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이민자 출신인 세 살 소년 무카드는 총기를 난사하고 있던 호주 출신 테러범 태런트에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달려갔다. 형들이 즐겨 하던 비디오 게임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카드는 지난주 발생한 뉴질랜드 총기사건의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아이다. 

한 남자는 자신의 조국이 아닌 곳에서 끔찍한 살인들을 저질렀고, 한 아이는 조국이 아닌 곳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 테러범 태런트는 이 범행을 계획하기 전,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한 사진들을 SNS에 올렸다. 그중에는 북한에 간 사진도 있었다. 또한 SNS를 통해 전 세계 극우주의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신념도 강화해 나갔다. 그가 속한 세상은 글로벌 네트워크 위에 세워진 기괴한 성이었다. 

그는 여행 중 무엇을 느꼈을까? 현지인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들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여행이 가져다주는 묘미에 흠뻑 취해 있었던 것 같다. 각 나라의 인종과 문화가 주는 다양성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색인종 이민자들을 경멸하는 선언문을 올리고 50명을 총기로 난사하는 장면을 SNS를 통해 생중계했다. 

영화 <그린 북> 포스터

영화 <그린 북>을 보면, 당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들의 안전을 위한 가이드북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일명 ‘그린 북’이다. 책 속엔 이곳에서 잠자고 저곳에서 먹으라는 친절한 정보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다. 흑인들에게 인도주의적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의 경계를 정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머물러라. 이 이상 넘어오지 마라’라는 경계표다. 마치 아우슈비츠 정문에 걸려 있는 간판 위, 유대인들을 속이기 위한 문구, “노동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흑인 뮤지션인 돈 셜리가 피아노 연주를 할 때, 그 경계는 잠시 해제된다. 흑인 특유의 감성이 깃든 연주에 흠뻑 취해, 객석의 백인들은 환호하고 기립박수를 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연주가 끝나면 돈 셜리는 홀 안에 있는 화장실조차 사용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식사도 하지 못한다. 이번 뉴질랜드 총기사건을 대하며, 마치 그린 북처럼 유혹적인 글로벌 네트워크의 허상을 본다. 마치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며 소통하고 있다는 듯한 SNS 속의 광고문구들은 오히려 관계의 피상성이라는 수렁으로 우리를 빨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영화 <가버나움>에서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난민촌에서 자신의 숙명적 삶과 씨름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불법체류자인 흑인 여성은 언제 발각되어 추방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갓난아이를 끌어안은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 그 선은 서로의 경계를 확정짓고, 단절시킨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 때문에 만들어진 선이다. 그러나 정작 갈라지는 것은 사실은 너무도 닮은꼴인 ‘서로의 영혼’이다. 그것은 서로를 공멸로 이끈다. 

영화 <그린 북>에 관한 논란 중에 감독이 던지는 메시지, 인종차별 문제를 개인의 관계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견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보다는 훨씬 거대한 담론이어야 한다는 전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성찰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교감이야말로 피상성의 시대를 치유하기 위한 첫번째 전제다. 개인과 개인의 교감이 공동체로 확장될 때에만 우주는 유기체로서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세계인의 운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인식만이 편견의 경계선을 지우고 다양성 가운데의 통합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이 영혼을 가르는 선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 역시 그 중심에 있다.

<추상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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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도, 정당도, 정부도 언론 보도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언론중재위는 제도로 이의 제기를 뒷받침한다. 여러 언론 보도에 대한 고소와 고발도 이뤄진다. 정당 논평은 말할 것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이해식의 지난 13일 ‘나경원 원내대표는 문제의 발언을 철회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는 제목의 논평도 정당의 정당한 정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논평의 몇몇 표현과 그 속에 드러난 의식은 문제가 다분했다. 두 부분이 그렇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에서 김정은의 수석대변인(top spokesman)이 됐다’는 제목으로 블룸버그통신의 ○○○ 기자가 쓴 바로 그 악명 높은 기사다.” ○○○으로 처리한 부분은 실제 논평에서 실명처리했다. 논평이 유도했건 안 했건, 온라인에서 기자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언론의 표현, 비유, 서술에 문제가 있다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점을 해당 언론사나 데스크에 조목조목 차분하게 반론하면 될 일이었다.

논평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이 기자는 국내 언론사에 근무하다 블룸버그통신 리포터로 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 당시에도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해식이 ‘매국에 가까운 내용’은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사과했고, 논평에서 기자 실명은 삭제했지만 1회성 일로 보기는 힘들다. 최근 정권 관계자들의 발화에서 ‘민족’이나 ‘국민’이란 개념이 곧잘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조선시대 왕을 불러내 국장을 재현하는 이벤트까지 벌이기도 했다. 

‘국민’과 ‘민족’ 발화의 대척점에 놓인 세력이 수구이자 반동인 건 분명하다. 반민특위를 부정하고, 5·18 망언을 내쏟으며 끝없이 과거로 회귀하는 정당이 제1야당이다. 한반도 평화라는 대의 자체를 부정하며 사사건건 시비 걸고, 틈만 나면 왜곡하려는 세력도 많다. 지금 한국 사회 기득권 다수는 청산되지 못한 친일 세력의 후손이다. 

‘국가원수’ ‘민족’ ‘국민’ 같은 개념으로 수구 세력의 반동에 대응해야 할까. 지금의 경제체제 같은 물적 토대를 수호하려는 수구보수 세력은 이런 개념을 활용한 적대적 공생 프레임을 선호한다.

‘국민’과 ‘민족’의 호명은 자칫 위험하기도 하다. 국민은 ‘국(國)’이란 하나의 틀로 사람들을 묶는 말이다. 국가 형태와 내용은 다양할 터인데, 집권 세력이 자신들이 설정한 국가 이념에 동의하는가를 일방적으로 묻고,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비국민으로 가르곤 한다. 주로 수구보수 기득권들이 이 같은 프레임으로 사람들을 갈래 쳐왔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해고 노동자와 소수자, 문화예술인 등 수많은 ‘비국민’들이 나와 탄압받았다.

국민은 서양의 ‘People’을 번역한 말이다. 국민은 정부에 대응하는,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하는 시민과는 다르다. 여러 사람들이 People을 시민으로 쓰려는 이유도 여기 있다. 북한이 국호에 넣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쓸 수 없게 된, People의 또 다른 번역어인 ‘인민’을 다시 불러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민이란 말에 깃든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호명이다.

‘민족’과 ‘국민’ 같은 개념은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갈등과 과제를 가릴 수도 있다. 하나의 틀로 가두는 이 상상의 개념은 ‘나는, 당신은 재벌 총수와 같은 민족인가? 같은 국민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낸 2016~2017년 촛불집회 주최자는 2015년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단체들이다. 

2015년 최대 13만명이 모인 이 총궐기 대회는 이듬해 촛불집회의 예고편이었다. 여기에 노동자·농민·청년학생·여성·성소수자·장애인·빈민 등 ‘국민’과 ‘민족’ 개념으로 단순히 포괄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들이 제기한 이슈·의제도 다종다양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의 여러 비정상이 정상화됐지만, 해결되지 않은 과제도 남아 있다.

정부가 모든 계급, 계층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임한다면, 수구반동 기득권과는 평화, 반전, 환경, 노동, 여성권 같은 보편의 가치와 개념으로 맞서야 한다.

‘국민 바깥의’ 존재 취급을 받았던 이들을 아우르겠다면 구체적인 제도 과제도 수행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그중 하나다. 현안 중엔 국제노동기구(ILO)의 8개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협약’ 등 4개를 비준하는 문제도 있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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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이라도 꺼내봐

미소라도 날려봐


조금은 가벼워도 괜찮아

순결하지 않아도 괜찮아

노래가 아니어도 괜찮아


아픈 것이 부끄러움은 아니니

깃털 속에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믿어봐


너 없는 공중은

투명한 폐허일 뿐이야


여긴 병원이 아니라

나는 너를 치료할 수 없지만


입을 맞춰줄게

부력을 채워줄게


너의 근력을 믿어봐

너의 의지를 믿어봐


고영(1966~)


아픈 새가 있다. 예전엔 공중을 투명하고 비옥한 영토로 만들던 새였다. 시인은 아픈 새에게 공중의 높이와 공중의 쾌청함을 돌려주고자 한다. 새가 없다면 공중은 황무지에 불과하기에. 몽골의 시인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가 “풀은 모두 나무/ 돌마다 산/ 넓은 이 세상/ 사물은 모두 중심// 깃은 모두 새/ 새마다 하늘/ 풍요로운 이 삶의/ 모든 날들이 새롭다”라고 노래했듯이 새가 곧 하늘의 중심이요, 새가 곧 높고 맑은 하늘이기에. 시인은 새의 비상과 새의 자유를 위하여 심장의 박동과 근력과 의지를 스스로 신뢰하라고 말한다. 지금의 상황이 흡족하지 않고 모자람이 있고 순탄하지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다시 한번 더 하늘을 향해 떠오르자고 격려한다. 마음도 기운도 꺾이지 말라고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에게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내일의 벽공(碧空)이 기다리고 있기에.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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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철 복날이면 일간신문을 장식하는 사진이 있다. 유명 삼계탕집 앞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장사진을 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언제부터인가 복날이 아닌데도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 삼계탕집 문전성시는 같지만, 줄을 서는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바뀌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눈에 띄고, 일본·동남아인은 물론 아랍계 단체 관광객도 종종 목격된다. 

삼계탕은 닭의 배 속에 찹쌀, 인삼, 대추, 밤 등을 넣고 푹 끓인 한국 요리다. 인삼은 삼계탕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재료로 피로 해소, 원기 강화, 혈압 조절, 항암 등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계탕이 여름철 보양음식으로 각광받은 이유다. 인삼은 또 닭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줘 외국인도 즐겨 찾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졌으나 드라마 한류에 힘입어 크게 퍼졌다. 특히 <태양의 후예>에서 극중 유시진 대위(송중기 분)와 서대영 상사(진구 분)가 앞치마를 두른 채 강모연(송혜교 분)과 윤명주(김지원 분)에게 삼계탕을 요리해주는 장면이 해외에 방영되면서 붐을 일으켰다. 2016년 5월 한강시민공원에서는 서울시와 닭고기 가공업체가 합동으로 중국인 관광객 4000명을 대상으로 삼계탕 파티를 열어 화제가 됐다. 삼계탕은 이제 비빔밥, 김치찌개와 함께 외국인이 즐기는 3대 한식으로 꼽힌다. 

서울 성북구 한성대학교에서 열린 2018 국제여름학교 초복 맞이 보양식 체험행사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삼계탕을 맛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주 국산 삼계탕 1t이 부산항을 통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으로 수출됐다. 삼계탕은 중국, 일본, 미국, 동남아, 호주 등 여러 나라에 수출됐지만 중동의 이슬람 국가는 처음이다. 무슬림들은 음식에 대해 특별히 까다롭다. 그들은 이슬람 경전 ‘코란’의 율법이 허용하는 음식만을 고집한다. 닭고기는 허용되지만, 가공법에 따라 금지하기도 한다. 이슬람 국가들은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식품에 한해 ‘할랄(Halal) 푸드’ 인증을 부여한다. 이번에 수출길을 튼 국산 삼계탕은 지난해 음식과 생산시설 전체에 대해 할랄 인증을 받았다. 

삼계탕의 역사는 짧다. 일제강점기에 조리법이 만들어지고, 한국전쟁 이후에야 ‘삼계탕’이 공식 등장했다. 100년도 안된 삼계탕이 까다로운 무슬림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K팝, K드라마에 이은 ‘음식 한류’의 쾌거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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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호주 출신의 한 백인 남성이 뉴질랜드의 이슬람 사원에 총격을 가해 50명을 살해하고 그 장면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중계했다. 말 그대로 ‘테러 라이브’였다. 사냥을 하듯 혹은 게임을 하듯 그는 사람들을 죽였다. 무려 74쪽 이르는 선언문도 내보냈다. 선언문에서 그는 무고한 아이들까지 죽이는 이유도 적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백인 아이들의 자리를 다 차지할 테니 후손들을 위해 미래의 적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행동이나 말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변호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고 심지어 ‘상당히 명쾌해’ 보인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이 변호인조차 필요 없다며 해임시켰다. 법정에서 직접 신념을 설파할 모양이다.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당연히 이 연설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것이다. 총리는 테러범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같은 행동은 드물지만 신념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장들로 이루어져있고 그중 몇몇은 극우 성향의 지도자들이 애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괴물인 이유는 ‘어떻게 저런 짓을 할까’에서 ‘저런 짓’이 아니라 ‘할까’에 있다. 그는 사람들이 가슴속에만 품고 있거나 기껏해야 집회에서나 떠들어대고 인터넷 댓글로나 내뱉던 것들을 실제로 저질렀다.

그는 선언문에서 자신을 평범한 백인이라고 소개했다. 조직에 속한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없는 서민일 뿐이라고. 다만 그는 백인의 나라에 들어와 이러저런 자리를 차지하는 ‘침략자들’에 분노한다고 했다. “우리의 나라는 우리의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백인이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우리 땅을 차지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테러를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을 자주 썼다. 선언문의 제목 자체가 ‘거대한 대체(The Great Replacement)’이다. 이는 이민자 유입에 반대하는 프랑스 작가 르노 카뮈의 책 제목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카뮈의 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프랑스 여행 중에 너무 많은 ‘침략자들(비백인들)’을 보았으며, 그들이 문화와 정체성을 파괴하는데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염세적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싸우지 않으면 “유럽인들의 완전한 인종적, 문화적 대체가 일어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썼다.

그는 ‘거대한 대체’를 ‘백인에 대한 인종청소’라고도 불렀다. 원래 이 말은 미국의 테러리스트 데이비드 레인이 쓴 것으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애용하는 표현이다. 비백인 이민자들의 유입과 인종 혼합 때문에 세상에서 백인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게 그 핵심이다.

물론 ‘거대한 대체’니 ‘인종청소’니 하는 말들은 모두가 끔찍한 헛소리다. 테러범의 선언문에서 이 표현들을 처음 접했을 때 내게는 1990년대 호주에서의 역사 논쟁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가 호주 출신 백인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논쟁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1992년 호주 최고재판소가 토착민의 본래적 토지소유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호주를 식민화할 때 백인들은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토착민들이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한 흔적이 없는 땅은 차지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최고 재판소는 이 원칙의 부당성을 인정했다.

또 하나는 1997년에 간행된 호주의 ‘인권과 기회균등 위원회’의 보고서였다(제목이 &lt;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gt;다). 이 보고서는 식민화 과정에서 토착민에 대한 인종청소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토착민 아이들을 백인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 백인 부모에게 강제 입양시킨 일이 들어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런 반인륜적 관행이 1960년대까지 활발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트럭을 쫓아오며 울부짖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뉴질랜드 테러범은 백인들이야말로 식민화를 통해 자리를 차지했고, 인종혼합을 통해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걸 감추었다.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신화적 기억으로 토착민에게 저지른 ‘거대한 대체’와 ‘인종청소’의 폭력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토착민들이 백인에게 당한 폭력의 이름을 백인 것으로 만든 뒤 이민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은 뉴질랜드 테러 현장에 ‘하카’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하카는 잘 알려진 것처럼 마오리족 전사들의 춤이다. 토착민들은 무슬림 이주민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하카를 추었고 많은 뉴질랜드인들이 하카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다고 한다. ‘코 아우, 코 코에, 코 코에, 코 아우.’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입니다. 토착민들은 하카를 추며 이주민들에게 이런 노랫말을 건넸다. 토착민과 이주민이 반대말이 아닌 세계를 그렇게 열어보인 것이다.

참고로 뉴질랜드의 테러범은 한국에서 자신의 모범을 보았다고 한다. 다문화주의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수적 가치를 잘 지키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4·3의 땅 제주에 예멘의 난민들이 왔을 때 우리의 춤은 무엇이었고 우리의 노랫말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로서 누구에게 말했던가.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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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 가정 심층조사를 종료했다. 그 끝은 기자간담회를 겸한 보고회였다. 발표 직후 관련 보도가 이어졌다. 대부분 피해자의 울분을 제목으로 달았다. 하지만 어떤 기사는 해석이 불분명했고 부등호가 반대로 나간 것도 있었다. 조사로 확인한 울분의 의미를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울분 조사는 피해 신청 4127가구 중 무작위로 추출한 100가구 129명의 성인 피해자를 대상으로 했다. 울분은 ‘외상후 울분장애’ 한국어판 도구로 측정했고 19개 문항 평균 기준 ‘이상 없음’ ‘지속되는 만성 울분’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울분’으로 구분한다. ‘만성’과 ‘심각한’ 울분은 ‘임상적으로 유의한 울분’으로 보고된다. 분석 결과 피해자 열 명 중 일곱은 울분이 지속되는 상태, 그 절반은 장애를 일으킬 만큼 심각한 울분 상태에 속했다. 피해자 대다수가 어제오늘을 분노, 무력감, 자기비난이 혼합된 감정 속에 살았고 내일도 그토록 심각한 울분 속에 살아가리라는 의미다.

외상후 울분장애 질환명을 소개한 린든에 따르면 울분은 ‘정의에 어긋나고 부당한 부정적인 생애사건 경험에 대한 감정 반응’이다. 학자들은 울분 유발 사안이 현재의 역경에 직접 원인이 되고 ‘세상은 공정하다’ 같은 기본 신념을 무너뜨리면 울분이 ‘버닝’하여 자신과 사회를 향해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 극도의 울분은 유발자를 겨냥해 ‘전쟁’을 벌이거나 고통에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울분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개방형 질문 답변에는 울분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감정이 강도 높게 드러난다. 사전에 일을 막지 못한 자책감이 기업과 국가를 향한 분노와 결합하고, 속수무책이란 무력감과 미래 비관이 더해졌다. 다른 울분 사례와 달리 분노를 압도하는 ‘자기비난’이 있었고 이는 스스로 피해자면서 동시에 피해자 어머니, 아내인 여성에게 뚜렷했다. 침습적 사고, 배신 트라우마, 우울, 스트레스 동반 신체증상 등 외상후 울분장애에 수반하는 증상 다수도 감지됐다. 린든 교수는 ‘(그것들이) 바로 울분이 예고하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무엇이 이들의 울분을 유발하는가를 가까이 봄으로써 찾아볼 수 있다. “피해자한테 자꾸 증명하라고 하면 저는 가습기를 다시 흡입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흡입해서 다시 임신해 아픈 애를 낳고 부검할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저한테 뭘 어떤 식으로 증명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느 피해자의 말은 울분 유발자가 독성 물질 노출 그 자체가 아님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오히려 기업의 비윤리성과 국가의 위험사회 관리책임 소홀로 유발된 집단적 정신현상으로 볼 수 있다. 1990~2018년 국내 7개 일간지 중 ‘울분’을 제목으로 한 기사 내용 분석이 확인한 한국의 사회적 울분, 즉 “각종 안전사고·사건 피해자들의 삶의 기반 박탈·근본적 요구 묵살로 국가와 사회를 향해 느끼는 분노”에 부합한다.

보고회를 통해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기에 반복하기보다 울분에 초점을 둔 하나를 추가한다. 전문가들은 믿음이 낮은 외상후 울분장애 환자와의 수용과 공감의 ‘치료동맹’을 권고한다. 같은 맥락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적극 인정(認定)하고 피해자들과의 공감을 높이는 ‘사회적 연대’가 절실해 보인다.

<유명순 |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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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성범죄 의혹’에 연루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도피성 출국’이 무산됐다. 김 전 차관은 지난 22일 오후 11시쯤 인천공항 티켓카운터에서 23일 새벽 출발하는 태국 방콕행 항공권을 구입했다. 김 전 차관은 체크인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김 전 차관의 출국시도 사실을 법무부에 통보했고, 대검찰청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소속 검사가 긴급출국금지를 지시했다. 김 전 차관은 항공기 탑승을 불과 몇 분 앞두고 탑승게이트 앞에서 출국이 좌절됐다. 김 전 차관은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경호인력까지 동원했다. 김 전 차관이 출국했다면 수사가 공전에 빠질 수도 있었다.

김 전 차관 사건이 시민들의 공분을 산 이유는 ‘증거가 뻔한데도 어떻게 두 차례나 무혐의 처분을 내릴 수 있는가’였다. 김 전 차관은 2013년 건설업자가 이권을 따기 위해 열었던 향응파티에 연루됐다는 의혹의 당사자다. 향응에 여성 수십명이 동원돼 성범죄가 이뤄졌고, 김 전 차관의 모습이 동영상에 찍혔다. 경찰은 ‘동영상 속 인물이 김 전 차관’이라고 확인했지만, 검찰은 ‘인물을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했다. 2014년에도 한 여성이 “여러 장소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준강간했다”며 김 전 차관을 고소했으나 흐지부지됐다. 죄를 짓고도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3월22일 (출처:경향신문DB)

다수의 피해자 증언과 동영상이 무용지물이 된 배경에는 비호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새로운 증언도 나왔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가 김 전 차관 수사를 막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지난 23일 한 방송에 출연한 당시 경찰 수사 책임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경찰청에 찾아와 “대통령이 불편해한다. 수사를 진행하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청와대뿐 아니라 당시 이성한 경찰청장도 수사팀을 압박했다고 한다. 이후 수사팀 지휘부는 모두 전보조치되었다. ‘윗선 개입’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 전 차관은 지난 15일 조사단 출석을 요구받았으나 서면 진술서 하나만 보낸 채 불응해왔다. 그러다가 18일 청와대에서 사건과 관련,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자 23일 야음을 틈타 출국을 시도했다.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숨어서 지내자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검찰 과거사위원회 활동기간은 오는 5월 말까지 2개월 추가 연장하기로 한 상태다. 조사단이 김 전 차관의 출국시도에 기민하게 대처했던 것처럼 의혹 역시 신속하게 그리고 낱낱이 규명하길 기대한다. 김 전 차관의 범죄는 물론 그를 비호해온 검찰 내 인사와 윗선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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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이 지난 22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장관이 재임 시 박근혜 정부에서 임용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 제출을 종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이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임원 후임자들을 공모하는 과정에서 환경부가 일부 지원자에게 면접 자료를 미리 제공한 것에 대해서는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김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장관으로는 최초로 구속될 위기에 몰렸다. 여간 실망스럽지 않다.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는 22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적용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지난 정부에서 임용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을 추려 사표 제출을 종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8년 7월 31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김 전 장관. 연합뉴스

지난해 말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수사관이 관련 의혹을 제기했을 때 김 전 장관과 환경부는 이를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환경부가 자진 사퇴를 거부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사퇴할 때까지 무기한 감사’ ‘거부 시 고발 조치 예정’ 등을 계획한 사실이 검찰의 압수수색 문건에서 드러났다. 김 전 장관은 이어진 검찰 수사에서 “임원 동향은 파악했지만 사퇴 압력을 넣지는 않았다”고 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시민들이 김 전 장관과 환경부의 해명을 믿기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다. 청와대도 처음에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가 “통상 업무의 일환으로 진행해온 체크리스트”라고 말을 바꾼 바 있다. 최근에는 청와대가 바라는 대로 인사가 이뤄지지 않아 김 전 장관 측에서 청와대 신미숙 균형인사비서관실에 경위를 해명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사를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김 전 장관과 청와대가 어떤 상의를 했으며, 그 일이 과연 적법한지를 가리는 일이다. 여권은 공공기관 임원 인사권을 갖는 대통령이 해당 부처 장관과 인사 문제를 협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적폐라 해도 적법한 방법으로 청산해야 한다. 혹여 박근혜 정권 때처럼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놓고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불법적으로 배제했다면 말이 안된다.

25일 진행되는 구속적부심에서 김 전 장관이 구속될 경우 수사는 곧바로 청와대를 향하게 된다. 검찰은 조만간 신 비서관을 소환할 예정이라고 한다. 검찰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수사해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 검찰이 더 이상 살아있는 권력에 약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청와대 역시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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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었음을 얼마나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으니! (…) 뒤쪽이 진실이다! ….”

오래 지니고 있는 책 <뒷모습>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2002년 출간되었으니 어느 새 17년 묵은 책,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진집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저명한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와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가 공동 작업으로 펴냈다. 국내에는 불문학자 김화영이 옮겨 현대문학에서 출간했다.

에두아르 부바는 일상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남녀노소 50여명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가 등을 보이고 있다. 뒷모습이 핵심이다. 곰 인형을 등에 업은 소녀, 키스하는 남녀, 소를 앞세우고 쟁기를 메고 가는 농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등이 굽은 할머니, 엎드려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 홀로 또는 여럿이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 부바의 사진작품마다 투르니에는 시적인 문장을 곁들였다.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사진과 시적인 글이 짝을 이루다 보니 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읽는 즐거움까지 준다. 그래서 문득 생각날 때마다 편하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뒤쪽이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앞쪽은 얼굴로 온갖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손짓은 물론 발짓과 어깻짓으로도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뒤쪽은 앞쪽에 비해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그저 넓적한 등과 어깨, 엉덩이가 있을 뿐이다. 꾸며내거나 거짓말을 할 방법이 없으니 솔직하고 정직하고 또 진실할 수 있다. 투르니에가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천명한 것을 보이지 않는 이면, 숨겨진 진실을 보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화제가 된 사건들이 있다. 공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의구심을 가지는 사건들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 장자연씨의 죽음, 이제는 ‘사건’에서 ‘게이트’로 변하는 ‘버닝썬’이 대표적이다. 의구심은 앞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뒤쪽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실제 김 전 차관과 장자연씨 사건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여러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얼굴이 아니라 등에,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것 같은 진실을 주목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 이 사건들을 콕 집어 철저한 진상규명을 지시했다. 법무부 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은 득달같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 마치 검찰과 경찰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실토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명확한 규명, 가려진 진실이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들 사건은 우리 사회의 권력층 인사들, 검찰과 경찰까지 얽혀 있어 더욱 그렇다.

이 사건들과 관련된 뉴스를 접하면서 <뒷모습>을 다시 펼쳤다.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투르니에의 말이 새삼 다가온다. 가수이자 방송인인 정준영과 ‘제2의 정준영’들이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주고받은 문자들을 보면서는 더 절감했다. 팬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준영은 성관계 동영상을 몰래 촬영해 거리낌없이 단톡방에 공유했다. 공유가 아니라 자랑했다. 다른 인기 연예인들은 그 영상을 보며 히히댔다. 스스로들 ‘쓰레기짓’임을, 범죄임을, 부도덕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공범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방송 카메라 앞이나 무대 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진정한 실체는 정면이 아니라 뒤쪽의 단톡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투르니에의 말이 맞다. 이제 그들은 각자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고, 부도덕성을 질타받는 게 마땅하다. 물론 그들의 소속사인 연예기획사,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으로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들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세웠던 방송사들도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오고간 그 단톡방 문자들을 보면서 그들만의 행태일까라는 자문도 한다. 여성의 성이나 신체를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의 뒤쪽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단톡방 문자가 공개된 이후 거리낌없이 벌어지는 2차 가해를 본다. 왜곡된 성의식과 성문화, 관음증까지 내면화되는 한국 사회의 솔직한 뒷모습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단톡방을 한번쯤 살펴보자. 어쩌면 나의 진정한 실체도 앞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지 성찰할 때다.

<도재기 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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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열렸다. 3인 가족이면 1억원 넘게 벌었다는 얘기다. 선진국 진입의 징표라는 이 기준을, 인구 2000만명을 넘는 국가 중에서는 아홉 번째로 달성했다.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성장’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정부는 이 호재가 남의 나라 일인 양 조용하기만 하고, 오히려 국민은 정부의 경제무능을 하염없이 탓하여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탄 수구세력은 국가위기라 선동하며 극복을 위해 기업의 효율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 김용균씨, 고 황유미씨는 그들의 기억에 없다. 최저임금을 낮춰야만 하고 사람의 생명을 돈 몇 푼으로 바라보는 저열한 기업의 노동환경개선 속도를 늦춰야 한단다.

미세먼지와 폭염의 고통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감내해야만 한단다. 기업이 지금보다 돈을 더 잘 벌어야 국민이 잘산단다. 그래서 규제를 타파해야 한단다. 급기야 정부는 타당성도 없는 토건사업에 수십조원을 쏟아붓는단다. 기업만 배불린 ‘4대강사업’은 ‘고향의 강’ ‘생태하천’사업으로 둔갑하여 더 빠른 속도로 하천을 유린하고 모든 산에 케이블카를, 모든 지자체에 공항을 건설할 기세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진다. 개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이고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설명하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경제는 더욱 그렇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한국은 자원이 없어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럼 수출이 잘되면 국민이 잘살아야 하는 것이 기본 이치이다. 작년 한국의 수출은 역사상 최초로 6000억달러를 돌파했고 경상수지 흑자는 80개월 넘게 연속되고 있다. 2008년까지 많아야 200억달러 수준이었던 연간 흑자규모는 2009년을 시작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2013년부터는 매년 700억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에도 저축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무를 늘려 2013년 500조원이 채 안되던 빚이 작년에는 700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부터 작년까지 무역 흑자는 5000억달러를 넘었고 빚은 200조원이 넘게 증가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고, 정부가 돈을 뿌렸는데도 정작 대다수 국민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피폐해지고 빚만 늘어갔다. 대기업의 재산은 주체할 수 없이 늘었는데 일자리는 줄고 실업자가 늘어난다. 파이가 커지는데 국민에 돌아오는 양은 더 작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업을, 자본을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하고 자본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전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면, 오염물질을 덜 배출하게 하면 기업이 힘들고, 돈이 정체되고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위기가 온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좀 솔직해지면 안될까? 규제 완화 정책은 극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이다. 오죽하면 무노동의 건물주가 최고 선망의 직업이 되었겠는가?

낙수효과는 없다. 이제 경제성장이 우리를 잘살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기업의, 자본의 효율성 강화라는 명목으로 시행된 각종 규제 완화로 서민은 더욱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만 할 때이다. 지금 주장하는 효율성 강화는 쉬운 해고와 낮은 임금체계로 노동을 착취하거나 환경파괴행위를 용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강화된 효용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지만 정작 국민의 삶과 국토는 유린된다. 미국의 리먼사태 이후 경제부양에 쏟아부은 돈의 90%는 정작 위기를 초래한 1%의 부자에게 돌아갔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다. 경제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예비타당성조사도 없이 퍼붓는 토건비용은 부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언어모순에서 벗어나, 촛불정부의 초심으로 돌아간 ‘나눔주도성장’이 절실해 보인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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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민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매일 새롭다. ‘신행정수도’의 우여곡절 논쟁을 거쳐 2007년 건설의 첫 삽을 뜬 지 불과 10년 만에 인구 30만명이 정주하게 된 이곳은 경이로운 ‘순간’ 도시이다. 최근에는 국회 분원 입지연구가 시작되고, 대통령 제2집무실 태스크포스(TF)도 구성되어 향후 세종시의 진화 양상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

현재 건축전문가 대다수는 세종시에 대해 별로 좋은 소리를 안 한다. 건물 디자인에서부터 가로환경 디테일까지 긍정적 언급이 드물다. 도시계획가도 비슷해, 토지 이용은 물론 교통 및 주차 체계에 대해 아쉬워한다. 지표면적의 절반 이상이 공원녹지인 도시인데, 조경가 역시 오픈스페이스의 경관에서부터 바닥재질까지 흡족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불만에 공감하는가? 세종시 환경에 대해 어떤 근거로 설명하는 게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을 가질까?

국토교통부의 2017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세종시에 대한 건축·도시계획·조경 전문가들의 부정적 의견에 비해 주민들의 주거환경에 대한 평균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그리 낮지 않다. 공원녹지, 보행 안전, 치안, 주변 청결, 지역 유대 등과 같은 항목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한다. 오히려 문화시설과 의료시설에 대해서 큰 아쉬움을 보인다. 특히 문화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표출하고 있다.

세종시를 처음 구상할 때, ‘세계적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대규모의 국립박물관단지가 계획됐었다. 이에 대한 마스터플랜도 국제공모를 거쳐 2016년 말 선정되었다. 이후 개별 박물관의 건립 준비작업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도시건축박물관만 하더라도 몇 차례 초기 스터디와 콘텐츠 및 전시기획 기초연구가 있었지만, 적절한 후속작업은 미흡했다.

도시도 변하지만, 박물관 자체도 변하고, 전시 대상으로서의 도시건축 콘텐츠 역시 크게 변한다. 흔히 고지도, 고문서, 계획 초기 도면, 오래된 사진, 문헌, 모형 등이 도시건축박물관의 고전적인 콘텐츠로 여겨지지만, 이것으로 새로운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을 채울 수 없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전적이라 때론 새롭지 않다고 폄하되기도 하는 이 귀한 역사자료들 자체가 우리에게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모순적 이유로 우리에게는 획기적인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 전통뿐 아니라 일상의 도시건축 콘텐츠가 신기술과 만나, 신개념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도시건축박물관 내용으로 새롭게 대상화하지 않고서는 다른 해법이 현재 희박한 상황이다. 서울 성공회성당 앞의 도시건축박물관,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도시건축센터, 그리고 정동의 국토발전전시관보다 훨씬 더 심화, 진화한 방식으로 세종시의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획을 위해, 이제껏 국립박물관단지 실행계획이 다소 늦어지고 있는 점이 역설적으로 다행일 수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건설속도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급속의 압축성장시대를 견뎌온 우리 사회가 이제는 차분히 우리 도시건축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그곳에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미래 삶의 모습으로 향해 가고 싶은지, 새삼 새로운 공부와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학습이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의 실행 기반으로 작동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명품 신도시, 국민통합과 균형발전의 친환경 도시, 상생과 도약의 지속가능 도시’ 등 세종시에 붙여진 공식 명칭이 여전히 공허하다. 국회 분원과 대통령 제2집무실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이즈음, 세종시와 우리 도시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채워줄 국립박물관단지의 논의가 함께 구체화되길 바란다. 미국 워싱턴시가 자랑하는 그 도시의 정주성과 정체성은 행정, 사법, 입법의 기능과 함께 큰 축으로 작동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군의 다양한 문화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박소현 건축도시공간연구소장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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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은 범죄자의 죗값을 고통으로 치르게 하는 거다. 가장 확실한 고통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자유를 제한하여 고통을 주도록 설계된 제도이니 갇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신체의 자유 제한에는 가족 관계의 단절, 생계 박탈, 사회적 평판의 추락 등 따라붙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만4774명이 감옥에 갇히는데,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구금자는 1만8867명으로 전체 수용자의 34.5%다. ‘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면 상당한 숫자를 줄일 수 있다. 예산도 줄이고, 피고인의 방어권도 보장하며 진짜 범죄자인지를 가리기 전에 형벌을 주는 왜곡도 막을 수 있다. 구속은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칠 것 같은 사람을 잡아두기 위한 이례적 절차이지만, 현실에서는 유무죄 판단보다 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나쁜 범죄자, 기각되면 죄가 없거나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된다. 간편한 도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기관들은 구속에만 매달린다. 자기들의 수사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법원에는 거센 여론과 맞설 배짱 같은 것이 부족해 보인다. 구속영장을 발부하지만, 억울하면 나중에 재판받을 때 얼마든지 소명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부담감을 덜어내는 식이다.

형사사건의 핵심은 감옥에 가느냐 아니냐로 갈리지만, 이게 꼭 공정한지는 늘 의문이다. 재벌들에게 적용된다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법칙’이 보여주듯, 감옥행이 죄질에 따라 갈리는 것도 아니다. 당장 김학의 사건 등 여러 낯 뜨거운 사건들만 해도, 결국은 누구는 힘이 있어서 다른 누구는 어떤 배경이 있어서 감옥에 가지 않았고, 기본적인 수사조차 피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특권층과의 유착에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유독 흉악하거나 매우 위험해서 반드시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당장 중요 범죄의 발생 건수 자체가 줄고 있는데, 감옥은 연일 과밀수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만 해도 그렇다. 지난 10년 동안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범죄 자체가 줄어드니 수용자도 줄어드는 당연한 결과다. 2013년 절도사건으로 갇힌 사람은 4650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3858명으로 줄었다. 놀라운 성취다. 반면, 사기, 횡령 등 경제사범으로 구금되는 사람들은 같은 기간 5024명에서 7630명으로 크게 늘었다. 결국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갇히는 사람들만 잔뜩 늘어난 셈이다.

법정 구속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과밀수용의 원인이 되었다. 2013년에는 연간 753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만2378명이었다. 법의 준엄함을 보여준 것은 좋지만, 범죄 발생 건수 등에서 별다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고 주요 범죄 발생은 큰 폭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유독 법정 구속만 늘고 있다는 것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각급심의 재판기간이 계속 늘어나는데 법원이 구속재판을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입구가 활짝 열린 감옥 문제, 특히 과밀수용 때문에 교정교화든 재사회화든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구 전략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감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감옥에서 나오는 길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 정해진 형을 다 마치고 만기 출소하는 경우, 아니면 가석방을 통해 조금이라도 일찍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가석방은 출구 전략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만, 무엇보다 교도소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감옥생활은 더딘 시간과의 싸움이 핵심이다. 그러니 수용자 입장에서 가석방은 기대볼 만한 유일한 희망이다. 교정당국 입장에선 확실한 유인책이기도 하다. 질서를 잘 지키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를 열심히 한다는 차원에서 자격증이라도 따면,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교도소 운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교정당국이 수용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당근이다. 징벌을 주거나 심한 경우 추가 범죄로 단죄하는 등의 채찍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회도 채찍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형벌을 주는 것이지만, 세상 어떤 나라도 단순한 응보적 형벌만으로 감옥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다시는 범죄로 빠지지 않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방도를 마련하는 게 교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가석방은 교정활동의 실질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석방 여부를 정하는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수백명의 심사자료를 한꺼번에 검토할 뿐이다. 얼굴을 맞대고 수용자의 재활의지를 직접 묻고 확인하는 일은 없다. 음주운전, 마약, 성범죄 등 가석방 제한 사범을 정해두는 식으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법원, 검찰, 학계와 교정관계자가 참여하는 지금의 틀을 유지하되, 각 교도소마다 가석방심사위원회를 두고 실질적인 심사를 해야 한다. 수용생활을 하면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 사회에 나가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 믿을 만한 근거는 뭔지 묻고, 직접 답을 듣는 가석방심사가 되어야 한다.

감옥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대폭 늘려야 한다. 그저 가둬두는 것만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석방을 활성화해서 수용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든 희망이 없는 곳은 그저 지옥일 뿐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그 위험이 해소될 때까지 격리하는 게 맞지만,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감옥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공간이다.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고이고 썩게 된다. 지금 한국의 감옥 현실이 그렇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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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KBS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방영하고 있는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생존주의 시대답게 청소년 100명이 50문제를 풀면서 매 순간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포맷이다. 50문제를 모두 맞힌 사람은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하다보면 중간에 학생들이 대거 탈락하는데, 패자부활이란 이름의 매우 간단한 게임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50번 문제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탈락한다. 가끔 최후까지 살아남은 한 명이 50번 문제에 도전할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한 명이구나.’ 일상의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한 지금 사회 전 성원이 모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 좌절과 냉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달래어 다시 생존경쟁에 복귀시켜야 한다. 패자부활 게임이 필요한 이유다. 힐링을 시켜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생존경쟁에 복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도 문제지만, 문제의 수준도 그에 못지않다. 2016년 나온 문제다. “다음 중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닌 사람은? 1) 톨스토이 2) 타고르 3) 앙드레 지드 4) 펄 벅 5) 헤르만 헤세.” “멘델스존 <결혼 행진곡>은 요정들과 청춘남녀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입니다. 어떤 작품일까요?” 도대체 이따위 문제를 풀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읽지도 않은 책, 감상하지도 않은 음악 ‘제목’을 알아맞힌다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장학금 주고 명예의전당에 이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오른 어느 최후 생존자의 고백이다. “방송 퀴즈라는 게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생각나지 않으면 절대 맞힐 수가 없거든요. 여유 시간을 5초 더 준다고 하여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50문제 모두 제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왔으니 정말 행운이었던 거죠.”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을 해야 하는 문제를 잘 맞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이 골든벨 최후 승자는 대학 들어간 지 몇 년 채 되지도 않아 사법시험에 붙었다. 도대체 시험문제가 어떻기에?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나온 역사 문제다. “다음 중 고려후기에 閔漬가 편찬한 史書는? 1) 古今錄 2) 千秋金鏡錄 3) 本朝編年綱目 4) 史略 5) 編年通錄.” 응시자가 읽어보지도 않았을 역사서 이름 알아맞히기 퀴즈다. 대부분 이름만 전하는 역사서라 접할 수조차 없다. 엘리트가 치르는 사법시험이니 한자(漢字) 읽기 능력 검증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쨌든 골든벨 퀴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제를 잘 푼 사람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언론계의 특권층이 되어 온 나라를 쥐락펴락해왔다.

그나마 이제 사법시험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사정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시험문제를 보면 대부분 정보의 옳고 그름을 묻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다. 기껏해야 암기한 단순 지식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추론하는 논리 문제다. 인지능력 테스트인 셈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에는 참과 거짓을 순식간에 인지적으로 식별해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이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자극-반응에 몰두하다보면 자아가 축소되기 마련이다. 보다 일반화된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대상화해서 타자들과 정서적·도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감퇴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현재 ‘온 나라 공무원 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퀴즈풀이 결과로 한 줄 세워서 극소수의 승자에게는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특권을, 나머지 대다수 패자에게는 지나친 열패감과 차별을 평생 각인시키는 ‘골든벨 사회’. 2018년 9급 공무원 한국사 문제다. 자, 다 같이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다음 해외 견문 기록을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표해록 ㄴ. 열하일기 ㄷ. 서유견문 ㄹ. 해동제국기”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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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수 세계 1위’ ‘휘게 라이프의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구시청 청사 로비에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 4명의 동상이 서 있다. 그중 한 명은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원자물리학의 교황’ ‘양자역학의 아버지’인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이다. 그가 설립한 코펜하겐 대학의 닐스 보어 연구소는 1920년대부터 2차대전 후까지 세계 물리학의 중심이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보어 자신이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그의 아들 아게 보어(1975년)를 포함, 노벨상 수상자를 4명 배출했다. 1939년 세계 최초로 핵분열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원자력 연구의 중심이었던 덴마크에는 지금 원전이 없다. 1985년 덴마크 의회가 원전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일어나자 석유에너지 의존도 95%(석탄 포함 99%)에 이르렀던 덴마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대안으로 원자력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이때부터 12년 동안 논의한 끝에 원전 포기를 국가정책으로 확정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비추면 덴마크의 탈원전 결정은 동화 같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국내 원전주의자들이 덴마크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연구 역량까지 갖고 있다면 탈원전의 탈자도 꺼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의 원전주의자들은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고 하지만 실상은 반대이다. 원전을 새로 짓는 나라는 중국과 몇 나라 외에는 없다. 지난해 착공한 원전도 전 세계적으로 단 2기뿐이다. 탈원전 비판 논리도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다 무너진다. 최근 탈원전 정책 때문에 미세먼지가 심각해졌다는 주장은 완벽한 가짜뉴스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원전 가동 중단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원전 발전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부실공사가 드러난 데 따라 원전에 대한 안전을 점검하느라 벌어진 결과일 뿐 탈원전 정책 때문이 아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해외 원전 공사 수주를 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왜곡이다. 지난해 영국 원전 수주에 실패한 것은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수주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영국 가디언지 기사에서 맨 뒤에 잠깐 언급됐다. 이것을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해 핵심 요인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탈원전 정책 탓에 핵 공학 관련 학과에 학생이 줄었다는 주장도 코미디다. 대학에서 영원히 잘나가는 학문·학과는 없다. 원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원전주의자들이 목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깨어진 원전 불패 신화의 조각을 붙들고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탈원전 12년 토론은 치열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집착한 보어의 이상과 학문적 전통을 포기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원전은 짓지 않지만, 원자력 연구는 계속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은 그 산물이다. 원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연구는 이어가자는 것이다. 사시사철 균질하게 부는 질 좋은 바람이 풍력이라는 대안 에너지에 힘을 실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토론에 가장 기여한 것은 덴마크의 정치다. 덴마크는 지금도 좌우 정당 간 의석수가 1석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한 뒤 결론이 나오면 인정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정치문화가 건강한 원전·탈원전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탈원전 법안을 통과시킨 이듬해 체르노빌 사고로 전 유럽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덴마크 사람들은 “원전을 짓지 않기로 한 우리 결정이 옳았다”며 안도했다.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기존 3개의 원자로를 차례로 닫았다. 원전 셧다운을 실현하면서 전기에너지의 70%를 풍력으로 대체한 최고의 친환경 에너지 국가로의 변신을 완성했다.

현 정부의 정책대로 간다고 해도 완전한 탈원전에 이르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원전 정책을 놓고 토론할 60년이라는 시간을 받아놓은 것이다. 미래를 전망할 근거가 부족하면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는 게 과학하는 자세다. 원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억지 주장이 합리적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자유한국당도 탈원전 비판에 올인할 게 아니라 향후 원전 공약을 고민해야 한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쪽도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탄소를 덜 배출하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전의 효용도 무시할 것만은 아니다. 빌 게이츠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신원전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50년 전 덴마크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겐 불가능한 것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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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 ‘여성 재판관 3인 시대’가 열리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성인 이미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신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면 이선애·이은애 재판관과 함께 3인의 여성 재판관이 동시에 재직하게 된다. 전체 재판관 9명 중 3분의 1로, 헌법기관의 여성 비율이 30%를 넘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헌재의 고유한 역할과 성평등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 인선으로 환영한다.

헌법재판은 사인(私人) 간 권리 다툼을 다루는 일반 재판과 달리 헌법적 분쟁을 해결해 국가 공권력 작용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일반 소송에서는 재판 결과가 소송 당사자에게만 미치지만, 헌법재판에선 심판 대상 법률에 위헌을 선고할 경우 그 법 조항을 적용받던 시민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헌법재판의 규범적·정책적 기능과 공동체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헌법재판관 구성의 다양화는 절실한 과제다. 한목소리, 같은 색깔, 비슷한 얼굴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균형 있게 반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 법관) 위주의 헌재 구성이 비판받아온 이유다.

이 내정자는 여성이자, 40대이며, 지방대(부산대) 출신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 노동 관련 사건을 주로 맡았다. 함께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문형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도 기존 재판관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서울에서 재판한 적이 없는 ‘지역법관’이며, 노동·아동학대·가정폭력 사건 등에서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해왔다. 이들이 취임하면 헌재의 스펙트럼은 보다 다채로워질 것이다. 과거 ‘이용훈 대법원’의 ‘독수리 5형제’(김영란·김지형·박시환·이홍훈·전수안)가 법원의 변화를 견인해냈듯, 이들이 헌재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한다.

문·이 내정자의 지명은 긍정적이나, 이들로 충분치는 않다. 헌재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더 많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 지역 출신, 비서울대 출신, 변호사·법학교수 출신이 늘어나야 한다. 연령대도 젊어져야 한다. 가치관의 다양성도 확보돼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신뢰받으려면 그들의 모습이 주권자들과 닮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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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 항공권을 양도한 ‘김민섭씨 찾기 프로젝트’ 이후, 나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게 됐다. 90%에 가까운 수수료를 지불하고 1만8000원을 환불받느니 차라리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자,라는 이유로 시작한 별것 아닌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학생 김민섭씨의 여행을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개인적인 일이 의도치 않게 사회적인 일로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사실 나에게 “환불받고 치킨이나 같이 시켜 먹지 뭐하는 거야”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로 인해 행복한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항공권을 양도받은 누군가가 즐겁게 여행을 다녀온다면 그 과정을 지켜본 나 역시 가성비 좋은 ‘소확행’을 누리게 되는 셈이다. 여행을 후원한 여러 개인들 역시, 그로 인해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선한 연대, 우리 사회의 ‘착한 일’ 중 하나가 된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착한 일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표가 생겼다. 여기에 답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착함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착한 일 코스프레 같은 것을 늘 목도하며 살아가고, 스스로의 착한 일 역시 잘 인식하지 못한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작은 결론은, 착해지고 싶은 존재는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착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두 가지의 행위를 강박적으로 지속했다. 하나는 ‘아동 정기후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혈’이었다. 한 달에 3만원씩 특정 아동에게 돈을 보냈고 한 달에 한 번씩 헌혈을 했다. 내가 그것을 시작한 계기보다도 사실 ‘시기’가 문제였다. 나는 그때 대학원 과정생이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는 것조차 벅찼고 헌혈을 하러 갈 시간에 논문이나 더 쓰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후줄근하다고 할 수 있을 그 시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누군가를 돕고 싶은 심정이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는 사회적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밤새 논문을 쓰고 발제 준비를 해도 그것을 마치고 나면 몹시 허무했다. 내가 쓴 글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이 즐거우니까 버텨낸 것이기는 하지만, 문득 찾아오는 ‘나는 이 사회에서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슬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 헌혈을 하고 나의 피를 바라보던 중, ‘저 피는 나의 글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쓰이겠구나, 그러니까 저건 사회적인 물건이구나’ 하는 감정이 찾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사회적 존재로서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대학원을 수료하기까지 70번에 가까운 헌혈을 했다. 정기후원을 시작할 때의 사정도 비슷했다. 자매결연, 그 ‘결연’이라는 단어를 소유할 수 있음에 감격했던 것 같다.

착한 일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를 사회적으로 연결시킨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그 마음을 통해 자신이 사회적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행위는 하는 편과 받는 편 모두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어야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얇고 느슨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연결을 확장시켜 나간다. 그러한 착한 일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사회의 문화와 제도를 바꾸어 나가는 힘이 된다.

어느 아동과 연결되었던 날, 나는 “당신은 왜 후원을 하셨습니까?”하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는 “저를 위해 후원합니다”하는 한 줄을 적었다. 게시판을 살펴보던 나는 몹시 놀랐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후원의 이유에 “저를 위해서…”라고 적은 것이다. 사실 모두가 외로웠고 사회적 존재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날 나는 별로 외롭지 않았다. 아직 “착한 일이란 무엇인가”하는 데 대한 답을 제대로 내지는 못했지만, 타인을 상상하는 데서부터 그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사회적 존재로서 외롭지 않기를, 당신과 누군가의 잘됨을 바라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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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 내내 간직해 온 열매가 아직도 붉은데 다시 새봄을 맞은 산수유는 꽃망울을 틔워냈다. 봄이다. 무채색의 칙칙함을 한방에 날려버리듯 봄꽃은 밝고 화려하다. 곧 벚꽃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도 필 것이다. 남들보다 서둘러 꽃을 피우면 비록 적은 양의 꿀을 제공하더라도  꽃가루를 실어 나를 벌들이 찾아들 것이기에 산수유가 저런 전략을 취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잎 없이 열린 공간으로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서발막대 거칠 것 없이 날아갈 수 있다는 점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꽃은 대표적인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식물은 몇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생식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한다. 첫 번째는 잎에서 광합성을 진행하는 방법이다. 이는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로 꽃을 피우고 매개 동물을 유인할 꿀을 만드는 일이며 많은 수의 식물이 취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생식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는 일이다. 지난해 저장해 두었던 탄수화물을 꽃 피우는 데 사용하는 산수유나 벚꽃이 이런 전략을 쓴다. 마지막은 생식기관이 직접 광합성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꽃은 광합성에 참여한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푸른색을 띤 꽃받침일 것이다.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갈 때까지 꽃받침은 적극적으로 광합성에 참여하기도 한다. 최근 나는 감을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 호주 농림부의 출판물을 읽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감의 초록색 꽃받침 네 개를 하나씩 떼 가면서 감의 크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측정한 연구 결과였다. 놀랍게도 네 개 꽃받침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감의 크기가 제일 컸고 꽃받침 수가 줄어들면서 감의 크기는 비례적으로 작아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꽃받침 말고 꽃잎, 암술 혹은 수술대와 같은 꽃의 생식 부위에서도 광합성이 진행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식물의 거의 모든 기관이 많든 적든 탄소를 고정하는 광합성 작업에 나서는 걸 알 수 있다. 익기 전의 과일이나 일년생 풀의 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맹그로브라는 식물은 뿌리로도 광합성을 한다. 물론 이파리에 비해 그 효율은 떨어진다. 하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밀의 쭉정이는 단위 면적당 광합성 효율이 잎의 75%에 이르기도 한다. 이삭의 수를 감안하면 이는 쉽사리 무시하지 못할 양이다.

광합성 전문 기관인 잎은 기공이라는 구멍을 통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인다. 지금처럼 인간의 활동을 통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증가하면 식물은 그 사실을 금방 알아채고 기공의 입구를 좁히거나 그 수를 줄임으로써 광합성 원자재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중국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1924년과 1998년에 채취한 은행나무 잎에서 기공의 수가 각각 134개에서 97개로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미국 식물학 잡지에 발표했다. 잎 뒷면에 있는 기공의 숫자를 세면 식물이 살았던 당시 대기 중에 존재했던 이산화탄소의 양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식물은 대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탄수화물의 재료인 이산화탄소를 확보할 수 있다. 

식물도 동물과 다름없이 자신이 만든 포도당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얻고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따라서 광합성을 하지 않는 온대 지방의 겨울이나 빛이 없는 깜깜한 밤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약간 증가한다. 전문 광합성 기관이 아닌 줄기나 과일 혹은 꽃받침은 자신들의 날숨에 포함된 이산화탄소의 일부를 여투어 다시 쓰면서 광합성을 수행한다. 이렇게 식물은 따로 기공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이산화탄소 경제를 운영해 나간다. 

동물이나 대부분의 세균은 갖지 못한 엽록체를 구비한 식물이나 조류가 이 행성에서 진행하는 광합성 과정은 실로 지구 전체를 먹여 살린다. 행성의 바깥에서 도달한 한 방향의 태양에너지를 지구 생명체가 포획하는 유일한 방법이 광합성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부의 에너지를 지구 안으로 들여오는 통로로서 광합성 생명체들은 든든한 곡물 창고인 셈이지만 실제 이들은 지구에 도달하는 전체 태양에너지의 1%도 채 사용하지 못한다. 이 정도만으로도 식물의 생물량은 지구 전체 생명체의 80%에 육박한다. 2018년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와 미국의 칼텍 연구진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 전체의 탄소 무게가 5500억t이고 그중 식물의 무게가 4500억t에 이른다고 추정했고 그 연구 결과를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이 수치는 우리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 인구는 약 12년마다 10억명씩 늘고 있지만 인간의 주요 곡물인 밀과 쌀 생산량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태양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저장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가까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식물의 경제 방식을 배우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식물이 잎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을 최대한 이용하여 대기권 혹은 자신의 날숨 속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를 영양소로 변환시키는 과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인간이 작물화에 성공한 밀과 쌀 같은 곡물의 쭉정이조차 광합성을 한다는 사실은 경탄할 만하다. 식물의 이런 기예를 보고 있으면 생명의 역사에 기여한 인간의 발명품이 알코올을 농축시키거나 끓는점에 따라 석유를 분류하는 ‘증류’ 또는 ‘바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광합성에 참여하는 분자 기구나 유전적 기초를 비로소 눈치채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엽록소를 동물의 세포에 이식하든, 식물의 잎이나 뿌리를 흉내 낸 로봇을 제작하든 인류의 운명은 앞으로도 거의 수십억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될 가능성이 큰 저 태양에너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도 여전히 봄은 꽃으로 그득하겠지만 이젠 그 꽃받침에 내려앉는 태양빛마저도 눈여겨보게 된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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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내가 겪은 몇 가지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다.

물리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태어난 뒤로,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접하는 경험과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일을 겪어도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여성이 훨씬 더 위험한 세상에 살고 더 많은 차별을 받는다.

몇 년 전 일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택시를 탔다. 기사님에게 행선지를 이야기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택시는 낯선 길로 가고 있었다. 주변에 가로등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겁이 났다. 그러나 곧 별일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택시 강도나 납치범이라면 술에 취하지도 않은 멀쩡한 남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잠이 들었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슬쩍 물어보니 본인이 아는 지름길을 택해서 왔다고 했다. 실제로 택시비도 조금 적게 나왔다.

집에 와서 아내와 이 짧은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 ‘남자라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여성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다시 잠들지는 못했을 것이라 했다. 맞다. 내가 여성이었다면 택시가 집 앞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쩌면 한밤중에 이런 택시를 잡아탄 스스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여성·흑인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캡틴 마블>. 월드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얼마 전 영화 <캡틴 마블>을 봤다. ‘페미니즘 영화’라며 일부 남성들이 관람을 거부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려와 달리 페미니즘 요소가 극의 전개를 해치지 않았다. ‘여자들은 할 수 없을 것이란 편견을 이겨내는 여주인공’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라 ‘진짜 이게 페미니즘 요소의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해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다음달 개봉하는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이어주는 영화로는 무난하다고 여겼다.

같은 영화를 보고 온 회사 여자 후배의 반응은 나와 달랐다. 평소 마블 영화를 즐기지 않았지만 <캡틴 마블>은 정말 재밌고 감동적으로 봤다고 했다.

특히 “여자는 조종사가 될 수 없어” “여자는 너무 감정적이야” “여자가 하기엔 무리야”라는 ‘조언’을 쉴 새 없이 받으며 자란 주인공이 이런 편견을 박살내고 우주 최강의 전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린 모양이었다. 이 후배는 ‘딸과 함께 볼 영화’를 찾고 있는 선배에게 <캡틴 마블>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최근 성폭력 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방송인 정준영의 범행을 보는 시선에도 ‘온도차’가 있다. 획일적으로 재단하기는 어렵겠지만, 남성들은 대체로 정준영의 범죄를 ‘실재하는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많은데 왜 언론은 정준영 사건만을 다루나. 뭔가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남성일 것이다. 반면 여성들에게 정준영의 범행은 언제라도 눈앞에 닥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니 ‘다른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 역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은 원래 다르게 태어난 존재이니 별 수 없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세계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의 평화, 직장의 평화,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두 세계의 간극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다.

사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여성들은 두 세계 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와중에 비판을 받고, 논란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럼 이제 공은 반대편에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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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절집엔 고목 매화들이 듬뿍한 꽃들을 내밀고 있더라. 입술연지처럼 고운 꽃을. 지난겨울 동치미가 먹고 싶었나 캥캥 울던 고라니도 간데없고 외따롭게 지붕을 인 암자엔 노승의 기침소리만 뎅그렇다. 같이 나들이한 친구가 “나 절에 들어가서 살까?” 실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절집도 장기 투숙자는 골라서 받는다. 또 행자스님이라도 아무나 받는 게 아니지. 피식하면 하는 소리가 ‘고향에 내려가서 살겠다, 절에 들어가 살고프다’ 어쩐다 하지만 그게 말만큼 쉽나. 만만한 게 절집이다. 정치인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유권자 여러분. 일단 저를 실업자로 만들지만 말아주세요. 실업에서 구해 주시면 반드시 유권자 여러분에게 구직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능청도 좋아라. 그래놓고는 몰라요로 하세월이렷다.

구름이 비를 꾹 참고 있다. 꾸물꾸물하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 아이가 실업자 신세가 되었노라 하소연을 했다. 짐마차를 모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아이. 이제 뭘 할 거냐 물으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시 구직활동을 해보겠노라고. 그 아이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혼자 벌어 월세를 내고 햇반을 데워 먹으며 살아간다. 친구들 다 가는 대학도 가지 못했다. 복날에 술 취한 개도 “개장수들 다 나오라고 그래!” 허풍을 떤다고 하지. 이 아이는 항상 마음을 움츠리고 어깨도 굽어 있다. 목소리도 모기소리만 하다.

지금은 실업급여라도 있어 다행이어라. 전에는 당장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했고, 당일부터 알거지였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정년도 뭣도 없고 좋아. 다만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점. 실업자 아닌 실업자라는 점. 누가 그랬다. 아직도 원고료 몇 푼이라도 받고 사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냐고. 운 좋은 거라고.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한번은 동생 스님이 계시는 절집에 시주했다. 스님도 시를 쓴다. 실업자 시인들, 모두 원고료를 받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살짝 밀어드렸다. 그 덕분인지 요즘 시가 솔솔 써진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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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드린다. 팀 애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초 열린 미국 노동정책자문위원회에서 애플 최고경영자(CEO)에게 “애플이 미국 내 투자를 많이 했다”며 한 말이다. 그런데 애플의 CEO는 팀 쿡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실수는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는 아시아국가 부탄을 ‘부톤’으로, 네팔을 ‘니플’로 잘못 불렀다. 유럽 테러를 이야기하면서 테러가 발생하지도 않은 스웨덴을 언급하기도 했다.

말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총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평양 전쟁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당시 스즈키 간타로 일본 총리가 ‘모쿠사쓰(默殺·묵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무조건 항복과 완전한 파멸 중 하나를 택하라”는 미군의 통지에 “당분간 보류한다”는 뜻으로 말한다는 것이 “무시하겠다”로 이해되면서 원폭투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호주 방문 때, 맬컴 턴불 당시 호주 총리와 루시 여사에게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당신과 당신의 맛있어 보이는(delicious) 부인께 감사드린다”고 영어로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프랑스어로 ‘매력적’이라는 뜻을 가진 델리시외즈(delicieuse)를 딜리셔스(delicious)로 혼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도 2016년 연설에서 “스스로 발전시키고(라즈비바츠)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려던 것을 “옷을 벗고(라즈디바츠) 땀 흘릴 때까지 일하라”고 잘못 전달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국빈 방문에서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에게 ‘슬라맛 소르(selamat sore·안녕하세요)’라고 인도네시아어로 인사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말레이시아어 인사말 ‘슬라맛 쁘탕(Selamat petang)’을 잘못 말한 것이다. 두 나라는 전통적인 ‘앙숙’ 관계여서 모하맛 총리는 물론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불쾌했을 법하다.

청와대 측은 “현지어 인사말 작성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다”고 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외교 참사’다. ‘작은 구멍에도 댐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구를 청와대는 새겨들어야 한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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