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점들은 모두 도심지 쪽으로, 종각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구부정하게 뻗어 있는 큰 길가에 모여 있는데 (…) 책방 주인이 목판 위에 비스듬히 늘어놓은 책 뒤, 가게 안쪽에 높직이 웅크리고 앉아 (…)’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학 서론>에 나오는 내용이다. 언어학자이자 동양학자이던 모리스 쿠랑은 1890년 프랑스 공사관의 통역 신분으로 내한한 후 조선의 서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 우리나라 고서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서양인이 되었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이 서양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서울의 책점은 거의 다 뒤지고 서점의 책은 다 훑어보았으며, 점차적으로 가장 흥미 있어 보이는 것은 사고 그 밖의 것에 관하여는 간명하게 적어두었다.’ 그의 말처럼 얼핏 간명해 보이는 일이나, 사실 그가 서지로 작성한 책은 3821종에 이른다. 조선 서책에 관한 그의 관심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경제로까지 확장된다. 당연한 일이다.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므로.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은 ‘오히려 세계,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책’이고 ‘세상은 책처럼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 <독서의 역사>는 <파이 이야기>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유명한 작가 얀 마텔이 자국의 총리에게 독서를 권하는 서한문 형식의 책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 소개되기도 했다. 캐나다의 전임 총리인 스티븐 하퍼가 그 주인공이다. 얀 마텔은 100여차례에 걸쳐 책과 함께 그 책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한국에서 번역 출판될 때, 그는 책의 서문을 대신해 당시의 우리나라 대통령에게도 편지 한 통을 썼다. 역시 독서를 권하는 내용이지만, 어쩐 일인지 자국의 총리를 욕하는 부분이 더 눈에 띈다. ‘그분에 대해서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스티븐 하퍼 총리는 절대 문학작품을 읽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퍼 총리는 똑똑하지만, 재미는 없는 사람입니다.’

책상 위에 놓여진 펼쳐진 책의 모습 이미지컷 (출처:경향신문DB)

심지어 스티븐 하퍼 전 총리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니 본받지 말라고까지 말한다. 요즘 도서관에 자주 가는데 서가 사이를 거닐다보니 우리나라 대통령의 독서를 소개한 책도 눈에 띈다. 서문에 의하면 대통령이 엄청난 독서가라고 하는데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통령이 읽은 다양한 책을 볼 수 있겠다 싶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가 골라 든 책에는 몇 권의 책만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 소설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기준인지, 저자의 기준인지는 모르겠다. 반면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소개한 책들의 목록도 보인다. 역시 국민들의 시선이 다양하고 다채롭다.

다시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학 서론>으로 돌아가보자. 책을 빌려주는 사람, 즉 세책가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좀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책을 볼 수 있는 곳은 서점에서만이 아니고, 세책가(貰冊家)도 꽤 많이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특히 이야기책이나 노래책과 같은 평범한 책들이고, 이것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어로 쓰여 있으며, 어떤 것은 인본(印本)이고 또 다른 것은 수사본(手寫本)이다. (…) 주인은 이런 책들을 매우 헐값으로 빌려 주는데, 하루 한 권에 10분의 1, 2푼 정도이다. 흔히 그는 보증금이나 담보물을 요구하는데, 예컨대 현금으로 몇 냥이라거나, 현물로 화로나 냄비 같은 것들이다. 이런 종류의 장사가 옛날엔 서울에 꽤 널리 퍼져 있었으나, 이젠 한결 귀해졌다고 몇몇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직업은 벌이는 좋지 않지만, 점잖은 일로 인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해진 양반들이 기꺼이 택하는 바가 되었다. 책을 빌려간 사람들은 빌려준 책을 잘 돌려주지 않으므로 세책가의 책은 급속히 줄어들어 도서목록을 대신하고 있는 조잡한 일람표와 매우 불완전하게밖에 일치하지 않는데, 내가 그러한 일람표를 믿고 어떤 책을 달라고 하면 번번이 그것은 분실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인용문을 길게 소개한 것은 책이 귀했던 시절에 그 책을 빌려주고 또 빌려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가와서이기도 하거니와, 그 책들을 역사에 전하기 위해 한권 한권 찾아다녔던 모리스 쿠랑의 마음이 귀해서이다.

오늘날, 책은 귀하지도 않고 오히려 넘쳐나는 듯 보이는데, 그 미래가 마냥 밝은 것 같지만은 않다. 도서관의 서가를 거닐다보면 ‘책의 미래’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도 보이는데, 그 미래라는 말에는 쇠퇴, 혹은 종말이라는 의미까지도 종종 들어 있는 듯하다. 책은 늘어나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겠다. 곧 책의날이 다가온다. 4월23일이다. 일년 열두 달 무슨 날 아닌 날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념해야 할 날이니 책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길게 소개해 보았다. 

책이 예전같은 대접을 받지 못할지 몰라도, 그 책이 담고 있는 세계는 여전하다. 그 세계를 해석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여전하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내가 그 세계가 되니,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세계가 깊어지고 은근해지기도 하겠다. 

조선서지학 서론 (모리스쿠랑 저, 정기수 옮김, 탐구당)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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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며칠 남지 않았다. 헌재는 임신 중지를 결정한 여성과 여성의 요청에 의한 의료인의 행위를 형벌로 처벌하는 것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리를 침해하는지 판단한다. 판결의 핵심은 ‘낙태’ 행위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국가가 처벌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런데 판결을 앞두고 일부 종교계는 ‘낙태죄’ 존치운동을 벌이며 ‘낙태죄’가 없어지면 ‘성 문란’과 ‘무분별한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 주장한다. 도대체 누구의 ‘성 문란’이 문제이며, ‘무분별한 낙태’란 존재하기는 하는가? 재미있는 것은 이런 주장이 1953년 일본의 형법을 본떠 형법에 낙태죄를 만들 때도 나왔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충분한 책임감과 고민과 자신이 처한 사회적 여건들 속에서 임신을 유지할지 중단할지 결정한다. 자신은 물론 태어날 아이의 전 생애에 걸친 존엄한 삶까지를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정에 이른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에 대해 ‘무분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111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낙태죄 위헌 촉구 1인 시위 100일 맞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무분별하다’는 말의 의미는 ‘사리에 맞게 판단하고 구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낙태죄’가 없으면 ‘무분별한 낙태’가 늘어난다는 말은, 여성들은 분별력이 없고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열등한 존재여서 부적절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규제하여 여성들 스스로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는 명백한 여성에 대한 혐오이고 차별이다. 

‘성 문란’은 어떤가? 이 단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성별은 남성인가? 대부분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순결-정조-성 문란’은 여성에게만 연결되는 성별화된 언어다. 많은 여성과 성관계 경험이 있는 남성은 문란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선망하는 능력 있는 남성의 표상이다. 남성에게 성은 때론 폭력까지도 용인되는 ‘자유’의 영역일 뿐이다. 최근 확인된 정준영 카톡방 문화가 그 단적인 증거 아닌가? 결국 ‘낙태죄’ 폐지 반대의 핵심은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는 것, 보다 정확히는 여성이 성적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얼마 전 교황이 신부에 의한 수녀 성폭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해결책은 놀랍게도 수녀원 폐쇄였다. 이들이 삼고 있는 통제와 처벌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장면이다.

‘낙태죄’는 여성을 국가 인구조절정책의 도구로 삼고, 국가에 순응하지 않으면 처벌로 통제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의 논의 기록에 있는 사실이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과 능력,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통제하고 규제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 국가를 위해 여성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낙태죄’의 본질이다. 여성은 더 이상 이등시민이 아니다. 이제 출발부터 차별을 전제했고, 차별을 유지·강화해온 성차별 악법인 ‘낙태죄’는 폐지해야 한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에 대한 처벌과 통제가 아니라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삶을 풍성하게 구성하고 영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선택지를 보장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사라질 때 그 선택지는 훨씬 넓어질 것이다.

2019년의 정의와 인권 규범에 맞게 헌법재판소가 정의로운 판단을 할 것을 믿는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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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규모라면 신도시 하나는 너끈히 들어가겠다.’ 인천공항에 들어설 때마다 중얼거리곤 한다. 며칠 전 호주에서 귀국하는 친지를 마중하러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1층 입국장과 3층 출국장은 물론이고 지하 주차장에 공항철도역까지 포함하면 실로 엄청난 크기의 실내 공간이다. 거대할 뿐만 아니라 쾌적하고 안전하고 편리하다. 

입국장에 앉아 가까운 미래를 그려보았다. 누군가 기후변화와 같은 대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유리 돔을 기획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 돔 내부에는 그야말로 조화와 균형의 생태계가 조성될 것이다. 깨끗한 공기와 적절한 온도는 기본이고, 먹을거리는 최적의 상태에서 재배되고 양식될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 또한 재생과 순환이 가능할 것이다. 인구가 많지 않을 것이므로 자립과 자치의 마을 공동체가 뿌리내릴지도 모른다. 

인천공항에서 미래도시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때문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플롯은 단순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최후의 날’에 직면하게 되자 과학자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압도적 화면, 정교한 스토리 라인, 과학 지식의 적절한 활용, 인류의 미래를 위한 영웅들의 도전과 희생 등등 완성도가 높은 영화였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우주를 배경으로 인류가 새 행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인터스텔라>.

픽션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제로 지구 행성을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진전하고 있지만 인류가 ‘또 다른 지구’로 이주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행성으로 떠나기 전에 인천공항과 같은 ‘유리 돔 도시’가 먼저 생겨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누가 유리 도시에 입주하는가. 또한 지구를 떠날 때 누가 우주선에 탑승하는가. 그리고 새 행성은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가. 몇 년 전 인천공항에서 <인터스텔라>를 떠올리며 붙잡게 된 화두다. 

엊그제 책벌레로 유명한 후배가 “요즘 기후변화에 관심이 많죠?”라며 신간을 한 권 놓고 갔다. <파란 하늘 빨간 지구>(조천호 지음, 동아시아). 기후변화를 심리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번역서를 읽고 난 뒤여서 얼른 집어 들었다. 기후변화에 관해 평균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밑줄을 자주 그었다. 무엇보다도 국내에 이런 시야를 가진 기후 전문 필자가 있었구나 하는 반가움이 앞섰다. 추천사에 나왔듯이 “과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학자”였다.

국립기상과학원 원장을 역임한 대기과학자가 대중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다. 특히 빅 히스토리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기후와 문명의 관계를 조명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4대 문명의 탄생은 물론이고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도 기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가 등장한 것이나 조선시대의 개막, 영·정조 시기의 문예부흥 역시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 문명이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다. 인류 문명은 홀로세라는 ‘완전한 기후 조건’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홀로세는 인류가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홀로세에서 ‘인류세’로 진입하고 있다. 인류세란 우리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생태 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시대를 말한다. 현재 인류가 지구에 끼치는 가장 큰 악영향 중 하나가 지구 평균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총회는 특별보고서를 통해 향후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산업혁명 시기를 기준으로 섭씨 1.5도 이하로 낮추자고 결의했다. 지구 평균 기온이 2도 이상 올라가면 임계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인류는 홀로세 기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폭염, 한파, 해수면 상승, 농경지 상실, 환경 난민, 기후 전쟁 등 최악의 시나리오가 한꺼번에 작동된다. 

지구가 빨개지고 있다. 하지만 지구는 인류에게 관심이 없다. 미래가 우리 인류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인가? 그렇지 않다. <파란 하늘 빨간 지구>의 저자 조천호 전 원장은 과학계의 경고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과학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휴대전화 위치정보와 독감 약에 빗댄다. 위치정보와 독감 약이 문제를 100%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것처럼 과학계의 충고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반세기 전부터 ‘성장’을 멈추고 ‘지속’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고해왔다.  

인천공항에서 상상한 ‘유리 도시’는 이미 곳곳에서 우뚝하다. 하지만 극소수 기득권층을 제외한 대다수가 유리 도시 바깥에 거주한다. 가난하고 힘없고 아픈 대다수 인류가 지구의 역습에 내몰리고 있다. 기후변화는 생태 환경 문제 이전에 정의와 윤리의 문제다. 이대로 가다간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이 극심해질 것이다. 결국 정치의 문제다. 권력에 눈먼 현실정치부터 혁신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지속을 위한 합의를 이뤄낸다면 지구는 다시 푸르러질 것이다. 우리 안에는 아직 홀로세의 ‘파란 마음’이 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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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한 춤꾼은 비로소 구비치는 자기춤을 얻나니 … 딱 한발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원본인 백기완 선생님의 시 ‘묏비나리’ 한 구절이다. 1979년 박정희 사후 전두환에게 끌려 가 서빙고 보안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5년형을 받고 독방에 갇혔을 때, 5·18 학살 소식에 치를 떨며 감옥 천장에 입으로 쓰며 외웠던 시라 하신다. 박정희 때 함께 고문을 받던 장준하 선생께서는 ‘백기완이는 죽이지 마라. 그가 죽으면 우리나라 민족예술의 보고가 사라진다’고 고문관들에게 부탁하시기도 했다 한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 고운 우리말을 찾아 살려놓은 것도 그였다. 청년시절 그를 쫓아다니며 배웠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이야기처럼 ‘전승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민족민중문화재’였던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늦게나마 지척에서 십수년 뵐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당시 이건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하던 그. 2010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당시 갑자기 밀어닥친 공권력에 맞서 점거한 포클레인 위에서 전깃줄에 매달려 저항하고 있을 때 맨 먼저 달려와 위험한 순간을 막아준 이도 그였다. 2011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 157일차에 1차 희망버스 운동을 시작할 때 든든한 배후가 되어 준 이도 그와 문정현 신부님이었다. 이후 진행된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거제조선소 비정규직, 부산생탁, 구미스타케미칼, 삼척동양시멘트 등 모든 희망버스의 1호차 차장은 늘 백기완 선생님과 여러 사회원로들이었다. 2012년 쌍용차에서 스물 두 번째 정리해고 희생자가 났을 때 대한문 앞에 사회적 분향소를 설치하며 경찰들과 회오리가 되어 맞붙던 날도 함께 서 계셨던 기억. 작년 10시간에 이르는 심장수술 이후 지금은 쉽지 않지만, 단언컨대 지난 십수년 선생님만큼 작은 자리 어둔 자리 가리지 않고 노동자 민중 연대를 구체적인 몸으로 실천한 사람은 사회운동하는 이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 그는 받듦을 받는 어른이 아니라 이름 없이 싸우는 노동자 민중들에 대한 길거리 섬김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천해온 동지였다. 

소원이 있다면 끝까지 거리에서 싸우다 쓰러지고 싶다 하신다. 가진 자들을 위한 법은 법원과 국회와 저 높다란 행정부나 청와대 안채나 고상한 분들의 고담준론 속에 품위 있게, 안전하게 있을지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법은 거리와 광장에서 피 터지는 ‘즉자적인’ 한숨과 절규와 아우성 속에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셔서일까. 모든 생명들의 온전한 권리와 존엄을 빼앗고 짓밟는 반생명의 무리들을 “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무산자들의) 철학”(시, ‘나의 철학’ 중에서). “야 기완아! 이웃들도 다 어려운데 네 배지만 부르고 네 등만 따스하고자 하면 키가 안 커. 몸뚱어리 키도 안 크지만 마음의 키도 안 큰단 말이야” 하던 가난한 어머니에게 배웠다는 사상. 민중들이 입으로 구전해 왔다는 그 민중사상의 원형.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 그 민중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남겨놓고 가시겠다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쓰신 ‘버선발 이야기’ 끝장을 덮으며 숙연해진다. 그런 맨발의 시민 민중들이 일궈낸 지난 촛불항쟁의 결실이 함부로 버려지는 오늘. 우리가 다시 ‘버선발’이 돼 걸어야 할 거리와 광장의 역사와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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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이파리가 새롭게 나고 있다. 달래장에 밥을 비벼 먹고, 산에서 해 온 머위, 두릅으로 찬을 하고, 쑥국을 끓여 먹는다. 온 사방 벚꽃이 환하게 핀 것을 보면서는 그저 봄이 좋다 싶기만 했다가, 산나물 찬으로 밥을 먹으니 기운이 나고,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든다. 

올해 봄에는 마당에도 봄꽃들이 피었다. 시골살이 10년이 넘어서야 마당에 꽃을 심고 가꾸게 된 것. 지난가을에 둘째 아이가 심은 것들이다. 아이가 나서서 꽃을 심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마당 꽃밭이라는 것은 언제까지고 다른 일들에 밀려 뒷전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언제부터 풀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좋다고 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식물학자가 되고 싶다거나, 식물원을 가꾸겠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한 아이는 초등 1학년이 되어서 제가 심고 싶은 꽃을 골라 심었다. 봄이 와 꽃이 피기 시작하자 아침마다 누나와 동생까지 셋이서 꽃밭을 들여다보고, 이것 좀 봐 하면서 자기들끼리 꽃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고는 학교에 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남아 있던 화분과 마당 빈자리에 풀과 꽃을 더 심었다. 풀꽃 가꾸기를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 거라면 여기에서 마음껏 할 수 있지. 돈도 뭐 거의 안 들고. 심으려는 것에 블루베리와 수국도 있어서, 뒷산 솔밭에 가서 솔잎 흙도 두어 자루 담아 온 다음, 화분에 심으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수레를 끌고 냇가에 갔다. “자갈 작은 거부터 가져와. 그러고 나서 모래도 조금 퍼 오고.” 수레에 고무 대야와 모종삽을 싣고 간 아이들은 도무지 돌아올 줄을 모른다. 냇가에서 웃는 아이들 소리가 마당에까지 들린다. 

우리집 시골살이 첫 대목은 아이 이야기다.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생각보다 일찍 시골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려와 살면서는 시골에서 지낸다는 것,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도저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날마다 절감한다. 그래도 서울이었다면, 아이가 셋이 되기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가 셋이 되어 가는 동안 생각이 꽤나 바뀐 것이 있는데, 아이가 한 명일 때는 마음속에 어떤 기준이 있어서, 아이가 거기에 미치는지 아닌지 따질 때가 있었다. 두 아이일 때는 한 명이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다른 아이와 너무 다르거나 한 것이,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할 때가 많았고. 그러다가 아이가 셋 되고 나서는, 사람이란 얼마나 저마다 타고 나는 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제는 큰아이와 둘째 아이까지 무언가 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아이들과 지내는 생활도 ‘시즌2’가 열리는 느낌이랄까. 아이들이 훌쩍 커 가는 만큼 부모인 나도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앞날이 어찌 열릴지는 아무런 짐작도 못하고 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크게 어려움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아이와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아침저녁을 같이 먹고, 아이들이 잠들 때에 같이 있고, 그러는 것. 친구 같은 아빠는 전혀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는 편인데, 날마다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만큼, 아이 이야기를 듣고, 아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많아진다. 돈 버는 쪽을 많이 포기한 만큼, 식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을 얻은 셈이다. 그 덕분에 아이들과 부모, 서로가 자기 욕심만 내는 일도 별로 없고, 지금 여기서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누리려고 조금이라도 더 애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휴일 아침, 아이들은 더더욱 일찍 일어나더니 자기들끼리 마당에 나가서는 호미를 꺼내들고 잡초를 매고, 꽃밭을 다듬는다. 꽃 피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꽃밭을 어떻게 가꿀지 하는 것도 한참이나 속닥거리고. 다음 장 서는 날에는 아이들하고 마당에서 쓸 물뿌리개 하나를 구해야겠다.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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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생각해도 자유한국당이 잘한 것은 없었다. 태극기 세력에 휘둘린 전당대회 직후 ‘망하는 게 답이다’라는 비판을 받은 게 어제 그제의 일이다. 황교안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좌파독재’라고 비난하는 데에만 열을 냈을 뿐 쇄신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했다.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징계는 차일피일 미뤘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나경원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막말이 이어졌다. 탄핵 이후 한 발짝도 못 나아간 한국당 민낯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어떻게 ‘진보 1번지’라는 창원성산에서 선전했는가.  

답은 나와 있다. 여권이 못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평화국면 교착, 경기침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만했다. 국정을 책임진 세력으로, 어려운 현 상황에 대해 국민들에게 송구해하지 않았다. ‘우월한 우리가 적폐를 청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크게 들렸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20년 집권론’,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구속 후 집권여당의 전례 없는 사법부 압박…. “문재인 정부 DNA(유전자)에는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발언에선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드러났다.

차곡차곡 쌓인 오만의 기운은 ‘인사참사’라는 말을 낳은 이번 개각에서 터졌다. 투기지역에 아파트 3채를 소유한 장관 후보자, 아들의 호화 유학비 충당을 위해 전세 보증금을 올렸다는 장관 후보자…. 흠결 없는 공직자가 드물었던 ‘이명박 때’가 떠올랐을 정도다. 그러나 청와대는 잘못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했다. 조동호 전 후보자를 낙마시키면서도 검증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후보자 거짓말 탓으로 돌렸다. 옹색한 변명이다. 만약 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거짓말만 돌출됐다면, 청와대는 조 전 후보자를 잘라냈을까.

청와대는 후보자들의 결격사유를 알고도 이들을 내정하고 국회 청문회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우리가 이래도 국민들이 이해할 것’이라는 오만이 작동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와중에 대통령의 입이라는 청와대 대변인 투기 논란까지 터졌다. 이러고도 선거를 잘 치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면 여권은 안이했던 것이다. 인사 결정권자인 문 대통령은 인사참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권 관계자들은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며 속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불안석이어야 한다. 선거 뒤 몰락 징후가 더 또렷해졌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 선거에 부담이 됐다는 점을 마음에 담아둬야 한다. 여당 후보들이 청와대 그림자에 숨기만 하면 됐던 지난해 지방선거 때와 반대환경이 된 것이다. 한국당은 총선이 다가올수록 ‘문재인 심판론’을 더욱 쟁점화시킬 것이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경향신문 6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는 ‘반문재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여론조사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한국갤럽 등 여러 기관의 정례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대선 때 득표율(41.08%)에 근접했다. 집권 초반 70~80%를 떠받쳤던 중도보수층이 다 이탈했다. 지지율 하락은 단순히 수치 문제가 아니라 국정 장악력과 직결된다. 구조적으로도, 대통령 영향력은 집권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 주도의 국정운영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청와대가 못하면 여당이 나서야 한다. 과연 몸만 무거운 민주당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가 앞선다. 오만한 여권 프레임을 자초한 지도부가 그대로다. 간판이 안 바뀌었는데, 어떻게 변화 시그널을 줄 수 있겠는가. 의원 개개인도 남 탓 할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과 여권 핵심 인사 방어에만 거품을 물었을 뿐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령 인사참사에 대해서 어느 누가 공개적으로 ‘대통령님, 이게 아닙니다’라고 했나. 청와대와 경우 없이 맞서라는 게 아니다. 너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하라는 것이다. 여당은 한국당과 맞서 싸우는 데에만 능력을 보였을 뿐 민심을 다독이는 데에는 무능했다. 다 오만해서 벌어진 일이다.

여권에 대한 여론의 호감은 닳아없어지고 있다. ‘내로남불’ 비판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만한 행태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선의와 진정성을 강조해도 덮일 것이다. 한국당의 비정상적 행태만 두들겨서 넘을 수 있는 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공인된 불량식품을 두고 ‘먹으면 배탈 난다’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당 퇴행보다 여권의 오만함이 더 큰 흠결로 비춰지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오만은 그만큼 위험하다. 모든 것을 삼킨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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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은 흥에 겨워

건들대는 거야.

천성이 그래,

사는 게 즐거운 거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비 내리면 비와 함께

새들이 노래하면

새들의 날개에 얹혀

같이 날아보는 거야.


그런 게 즐거움 아니냐고

너도 건들대보라고,

죽기 전에 후회 없이

한번 건들대보라고. 

김형영(1944~)


건들대는 것은 몸과 마음에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일 테다. 언덕을 넘어서오며 버드나무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가만가만 흔들어놓는 봄바람처럼. 조금은 들떠서 조금은 신이 나서 흥에 겨워 살아도 좋겠다. 바람이 저편으로 가면 바람을 따라서가고, 비가 오면 빗방울처럼 수면 위를 뛰고, 새들이 울면 새들의 악보에 맞춰 노래를 하면서 살아도 좋겠다. 너무 무겁고 딱딱하게 살지 않고,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고. 살구꽃이 피는 일에도 신명이 들어 있고, 보리밭이 넘실넘실하는 일에도 신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형영 시인은 시 ‘화살시편 29 - 봄을 믿어봐’에서 “봄바람 마신 새들/ 노랫소리 들리지?/ 감기 든 목소리가 아니야/ 목청이 탁 트였어// 믿을 건 봄뿐이야”라고 썼다. 봄바람을 마신 새처럼 봄을 흥얼거리면서 살아도 좋겠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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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는 <All about Love(올 어바웃 러브)>에서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잘못된 사랑관을 가지게 된 여러 가지 배경 중 하나로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성 구축방식에 주목한다.  

가만히 남성 문화를 생각해 보자. 어린 시절부터 남성은 외로움, 슬픔, 아픔, 참된 감정을 감추고 거짓 자아를 만들어야 강한 남자라고 배운다. 강자에게 눈치 빠르게 복종하고, 약자를 무시하고 지배하며 힘으로 누르는 게 남자답다고 배운다. 그래야 출세하고, 출세하면 모든 걸 가지게 되며 그간의 고통과 비굴함을 보상받는다고도 배운다. 힘 있는 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떠한 거짓과 기만도 용서받는다는 교훈을 현실에서 직접 체득한다. 

음란물, 성매매, 성희롱, 성폭력, 불법촬영, 접대문화, 클럽문화가 한 줄로 꿰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남성에게 여성은 지배와 통제라는 남성(성)을 증명하고 구축하는 도구였다. 여성은 부위별로 측정되고 전시되는 살덩이, 뇌 없는 인형, 구멍, 자궁이다. 힘 좀 쓰게 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전리품이거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액세서리다. 더 많이 가질수록, 가졌다고 큰소리 칠수록 ‘쎈’ 놈이 된다. 강압적으로 푼돈으로 기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허세로라도, 함부로 하거나 소유해야 한다. 그래야 남자다! 

문제는 젊은 남성들이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로부터 온갖 무용담을 들으며 남성성의 실천 양식을 물려받았다. 집·학교·군대·직장에서 각종 미디어를 통해 갖은 방식으로 습득했다. 어쩌면 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빨리 더 어린 나이에 ‘남자다움’의 의미를 학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세대의 여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가 원하는 상에 모든 것을 맞추고 선택되기만 기다리는 여자,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고 포용해 주는 여자, ‘망나니’를 멋지게 다시 태어나게 해줄 여자, ‘조용히 은거지의 그늘에 숨어’ 아이를 낳아주고 정갈한 밥상을 차려주며 쥐꼬리만 한 월급을 두세 배 뻥튀기해 놓은 듯 알뜰히 살림을 키우는 여자는 이제 드물다. 재능으로도, 성적으로도, 힘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지배·통제가 어렵다. ‘남자답게’ 애써 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낭패다. 아버지들로부터 전수받은 ‘전통적’ 기술들은 이제 범죄행위가 되었다. 

혼란스러운 자아는 익명 뒤에 숨어 키보드로 분노를 뿜어내거나, ‘믿을 만한’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분열을 봉합하려 한다. 오랜 훈육의 결과 익혀 온 잡기를 공유하며 거짓과 허세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불법촬영물과 성구매 경험으로 공모자가 되어 남성연대를 구축하려 한다. 결과는 더 비참하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아슬아슬 유지해야 하는 이중생활 때문에 기만의 가면은 늘어만 간다. 여성과 분리된 채 상호 나눌 수 없는 비밀을 쌓아가는 ‘가면무도회’장에서 남성들은 진솔한 감정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피폐해진다. 그럴수록 ‘진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그 ‘여성’은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점점 더 멀어진다. ‘물게’(물 좋은 게스트), ‘와꾸’가 좋은 ‘헤픈’ 물건, 마구 만지고 약물을 먹여 강간해도 되는 ‘싸구려’들과 어떤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 여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성애 남성들의 실존적 불안은 더 증폭된다. 때로는 생존 전략으로, 때로는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익혀온 남성성이 이제 남성 자신에게도 독이 되었다. 

사랑은 단순히 열정적 감정이거나 일방적으로 쟁취되는 소유물이 아니다. 벨 훅스가 지적했듯 행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동등한 인간 간 상호 존중을 통해 쌓아올리는 과정이다. 진실은 실천의 토대이고 신뢰는 결과다. 조롱과 무시, 학대와 모욕, 폭력과 혐오는 사랑의 실천과 양립될 수 없다. 남성의 성적 욕망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회, 여성의 몸을 통해 일방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남자답다고 가르치는 사회, 몸의 주체가 동등한 인간이 아닌 사회, 평등에 대한 요구가 갈등으로 이해되는 사회에서 영적인 성장이 가능한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눈앞에 놓인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자. 사랑을 일회성 욕망, 허세용 전리품,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서비스’로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한 자들은 누구인가. 당신의 자아를 분열시키며 진정한 사랑을 방해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영혼을 황폐화하고 인간다운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진실과 정의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 거울을 남성 스스로 과감히 깨트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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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속초 산불이 국가재난사태로 번지는 동안 자유한국당이 보인 상식 밖의 언행이 공분을 사고 있다. 한국당 소속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촛불 정부’인 줄 알았더니, ‘산불 정부’네요. 촛불 좋아하더니 온 나라가 산불, 온 국민은 화병”이라고 썼다. 한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사람의 인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상식 이하 수준이 초라하다 못해 참담하다. 

한국당은 앞서 지난 4일 저녁 강원도 산불이 막 커져가는데도 국가위기관리 책임자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국회 운영위에 늦게까지 붙잡아 뒀다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파문이 일자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민경욱 대변인은 4~5일 이틀 동안 페이스북에 “왜 이리 불이 많이 나나” “대형산불 발생 네 시간 후에야 긴급지시한 문 대통령 북으로 번지면 북과 협의해 진화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빨갱이 맞다”는 글을 쓰거나 공유했다가 비난이 빗발치자 삭제하기도 했다. 무슨 호재라도 만난 양 대형 산불을 정치공세로 활용하는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불길을 잡겠다고 발벗고 나서 뜨거운 사투를 벌인 시민들 보기에도 부끄럽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4월8일 (출처:경향신문DB)

산불·홍수·지진 같은 국가재난은 정부만이 아니라 국회도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 중심에 여당과 제1야당이 있다. 이런 재난을 미리 방비하고, 발생 후라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도록 법령을 고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게 국회가 할 일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여야 가릴 것 없이 시민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우선이다. 한데도 한국당은 재난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정부를 조롱하고 공격했다.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도 시커멓게 탄 이재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기에 부족할 판에 그렇게 해서 얻을 건 무엇인가. 이런 재난을 당리당략적으로 이용하는 건 수권정당을 노리는 한국당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포용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로는 시민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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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 게이트’에 대한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하다. 수사에 착수한 지 두 달이 넘었으나, 핵심 의혹에 대해선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조직의 명운을 걸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지만 수사 성적표는 초라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다.

버닝썬 사태는 당초 김상교씨(28)가 지난해 11월 이 클럽에서 여성을 보호하려다가 클럽 관계자와 경찰에 폭행당했다고 주장하며 촉발됐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은 지난 1월30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를 전담수사팀으로 지정하고 150여명의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수사에 나섰다. 사건은 각종 성범죄와 마약, 연예인과 경찰 고위직 간 유착, 탈세 등으로 번지며 게이트급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수많은 의혹 가운데 어느 정도 수사 성과를 거둔 부분은 전 빅뱅 멤버 승리 등 연예인들의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불법촬영물이나 음란물이 유포된 부분뿐이다. 가수 정준영씨가 구속되고, 승리와 전 FT아일랜드 멤버 최종훈씨도 수사를 받고 있다. 가수 로이킴과 에디킴도 음란물 유포 혐의로 입건됐다.

3월 2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한국여성연합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버닝썬 관련 공권력 유착 진상규명과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갖고 있다. 서성일 기자

정작 여성들의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킨 클럽 내 ‘약물 성폭력’ 의혹 수사는 진전이 없다. 현재까지 버닝썬 등 클럽과 관련된 마약류 입건자는 53명에 이르지만, 약물 성폭력 가해자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경찰 유착 의혹도 마찬가지다. 현직 경찰관 5명이 입건됐으나 대가성은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한 상태다. 연예인들의 단톡방에서 ‘경찰총장’으로 거론된 윤모 총경이 입건된 혐의는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과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달 승리의 해외투자자 성접대 의혹 및 경찰과의 유착 정황 등이 담긴 자료를 대검찰청에 넘기고 수사를 의뢰한 바 있다. 경찰의 공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대검은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 배당하고도 직접수사는 자제해왔다. 하지만 경찰 수사가 계속 변죽만 울린다면 검찰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찰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치부를 파헤치기 어렵다면 조기에 사건을 검찰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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