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세계여성의날(3월8일) 때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퍼질 때 미국에서는 한 성전환 여성이 투옥됐다. 그는 한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와 국무부 기밀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바로 첼시 매닝이다. 그 일로 매닝은 35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반 넘게 투옥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퇴임 이틀 전 사면돼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2년3개월 만의 재투옥이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과 시민들이 침묵한 탓이다. 투옥 죄목은 법정모독. 그는 자신의 자료를 공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조사차 제4연방항소법원 대배심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배심이 비밀로 진행된다는 점, 이미 군사법정에서 모든 것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하루 22시간씩 28일간 독방에서 지내온 매닝은 지난 4일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가 증언하지 않으면 대배심 절차를 마칠 때까지 최대 18개월간 투옥될 수 있다. 

미 정부가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른 그를 다시 옭아매려는 이유는 뻔하다. 그를 압박해 어산지를 사법처리하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미 정부에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그럴 만도 했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기밀자료는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 덕분에 테러와의 전쟁,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구실로 해외에서 벌여온 활동의 민낯이 드러났다. 많은 미국인들은 미군의 교전수칙이 망가지고, 그들도 민간인 학살의 공범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 미 정부가 두 사람을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가한 범법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가자들이 8일 대회 장소인 광화문광장에서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의 바람이 통한 걸까. 어산지는 11일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영국 주재 대사관에서 그를 보호해온 에콰도르 정부가 보호 조치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어산지가 망명한 지 6년10개월 만이자 위키리크스가 트위터에 “어산지가 몇 시간에서 며칠 안에 추방될 것”이라는 글을 올려 우려를 표현한 지 일주일 만이다. 망명 지위 철회 이유는 국제협약 위반이다. 전임 좌파 대통령 시절 망명한 어산지는 현 레닌 모레노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갈등을 빚어왔다. 모레노는 최근에도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과 가족의 계좌나 전화 같은 사적 정보를 유포한 어산지를 비난한 바 있다. 어산지의 체포로 그의 미국 송환과 투옥은 시간문제가 됐다. 미 정부는 이미 그를 이적행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매닝과 어산지는 미 정부의 주장처럼 국가안보의 위협일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언론 자유와 시민의 알권리 수호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최근 언론의 태도는 그때와는 딴판이다. 사실 보도만 할 뿐 이들을 옹호하거나 이들의 투옥이 언론 자유의 중대한 침해라는 목소리를 담은 사설이나 칼럼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초선인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지난 2일 매닝 석방을 요구한 것이 고작이다. 민주당은 어산지의 투옥을 바라는 눈치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민주당 대선본부장의 e메일을 공개하는 바람에 패배했다는 악감정이 남아서일까. 침묵 지키기는 여성운동단체나 인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 정부는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 위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같은 내용을 공개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제쳐놓고 어산지만 사법처리하려는 것이다. 만약 어산지에 대한 관심이 옛날과 같았다면 그는 쉽게 체포되지 않았을 터이다. 오로지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국가 권력의 오만함과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성범죄 의혹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한창이다. 장자연은 권력의 희생자를, 김학의는 권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윤지오나 피해여성의 용감한 증언이 없었다면 재수사는 불가능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침묵하던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매닝과 어산지, 윤지오와 피해여성은 국가나 권력 앞에 무기력한 개인을 대표한다. 이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배반의 침묵을 깨는 양심의 목소리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민과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견제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기 정확히 1년 전인 1967년 4월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한 반전 연설에서 강조한 말이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언론 자유는 물론 인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에 빠질 수 있다. 지금이 그때일지도 모른다.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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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쓰레기 수입금지 조치로 플라스틱 쓰레기 대란을 겪은 지 1년이 지났다. 우린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을까? 지난해 8월부터는 커피전문점 내 일회용품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번 4월부터는 전국 대규모 점포와 슈퍼마켓에서 일회용 비닐봉지와 쇼핑백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제 시작일 뿐, 아직도 일회용품 사용이 크게 줄지 않았고 규제에 대한 불평불만도 없지 않다.

우리가 몰랐던 사이, 우리 사회엔 해결 못하는 쓰레기가 늘어만 가고 있었다.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2리, 50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농촌 마을에 재활용을 명분으로 들여다 놓은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다. 보관량(2157t)의 34배가 넘는 분량(17만3000여t)이다. 폐기물이 썩으면서 나온 악취와 침출수로 주변 환경이 오염되고 마을주민들이 심각하게 고통받고 있다. 이 ‘쓰레기산’에 불까지 나자 미국 CNN에서 “세계 최대 플라스틱 소비국의 단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필리핀에 플라스틱 재활용품으로 수출했던 쓰레기가 지역 환경단체의 문제제기로 반송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폐기물 관련 사업장에 쌓아둔 방치폐기물이 85만t, 야산이나 창고에 버려진 불법폐기물이 30만t가량. 모두 소각한다 해도 매해 100억원씩 들여 30년 정도 걸리는 규모이다.

폐비닐은 용융기에서 검은 색소와 섞여 플라스틱 반죽으로 변하고, 4~5㎜ 크기의 플라스틱 펠릿으로 모양이 잡힌다. 자루에 담긴 펠릿은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돼 하수도관 등의 재료가 된다. 김정근 기자

다행히 많은 시민들이 일회용품, 플라스틱 제품 규제를 지지하고 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재활용 쓰레기 대란 1주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 및 해결 방안에 관한 대국민 인식도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 95% 이상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에 아홉은 플라스틱 제품 사용 ‘전면 금지’ 같은 강한 규제를 원했다. 소비자 규제를 넘어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기업 규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출처:경향신문DB)

환경부의 규제 조치에 대한 다수 기사들은 조치의 문제점이나 관련 업체들의 불평불만을 주로 전한다.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필요하지만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변화란 있을 수 없다. 기사들 아래 댓글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어느 기사에 달린, 아이디 ‘문제없어’란 누리꾼의 댓글이다. “고통 없이는 절대 성공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안 하면 안되는 사업이라 어떤 식으로든 진행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의점·새벽배송업체·대기업의 공산품과 대포장 등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 아닐까요? 생활쓰레기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분류해보니 재활용으로 90% 이상 나옵니다. 음식을 담았던 일회용품은 잘 씻어 물기를 제거하고 재활용으로 분류해냅니다. 만드는 대기업, 대책 부족한 정부, 항변하는 영세업자 등등을 탓할뿐더러 개인인 나 스스로도 열심히 방법 찾아 동참합시다. 우리 아이들이 쓰레기장에 살게 할 순 없잖아요.” 아이디 ‘티없이살라하네’도 말한다. “문명의 발달로 너무 편리함에 익숙해져 살다 보니 좀 불편하면 힘들어한다. 폐비닐·폐플라스틱이 육지에서는 산을 이루고 바다에서도 섬을 이루어 더 이상 방치한다면 지구는 죽는다. 만들어 쓰고 버릴 뿐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니. 좀 불편하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배달음식 단가 올려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부담하면 되고. 지금 규제를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대책도 없이 과거에 규제를 하지 않은 일이 더 문제다. 내 집에 쓰레기 더미 안고 산다고 생각하면 규제와 비용 부담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일단 나 자신부터 시작해보자. 할 수 있는 일들, 너무나 많다. 다회용컵(텀블러) 사용하기,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기, 그릇 가져가서 음식 사오기, 과대포장 않는 제품 사기, 다회용품 사용 배달업체 이용하기 등등. 실내 흡연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젠 실내 흡연은 물론이고 길거리 흡연조차 문제라 본다. 문화가 바뀐 거다. 일회용품 사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아니라 문제로 보는 문화, 부끄럽게 보는 문화로! ‘내’가 그 변화의 시작이 되자.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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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산림청은 산불 진압을 위해 산불재난특수진화대를 운영하며, 이들은 소방청의 경방대원(화재 진압)과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소방관은 정규직이지만 특수진화대원은 매해 10개월씩 일하는 기간제 노동자다. 이들은 산불이 날 때 재난지역에 투입되지만 그때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일한다. 산불 진화훈련, 산불예방 순찰활동, 논·밭두렁 소각행위 단속, 불법 임산물 채취자 단속 및 입산자 통제, 산사태 예방, 임도 및 등산로 주변 풀베기와 잡목 제거 그리고 산불감시초소 및 임도차단기 보수작업, 농업폐기물 수거 및 인화물질 제거작업 등 쉴 틈이 없다. 즉 이들이 계약직 기간제 근로계약을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얼마 전 경남 김해 분성산에서 3차례(2018년 12월25일과 30일, 2019년 1월6일) 산불이 났지만, 특수진화대의 현장투입은 한 차례뿐이었다. 12월30일과 1월6일 산불이 발생했을 당시, 특수진화대원 총 10명은 현장 산불 진화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특수진화대원들이 단기 계약직으로 계약이 만료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1월6일 발생한 산불은 소방대원들이 진입하기 어려워 완전히 불을 끄는 데 11시간이나 걸렸다. 특수진화대원을 정규직이 아닌 단기 기간제로 운영한 결과다.

지난 4일 발생한 고성, 인제, 강릉 등 강원도 지역의 산불로 특수진화대가 기간제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최일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당하는 특수진화대가 기간제일 뿐 아니라 일당 10만원이라는 열악한 처우가 공개되면서 여론이 들끓자 산림청은 특수진화대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산림청의 뒷북 정규직 전환 추진 입장에 박수를 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특수진화대는 이미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2017년 7월 발표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보면 “상시·지속적인 업무는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이 당연한 관행이 되어야 한다”며 기간제 노동자는 가급적 2017년 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앞서 특수진화대와 유사업무인 산불감시원, 산불예방전문대 등을 상시 지속 업무로 판단한 바 있다.

정부가 2017년 12월 발표한 합동지침에도 특수진화대는 정규직 전환이 진행 중이거나 정규직 전환이 완료된 사업으로 분류돼 있다. 그럼에도 특수진화대 노동자들은 매해 2월에서 12월 사이 10개월짜리 기간제 근로계약을 맺어왔다.

결국 산림청이 당연히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할 특수진화대 노동자들을 속이고 반복해서 기간제 근로계약을 맺어 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산림청 공무원들의 무지와 정부 지침 위반으로 만성적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일당 10만원이라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내몰린 것이다. 

이제 와서 정부가 무기계약직 전환을 검토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눈 가리고 아웅하듯이 처리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꼼수가 발생하지 않을지 우려가 크다. 정부와 산림청은 특수진화대를 계속 기간제 노동자로 채용한 것은 스스로 정부의 지침을 어긴 행위이며, 심지어 불법의 소지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수진화대원을 처우 개선 없는 무기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비용 절감과 탄력적 인력 운용을 위해 무한정 늘린 비정규직이 사회 양극화의 핵심적인 원인이 되어 왔다고 진단하면서 정부와 공공부문이 모범적 사용자로서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진짜 그러고 있는가? 수도검침원, 도서관 연장 개관, 건강가정 및 다문화가족 지원, 아동복지교사, 생활체육지도자 활동지원 그리고 특수진화대. 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미 정규직 전환이 되어야 했지만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다.

<김성환 민주일반연맹 민주연합노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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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물으면 ‘물부족 국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물이 부족해 고통스러운 미래를 그리며 캠페인을 벌이니 물부족 국가라는 인식만은 확실히 한 것 같다. 2019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다시 묻는다면 아마 ‘저출산·고령화’ 시대라고 대답할 것 같다. 청량리역 인구탑을 보면서 인구폭발로 한국이 궤멸할 듯한 위기감 속에서 자랐지만, 막상 내가 아이를 낳을 때는 더 낳아보라 부추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불과 30년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이 인구정책이다. 

얼마 전 경북 의성군에 다녀왔다. ‘롯데리아’마저도 휴무일이 있는 곳이다. 때마침 학교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바나나맛 우유를 먹는 의성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대도시 풍경과 다르지 않다. 몇몇 중·고생들도 편의점에 들락거렸지만 이내 읍내는 고요해진다. 분식집의 유일한 피크타임일 텐데 제대로 개시를 못한 것 같았다. 장날이 아닌 평일 농어촌 읍내 풍경은 대략 이렇다. 

그래도 계절은 또 돌아와 들판에는 마늘이 쏘옥 올라왔다. 의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의성마늘’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종종 ‘지방소멸 위험 1위 지역’이 의성을 떠올리는 이미지인 것 같다. 외부인보다는 주민들이 그리 규정한다.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는 “읍내에 사는 인구가 1만도 안됩니더. 곧 소멸됩니더”라며 외지인인 내게 의성군을 딱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인근의 상주시는 인구 10만명 선이 무너지자 공무원들이 ‘상주’ 된 마음으로 검은 상복을 입고 출근하면서, 10만명 지키기에 사활을 건다는 소식을 전했다. 택시 기사는 대학이라도 있는 상주시 상황은 의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탄식을 보탰다. 

지방소멸에 대한 논의는 일본의 지방소멸 위험을 경고한 ‘마스다 보고서’에서 착안해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공식화된 말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65세 이상 인구수가 20~39세 여성의 수보다 2배 이상 많으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경북 의성군이 소멸위험지역 1위에 들어서고 만다. 하지만 전국 농어촌 상황은 다 엇비슷하다. 보고서 기준을 적용하면 향후 30년 내에 84개 시·군, 1383개 읍·면·동이 소멸위험이며 이는 전체 마을의 39%에 이른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농촌이 휑한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건만, 막상 ‘소멸위험’이라는 말을 들은 지역민들의 박탈감은 매우 큰 듯하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맥이 빠질 것이다. 경각심을 가지란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겠지만 중앙집중적인 말이고 말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  

그래도 의성초등학교 아이들은 재잘대면서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태권도 사범을 따라 태권도 도장으로 몰려간다. 피아노 학원과 문구점도 있으니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고장이라면 그 부모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 할 것이다. 지금 사과와 마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농사지어 살 만하다면 그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농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의성마늘과 의성사과는 여전히 인기 만점일 것이다. 며칠 전 보니 전지작업이 말끔하게 끝난 사과나무에 꽃망울이 웅얼웅얼 맺히고 있었다. 지금을 돌봐야 한다. 그것만이 소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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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올 때면 가끔 아파트 앞 생활폐기물 수거 차량과 마주친다. 시민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도로 한쪽에 차량을 정차하고 음식물이나 폐기물을 수거한다. 청소 노동자들을 대하는 인식 차이일까. 일본이나 유럽에선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이 낮에 진행되는데, 우리는 새벽에 한다. 그러다 보니 업무상 재해나 사망사건도 많다. 1년에 꼭 한 번 정도 청소 노동자의 사망사고를 접한다. 전국에 생활폐기물 운반수거의 87.7%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다 보니, ‘위험의 외주화’는 공공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민간위탁 노동자 고용의 질은 우리가 꼭 짚어야 할 문제다. 저임금에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보니 양질의 시민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민간위탁 시설의 법률 위반현상은 심각하다. 연장 및 휴일근무 수당, 연차휴가 등 기본적인 노동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민간위탁이라는 이유로 숨겨지거나 은폐되고 있는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수탁업체 대표 및 관리자들의 노동 감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의 힘이 도시를 위해 뭔가 커다란 것을 해주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간 정부는 다양한 기본 서비스를 꾸준히 외주화했다. 사실 민간위탁은 대시민서비스의 일부를 외부 전문기관에 위임·대행이라는 ‘합리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위탁의 회계 부정, 용역비 과다청구, 임금 가로채기, 선정 비리, 관리 감독 부실 등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위법적이고 탈법적 현상들을 지자체는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공적자원을 시장의 힘에 넘겨버린 민간위탁의 비민주적 속성을 보여준다. 

지난해 기준 공공부문 민간위탁은 1만개가 넘고, 노동자는 약 19만6000명이나 된다. 정부 재정의 1.86%에 해당하는 7조9600억원 규모다. 민간위탁 다수는 사회서비스 시설이다. 어린이집부터 사회복지, 장애인, 아동, 청소년, 정신건강 등 47.2%가량 차지한다. 그러나 도서관, 상수도 검침, 콜센터, 지하철 역사 등 매우 다양한 대국민 공공서비스들이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최근에는 중앙정부가 국고보조 사업으로 지원하는 지자체 ‘센터’들도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정부는 도시의 공공서비스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했다. 지자체 평균 100개 정도의 업무들이 공공이 아닌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공공부문에서 민간위탁 ‘신화’는 IMF 경제위기 이후 비용절감과 조직효율성을 이유로 더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서울, 광주 등에서 일부 민간위탁을 직영 혹은 재구조화했다. 때마침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3단계 민간위탁’ 내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민간위탁이 공공서비스 전달체계 변경과 관련되어 있다며 기관 자율에 맡기겠다고 한다. 기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사실상 정규직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지자체 일부 업무들은 노무도급 성격의 용역근로 형태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1단계와 2단계에 해당되어야 할 간접고용 업무들이다. 

우리는 노르웨이 제3의 도시인 트론헤임의 ‘지자체 실험 모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지자체 공공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위탁을 물리치고 직영으로 운영한 공공행정조직의 내부적인 민주적 변화를 이끈 곳이다. 특히 공공서비스를 직영 운영하면서 직원들의 병가 신청자가 11%에서 2%로 줄었고, 일자리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도시의 좋은 일자리 모델의 의미 있는 성과다. 독일 베를린의 생활폐기물 시영회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박스 스톱)도 제공하고 있다. 

공공서비스를 시장에 맡겨야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민간위탁 서비스들을 공적 통제 아래로 되돌리려는 선택이 필요하다. 초점은 ‘돈이 아니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이점을 봐야 한다. 시민의 삶에 핵심이 되는 국가의 일부를 되찾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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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개혁을 비롯하여 중등교육 정상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절박하지만, 작년의 대입 공론화 과정은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탄탄하게 형성하지 못한 우리 현실을 잘 보여줬다. 하지만 고교체제 개편의 일환인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교육 공약 중에 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은 국민적 지지가 높은 공약이었다. 2017년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 예외 없이 국민 과반수가 찬성했으며(리얼미터 52.5%, TV조선 62.3% 등), 반대 역시 한결같이 30% 미만이었다. 또 2017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과 함께 실시한 교사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학교, 일반고, 영재학교·자사고·특목고 등 총 512개교 3494명의 응답 교사 중에 무려 82.4%가 현행 고교체제로 인해 고교서열화의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교사와 일반 국민 모두가 고교체제 개편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된 실망 끝에 입시개혁과 중등교육 정상화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육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할 꽃다운 청소년들이 과로사의 국제기준시간을 훌쩍 넘겨 학업에 시달리는 중이며, 새 시대를 앞서서 이끌 창의적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은 정부가 적절한 보완책과 함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지정 평가를 통한 일반고 전환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며 각 지역 교육청에 부담을 떠넘기고 말았고, 그 덕에 자사고의 집단적 평가거부 소동도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교육개혁의 동력을 살리는 불씨가 될 잠재력이 크다.

9일 고교 무상교육 시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에서 열린 열린 당·정·청 협의에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재지정을 위한 자사고 평가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자사고는 5년마다 재지정 평가를 받지만, 이 제도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다. 특정한 학교가 자사고로 지정되어 교육 다양성의 명분 아래 학생 우선 선발권을 가지고 일반고와 크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다 5년 만에 평가에서 떨어지면 도로 일반고가 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제도이며 자율이나 자유와도 거리가 멀다. 짐작하건대 자사고 도입에 대한 반발을 회피하려고 만든 무원칙하고 편의적인 장치이며, 입시 위주의 학교를 허용하는 특혜임을 자인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아예 재지정 평가가 불필요한 자사고 폐지의 길을 택해야 옳다.

자사고의 일반고 환원의 명분은 차고 넘친다. 대부분의 자사고 교육과정은 학생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함으로써 우리 교육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또 중학교 내신성적 상위 10% 이내 학생이 서울 시내 일반고 204개교에는 8.5%이지만, 23개 자사고는 18.5%, 전국단위 자사고 3개교는 무려 88.0%이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좋은 자사고를 가려는 과열 경쟁과 사교육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공약이 법적 소송과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은 2017년 말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이 ‘꼼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정공법이 아닌 일반고와 자사고의 ‘고입 동시 실시’라는 우회로를 택해 시행령을 손질했지만, 자사고와 일반고의 중복지원 불허로 자사고에 낙방한 학생이 거주지에서 가까운 일반고에 갈 수 없게 되었다. 타당성이 높은 정책 전환이 아니라 죄 없는 어린 학생에 대한 권리 침해의 측면이 컸다. 이런 허점 탓에 2018년 6월 헌법재판소가 이 대목만큼은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년 10월19일 서울행정법원은 서울 시내 자사고들이 제기한 2019학년도 고입전형 기본계획 취소 소송을 기각했다. 자사고 측은 학생 우선 선발권이 사학 운영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학생 우선 선발권은 교육의 다양성을 명분으로 주어진 특전이었다. 그러나 자사고가 내세우는 교육의 다양성이 대부분 허구임이 명백한 터에 우선 선발권은 성적 좋은 학생을 독점하는 부당한 특혜일 뿐이며,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정당하다. 어제 4월11일의 헌재 결정도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지만, 사회적 논란을 끝내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정부의 소극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 탓에 벌어진 혼선과 갈등을 해결할 길은 자사고 등의 일반고 환원을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일이다. 만만치 않은 반발과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길도 얼마든지 있다. 고교체제 개편은 대학입시 개선과 중등교육 정상화, 나아가 고등교육체제 개편에 이르는 종합적 교육개혁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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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의 자유·단결권 보장, 강제노동 폐지 등 국제노동기구(ILO) 4개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사실상 결렬됐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최근까지 노사정 부대표들 간 연쇄회동을 갖고 합의를 시도했으나, 경영계의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폐지’ 등 주장에 막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경사노위 전체회의가 남아있지만 의미있는 결론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상 노동 관련 의무이기도 하다. 비준이 늦어지면 전문가패널 권고안 등에 따른 통상 압력은 물론 한국의 국가신뢰도 하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경영계가 주장하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은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ILO정신에 반한다.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한 헌법 33조와도 배치된다. 한국은 28년간 4개 협약 비준을 미루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고집하는 것은 누가 봐도 ‘판’을 깨자는 것이다. 경영계의 무책임한 태도는 안타까움을 넘어 개탄스럽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선 비준, 후 입법’이다. 경영계와 일부 야당을 제외한 다수가 이의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부는 ILO 핵심협약을 즉각 비준하라”고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3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ILO 긴급공동행동’은 ILO 핵심협약 우선 비준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경사노위 공익위원 일부도 “선 비준, 후 입법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선수 대법관도 지난해 한 토론회에서 “선 비준, 후 이행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서둘러 ILO 핵심협약 비준 및 동의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회 동의절차를 거친 협약 비준은 그 자체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럴 경우 EU와의 외교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 무엇보다 노조 조직률 11%에 불과한 한국의 노동자가 ‘노조 할 권리’라는 기본권을 회복하는 일임을 정부와 국회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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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임신중단·임신중지)한 여성과 수술한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낙태가 범죄로 규정된 지 66년 만이다. 헌재는 11일 형법 제269조 1항(자기낙태죄) 및 제270조 1항(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재판관 9명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이 단순 위헌, 2명이 합헌 의견을 내놨다. 국회는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이 기한 안에 개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해당 조항은 무효화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생명권을 존중하고 확장시킨 헌재 결정을 환영한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다. 이번 결정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그 통제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가혹한 책임을 물어온 과거와 결별하고 여성인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가 있다. 헌재는 기존 낙태죄 조항이 임신 초기를 포함한 전 기간에 걸쳐 모든 낙태를 일률적·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모자보건법에서 제한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는 경우를 규정하고는 있지만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갈등 상황’은 전혀 반영되지 않아 여성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선 하루 종일 찬반을 주장하는 기자회견과 시위가 이어졌다. 낙태죄를 반대해온 시민단체 회원들이 형법 제정 이후 66년 만의 헌법불합치 선고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제 공은 국회와 정부로 넘어갔다. 헌재 결정의 취지를 존중해 형법의 해당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고 관련법인 모자보건법도 손질해야 한다. 헌재가 제시한 기한이 1년8개월 이상 남았다고 하나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선 서두르는 게 바람직하다. 일각에서는 낙태가 폭넓게 허용될 경우 무분별한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낙태를 보장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다수 회원국은 한국보다 낙태 경험 비율이 높지 않다. 가임기 여성 1000명당 인공임신중절 건수를 의미하는 인공임신중절률은 독일 7.2, 캐나다 12.1(이상 2012년 기준), 노르웨이 12, 프랑스 15(이상 2015년 기준) 등이다. 한국은 15.8(2010년 기준)로 이들 나라보다 높다.

후속 입법 과정에서 임신중절권의 허용범위와 시기, 사유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하나 모두 중요한 쟁점이지만, 논의가 이 부분에만 매몰될 경우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헌재 결정의 의미는 축소될 우려가 있다. 여성의 선택과 결정을 위한 ‘자격’을 또다시 국가가 심사하는 차원으로 후퇴해선 곤란하다. 국가가 시민의 신체와 관련해 할 일은 ‘처벌’도 ‘승낙’도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낙태나 출산과 관련해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한 보건·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헌재 결정은 인권과 생명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낙태의 비범죄화를 넘어 ‘재생산권’에 대한 사회적 모색이 필요하다. 재생산권은 아기를 낳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권리도 포괄한다. 혼인 여부, 장애, 성적 지향 등에 따라 아기를 낳거나 키우고 싶어도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더 많은 시민이 정당한 재생산권을 보장받고, 태어난 아이가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와 인식의 개선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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