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단식 광대>에서 한때 유행했던 단식 공연에 대해 묘사한다. 대중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갔기에 굶주린 광대의 공연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굶주림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북한에 스위스 정부가 최근 500만달러(약 59억원)를 지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 중 가장 큰 규모다. 한국이 갈팡질팡할 때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인도적 지원의 원칙을 지키면서 묵묵히 북한을 지원해왔다.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EU)이 2006년부터 중단 없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정치와 무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정세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이슈에 상관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 북한 주민을 돕는 데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린이, 임산부, 노인, 장애인 등 실질적 수혜자인 취약계층을 중점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사업 목표를 선정할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수치를 근간으로 하며, 국제기구와 함께 북한 내 수요와 우선순위를 분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퍼주기 논란’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그동안 사업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EU는 평양에 사무소를 둔 자국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식량, 영양, 보건, 식수 분야의 국제개발 전문가들이 사업을 진행해 왔다. 정기적이고 전문적인 모니터링과 평가를 통해 사업의 질을 높여 왔기에 효과는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세번 째로, 금세기 가장 어려운 제재 상황에서도 국제사회가 합의한 규칙을 지키며 인도적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제재 예외를 유엔 제재위원회에 요청하기 위해서는 제반 시스템과 행정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국이 역량이 없어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하면서 전문성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북한에 식량 위기가 왔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기아 위험 경고는 수년 전부터 있었다. 유엔에서도 ‘잊혀진 위기 국가(Forgotten Crisis Country)’로 북한을 선정했을 정도다. 컨선월드와이드와 세계기아원조가 작년 10월 발표한 ‘2018년 세계기아지수’에서 북한의 기아 위험 수준은 11위였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약 40%가 만성 영양실조의 지표인 ‘발육 부진’에 해당했다. 나이지리아(17위)와 모잠비크(18위)보다 심각했다. 기아가 서서히 북한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이달 초 북한 식량 생산이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가뭄 탓에 극심한 보릿고개를 마주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외신은 북한의 일일 배급량이 570g에서 300g으로 줄었다고 알렸다. 주민들이 300g짜리 햇반 한 개를 긴 하루에 나누어 먹고 있는 셈이다. 

모든 데이터와 수치가 최악의 식량사정과 영양 위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북한의 식량 상황이 정말 나쁜지, 지원해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TV나 동영상에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되어버린 ‘먹방’은 이제 영어로도 ‘Mukbang’이라고 할 정도이니, 한국 사회에서 굶주림은 가장 재미없는 콘텐츠일 게다. 동시대, 같은 시간에 굶주린 배를 움켜 잡고 바닥을 기며 스스로 소멸되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에게 줄 관심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인도적 지원을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여론에 기대어 결정하려고 한다.

인도주의는 북한이라는 이슈를 넘어 인류의 공존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새겨야 할 가치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굶주림에 쓰러져 있는 북한에 몇 년째 도와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유럽과 국제사회는 묵묵히 북한을 돕고 있다. 당신이라면 누구의 손을 잡겠는가. 한국의 인도적 지원은 이미 늦었다. 더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준모 컨선월드와이드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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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과 정용이 입주해 있는 원룸 건물에는 외국인 노동자도 살고 있고, 공무원 시험 준비생도 거주하고 있고, 초등학생 남매를 둔 일가족도 주소지를 두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사람들은 환갑을 훌쩍 넘긴 독거노인들이었다. 

매일 빈 유모차를 밀고 나오는 할머니가 있었고, 복도에 퉤퉤, 아무렇지 않게 가래침을 뱉는 할아버지도 많았다. 여름밤, 늦게 퇴근해서 돌아오다 보면 비슷비슷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원룸 중앙 현관 앞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말없이 부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새벽 네 시 삼십 분 무렵 불이 켜지는 방은 여지없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방이었다. 

진만은 원룸 건물에 살고 있는 한 할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지냈다. 올해 일흔네 살이 된 황화수 할아버지였는데, 늘 알록달록한 추리닝을 입고 다녔다. 숱이 많은 흰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반들반들한 이마와 정수리, 거기에 항상 끼고 있는 흰 목장갑까지. 진만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부모 속 꽤나 썩였겠구나, 생각한 적은 있었다. 진만은 황화수 할아버지와 원룸 문고리를 고치다가 알게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과 정용이 사는 원룸은 그 흔한 도어록 잠금장치 없이 열쇠로 문을 잠그고 여는 구조였는데, 어느 날 문고리 안에 들어간 열쇠가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 힘을 준 것도 아니고, 맞지 않는 열쇠를 억지로 밀어 넣은 것도 아닌데, 마치 나무젓가락이 부러지듯 툭 그렇게 되어 버렸다. 진만은 난감한 심정이 되어 멀거니 문고리를 내려다보았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정용에게 갔다 올까,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을 거 같았다. 부러진 열쇠가 문고리 안에 있으니…. 진만은 원룸 건물 밖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워와 툭툭 그것으로 문고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문고리를 다 떼어내고 교체하는 게 빠를 거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문고리를 내리치고 있을 때, 문제의 황화수 할아버지가 복도에 나타났다. 황화수 할아버지는 가만히 진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곤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동드릴을 들고 다시 진만 앞에 나타났다.

“교체할 거지?”

황화수 할아버지는 전동드릴의 스크루를 갈아 끼우면서 물었다. 진만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만 원이야. 문고리값은 별도고.”

그날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화수 할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생활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었다. 원룸 건물뿐만 아니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문짝을 고쳐주거나 부러진 식탁 다리를 다시 이어주거나 망가진 센서 등을 손봐주는 일을 했다. 언제나 일의 착수가 먼저였고, 돈은 그 후에 받았다. 황화수 할아버지는 일흔넷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팔뚝 위엔 힘줄이 선명했다.

하지만 황화수 할아버지의 진짜 정체는 다른 데 있었다. 진만은 그것을 불과 며칠 전에 알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원룸 건물로 들어서는 진만을 황화수 할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자네, 지금 바쁜가?”

황화수 할아버지는 전동드릴을 들고 나타났을 때와는 다르게 어쩐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바쁘지 않으면 이번엔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진만은 잠시 망설였다. 바쁘진 않았지만 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또 같은 원룸 건물에 살면서 계속 얼굴을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인데…. 진만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진만은 황화수 할아버지를 따라 302호로 갔다. 그곳이 황화수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방이었다.

“이건 자네만 알고 있게.”

황화수 할아버지는 현관에 길게 드리워진 암막 커튼을 걷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막 커튼을 걷자 드러난 황화수 할아버지의 방 한가운데엔 원목 탁자와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마이크와 조명 장치까지.

“사실 나 유튜버야. 크리에이터지.”

황화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옷장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이내 스님들이나 입는 장삼으로 갈아입었다. 

‘화수 거사의 정국진단’

그것이 황화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라고 했다. 장삼으로 갈아입은 황화수 할아버지는 원목 탁자 뒤 의자에 앉았다. 탁자 옆에는 낡은 소형 오디오가 한 대 있었는데, 전원을 넣자 ‘반야심경’이 낮게 흘러나왔다.

그날, 진만은 황화수 할아버지가 방송을 하는 내내 전선으로만 이어진 백열등을 들고 스마트폰 바로 뒤에 서 있어야만 했다. 오늘 내로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조명 장치가 갑자기 말썽을 부려 급하게 부탁을 한 것이라고 했다. 황화수 할아버지는 진만에게 자신의 흰 목장갑을 벗어주었다.

황화수 할아버지는, 아니 화수 거사는 방송 내내 이런 식의 말을 했다.

“오월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달이지요.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고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 법인데, 그런데도 오월은 항상 같은 고통을 우리 중생에게 안겨주는 달이기도 합니다. 바로 종합소득세를 내야 하는 달이지요. 이곳저곳에서 우리 중생들이 세금 폭탄을 맞고 신음을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이게 다!”

화수 거사는 계속 원목 탁자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면서 말했다. 그 때문에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반야심경’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화수 거사는 한 시간 가까이 계속 그렇게 화를 내다가 마지막 멘트를 했다.

“우주 삼라만상 어느 것 하나도 관계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중생들이여, 좋아요와 구독은 필수라는 거, 그거 잊지 마시길 바라옵나이다. 나무관세음보살.”

화수 거사는 스마트폰을 보며 합장을 했다. 진만은 백열등을 든 채 슬쩍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화수 거사의 정국진단’의 이전 방송 조회수는 ‘22’였다. 진만은 화수 거사가, 아니 황화수 할아버지가 어서 정신을 차리길, 마음속으로 슬쩍 바라보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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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심상찮다. 더위도 안 타고 자연에 순응하자 주의라 평생 에어컨 없이 살았는데 작년엔 쪄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한 대 들여놓고야 말았다. 올해는 5월 초부터 햇살이 예사롭지 않더니 첫 폭염주의보가 5월15일 광주에서 울렸다. 사상 최악의 폭염을 기록한 지난해에도 폭염주의보는 7월15일에 발령되었건만 올해는 두 달이나 빨라졌다. 그새 광주에는 두 번째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주, 조지아주 등도 섭씨 40도에 육박하여 역대 5월 기온의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 26일 일본 홋카이도 사로마에서도 기온이 39.5도까지 올라 역대 5월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미 국립기상청(NWS)을 포함, 국내외 과학자들도 올해 지구 평균기온이 역대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록이 한번 깨지면 우연이지만 매번 깨지면 변화가 된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대기에 계속 쌓이면서 이런 기상이변은 계속될 텐데,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이 지난 11일 1958년 관측 이후 처음으로 415ppm을 돌파하며 인류 역사상 최고점을 기록했다. CNN에 따르면 심지어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진화한 80만년 만에 가장 높은 CO2 농도란다. 이런 빅뉴스가 우리나라에서는 해외토픽처럼 스쳐지나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최근 3년간 이산화탄소 농도가 되레 증가했다는 것도 심각한 일이다. 세계 196개국이 2015년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에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하로 제한하자고 협약까지 했는데 말이다.  

폭염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전기요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전 통계에 따르면 작년 1인당 전기 소모량은 역대 최고기록을 세워 2000년과 비교해 무려 2배나 썼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보다 많이 썼고, 가격이 OECD 주요 국가 중 가장 싼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는 기후변화 문제가 그 심각성에 비해 왜 해결에 진전이 없는지 쉽고도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소위 기든스 패러독스라고 일컬어지는데, 지구온난화의 위험은 직접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기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위험이 다가온다 한들 우리 대부분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심리학 실험실에서 말하는 마시멜로 효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보통 미래에 얻을 수 있는 더 큰 보상보다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작은 보상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성된 시민의 자발성에만 기대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에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문제가 국내적이건 국제적이건 간에 언제나 정치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만 실질적인 대책이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정책과 제도와 그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사회적 여론 조성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책장을 덮으며 밖을 본다. 유럽에서는 녹색당이 약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떨까. 더운 날씨, 플라스틱 컵에 빨대를 든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SNS를 타고 플라스틱 대신 텀블러를 쓰겠다는 약속이 넘치고 있는데 실제로는 보기 어렵다. 작년 8월부터 커피숍에서 일회용기를 쓰지 못하도록 했지만 유리찻잔이 손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소비자가 원하니까 강제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법은 만들었지만 단속을 안 하기에 장식용 법처럼 보인다. 플라스틱 사용에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썼던 언론사 1층 커피숍에도 여전히 일회용만 출렁인다. 법을 만든 국회에서도 행사가 열리면 일회용품을 당연히 쓴다. 기후변화 같은 주제는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명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환경문제 해결은 ‘동사’로만 가능한데 말이다. 시민환경단체가 건널목이 되고 싶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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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텃밭은 참 이쁘다. 저마다의 모양, 색깔로 자라나는 것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다. 상추와 치커리, 겨자 같은 갖가지 쌈채소들은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쌈을 싸든 샐러드를 만들든 맛나다. 건강한 맛은 덤이다. 눈곱만 한 씨앗의 열무는 어느새 열무김치를 담글 만하고, 당근도 바질도 한 뼘 크기로 자리 잡았다. 완두콩과 감자도 영글어간다. 겨울을 이겨낸 부추는 잘라 먹어도 또 자라 이웃과 나눈다.

작물들이 잘 자라고, 싱싱한 먹거리가 많아지고, 마트에서 산 쌈채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맛나다고만 해서 텃밭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흙과 햇빛과 바람과 물로 씩씩하게 자라나는 그 생명의 신비로움이 아름다움의 고갱이다. 생명의 신비로움은 오감을 자극하고, 오감의 부활은 삶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땀 흘린 만큼 거둔다’ ‘땅이 스승’이라는 평범한 말에 담긴 수백가지의 뜻을 새삼 깨우친다. 씨앗을 뿌린 나 스스로가 기껍다. 그래서 텃밭은 더 이쁘다.

이맘때 땅은 농부의 손길 속에 생명의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남녘 곳곳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다. 이미 제주도의 양배추를 시작으로 해남의 겨울배추, 무안의 양파를 비롯해 대파·주키니호박 같은 농작물들이 밭에서 갈아엎어지고 있다. 월동 농사가 잘됐다고 기뻐해야 마땅한데 값이 폭락, 자식처럼 애써 키운 농작물을 농부들은 땅에 묻어버린다. 그 농부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산지폐기, 시장격리라는 이름 아래 폐기된 농작물이 벌써 수만t이다. 해마다 반복된다. 잔인한 일이다. 정부의 제대로 된 농정정책이 없어서다.

산지폐기 소식을 듣는 이맘때면 그가 생각난다. 누구보다 땀 흘려 일하지만 먹고살기 팍팍한 도시의 소외된 약자들을 만날 때도, 공동체 파괴로 각자도생하며 배려와 나눔이 없는 한국 사회의 일면을 볼 때도, 생태환경 파괴에 따른 공포스러운 현상이 나타날 때도 그가 떠오른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1928~1994). 무위당은 생명의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생태환경 속에서 사람과 만물이 공존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한 밥상을 맞으며 서로 연대해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꿈꿨다. 그리고 이 땅과 어울리는 생명·생태사상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몸소 실천했다.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공동체 정신에 기반한 지역민의 자립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협동(조합)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생산자와 소비자, 도시와 농촌 사람 모두를 위한 농산물 직거래인 한살림 운동도 펼쳤다.

협동조합운동·생명운동의 선구자만이 아니다. 1970년대엔 민주화운동의 한 구심점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민주주의를 꿈꾸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주에 모여들었다. ‘70년대는 원주, 80년대는 광주’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또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본’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되새김질할수록 깊은 뜻이 우러나는 서화작품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하다. ‘좁쌀 한 알’이라는 ‘일속자(一粟子)’란 호에서 보듯 자신을 한없이 낮춰 세상 모든 사람, 만물을 하느님으로 섬긴 수도자였다. 이 시대에 그리운 큰 어른이자 스승이 무위당이다. 지난 22일은 무위당의 25주기였다.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도 생겼다. 무위당의 삶과 사상을 담은 <장일순 평전>(두레)이 마침내 출간된 것이다. 그동안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좁쌀 한 알, 장일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등의 책은 있었으나 평전은 처음이다. ‘무위당의 아름다운 삶’이란 부제의 평전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무위당사람들’의 감수로 펴냈다. 무위당사람들은 무위당의 유지를 이어 공동체적 삶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현재 전국 12개 무위당학교와 연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삼웅 전 관장은 “무위당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따르는 사람이 줄을 선다. 왜일까?”라며 “지식인으로서 정직함, 불의에 맞선 장렬함,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라고 후기를 남겼다. 무위당과 인연 깊은 목판화가 이철수는 “무위당을 잘 모르던 이들은 <장일순 평전>으로 무위당의 삶과 사상의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지속 가능한 문명,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뭇 생명들이 모두 함께 잘 살아가는 상생과 공존, 공동체적 삶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대를 앞섰던 무위당의 사상과 삶을 살펴볼 만하다. 무위당의 지혜가 담긴 이 평전이 더 널리 온누리에 퍼지기를 기대한다.

<도재기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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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내면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 싸움은 어딘가를 엄숙하게 향하기도 하죠.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던 고상돈이나 모두가 꺼리던 소록도를 향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싸움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한 싸움도 합니다. 하얼빈 역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안중근의 손길, 1987년 종로 한 골목길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소녀의 눈물, 뻔히 질 것을 알며 부산으로 내려가던 한 정치인의 발길에는 아무 말 없어도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죠.

황교안도 진심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5월1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하며 교육을 통해 동성애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죠. 정체성 이슈인 동성애를 선택의 문제로 본 그릇된 시각보다 그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반대, 그의 싸움이 어디 있는가. 바로 성경입니다.

2017년 한 기독교 강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죠. 황교안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50년 동안 주일 예배를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입니다. 검사 시절에도 부임하는 곳마다 예배 모임을 만들어 ‘검찰 복음화’를 외쳤죠.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던 자기가 관직에 오른 것도, 총리 시절 가뭄을 극복한 것도, 법안 통과도 예수 덕이라며 자기 믿음을 자랑했다죠.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보는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한 절을 찾은 황교안은 합장도, 예법에 따른 반배도, 의식 참여도 거부했죠. 내 신만 정당하고 그의 가르침 그대로, 온전히 따르며 세상과의 타협을 반대한다는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하죠.

어떤 종교건 근본주의가 활개를 칠 때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 왕가처럼 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데 쓰곤 하죠. 정부가 역할을 못하면 그 공백을 채우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그런 경우죠. 정책으로 승부가 안되니 종교를 동원해 표를 모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인도 모디 총리가 그랬고 미국의 공화당도 그랬습니다. 미국 공화당은 기독교 세력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낙태, 동성애 등 가치 이슈를 들고나와 보수 기독교 표를 쓸어 모았죠. 덕택에 공화당은 부자 배를 불리는 경제정책을 내면서도 가난한 다수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럴수록 성서의 외침을 더 크게 틀어댔죠. 대립과 불신은 커갔습니다. 극단적 정파성은 최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교활한 정치가 공화당 자기 발등마저 찍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에는 종교와 가치뿐 정책이 상관이 없죠. 그러다 보니 정책에 무지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이 활개를 칠 판을 깔아준 셈이 되었죠. 거기에 트럼프가 등장한 겁니다. 이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 공화당 주류를 다 삼켜버렸습니다. 하긴 공포정치와 전쟁도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종교의 폐해는 얌전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문제는 심각합니다.

어떤 종교를 따르고 그 믿음이 근본주의적일지 아닐지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교회가 아닌 공당의 대표라면 좀 생각해봐야겠죠. 황교안이, 자유한국당의 정책과 주장이 공익을 해치면서 자기 믿음만 따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대표직을 맡은 지 두세달 만에 근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듯한 황교안의 행보가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과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하는 것. 자기 신만 신이라는 환상과 좌파독재를 물리쳐야 한다는 환상. 과연 무관한 것일까요?

그냥 정치적 레토릭일 뿐 그의 종교적 신념과 아무 상관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고약한 길로 황교안은 향하고 있으니까요. 사상과 지역 갈등으로 찢긴 나라를 종교로 또 나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 없게 정화수 떠 놓고 간절히 기도라도 해야겠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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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요즈음 대한민국은 참으로 무미건조하다. 이런저런 자극적 사건은 연일 터져 나오지만, 촛불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이어받는 미래를 향한 사회적 동력과 다양한 지적 담론 및 논쟁, 실험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평화를 향한 남북관계의 진전이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새 남북관계도 ‘과거의 길’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호수가 고여서 서서히 부패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구호가 생겨날 정도로 대한민국은 여기저기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변화의 물결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체감한다. 

물론 방탄소년단의 K팝이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쾌거 등으로 대표되는 아직도 다이내믹한 한류가 있지만, 사실 이 분야도 우리를 흥분시킬 만한 신선하고 창의적인 거대한 활력과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밤하늘 가득한 구름을 벗어난 그나마 몇 개의 별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반, 우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인터넷과 디지털 벤처의 시대를 이끌었고, 우리의 문화를 세계화시키는 한류 창업가들이 있었다. 또한 지적으로도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꿈꾸는 이상과 포부가 있었으며, 북방정책, 민주화, 선진화, 정보화, 신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 경제민주화, 동아시아 공동체, 동북아 균형자 등과 같은 시대정신과 국가 비전을 담은 굵직굵직한 담론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적 자극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연결되는 미래지향적인 에너지로 분출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향한 에너지가 사라지고, 정지해 버린 대한민국을 놓고 나라의 주인은 누구이며, 이 땅의 주류는 누구이며,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지금의 경제적 파이를 누가 더 많이 떼어가야 하는가의 진영싸움, 파벌싸움만 난무하고 있다. 우물 밖으로 나가던 우리의 시야는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오고, 그 우물 속에서도 덧셈의 정치와 덧셈의 경쟁이 아니라 뺄셈의 정치와 뺄셈의 경쟁을 하고 있다. 나와 다르면 틀리고 나쁘다는 단일한 기준이 생기면서 아예 다름을 표현하지 못하는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 

물론 청산해야 할 과거와 적폐가 존재하지만, 미래 지향성이 없는 청산이 오랜 일상이 되어가면서 사회가 움츠러들고, 지식인도 공적인 장에서 입을 닫기 시작하였다. 그 부작용이 자극적 뉴스와 분석이 난무하는 비공인 언론공간인 유튜브의 세계다. 공인된 열린 공간에서 행해져야 할 지식인들의 건설적인 토론과 담론을 자극과 인기에 의존한 유튜버의 예능언론이 대체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상화된 적폐청산의 공포 분위기와 정의로움을 무오류와 전지전능으로 치환하려는 정치세력의 책임이 크다. 그 공포 분위기와 무오류의 정의로움은 미래와 다름을 토론하고 논쟁할 수 없는 닫힌 사회를 만들어 버린다. 

물론 닫힌 사회로의 흐름은 현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나 시끄러울 정도로 가장 열려 있었던 노무현 정부를 마지막으로 정의와 옳음과 의제를 독점한 권력들이 배제의 정치를 시작한 지는 꽤 되었다. 그 세력이 지금은 다시 적폐가 되었지만, 닫힌 사회를 다시 열라는 촛불의 요구를 지금의 진보정부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한편 현재 우리 사회를 열지 못하는 데에는 거대 야당의 책임 역시 크다. 이들도 미래의 적폐청산을 위하여 정치자본을 쌓아가고 있을 뿐 주권자 국민의 활기를 되살릴 상상력과 정책담론, 국가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카를 포퍼가 말했듯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열린 사회의 적들은 전체주의를 지향한다. 아무리 스스로 정의롭다 생각해도 그것이 무오류와 전지전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은 적폐청산과 함께 미래로 향하는 열린 민주주의 사회를 요구했다. 적폐를 청산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 무오류성을 인정한 것으로 동일시되면 안된다. 그걸 동일시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닫힌 사회의 친구들일 뿐이다. 민주세력은 닫힌 사회의 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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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을 놓고 노사 간 대립이 첨예화하고 있다. 노조는 31일 오전 10시에 열리는 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을 승인하는 주주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주주총회장을 점거하고 5일째 농성을 벌였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수천명은 농성장 안팎에서 연대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측은 주총을 강행하겠다는 방침이어서 노사 간 충돌 우려도 있다.  

현대중공업 법인 분할을 위한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30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조합원과 영남지역 노동자들이 주총장인 울산 동구 한마음회관 앞에서 법인 분할 중단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건물 출입문을 막고 농성 중인 이들은 주총 당일에도 사측의 진입을 원천봉쇄하기로 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지난 3월 대우조선해양 인수계획을 발표한 현대중공업은 합병 후 회사를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과 사업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물적분할하겠다며 31일 주총을 예고했다. 현대중공업은 대우조선 인수 이후 생산성 증대, 원가 절감 등을 위해 물적분할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물적분할은 대우조선의 최대주주인 산업은행과 협의한 사항이며 현대중공업의 2대주주인 국민연금도 찬성했다며 관철하겠다는 방침이다. 노조 측 반대는 확고하다. 회사가 분리되면 부채를 사업회사인 신설 현대중공업이 떠안아 임금삭감과 함께 구조조정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노조는 신설 사업회사로 단체협약이 승계되지 않고,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이 서울로 이전하면 지역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측은 담화문을 통해 임금이나 복지 등의 단체협약 승계를 노조에 약속했으며 인위적 구조조정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이 인수·합병 과정에서 추진하는 물적분할을 탓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사측이 노조의 우려를 불식시킬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조는 2017년 현대중공업을 4개 회사로 분할할 때 내건 ‘근로조건 유지’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여전히 회사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측은 노조 불신의 원인을 찾아 신뢰 회복에 적극 나서야 한다. 물적분할에 대한 울산 지역사회의 반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노조 역시 사측에 대한 무조건 반대보다는 대화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노사 모두 파국을 자초하는 치킨게임은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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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9일 열린 첫 정식 재판에서 재판거래와 법관사찰 등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런 공소장은 처음 봤다.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서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를 두고도 “모든 직무행위를 뒤져 뭔가 법에 어긋나는 게 없는지 찾기 위한 수사였다. 사찰이 있다면 이런 것이 사찰”이라고 비난했다. 함께 피고인석에 선 박병대 전 대법관도 “수사기록을 보니 많은 법관이 겁박당한 듯이 보였다”고 했다.

사법농단 의혹의 최정점에서 재판거래, 내부 법관 탄압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형사재판의 피고인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대법원장·대법관까지 지낸 법률가라면, 최소한 국가 형사사법 체계와 절차는 존중해야 하는 것이 도리다. 양 전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재판부가 구속영장을 발부함으로써 수감됐다. 기소된 이후 담당 재판부에 보석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앞서 검찰 수사에서도 신문받은 시간보다 신문 이후 조서 열람 시간이 훨씬 길 만큼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법관들이 겁박당했다’는 박 전 대법관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공범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현직 법관 중 검찰에서의 진술을 뒤집은 사례는 거의 없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은 검찰뿐 아니라 법원과 동료 법관들까지 모욕한 것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일말의 성찰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잔인한 수사”를 당했다고 했다. 쌍용차·KTX 해고노동자 가운데는 사법농단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 ‘잔인한 수사’를 말하기 전에 ‘잔인한 재판’부터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법농단 재판 피고인들은 모두 노련한 법률가들이다. 담당 재판부는 이들이 정당한 방어권 행사를 넘어 형사사법 절차를 지연·방해하려 할 경우 단호히 제동을 걸어야 한다. 첫 재판을 방청한 시민들은 ‘두눈 부릅’이라는 스티커를 옷에 붙이고 있었다. 이들뿐이 아니다. 온 나라 주권자가 사법농단 재판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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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9시쯤(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유람선과 대형 크루즈선이 충돌, 유람선에 타고 있던 여행객 등 한국인 26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침몰한 유람선 ‘허블레아니호’에는 관광객 30명과 여행사 직원 3명 등 한국인 33명과 헝가리인 승무원 2명 등 35명이 타고 있었다. 이 중 한국인 7명은 구조됐다. 7명은 숨졌고, 19명은 실종됐다. 사고가 난 유람선에는 30~60대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가족 전부가 숨지거나 실종된 경우도 있다. 71세 노인과 6세 어린이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안타까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보도에 따르면 사고는 허블레아니호가 귀항을 위해 항구에 들어서려는 순간 대형 크루즈선이 뒤에서 들이받으면서 발생했다. 추돌 직후 배가 뒤집혔고 이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아 여행객들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사고가 난 유람선에는 구명조끼 등 안전 장비가 없었고, 승객들은 튜브나 구명정에 대한 안내나 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구명조끼만 입었어도 상당수는 어이없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고 당시 다뉴브강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계속된 비 때문에 수위가 상승하면서 곳곳에는 소용돌이성 급류도 많았다. 그런데도 운항을 강행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설혹 여행객들이 운항을 원하더라도 여행사 측이 이를 말리거나, 안전에 만전을 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정확한 사고 경위를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헝가리 구조선이 29일 밤(현지시간) 한국인 관광객 33명과 현지인 2명 등 35명을 태운유람선이 침몰한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불을 밝힌 채 수색 작업을 펼치고 있다. 부다페스트 _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해외여행객 수는 2870만명에 달한다. 2014년 1608만명에서 79% 급증, 사실상 ‘전 국민 해외여행시대’에 진입했다. 해외여행객은 급증했으나 현지에서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나라마다 안전에 대한 기준이 다를 뿐 아니라 있다고 해도 무시되기 일쑤다. 외교부 자료를 보면, 해외여행 중 사건·사고는 지난해 2만100건으로 10년 전보다 2.7배 급증했다.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여행객도 해마다 100명가량이다. 특히 해외여행객의 절반이 이용하는 패키지 상품의 경우 여행객은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기상 악화 등을 이유로 일정을 취소하려면 여행사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행객은 동료 여행객들을 의식해 일정 취소를 강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여행사도 환불 등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일정조정을 꺼린다고 한다. 그러니 가기 싫어도 가야 하고, 힘들어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번에도 악천후 등 위험한 환경 속에서 유람선 운항이 강행됐고,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해외여행 안전망에 허점이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라며 “외교 채널과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구조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여야도 정쟁을 멈추고 한목소리로 실종자 구조에 총력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모처럼 정치권이 성숙한 모습을 보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부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신속대응팀 19명을 현지로 급파했다. 구조전문 심해 잠수요원들은 현지에서 실종자 수색과 사망자 인양 등 작업에 나선다. 정부는 단 한 명이라도 국민이 머나먼 타국에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구조와 수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슬픔에 빠진 유가족과 국민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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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지키는 일은 정부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다. 국회와 공공기관, 지자체, 시민단체 등 다양한 주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지난 28일 ‘장기미집행 공원 해소방안’에 관한 정부와 여당의 당정협의에서 나온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발언이다. 내년 7월 전국 1987곳 338.1㎢의 도시공원 부지가 일시에 사라질 수 있는 ‘도시공원 일몰’ 시점을 앞두고 정부가 “공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지난해 4월 처음 나온 대책에 빠져 있던 국공유지 일몰 유예 등 추가 대책이 나온 것은 긍정적이다. 그런데 정작 추가 대책을 기다려 온 지자체의 반응은 냉담하다. ‘전형적인 책임 전가와 면피’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핵심적인 정부 역할은 잘 안 보이고, 지자체로 하여금 공원 조성을 유도한다는 식의 대책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정부가 강한 의지만 표명하면서 각론에선 ‘손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심사가 아닌지 우려된다.

정부 대책을 보면 재정적으로는 당초 최대 50%를 지원하겠다던 지방채 발행 이자를 70%까지 늘려 지원하겠다는 게 전부다. 정부는 우선관리지역 부지 매입에 필요한 지방채 발행액을 2조4000억원으로 추산한다. 정부는 이번 대책으로 5년 동안 많아야 600억원만 지자체에 추가 지원하면 된다. 반면 지자체는 지방채와 자체 예산 4조3000억원 등 최소 6조7000억원의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 정부·지자체가 공히 열악한 지방재정을 공원 장기미집행의 주된 이유로 꼽아온 점을 감안하면 실효성 있는 대책으로 보기 어렵다. 국공유지도 마찬가지다. 국공유지를 아예 일몰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지만 정부는 일단 실효를 유예하며 폭탄을 뒤로 넘겼다.  

정부가 일부라도 국비 지원을 결정하고 국공유지를 일몰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면 도시공원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대부분 도로·철도 건설에 쓰이고 있는 교통에너지환경세 일부를 도시공원에 투자할 수도 있고, 10년, 20년간 장기 계획을 세우면 큰 부담 없이 조금씩 부지를 확보해 갈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공원 조성 성과를 평가지표에 반영하겠다며 지자체만 쥐어짜려 한다. 김 장관은 “추가 대책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책과 지원방안을 고민해 소중한 공원을 지켜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는 도시공원을 ‘도시의 허파’라며 미세먼지 저감효과까지 홍보했다. 빠듯하지만 아직 1년여의 시간이 있다. 김 장관의 말처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정부의 노력을 기대한다.

<이종섭  |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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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에서 천정(天正) 시대, 그러니까 서기 1573~1592년 사이에 나가사키로 처음 들어왔다. 중개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그 조리 방법은 이렇다. 달걀, 설탕, 밀가루, 꿀, 맥아당(조청), 우유 등을 섞어 뻑뻑한 반죽을 만들어 나무틀에 붓는다. 틀은 일본에서 구하기 쉬운 삼나무 계통 목재를 쓰면 그만이다. 반죽은 오븐에 넣고 구워야 한다. 번듯한 유럽식 오븐을 당장 만들기 어렵다면? 쓰던 아궁이 또는 화덕을 손보아 대류열을 가둘 공간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대단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원리를 파악해, 내가 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쓸모 있는 사물을 만들어 내는 솜씨 또는 그 결과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브리콜라주로 조리의 한 고비를 넘기면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 한 시간쯤 불 조절에 주의해 잘 구우면 맛난 과자가 완성된다.

눈치챈 독자도 있으리라. ‘카스테라(カステラ)’ 이야기다. 더 들어가 보자. 일본인은 자완무시(茶碗蒸し)를 익히 먹어왔다. 일식 달걀찜인 자완무시는 설탕과 다디단 요리술을 섬세하게 써 특유의 질감과 풍미를 구현한다. 남중국, 동남아시아, 유구(오키나와)와 이어진 무역 덕분에 쓰자고 하면 일본인에게 설탕이 없지 않았다. 이윽고 네덜란드와 영국이 정제당의 시대를 열자 일본인은 정제당에도 금세 적응했다. 이때 비정제당 경험은 유용한 참고서이자 훌륭한 조력자였다. 자완무시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카스테라에 또 다른 상상력을 빌려주었다. 자완무시의 맛과 조리의 설계에서 연역하면 이렇다. 카스테라란 밀가루 전분의 호화(糊化)가 낀 데다 설탕과 우유에서 비롯한 독특한 질감과 풍미까지 기대되는 새로운 자완무시이다. 대류열에 굽는다지만 반유동 상태의 반죽이 머금은 물기는 찌는 효과도 낸다. 틀에 쓴 나무는 물기를 붙들어주는 소재이다.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는 가운데 내 입맛의 기호와 공동체의 선택이 그다음 진화의 동력이 되었다.

맥아당, 꿀, 설탕을 섬세하게 매만진 끝에 구현한 쨍하면서 깊은 단맛, 우유와 벌꿀이 배가한 풍미, 찜의 여운이 있는 스펀지의 물성 등은 이베리아 ‘카스텔라(castela)’와는 다른 ‘카스테라’의 속성이고 개성이다. 16세기 이베리아(포르투갈-스페인)의 카스텔라를 시조라고 한다면 일본의 카스테라는 시조와 나란히 설 만한 중시조다. 일본 제과인들은 이베리아에서 유래해, 일본 제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꽃피어, 오늘날 동아시아 사람이 공유하는 카스테라를 일본 과자로 여긴다. 먹는 분야에서 ‘힙스터’를 자처하는 유럽 사람들에게도 카스테라는 일본 과자로 보인다. 일본풍 찻상과 함께라면 더하다. 카스테라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 꽃핀 구미풍의 양과자(洋菓子)가 아니라 일본의 전통 과자, 곧 화과자(和菓子) 동아리에 들어간다.

1718년에는 본격 제과서인 <어전과자비전초>가 등장한다. 여기에도 이베리아발 과자의 원리와 본질에 파고든 흔적이 역력하다. 달걀을 예민하게 대하고, 달걀 거품을 잘 쓰고, 대량의 설탕을 적절히 통제하는 데서 이베리아 및 유럽 제과의 특색을 발견한다. 낯선 재료인 밀가루와 낯선 기술인 제빵 또한 일본식으로 소화한다. 가령 술이나 술지게미를 써 반죽을 부풀린다는 제안도 흥미롭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옥수수술빵의 원리다. 상상력과 시도는 메이지 시대로 이어졌다. 문호 개방과 함께 폭발한 서양 제빵제과의 이입은 두 번째 도전과 도약의 계기였다. 

눈 돌려 오늘 내 나라를 바라본다. 슈니발렌, 벌집아이스크림, 대만카스테라, 뚱카롱, 흑당 음료 등등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유행이 명멸한다. 무엇이 의미 있는 시도이고 무엇은 유산되지 못할 우발적인 등퇴장인가? 무엇이 한국적 재해석이고 무엇은 열화복제인가? 열화복제라도 쌓기만 하면 유산이 될까? 아니 쌓은 게 있긴 한가? 운산조차 벅차다. 유행의 현황에 관한 중계보다, ‘뚱카롱은 한과다’와 같은 명제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관찰자의 착잡함부터 굳이 남긴다. 이 착잡함이 나와 내 동포에게 유산이 될 수 있을지조차 회의하면서.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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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는 건강에 아주 좋다. 토마토의 여러 좋은 성분 중 라이코펜이라는 식물의 이차대사산물은 아스타잔틴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천연 항산화제이다. 이차대사산물은 어떤 생물체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수적인 대사산물은 아니지만 성장이나 외부 유해균으로부터의 보호, 향을 내어 곤충 유혹, 그리고 다른 식물과 상호작용 등의 역할을 하는 화학물질을 말한다. 식물이 만드는 수많은 이차대사산물 중에는 라이코펜, 아스타잔틴과 같이 좋은 효과가 있는 것들이 많다 보니 이들을 함유한 건강보조제들이 많이 시판되고 있다. 단순히 건강보조용이 아니라 실제 치료용 의약품들도 식물 유래의 이차대사산물들과 그들의 유도체인 경우가 많이 있다. 해열제와 진통제로 널리 사용되는 아스피린의 화학명은 아세틸 살리실산인데 이는 오래전부터 해열제로 사용되었던 버드나무 껍질에 들어 있는 살리실산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바닐라 향과 같은 식품첨가제로 쓰이는 이차대사산물들도 있다. 이렇게 유용하고 다양한 이차대사산물들은 식물을 재배하거나 식물세포의 배양으로만 생산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대사공학을 통해 식물들이 생산하는 천연물들을 미생물이 생산하도록 만들고 이렇게 개발된 미생물의 발효로도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미생물에 의한 생산의 경우 식물과 같이 기후변화와 날씨, 토양의 질과 재배 인력 등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품질의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몇 가지 예를 보자. 포도 껍질에 많이 있는 폴리페놀계 물질인 레스베라트롤은 항암, 항염, 항노화, 심지어는 수명 연장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드시지는 않아야겠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적포도주를 많이 마시면 레스베라트롤을 많이 섭취하게 되어 오래 살게 될 것 같지만, 효과를 보기 위해 많은 양의 와인을 마시면 오히려 더 독이 된다. 따라서 생명공학자들은 효모를 대사공학적으로 개량해 레스베라트롤을 발효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병원에서 매우 중요한 진통제로 쓰이는 모르핀은 양귀비로부터 획득한다. 양귀비의 덜 익은 꼬투리를 긁어 상처 내서 채취한 유액을 말려 얻는 아편의 여러 알칼로이드 성분 중 하나가 모르핀이다. 2015년 캘리포니아공대의 크리스티나 스몰키 교수는 양귀비, 박테리아, 심지어는 쥐로부터 적절한 유전자들을 조합해 효모를 대사공학적으로 개량함으로써 모르핀 전구체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까지는 생산 농도가 아주 낮지만 효모의 추가 대사공학을 통해 성능을 향상시킴으로써 양귀비 경작을 하지 않고도 모르핀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고자 안세이아라는 회사를 창업해 기술을 개발 중이다. 모르핀을 화학적으로 조금만 변형하면,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핀에 있는 두 개의 수산기를 메톡시기로 치환하면, 소위 마약의 최고봉이라는 헤로인이 된다. 평소 잘 알고 있는 스몰키 교수이기에 이러한 마약 남용을 포함한 안전문제에 대해 물었더니, 그렇지 않아도 연방수사국(FBI)에서 매우 심각하게 감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2015년 중국의 투유유 박사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아티미시닌은 말라리아 치료제인데 개똥쑥 등의 식물에서 아주 미량 만들어진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제이 키슬링 교수는 10여년에 걸친 대사공학 연구 끝에 효모를 이용해 아티미시닌의 전구체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제약사를 통해 상용화했다. 또한 키슬링 교수는 홉의 맛을 내는 이차대사산물을 효모가 만들게끔 하여 홉을 넣지 않고 맥주 발효를 해도 홉을 넣어 발효한 맥주와 유사한 맛을 내는 맥주 생산 기술도 개발했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의 여러 주에서 대마초가 합법화되는 것에 맞추어 대마의 성분 중 하나인 테트라 하이드로 카나비놀과 유도체들도 효모의 대사공학에 의해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식물의 이차대사산물들을 미생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필자의 연구실에서 개발한 아스타잔틴을 생산하는 대장균을 예로 들어 보자. 우선 대장균은 아스타잔틴뿐 아니라 아스타잔틴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여러 효소들이 모두 없기 때문에, 이들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들을 도입해 생산이 가능하도록 대사회로를 먼저 설계했다. 다른 박테리아로부터 5개의 유전자를 가져오고 미세조류로부터 유전자를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아스타잔틴이 합성될 수 있도록 대장균 내에 대사회로를 구축했지만 그렇게 한다고 생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반응이 잘 일어나도록 정교하게 대사의 흐름을 조절해 줘야 한다. 복잡한 대사공학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대장균은 발효를 통해 1ℓ당 432㎎의 아스타잔틴을 생산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논문에 발표했듯이 포도향을 생산하는 대장균과 코리네균도 개발했다. 포도의 향으로 쓰이는 메틸 안스라닐레이트는 식품, 화장품, 의약품에 첨가제로 쓰이는데 이제까지는 모두 화학적으로 합성된 것을 사용했다. 대장균과 코리네균의 방향족 아미노산 대사경로를 체계적으로 조작하고 그 후 식물 유래의 마지막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도입하고 전체 대사회로를 최적화함으로써 발효에 의해 메틸 안스라닐레이트를 1ℓ당 5g 이상 생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식품이나 화장품 등에 사용되는 물질들의 경우 화학적으로 합성된 것보다 이렇게 발효생산된 화합물을 선호한다. 그래서 이들 제품이 보다 고가에 판매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기능성 천연물질들은 식품, 건강, 화장품 등 다양한 산업에서 그 수요가 급속히 늘 것으로 예측된다. 세계 인구는 77억명을 넘어 100억명을 향해 계속 증가 중이다. 또한 급격한 고령화가 이루어지면서 건강 유지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기능성 천연물들은 우리가 건강하고 즐겁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미생물 대사공학에 의한 기능성 천연물들의 생산은 이렇게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우리 몸에 안전하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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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파 가사에 길옥윤 작곡의 ‘순례자’라는 찬불가가 있다. 찬송가가 아니라 찬불가. 가깝게 지내는 운문사 승가대의 학장 진광 스님이 처음 이 노랠 가르쳐주었다. 그때 후배 여가수도 옆에서 따라 배워 불렀는데, 녹음실에서 녹음까지 해둔 기억. 내가 배운 첫번째이자 현재까진 마지막 찬불가. “당신은 꿈 찾는 방랑자. 마음의 길 가는 나그네. 인생도 사랑도 끝이 없는 길. 멀고 먼 고행길. 꿈꾸는 바다에 별 뜨면 불타는 사막도 잠들고 외로운 순례자, 거친 산길에 단풍이 깊어가네. 외로운 들판에 무명초. 잊혀진 하늘가 뜬 구름. 별이여 달이여 어린 잎새여. 내 너를 사랑하리. 내 너를 사랑하리.”

뒷산에 놀러갔다가 어제 내린 장대비로 퉁퉁 분 개울물이 급히 달음질쳐 내려가는 소리. 찢기고 떨어진 어린 잎새들이 흘러가는 풍경. “별이여 달이여 어린 잎새여.” 모두가 여행을 떠나는 시절이다. 올해도 몇 분들의 도움으로 순례를 떠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잠깐의 시간여행. 광복군의 수장 안중근의 도시를 거쳐 저항 가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가 노래하던 ‘야생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아랫녘에서 잊고 사는 도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올리면 가슴 저 끝, 시리고 아려온다. 오래전에 그 도시에서 출발하여 멀리 유럽까지 기차여행을 해봤다. 평생 잊지 못할 여행 가운데 한 장면. 남북이 철도를 잇는다는 소식에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노랗게 단풍이 든 자작나무숲을 지나 눈 내리는 시베리아를 달리기도 했었다.

여당 건배사는 ‘위하여’고 야당 건배사는 ‘위하야’라고 한다. 여야가 힘을 합해도 될까 말까 한 대륙 연결, 유럽 연결이라는 평화와 번영의 일대 전진. 우리 동네에 영어가 쪼매 가능한 사람들만 하는 건배사가 있다. ‘무시로’ 삼행시. 무조건, 시방부터, 로맨틱한 사랑으로! 로맨틱해야 한다. 이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매우 로맨틱하다. 강릉을 출발해 원산, 함흥, 나진을 거쳐 달리던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을 고른다. 순례자들이 기차역에 가득한 시골 도시.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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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형태의 의복이나 장신구, 장식 등 상징물은 이를 공유하는 집단에 자부심, 단합과 동료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배타성으로 인해 반감을 키우고 나중엔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종교적인 상징물 가운데 머리에 두르는 두건이나 모자만큼 눈에 잘 보이는 것도 드물다. 무슬림 여성들이 착용하는 히잡이 대표적이다. 히잡은 머리 등 신체 일부를 가리지만, 부르카나 니캅과 같이 신체의 대부분을 감싸는 것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히잡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른바 정교분리 원칙을 말하는 ‘라이시테’에 근거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인정하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종교적 행위를 철저히 막는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학교에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 히잡 착용이 불가능하다. 이를 두고 ‘여성 차별의 상징 vs 문화적 차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증가하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의 전통모자인 키파 착용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다. 지난 27일 독일정부 산하 반유대주의 대응 책임자는 ‘알 쿠즈의 날’에 키파 착용 금지를 발표했다. 유대인 혐오 범죄의 발생을 우려해 국민을 상대로 착용 금지를 요청한 것이다. 물론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항복’이라고 반발했다. ‘알 쿠즈의 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지배를 반대하는 연례 시위를 갖는 날이다.

그런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반유대주의 대응 책임자와 정반대의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키파를 쓰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반유대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독일 최대일간지 ‘빌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신문 1면에 키파 그림을 넣고 사용법도 게재했다. 그리고 “다윗의 별을 달고, 반유대주의 깃발을 들고, 자신들의 키파를 만들어 유대 이웃들과 연대하자”고 촉구했다. 

세상을 보는 기준은 하나일 수 없다. 그런데 인종주의와 차별, 혐오로 범벅된 편견을 자유와 진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일이 빈발한다. 인종과 종교, 이념을 넘어서는 다원주의를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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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국가조사위원회의 독립전문가패널(IEP)이 SK건설이 짓던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소 보조댐에서 지난해 7월 발생한 붕괴사고에 대해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볼 수 없다”고 잠정 결론지었다. IEP는 국제 댐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조사기구로, 한국도 전문가 3명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했다. 사고원인에 대한 최종 결론은 라오스정부와 SK건설 간 협의를 거쳐 확정되겠지만, IEP 발표만 보면 댐 붕괴는 국내기업의 잘못에 따른 ‘인재’인 것이다. 

IEP는 “보조댐에 미세한 물길들이 존재하면서 누수로 인한 내부 침식이 있었고, 기초 지반이 약화된 것이 붕괴의 근본 원인”이라며 “댐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 이 같은 현상이 최상부에서도 일어나 댐이 무너졌다”고 설명했다. 또 “사고 전 며칠간 집중호우가 쏟아졌지만 붕괴가 시작됐을 때 댐 수위가 최고 가동 수위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했다. 댐 붕괴는 집중호우 때문이 아니라 잘못 지은 탓이라는 것이다. 

SK건설은 “IEP의 결론은 사고 전후 정밀지반조사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등 과학적, 공학적 근거가 결여됐다”며 국가조사위에 재조사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재조사를 통해 SK건설이 댐 붕괴의 직접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야 국내 건설사들이 입을 국제적 신뢰 하락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SK건설이 댐 붕괴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댐은 붕괴됐고, 70여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6000여명의 피해 주민 중 상당수는 지금도 수용소 같은 임시 거처에서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댐 건설에 따른 환경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도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고원인이 어떻든 한국은 재건, 복구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도 “사회적 가치가 기업의 이윤보다 우선시돼야 하고, 기업이 빈곤·고용·환경 등의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SK는 지금까지 2500만달러 규모의 구호 지원 활동을 펼쳤다. 정부도 앞으로 5년간 1200만달러 규모의 원조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그쳐서는 안된다. 정부와 SK건설은 댐 원상 복구는 물론 참사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이들이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재난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책임 있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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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씨에 대한 2013년 검경 수사가 총체적 부실·봐주기 수사였다고 결론내렸다. 특히 한상대 전 검찰총장 등 전직 검찰 관계자들을 윤씨 비호세력으로 지목하고 이른바 ‘윤중천 리스트’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과거사위는 29일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 같은 내용의 최종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가 공개한 내용을 보면, 과거 검찰 수사는 수사의 ABC도 지키지 않은 엉터리였다. 김 전 차관과 윤씨에 대해선 계좌추적도 압수수색도 하지 않은 반면, 피해 여성들과 관련해선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 위해 e메일 계정을 압수수색하고 방대한 참고인을 소환조사했다. 과거사위 자료의 표현대로 “이율배반적 적극성”을 보인 셈이다. 과거사위는 부실수사의 원인으로 ‘박근혜 청와대’를 지목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앞서 과거사위는 지난 3월 곽상도 전 민정수석과 이중희 전 민정비서관을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토록 권고한 바 있다.

김용민 검찰과거사위원회 위원이 29일 경기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사건 심의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과거사위 발표 중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전직 검찰총장의 이름이 포함된 ‘윤중천 리스트’다. 윤씨가 원주 별장을 중심으로 다수의 검찰 간부들과 교류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아무런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사위는 “검찰이 제 식구에 대한 수사를 막으려고 윤씨를 봐주기한 것”이라고 봤다. 한 전 총장 등 거명된 인사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의 고위간부들이 ‘스폰서’를 위해 사건을 부당 처리했다는 의혹은 가벼이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윤씨의 범죄 행각으로 많은 여성들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 범행의 파렴치성을 고려할 때 더욱 엄정한 수사가 절실하다.

검찰은 지난 3월 과거사위 중간발표 이후 수사단을 구성해 결국 김 전 차관을 구속했다. ‘별장 성범죄 동영상’이 공개된 지 6년 만이다. 검찰이 이런 성과를 올렸는데도 시민은 여전히 ‘셀프 수사’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제 최종 결과가 나온 만큼, 배전의 각오로 수사에 임해야 한다. 비리를 은폐하고 범죄자를 비호한 세력이 있다면 전·현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수사해야 한다. 김학의·윤중천의 뒷배를 밝히는 게 사건의 본질임을 잊어선 안된다. 이번에도 과거의 치부와 단절하지 못한다면 검찰 조직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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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제주 강정 해군기지를 유치·건설하는 과정에 해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부당하게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진상조사위는 29일 이 같은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경찰청에 재발 방지 및 인권 보호 개선책 마련을 권고했다. 정부에도 물리력을 동원해 기지 건설을 강행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했다. 늦게나마 국가의 부적절한 국책사업 시행과 인권침해를 확인, 개선책을 촉구한 것은 다행이다.

이번 조사로 강정 기지 건설은 총체적으로 잘못됐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2007년 4월 강정마을회 회장은 총회 소집공고도 하지 않고, 의제도 무단 변경해 기지 건설 안건을 상정했다. 그 결과 마을 주민 1900여명 중 87명만 참여한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렸고, 국방부와 제주도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사업 공식화를 결정했다. 주민들이 사후 주민투표를 통해 기지 건설 반대를 결의했지만 당국은 묵살했다. 정부가 국책사업을 할 때는 그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러나 강정 해군기지 건설에는 이런 과정이 전무했다. 심지어 주민투표 당일 해군은 주민 100명을 차에 태워 관광을 시켰고, 경찰은 일부 주민의 투표함 탈취를 방조했다. 주민자치의 전통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사업을 결정한 것도 모자라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반대 주민의 의사 표시까지 억압했다. 신고된 집회 방해와 강제연행은 일상이었고, 과잉 진압과 진입 봉쇄도 자행됐다. 반대 측 주민을 고의로 폭행하는 등 인권침해도 예사로 벌어졌다. 국군기무사와 국가정보원은 뒤에서 경찰의 강경 대응을 조장했다. 2011~2013년 경찰청과 청와대, 국군사이버사령부가 해군기지 관련 인터넷 댓글 등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 결과 평화로운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라는 말 이외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문제는 해군기지가 건설된 후에도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와 법적 조치 취소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법원의 조정에 의해 주민들에게 청구된 구상권이 취소된 것 이외에 이번 조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사실상 정부가 한 일은 없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 강행으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 또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 차원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는 부적절한 사업 추진과 인권 탄압에 대해 마을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제주도와 함께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공공사업 추진 시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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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 살 때 우리 집은 단칸방 셋방살이를 면하고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마당이라고 해봤댔자 손바닥만 했지만, 그래도 마당 한구석에 개집 하나는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개를 얻어와 개집 앞에 묶어놓았다. 누렁이라 불리던 개는 무럭무럭 잘 자랐는데, 여름날 아버지가 자전거 안장에 싣고 대문을 나선 뒤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개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까만 눈을 끔벅이며 울던 누렁이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 시절 복날이면 개를 잡는 건 흔한 일이었고, 나도 어른들이 떼어주던 고기를 곧잘 받아먹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의 결심은 우주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는 한 존재에 대한 공감, 그것 말고는 더 설명할 게 없었다. 사람 몸에 개고기가 가장 좋다는 동네 의원 말을 평생 맹신하는 아버지는 내 결심을 번번이 묵살하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쇠고기나 돼지고기도 먹지 말라고.

세상에 이로운 일을 실천하고자 채식을 한다는 청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선택은 어린 시절 나의 결심과는 다른 것이지만, 채식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취업하게 되면 채식주의자로 살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눈치를 준대요.”  

그는 지금도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밥 먹는 게 꺼려진다고 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만한 식단이 없는 외식 문화에 대해 말했지만, 진짜 문제는 식단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한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 존중되는 것, 우리는 그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반대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에서 그런 바람은 부질없을 테니까.

그는 내게 한 학자의 글을 보여줬다. ‘비거니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도, 잃음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비폭력을 지지하고, 나약한 존재들의 착취를 거부해 내적 평화를 얻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게리 프란치오네)

올여름 아버지에게 이 말을 해드린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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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소위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며 재수사를 권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막대한 국민 세금을 써가면서, 장장 13개월이나 조사를 했다는 점에서, 과거사위의 결론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사실 고인의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인이 숨질 당시의 수사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는 사이 몇몇 범죄는 공소시효가 지났고, 증거는 더 없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과거사위에 기대를 한 결정적 이유는 두 달여 동안 매스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윤지오의 존재였다. 장씨 사건의 유일한 증인을 자처했고, 기자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막말을 해대는 윤씨를 보면서 사람들은 드디어 진실이 밝혀지고 악인들이 처벌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실제 조사를 담당한 대검 조사단이 윤씨의 입에 목을 매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안타깝게도 윤지오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윤씨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고인과 별로 친하지 않았으며, 기억력도 좋지 않았다. 윤씨는 ‘16번이나 증언했다’고 자랑을 했지만, 증언 횟수가 많은 것은 그녀의 진술이 수시로 번복되는 등 신빙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자연 리스트를 봤다는 윤씨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10년 전에 조사를 받을 땐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아 놓고선, 자신이 쓴 책 <13번째 증언>에선 리스트를 언급하며 총 40~50명이 있다고 했다가, JTBC에서는 30명이라고 슬그머니 줄이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심지어 장씨의 유족 등 고인이 남긴 문건을 본 다른 사람들은 ‘이름만 나열된 리스트는 없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으니, 윤씨가 진짜로 리스트를 봤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윤씨는 재수사 불발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다. 정말 이게 우리가 원한 진정한 대한민국이냐”고 했지만, 이런 걸 전문용어로 적반하장이라 한다. 조사단에서 활동한 김영희 변호사도 사과는커녕 같이 애를 썼던 검사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검사들은 성폭행 의혹 부분을 수사에 못 넘기게 하려고 정말 총력전을 했다. … 조직적 차원에서 반대가 있지 않았나 느꼈다.” 하지만 대통령이 명운을 걸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한 마당에 무슨 외압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건 어이가 없다. 안 그래도 김 변호사는 윤씨가 기억력이 뛰어나다느니,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느니 하면서 시종일관 윤씨를 옹호하는 여론몰이를 해 조사단 내부에서도 불만이 많았는데, ‘재심’ 변호사로 유명한 박준영은 이에 항의하며 조사단을 탈퇴하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점은 윤씨가 이런 결론이 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줬던 김수민 작가에게 윤씨는 다음과 같은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사건은 종결 자체가 불가능하고 … 서로 헐뜯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고.’ 그런데도 윤씨가 자신이 사건을 해결할 것처럼 굴었다면, 그녀에겐 이 기회를 틈타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윤씨에 대한 언론들의 태도였다. 대부분의 언론은 윤씨로부터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안달했고, 그녀가 쏟아내는 말들을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내보내기 바빴다. JTBC <뉴스룸>에서 윤씨가 차량 테러를 두 번이나 당했다며 부서진 차 사진을 내보냈을 때, 국민들은 경악했다. 윤씨가 스마트워치를 눌렀는데 경찰이 9시간이나 오지 않았다는 윤씨의 증언도 충격 그 자체였다. 누군가 윤씨 숙소의 열쇠를 복사했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사람들은 윤씨의 신변이 위험에 빠졌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로 인해 여경 5명이 한 달 가까이 윤씨 옆에서 심부름을 해야 했고, 그것도 부족해 사람들은 경호비에 보태라며 윤씨가 공개한 후원계좌에 아낌없이 돈을 보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실제로 윤씨를 위협한 사람은 그녀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 이에 대해 사과하는 일이다. 하지만 윤씨가 대국민 사기극을 펼치는 데 앞장선 언론들 중 누구도 여기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윤씨의 교통사고는 학부모의 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일어난 접촉사고였지만, JTBC는 그 진상에 끝내 침묵한 데다, 최근에는 장씨의 유족이 진술을 번복한 것이 재수사가 불발된 이유인 것처럼 보도했다. 윤씨의 존재를 처음 대중에게 알린 <뉴스공장>은 그녀에 대한 의혹이 쏟아지는 내내 침묵했고, 과거사위의 결론이 난 뒤엔 엉뚱하게도 김영희 변호사를 불렀다. 역시 윤씨가 출연했던 KBS <오늘밤 김제동>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윤씨에 대한 의혹이 대부분 사실로 밝혀진 지금이라면, 김수민 작가나 김 작가를 대리해 윤씨를 고소한 박훈 변호사 등등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자를 ‘기레기’라고 비하하는 것에 부정적이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니 그런 말이 왜 유행하는지 이해가 간다. 하기야, 나중에 사과할 언론사라면 미리부터 사실 여부를 철저히 검증했으리라. 이분들에게 윤지오가 올린, 윤씨와 SBS 박원경 기자의 전화통화 영상을 보기를 권한다. 팩트체크는 어떻게 하는지 배울 수 있고, 거짓말을 하는 이가 팩트체크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담겨 있으니, ‘참기자’가 되길 원한다면 꼭 보길 바란다. 계속 기레기로 남아있고 싶다면 안 보셔도 되지만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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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려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으면 담배 피는 어른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숨을 참고 뛰어가요. 냄새가 너무 심해서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거든요.”(2017 전국 아동 통학로 흡연 실태조사 참여 아동 인터뷰 중)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2017년 전국 200곳의 통학로 현장을 조사했다. 조사 대상 통학로 중 196개 현장에서 담배꽁초나 담뱃갑이 발견되었다. 인터뷰한 아동 418명 모두 통학로에서 흡연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린이재단은 통학로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라고 촉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으로 어린이집 및 유치원 시설 경계선 10m까지가 금연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거리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숨쉬기에는 턱없이 짧다. 2017년 통학로 현장조사 당시, 경남지역에서도 아이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통학로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되었다. 심지어 교문 바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흡연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담배연기가 싫어 숨을 참고 뛰어간다는 아동, 담뱃불로 인해 화상을 입은 아동도 있었고, 담배는 싫지만 그 맛이 어떻길래 어른들이 저렇게 담배를 피울까 생각한다는 아동의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남지역의 아동 통학로는 학교 출입문으로부터 직선 50m까지 지역인 절대정화구역만 금연구역으로 지정돼 있었다. 

이에 경남아동옹호센터는 아이들과 함께 문제를 알리고 어린이보호구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도록 ‘경상남도 금연 환경 조성 및 지원 등에 관한 조례’ 개정을 촉구했다. 도의회에 어린이보호구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촉구하는 의견서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2018년 지방선거 때는 후보자들을 직접 찾아갔다. 또한 아이들이 직접 그린 금연구역 표지판을 학교 근처에 설치해 여기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4일, 이옥선 도의원의 대표발의로 경남지역의 어린이보호구역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는 31일은 세계 금연의날이다. 뒤늦게라도 아이들이 간접흡연으로부터 안전한 등·하굣길을 위한 보호제도가 마련되어 다행이다. 아직 어린이보호구역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지자체들이 있는데 조속히 대책을 강구하여 아이들을 간접흡연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아이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뤄낸 조례 개정이니만큼 어른들은 실천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아동이 있는 곳, 그곳이 금연구역입니다’라는 슬로건이 행복한 삶을 위한 아이들의 권리와 맞닿길 바란다.

<박문호 |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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