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생인 나는 작년에 나와는 10살 차이인 90년대생, 70년대생 두 사람과 독특한 인연으로 만났다. 그들과 적당히 친해지고서는 언젠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두 분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이 무엇이었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그것이 ‘2002년 월드컵’이었다고 덧붙였다. 2002년에 나는 스무 살이었다. 태극기를 들고 신촌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무척 행복했다. 사실 나에게 그 거리는 전경과 대학생이 아니면 서 있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최루탄 때문에 손수건을 항상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2002년에 아, 이렇게 거리에 함께 모여도 되는구나, 그리고 멋진 일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는 감각을 얻었다. 내가 한 개인이자 청년으로서 대한민국의 몇몇 현대사의 순간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갈 수 있는 용기도 그때 내 몸에 새겨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답을 짐작해 보았는데, 1970년대생은 IMF를, 90년대생은 최근의 촛불집회를 각각 말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정확히 20살 차이가 나는 둘은 동시에 같은 답을 했다. 그러니까, 2014년 4월16일, ‘세월호’였다. 그 이유도 거의 비슷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저의 아이가 거기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했어요.”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나는 2014년에 막 서른이 넘은 참이었다.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일들이 밀려들었던 때다. 나뿐 아니라 83년생인 주변의 친구들 모두가 비슷하게 순탄하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주변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었다. 어쩌면 모두의 서른 즈음이 대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월호의 뱃머리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슴이 먹먹하기는 했으나 ‘내가 저기에 있다면’ 혹은 ‘나의 아이가 저기에 있다면’ 하는 데까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나의 공감능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탓도 있겠고 출산과 육아라는 미션을 수행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70년대생과 90년대생의 몸에 세월호라는 재난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재난으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

개인과 동시하는 역사는 그들의 몸과 사유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재난이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서해훼리호의 침몰을 지켜보았다. 그 잔상이 내 몸 여기저기에 여전히 묻어 있다. 그러나 재난보다도 오히려 그 재난을 극복하는 방식이 그것을 목도하고 자기화한 이들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놓게 된다. 잘 극복된 재난은 그 이후의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다시 그러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반면 잘 극복되지 않은 재난은 오히려 그 이후를 더욱 참혹하게 만든다. ‘어떻게 구조했는가’만큼이나 ‘어떻게 사과했는가’ ‘어떻게 진상을 규명했는가’ ‘어떻게 책임졌는가’ ‘어떻게 위로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세월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재난이다. “왜?”라는 여러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재난 이후의 재난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세월호를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규정한 90년대생과 70년대생 두 사람은, 하나의 공통점을 더 드러냈다. ‘나의 아이들을 외국에서 키우고 싶다’는 것과 ‘기회가 되면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70년대생은 지금 한국에 없다. 작년 여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엔지니어라는 그의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세월호 이후, 이민이 삶의 한 명제이자 목표가 된 어느 세대들이 탄생했다. 그것을 드러내는 개인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몸에는 이미 그 단어가 새겨지고 말았다. 80년대생들이 갖고 있는 ‘탈조선’이라는 해묵은 유행어와는 그 차원 역시 다르다. 이 자체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대한민국이 직면한 거대한 재난이다. 

그들의 마음을 구조하는 데는 많은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현재진행형인 재난이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를 내가 만난 70년대생과 90년대생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제 5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겨움을 호소하기에는 오히려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몇 주기라는 기억의 순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세월호라는 재난을, 그 재난 이후의 재난을 극복해야 할 책임이 남는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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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세월호

막 피어난 수수꽃다리 꽃에 앉아 날개를 접고 꿈을 꾸는 나비는 태양에서 날아온 광자(photon)에 흠뻑 취해 있다. 이런 나른하고 이완된 기운은 금방이라도 나까지 엄습할 듯하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유독 봄에 피곤하고 무기력한 증상을 우리는 춘곤증이라고 부른다. 낮이 길어지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 북반구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긴 겨울 동안은 햇빛이 내리쬐는 낮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우리 몸속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재고가 바닥난다. 이에 반해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춘곤증이 생긴다는 가설도 있다. 또는 기온이 올라가 혈관이 이완되고 혈압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증세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춘곤증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균 시간만큼 잠을 자지 못해서 잠의 고리(高利) ‘빚’에 시달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기네스북에서조차 ‘잠 안 자고 버티기’ 기록 분야를 폐지했을 만큼 과학자들은 부족한 잠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했다. 너무 많이 자도 좋을 것은 없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인들은 세탁기나 냉장고 혹은 휴대폰과 같은 ‘시간 절약 기계’ 살 돈을 버느라 잠잘 시간을 앗기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수면 부족은 우리 몸 곳곳에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그래서 수면과학자들은 평균 수면 시간보다 잠을 적게 자는 행위가 빚을 지는 일이라고 단정 지어 말한다. 사실 평생 지속되는 인간의 행동 중 잠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운동하거나 밥을 먹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동물의 몸속에 수면을 유도하는 기구(machinery)를 켜고 끄는 스위치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주로 초파리를 사용한다. 포도 껍질에 몰려드는 자그마한 곤충 말이다. 생긴 것은 보잘것없지만 이들의 유전체는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흡사한 부분들이 많다. 초파리들도 잠을 설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수명도 줄어든다. 하지만 남들보다 적게 자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있는 까닭에 동물의 수면을 조절하는 유전적 소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2005년 위스콘신 대학의 토노니 교수는 9000종의 초파리 돌연변이체를 조사한 뒤 칼륨 채널을 암호화하는 셰이커(shaker)라는 유전자에 문제가 있으면 잠을 적게 잔다고 보고했다. 뒤이어 수면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항균 작용을 하는 유전자도 알려졌다. 잠을 자는 일이 곧 면역계를 강화시킨다는 점을 증명한 셈이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잠 역시 관장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잠을 자지 않으며 공부하면 학습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잠을 잘 때 활발하게 일하는 한 무리의 신경세포들이 초파리 뇌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세포들이 밤에 일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세포가 일을 잘하도록 수면 환경을 조성하면 곧 불면증을 치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생명체가 잠에 들 수 있게 단백질의 활성을 조절하는 일이 초파리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면 잠은 결국 동물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잠의 기능을 일반적으로 뇌와 근육에 휴식 시간을 주거나 손상을 회복하는 일, 포식자를 피하는 일, 에너지를 절약하는 일, 정보 처리와 저장 등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효과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연구 결과가 올해 3월 ‘네이처’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잠은 체내에 누적된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생체 내 에너지 상태를 재정비한 후 다음날을 대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산소와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산화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음식물에서 채굴한 전자가 간혹 부적절하게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녹슨 쇠도 ‘화학적’으로 산화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보면 된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산소를 다루어야 한다. 우리 세포 안의 에너지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산소가 없으면 에너지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연료가 바닥난 자동차처럼 주저앉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부산스레 산소를 써서 에너지를 만들어야만 간신히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천형처럼 산소와 함께 사는 동안 동물은 잠을 자야만 한다. 내려오다 만 모래시계를 뒤집듯 잠을 설친 뒤 활성산소를 이고 진 채로 출근길에 나서는 사람들의 어깨는 축 처질 수밖에 없다. 비단 인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포분열 시간이 불과 30분이 안되는 대장균도 어떤 식으로든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이다. 또한 행동을 기준으로 봤을 때 잠을 자지 않는다고 알려진 귀뚜라미나 얼룩물고기 또는 개구리도 반드시 잠을 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잠을 자는지 우리가 아직 자세히 모를 뿐이다. 

파킨슨이나 알츠하이머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먼저 수면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운동이나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세포를 허물어뜨릴 단백질의 손상이 수면을 관장하는 신경세포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만약 다른 어떤 생리학적 과정보다도 수면이 질병을 치유하는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잠을 잘 자는 행위는 곧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일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면서 서로 잠을 권해야 하지 않겠는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지만 어쨌든 꽃은 피는 게고 솟아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우리도 나른한 나비의 꿈을 한번 꾸어봄직하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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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을 해도 자꾸 걸려오는 전화 가운데 주택에 태양광을 설치하라는 소리. 시골에 산다고 다짜고짜 노인 취급을 한다. 아버니임~으로부터 시작되는 코맹맹이 소리. 죄송합니다, 라고 전화를 서둘러 끊으면 재차 또 걸려오곤 한다. 짜증이 욱 올라온다. 태양광 소리만 들어도 이젠 뒷골이 땅길 지경이다. 탈곡기를 사라는 전화도 온다. 마을 전화부를 어떻게 알고 이런 전화를 다 하나 싶다. 손전화기로 걸려오는 보이스 피싱도 두어 번 받아보았다. 귀하의 은행정보가 털렸다고 하길래 은행에 저축한 돈이 없는데 괜찮다고 했더니 딱 끊는다. 좀 더 전화를 해도 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 언젠가는 대출을 해준대서 이미 콩팥 장기까지 팔았다고 했더니 딸칵 끊더라. 

대학생인 아들이랑 통화를 하다보면 ‘이 녀석이 요새 돈이 없구나’ 느껴질 때가 있다. 술값이 없든지 책값이 없든지 아니면 데이트 비용이 없든지 셋 중 하나일 테다. 사내아이는 보이스. 낚시는 피싱. 대부분의 부모는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산다. 해준 것 없는 아비에게 마음을 내는 걸 보면 나로선 감사한 일. 적은 돈이지만 잘 받았다는 문자를 받으면 마음에 저장해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낙들 둘이서 자식 걱정을 했다. 한 아낙 왈 “대학교 댕기는 아들이 만날 돈만 부쳐달라는데, 도대체 무슨 학생이 그렇게 돈이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학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푸념을 늘어놓자, 듣고 있던 다른 아낙 왈. “차라리 그렇다면 속이나 편하겠네요. 우리 딸은 돈을 달란 소리를 전혀 안 해요. 도대체 어디서 돈이 생겨 옷 사고 가방 사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빼앗기는(?) 편이 낫다 싶기도. 

몽글몽글 구름이 피어나더니 서산을 넘는다. 어떤 날은 전화가 하도 많이 걸려와 소동에 가까운 날이 있고, 어떤 날은 공치는 심심한 날도 있다. 번호부를 뒤지면 얼굴조차 희미한 사람. 인연이 다한 사람. 아쉽지만 가벼워지고 싶어 ‘삭제’를 누른다. 오래전 죽은 사람이지만 기억하고 싶어 저장해 둔 이름도 있다. 그리운 노란 리본의 이름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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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노래 속 ‘잡초’는 이름도, 꽃도, 향기도, 손도, 발도 없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여자농구 청주 KB스타즈를 우승으로 이끈 안덕수 감독은 ‘잡초’라 불렸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갖고 있는 걸 잘 몰라서다. 한국 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하는 첫번째 요소인 ‘학연’과 ‘지연’을 갖추지 못했다.

경기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덩치가 컸다. 주변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았다. 매산초등학교와 삼일중을 거쳤다. 중3 시절 전국대회에서 펄펄 날았고 우승을 따냈다. 안 감독은 “옛날 기억은 항상 좋은 일만 남기지만 같은 학년에서 우리 친구들을 이길 선수는 없었다. 다 한 수 아래였다”고 했다. 같은 학년 동기들은 얼마 뒤 불기 시작한 ‘농구대잔치 열풍’의 주인공이 됐다. 전희철과 김병철이 한 학년 위, 양희승과 서장훈, 추승균 등이 동기였다. 

우승 뒤 일본으로 친선경기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본 고교(하쓰시바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농구공은 잘 다뤘지만 일본어는 몰랐다. 이미 같은 재단의 삼일상고 진학이 예정돼 있던 터였다. 농사짓던 아버지가 말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1989년 당시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는 상당했다. 운동 선수에게 짐 싸는 일은 익숙했지만, 말 한마디도 안 통하는 곳은 낯설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첫 반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다. 말이 안 통하니 그곳에서야 말로 ‘잡초’였다. 안 감독은 “그래도 나중에는 일본 후배들이 형제처럼 잘 따랐다”고 했다.

고교 졸업 뒤 일본의 규슈산업대에서 월 10만엔씩 장학금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무렵, 한국에도 ‘프로농구’가 생겼다. 삼성에 입단했지만 그를 위한 자리는 넓지 않았다. 습관성 어깨 탈구도 발목을 잡았다. 선수생활이 일찍 끝났다. 대학농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내다 2007년 일본 여자프로농구 샹송화장품에서 코치 제의를 받았다. 당시 일본 여자 농구는 한국 농구에 뒤져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낯선 곳을 향한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9년 동안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 농구는 한국 농구에 역전했다. 그사이 안 감독도 일본 농구가 가진 시스템의 힘을 온몸으로 배웠다.

2016년 초 KB스타즈의 감독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많은 ‘국내 농구인’들이 그 자리를 노렸다. 학연·지연은 물론 여러 가지 ‘인연’을 동원해 관심과 욕심을 전했다. 안 감독은 여기저기 줄을 대는 대신 당시 챔피언이었던 우리은행의 챔프전 경기를 보러 다녔다. 안 감독은 “경기를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고 했다. KB스타즈는 팀 분위기 쇄신을 원했다. WKBL 출범 뒤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인연이 없는 ‘잡초’가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구단 관계자가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샹송화장품을 설득했다. 감독직을 고사했던 안 감독은 “3년을 기다려달라는 게 내 수락 조건이었다”고 했다.

감독 첫해 드래프트에서 박지수를 지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 같은 행운이었다. ‘잡초’로 지낸 지난 세월은 소통 능력을 키웠다. 일본어 한 글자를 모르고도 살아남았다.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뜻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선수들은 “감정 표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게 오히려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긴박한 순간 복잡한 언어보다 솔직한 표정이 더 정확하게 뜻을 전하기 마련이다. 화려한 꽃과 향기로 속이는 대신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잡초의 힘이다. 한국 여자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정선민을 FA로 데려오고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약속했던 3년 만에 결국 해냈다.

중3 때 일본을 가지 않았더라면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지 모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안 감독은 “그래도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온실 속 화초는 보는 사람이 즐겁지만 끈질긴 잡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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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의 자격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법을 개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을 떠나기 전 진상조사위 조기 구성을 당부한 데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5월18일이 오기 전에 진상조사위 구성을 마무리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진상조사위는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한 ‘5·18진상규명특별법’에 따라 지난해 9월 출범했어야 하지만 여태껏 구성조차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지난 2월 그들이 추천한 진상조사위원 2명을 재추천해달라는 문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한 채 꿈쩍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한국당이 추천한 조사위원 3명 가운데 권태오 전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에 대해 자격요건 미달을 이유로 임명을 거부한 바 있다. 특별법에 따르면 조사위원은 법조인, 교수, 법의학 전공자, 역사연구가, 인권활동가 등 분야에서 5년 이상 경력을 갖춰야 한다. 두 사람은 이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조사위원이 될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16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홍 원내대표는 “군 경력도 조사위원 자격요건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 출신 조사위원 포함을 주장하는 한국당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그만큼 조사위 구성을 속히 마무리짓고 진상조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실 군 출신이라고 해서 안될 이유는 없다. 진상규명 대상이 대부분 군과 관계된 부분이어서 어쩌면 군 출신이 보다 전문성을 갖췄다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역사적 진실과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의 상식에 부합하는 인물이냐는 점이다. 두 사람이 문제가 됐던 것은 자격요건보다 그들의 역사관과 행적 등을 볼 때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 하는 우려가 더 컸기 때문이다.  

여당이 한 걸음 양보한 마당에 한국당도 더 이상 조사위 출범을 지연시킬 명분이 없다. 이제는 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 정치공방은 자제하고 객관적·합리적인 인물로 조사위 구성을 마무리해야 한다. 5·18 진상조사에 발벗고 나선다면 시민들은 한국당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또다시 편협된 인사를 고집하면 시민의 공분을 자초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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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영리병원으로 추진돼온 제주 녹지국제병원의 설립이 좌절됐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17일 “녹지병원 측이 현행 의료법에서 정한 3개월의 기한을 넘겨서도 개원하지 않았고 개원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없었다”며 의료법에 따라 개설허가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녹지병원 설립 취소는 지난해 12월5일 제주도가 허가한 지 4개월 만이다. 영리병원이란 성격과 병원 설립 과정에서의 잡음과 의혹, 반대 여론에 비춰볼 때 제주도의 허가 취소는 당연하다. 

2017년 8월, 녹지그룹이 제주도에 녹지국제병원 개설허가 신청서를 제출할 때부터 논란이 거셌다. 녹지그룹은 중국 부동산개발회사로, 영리병원 신청에 앞서 제주 헬스케어타운 조성 사업에 개발업자로 참여했다. 시민단체는 일찍부터 부동산개발업체가 영리병원에 뛰어든 사실을 주목하며 병원 운영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부실한 사업계획서도 도마에 올랐다.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제주도가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를 통해 여론 수렴에 나섰고 ‘허가 반대’가 58.9%로 찬성 비율(38.9%)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 그러나 원 지사는 공론조사위의 결론을 뒤엎고 행정의 신뢰성, 대외 신인도, 지역경제 활성화를 내세워 ‘내국인 진료 제한’을 조건으로 병원 개원을 허가했다. 이후 녹지병원 측이 제주도의 ‘내국인 진료 제한’ 방침에 반발하면서 논란이 이어졌고, 결국 법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사실상 무산됐다.   

원희룡 제주지사가 17일 오전 제주도청에서 국내 최초 영리병원으로 추진되던 녹지국제병원의 개설 허가 취소와 관련된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고 제주 영리병원 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녹지병원 측은 지난 2월 제주도의 조건부 개원허가를 취소하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또 이번 설립허가 취소에 대해서도 법에 호소할 수 있다. 제주 시민사회는 녹지병원을 공공병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 역시 녹지병원 측의 반대로 쉽지는 않다.

영리병원 설립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송도에 세우려다 백지화됐고, 2014년에는 중국 싼얼병원의 영리병원 진출을 논란 끝에 불허했다.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병원이 고급화하고 의료서비스가 향상된다는 게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진료비 상승으로 의료의 질이 양극화되고 건강보험 중심의 공공의료 체제를 붕괴시킬 우려가 크다. 정부는 더 이상 영리병원은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자체들도 지역발전을 앞세워 의료공공성을 외면하는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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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새벽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안모씨(42)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70대 남성과 60대 여성 등 5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씨는 유일한 대피로인 계단 2~4층을 오가며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상처를 입혔다. 사망자 중에는 12세 여자 초등학생과 18세 여고생도 포함돼 있다. 참담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수사 당국은 엄중한 수사와 처벌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안씨는 폭력 전과와 함께 치료감호소에서 편집형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 아파트에 살면서 평소에도 이웃집·승강기에 인분 등을 뿌리는가 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주민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숨진 여고생은 안씨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까지 해, 가족들이 지난달 집 앞에 폐쇄회로(CC)TV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올 들어 안씨의 행패·폭행과 관련해 경찰에 신고된 것만 7차례나 됐다. 이런 사정을 보면, 안씨의 방화·살인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일이다. 법무부와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안씨 출소 후 조현병 치료와 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경찰이 적극적인 범죄예방조치를 시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7일 오전 방화·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시 가좌동 한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소방차 너머로 불에 검게 그을려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의 허술한 안전망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대검찰청 자료를 보면, 전체 살인사건에서 사회 불만에 따른 우발적 살인 비중은 2015년 38%, 2016년 39%, 2017년 42%로 해마다 늘고 있다. 올 들어서도 ‘성신여대역 행인상대 칼부림사건’ ‘부산 범천동 고시텔 방화사건’ ‘진주 70대 노인 무차별 폭행사건’ ‘부산 대학생 피습사건’ 등 충동범죄가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 10명 중 1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국회는 법·제도의 정비에 나서야 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범죄 우려자에 대한 등록의무화와 정보의 공유·치료가 우선 시급하다.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전체 중증정신질환 환자 중 정신보건시설 등에 등록한 사람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스토킹범죄 처벌법’ 등의 시행도 서둘러야 하고, 경찰청 예규에만 언급된 ‘우범자 관리제도’도 정비해야 한다. ‘임세원법’ 시행으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정보연계·외래치료명령 등이 가능해지지만 본인 동의가 없으면 강제 치료나 관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우리 사회의 부조리, 불평등, 빈부격차와 함께 성별·이념·계층·세대 간 갈등 치유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그래야 ‘묻지마 범죄’에 의한 사회적 약자의 허망한 죽음을 일부라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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