 사회주택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발언이다.

사회주택 지원조례의 초안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사회주택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비영리법인, 공익법인,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을 사회주택 공급주체로 규정하여 서울시에 제안하였다. 모두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사회적 이익을 강조하는 회사 형태이다.

주택에서 발생하는 이윤, 즉 불로소득은 입주자들이 낸 임대료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주택시장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주축은 상위계층이 가져가는 하위계층의 임대료다. 불로소득의 또 다른 축인 시세차익이 줄어들기라도 하면 임대료가 크게 치솟는다. 이런 부조리한 구조를 끊기 위해서는 임대주택에 끼어있는 불로소득을 걷어내야 한다. 사회주택을 도입하면서 비영리성을 강조한 이유였다.

하지만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과정이 복잡해 많은 사업자가 참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어쩌면 양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반협동조합이 포함되도록 수정된 조례가 제정되었다. 일반협동조합은 조합원에 대한 배당을 할 수 있으므로 영리 추구가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택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입주자들이 부담하는 임대료에서 나온다. 영리를 추구하면 임대료가 오르거나 주택의 품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리에 기반한 사회주택 공급은 모순이고 허상일 뿐이다. 오히려 비영리성이 사회주택의 시장경쟁력을 담보하는 토대이다. 즉 사회주택 활성화의 관건은 민간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적이고 비영리적인 주택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여 그에 맞는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례가 개정되어 중소기업까지 지원대상에 포함되었다. 사회주택의 비영리성이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아서 착잡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은 노력’으로 비치는 비영리 추구가 사회주택이 어렵게 추구하고 있는 본질이며,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이라는 점을, 우리 사회의 발전과 혁신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차근차근 되짚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최근 사회주택에 관심을 두는 지자체가 점차 늘어나고 있고, 몇몇 곳에서는 사회주택 지원조례의 제정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한다. 부디 사회주택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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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 실험 보고서를 왜곡하거나 숨긴 사실이 드러났다. SK케미칼은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었고, 애경은 ‘가습기메이트’를 판매했다. 24일 경향신문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SK케미칼은 영국임상실험연구소에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의 독성실험을 한 뒤 가습기메이트 원료가 ‘저독성 인정’을 받은 것처럼 홍보했다. 그런데 실제 가습기메이트에 사용된 원료는 독성실험을 거치지 않은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이었다. 허위광고로 소비자를 속인 것이다. 또 독성실험을 할 때는 고농도 실험이 요구되지만, 저농도 실험을 한 뒤 ‘무해함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했다. 더욱이 1994년 진행된 독성실험 자료를 인멸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료의 독성실험 왜곡부터 ‘범죄흔적 지우기’까지 기업윤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출처:경향신문DB)

SK케미칼이 생산한 CMIT·MIT를 원료로 만든 가습기메이트는 옥시의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 다음으로 많은 피해자를 냈다. 그런데도 2016년 검찰 수사에서는 ‘옥시에 원료를 공급하면서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될 줄 몰랐다’며 법망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가습기메이트의 인체 위해 가능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에게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가습기메이트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옥시가 총 405명에게 2383억원 규모를 배상한 것과 비교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울분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7명은 울분이 지속되는 상태, 절반은 장애를 일으킬 만큼 심각한 울분상태라고 한다. 이들의 울분은 여느 울분 사례와 달리 자기비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는 자녀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비롯된다. 심리적인 고통을 추가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가습기살균제사건 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메이트에 노출된 반려동물에게서 사망, 폐섬유화 등 치명적인 피해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을 입증하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가습기메이트 피해는 차고 넘친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재수사하고 있다. 법을 비웃고 피해자를 우롱하는 비윤리적인 기업이 설 자리가 없도록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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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했다”는 발언으로 궁지에 몰리자 뒤늦게 내놓은 해명이라는 게 가관이다. 나 원내대표는 “비판한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문특위’다”라는, 귀를 의심케 하는 해괴한 해명을 내놓았다. 친일 청산의 대의를 부정하고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의를 짓밟는 자신의 발언에 시민사회와 역사학계에 이어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이 직접 규탄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자, ‘반문특위’ 궤변으로 발뺌하려는 수작이다. ‘반민특위 발언’으로 드러난 극우적 역사인식도 경악스럽지만, ‘민’을 ‘문’으로 바꾸는 말장난으로 물타기를 하려는 천박한 발상도 목불인견이다.

임우철 애국지사(101)와 독립유공자 후손 600여명은 지난 2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역사 왜곡”이라며 나 원내대표의 의원직 사퇴와 사과를 요구했다. 나 원내대표는 임 지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제가 비판한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2019년 ‘반문특위’다. 문재인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색출해서 전부 친일 수구로 몰아세우는 이 정부의 ‘반문특위’를 반대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나 원내대표는 25일에도 반문특위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 화살을 돌려 자신의 뒤틀린 역사인식을 변호하려는 비겁한 회피다.

나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은 단순 실수가 아니다. 그는 지난 1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진 이튿날에도 의원총회에서 “반민특위 활동이 잘돼야 했지만, 결국 국론 분열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분명 2019년 ‘반문특위’가 아니라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언급하면서 “국민을 분열시켰다”고 했다. 당시 국론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민족 죄과를 숨기려 방해공작으로 반민특위를 좌초시킨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다. 친일세력의 반동을 정당화하는 망발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토착왜구’라는 치욕적인 비아냥을 듣는 것이다. 101세의 독립지사가 “반민특위의 숭고한 활동과 역사를 왜곡하고 독립운동가를 모욕했다”며 피맺힌 분노를 토하는 것이 2019년의 비루한 현실이다. 정녕 나 원내대표가 친일파를 비호하고 반민특위를 부정할 뜻이 아니었다면, 더는 호도하지 말고 발언을 사죄하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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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