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인데?” 한 친구를 매개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거기에는 중년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다. 친구는 그와 내가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에게 내 정보를 흘렸고, 그는 관심 보이며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작품을 준비하며 친구들의 사례를 촬영하고, 랩도 배우고 있다고 답했더니 대뜸 돌아온 말은 별로라는 ‘평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별로인지, 만약 정말 별로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만 뒤따른다면. 그러나 그는 면접관이라도 된 양 질문만을 이어갔고, 내 답변에 대한 반응으로는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네 작품은 안 뽑겠는데?” “내가 프로그래머라면 상영 안 하겠는데?”와 같은 깎아내림만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관련 경험이 나보다 많은 사람이니 성실히 정보를 제공하면 뭔가 쓸 만한 통찰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헛된 기대였다.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털린 것만 같은 기분.

“그런 사람들 문창과에도 많아요!” 며칠 뒤 시와 소설을 쓰는 지인들과 만났을 때 그 감독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다들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겠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 소설가는 한 창작 비평 모임에서 써 온 작품에 대해 폭언에 가깝게 깎아내리며 글쓴이를 낙담시킨 뒤, 술자리에서는 다정하게 대하며 격려하는 방식으로 후배를 길들이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선배는 정작 자기 소설은 안 쓰고 남의 소설 평가하는 데 열심이라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할 때 느껴지는 우월감. 자기 말을 귀담아듣는 존재를 눈앞에 두며 일종의 권력을 확인하는 감각에 취한 채 고여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길들이기’ 방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일도 수차례였다고.

그러고 보니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쉽사리 휘둘렸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들어간 뒤의 삶을 경험해 본 적 없어 막연했고, 일단 입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고, 손에 쥔 것을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되고, 내 것이 보잘것없어 보여 불안하고…. 그 시기, 가고 싶은 길을 앞서가는 사람은 영웅처럼 보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설령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불리 가능성을 재단하는 말이더라도. 이제 생각해보니 그 녀석들도 갓 회사 생활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을 텐데, 후배들 훈계하며 뭐라도 된 기분을 만끽하고, 우러름 받으며 자존감 부풀리고, 잠재적 연애 대상을 물색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 삶을 택했다. 몇 가지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벌였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은 남들이 뺏어갈 수 없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덕에 이제는 수평적으로 의견과 감상을 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비틀린 마음으로 폭언을 일삼는 대상을 분별하는 눈을 얻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고 또 당해버렸네.

쉽게 일축할 수 있는 직업적 명사보다 꾸준히 해온 행동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 활동은 주로 말과 글로 이뤄졌지만, 더 효과적이라면 다른 방법을 익혀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심자로서 새로운 기술과 감각을 익히는 시기, ‘자존감 강탈자’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것. 나이 먹는다고 절로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게 아니며, 경험 부족한 이들을 휘두르며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는 것. 또 한 번 경험했네. 앞으로도 새로운 분야에 흥미 생기면 또 뛰어들 텐데, 그때마다 거듭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어쨌거나 나는 그때 그 다큐멘터리 감독이 혹평했던 그 기획 그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상영의 기회와 관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고, 영화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감정이 와 닿았다고 말하는 관객들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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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만큼 여러 사람을 안달하게 하는 것도 없다. 많은 이들이 수능, 다이어트, 승진과 같은 목표를 위해 자기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또한 자녀, 학생, 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기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동기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 지나치게 큰 보상의 역효과

흔히들 금전적 보상은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수한 인재를 모아 일을 잘하게 만들고 싶을 때는 종종 인센티브를 높이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적당한 인센티브는 효과적이지만 지나치게 큰 인센티브는 역효과를 낸다고 한다. 지나치게 큰 보상이 압박감을 줘서 인지 자원의 활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실제로 지나치게 큰 인센티브의 역효과는 인지 능력이 요구되는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듀크대 경제학과의 댄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것처럼 기계적인 업무와 간단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인지 능력이 필요한 업무를 시켰다. 이때 같은 종류의 업무를 낮은 보상 수준과 대단히 큰 보상 수준에서 각각 한 번씩 수행하게 했다. 실험 결과 기계적인 업무에서는 높은 보상이 높은 성과로 이어지지만, 인지 능력이 필요한 업무에서는 지나치게 큰 보상이 성과를 낮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나치게 큰 보상은 오히려 압박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시험에서 긴장한 나머지 평소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 연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센티브보다는 적당한 규모의 잦은 보상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 포기의 지혜

동기에는 돈과 무관한 의미도 영향을 준다. 다른 실험에서 댄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레고와 설명서를 주고 조립하게 했다. 참가자가 조립을 마치면 2달러를 주고 한 번 더 하겠느냐고 의향을 물어보았다. 참가자가 응하면 다시 레고를 가져다 주되, 두 번째 작업을 마쳤을 때는 11센트가 줄어든 1.89센트를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보상을 11센트씩 줄여가면서 참가자가 그만두겠다고 할 때까지 실험을 계속했다. 줄어드는 금액에도 불구하고 조립을 여러 번 한 사람일수록 동기 부여가 더 많이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실험 참가자들은 무작위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집단 1에서는 참가자가 조립한 레고들을 그대로 둔 채 다음 레고를 가져다 주었다. 반면 집단 2에서는 참가자가 조립을 하는 동안, 참가자가 이전에 만든 레고를 연구자가 옆에서 해체했다. 어느 집단이 조립을 더 많이 했을까? 첫 번째 집단은 평균 10.6개를 조립한 반면, 애써 만든 성과물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본 두 번째 집단은 평균 7.2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무의미한 일에 동기를 부여하기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물을 싫어하는 쥐를 물이 있는 통에 넣어두면 쥐는 처음에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책이 없음을 알게 된 뒤부터는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이렇게 더 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한 쥐들이 우울증의 원리와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한 동물 모델로 쓰인다.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때 더 이상 동기를 부여하지 않고 포기하는 상황을 ‘우울’이라고 보는 셈이다.  

■ 노력과 성취의 동기 부여 효과

그렇다면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저절로 동기가 부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 자체에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을 집단 1과 2로 나누었다. 집단 1의 참가자들에게는 종이로 학이나 개구리를 접을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이 가격이 컴퓨터가 무작위로 추출한 금액보다 크면, 금액을 지불하고 자기 작품을 가져갈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평균 23센트의 가격을 책정했다. 반면, 집단 2의 참가자들은 집단 1의 참가자들이 만든 작품의 가격만 책정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평균 5센트의 가격을 책정했다. 이 실험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노력을 들여 만든 성과물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가치있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애리얼리 교수는 종이접기 설명서의 일부분을 삭제해서 일부러 어렵게 만든 뒤 위 실험을 반복했다. 집단 1에 속하는 참가자들은 이전 실험의 집단 1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그 결과 포기하는 참가자들도 생겼다. 실험 결과,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했던 이번 실험의 집단 1은 이전 실험의 집단 1보다 자기 작품을 더 높이 평가했다. 단, 종이접기를 중간에 포기한 참가자들은 자기 작품의 가치를 대단히 낮게 평가했다. 이 결과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 성취한 대상일수록 애착을 가지지만, 아무리 노력했어도 중간에 포기한 대상은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작은 성공의 위력

우울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노력을 기울여 성취하는 대상도, 노력했기에 좋아하는 대상도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적다면, 그런 세상을 열심히 살아보려는 동기가 부여되기도 어렵다. 소개된 연구들은 노력해도 소용없거나 너무 쉬운 일보다는 적당한 도전이 필요한 일들,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는 일들을 자주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려준다. 또한 어렵고 큰 일을 중간 난이도의 작은 일로 나누어서, 좋아하는 대상을 늘려가는 것이 동기 부여에 효과적임을 알려준다. 작은 성공들을 통해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진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살아볼 만하지 않겠나.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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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 큰 산불 소식. 우리 동네도 몇 해 전 가정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태웠다. 힘내시라고 성금도 드리고 그랬었다. 아직도 그 집 마당엔 불에 탄 흔적들이 보인다. 다행히 헬기로 물을 뿌려 뒷산으로 번지는 걸 막았다. 산으로 불이 옮았다면 내 거처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냇가에 살면 홍수가 무섭고 산골에 살면 산불이 걱정된다.

사형수 세 명이 간곡하게 기도하자 하느님은 각자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한 명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했다. 얼마 못 가 뼈만 앙상한 채로 죽었다. 다른 한 명은 술을 달라고 했다. 주정만 부리다가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담배를 원했다. 그런데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간수가 궁금해서 묻자 죄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담배만 달랑 주고 성냥불은 안 주셨는데요.”

성냥불 하나, 담뱃불 하나로 큰불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상여를 태우다가 산불이 나고, 논두렁 밭두렁 태우다가도 산불이 났다. 아주 어렸을 적에 잠깐 초가집에서 살아도 봤다. 목사관 임시 거처가 초가집이었다. 그즈음 장애인 형이 불장난에 재미를 붙였는데, 나뭇광에 불을 붙이려고 번번이 시도하다가 내게 딱 걸리곤 했다. 장작 아궁이에서 놀다가 손을 데더니만 그 재미와 작별하더라. 집이 타버릴 뻔했다.

“저녁노을 지고 달빛 흐를 때, 작은 불꽃으로 내 마음을 날려 봐. 저 들판 사이로 가면 내 마음의 창을 열고, 두 팔을 벌려서 돌면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명절 때면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놀이를 하기도 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산불로 번지는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예전엔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합심하여 불을 껐다. 뜬금없이 교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부흥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 나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떠올렸다. 불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위험한 무엇이렷다. 이상 저온으로 밤기온이 차다. 잔솔가지 그러모아 난로에 불을 모으고 산다. 날마다 불을 보면서 지내는데, 재를 버릴 때도 그렇고, 꺼진 불도 다시 본다. 자나 깨나 산불조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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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폐 속 인물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비롯해 대부분 정치인이다. 유일한 비정치인은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해밀턴은 미국 경제의 설계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관세를 통해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국내 기업을 키우는 정책을 택했다. 그 결과 미국은 농업국가가 아니라 제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길을 독일과 일본에 이어 한국, 그리고 중국이 뒤따르고 있다. 해밀턴은 한때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이 20달러 새 지폐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면서 ‘퇴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밀려난 건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었다.

영국의 파운드화 지폐 앞면에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지폐 뒷면에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올라 있다. 윈스턴 처칠 전 총리,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소설가 제인 오스틴 등 대중에게 친밀하거나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다. 중국(마오쩌둥)이나 베트남(호찌민), 인도(간디) 등에서는 국가 건립 영웅이, 군주국에서는 현직 군주의 초상을 넣었다. 각 나라의 현실과 시대정신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새 일왕의 연호를 정하면서 지폐도 새로 발행하기로 했다. 1만엔 지폐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시부사와 에이치의 초상을 싣기로 했다. 그리고 5000엔 지폐엔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인 쓰다 우메코, 1000엔 지폐엔 ‘일본 근대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새 모델이라고 한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제강점기에 제일은행권 발행과 경인선 철도 부설 등 한국 침탈에 앞장섰던 인사다. 그런 사람의 초상의 지폐 등장은 우리로선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지폐는 나라의 얼굴이다. 한국의 지폐에는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이, 이황 등의 초상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 조선시대에 한정됐고, 넓게 보면 학자들만 있다. 다양성이 부족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했다고 하기 힘들다. 일본은 대놓고 한반도 수탈의 주인공을 새 지폐의 인물로 선택했다. 임시정부 100돌을 맞아 독립정신과 진취성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물을 고민해볼 때가 됐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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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1948~1970)에겐 우리가 몰랐던 ‘꿈’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기업, ‘태일피복’의 창업이다. 1969년 11월1일 일기에 미리 쓴 ‘개업 인사글’을 보면, 그가 그렸던 태일피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본사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생산원가를 고객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생산과정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생산원가에서 얼마간의 이익을 붙여 주시면 됩니다. 이윤은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인, 종업원을 건강부터 교육까지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본사의 모토는 정직입니다.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 없이 대우하고도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양심적이며, 실용적인 상품은 논할 것도 없으며, 모든 기업체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당시 서울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노동환경은 참담했다. 대여섯 평 일터에서 수십명의 노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고, 환풍기도 없어 먼지가 가득했다. 노동자들은 폐병에 안질, 영양실조 등 갖은 질환에 시달렸다. 전태일은 이런 현실을 타개할, ‘동행의 일터’를 만들려는 꿈을 사업계획서에 담았다.     

서울시가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지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기념관 정면에는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청하며 근로감독관에게 쓴 자필 편지가 패널로 붙어 있다. 서울시 제공

전태일은 196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쓴 사업계획서에 ‘하루 8시간 근무 등 근로기준법 준수’ ‘사장에서 노동자까지 차별 없는 대우’ ‘이윤의 공평 분배’ ‘종업원 건강 보호와 교육’ ‘생산원가 공개’ ‘정당한 세금 납부’ 등이 이뤄지는 태일피복을 설계했다. 구체적 실행계획도 세웠다. 재단·재봉사는 3만원, 품질관리·배달 담당은 1만5000원, 재봉사 조수는 8000원의 월 임금을 받도록 했다. 그때는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풀빵이 1원 하던 시절이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면서도 재봉사 조수가 3000원, 재봉사가 1만원 정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이다. 밝은 형광등과 넓은 창, 환풍기가 있는 일터와 음악감상실·도서실·탁구대·농구대 등을 갖춘 휴게실도 조성할 계획이었다. ‘야간 기술학원’을 설립, 노동자 교육도 꿈꿨다. 전태일은 157명의 직원을 고용, 생산원가 공개로 가격 거품을 빼는 대신, 대량생산을 통해 이익을 키울 계획이었다. 서울시내 모든 의류점의 정보를 파악한 뒤, ‘월 1회 카탈로그 발송’ ‘오토바이를 활용한 주문 후 3시간 이내 배송’ ‘자동차로 고객 배웅’ ‘지역별 대리점 운영’ 등 전략도 세웠다. 매월 한차례씩 장학금·오토바이·피아노 등 사은품 증정행사도 기획했다. 

태일피복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할 각오로 자본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70년 11월13일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하루 8시간 근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로기준법에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법이 정한 ‘주 40시간’도 아닌 ‘주 52시간 노동’을 이야기한다. 경영계는 이마저도 부족하다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 혹은 1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최저임금이 너무 가파르게 오른다”고 아우성이지만 지난해 4분기 5분위 배율(최상위 20%의 평균소득을 최하위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은 5.47배로 통계청 집계 이후 가장 악화됐다. 2014~2017년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평균연봉은 직원 평균연봉의 20배가 넘었다. 안전해야 할 일터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기까지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 등으로 숨지고, 김용균 같은 노동자들이 기계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 해 1000명에 가까운 생명이 ‘일터에서의 사고’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원했던 노동조합 할 권리도 취약하다. 노조 조직률 10.7%에서 알 수 있듯, 산업현장 곳곳에서 “노조 할 권리를 달라”는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8개 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강제노동 폐지 등 4개 협약에 여전히 비준하지 않았다. 

평화시장과 멀지 않은 청계천변에 오는 30일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연다. 그곳에 ‘태일피복’ 전시공간이 마련돼,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곳에 가면, 그가 꿈꾸던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 차별 없는 대우와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숨진 지 49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번 바뀐 시간이다. 

그런데 모든 노동자는 그가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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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불을 계기로 지방직 공무원인 소방관을 국가직으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국회에서 다시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반대로 관련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진복 한국당 의원은 지난 9일 국회에서 “국가직이 아니면 불을 못 끄느냐”며 반대했다. 

소방 관련 인력과 예산 편성, 장비 구입 등을 지방자치단체가 맡은 탓에 지방별로 소방관 처우와 장비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해법에서 여야 간 입장이 갈린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당은 지난해 11월 관련 부처 간 협의가 덜 되어 있다며 법안 통과를 반대하더니 이번에는 지방직으로 둔 채 재정 지원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강원 고성 산불이 이틀째 번진 5일 오전 동해시 망상오토캠핑장에서 마스크와 방독면을 쓴 소방대원들이 잔불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방은 이미 지방이 아닌 국가의 사무가 되어 있다. 소방대는 단순히 불을 끄는 조직이 아니라 광역 단위의 특수 재난사고에 대응하는 기관이 된 지 오래다. 또 시민에게 균질한 소방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소방을 국가 조직화하는 게 맞다. 지방직으로 둔 채 재정 지원만 강화하자는 해법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비현실적이다. 지방사무 예산은 지방 재정으로 충당한다는 원칙 때문에 재정 투입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한국당은 “경찰은 자치경찰로 가면서 왜 소방직은 왜 반대로 하느냐”고 했다.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억지 주장이다. 소방의 국가직 전환이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라 일부러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시민 10명 중 8명이 소방직의 국가직 전환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10일 나왔다. 보수층에서도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다. 강원 산불을 신속하게 끈 것은 전국의 소방 대원과 장비를 총동원한 덕분이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의 소방관들이 기본적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화재진압에 나서는 일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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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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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열린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주식’으로 시작해 ‘주식’으로 끝났다. 이 후보자 부부는 전체 재산 42억여원의 83%인 35억여원 상당을 주식으로 보유한 데다 이들 주식 중 절반가량이 이테크건설이라는 특정 업체 것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후보자는 “주식거래에 관여하지 않았다. (투자)종목·수량 선정은 모두 배우자가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본인 명의 주식이 실재하는 이상, 이 같은 해명으로 시민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죽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점이 있다”(백혜련 의원), “판검사는 국민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주식을 해선 안된다고 배웠다”(금태섭 의원)는 지적이 나왔겠는가.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1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물론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헌법재판관 자격 문제를 거론하는 일은 지나치다. 그러나 보유 주식과 법관 직무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은 명확히 해소될 필요가 있다. 이 후보자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하던 지난해 이테크건설이 하도급을 준 공사현장 사고와 관련된 재판을 담당했다. 이 후보자 부부는 당시 이테크건설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후보자의 남편은 재판을 마친 뒤 해당 회사 주식을 추가로 매입했다. 이 후보자는 “이테크건설은 소송 당사자가 아니며, 판결도 이테크건설 측에 유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애당초 회피신청을 했다면 이해충돌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을 터다.

헌법재판소는 각계각층의 견해가 엇갈리는 사안을 판단해 시민의 일상을 규율하고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헌법재판관이 스스로의 이해충돌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헌재 결정은 신뢰받기 어렵게 된다. 더욱이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주식 보유 논란은 처음도 아니다. 2017년 이유정 후보자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비상장기업 주식 매매로 거액의 차익을 남겼다는 의혹에 휘말려 사퇴한 바 있다. 청와대의 사전 검증이 부실했던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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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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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4월11일 신익희, 이동녕, 조소앙 등 애국지사 29인은 중국 상하이에 모여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알렸다. 그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며 우리나라가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선언했다. 애국지사들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임시헌장 10개 항은 민주와 공화, 평등, 자유, 평화 등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이러한 헌법의 가치는 제헌 헌법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 대한민국의 출발이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임시정부 헌법에서 주목할 조항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민주공화제’란 문구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세계 헌정사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황제가 다스린 전제군주국이었다. 일제 강점 직후만 해도 복벽주의, 사회주의, 민주공화주의 등 여러 정치이념이 제시됐다. 이런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주와 자유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특히 3·1운동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었다. 3·1독립선언서는 새로 건립될 조국은 정의·인도·자유의 나라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중국 상하이의 대표적 여행지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와이탄(옛 지명 황푸탄)의 현재 모습(왼쪽)과 옛 모습이다. 황푸강변을 따라 유럽풍 건물들이 들어선 와이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한국인에겐 유명 관광지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피끓는 역사의 현장이다.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배를 타고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그리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와이탄의 저 빌딩들 뒤편 ‘루이진얼루’ 주변의 어느 곳이 임시정부 첫 청사이지만, 아직 우리는 그 정확한 장소를 모른다. 1922년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황푸탄 의거’를 단행한 곳도 여기다. 상하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여기 와이탄이다. 이준헌 기자

임시정부는 해방을 맞기까지 27년간 임시의정원의 의회정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의정원의 법령에 기반해 이뤄졌다. 의정원은 모두 5회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고 법령 제정을 위해 39차례의 회의를 소집했다. 임시정부가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유일 통합정부를 지켜갈 수 있었던 것은 의회정치의 힘이었다. 광복 후 민주와 자유의 가치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더욱 신장됐다. 특히 6월항쟁과 뒤이은 헌법 개정을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등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됐다.  

반면 공화주의의 진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공화주의는 군주와 같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급이 아닌 공공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이다. 임시헌장 제3조는 남녀·빈부·계급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며 평등 가치를 내걸었다. 정치·경제·교육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 정신이다. 제헌 헌법은 정의·인도·동포애를 명기하며 공화주의 가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현실에서 헌법의 공화주의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빈부·계급 간 격차는 커져가고 있다. 배려, 협력, 포용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특권층이 부와 권력을 독식하면서 소수자 등 소외계층은 각자도생해야 할 처지다. 

10일 국회에서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11일에는 정부 차원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린다. 여야 원내대표 5인은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 중이다. 그런 행사도 필요하지만 임시정부의 통합정신, 공화주의정신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 100년 동안 헌법 제1조를 지켜온 민주공화제를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내실화하고 공공의 가치를 실천하는 일, 이것이 100년 전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응답이다.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공허하게 외치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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