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나무로부터 사람에게로, 김소월로부터 진달래꽃으로, 사랑으로부터 슬픔에게로 바람이 분다. 우리를 앞질러간 봄은 흰 조팝나무 꽃 속에 숨었다. 봄은 슬프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은 개벽(開闢)이지만 꽃들의 잔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조팝나무 꽃을 뒤져서 겨우 남아있는 한 줌의 봄을 끌어내고 있다. 날개 위에 실린 봄이 위태롭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비를 좇던 마음까지 나풀거린다. 그렇다. 우리 사랑 또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꽃이 진다.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떨어지는 잎 잎 잎……. 어디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우리네 슬픔이 스며있는 작은 못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분홍빛 작은 파문이 일면 눈물을 다 쏟아버린 슬픔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는 아프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다. 1953년 백설희가 처음 부른 후 예순 여섯 번의 봄이 지나갔다. 꽃은 남쪽에서부터 진다. 꽃이 피어올라온 속도로 봄은 또 그렇게 가고 있다. ‘봄날은 간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스며들 때면 우리네 삶은 봄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우정도 정점이 지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꽃잎이 날리는 밤, 이 노래를 부르며 친구가 울었다. 기억이 닳아서 희미하지만, 서울 남산 아래 대폿집 골목이 아니라면 인사동 골목이었을 것이다. 친구의 울음 섞인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친구가 왜 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봄날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는 올해도 봄의 끝자락을 붙들고 울 것이다. 지금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꽃그늘에 앉아 향기에 취했던 시간은 그저 꿈만 같다. 봄날이 아무리 좋아도 그 속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면 내 안의 상처들도 날린다. 신음 소리를 다 풀어버린 아픔들이 휘날린다. 야무진 햇살이 내려와 오래된 고통을 뒤집는다. 한나절의 풍장(風葬)이다. 문득 바람을 당기면 저만치 옛 기억들이 살아난다.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는 봄의 멀미, 아른거림 속에서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렸던 것들이 붉은 옷을 입는다. 돌아보면 어지러웠다. 눈물겨웠다. 숨 막혔다. 울컥울컥, 느릿느릿 젊은 날의 내가 다가온다.  

“순이네가 사는 집 지붕 위에선/ 순이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복동이가 사는 집 지붕 위에선/복동이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누이야 네 수놓는 방에서는/ 네 수놓는 아지랑이/ 네 두 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면/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는 아지랑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섧고도 어지러운 사랑의 모습처럼/ 여릿여릿 흔들리며 피어오른다”(서정주 ‘아지랑이’)

고등어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손톱을 깎고 있는데, 점심을 먹고 졸고 있는데,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데 문득 창밖의 봄날이 환장하게 곱다. 그럴수록 봄에 비친 내 모습은 남루하다. 사랑도 명예도 봄볕에 비춰보니 노래 한 소절보다도 못하다. 도대체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시대의 어디에 걸려있는가.

우리는 서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다. 갑자기 늙는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 중늙은이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젊은 날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살아있는 동안 몇 번의 봄을 맞을 것인가. 또 한걸음 멀어진 내 청춘은 어디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눈물 젖은 과거는 눈물 없는 곳으로 흘려보내야 하리.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시 가는 봄이 서러워 눈물이 나는 것을.

그대가 머물고 있는 마을에도 볕이 고운가. 이렇듯 환한 날에는 그대의 그리움이 보인다. 문득 보고 싶다. 초록별 속에서는 중력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나브로 늙어가고 있다. 그대 오늘도 지구인으로, 한국인으로 무사한가. 잘 것이 없으니 모난 것들을 지우고 술 한잔 건네고 싶다.   

사랑도 미움도 때가 되면 떠난다. 누가 떠나고 있기에, 무엇이 지고 있기에 이리도 아픈가. 신열이 멎을 때쯤에는 꽃 진 자리에서 실컷 울 수 있을까. 

저 신록에 섞이려면 다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풀 옷 하나 걸치지 못한 나는 누구인가. 나만 빠뜨리고 봄은 언덕을 넘어 숲속으로 사라진다. 봄날은 간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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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미국 연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20년 프로야구연맹의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프로야구계가 제시한 영입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종신직인 데다 총재 연봉이 판사 연봉의 다섯 배가 넘었다. 겸직으로 물의가 일자 법무부가 조사한 후 총재 일을 해도 판사로서의 직무 수행에 지장이 없다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미국변호사협회는 랜디스의 행위가 ‘온당치 못한 외관’을 보였다는 이유로 제재를 결의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실체가 어떻든 외관상 의심스러운 행위는 그 자체로 사법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다.

워런 법원은 진보적 판결을 많이 낸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 연방대법원장을 임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진보 진영은 1968년에 꾀를 냈다. 얼 워런이 대법원장직을 사임하고 그를 이어 대법관 에이브 포터즈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자는 것이었다. 문제가 터졌다. 포터즈가 아메리카 대학교에서 받고 있던 강의료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원의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다음해에는 다시 포터즈가 어느 사업자에게 법률 조언을 해주고 2만달러의 사례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법무장관이 대법원장을 면담해 연방수사국의 조사 결과를 전달하자 이틀 후 포터즈는 사직했다. 대법관직마저도 놓친 것이다. 여기에도 문제는 포터즈의 행위가 실제로 위법하다는 것보다는 그런 외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후 워런이 사임하자 대법원장에 임명된 사람은 보수 성향의 워런 버거였다. 포터즈 사건은 ‘연방 사법부의 진보주의에 대한 조종(弔鐘)’으로 평가된다.

포터즈의 후임으로 지명된 클레멘트 헤인즈워드 판사도 다시 상원의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어느 공장에 관한 소송을 처리하면서, 그 공장에 자판기를 설치해 수익을 올리고 있던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서도 사건에서 회피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헤인즈워드는 청문회에서 내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실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온당치 못한 외관마저도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민들의 윤리적 기대치가 높아졌는데도, 그는 여기에 부응하지 못했다.

판사는 안정과 절제의 표상이다. 미국의 사이먼 리프킨드 판사는 이렇게 썼다. “별난 행동은 판사에게 금기사항이다. 폴로 경기장에서 폴로를 지나치게 잘 치거나, 경마장의 매표구에서 50달러짜리 마권을 사는 모습이 너무 자주 보여서는 안된다. 판사의 아내가 동네에서 제일 먼저 토플리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사생활이 이 정도이니, 돈벌이에 이르면 바짝 주의해야 한다. 판사의 경제활동이 직무와 관련이 있는 듯한 모습, 즉 온당치 못한 외관조차도 보일 수 없다. 이것을 ‘황후의 처세도(Caesar’s wife doctrine)’라고 한다. 황제는 높은 사람인 만큼 자신은 물론 그 아내도 의심스러워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디 판사뿐이랴. 모든 공직자가 그렇다. “당신들이 문제 삼은 그 투자와 내 직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서 나는 억울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한 주식 투자라서, 아내가 건물을 샀기에, 어머니가 위장전입을 한 것이어서 나는 몰랐다고 해도, 양해를 받기 어렵다.

돈벌이만 그런 게 아니다. 판사실에 변호사가 드나들지 못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아무리 사건 부탁을 하러 들어갔던 게 아니라고 해도, 사건이 해당 재판부에 걸려 있는 이상, 아무도 그 말의 진실성을 믿어 주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온당치 못한 일은 피한다는 ‘피지(避止) 원칙’은 법조윤리에서 상식이다. ‘이해충돌’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법관윤리강령에도 이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모든 공직 후보자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사회가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기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공직자가 인식하는 윤리칙의 수준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게 아닌데 왜들 그렇게 날 억울하게 만드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인간적으로는 안되었지만, 공직의 염결성이 가지는 엄중함을 생각하면 그런 항변은 수긍하기 어렵다.

배밭은 배가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니 까마귀일랑 아예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왜 하필 그때 떨어졌느냐고 배를 나무라거나 내 날갯짓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해도 잘 믿어 주지 않는다. 친척이 목포에 무슨 점포를 샀다는 어느 국회의원이 곤욕을 치르면서 사실이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의혹의 기초가 된 사실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기초사실이 외견상 해당 인물의 직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그것이 바로 이해충돌 상황이다.

억울한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공직자의 경제활동이 직무와의 관계에서 실체가 어떻든 의심스러운 외관을 띠면 안된다는 것,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집권세력의 앞날은 순탄치 않다.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주식 투자가 문제되자 “이제 진보 진영은 도덕적 고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한 어느 보수 성향 언론인의 주장을 가볍게 들어선 안된다. 워런 법원의 진보주의에 대한 조종은 온당치 못한 외관이 일으킨 도덕적 의혹으로 울렸음을 상기하라. 억울한가? 세상은 변했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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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하루가 가을날 열흘 맞잡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봄은 한 해 농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농업·농촌이 분주해지는 시기다. 이맘때 농촌에 가면 농업인들은 볍씨 준비, 논둑과 밭고랑 정비, 밑거름 작업 등으로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렇게 바쁜 농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쁜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다.

지난 4월16일부터 20일까지 4박5일간 전국 팔도의 영농현장을 다녔다. 쌀 전업농가, 과수농가, 축산농가 등 여러 농가를 방문해 농업인들과 대화를 했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동안 열심히 해왔지만 여전히 농협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농민들 곁에서 함께하는 게 농협의 존재가치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현장에서 만난 농업인들은 영농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농협이 적극적으로 나서 해소해달라고 요구했다. 축산농가는 미허가 축사, 태양광농가는 인·허가 규제, 과수농가는 수급 조절 등 농가마다 나름의 고충이 있었지만, 모든 농가가 공통으로 토로한 어려움은 일손 부족이었다. 농촌경제연구원이 2018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농업인이 꼽은 가장 심각한 경영 위협요소가 일손 부족(49.5%)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현장의 어려움과 여론조사 결과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일손 부족 문제는 무엇보다 기계화가 선행되고 기계로 대신할 수 없는 부분에는 체계적인 인력 지원방안이 마련되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농 기계화는 1979년 시작해 8차까지 이어진 정부의 ‘농업 기계화 계획’과 농협이 실시하는 농기계은행 사업을 통해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논농사의 경우 기계화율이 98.4%에 이를 정도다. 하지만 밭농사의 경우 대상 작물이 200종이 넘고 영세 소농은 농기계를 보유하기 쉽지 않아 기계화가 60.2%에 불과한 실정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올해 밭농사용 농기계를 장기임대하는 주산지 일관 기계화 사업에 440억원을 투입해 기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농협도 이에 맞춰 올해 1200억원의 자금과 170억원의 예산을 농기계은행 사업에 추가 투입해 전국 농경지의 17.6%인 농작업 대행면적을 4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농작업 지원을 위한 인력 중개에도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자체와 협력해 농작업 숙련자로 구성된 영농작업반을 지난해 72개에서 100개로 확충하는 등 54만명 이상의 유상인력을 중개할 예정이다. 아울러 시민사회단체, 기업체 등과의 협력을 통해 자원봉사 인력도 31만명 이상 소개하여 농촌에 힘을 보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 4월17일에는 전국 157개 시·군에서 자원봉사자 3만명이 참여한 영농지원 발대식을 개최해 전 국민에게 영농기 도래를 알리고, 일손돕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농사일에 서투른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전문가에 비해 생산성은 다소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어 농업인에게 몇 배의 가치로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자원봉사에 참여한 이들도 단순한 일손 지원을 넘어 봉사의 기쁨과 함께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넉넉한 인심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올봄 잠시 짬을 내어 농촌에서 힐링하기를 도시민들에게 권해 본다.

<김병원 | 농협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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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오대산 북쪽 자락의 한 오지마을을 다녀왔는데 이름이 부연동이라 했다. 솥 부(釜)에 못 연(淵)자를 쓴 마을이다. 바야흐로 산천초목이 새의 혀 같은 이파리를 밀어내는 계절. 1000m 고봉을 사방으로 끼고 실낱같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부연마을 가는 길은 수묵담채화가 수묵채색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산색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신세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때 인솔자가 “여긴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만큼 깊고 외부와 단절된 마을이다. 과연 얼마나 깊을까. 가도 가도 길은 계속됐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무렵 눈앞이 확 트이면서 넓은 분지가 나타났는데 바로 부연마을이었다.

가옥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펜션 같은 현대식 건물도 드문드문 보였고 그 외엔 온통 두릅나무 밭이었다. 마을 옆으론 계곡이 흘렀는데 바로 남대천 상류다. 연어도 아닌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찾아 물을 건너다니면서 서너 시간 꽃구경, 나무 구경을 했다. 마을 입구부터 지천으로 피어난 산괴불주머니를 시작으로 피나물, 바람꽃, 제비꽃 등 온갖 꽃이 외지인을 맞아주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식생이 호화로웠고 크게 자란 낙엽송이 빽빽하게 우거져서 봄인데도 밀림의 느낌을 주었다. 실컷 걷고 도시락을 까먹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참방일 때까지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시끄럽더니 눈앞에 큰 폭포가 나타났다. 그 밑으로 깊은 소가 있었다. 아, 저것이 부연(釜淵)이구나. 관광명소가 되고도 남을 풍채의 폭포를 독차지하고 보고 있으려니 선택받은 느낌에 행복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화전민 집터를 지나갔다. 이런 깊은 곳에서도 예전엔 사람이 밭을 갈아 먹고살았구나.

다시 차를 타고 양양 하조대로 나와 저녁을 먹을 때도 감흥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 산이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1984년에 김선풍 중앙대 교수 연구팀이 부연동 민속을 조사한 자료가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서 마을 주민에게 풍습, 민요, 민담 등을 채록한 것인데 나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다녀온 치에겐 천지개벽의 놀라운 정보가 가득했다. 

우선 “전쟁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이란 집은 다 불태워 너와집, 굴피집 등속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부연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500년 전부터였다. 워낙 오지인 데다 먹고살기 힘든 환경이니 집성촌은 못 이루고 대처에서 쫓겨난 이들이 숨어 들어오듯 해 정착하면서 각성바지 마을을 이루었다. 쌀과 감자농사를 많이 지었고 자생하는 당귀를 캐다가 팔기도 했다. 주문진으로 장을 다녔고, 민속 명절 때는 농악대가 원정을 와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호랑이를 잡아 강릉 원님에게 바친 일도 있었다. 마을의 빈집에 호랑이가 들어왔는데 마을에서 창질을 가장 잘하는 이가 부엌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들보로 나오는 걸 찔러 잡았다고 한다. 혹시나 벌을 받을까 조마조마하며 갖다 바쳤다. 

가장 궁금했던 건 화전민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집터만 남겨놓고 그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을 사람의 기억엔 어떤 시기에 몽땅 철거가 됐다고 했는데 진술이 분명치 않아 다른 자료를 뒤져보니 1968년에 화전정리법이 공포되어 정부가 강원도 산간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그 언저리쯤부터 산이 텅 비기 시작한 것이다. 봄이면 산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고 옥수수 알갱이를 곤드레와 섞어 개밥처럼 끓여 먹는 게 이들의 주식이었다. 다만, 그날 산에서 본 군데군데 쌓인 돌무더기는 화전민의 흔적이 아니었다. 심마니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이었다. 오대산의 산신은 여신이다.

그 외 부연마을에 접어들 때 봤던 장군송은 금강송 군락지로 유명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데 기념수로 관리되기 전엔 단오만 되면 그 나무에 그네를 걸어 탔다고 한다. 집집마다 양봉을 했는데 계곡 전체가 꽃밭이니 이는 당연한 일일 테고 유독 산괴불주머니가 마을을 둘러싸고 지천으로 핀 것도 번식을 잘하는 이 꽃이 양봉에 이용된 흔적일 것이다.

1984년 당시 김선풍 교수팀에 구술을 해준 마을의 백남혁 어른은 당시 50세였는데 20여년 뒤인 2005년의 언론 기사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70세 노인이 된 그는 자식을 다 키워 내보내고 부인과 단둘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당시 기사에서 장작을 패며 겨울을 준비하던 백 노인은 지금, 살아계신 것일까. 한 번도 뵙지 못한 그분의 안부가 궁금하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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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꼰대가 되지 않을까요?” 강연을 가면 자주 듣는 말이다. 나는 저서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늙은 꼰대와 자유로움에 취해 의미 있는 조언조차 무시하는 젊은 꼰대를 함께 다룬 바 있는데, 인권감수성이 높아진 사회의 공기를 의식해서인지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음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으니 꼰대가 되지 않는 법을 어찌 말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상처를 받거나 주는 경우를 모으면 어떤 사람이 이상한지는 어렴풋이 그릴 수 있다. 

꼰대란 극도의 자기중심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사람인데, 최근에는 막무가내로 나답게만 살라는 식의 가치관이 자존감을 지키는 법이랍시고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정글 같은 경쟁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에 구속받지 않고 ‘나’를 오롯이 존중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솔직히 그런 성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히려 자신의 장점을 지나치게 포장하여 다른 단점을 보지 못하는 외골수, 그래서 주변의 합당한 비판을 비난으로 이해하여 날 선 대응으로 인간관계에 무리수를 두는 사람이 훨씬 많다. 외부와의 생산적 교류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사람은 자기 생각과 비슷한 무리들만을 만나 그릇된 신념을 견고한 양심으로 만들어 행동하며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조차 모른다.

이들은 거시와 미시 사이의 균형 감각이 없다. 거시는 사회의 역사와 문화라는 사회구조를 뜻하며 미시는 그 울타리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특정한 가치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말한다. 아무리 사소한 생활습관도 사회의 물줄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 관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보수꼰대라고 불린다. 살다 보니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특권을 자연적 질서로 이해하면서 불평등을 부정한다. 이런 부모, 교사, 선배나 상사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힘들어한다. 

하지만 거시에만 몰두해 일상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수순을 깡그리 무시하는 진보꼰대들도 주변인들을 괴롭힌다. 이들은 일상생활 속에 등장하는 해프닝조차 구조악의 표출이라면서 폭력, 권력, 기득권 등의 무서운 단어를 오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발가벗긴다. 사회운동의 당위에 지나치게 집착해 적을 설득시키기는커녕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던 아군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에게 공격받은 이들은 상처를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또한 꼰대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를 제대로 응용하지 못한다. 점의 관계는 느리다. 의사전달이 우회적이기 때문이다. 눈치 때문이 아니라, 사람 각기의 상황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의 관계는 단호하다. 메시지가 파이프에 연결된 물처럼 일사천리로 타인에게 전달된다.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폭력을 없애고 적폐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강한 다짐과 뒤돌아보지 않는 빠른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무작정 선을 들이대면 당혹스럽다. 누구나 상처가 있기에 누구의 상처도 조심스레 다뤄지는 신중함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만이 가시화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그렇다. 반대로 반드시 선의 관계가 필요할 때 점의 모호함을 버리지 못하면 문제의 본질이 덮어진다. 반드시 가해자를 가려내고 재발을 방지해야 하는 순간에,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주변 사정을 다 고려해야 한다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된다.

우리들은 꼰대에 저항하면서도, 다른 영역에서 자신이 꼰대임을 쉽게 잊는다. 자신의 장점에 심취해 단점을 망각하면 관계의 균형감각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자신이 꼰대가 아닐 거라는 확신과 결코 그렇게 되지 않겠단 지나친 다짐보다, 꼰대일 수 있다는 자책을 성찰로 발전시켜 나갈 때 주변 사람들의 불편이 경감되지 않겠는가.

<오찬호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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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소(한경연)는 2013년 4월25일 ‘바른 용어를 통한 사회통합의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핵심 주장은 ‘사회통합을 위한 바른용어’라는 연구서로도 나왔다. “시장과 정부를 보는 삐뚤어진 시각을 규명하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1889~1976) 말까지 인용한 보고서는 사뭇 비장하다.

이 보고서가 바른용어 1순위에 올린 게 ‘시장경제’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소득격차는 시장경제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의도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과당경쟁, 목따기 경쟁, 먹고 먹히는 경쟁 같은 용어는) 시장경제의 속성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그것을 ‘자유경쟁’이라는 용어로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로 ‘양극화’의 바른용어는 ‘소득격차’다.

시장경제는 어떤 ‘비뚤어진 용어’를 대체할까? 바로 자본주의다. 전경련과 한경연의 눈엔 ‘정글자본주의’ 같은 말이 뒤틀렸다. 그래서 나온 바른용어가 ‘상생경제’다. 완곡어법으로 점철된 이 보고서의 압권이다.

시장경제라는 말은 범개혁 진영도 자주 쓴다. 한 예로, 더불어민주당의 논평·브리핑을 검색해보면 시장경제가 자본주의보다 두 배가량 많이 나온다. 부정의 맥락에서 쓴 게 아니다. 전경련과 한경연 뜻대로 시장경제란 용어는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룬 셈이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정명(正名)? 헌법재판관 후보로 나온 이미선의 주식 과다 소유·거래가 논란이 됐을 때 자본주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식거래 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따라가면 자본주의 시장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이해찬 민주당 대표) 이다. 이미선의 남편인 변호사 오충진은 “주식 많다고 까는 야당 놈들은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망각하는 무뇌아들”이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그렇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국가다. 이미선을 둘러싼 정쟁과 논란에서 건질 게 하나 있다면 현 지배 집단에서 나온 ‘자본주의’라는 말이다. 뜻밖에 나온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정명에서 다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이미선을 옹호하는 말에서 나타났듯,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한다. 여기에 진정성이니 선의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투자’라는 게 그렇다. 시민들은 종종 악덕 기업을 대상으로 불매 운동을 벌이곤 하지만,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았다고? 한국 자본주의(시장경제) 발전을 위해 이 기업엔 투자하지 않아야겠군’이라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은 거의 없다. 이미선과 오충진이 주식을 산 이테크건설이 그렇다. 2017년 당시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이 9월 낸 자료를 보면, 이 회사의 장애인 고용률은 1% 미만이다. SK케미칼 임원이 가습기 살균제 흡입 독성 은폐 혐의로 구속된 다음날도 이 회사 주식은 전일 대비 0.14% 올랐다. ‘바이오중유 연료 상용화’ 기대감 때문에 보합세를 유지한 것이라고 한다. 

지난 10일 경기 수원의 한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노동자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가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착한’ 자본주의, ‘나쁜’ 자본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니, 정의로운 사회니, 공정한 사회니 하는 아름다운 수식의 말과 선언의 말로 쉬이 덮을 수 없는 게 자본주의 문제다. 촛불집회와 정권교체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다. 좌파니 우파니, 빨갱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겉으로 드러난 대립 밑에 깔린 공유점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 사수와 옹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양분한 세력이 ‘친자본주의’를 공통분모로 한다는 사실은 종종 망각된다.

20대 일용직 노동자 김태규가 지난 10일 아파트형 공장 신축 건설현장에서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해 숨졌다. 안전화 대신 운동화를 신은 채 발견됐다. 시공사는 일용직 노동자라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전화를 아낀 비용은 누군가의 이윤으로, 자본으로 축적됐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4개 하위법령 개정안의 후퇴는 다시 누군가의 이윤으로 돌아갈 것이다. 

경향신문은 최근 김태규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대표)과 인터뷰했다. 그는 매년 산재 발생 추이를 보면 일정한 흐름이 나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건설경기가 좋으면 건설업에서 그만큼 사망자가 늘고, 침체되면 사망자가 줄어듭니다. 이게 한국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 문장 ‘사망자’ 자리에 ‘이윤’을 넣어보라.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가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나는 게 산업재해다.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날이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희생된 수많은 김태규, 김용균의 명복을 빈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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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로 호랑무늬 깃을 펼치며


대지를 움켜쥔


나비가 날고 있다


대양 너머 저 멀고 먼 산언덕에서


작은 들꽃 무리들이


피었다


지면서


비바람 헤치고 찾아올 나비를 기다리고


구름 뒤의 달은


나뭇잎에 매달려 쪽잠 자며


고치에서 부활하는 영혼을 지켜보고 있다


최동호(194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제왕나비는 캐나다 남부, 미국 대륙, 중앙아메리카에 주로 사는 왕나비류의 하나로 꽃가루 매개종이다. 아메리카의 제왕나비는 매년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에 캐나다를 출발해 장장 5000㎞를 날아가서 멕시코의 고산지대에서 겨울을 난다. 숲의 나무에는 수천만 마리의 나비들이 날아와 열매처럼 매달리는데, 이 시기를 사람들은 망자(亡子)를 기리는 기간으로 여긴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나비와 함께 찾아온다고 믿는 것이다. 저편으로부터 이쪽으로 멀고 먼 거리를 날아오는, 막막하게 넓고 깊은 바다를 건너 날아오는 놀랍고 신기한 이 일은 관계의 이끌림과 맺음, 그리고 모든 생명 존재들 사이의 숭고한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난관과 장애를 넘어서서 이어지는, 영속적인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망자의 영혼인 듯 나비가 날아와, 신생의 알을 낳고 스스로는 죽음을 맞는 이 일은 강물처럼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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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국가수반은 올해도 어김없이 싱가포르 총리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의 조사(상위 20개국 공개)에 따르면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연봉은 161만달러(약 18억7000만원)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봉의 4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12배에 달했다. 리셴룽 총리 뒤는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56만8400달러), 스위스 윌리 마우러 대통령(48만3000달러), 트럼프 대통령(40만달러) 순으로 이었다. 2억2600만원의 연봉을 받는 문재인 대통령은 20위권 아래다. 국가수반의 연봉이 국력이나 경제규모와 비례하지는 않는 셈이다. 싱가포르 총리가 매년 연봉킹에 오르는 것은 리셴륭 총리의 아버지 리관유 전 총리가 마련한 독특한 급여체계 덕이다. 1994년 리관유 당시 총리는 각료의 연봉을 은행원·변호사·회계사 등 8개 전문직 평균 급여의 3분의 2가 되도록 정했다. 여기에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8% 이상 오르면 연봉의 4개월치를 보너스로 받는 성과급도 도입했다. 일하는 정부, 부패 없는 정부를 추동하자는 취지였다. 싱가포르가 모범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정부로 평가받는 한, 국가수반의 ‘최고 연봉’은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터이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왼쪽)·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의 연봉은 미국 주요 기업 CEO 평균 연봉의 3% 수준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연봉(36만9727달러)은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 연봉의 0.3%에 그친다. 모리타니의 압델 아지즈 대통령 연봉은 33만달러, GDP(국내총생산)가 모리타니의 2400배에 달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연봉은 그 10분의 1에도 못미친다. 이번 집계에서는 빠진 터키의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연봉이 무려 646억원에 달한다.

국가수반이라는 최고 ‘권좌’의 명예와 책임의 무게를 연봉액수로만 견준다는 건 턱없다. ‘사람은 밥값을 하고 소는 꼴값을 해야 한다’를 차용한다면, 연봉의 다과가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서 모름지기 밥값’을 하는지가 관건이다. 밥값 못하는 지도자에 대한 주권자의 분노와 자괴가 ‘박근혜 탄핵’을 불렀다. 만고의 진리다. 실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평안히 잘살게 해준다면 대통령 연봉이 아무리 많은들 문제되겠는가.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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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은 주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갖고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결사 저지를 다짐했다. 당 지도부와 의원 등 참석자들은 두 손에 ‘독재타도, 헌법수호’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단상에 오른 의원들은 “김일성 치하” “수령 국가” 등 색깔론을 다시 꺼내 들었고, 행진 대열을 따르는 참가자들은 “문재인 빨갱이” “개XX” 등 욕설을 내뱉었다. 한국당은 이날 집회를 위해 전국 253개 당협에 당원 총동원령을 내렸다.

한국당은 전날까지 연이틀간 국회에서 감금과 육탄전, 드러눕기, 집기 파손 등 온갖 폭력적 수단으로 법안 접수를 막고 회의장을 봉쇄했다. 민주적인 법안 처리 절차를 폭력으로 짓밟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날엔 장외에서 태연히 헌법을 지키겠다고 외치니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다. 황교안 대표는 국회를 무법천지로 만든 의원 18명이 검찰에 고발된 데 대해 “고소·고발된 의원들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도 했다. 법무장관 출신의 법치의식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황 대표는 과거 장관, 총리 시절 걸핏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입장이 달라졌다고 어제의 불법행위가 오늘은 헌법수호행위로 둔갑할 수는 없다. 마치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라도 된 듯한 행세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8일 회견에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좌파독재 플랜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한국당은 선거제·검찰개혁 법안 저지를 마치 자유와 민주를 위한 투쟁인 양 목청을 높이지만 사실도 아니고 설득력도 없다. 선거제 개혁만 해도 한국당은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을 추진하자 ‘비례대표 폐지’라는 반헌법적인 안을 불쑥 내놓았다. 공수처 설치도 이렇다 할 대안 없이 시간끌기로 버텨왔다. 그러면서 이를 막는 게 자유민주주의 수호라고 한다. 승자독식의 양당 체제를 완화하는 선거제 개편과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공수처 설치가 어떻게 좌파 독재이고, 헌법 파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막가파식 극한 투쟁을 좀체 접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당의 국회 봉쇄는 의회주의,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행태다. 그러나 한국당은 사생결단식 투쟁을 이어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민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민들의 입법 요구도 무시하고 있다. 이런 정치 현실에 시민들은 화가 나고 지친다.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당은 투쟁에 앞서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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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2019년도 제8회 변호사시험(변시) 합격자 1691명을 지난 26일 발표했다. 합격률은 50.78%로 지난해 49.35%보다 소폭 상승했다. 계속 떨어지던 합격률이 반등한 것은 처음이다. 법무부는 “지속적인 합격률 하락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충실한 교육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봉책으로 변시와 로스쿨 제도를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기는 어렵다. 2009년 3월 문을 연 로스쿨이 10년을 맞은 만큼, 바람직한 법률가 양성 체제를 위한 근본적 점검이 필요한 때다.

변시 합격자 기준은 사실상의 ‘정원제’다. 법무부는 2010년부터 ‘로스쿨 입학정원(약 2000명)의 75%(1500명) 이상’이라는 기준을 적용해왔다. 합격률은 제1회 시험 때 87.1%를 기록했으나 회차가 거듭될수록 하락해왔다. 불합격에 따른 재응시자의 누적 때문이다. 합격선이 계속 높아지면서 선배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고도 탈락하는 후배들이 생겨났다. ‘사시 낭인’ 대신 ‘변시 낭인’이 양산되고, 로스쿨 교육은 변시 합격을 위한 기술 습득에 매몰되면서 황폐화하기에 이르렀다. 로스쿨 교수·학생들은 변시 합격률을 높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면,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라며 외려 합격자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앞에서 대한변협(왼쪽)과 로스쿨 재학생·졸업생 등으로 구성된 ‘법조문턱낮추기실천연대’가 동시에 집회를 열고 있다. 이찬희 대한변협 회장이 발언하는 동안 로스쿨 학생들은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변시 합격자 결정 문제는 이해관계자들의 밥그릇 다툼 차원으로 다뤄져선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법조인의 자격’에 대한 시민적 합의다. 다양한 판례를 분석·비판하는 대신 최신 판례만 달달 외우고, 인권법·국제법 등 특성화 과목을 외면한 채 변시 예상문제만 풀던 사람들이 변호사 자격을 얻는 일이 공동체를 위해 바람직한가. 이는 복잡다기한 법률 수요에 호응하기 위해 다양한 배경·지식·경험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하고자 도입된 로스쿨 제도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변시의 자격시험화를 촉구하는 입장을 각각 발표했다. 우리는 이들의 견해에 공감한다. 법조인의 다양성과 전문성 제고를 위해 변시를 자격시험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정부는 법조계·학계·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논의기구를 구성해 시민에게 보다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을 모색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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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과 숨진 송명빈 전 마커그룹 대표의 ‘도 넘은 갑질’은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은 고 조양호 전 회장의 경영권 박탈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시민사회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 1년간 직장 내 갑질 피해 제보를 받은 결과, 2만2810건으로 하루 평균 62건에 달했다. 직장갑질119는 ‘15대 갑질 40개 사례’를 추려 공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기가 찬다. “실수 한 번에 손가락 하나씩을 자르겠다”, (화장실 가는 직원에게) “내가 일어서지 말랬지!”, (술 따르라는 지시를 거부한 여성 직원에게 멱살까지 잡고는) “죽고 싶냐”고 말하는 상사 등 하나같이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폭언과 모욕, 폭행 사례들이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약속한 직장인 관련 공약 70개가 이행됐다면 직장 내 괴롭힘은 사라졌을 것”이라며 “현실은 실제 효력이 없는 10여개만 지켜졌다”고 밝혔다. 정부는 약속한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근무시간 외 카톡 금지’ 등을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직장갑질 관련 일러스트 (출처:경향신문DB)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등)’ 보완도 시급하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보면, 오는 7월16일부터 10인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방지책을 의무적으로 명시해야 하고, 신고를 받은 사업주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개정안에 괴롭힘 자체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다. 익명 신고자에 대한 신원 보장 방안도 없다. 대표이사·사장의 갑질에 대해 감사가 이사회를 소집해 조사·징계토록 한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한 해 300만명에 이르는 자발적 퇴사자 중 적지 않은 사람이 ‘갑질’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는데도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정부가 내놓은 취업규칙 표준안에 최근 사회문제가 된 ‘태움 문화’나 ‘회식·장기자랑 강요’ ‘불필요한 야근 강요’ 등도 빠져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를 보면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최근 5년간 폭력이나 따돌림, 강요 등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직장 내 갑질은 ‘적폐’다. 이를 뿌리 뽑아야 할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면 바꿔야 한다. 또 노사가 협의를 통해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직장 내 괴롭힘’을 명문화하고 강행토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 4개 핵심협약 비준이나 10%대에 불과한 노조가입률 제고 등 노동자 권리도 바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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