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발생한 강원 고성·속초와 강릉·동해 산불은 매서운 바람을 타고 시간당 무려 약 5.1㎞의 속도로 산림을 집어삼켰다. 강풍 속에서 쉴 새 없이 산림청 헬기가 물을 뿌리고 산불 특수진화대원들이 불타고 있는 산림에 뛰어들어 주불을 잡고, 국군 병사들은 갈퀴나 등짐펌프로 잔불을 잡아냈다. 소방대원들은 산불로부터 주택과 시설물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산림과 인명, 재산 피해가 컸지만, 산불 관계기관이 ‘협업’을 통해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한 결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유관기관이 협업으로 산불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불예측분석센터’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강한 바람에도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드론은 정밀 열화상 탐지장치를 장착하여 화선의 위치와 이동경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 산불 진행방향 및 산불 강도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파악된 산불 상황은 국가위기관리센터, 행정안전부 등과 실시간 공유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대책본부는 진화인력, 진화장비, 소방장비 등을 적재적소에 투입한다. 이러한 과학적 시스템이 있었기에 불시에 발생하고 확산속도가 빨랐던 이번 산불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

4일 오후 7시 17분께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대 산불이 확산되고 있다.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산불의 적기 진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산불 발생 상황을 분석하고 산불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종, 산지지형, 풍향 및 풍속 등에 대한 기초 자료가 축척되어야 하며,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다. 

최근 기후변화 현상과 산림조건의 급격한 변화는 산불 환경을 악조건으로 내몰고 있다. 따라서 빈번히 발생하는 대형 산불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항구적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 산불 발생에는 크게 기상, 지형, 산림(연료)의 세 가지 요소가 관여하는데, 이 중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요소는 산림뿐이다. 즉 산불 발생 이전에 산림 관리를 통해 탈 수 있는 물질 자체를 잘 관리하는 게 가장 확실한 산불 대응일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숲을 가꾸는 것에서부터 산불 대응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지속적인 산불 조심 계도, 과학적인 예측과 발생 시 대처 방안, 산불 이후의 피해조사와 복구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산림을 잘 알고 연구해온 산림과학자들의 노하우와 과학기술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이번 산불 이후 국립산림과학원은 아리랑 위성에서 촬영한 산불 피해지 영상을 통해 산불 피해면적과 특성을 상세히 파악하였고, 자체 개발한 드론으로 10㎝급의 정밀한 영상 정보를 취득하였다. 이러한 피해지 정보는 정부 합동조사단에 제공되어 올바른 산림 복구계획을 수립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앞서 1996년 발생한 고성 산불 피해지와 2000년 동해안 산불 피해지를 20년 이상 모니터링한 자료는 이번 산불 피해지의 향후 산림생태계 및 자연환경, 지역 주민의 여건을 반영한 산림 복원계획 수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산불의 방제, 예측 및 산림 복원까지 아우르는 산림과학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충원과 산불 예측 및 진화에 특화된 장비의 도입을 위한 적정한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 또한 산림의 조성·관리부터 시작하는 예방 활동, 진화체계 구축 및 산림 복구의 전 과정이 일원화된 형태로 통합관리되어야 한다.

<전범권 | 국립산림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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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화에서는 ‘혁명-이후’를 다루지 않을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처럼 노골적인 혁명 서사를 보고 난 후에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설국열차>는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건 무한동력엔진을 장착한 윌포드 트레인에 올라탄 사람과 생명체들뿐이다.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 기차는 폭주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었다. 기차에서의 삶이 철저하게 구획된 계급사회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화 <설국열차> 촬영현장에 선 봉준호 감독. 모호필름 제공

영화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혁명을 따라간다. 하나는 ‘엔진 칸’을 탈취하려는 ‘꼬리 칸’ 빈곤계급의 봉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기차 옆구리를 터트려 기차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반체제 혁명이다. 꼬리 칸 사람들은 기차 외부로 나가면 얼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를 터뜨리고자 하는 이들은 바깥세상, 즉 자본주의의 외부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공간이라 믿는다.

영화의 끝에 기차는 전복되고, 어린 소녀와 소년만이 살아남아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북극곰을 발견한다. 이제 설국의 시대는 끝났다. 이브와 아담은 자본주의-이후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말에 대한 해석은 분분했다. 대중은 그들이 북극곰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는 농담을 퍼뜨렸고, 한 평론가는 북극곰은 소녀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썼다. 그들은 결국 기차 밖에서 얼어 죽었을 거란 말이다. 이런 낄낄거림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맹신하는 시대의 좌절과 냉소를 잘 보여준다.

나는 좀 다른 이유에서 <설국열차>의 해피엔딩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영화는 혁명이 성공하고 체제가 내파된다면 우리가 ‘순백의 공간’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무엇보다 생존자가 소녀와 소년, 둘뿐이라는 결론은 안일하다. 도끼와 총을 가진 자는 물론이거니와, 기술이나 정보를 가진 자, 야비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등, 다양한 존재가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예상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기차의 내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생존자들 사이의 분배 투쟁일 터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국열차에서처럼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한다면, 이 싸움이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되지 않겠는가? 

대중영화가 혁명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기는 쉽지만, 그다음을 설득해내기 어려운 건 아마도 이 탓일 것이다. 이런 상상력 안에서 혁명은 그저 스펙터클로 소비되어 휘발될 뿐이다.

사실 영화를 에둘러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겐 이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 최고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촛불혁명 후, 세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 ‘먹고사니즘’과 ‘내로남불’ 운운이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선거제 개편 등 중요한 개혁 의제를 삼켜버린 것은 일상을 지탱하는 습(習)이 그토록 무서운 까닭이다. 그러므로 습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지속되는 과정으로서의 혁명이자 혁명-이후다.

헌법재판소가 7년 만에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불합치 선고를 내린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를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 환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다행히도 혁명-이후를 보여주는 빛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66년 만의 낙태죄 폐지도 그중 하나다.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선고는 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시민이 함께 이룩해온 사회의 질적 변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습의 전환’이다. 여성을 자궁으로 치환하여 국민 재생산의 메커니즘 아래 복속시키고, 생명을 우생학적 관점에서 등급을 매겨 관리했던 오래된 관습은 이제 역사의 뒤안으로 떠밀려 내려가고 있다. 

주수에 집중해서 “허락할 낙태와 불허할 낙태”를 법으로 정하려는 움직임은 낙태죄 위헌 선고를 ‘혁명’이라는 스펙터클로 박제하여 그 생명력을 박탈하는 효과를 초래할 뿐이다. 혁명-이후를 그리지 못하는 영화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제 한국 사회가 해야 할 것은, 낙태죄 폐지 운동의 성과와 의의를 일상의 습으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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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교육공약인 ‘외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을까? 최선은 외고·자사고의 존립 근거가 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0조, 제91조의3 등의 개정을 통해 일반고로의 전환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다른 정치세력이 반발하지 않을까? 이 공약은 정치권의 합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유승민·심상정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또 시행령 개정이라 그 권한이 정부에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 외고·자사고를 그대로 두면서 공약의 취지를 살리는 길은 없었을까? 학생 선발을 일반고처럼 오로지 추첨으로만 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안철수 후보의 대선공약이었다. 이도저도 다 버겁다면? 공약 이행을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국민에게 피로감만 줄 바엔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 그런데 정부는 어떻게 했나? 정부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먼저 헌법재판소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린 전략이 있다. 학생들의 외고·자사고 지원을 곤란하게 만들어 이들 학교를 일반고로 전환케 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외고·자사고의 선발 시기를 일반고와 일치시키고, 외고·자사고 지원학생의 (평준화 지역) 일반고 지원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선발 시기의 일치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하지만 효력이 작다. 그래서 함께 시행한 것이 외고·자사고에 지원하는 학생의 일반고 지원을 막는 것이다. 효력이 크지만 비교육적인 게 문제다. 이것은 외고·자사고 지원 학생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방식이다. 어린 학생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도저히 문재인 정부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책이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한 시민단체 관계자가 자립형사립고(자사고) 학생 선발 시기 및 이중금지 지원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한 자사고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지난 4월11일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헌재는 작년 6월에도 가처분 결정을 내려 효력을 정지시킨 바 있다. 헌재가 개혁의 발목을 잡은 게 아니다. 애초에 정부 정책이 문제였다.

시행을 앞둔 전략도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있는 교육감 권한을 이용해 이들 학교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지만 교육감들이 의지를 갖는다면 곧 시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첫 번째 전략보다 더 참담하게 실패할 것이다. 외고·자사고와 교육청 간에 소모적 갈등만 남을 것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존재하는 특목고와 자사고에 대한 교육감의 재지정 심사권은 이들 학교 다수를 폐지할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교육감이 이들 조항을 외고·자사고의 폐지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이후의 법적 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몇 개 학교만 일반고로 전환한 후 생색내기를 할 거라면 몰라도 이것은 공약 실현의 효과적 방법이 아니다.

승패 여부를 떠나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다. 이것은 외고·자사고 구성원들에게 모욕을 주는 방식이다. 외고·자사고 구성원이라 해서 교육적으로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다. 외고·자사고가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기관으로 변질되지 않았냐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고도 마찬가지다. 외고·자사고가 훨씬 심하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그들 학교에 성적 우수생이 많은 데서 비롯된 면이 있다. 일반고도 성적이 우수한 학교의 경우는 입시에 목매는 정도가 외고·자사고에 뒤지지 않는다. 외고·자사고 공약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략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기정 서울 구암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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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바쁜 시간들로 살다 보니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할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그래도 어쩌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을 때가 생깁니다. 하지만 식구들 표정은 데면데면합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낯선 탓도 있지만, 또 ‘밥상머리 교육’이 있을까 싶어 얼른 먹고 일어날 궁리를 하기도 하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요즘 뭐 하느라 바빠서 가족끼리 밥 한 끼를 못하냐?” 옆에서 눈치를 주면 “지금 아니면 언제 본다고. 모처럼 모였을 때 얘기 좀 하자는데, 그게 뭐 잘못됐어?”-이럴 때 아니면 언제, 라면서 꼭 텔레비전 틀어놓습니다. 들리는 뉴스 소리에 또 “저 놈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돌아다보는 시선 피하며 거칠게 밥만 욱여넣습니다.

흔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합니다. 밥 먹을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맛 뚝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먹은 것 얹히고 신물까지 올라오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조상들께선 밥상에서의 언동 역시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착하고 고분고분한 개도 밥 먹는데 건드리면 으릉! 합니다. 이때는 식욕이란 본능이 앞서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요. “감히 이놈이 주인한테!” 홧김에 손을 올렸다간 바로 왁! 하고 물릴 수 있습니다. 편하게 먹어라, 먹을 땐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게 상책입니다.

식욕을 채우는데 심기 건드리면 더 큰 스트레스와 짜증을 유발합니다. 친구 아닌 다음에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한마디 못하고 맛도 모른 채 꾸역꾸역 삼키겠죠.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색한 침묵이 식탁 위에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윗사람 먼저 말 꺼내진 맙시다. 나 빼고 다 떠들라 하고 “으흠~ 맛있네 맛있어!” 분위기만 살려주십시오. 어쩌다 숟가락 내밀면 반찬 같은 말씀만 가만 얹어주시고요. 억지로 떠먹이는 밥은 피와 살로 못 가고 식탁만 해체합니다. 겪어봤잖습니까.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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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생인 한 회사 후배와 대화를 하다 흠칫 놀란 적이 있다. “저는 영화 잘 안 봐요. 유튜브에 가면 짧게 짧게 설명해 놓은 영상들 있어서 그걸 봐요. 몇 시간 동안 어떻게 봐요.” ‘아 그렇구나!’


입사 16년차인 나에게 그는 ‘요즘 후배’의 기준이다. 그는 센스 있고 합리적으로 일하며 제 몫을 해낸다.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지만 선이 확실하고 끈적한 관계보단 산뜻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대체로 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에겐 비슷한 특징이 엿보인다.

이런 90년대생이 한꺼번에 우리 팀에 몰려왔다. 영상 제작을 함께할 인턴PD가 합류한 것이다. 앞으로 이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고, 이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었다. 258쪽에 나온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트위터 멘션. “망연자실한 리서치 결과 십대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두 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놔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다. 나는 영화의 적이 휴대폰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16년 전엔 나도 신입이었다. 입사 2년차쯤, 당시 15년차였던 한 선배가 신입인 나에게 적잖이 당황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거침없고 직선적이었다고. 이제 추억을 곱씹는 선배가 됐지만 말이다. 앞에 언급한 책에 채현국 선생님(효암학원 이사장)의 발언도 인용되는데, 채현국 선생님은 2014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가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라고 했다. 나이가 들고 ‘아비’가 된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거늘 이런 가차 없는 말씀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뒤집어 보면 그리 섭섭할 일은 아니다. ‘아비’는 이미 많이 누리고 많이 가졌다. 많이 도전했고, 실패했으며 성공했다. 연륜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생겨나는 사이에 어쩌면 현실에 만족하며 변화에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썩는다’는 채현국 선생님의 표현을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들어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아비’가 되는 것. 어쩌면 ‘아비’로 생존하는 것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어쩐지 선배 세대가 억울하다고? 아니다. 90년대생도 언젠가 ‘아비’가 된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어른됨을 고민하다가 생각의 끝은 신문에 이른다. 신문은 올드 미디어다. 레거시 미디어, 트래디셔널 미디어 등 올드 미디어를 부르는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어쨌든 뉴미디어는 아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려왔고 유튜브를 위시한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도 달리고 있지만 어느새 늙어버렸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잠깐 뒤집어 보면 레거시 미디어는 이미 많이 누리고 많이 가졌다. 많이 도전했고, 실패했으며 성공했다. 노하우가 축적되는 사이 지금의 방식에 안주하게 되고 도전정신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올드 미디어에 쏟아지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치 있는 언론으로 남는 것은 미디어 스타트업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의 시대에 신문은 ‘아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아들’을 자처하고,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혁신이 그렇게 쉽냐고? 아니다. 그렇지만 변화의 타이밍이 언제인지 고민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미 미디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정답을 제시해 줄 초인은 없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아비’와 ‘아들’이 함께 만들어갈 뿐이다. 이제 90년대생 인턴들이 쓴 뼈 때리는 콘텐츠 분석 보고서를 더 읽어 봐야겠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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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하면) 신고한다. 불법인 거 알지?”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다. 예정에 없던 아이가 생기자 아내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으려 한다. 병원에 나타난 남편은 아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협박한다. (2018년 1월)

# “(낙태하려는 여성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가 낸 변론서다. 법무부는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라고 했다. (2018년 5월)

#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시키고 ‘형법 270조를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한다’는 내용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공포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수술 파업’을 선언했다. (2018년 8월)

헌법재판소가 지난 11일 형법 269조 1항(자기낙태죄)과 270조 1항(의사낙태죄)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내년 말까지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12년 합헌 선고 이후 7년 만이다. 과정을 모르는 이들은 때가 되어 결정이 내려졌겠거니 여길 법하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두레박이 떨어진 게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공영방송에서 남편이 낙태죄를 빌미로 아내를 협박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정부 부처는 낙태죄를 존치하거나 외려 강화하는 쪽에 손을 들어줬다.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수많은 여성이 땀과 눈물, 이론과 실천으로 일궈낸 ‘혁명’이다.

낙태죄 반대를 주장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뒤 기자회견을 마치며 '낙태죄 위헌'이란 문구가 새겨진 손팻말을 날려 보내는 상징 의식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10~30대 여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해 9월 보건복지부가 낙태 시술 의사 처벌 강화 방침을 밝히며 낙태죄 논란이 확산됐다. 폴란드의 ‘검은 시위’를 벤치마킹한 임신중지(낙태) 합법화 시위가 시작됐다. 2017년 23개 여성·인권·의료·노동단체 연대체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이 출범했다.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은 23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2018년 들어 미투 운동과 불법촬영 규탄시위 등 거세진 페미니즘 흐름도 힘을 보탰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온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적 흐름에 사회운동적 흐름이 교차하며 이번 결과가 나왔다”며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10대, 성소수자, 저소득층 등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하며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주도해온 ‘모낙폐’의 이유림 집행위원(32)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젊은 여성들의 당사자 운동이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페미니즘 대중화라는 흐름이 큰 힘이 됐다. 2012년 합헌 결정 때보다 대중을 믿고 적극적으로 이 사안을 끌고 갈 수 있었다.”

-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최근 대중운동이 거둔 의미 있는 성과로 기록될 것 같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두가 자신의 재생산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주어’ 자리에 국가를 적어넣는 일이었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슬로건을 외친 이유다. 국가와 정부는 인권, 특히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주체인데 망각해왔다. 아이 낳을 조건은 마련하지 않으면서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을 처벌하는 건 국가의 책임 회피다. 국가의 역할은 시민의 판단을 의심하고, 폄훼하며, 징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책임을 저버린 자리에 국가를 기입했다.”

헌재도 결정문에서 “국가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사회적·제도적 개선 노력은 하지 못하면서 형법적 제재 및 이에 따른 형벌의 위하(으르고 협박함)로써 임신한 여성에 대해 전면적·일률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고 국가의 책임을 지적했다.

책임을 방기해온 국가에 제자리를 일러준 여성들 앞에 과제는 산적해 있다. 후속 입법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합헌 쪽에 섰던 헌법재판관 2인(조용호·이종석)의 반대의견은 시사적이다.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출산에 책임져야 한다. 우리 세대가 시류에 편승해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남성에겐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형사책임을 지우겠다는 차별적 인식, 낙태 합법화에서 고려장을 연상하는 ‘상상력 과잉’이 비단 헌재 내부에만 존재하지는 않을 터다. 

다시, 국가의 책무를 물을 때다. 국회와 정부는 특정 주수(週數)를 기준으로 낙태를 제한하는 식의 협소한 논의가 아닌,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 등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의 포괄적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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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군에 가면 1004라는 숫자가 돋보인다. 일공공사가 아니라 천사로 읽고 天使로 이해해야 한다. 이 지역의 크고 작은 섬을 통칭하여 1004개라는 것. 그래서 이곳은 천하에서 유일한 천사의 섬이라는 것. 최근에는 천사대교가 개통되어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등이 뭍에 직방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목포에서 발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저 천사들의 발치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날씨가 유난히 변덕스럽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무가내의 추위가 산하를 휩쓸고 있다. 식물에 각별한 애정과 깊은 안목을 지닌 분들과 봄맞이 꽃산행에 나섰다. 무안 톱머리해변에서 일박하고 김대중대교-천사대교를 지나 자은도 두봉산에 올랐다. 최근 뭍의 산에서는 진달래(너마저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겠더냐, 진달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꽃이 없었는데, 섬의 산은 올해의 봄을 한껏 포옹하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꽃에 취하려는데 한술 더 뜬다. 하늘에서 부드러운 사신이 도착한 것이다. 객쩍은 환영사도 작성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텅 빈 줄로 알았는데/쌓인 말이 저리도 많았구나//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두봉산을 종주하고 내려오니 벚나무가 활짝 피었다. 그 아래 작은 정자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때는 마침 점심 무렵이라 하루 중에서 가장 긴요한 시간대이다. 허기를 달래는 사람, 젖은 몸을 말리는 사람, 등산장비를 점검하는 사람, 동무들을 찾는 사람. 마치 산중에 도깨비시장이라도 반짝 열린 듯하다. 벚나무 꽃잎에 폭 싸인 저 알록달록한 풍경을 세 줄의 문장으로 이렇게 묘사해 볼 수도 있겠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는 구르고 흘러 바다로 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벚나무 가지를 뚫고 나온 꽃은 비바람에 찢겨 떨어졌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간다. 착륙하는 빗방울과 흩날리는 꽃잎의 중간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 그대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에 머무르다 또 어디로 가는가. 벚나무,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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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치 그만둘래.” 알고 지내는 정치인들로부터 가끔 듣게 되는 말이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으로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를 계속해주었으면 싶은 정치인들 중에서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몇몇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는데, 오늘은 자유한국당 이야기를 할 생각이어서 원래 그 당 출신 중에 꼽자면 얼마 전 정계를 은퇴하고 스타트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남경필 전 경기지사가 떠오른다. 나는 그와 정치적 견해를 온전히 같이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꽤 괜찮은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정치의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아주 멈춘 적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좋은 정치인일수록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정치를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지켜본 정치인의 삶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일정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회의는 무의미하기 일쑤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짜 신념이 진심인 척해야 하고, 운 없으면 밤 늦은 시간 술 취한 시민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적어도 지금 한국의 정치는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아주 멈추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내면의 고통을 강요한다. 괜찮은 정치인일수록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가 하면 그런 사유를 아주 멈춰버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유를 단 한 번도 시작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인들도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치를 더 열심히 한다. 내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가능한 일일 것이다. 10여년 전 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쓴 책에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겪는 마음의 병을 ‘정체성 폐쇄(identity foreclosure)’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학벌경쟁의 최정상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조차 자신이 왜 열심히 공부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입학한 후에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공부해서 무엇을 하려는지, 왜 그것을 하려는지 모른다. 의미가 없는데도 안 하면 불안하니까 계속 열심히 한다. 입시공부하느라 나는 누구인지, 내가 욕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닫혀버린 것이다. 정체성 폐쇄는 미처 자아가 성숙하기 이전부터 부모가 너는 이다음에 커서 판사가 되어야 한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 같은 목표를 계속해서 주입하면 흔히 나타난다. 나만의 정체성이 형성될 기회가 미리 차단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한 번도 시작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인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정치인 중에서 정체성 폐쇄의 대표적 사례를 꼽으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당대표 시절에도, 대선후보 시절에도,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이 왜 정치를 하는지, 아버지 이외에 대통령에게 주어진 막중한 공적인 책무가 무엇인지 사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제한된 인식의 틀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탄핵당했다. 영어의 몸이 된 지금 그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의 지평 속에서 자신이 왜 갇혀있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시평이라는 것을 쓰다보면 집권여당의 책임에 먼저 화살을 돌리게 되는 것이 순리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자유한국당의 폭주는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말 한국당의 광화문 집회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자. “좌파천국” “김정은의 대변인” “대북 제재 풀어달라고 구걸” “베네수엘라행 특급 열차” “종북 굴욕외교” 같은 것들이다. 현 정부의 정책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들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그것이 건강한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정말로 이 나라에 평화체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언어의 천박함은 둘째 치고 제1야당으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다. 

100년 전 이 땅에서 3·1운동이 있기 한 달 전,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통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설파했다. 종북 타령이 진짜로 그들의 신념인지도 확실치 않지만, 그 책임윤리의 완벽한 결여에 이르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한다. 정체성 폐쇄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의 부끄러움에 대해 한 번도 사유를 시작해 본 적이 없는 그들의 정체성 폐쇄는 우리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허탈한 것은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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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이 선거제·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 처리 합의안을 도출했다. 여야 4당 원내대표는 22일 회동에서 선거제 단일안과 함께 패스트트랙에 올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안에 대해 타결지었다. 공수처가 판사·검사·경무관급 이상 경찰 관련 사건에만 기소권을 갖는 바른미래당의 절충안을 더불어민주당이 받아들이면서 이뤄진 것이다. 내홍이 극심한 바른미래당을 필두로 각당의 추인 과정이 변수로 남아 있지만, 내년 4월 총선 일정을 감안할 때 선거법 패스트트랙 ‘골든타임’을 가까스로 지켜낸 셈이다. 여야 4당 원내대표는 각당의 추인을 거쳐 오는 25일까지 국회 정치개혁특위와 사법개혁특위에서 선거제 개편안과 개혁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작업을 완료키로 했다. 국회법상 패스트트랙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데 최소 270일, 최장 330일이 소요된다. 이대로 패스트트랙에 태운다 해도 빨라야 내년 1월 중순에 선거법 개정이 이뤄진다. 지역주의와 기득권에 기반한 거대 정당의 대결정치를 끝내기 위한 정치개혁의 ‘최고’인 선거제 개혁, 그 최후의 기회를 살렸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이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 원내대표들이 22일 국회 정론관에서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 처리 방안 등과 관련해 합의 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정의당 윤소하(왼쪽부터),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권호욱 선임기자

지역주의와 승자독식 구조를 깨는 선거제 개혁은 정당득표율과 의석수 간 괴리를 줄이고 다양한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연동형 비례제 도입에 방점이 찍혀 왔다. 이러한 개혁 방향은 여야의 대국민 약속이기도 하다. 여야 4당은 물론 한국당도 지난해 말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포함한 선거제 개혁 법안을 1월 말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한국당이 어깃장만 부리며 선거제 개혁의 발목을 잡아온 탓에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이라는 수단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여야 4당이 지난달 ‘지역구 225석·비례 75석’으로 하고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는 선거제 단일안을 마련하자, 한국당은 뒤늦게 의원정수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폐지하는 안을 내놨다. 위헌적일 뿐 아니라 선거제 개혁의 본령을 저버리고 현행 선거제도의 폐단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반동이다. 한국당이 선거제 개혁 무산의 본색을 노골화한 상황에서 여야 4당의 선거법 패스트트랙 추진은 불가피한 수순이다.

한국당은 “패스트트랙 합의는 4월 국회가 아니라 20대 국회 전체를 마비시킬 것”이라며 총력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게임의 룰’인 선거제를 여야 합의가 아닌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게 만든 건 한국당 책임이다. 패스트트랙은 분명 국회법에 따른 절차다. 여야 4당은 한국당의 반대에 흔들리지 말고, 선거법 개정안을 차질없이 패스트트랙에 올려야 한다. 특히 바른미래당 지도부는 내부의 반발로 정치개혁의 대의가 좌초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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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이 22일 국내 최대 사립유치원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설립 허가를 취소했다. 지난달 초 한유총 소속 유치원들이 개학연기를 강행하자 사단법인 설립허가 취소절차에 들어간 지 50일 만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저버리고 불법과 비리를 자행해온 한유총에 대한 설립허가 취소는 당연하다. 한유총으로서는 자업자득이요, 자승자박이다. 

서울시교육청은 한유총이 공익을 크게 해쳤고 사단법인 목적 이외의 사업을 수행했다며 법인 취소처분 이유를 밝혔다. 교육청은 한유총이 지난달 4일 유치원 개학연기를 강행하면서 어린이의 학습권, 학부모의 교육권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심대하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또 한유총이 수년 동안 어린이와 학부모를 볼모로 집단 휴·폐원을 주도하면서 사회불안을 조성했다고 덧붙였다. 교육청은 이와 함께 한유총이 정관을 임의로 고쳐 모금한 특별회비를 궐기대회 등 집단행위 경비에 유용하는 등 목적 이외의 사업을 수행했다고 지적했다.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사무실에서 이정숙 서울시교육청 주무관(왼쪽)이 김철 한유총 사무국장(오른쪽)에게 한유총 법인 설립허가 취소 통보서를 전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교육청이 지적한 법인 허가취소 이유 이외에 한유총이 저지른 비리와 불법 사례는 차고 넘친다.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비리 유치원 1878곳의 명단을 공개한 이후 국민은 한유총의 추악한 얼굴을 똑똑히 지켜봤다. 한유총은 ‘유치원 3법’을 막기 위해 궐기대회를 열면서 회원 유치원들을 강제동원하고, 법안 반대 의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회원 단체 대화방에 의원 후원 계좌번호를 올렸다. 자신들의 비리를 캐낸 경기도교육청 감사관실에 대한 공무원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의혹까지 받고 있다. 유치원 교육 단체가 했다고 믿기 어려운 모습들이다. 

서울시교육청의 법인 허가 취소 처분으로 1995년 설립한 사단법인 한유총은 24년 만에 법인 자격을 상실했다. 이로써 유치원 교육 정상화를 위한 걸림돌은 제거됐다. 이제 교육당국은 유아교육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공공유치원을 확충해 유아교육의 안정성·공공성을 높여야 한다. 국회는 ‘유치원 3법’ 통과에 힘을 모아야 한다. 한유총은 유치원 교육단체로서 대표성을 잃었지만, 이익단체로 계속 활동할 수 있다. 문제는 한유총의 적반하장식 태도다. 한유총은 법인 설립허가 취소처분 직후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한유총은 법정에서 대표성 여부를 다툴 심산이겠지만, 명분 없는 소송은 회원 유치원까지 잃게 할 수 있다. 자칫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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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밝다와 붉다는 모두 ‘불’에서 파생한 말이다. 불은 자체로 빛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핵심 물질이었다. 붉은색은 태양의 색이자 피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붉은색에 광명, 희망, 생명, 권위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아시아에서든 유럽에서든 붉은색 옷은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붉은색 관복은 정3품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붉은색에는 고귀함이라는 의미도 따라붙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군중은 청·백·적 삼색의 표지를 모자에 붙이고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다. 이 혁명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현재 프랑스의 국기로서, 청색은 자유, 백색은 평등, 적색은 박애를 의미한다. 이후 민주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많은 나라가 삼색을 국기에 채용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삼색기의 붉은색은 대체로 박애·정열·애국 등을 표상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김두봉은 상해 청년들에게 태극기의 색깔에 대해 “청색은 자유와 힘을 상징하며, 적색은 평등과 사랑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적색에 평등의 의미가 있다고 본 이유는,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기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랑스혁명 당시 붉은색의 또 다른 의미는 계엄이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유혈사태’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붉은 기를 썼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부의 논리를 전복하여 붉은 기를 혁명의 깃발로 바꿨다. 그들은 반역자는 부르봉 왕조이며, 계엄의 주체는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기가 삼색기로 바뀐 뒤인 1848년 2월,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파는 삼색기에 대항하여 붉은 기=적기(赤旗)를 자기들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후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적기는 혁명파의 보편적 상징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혁명이란 본래 ‘천명(天命)이 바뀌는 것’, 즉 왕조 교체를 의미했다. 민중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튼 것은 19세기 최말기였고, 1919년 3·1운동 전후에야 민국(民國)에 대한 지향이 지식인들의 의식 안에 뿌리내렸다. 왕조 권력이나 제국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혁명이라는 생각도 이 무렵부터 확산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혁명파의 상징은 적색, 왕당파의 상징은 백색이었다. 러시아인뿐 아니라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백계와 적계로 나뉘었다. 한국인들도 이때부터 적색에 혁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변화에는 언제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1921년, 혁명을 지향하는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흑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의 상징색은 흑색이었다. 2년 뒤 이 단체는 공산주의자들의 북성회와 무정부주의자들의 흑풍회로 분열했다. 북성회는 적색을, 흑풍회는 흑색을 각각 상징색으로 삼았다.

1926년,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근대법의 대원칙을 묵살한 법령이었다. 이로써 행위 없이 생각만으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처벌받는 ‘사상범’이라는 범죄(자)가 생겼다. 총독부 관계자는 이 법령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회주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폭력혁명론과 의회주의를 구분하겠다는 취지였으나 탄압은 무차별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한반도에서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 일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이 고조되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생겨 사상범과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노랭이’에 이어 사람의 성향을 색깔로 표현한 두 번째 단어였다. 둘의 공통점은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불리는 이름이라는 점뿐이었다. 노랭이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으나, 빨갱이는 중세의 ‘대역죄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중세의 대역죄가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듯이, 근대의 빨갱이도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다.

일제는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제정하고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빨갱이’들을 늘 감시하고 강제 전향시키는 체제를 갖췄다. 해방 후 극심한 이념대립과 전쟁, 분단을 거치면서 이 체제는 법과 제도의 차원을 넘어 관행과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공산주의자, 그들의 가족·친척·친구는 물론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는 시대 정신이 되었고, 빨갱이로 지목된다는 것은 곧 ‘생의 종말’을 의미했다. 한국전쟁 후 발급된 도민증 중에는 사상 기재란을 둔 것도 있었다. 여기에 ‘좌(左)’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람은 사실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빨갱이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일상적으로,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은 빨갱이로 지목되지 않는 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희생양 삼아 사익을 챙기려는 사악한 욕망이 분출했다. 남을 빨갱이로 지목하는 데에는 작은 트집거리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나, 지목된 사람은 ‘빨갱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 불공평한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빨갱이를 식별하는 방법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항의를 잠재우는 마법의 언어가 ‘말 많으면 빨갱이’였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혁명의 시대’는 반세기 전에 끝났다. 하지만 한국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많다. 문제는 불의한 권력이 빨갱이의 범주를 필요에 따라 확장해 온 역사 때문에, 그들 스스로 ‘빨갱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묻지마 살인’의 충동은, 아무에게나 빨갱이 낙인을 찍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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