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보고 외국인들이 많이 하던 말은 “빨리빨리!”였다고 한다.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고, 빨리 먹고 등등의 예시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빨리빨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몸이 굼뜨거나 말이 느릴 때 혹은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빨리빨리!”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서다.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느릿느릿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답한’ 것을 싫어한다. 답답하다는 것은 뭘까? 국어사전에 ‘답답하다’를 표제어로 입력하면 “애가 타고 갑갑하다”와 “융통성이 없이 고지식하다”고 풀이한다. 애타는 데 답을 안 줄 때를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혹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떠오른다. 빨리 알려주는 걸 좋아한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사람을 떠올리면 뭔가 의견을 냈을 때, 절차를 지나치게 따지거나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사람이 떠오른다. 결정 안 난 불안정한 상황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한국인은 드물다.

요컨대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말할 때는 ‘피드백’이 늦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드백은 “어떤 일로 인해 일어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치는 자동 제어 원리”라고 위키백과는 정의한다. 원래 과학기술 용어인데 회사 등에서 쓰면서 일상어가 됐다. 피드백이 늦다는 건 누군가의 요청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거다. 몸을 빨리 움직이든, 늦게 움직이든, 타이핑이 빠르든 느리든, 중요한 것은 요청과 질의가 왔을 때 뜸들이지 않고 어느 정도 더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게 된다.

일상에서도 피드백이 중요해지는 상황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애인이나 상사와의 채팅창에서 1이 사라진 후 반응이 오는지로 초조해한다. ‘읽씹’(읽고 대꾸 안 함)은 고통이고 무례함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교통카드가 안 찍힐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비키곤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자리를 비켜주면서 “여기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능숙한 역무원은 목소리가 들리면 대답부터 하고 개찰구로 다가와 문제를 해결한다. 시민들이 답답해하는 역무원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역무원이 아니다. 버튼을 여러 번 누를 때까지 대답이 없는 승무원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도 피드백이 빠르다는 의미다. 상사나 동료가 물었을 때 완벽하게 대답하는 것도 좋지만, 파악할 수 있는 최대한을 통해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것이 핵심이다. ‘진전된’ 답을 내놓으려면 일머리를 꿰고 있어야 한다. 일머리는 일의 내용, 방법, 절차를 의미한다. 매 시간 혹은 몇 시간마다 선배 기자에게 상황 보고를 해야 하는 신입기자의 수습과정이나, 군대에서 ‘중간보고’의 중요성을 신병에게 가르치는 교육 모두 그러한 일머리를 숙지시키는 훈련이다. 빽빽하게 짜인 ‘표준교범(FM)’은 보고를 거치는 동안 성과를 위한 융통성 앞에서 늘 조정될 수 있다.

빠른 피드백을 바라는 가치 지향은 조직문화를 넘어 한국 사회의 특성 같아 보인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감은 ‘답답한 일처리’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에서 출발했다.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고 진전된 상황 처리를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있는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세워지지 않았고, 국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의사결정을 방기했다. 상황의 내용, 조치의 방법과 절차 파악은 때가 지난 후 지지부진하게 이뤄졌다. ‘답답해 미치는 상황’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반대로 얼마 전 강원 고성 산불 대응은 시민들이 정부에 기대했던 피드백이 잘 이뤄진 상황이었다. 정부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상황상황마다 성가실 정도로 분명한 지침을 줬다. 집권하자마자 20만 이상의 시민이 민원을 제기했을 때 답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방’부터 개설한 정부의 돋보이는 대응이었다.

피드백이 빠른 사회, 피드백을 빨리 하길 바라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진상 소비자’나 ‘진상 민원인’의 갑질이 문제인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슈가 발생해 공론화되어 빠른 상황 파악, 빠른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이 아닐 때도 많다. 심지어 과학기술자들의 기초연구마저 짧은 기간마다 ‘중간보고’를 해야 하다 보니 보고서만 쓰다 끝난다는 말도 나온다. 진득하니 앉아서 지루한 토론과 조심스러운 해법 제시가 필요한 순간, 미봉책만 세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상에 늘 시급하고 중요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빠른 피드백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피드백을 빠르게 해야만 하는 세상을 어떤 사람들은 어질어질하고 피곤하다고 한다. 덜컹덜컹 시행착오를 겪으며 피드백을 통해 고쳐갈 거면, 애초에 찬찬히 잘 만드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문화와 행동양식을 쉽게 맘먹는다고 바꿀 수 있긴 한 걸까? 외려 피드백 사회의 특징들에 맞게끔 일하는 방식, 경영방식, 정치가 기민하게 대응해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한국 사회가 잘 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산업계에서 한국이 제품 애프터서비스(A/S)의 최고 선진국이 되고, 신제품을 실험할 최고의 ‘테스트 베드’가 된 이유기도 하다. 이따금 관점을 달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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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섬마다 산란 행렬이 시작된다. 먼바다에서 겨울을 보낸 참돔이 육지 가까이 떼 지어 들어온 것이다. 4월 이맘때, 수온이 16~18도로 오르면 제주 서남단 모슬포 앞바다, 가파도와 차귀도는 알을 품은 참돔으로 가득 찬다. 봄 바다가 요란스럽다. 어민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벚꽃 향 가득한 어린 참돔은 세대를 이어 어미와 같은 모습으로 모슬포 바다를 유영할 게다. 서해 칠산바다를 향하는 조기 떼의 울음은 모슬포를 기억할 것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어린 실뱀장어의 3000㎞ 긴 여정도 모슬포에서 쉬어간다. 

음력 2월 제주도 영등할망의 눈물이 끝나야 비바람이 멈추고 비로소 육지의 봄이 솟구친다. 찬 북서풍이 한풀 꺾이고 따뜻한 남풍이 불어온다. 사람 키 몇 배씩 자라 바다 숲을 이뤘던 모자반과 감태 군락은 물결에 쓸려간다. 제주 농부들의 파종은 그때 시작된다. 가파도의 봄은 청보리 연초록으로 더욱 빛난다. 한평생 했던 물질이지만, 해녀의 굽은 허리는 놀랍게도 바다에서 펴진다. 갯무꽃의 보라와 유채꽃의 노랑이 엉켜 공동묘지조차 아름답다. 자연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한껏 존재를 뽐낸다. 우리는 그 존재로부터 상호 역동하는 거대한 생태 그물망을 알아차리고 겸손해진다. 단 한 번이라도 봄을 지긋이 지켜본 사람이라면 자연을 폭력적으로 다루진 않을 것이다. 

모슬포의 봄을 오롯이 느끼려면 서귀포 안덕에 위치한 군산오름에 올라도 좋다. 골 깊은 안덕계곡과 대평리 너른 땅, 박수 해안의 수직 절벽을 품 안에 담은 절경이다. 등 뒤로는 한라산의 위엄, 섶섬 문섬 범섬의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중문 해안과 주상절리, 난드르의 평평한 들판, 범접하기 힘든 산방산의 기세, 형제섬을 품은 송악산 해역의 천연보호구역 ‘제주연안연산호군락’, 남방큰돌고래 바다와 푸른바다거북 산란지, 모슬포 앞 가파도와 마라도의 일몰, 한라산에서 화순으로 그리고 차귀도 바다를 감싼 숲 ‘한경-안덕 곶자왈’. 이들이 그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거침없이 뽐낼 때, 찬란한 봄은 비로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그들이 살아갈 집이 필요하다. 참돔의 산란을 위한 집, 봄꽃이 자유롭게 피어날 집, 모슬포 대자연의 풍광을 담아낼 집, 강을 거슬러 오를 물고기의 길, 바람이 불어오고 갈 그런 공간. 그러나 지금, 자본의 문명은 사람의 집과 ‘자연의 집’을 폭력적으로 점거하고 있다. 연산호와 구럼비를 걷어낸 제주 해군기지, 원주민 토지를 강제수용한 예례 휴양단지, 비자림로 숲을 베어낸 직선의 도로, 송악산 경관을 독점하고 절단 낼 리조트 계획. 하루가 멀다고 집이 사라지는 위태로운 철거의 시대! ‘집을 지키는 것’은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 되었고, 집에서 쫓겨난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대자연의 반격은 재앙으로 돌아왔다.

집을 잃은 그들에게 마음도 몸도 회복되는 ‘모슬포의 봄 레시피’를 바친다. 마시면 쌉쌀하고도 비릿한 맛이 묘하게 바다 향을 닮은 쐐기풀을 넣었다. 해조류의 향이 입가에 남는다. 봄의 초록을 머금은 가파도 청보리도 말렸다. 곶자왈의 첫 번째 봄소식을 알린 쑥도 한 소쿠리 캤다. 미묘하게 혀를 자극하고 감각을 깨우는 동백동산 백서향도 구해 차를 우렸다. 그러니 그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고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 봄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집을 잃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윤상훈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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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부재’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월17일 더불어민주당과 야 3당 간에 합의된 선거제도 개혁안 패스트트랙은 표류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을 둘러싼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간의 이견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민주당 국회의원들 중 상당수의 속마음은 선거제도 개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견을 좁힐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수처도 바라지 않을 수 있다. 공수처가 만들어지면 국회의원도 수사대상이 되는데, 그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공수처를 추진할 때에도 여당 국회의원들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청와대는 ‘기소권 있는 공수처’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 같다. 이런 상태는 ‘정치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어떻게든 현재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싸우기도 해야 하지만, 협상도 하고 타협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정치를 해야 할 사람들이 정치를 하지 않으니 피곤한 것은 국민이다. 

이미 개헌은 정쟁으로 흘러서 무산됐고, 선거제도 개혁과 검찰개혁조차 무산되면 촛불 이후에도 이 나라의 시스템은 바뀐 것이 없다. 돌아보면 개헌이 무산된 것도 ‘정치의 부재’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진정성 없다고 탓하는 걸로 끝내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진정성이 없는 상대방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 청와대와 여당은 권력구조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것은 결국 개헌의 무산으로 귀결됐다. 

개혁 실패 후 어느 쪽 책임이 더 큰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변화가 필요 없는 세력은 일이 안 돼도 관계없지만,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일이 되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번엔 달라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수처가 기소권을 가지는게 바람직하다 생각하지만, 그것이 개혁 전체를 무산시켜도 좋을 만큼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펼쳤다. 274쪽을 보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고위공직자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공수처가 수사를 하여 검찰에 이첩해 기소하게 하고, 만약 검찰이 부당하게 기소를 하지 않으면 법원이 기소를 강제하도록 재정신청을 하게 하는 제도”라고 적고 있다. 공수처가 수사권을 갖되, 1차적 기소권은 검찰이 갖는 형태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이 발의해 놓은 법안의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때는 이 정도가 실현 가능한 최대치라고 봤을 수도 있다. 워낙 검찰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수처가 기소권을 갖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택해야 한다.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면, 설사 기소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공수처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검찰개혁이 완전 무산되는 것보다는 반보라도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도 마찬가지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을 국가의 미래가 달린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보았다. <운명이다> 290쪽을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의 선거제도에서는) 정책 개발보다는 다른 정당과 지도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거운동 방법이 된다. 모든 정당에서 강경파가 발언권을 장악한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발붙이기 어렵다. 국회의원을 대폭 물갈이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내가 20년 동안 경험한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선거제도 개혁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정치발전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떻게 할까? 아마 어떻게든 선거제도 개혁 패스트트랙을 성사시키려 할 것이다. 공수처에서 타협점을 찾아서 함께 패스트트랙에 올리든, 아니면 선거제도 개혁안이라도 먼저 패스트트랙에 올리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기회가 다시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인의 소명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직까지 청와대와 여당의 개혁인사들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얘기는 자유한국당 복귀파를 제외한 바른미래당의 정치인들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은 얘기이기도 하다. 공수처에 관한 바른미래당의 의견을 고집하다가 모든 개혁을 좌초시키는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책임은 너무나 무거울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패스트트랙이 성사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생적 문제의식’은 원칙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상인적 현실감각’은 타협을 해서라도 일을 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의 개혁인사들이 가진 공수처에 대한 입장은 ‘서생적 문제의식’이다. ‘기소권을 가진 공수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검찰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을 반보라도 전진시킬 ‘상인적 현실감각’이 필요한 때이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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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하고 너그러운 아저씨, 유머러스하고 짓궂기도 하지만 솔직 겸손해서 왠지 안전한 아저씨, 남을 잘 배려하고 베푸는 아저씨, 머릿속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아저씨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매일 마주치는 퉁명스러운 중년들처럼 나는 아마도 성마르고 지루한 비호감의 아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동년배 친구 중에는 앞의 이상적인, 닮고 싶은 아저씨도 분명 있는데 말이다. 내 주변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금방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친구도 지방 강연을 위해 탄 KTX 안에서는 독서를 방해하는 전화통화들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시끄러운 대화들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친척을 욕하고, 용돈을 덜 줬다고 자식을 험담하고, 아이의 대학 합격을 자랑하는 대화를 SNS에 고자질하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3번 열차 4C 좌석의 집사님, 아이가 대학에 간 건 예수 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저도 원고 좀 씁시다.

공공의식의 부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마른 나는 대중교통 안에서 자주 낯을 붉힌다. 휴대전화를 들고 30분씩 통화하는 사람들은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의 구분이 없다. 계속 눈치를 줘도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통화 좀 줄이죠. 조용한 버스 안에서는 아무리 작게 얘기해도 신경이 쓰인다고요.” 전화통화는 흘려들을 수 있는 잡담소리와는 또 달라서 한쪽의 이야기만 귀에 들어오니 신경을 긁는다.

버스에서 내려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사람이 걷고 있는데도 그 앞을 휙 지나가는 승용차, 짐차가 부지기수다. 멈칫거리는 기세도 없이, 바쁜 나를 누가 방해하느냐며 돌진한다. 광화문 사거리에 나가면 매일처럼 예수 전도단이 진을 치고 확성기와 스피커로 지나는 사람을 괴롭힌다. 그 앞을 지나다가 귀가 멀 정도의 큰 소리에 혼비백산했다. 그들이 찬양하는 천국은 내게는 지옥이다. 

경찰은 왜 이런 행위를 방치하는가? 단속이라도 하면 종교탄압이라고 항의하겠지?

사적인 것과 공적 공간이 한데 뒤섞여 잡탕을 이룬 도시는 서로에 대한 불신 지옥으로 변해가고, 이상적인 인격을 지키고 싶은 이 아저씨는 점점 성마르고 퉁명스러운 아재가 되어간다.

나는 ‘대중’이라는 말로 우리들 시민을 집합적인 하나로 묶어 비난하거나 떠받드는 모든 담론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한 명의 유권자이지 백 명의 유권자로 모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권리와 욕망을 모두 등가물로 환산하여 하나의 표를 부여하지만, 그 표들은 집단적 욕망으로 뭉쳐서 ‘광주항쟁’을 북한군의 공작이라 떠드는 정치인을 대표자로 옹립한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자체에 대한 폭력이 되어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해야 한단다. 

시민다움을 배반하는 이들을 시민으로 옹호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시를 빌려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자책한 박완서 선생의 반성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 시민 일개인의 사적 욕망과 행위가 공적 공간에서 함부로 허용될 때는 그 시민들의 권리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토대를 흔들 테니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나누고, 시장의 영역을 사적인 것에, 공동체적 토론과 합의를 공적인 것에 각각 배정한 바 있다. 

특이한 점은 우리가 완전 경쟁과 동등한 권리로 참여하는(참여한다고 믿는) 시장에서의 활동을 사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 ‘필요’에 따른 활동이 시장이라는, 이해관계와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영역을 구성한 것이니까. 개인으로서 자신의 필요를 해결해야 하는 시장 속의 인간은 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가령 공동체 유지와 함께 사는 환경의 보존 같은)을 할 때 비로소 공적 영역에 들어선다.

시장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과 대립하지만, 우리는 시장에서 체화된 경쟁의 감각을 공적인 영역에서도 적용하고자 한다. 대중교통과 도로의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고, 그것을 함께 이용하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그의 존재를 무시한다. 

이렇게 공적 공간이 사유화되면 가령 임대아파트의 주민들과 아이들이 대형아파트를 가로질러 등교할 수도 출근할 수도 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들 각자의 시장화된 욕망은 그 자체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헬조선의 오늘을 만들어낸 주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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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편성 과정에 국민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재정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제고하기 위해 2018년 국민참여예산제도가 도입됐다. 작년 국민참여예산에는 1200여건의 사업이 다양한 국민에 의해 제안됐다. 그중 국민참여단의 숙의와 일반 국민의 선호조사를 통해 30여건의 국민참여예산이 선정돼 집행되고 있다. 지방정부 예산과 달리 중앙정부 예산은 주민의 선호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어렵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사업을 제안하고 제안사업을 선정하는 숙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참여예산제도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한계로 언급되는 것은 국민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을 선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참여예산제도의 운영은 사업의 제안과 심사, 선정과 같은 절차적 측면보다는 국민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재정당국은 올해부터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인 사회적 난제를 선정해 집단지성을 통해 해결책을 완성해가는 문제 해결형 국민참여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국민참여예산제란 기존 국민이 사업을 제안하고 선정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어려운 사회적 난제의 해결방안을 국민들의 지혜를 모아 모색하는 방식이다. 단순 아이디어의 공모와 채택이 아니라 정책 수요자 입장에서 국민이 사회적 난제를 제안하고 해결방안을 토론을 통해 찾아나가는 문제 해결형 참여방식이다. 물론 국민뿐만 아니라 부처와 민간의 정책전문가가 함께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한다. 의견 제안자, 일반 국민, 관계부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토론을 개최해 사회적 난제 해결방안에 대해 토의한 후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방향을 도출하고 관련 사업을 발굴한다. 이를 위해 이슈, 문제점 진단, 정책 대응방안에 대한 온·오프라인 토론 과정 및 결과 등을 담은 국민참여 보고서가 작성되고 공유될 예정이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국민참여예산제도 도입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과거 지자체에서 시행해온 많은 참여예산제도가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운영되어 생색내기에 그쳐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국민들이 전체 국민들을 대표할 수 있는지, 전문가도 어려운 난제를 생업에 바쁜 국민들이 해결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이다. 참여 국민들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보완하는 꼼꼼한 제도 설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다른 참여예산제도가 그랬듯 보여주기식 행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제도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정부의 세심한 제도 설계를 주문하고 싶다. 가급적 다양한 국민들로부터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정부부처와 민간 전문가의 지원을 통해 참여 국민들이 문제의 본질과 쟁점에 대해 충분히 숙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원하에 국민들이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충분한 숙의 과정에 대한 설계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올해 국민참여예산제에선 새로운 방식의 참여예산 선정 과정을 통해 여러 사회적 난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들이 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되기를 기대한다.

<오영민 | 동국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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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외국인이라고 치자. 지금 당신은 한국의 경찰서에 있다. 당신은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고, 그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평범한 하루였다. 일터에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경찰관들은 동료들 앞에서 당신을 체포했다. 그날 경찰은 당신의 이름과 나이, 국적 등 개인정보를 ‘취재안내’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TV와 인터넷에는 보도가 쏟아졌다. 사회적으로 당신은 이미 범죄자로 불린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당신은 낯선 타국의 철창살이 주는 고립감과 범죄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 그날 저녁 조사가 시작된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찰관이 앉아 있다. 무방비 상태의 당신에게 오랫동안 훈련된 수사전문가의 준비된 질문이 시작되었고, 이미 당신의 멘털은 붕괴되어 버린 상태이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고 힘겨운 대답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경찰관이 표정을 싹 바꾸며 묻는다. “왜 거짓말을 하나요?” 여덟 글자밖에 안되는 이 짧은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공권력은 자기방어가 취약한 사람을 상대로 작동할 때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사소송법의 중요한 원칙들은 늘 가장 힘없는 사람이 만들어 냈다. 수사기관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의 이유와 진술거부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전에 알려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미란다 원칙’도 1966년 미국 애리조나 주 멕시코계 이주민 ‘미란다’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피의자 미란다가 용의자로 체포된 이후 자신의 권리에 대한 안내 없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2시간 동안 조사받으면서 범죄를 전부 자백한 진술서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위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경찰 피의자 신문의 전체적인 주안점은 (중략) 피의자를 감정적 상태에 몰아넣어 합리적 판단 능력을 훼손하는 데 있다”(Miranda v. Arizona 384 U.S. 436, 1966)는 시대를 앞선 통찰을 보여주었다.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형사법학자인 리처드 레오 교수는 그의 책 <허위 자백과 오판>에서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조사과정을 압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채 자발적인 자백으로 이어지는 “진실 발견에 관심을 쏟는 중립적인 정보 수집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는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로 하여금 범행을 시인하게 만들 목적으로 구체적인 일련의 심리적 효과와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처음의 가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경찰관은 이후로도 당신에게 무려 수십 차례에 걸쳐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다그쳤다. “100% 거짓말이다”라며 확신에 찬 모습도 보였다. 당신이 일상적인 한국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통역을 왜 불렀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 변호사를 부를 수 있는 형편이었다면 먼 타국까지 와서 노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소식을 듣고 선의로 달려온 변호사를 만나기 전에 이루어진 1차 조사는 나중에 보니 질문과 답변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 사실 이건 가설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외국인에 대한 조사의 일부다. 수사기관은 당사자의 진술을 “거짓말”이라 판단하여 반복 추궁할 필요가 없다. 진술과 배치되는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면, 별도로 증거를 통해 진술을 반박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아내고자 하는 잘못된 의도를 보여줄 뿐이다. 혐의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고려하여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원이 해야 할 일이지 수사기관의 몫이 아니며, 수사기관은 무죄로 추정되는 당사자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진술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특히, 피의자가 외국인이라면 제대로 교육되고 훈련된 통역 인력을 확보하는 게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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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동백나무 그늘의 끝을 막 지나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참새 몇 마리가 은행나무 이파리 사이에 숨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은회색 승용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

그가 지나갔다


노란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지어 동네를 돌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왕개미 한 마리가 제 몸만 한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힘겹게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세상에!

얼굴도 없이

이경림(194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여자와 참새 몇 마리, 승용차, 아이들, 왕개미가 각각 활동할 때 얼굴도 없는 그가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냇물 위에 떠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이배 같은 시간이 아닐까. 혹은 매일매일에 늘 나의 심중(心中)에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보든 함께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비록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이도 아니면 내가 신앙하는 ‘님’이 아닐까. 이도 아니면 소소하지만 스스로 빛나는 일상의 순간이 아닐까. 여럿의 주체들이 각자 힘껏 살고 있음에도 그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놓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스침과 사라짐에 빗댄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지낸 하루가 나는 좋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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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 중인 ‘기억공간’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제외하고는 5년이 지나도록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추모공원인 ‘4·16 생명안전공원’은 봉안시설 유치를 반대하는 일부 지역주민의 반발로 4년여를 표류하다, 지난 2월 말에야 조성계획이 마련됐다.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이 다니던 교실을 재현한 ‘기억교실’ 등이 꾸며질 ‘4·16 민주시민교육원’은 오는 9월에나 조성사업이 본격화된다. 부지를 놓고 안산시와 교육지원청이 3년여를 허송하다 최근에야 상록구청 인근 은하수공원에 조성키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전남 진도 팽목항의 ‘기억공간’은 “진도항 확장 공사에 걸림돌이 된다”는 진도군의 반대로 조성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침몰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 선체는 전남 목포신항 부두에 거치된 채 어색한 모습으로 추모객을 맞고 있다. 국민 모두가 뜻을 모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도 모자랄 판에, ‘지역 이기주의’ ‘지역개발’ ‘늑장’ ‘눈치 보기’ 등 때문에 기억공간 조성이 늦어진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2일 서울 광화문광장 남측 세월호 천막이 있던 자리에 개관한 추모시설 ‘기억·안전 전시공간’. 이 공간은 80㎡ 규모의 목조건물로 전시실 2개와 재난 안전교육을 진행할 시민참여공간, 안내공간인 진실마중대로 구성됐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진도 팽목항에서 4㎞여 떨어진 ‘세월호 기억의 숲’은 미국 영화배우 고 오드리 헵번의 맏아들 션 헵번의 제안으로 2016년 4월9일 문을 열었다. 300여 그루의 은행나무마다 희생자들의 사진·사연이 걸려있고, 가족·친구 등이 남긴 글을 담은 ‘기억의 벽’이 조성돼 있다. 션 헵번은 조성 당시 “어떤 행동이나 어떤 말도  유가족의 아픔과 비통함을 덜어드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절대로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은 참사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국가와 ‘산자’들의 참회와 다짐의 공간이다. 독일이 베를린에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우고, 미국이 뉴욕에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추모 공원’을 조성한 것도 같은 이유다. 세월호 참사는 특히 ‘살아있는 기억’이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세번째 책 &lt;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gt;에서 생존학생 엄마 문석연씨는 “생명안전공원 때문에 우리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어요. ‘납골당 반대!’ 우리 애가 그걸 볼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 조성은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이다.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은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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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에서 조선이나 자동차 등 산업구조조정에 따른 제조업 분야의 고용부진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이 14일 내놓은 ‘고용위기지역 산업의 일자리 이동지도 구축 기초연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연구는 2010년 통영지역에서 고용보험에 가입했던 조선업 종사자 7573명의 고용을 2018년까지 추적한 결과다. 고용위기지역의 현실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연구결과는 호황산업의 침체가 근로자와 지역경제에 주는 충격을 그대로 보여줬다. 고용보험 가입 근로자 10명 중 4명은 일자리를 떠났거나, 고용보험이 유지되지 않는 일자리로 이동했다. 고용보험은 ‘좋은 일자리’를 말할 때 최소한의 조건인 만큼 상당수 근로자가 저임금 일자리로 추락했음을 의미한다. 또 연구결과를 보면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절반 정도만이 조선업에서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전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부분은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근로자들이 항공부품 및 첨단분야에 취업한 것이다. 이는 산업구조조정에도 유관산업에 취업할 기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들 일자리는 구직자가 스스로 찾은 것이라고 한다. 구직자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 일자리를 유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통영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역공동화와 지역경제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통영은 세 차례나 반복적으로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됐다. 지역공동화를 막기 위해 지역에 맞는 신산업 발굴의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용위기지역은 전국에 통영·거제·군산·목포 등 8곳에 이른다. 대부분은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재지정되고 있다. 정부의 지원금 위주 대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증거다. 차제에 정부가 세금으로 주는 지역고용촉진지원금, 청년추가고용 장려금, 퇴직자를 고용한 사업주 지원 등의 실효성을 따져봐야 한다. 이와 함께 실직자가 재취업할 수 있도록 연관업종 알선과 맞춤형 재교육 방안도 찾아야 한다. 실직자에게 도움이 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고용위기지역 문제 해결은 지역경제뿐 아니라 제조업 활성화를 위해 절실하다. 미래지향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없이 산업구조조정에 따른 제조업 일자리 문제 해결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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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신 고(故) 박형규 목사님에 대한 긴급조치위반 등 재심사건에서 제가 무죄구형을 하며 과거사 반성을 했다가, 검찰 내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크게 소란이 일었지요. 최초 무죄구형으로 보도되었지만, 과거사 반성은 최초일지 몰라도 재심사건 무죄구형은 그전에도 없지 않았으니 최초는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검찰이 더러 무죄구형을 하였거든요. 정권의 보수화에 발맞추어 검찰은 황당한 옛날 구형을 반복하거나 속칭 백지구형(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을 한 후, 무죄판결이 나면 무죄가 웬 말이냐며 기계적인 항소와 상고로 무죄 확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악의적인 행태를 강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는 수뇌부에서 제 의지를 억지로 꺾지 않아 무죄구형을 할 수 있었는데, 12월 박근혜 후보 당선 후에는 실낱같던 샛길조차 완전히 끊겼습니다. 부득이 공판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무죄구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는 것은 검사의 의무니까요. 중징계를 받았지만,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제가 옳았다는 판결을 결국 받아냈습니다.

올해 초, 제주 4·3사건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검찰이 공소기각을 구형한 후 공소기각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신속하게 확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관련된 분들의 환한 웃음을 신문 너머로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소송이 상고기각으로 확정될 때까지, 법무부는 현재의 검사가 과거 법원의 유죄 판단을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검사가 무죄구형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제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켰다고 비난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검찰의 변화가 상전벽해와 같습니다. 놀랍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불의했던 시절 제가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 안도합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에는 4·3사건으로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을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현기영 작가님의 시 ‘새로운 빛으로 되살아나소서’가 새겨져 있지요.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영구불망의 돌을 세운다.’ 그 시 구절 앞에 붙박이장처럼 한참을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권력은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입을 반세기가 넘도록 틀어막는 또 다른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정의의 대변자여야 할 검찰은 국가폭력의 잔인한 집행자가 되어 피해자들과 진실을 말하는 목격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사형장으로 보냈지요. 70여년간 고통받아온 억울한 원혼들,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족분들과 침묵을 강요당해온 목격자분들이 그 시 구절처럼 가해자들을, 검찰을 용서해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 판결이 확정된 후, 모 간부가 저를 불러 흐뭇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더군요. “저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저에게 위법한 지시를 한 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과와 합당한 문책을 바랍니다”라고 답하니, 제가 가당치도 않은 과욕을 부린다는 듯 “징계취소해도 문제구먼”이라며 황당해했습니다. 그 간부가, 사과와 문책 없는 검찰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터라, ‘용서하지만…’이란 그 구절이 ‘용서하려고 발버둥치지만’이라는 절규로 읽혀 가슴 먹먹했습니다. 색깔론이 아직도 횡행한 시대,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한 맺힌 사연들을 조심스레 꺼내며 비명을 참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거든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주변에 피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 너무도 처연했지요. 제주 4·3의 상징이 왜 동백꽃인지 그날 비로소 알았습니다.

4·3평화기념관에는 운주사 와불처럼 누워 있는 무서백비(無書白碑)가 있습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설명문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요. 이름을 두고 이념과 진영 간의 논쟁이 끝이 없으니 아직 4·3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비이나, 사과와 화해를 통한 완전한 평화를 기다려온 원혼들의 오랜 피눈물로 적셔진 혈비지요. 사과는 가해자의 의무이고,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앞에 검찰을 포함한 가해자들과 악의 승리를 방관한 우리 사회의 진심 어린 반성문을 백비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백비에 얼룩진 피눈물을 가해자들의 눈물로 닦아 바로 세우는 날, 비로소 4·3이 끝날 테지요. 그날까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역사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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