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검찰은 300페이지에 달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공소사실은 무에서 무일 뿐입니다. 저는 공소장에 대응해야 합니다. 무소불위 검찰과 마주서야 합니다. 하지만 제게 무기라고는 호미 한 자루 없습니다. 재판은 재판입니다. 공평과 형평이라는 우리 형사소송법 이념이 지배하는 법정이기를 바랍니다.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고 형사소송법 원칙과 이념이 구현되는 법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영민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검사 수십명이 만든 공소사실에 대응하려면 사건을 잘 아는 당사자가 불구속으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보석은 기각됐다). 이렇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혐의를 다투기에 앞서 소송법 원칙을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一本主義)를 위반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라는 원칙이다. 판사와 배심원에게 예단을 주는 서류를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소장에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 이외 사실을 적어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하는 것도 금지된다. 

공소장일본주의가 무엇인지 대법원이 가장 치열하게 논쟁한 판결이 문국현 사건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검찰은 낙선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혐의와는 무관하지만 기업인 출신인 문국현 후보는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가 부도덕하다고 비판했었다. 검찰은 공소사실과 관계도 없고 입증도 되지 않는 내용을 산만하게 공소장에 적었다. 이 정도라면 소송법에 따라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고들 했다. 2009년 대법원이 문국현 사건을 선고했는데, 공소기각 의견을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전수안 대법관이 냈다. 

그러나 주심 신영철 대법관을 비롯한 나머지 대법관들이 “1심에서 문제제기해야 했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신영철 대법관의 문장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데 이때도 다르지 않았다. 요약하면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이 맞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애매한 다수의견을 보충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양승태 대법관이다. “공소사실을 특정하려면 그 배경과 과정을 자세하게 기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양승태 대법관은 2011년 대법관에서 퇴임해 같은 해 대법원장이 된다. 임명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공소장일본주의에 관한 양승태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이렇다.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 또는 상황적 요소에 의해 범죄의 성립 여부가 좌우되는 미묘한 사안에서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구성요건에 직접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하여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범행의 동기, 배경, 과정, 기타 정황적 사정을 필요한 범위에서 기재하는 것은 형사공판 절차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행 과정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은 양승태 대법관은 피고인에게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에 의해 심판의 대상이 특정됨과 동시에 입증의 대상과 심리의 방향도 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기재는 오히려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결론 냈다. “공소장의 기재 내용은 필연적으로 증거로 확보되어 있는 내용의 축약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인바, 증거에 의한 입증을 증거의 인용과 혼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의견이 법정의견이었다면 공소장일본주의는 사실상 폐기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형사법정은 검사의 놀이터, 판사의 휴게실, 전관의 영업장이다. 검사는 정의감으로 포장된 출세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털어대고, 판사는 복잡한 기록만 들춰도 전문가 소리를 듣는 민사담당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전관은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된다며 거액을 뜯어낸다. 국회와 언론도 다르지 않다. 국회는 작은 사건만 생겨도 형량을 올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언론은 삼류 수사관이 되어 혐의를 인정하라고 피의자를 윽박지르고, 피의사실공표죄의 도구가 되기를 애원한다. 

형사재판에 쓰이는 판례·법률 가운데 제대로인 게 드물다. 전문증거에 불과한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이 있고, 이런 피의자신문에 묵비하면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일제가 본토에서도 안 하던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심었다. 해방 뒤에는 친일파 법률가들이 군사정권에서 유지했다. 피고인 양승태는 대법관 양승태와 싸워야 한다. 공소장일본주의 정도는 만만한 상대다. 그보다 강한 대법관 양승태들이 기다리고 있다. 피고인 양승태가 대법관 양승태를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지금은 호미 한 자루 없지만 결국 밭을 일구고 인권을 전진시키리라 믿는다. 아이러니지만 역사란 이런 것이다. 양승태, 양승태를 이겨라.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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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농촌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미세먼지가 뒤덮으면서 야외 작업시간이 연간 1512시간 이상인 과수농사를 비롯해 본격적으로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철을 앞두고 농업인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야외에서의 장시간 노동으로 각종 호흡기 질환에 대한 염려가 크다. 특히 65세 이상 농업인 인구가 43.3%에 달하는 농촌에서는 미세먼지에 취약한 노년층이 큰 문제다. 고령인 노년층에 흔히 발생하는 질병이 폐질환인데 미세먼지가 폐기능을 급격히 떨어뜨려 각종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긴요하다.

미세먼지는 농업인들의 건강뿐 아니라 농축산물 생산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세먼지가 심하면 시설재배 작물은 더욱 큰 영향을 받는다. 먼지가 햇빛을 가려 투과율이 떨어지면 광합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작물의 뿌리 활력이 낮아져 농산물의 품질과 수확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딸기를 재배하려면 조도(照度)가 3만럭스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1000럭스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조도가 낮아지면 벌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떨어져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기형과가 열리게 되고, 이로 인해 수량 확보가 어려워짐은 물론 양질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농가에서는 난방을 하고 장시간 불을 밝히면서 전기료를 추가로 부담하고 있다. 스마트팜 수요 증가와 함께 시설하우스 면적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 향후 미세먼지를 극복할 수 있는 시설재배 기술개발 연구가 필요하다.

농작물뿐 아니라 가축 또한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다. 개방형 축사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축사농가에서는 움직임이 둔해지고, 먹이 섭취량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콧물과 기침 등 호흡기 질환을 앓는 가축이 늘고 있어 비상이 걸렸다. 축사에 가림막을 치고 환풍기를 돌리는 축사 환경 개선은 물론 가축에게 효소와 비타민제를 먹이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나 계속해서 피해농가가 속출하고 있다. 가축뿐만 아니라 야외작업으로 장시간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축산농가의 건강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실효성 있는 미세먼지 대책과 더불어 미세먼지를 저감하려는 농축산분야의 노력도 중요하다. 질소비료 사용을 줄이고 축산분뇨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며, 농업잔재물의 불법소각을 관리해야 한다. 40년 된 나무 한 그루가 연간 35.7g의 미세먼지를 흡착한다 하니, 앞으로 숲을 잘 가꿔 미세먼지 농도를 낮추는 일에도 농업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는 관련 기관과 함께 ‘농촌지역 미세먼지 저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미세먼지 대응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농촌진흥청도 129억원을 들여 연차적으로 농축산 미세먼지 발생 실태를 파악하고 저감기술을 개발하는 등 연구개발을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연구원도 관련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미세먼지 연구에 착수할 계획이다. 그동안 미세먼지가 농업·농촌 전반에 피해를 입혀왔지만 구체적인 조사·연구는 미미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농업계의 다각적인 노력으로 향후 농업·농촌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미세먼지 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

<김창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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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이 매서웠다. 하늘은 금방 잿빛으로 뒤덮였고,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졌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녹색 신호등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후다닥 뛰었다. 그는 길 건너편 건물 안에 서 있었다. 티셔츠에 얇은 블라우스만 받쳐 입은 그의 얼굴이 파르스름했다. 열여섯 살 소녀에게 날 추운데 두껍게 입고 나오지 그랬냐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군소리다. 그는 생일날 번화가에 나와 점심을 먹는 특별한 시간에 마땅한 옷을 고르느라 전날 밤부터 고심했을 것이다. 꽃샘추위만 아니었다면 봄에 딱 맞는 옷차림이긴 했다.

다행히 식당은 지하철역에서 가까워 오래 걷지 않아도 됐다. 그는 식당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학교 친구들하고 생일파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그는 오물오물 먹으면서 말했다.

“우리 반에 필리핀에서 온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애들하고 정말 잘 지내요. 그런데 저는 친구를 못 사귀어요.”

교실에서는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그는 큰 눈을 깜박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좀 다르게 생겼어요?”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아라비아반도의 유구한 숨결이 담겨 있다. 그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사막의 뜨거운 햇빛과 아라비아해의 푸른 바닷물이 그에게 닿아있다. 그러하기에 맞은편에 앉은 나와 다르기에, 너는 더 아름답다는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른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당황스럽고 화도 나요.”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온 걸까? 그와 나는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우주 어디선가 이 지구로 왔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웃었다. 그는 식당에서 나와 걸으면서 텔레비전에서 제주도에 정착한 난민들의 사연을 봤다며 중얼거렸다. 참 힘들 거예요. 

지구에서 열여섯 해를 산 그는 뻔히 알고 있다. 지구인들의 진짜 질문은 ‘너는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너는 왜 여기에 왔느냐?’라는 것을. 그는 꽃샘바람을 뚫고 통통통 뛰어갔다. 그가 매서운 바람을 잘 이겨내며 언제까지나 힘차게 달리길…….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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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먼 곳의 커피가게로 나를 데려가서 말했다. 네가 좋다고, 사귀고 싶다고. 어깨를 떨며 이야기했다. 고백을 받다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둘 다 대학 3학년이던 스물두살 때였다. 

함께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이 아닌 내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었고, 무심코 두유를 좋아한다 말했더니 다음날부터 본인도 아침에 우유 대신 두유를 먹는다 했다. 전화 안 받으면 짜증 내는 대신 조바심을 보였다. 그런 게 그저 신기했다. 고교동창의 동아리 친구였던 그는 이름보단 전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재료공학. 그것이 어떤 학문인지 모르면서 나는 툭하면 “이걸 재료공학적으로 설명해줘” 하고 억지 부렸다. 그럴 때마다 미간을 좁히며 설명해보려 골똘하던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나와 마찬가지로 연애가 처음이던 그 친구는 이렇듯 매순간 진지하게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는 게 언제부턴가 싫어졌다. 왜 그리 싫던지. 처음 손잡은 날은 나를 연애실험쥐 삼아 나중에 더 예쁜 친구와 능숙하게 사귀겠지 싶었다. 그런 싸늘한 마음을 품었더니 안 그래도 찬 손발이 더욱 차가워졌다. “너, 손이 얼음 같아”라며 그 애는 드라마에서 본 양 본인 외투 호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그 수줍음도 괜히 미웠다.

그때껏 나는 화를 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누구에게든 적어도 못된 사람은 아니었던 난 비겁하게도 처음으로 나를 좋아해준 이에게 변덕스럽고 못된 사람이 되었다. 애태우고 싶어 일부러 휴대폰을 꺼둔 적도 있었다. 결국 어느 저녁, 밥을 몇 숟갈 더 뜨라 권하며 “야위면 신경질이 많대”라고 진지하게 말한 순간 나는 폭발했다. 그는 “나도 미숙해서 미안했지만 너도 조금 독특한 것 같아”라고 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한편 누군가에게 내 쪽에서 먼저 고백하진 않았어도 당시 주위에선 눈치챘을 것이다. 옆을 지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당사자들 또한 알았을 테지만, 내가 좋아하건 말건 그들은 어차피 관심이 없었다. 

총학생회 후원주점이 열린 토요일 저녁, 다른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던 모 선배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확인한 나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학생회관 구석에서 파전을 부쳤다. 턱선이 뾰족하면 그 스타일이 어울린다고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전을 굽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먼저 나를 발견한 건 우리 학과 선배였다. 선배는 며칠 전 회의에 무단으로 결석한 일을 두고 큰소리로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주위 시선은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고 그의 시선도 거기 있었다. 삐삐머리를 한 채 파전을 굽다 말고 혼나는 자를 향한, 민망함과 한심함과 황당함이 섞인 눈길.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갈래머리를 풀어 한 갈래로 묶었다. 울고 싶었다.

사귀기를 소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서 어떤 그늘을 보았고, 다른 누구보다 내가 그 그늘을 잘 이해할 거라 믿었다. 그가 좋아한다는 이런저런 책과 영화와 이론을 나 역시 좋아했다. 이 사실을 선배가 알았으면 했다. 그뿐이었는데, 왜 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는 내가 되지 못하는지 그땐 알 수 없었다. 본인은 나보다 더 복잡하면서 왜 단순한 사람을 편안해하는지, 나보다 더 어두우면서 왜 화사한 사람을 아껴하는지. 한참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갈구했던 대상은 캄캄한 동굴 같은 내면을 누일 볕처럼 따사로운 존재였음을. 한데 본인과 꼭 닮은 누군가가 등잔도 등유도 지니지 않은 채 언저리를 기웃거리니 피하고 싶었던 게다. 오래전 그 시절, ‘진지하게 애쓰기’의 화신은 오히려 나였으나 마음 다친 쪽은 먼저 더 다가섰던 ‘재료공학’이었듯이 말이다. 

이기적이게도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보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생각이 더 난다. 알고 보면 세상 온갖 사랑이야기가 이 비대칭성과 불공평함에서 기인했을 테고, 뭐 그리 특별할 것 없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십 수년 전의 민망하고 한심하고 황당했던 삐삐머리가 지금 여기, 고단한 현실에서 이따금 꺼내볼 웃음의 기억 한 조각으로 상대에게 남겨졌으면 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재료공학이란 단어에 닿을 때면 외투 호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던 그 수줍음을 떠올리며 내 마음이 난로 위 보리차처럼 데워졌듯 그렇게.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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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부 장관 대행이 1일 워싱턴에서 회담을 열고 양국이 ‘9·19 남북군사합의’ 이행을 위해 지속적으로 공조해 나가기로 했다. 양국 국방장관들은 9·19 군사합의의 이행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간 신뢰구축에 기여했다고 평가한 뒤 이 같은 방침을 재확인했다. 두 장관은 특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연합준비태세도 유지해 나가기로 했다.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핵협상과 남북군사합의 이행이 소강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양국 국방장관이 이렇게 합의한 것은 의미가 크다. 

정경두 국방장관(왼쪽)이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워싱턴 AFP연합뉴스

지난해까지 9·19 군사합의에 적극 호응하던 북한은 올 들어 남북군사회담 제의에 응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달부터 남북이 공동으로 하기로 한 비무장지대(DMZ) 내 공동유해발굴 사업도 사실상 중단했다. 이런 차에 한·미 국방장관이 남북군사합의 이행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한 것은 의의가 있다. 우선 남북군사합의 이행이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한 점이 중요하다. 미국이 북핵협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한편 하노이 협상 결과에 실망한 북한을 향해 비핵화 노선에서 탈선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9·19 군사합의에 한·미 간 이견이 없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도 평가할 대목이다. 9·19 군사합의가 북한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고 한·미 연합 대비태세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준비의 첫 조치로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평가할 ‘특별상설군사위원회’를 가동한 것 역시 핵협상 타결 후 새로운 한·미동맹을 상정한 조치이다. 

한·미 국방장관이 9·19 군사합의 이행에 대한 지원을 재확인한 만큼 남북은 후속 조치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당장 남북군사회의를 열어 DMZ 내 모든 GP 철수, 서해상 우발적 충돌 방지와 평화수역 조성 등을 논의해야 한다. 최근 북한은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남측의 무기 도입을 비판했지만 이는 과도한 주장이다. 한·미 양국은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을 폐기한 데 이어 오는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도 축소 실시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 북한은 하노이 협상 실패 이후의 실망감을 ‘새로운 길’ 선언으로 이어가는 일부터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촉진하기 위한 한·미 양국 국방당국의 결단을 존중함으로써 북·미 핵협상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남북군사합의 이행에 북측이 적극 호응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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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우는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거기에는 미흡했다.” 음주운전으로 윤창호씨를 죽인 박모씨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을 때, 윤씨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윤씨의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한다. “한 사람의 꿈을 가져가고 6년을 선고받은 것은 너무 짧다.” 나 역시 이 말들에 동의한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겠다던 스물두 살 청년의 꿈을 짓밟은 행위는 100년의 징역형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음주운전 사망사고에 대한 대법원 양형 기준은 징역 1년에서 4년6월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판결의 형량은 이례적으로 높았다. 예컨대 2016년 23세의 오토바이 운전자를 치어 숨지게 한 음주운전자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후자의 청년이라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닐진대, 두 사건에서 다른 판결이 나온 이유는 뭘까? 2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음주운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이 높아졌고, 윤창호법이라는 게 생길 정도로 이 사건이 여론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사법부가 예전의 관성대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면, 해당 판사가 판사직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재판은 여론을 반영한다. 법이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라는 점에서, 판결에 여론을 반영하는 것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판결이 무조건 여론을 따라가는 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대중의 여론은 대부분 강한 처벌을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며칠 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할아버지가 손녀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한 댓글을 보자. “고작 7년? 그냥 죽여버려라. 인간도 아니다.” “7년이라니? 70년이 아니고?” 이런 여론은 의료사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의료행위의 과정에서 환자가 사망했을 때, 여론은 들끓는다. 당장 의사면허를 박탈하고, 의사를 구속하라고 말한다. 문제는 판사들이 이 여론을 의식해 의사 구속을 남발한다는 데 있다. 2018년 초, 이대병원 신생아실에서 4명의 아이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의사가 구속됐다. 어차피 차트는 경찰에서 가져갔으니 따로 인멸할 증거도 없고, 계속 진료를 해야 하는 의사의 특성상 도주할 가능성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감염이 의사의 잘못에 의한 것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장전담 판사의 판단은 영 아쉽다. 

이 점이 참작돼 재판에서는 무죄가 선고됐지만, 의사에게 실형이 선고되는 것도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다. 횡격막 탈장으로 8세 아이가 사망했을 때, 이를 진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사 세 명이 1심에서 한꺼번에 금고 1년~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아이가 태권도를 하다가 배를 차였다는 사실을 부모가 얘기하지 않았고, 초기에 횡격막 탈장을 진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나이 때 복통의 원인으로 흔한 변비로 추정하고 경과를 관찰하자고 한 것이 형을 살아야 할 만큼 중대한 범죄일까? 자궁 내 태아가 사망했을 때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산부인과 의사가 구속된 사례도 있다. 분만이 지연되자 지친 산모가 몸에 감은 태아 심박동 검사기를 풀어달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한 시간 동안 태아의 심박동이 떨어진 탓이었다. 1심 재판부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를 적용해 의사에게 금고 8월형을 선고했다. 대중들이 환호했으니 이건 좋은 판결일까? 위에서 예로 든 사건들은 윤창호씨를 죽인 음주운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씨가 음주운전이 살인에 준하는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운전대를 잡았고, 그의 만행이 아니었다면 윤씨가 죽을 일은 없었겠지만, 의사는 가만 놔두면 죽었을 환자들을 살리려고 애쓰다 실패했으니 말이다. 

연이은 의사들의 구속을 바라보는 동료 의사들의 마음은 참담하다. 이 참담함은 국민들의 손해로 돌아올 수 있다. 최근 몇 년 새 산부인과의 숫자는 급감했다. 문을 닫는 산부인과가 늘어나고, 그나마 있는 산부인과도 지방흡입에만 전념한다든지, 부인과 진료만 하는 식으로 업종을 바꾼다. 저출산 탓도 일정 부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산부인과가 의료사고가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그래서 의사가 법정에 서는 일이 가장 많은 과라는 게 더 큰 요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인구 10만명당 출산하다 숨지는 산모의 수를 뜻하는) 모성사망비가 서울은 3.2명으로 OECD 평균의 절반이지만, 제주 16.7명, 경북은 16.2명으로 엄청 높다. 심지어 두메산골이 많은 강원도는 32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며 스리랑카보다 높은 수치다.” <지방도시살생부>(마강래 지음, 개마고원)

이런 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의대생에게 산부인과는 가장 피해야 할 과이고, 소아청소년과와 흉부외과 등 생명과 직결되는 과들도 인기가 떨어진 지 오래다. 10년이 지나면 분만이나 심장수술을 위해 외국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괜한 엄살만은 아니다. 

의사라고 해서 무조건 구속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의사의 성범죄나 대리수술 같은 범죄에 대해선 지금보다 훨씬 엄격한 처벌이 내려지는 게 맞다. 하지만 환자 진료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의사에게 실형을 선고할 때는 조금 신중했으면 좋겠다. 여론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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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장관 후보자 중 2명이 낙마했으면 ‘인사 참사’에 가깝다. 다주택 보유 논란에 휩싸인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자진 사퇴했고, ‘해적 학회’ 참석·자녀 호화 유학 의혹 등이 불거진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는 지명을 철회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고위공직 후보자에 대해 지명 결정을 번복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흠결 사유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사권자인 문 대통령이 인정한 셈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비리의혹 백화점이 된 장관 후보자들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실망감을 헤아렸다면, 진정 어린 사과와 함께 엄격한 검증 체계를 마련해 다시는 ‘인사 실패’가 없도록 하겠다고 벼렸여야 할 터이다. 하지만 인사 실패에도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자기합리화와 면피성 해명을 사흘째 되풀이하는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의 브리핑은 보기에 한심할 지경이다.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이 3월 31일 오전 청와대에서 인사청문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윤 수석은 문재인 대통령이 조동호 과학기술 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최정호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는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윤 수석은 인사검증 부실을 둘러싼 조국 민정수석과 조현옥 인사수석 책임론에 “특별한 문제가 파악된 게 없고, 문제가 없으니 특별한 조치도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낙마한 장관 후보자들에게 제기됐던 부동산 투기나 자녀 호화 유학 논란 등에 대해서도 “지명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 보도’나 ‘국민 정서’ 탓에 낙마했다는 투의 어이없는 주장을 폈다. 최 후보자의 다주택 보유에 대해선 “주택 세 채를 보유했다는 것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인지 이론의 여지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론’을 말하는 것인가.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자기들만의 ‘이론’을 국민 정서와 견주는 것이라면 오만의 극치다. 윤 수석은 조 후보자의 자녀 호화 유학 논란에 대해서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조 후보자 아들이 보유한 포르셰 가격이 3500만원이 안되고 벤츠도 3000만원이 안된다고 설명하면서 “가격 기준으로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국에서 벤츠·포르셰를 타는 것이 무슨 문제였겠나”라고도 했다. 윤 수석의 주장처럼 별문제가 아니라면 왜 자진 사퇴에 ‘지명 철회’ 조치까지 취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검증 라인의 문책론을 모면하려 대통령의 지명 철회 결단조차 희화화하고 있는 꼴이다.

잇단 인사 실패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민의 눈높이, 상식과 거꾸로 가는 청와대의 상황 인식이다.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없이 ‘뭐가 문제냐’고 대거리하는 걸 보면, 결국 기존 방식과 라인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인사 실패’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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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봄과 함께 4·3 그날이 왔다. 하지만 제주에는 아직 봄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당시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은 71년이 지난 지금도 영면할 수 없다. 정치권이 이들의 ‘해원(解寃)’을 외면하면서 4·3특별법 개정작업이 표류하고 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4·3 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서 “유족들과 생존 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고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4·3특별법 개정작업은 지난 1년을 허송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개정안 발의 16개월 만인 지난 1일에야 법안심사소위를 열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군사재판 무효화가 법적 안전성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 1조8000억원으로 예상되는 배·보상액 규모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사법부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온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제주지법이 지난 1월17일 4·3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원이 당시 군사재판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생존 수형인들에게 ‘사실상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제주 4·3 71주기를 하루 앞둔 2일 제주 4·3 당시 함께 수감됐던 송순희 할머니(오른쪽)와 변연옥 할머니가 생존 수형인 자격으로 처음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도의회 의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4·3사건 당시 송 할머니와 변 할머니는 같은 버스를 타고 전주형무소로 이동해 각각 안동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두 할머니는 출소 후 인천과 안양에서 살다 이날 7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제주 _ 권도현 기자

소송 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2일 라디오에 출연해 당시 군사재판이 판결문이 없는 것은 물론 수형자들이 법정에서 선고형량을 듣지 못하고 감옥에 가서야 몇년형을 받았는지 처음 알았을 정도로 불법적이었다고 했다. 법원의 판결은 특별법 개정안의 주요 쟁점인 군사재판 무효화에 대한 법적 근거를 부여한 의미가 있다.

4·3은 해방 직후 불안정한 정치상황에서 벌어진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이다. 2003년 정부의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2만5000~3만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됐고, 이 중 3분의 1은 어린이와 여성, 노인 희생자였다. 유족과 직간접적 피해자들의 고통도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추념식에서 “제주에 봄이 오고 있다”고 했지만 이날 제주에서 열린 특별법 개정 촉구집회에서 참석자들은 “개정법안이 처리되지 않는 한 제주의 봄은 요원하다”고 했다. 

4·3 수형인 2500여명 중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과하고, 현재 80~90대인 이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4·3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개정은 시간을 다투는 문제다. 정치권이 이를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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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자신에게 ‘김학의 성범죄 사건’ 개입 의혹을 제기한 이들을 “악한 세력”(페이스북, 3월20일)이라고 규정했다. 기독교 언어를 정치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황 대표 자신은 의혹을 받는 사람에서 ‘판결자’로 변신했으니 참으로 편리한 방식이다. 문제는 악한 세력은 굴복이나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정치의 미덕인 타협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기독교(개신교) 언어를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야 문제 삼기 어렵다. 하지만 교회 담장을 넘는다면 달라진다. ‘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마귀’ 발언(대형교회 ㄱ목사)처럼 언론과 시민사회를 비난한다면 사회 현안이 된다. 황 대표와 ㄱ목사의 발언은 스스로가 봉착한 세속적 문제를 기독교를 동원해 풀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황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동의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대화는 어떤가. “황 대표가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가더라도 교계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천만 크리스천들과 함께 뜻을 좀 모아달라”(황 대표). 기독교 일각에서 정치에 뛰어들려 하고 있고, 황 대표는 그 선봉을 자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게 될 때 정치적 상대나 정적을 넘어 상대는 악의 차원으로 격하되어 악의 화신이 되고 자신은 선의 차원으로 승화된다고 말했다. 의혹을 합리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악이라고 맞받아치는 황 대표의 모습에서 그 같은 종교적 독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국가 지도자의 종교적 독선은 독재보다 무서울 수 있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 대통령 조지 부시는 ‘악의 축’ 구호를 앞세워 이라크를 침공하며 ‘성전’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부시가 침공 명분으로 내세운 대량살상무기의 보유는 허구로 드러났다. 황 대표 발언이 내포하는 위험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창원성산 보궐선거에 출마한 강기윤 후보가 지난 30일 경남FC와 대구FC의 2019 하나원큐 K리그1 4라운드 경기가 열린 창원축구센터 안에 들어와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홈페이지 [연합뉴스]

황 대표는 ‘비종교적’ 정치 행보에서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엔 정치 행위가 일절 금지된 프로축구 경기장에 들어가 선거 유세를 하기도 했다. 어족자원보호선을 넘어가면 만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나. 그렇게 하면 물고기 씨가 마르고 어장이 황폐화될 터이니 출입금지 규정을 만들어 지키는 것이다. 황 대표는 ‘서울역 플랫폼 관용차 진입’ 논란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황 대표의 ‘상습적 반칙’의 배경에 기독교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내 뒤에 천만 기독교 세력이 있는데 그깟 법·규정 위반이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 정치평론가는 보수 특유의 ‘대한민국 오너’ 심리의 분출로 봤다. 황 대표가 ‘이 나라가 본디 보수 것인데’라고 인식한다면 특권의식과 갑질의 동기가 설명이 된다. 어느 쪽이든 시민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다.

바라건대 황 대표가 항간의 우려를 씻고 정치에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정치 문제를 정치 안에서 정치적으로 풀었으면 한다. 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에 앞서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것은 진짜 악한 세력이 누구인가이다. 본인 말처럼 “제가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의혹 사건에 개입했다고 왜곡했다고, 허위 사실을 기획하고 조작하고 모략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국민이 부여한 행정 권력과 금력을 내세워 무고한 여성들을 강제로 짓밟은 세력, 그런 끔찍한 짓을 한 것을 알고도 고위 공직에 기용한 세력, 그것을 묵인·방조한 세력인가. 

도움이 필요한가. “검찰에서는 진실을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동영상) 행동이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한번 해보시라’고 시키기도 했다.”(김학의 성범죄 사건 피해 여성, KBS) 이런 피해여성이 30명이나 된다. 가해자들은 성폭력을 저지르고 동영상을 찍어 가족까지 협박했다. 피해자들은 10년 넘게 진실을 가려달라고 직접 얼굴까지 공개하며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혐의 처분이었다. 경찰이 “동영상 인물은 확인할 것도 없이 김 전 차관이 맞다”고 했지만 검찰은 “불분명하다”며 부인했다. 김학의 사건은 흔한 사건이 아니다. 박근혜 청와대와 검찰, 경찰에 뿌리박은 거대한 악한 세력이 권력에 취해 악을 악으로 인식 못한 유례를 찾기 힘든 반인권, 반여성, 반국가 범죄다. 

우리는 세금을 낸 시민으로서 황 대표가 당시 법무장관으로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 권리가 있다. 지금도 황 대표는 매년 수백억원의 세금을 지원받는 제1야당 대표로서 진실을 알리고 사회 정의를 세워야 할 의무가 있다. 간음금지는 기독교의 계율(십계명 중 칠계명, 출애굽기)이기도 하다. 현실 정치로든 종교적으로든 황 대표는 답해야 한다. 누가 악한 세력인가.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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