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게 죄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국어오염죄’가 그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미 수많은 죄를 지어왔다. 반민특위를 폄훼하여 역사를 왜곡해 101세의 독립운동가가 국회에까지 나와서 성명서를 읽게 하는 죄를 범했다. 패스트트랙을 저지한다고 국회를 폭력으로 난장판을 만들고는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저항권이라고 우겨댄다. ‘헌법 수호’와 ‘독재 타도’를 내걸고 그들은 저항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박정희가 했던 독재는 개발을 위한 독재니 용인할 수 있지만 ‘좌파독재’는 망국으로 가는 것이므로 저항권을 발동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연일 기염을 토해낸다. 

그래서 올해 5월에는 ‘신자유당(자유한국당)’의 ‘5월투쟁’을 보게 될 것 같다. 매년 5월이 오면 ‘5월투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광주 시민들을 자국의 군인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학살한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서는 투쟁을 ‘5월투쟁’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사과탄, SY-44 깡통형탄, ‘지랄탄’이라고 불린 다연발탄 등이 매캐하게 깔린 거리에서 백골단으로 대표되던 폭력기계들에 의해 짓밟히고 매 맞고, 피 흘리며 끌려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더러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면서까지 저항하던 처절한 투쟁의 시절에 외쳤던 구호는 ‘독재타도, 민주쟁취’였다. 학살정권, 고문정권, 폭력정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항밖에 없었다. 그때 언론도 장악되어 언로는 차단되었고, 권력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다. 광주의 학살을 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그 시절, 우리는 피 흘리며 끌려간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오고야 말 민주주의의 신새벽을 노래하고는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 5월투쟁들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6월항쟁을 일궈냈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최루탄 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쟁취했던 게 지금의 헌법이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저항권을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정신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1997년 헌법재판소는 “저항권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헌법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행하여지고 그 침해가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국민이 자기 권리·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실력으로 저항하는 권리이다”라고 정의했다. 

패스트트랙이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일까?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법안을 조정할 수 있고, 마지막에 법안 통과 직전에도 표를 단속하면 될 일이다. 330일이나 남았고, 해도 해도 안되면, 마지막에는 국회선진화법을 어기지 않으려 민주당이 썼던 필리버스터란 방법도 있다. 

그러므로 나경원 원내대표가 저항권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저항권이라는 개념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짓이다. 나 원내대표가 저항권 운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안다. 밥그릇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밥그릇에는 불법적인 수단의 동원도 불사하는 정치인, 정작 다루어야 할 국민들의 밥그릇에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는 정치인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좌파독재라는 규정도 그렇다. 언론이 권력에 장악되어 언로가 막혔을까? 정권을 비판하는 말을 한다고 잡혀가는 일이 있을까? 최루탄도 백골단도 없고, 경찰은 박근혜 정권 때와는 달리 막말과 혐오 표현이 대부분인 ‘태극기모독부대’의 집회와 시위마저도 보호해주고 있다. 그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다 누가 체포되고 연행되어 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매주말 광화문에는 청산되지 않은 적폐세력들이 ‘태극기모독부대’로 변모하여 점령하고는 한다. 오늘의 언론과 집회·시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썼던 이들은 뒷전으로 몰리고 여기에 무슨 좌파는커녕 독재의 기운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경원 원내대표와 ‘신자유당’의 국어 오염은 집권여당이었던 시절부터 지속되어온 전통이기도 하다. 그들에 의해서 국어의 개념과 단어들은 혼탁해졌다. 나 원내대표는 2007년 이명박 후보의 선거대책위 대변인을 맡았을 때, “주어가 없다”는 말로 독특한 국어 실력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때는 북한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가, 막상 북한이 참여한다고 하니까 “평양올림픽”이라는 말을 만들어 반대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하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비례대표를 없앤 안을 선거개혁안이라고 들이밀었다. 자신이 한 말을 그때그때 바꾸는 야누스 정치인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나 원내대표의 말에 환호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글귀가 있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박완서 선생의 <오만과 몽상>에 나오는 대목이다. 반면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 친일파와 애국투사의 족보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었다. 수십년 전에 읽은 이 대목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그는 어디서 개념조작, 망언과 왜곡의 국어를 배웠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이라든가, 반민특위 왜곡 발언, 5·18 망언 의원들에 대한 두둔 등으로 이미 그는 전력을 쌓아왔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순순히 수용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만의 극치다. 그렇게 언어의 개념을 조작하고 왜곡했던 한 선배 정치인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재판을 받고 있고, 한 선배는 서울구치소의 503호에 갇혀 있다. 

박완서 선생은 오만과 함께 몽상을 짝으로 지어 놓았다. 나 원내대표의 오만함이 몽상으로 이어지는 일은 불행으로 귀결될 것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노할 ‘국어오염죄’를 그가 더 이상은 짓지 않기를 바란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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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의원들의 해외연수에 의회 사무직 직원들이 대거 동행하는 것이 과연 민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방의회는 조례의 제정 및 개폐, 예산의 확정 및 결산의 승인 등을 통해 지방자치단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필수 기구는 아니지만 사무 보조 부서를 설치하고 직원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다.

전국 237개 시·도·군·구 의회를 대상으로 지난 5년간의 해외연수 실태를 조사해본 결과 여러 면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첫째, 해외연수 계획에 대한 심의가 대부분 의회에서 구성한 자체적인 기구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둘째, 해외연수에 동행한 사무직원 수가 대체적으로 의원들 인원의 절반을 넘는(의원 2명당 사무직원 1명 동행) 의회가 경기 21곳을 비롯하여 전남 15곳, 강원 11곳, 서울·충남·경북·전북 각 7곳, 충북·경남 각 5곳, 인천·대전·대구·울산 각 2곳 등 모두 96곳이나 됐다. 심지어 사무직원 수가 의원들 인원보다 더 많은 의회도 경기 5곳을 비롯하여 세종·충남·경남·전남 각 1곳 등 모두 9곳이나 됐다. 

셋째, 그럼에도 사무직원들이 해외연수에 동행해 하는 일은 방문기관과의 협의와 자료 수집 및 사진 촬영이었고, 귀국 후  주된 일은 자료 정리와 연수 보고서 작성 지원이었다. 

넷째, ‘해외연수 결과보고서’가 의회 사이트에 올려져 있지 않은 곳도 더러 있었으며, 각 의회 사이트마다 메뉴 구성도 서로 다르다 보니 해외연수 결과보고서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찾아진다 해도 해외연수에 쓰인 비용의 내역까지 제시해놓은 의회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다섯째, 해외연수 기간이나 연수 횟수는 각 의회마다 큰 차이가 있었다. 한 예로 수원시의회의 경우는 작년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15명 의원이 각 2차례씩 해외연수를 다녀왔는데 그 가운데 3명은 재작년에도 2차례, 즉 2년간에 걸쳐 무려 4차례의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2018년도 전국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에 동행한 사무직원들은 모두 1317명이었으며, 이들의 동행으로 지출된 비용은 서울 5억4000만원, 경기 9억2300만원, 충남 1억3900만원, 전북 3억2900만원, 경남 2억7000만원, 광주 5300만원, 부산 6300만원 등 모두 36억2200만원이었다. 이는 결국 매년 36억원(2018년도 기준) 규모의 혈세가 새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방의원들이 그동안 이런 사고(思考)를 가지고 예산 심의를 해왔다는 것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몇 가지 개선책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 계획은 해당 지자체의 시민감사관이나 옴부즈맨 등 외부의 별도기구에서 심의하게 하자. 

둘째, 지방의원 해외연수에 의회 사무직원들이 동행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도록 하자. 

셋째,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 기간은 4년 기준 총량 20일을 넘지 않도록 하자. 

넷째, ‘해외연수 결과보고서’는 의원들 각자가 직접 작성하되 연수비용 세부내역도 함께 제시하게 하고, 의회 사이트에 올리기 전에 필히 주민들을 상대로 발표회도 갖게끔 하자. 

다섯째, 광역시의회와 도의회 사이트에 ‘국외 연수보고서 모음’ 코너를 만들어 해당 지역의 기초의회들에서 생성된 보고서를 국가별·도시별로 수록하여 해외정보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게 하자. 

행정안전부와 각 지자체는 지방의회 사무직원들의 해외연수 동행에 따른 ‘예산낭비 실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그 개선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주기를 촉구한다.

<이민세 | 고양시 시민감사관·전 영남이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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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지향 생활을 해보니 이 시대의 영상들을 새롭게 감각하게 된다.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맺는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무엇을 볼지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이 생긴다. 유튜브 시대를 나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실감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 대한 글을 써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나 먹방이나 게임 채널이나 ASMR을 소개하고 감상을 적는다. 그중에서도 나의 학생들이 가장 잦은 빈도로 시청하는 것은 동물 영상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영상들 속 동물들이 얼마나 귀엽고 웃기고 놀라운지를, 혹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슬픈지를 증언하는 글을 쓴다. 그걸 읽으며 나는 학생들의 여가 시간을 상상하고, 가끔 웃고, 또 가끔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반려견이 죽음을 맞는 순간을 촬영한 영상이 유튜브에는 아주 많다. 죽기 직전의 개와 그 개를 둘러싼 가족과 절절한 호명과 울음과 사랑의 메시지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제목엔 날짜와 개 이름과 ‘무지개다리 건너는 순간’이라는 문장이 쓰인다. 나는 동물 영상을 잘 보지 않지만 아이들이 영상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옮겨 적어오는 날엔 그 죽음의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아이들은 그걸 보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쓴다. 나는 그들이 슬펐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영상 속 동물과 사람들이 겪은 슬픔의 무게나 진정성에 대해서도 감히 어떤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영상을 보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아이들이 느낀 슬픔의 정체를 생각한다. 나 역시 반려묘와 함께 살며 날마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므로 그 존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고통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장면이 웹에 업로드되어 누구든 언제든 시청할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데이터가 무한 복제되고 무한 반복 재생도 가능한 시대에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봄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의 결에 대해서도 세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영상에서의 슬픔은 시청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보고 싶은 슬픔’이자 ‘소진되기 좋은 슬픔’이다. 시청자의 일상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소비된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그의 책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 스펙터클 사회가 미디어를 통해 제공하는 감정의 고양 상태에 관해 말한다. “텔레비전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웃음과 슬픔, 분노와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작 이것이 겨냥하는 것은 감정의 소진상태이다.” 

우리는 예능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유튜브 영상 클립 등을 통해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극적인 비극을 본 뒤에도 대체로 별탈없이 일상에 복귀한다. 숱한 미디어 콘텐츠가 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은 어제의 내가 변함없이 오늘의 나로 돼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정화 역할을 한다. 라캉은 이런 안정화를 비난했다. 안정화란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고착시키는 부정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걸 ‘살균된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한 슬픔과 분노는 우리의 존재를 뒤흔든다. 원래 자리한 위치에서 떨어져나가게 하고 방황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라캉은 말했다. “만일 슬픔이 우리의 ‘감정’에 진실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감동’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흔들림’을 통해서일 뿐”이라고. 

감동적인 동물 영상들이 범람하는 한편에는 공장식 축산과 공장식 수산 현장이 있다. 그라인더에 갈리는 병아리와 살처분당하는 돼지의 얼굴들도 있다. 그 현장 역시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슬픔의 실체는 거기에 죄다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조회수가 높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망각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거기엔 없다.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비건이 아닌 이들에게도 분명히 어떤 영향을 미치고야마는 이미지들이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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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 영국 BBC방송국의 <Teletubbies>를 수입 방영한 <꼬꼬마 텔레토비> 주제가입니다. 이 노래만 나오면 아이들이 울음 뚝하고 텔레비전 화면에 ‘햇님아기’ 얼굴로 붙었지요. 뽀로로나 타요 인기 저리가라였습니다. 그 뒤로 ‘꼬꼬마’는 아동용품 매장이나 어린이집 이름으로 널리 쓰입니다. 나아가 ‘꼬꼬마 녀석이 어딜 감히’ 하며 나이 어린 사람을 누를 때도 쓰였지요. 그런데 사실 ‘꼬꼬마’는 ‘꼬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싸울 때 지휘소에서 한눈에 구분하고 계급도 나타내기 위해 투구나 벙거지(군모) 위에 단 술, 그리고 천이나 종잇조각을 실에 매달아 바람에 날리며 뛰놀던 장난감이 꼬꼬마입니다(‘낚싯대’라는 고양이 장난감과 비슷합니다). 텔레토비들은 배마다 화면이, 머리 위엔 각기 다른 모양의 안테나가 달려 있습니다. 이 안테나들을 보고 번역자가 꼬꼬마라는 단어를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꼬마라는 느낌도 나게요. 그런데 그 훌륭한 번역이 외려 단어 오해를 낳았지요. 아직도 온라인 지도에서 ‘꼬꼬마’를 검색하면 아동 관련한 엄청난 ‘꼬꼬마’들이 뜹니다. 꼬꼬마가 꼬마를 귀엽게 부르는 말인 줄만 알고요.

서두가 길었네요. 아랫사람을 너무 받아주면 버릇없이 군다는 속담 ‘종의 자식을 귀애하면 생원님 수염에 꼬꼬마를 단다’가 있습니다. 진사·생원이건 아니건 할아비들은 그저 어린애가 귀엽습니다. 종의 자식일지언정 무릎에 앉히고 토닥입니다. 깜박 잠들었다 깨보니, 이런! 긴 수염 꼬아 종잇장을 매달았네요. 허허, 애한테 화도 못 내겠고. 지금도 아끼고 예뻐하니 제 위치 모르고 기어오르는 사람 꼭 있습니다. 업무를 지시하니 몸을 꼬면서 “안 하면 안 돼요? 과장님이 더 잘하시잖아요” 합니다. 아랫사람과 너무 허물없으면 전쟁터가 놀이터인 줄 압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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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만큼 남녀 구별이 엄격한 직업도 드물다. 남성은 남성들과, 여성은 여성들과 겨뤄야 한다. 남녀 혼합팀을 구성하는 종목이 있지만 이때도 성비를 맞춰야 한다. 동일한 성끼리 겨루도록 하는 게 공정한 경쟁의 장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스포츠계에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한몸에 지닌 간성(間性) 선수, 캐스터 세메냐가 등장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장거리 육상 스타 세메냐는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800m 금메달을 차지하며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일부 국가에서 ‘외모가 남자 같다’며 세메냐의 성별에 의문을 제기했다. 검사 결과 세메냐는 간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간성 규모에 대한 추정은 학자마다 다르다. 전체 인구의 1.7%라고 추정한 연구가 있는 반면 0.018%로 추산한 학자도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태는 다양하다. 외부 생식기관의 모양새는 남성이지만 난소가 있거나, 외형은 여성이지만 잠복 고환을 가지고 있는 식이다. 겉보기엔 여성인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경우도 해당된다. 

국제육상연맹(IAAF)은 세메냐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을 문제 삼고 있다. 테스토스테론이 운동 능력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IAAF는 세메냐를 겨냥해 ‘정상적인’ 여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혈액 1ℓ당 2나노몰 이하이며, 대회 전 6개월 동안 약물 투약을 통해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5나노몰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세메냐와 남아공육상연맹은 이 규정이 차별이라며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제소했지만 지난 1일 재판소는 IAAF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소는 여성 선수들의 통합을 위해 “이런 차별은 필요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세메냐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도핑 아닌 도핑을 해야 하는 셈이다. 

타고난 신체 조건이 탁월한 선수들이 있다. 사실 위대한 선수들은 대부분 그렇다. 세계 수영을 제패했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는 발목에 관절이 하나 더 있었고 운동 후 젖산 수치가 남들의 절반에 불과해 피로를 덜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펠프스에게 ‘약물을 복용해 젖산 수치를 높여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특이성을 재능으로 여기고 경이롭게 바라봤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모니카 헤스는 “펠프스의 유전적 차이는 찬양하면서 왜 세메냐의 유전적 차이는 처벌하느냐”고 지적했다. 

운동선수의 신체 조건 중 어디까지가 타고난 재능이고 어디부터가 규제해야 하는 속임수일까. 이 경계를 명확히 나눈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IAAF 규정은 낯설고 두려운 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 아닐까. IAAF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규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추기 위해 주삿바늘을 꽂든지, 그게 싫으면 선수 생활을 그만두라고 강요하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외관상 남성처럼 보이는 여성 선수를 지목해 성호르몬 검사를 실시하는 게 반인권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유엔인권이사회는 IAAF 규정에 대해 “불필요하고 모욕적이며 유해하다”는 논평을 내놨다. 세계의사회는 약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추는 일은 비윤리적이므로 IAAF 규정을 집행하지 말라고 의사들에게 당부했다. 

세메냐는 약물 투약을 거부하고 IAAF에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IAAF 규정에 대한 스포츠중재재판소의 결정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전했다. 간성 선수에 대한 논의가 다른 종목으로 조심스레 확산되리라는 전망이다. 현명한 해법이 필요하다. 꿈과 희망, 인간승리의 드라마여야 할 스포츠가 차별과 배제의 가해자가 된다면 선수와 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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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좋은 거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할 때의 그것은 입이 큰 생선이겠지만, 와 그래요 대구?라고 할 때의 그곳은 어엿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도시다. 거창에서 가장 가까운 대처라 많은 내 고향분들이 대구를 비빌 언덕으로 알고 살아온 바이기도 하다. 그동안 큰 언덕이라고만 알았는데 옥편에서 구(邱)를 뒤적이니 구릉을 넘어 무덤, 분묘의 뜻도 있다. 병풍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라서 무척 덥겠거니 했는데 어찌 보면 이름에서 이미 더운 기운을 바탕으로 깔고 있겠다는 느낌도 든다.

그 대구의 한편에 위치한 불로동은 不老洞이다. 불로라면 불사일 것이 마땅할진대 역설적으로 삼국시대에 조성된 어마어마한 무덤군이 있다. 얼마나 양지바른 곳이었기에 이리도 많은 무덤일까. 당시엔 울창한 숲에 둘러싸였을 테지만 이제는 탱자나무 울타리만 초라할 뿐이다. 그래도 하늘과 내통하고 호령하는 무덤의 정기는 살아 있어 다종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기를 되풀이한다.

어느 주말의 오후 2시, 나는 불로동 무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2년 만의 두 번째 방문이었으니 또 2년만큼 정확하게 늙은 몸이었다. 그나마 잘 먹는 재주를 가진 자로서 불로동에서 터득한 게 있다. 무덤군에 갈 때는 조금 불콰한 기분으로 가는 게 좋다! 이날은 배우 안재모씨가 광고모델인 불로막걸리를 공원 입구의 칼국수집에서 음복하듯 한 잔 걸치고 입장했다. 술기운 탓인가. 무덤 곁을 지나치려니 나의 다음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아무리 불로동에 드나든다 한들, 탱자나무 가시로 막는다 한들 불사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허벅지 근육의 탄력이 헐렁해지듯 호주머니 속의 금쪽같은 시간이 점점 묽어지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덤은 무의 덤. 언제나 봉긋하고, 포근한 곳. 다정하고도 덤덤하다. 대구 불로동 무덤 사이를 돌아다니는 뻣뻣한 똥막대기를 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건 애기자운이다. 작지만 야무진 꽃이다. 지하 뿌리에서 직접 잎과 꽃이 따로따로 나온다. 대체적으로 털이 빽빽해서 나오자마자 늙었다는 느낌도 주는 애기자운. 턱 괴고 엎드려 꽃을 맞추는데 자꾸 꽃 너머가 눈에 들어왔다. 대구에서 무덤에 파묻히고, 불로동에서 불로막걸리를 마신 하루. 살아 있을 때 모름지기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 어떤 아귀를 딱딱 맞춘다는 느낌이 흠뻑 들었다. 애기자운, 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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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은 국회에서 행한 직무상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다. 불체포특권도 있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고, 회기 전에 체포·구금됐을 때에도 국회의 요구가 있으면 회기 중 석방될 수 있는 권리다. 소신껏 발언하고 표결하라는 면책특권은 그러나 때로는 방탄복으로 변질되고, 불체포특권은 제 식구 보호용 우산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국회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고 국회의원은 건드릴 수 없는 특권을 누린다. 그야말로 치외법권의 성역이다.

그런 곳에서 패스트트랙을 두고 물리적 폭력이 발생했다. 국회 패스트트랙 처리 과정에서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불법적인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식물국회’에 더해 ‘동물국회’라는 오명을 얻었다. ‘짐승국회’로 이름 붙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다. 여당이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소위 국회선진화법 위반으로 무더기 고발하면서 향후 정국의 흐름은 수사와 재판의 향방에 달려있게 되었다. 국회법 제165조와 제166조는 국회회의 방해금지를 규정하고 의원직 상실과 피선거권 박탈의 형선고가 가능한 법정형을 두고 있다. 2012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주도하여 만든 국회선진화법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첫 수사대상이 된 터라 검찰의 칼날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에 반발한 한국당은 여당 의원들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상해)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검찰이 마뜩잖게 생각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포함된 패스트트랙 법안에 반대하는 한국당 의원들이 수사대상이어서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몸싸움 방지법이라 불리는 국회선진화법이 살아있음을 보여줄 것인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법적 처리보다는 정치적 타협을 주문하기도 한다. 고소·고발을 취하한다 해도 검찰 수사는 그대로 진행될 수 있지만 양측의 합의로 자신들이 만든 법을 무력화한다면 국회와 입법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국회에서 불법적인 사태가 벌어져도 정당 간 타협으로 유야무야되던 잘못된 관행이 되풀이되면 국회의 성역화는 더 큰 비난을 받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과 여야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니 국회의원의 국회 밖 막말도 도를 넘고 있다. 경쟁적 막말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편을 가르고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막말이 최고가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발언과 4대강 보 해체를 위한 다이너마이트로 청와대를 폭파하자는 선동적 발언 등은 막말의 극치다. 면책특권과 표현의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면서 정당화하려 하지만 정치적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한참 넘어섰다. 명백히 허위사실임을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내뱉기도 한다. 한번만 확인해 보면 진위를 알 수 있는 가짜뉴스도 거리낌 없이 유포한다. 국민의 대변자라는 국회의원으로서 품위와 품격은 간데없다. 이렇게 면책특권의 뒤에 숨어 ‘아니면 말고 식’의 발언을 내뱉는 행태, 직무상 행하는 발언이 아니라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발언 등등은 어떤 식으로든 규제되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국가에서 공적 관심사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헌법상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공인이나 이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이들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문제제기와 비판도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문제는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등의 극단적 표현이나 차별·혐오 발언이다. 표현의 자유 뒤에서, 면책특권을 방패막이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는 발언과 표현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이를 적절히 제한하지 않으면 오히려 민주주의가 침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내외에서 이처럼 국회의원들이 숱한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막말면허로 여기는 면책특권의 영향이다. 면책특권의 방탄복에 숨어서 막말을 해본 경험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니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면책특권은 민주주의가 덜 성숙되고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어 있던 독재시대에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에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장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구시대의 산물인 면책특권을 보장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은 아니다. 국회를 더 이상 성역으로 남겨두거나 국회의원에게 치외법권의 특전을 베풀어서는 안된다. 국회의원 스스로 위법행위에 상응하는 책임을 회피하면 법치를 말할 자격은 없어진다. 민주주의가 가장 잘 작동해야 할 국회에 특혜와 성역이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민주적이다. 불가침 성역을 허물어야 국회 안팎에서 책임 있고 품격 있는 언행이 발현되고 민주주의가 발전할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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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이 칼럼(2018·3·27)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되던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보았던 동인(動因)으로 첫째, 문재인 정부의 선제적이고 치밀한 준비, 둘째,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 마지막으로 오랜 제재로 인한 북한 내구성의 약화를 들었다. 그러면서 대화로 포장된 길이 낭떠러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족으로 달았다. 이후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사족이 점점 불길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판문점회담과 평양회담(9·18~20)에서 남북이 공동 승리자였다면 북·미 정상들이 최초로 마주한 싱가포르회담은 북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단독 기자회견에서 쏟아낸 발언에서 북·미 양국은 금방이라도 행동 대 행동으로 나아갈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싱가포르회담 합의문을 두고서 미국 국가안보 엘리트들의 역풍은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집요했다. 뉴욕타임스(2018·6·12)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보다 한 수 아래”였으며 “농축 우라늄 비축량을 98% 줄이도록 규정한 이란 핵합의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였을까, 싱가포르회담 후 8개월여 만에 개최된 베트남 하노이회담(2·27~28)의 결과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트럼프의 한판승이었다. 존 볼턴, 마이클 코언, 비등가성, 미국 의회 반발 등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결과였어도 이를 미처 예상치 못한 북측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이후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4·12)에서 “연말까지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며 협상 여지를 두면서도, 한 외세(미국)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균세외교(均勢外交)’를 펼쳤다. 말이 좋아 균세외교이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일 뿐 김 위원장으로서는 절박하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자력갱생(自力更生)’이니 ‘우리민족끼리’를 무색하게 만든 나들이였다.

연내까지 미국의 행동변화를 겁박(劫迫)한 북한에 트럼프 행정부가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영(零)에 가깝다.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필두로 트럼프 행정부 내 매파들(hawks)은 드디어 대북 제재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강경파들이 보기엔 초조한 측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다. 특히 이들은 하노이회담 이후 드러난 북한의 ‘거친 대응’에서 김정은 정권이 제재로 인해 고통을 심하게 느끼는 것으로 ‘인식’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정은의 블라디보스토크 열차 여정(旅程) 역시 직면한 위기를 우회하려는 관성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8년 만에 개최된 북·러 정상회담치곤 너무 초라했다. 공동성명 채택은커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회담 후 “비핵화와 관련해서 미국과 입장이 동일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허가 찔린 셈이다. 북한 비핵화를 두고서 강대국들이 고공(高空)에서 주고받는 게임의 규칙을 알 리가 없는 세습 왕조국가 북한의 ‘조정대신(朝廷大臣)’들 중 어느 누가 ‘찬배(竄配)’에도 개의치 않고 ‘미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할까. 21세기에 미국을 상대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려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거듭되는 대미 강경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잠자고 있는 사람보다 잠자는 척하는 사람을 깨우기가 더 힘들다면 비핵화 시늉을 내는 국가를 완전하게 비핵화시키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든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다. 여기에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척하면서 북한을 각자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묶어두려 한다.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북한 비핵화호의 표류, 나아가 침몰까지 예상할 수 있다. 더 늦지 않게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핵무기가 국제정치에서 더 이상 ‘로열 플러시’(royal flush)가 아니며, 더군다나 ‘벼랑 끝 전술’이 트럼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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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생명과학이 퇴행성 관절염 치료제 ‘인보사 케이주’의 성분이 잘못된 사실을 2년여 전에 알고도 묵살한 정황이 드러났다. 미국 내 자회사인 코오롱티슈진이 “유전학적 계통검사(STR)를 실시한 결과, 인보사 2액이 허가 당시 제출한 연골세포가 아닌 신장세포인 ‘293 유래세포’였다”는 내용을 2017년 3월 코오롱생명과학에 통지했다는 것이다. 코오롱생명과학은 이런 사실을 지난 3일 공시했다. 신약성분이 바뀌었다면 치료효과가 달라짐은 물론 부작용까지 우려되는 중대사안이다. 코오롱이 이를 알고도 판매를 강행했다면, 국민생명을 담보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나 다름없다.

코오롱은 “최종 결론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코오롱티슈진의 2년 전 통지에 대해서도 “‘생산이 가능하다’는 내용만 보고해 그런 줄 알았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공시내용을 보면 코오롱티슈진의 성분 분석은 코오롱생명과학의 요청으로 진행됐다. 코오롱생명과학과 기술수출계약을 맺은 일본의 제약사가 계약취소소송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기하면서 취소 사유로 형질전환세포의 유래에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내부 보고 실수’로 책임을 회피하려 하다니, 코오롱의 후안무치한 행태에 말문마저 막힌다. 인보사는 사람의 정상 연골세포(1액)와 세포의 분화를 촉진하는 형질전환세포(2액)를 무릎 관절강 내에 주사로 투여하는 세계 최초의 유전자치료제다. 우리나라는 무릎관절염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만 한 해 80만명에 달한다. 치료가 어려운 중증환자들에게 인보사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경차 가격과 맞먹는 700만원을 들여 치료받은 환자가 이미 3700여명에 달하지 않았겠는가.

식약처는 투여환자에 대한 특별관리 및 장기추적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신약 및 판매 허가를 해준 식약처 역시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허가 과정에서 로비 의혹까지 제기된 상황이다. 코오롱은 400억원의 정부 지원금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원인규명과 함께 허가 과정에서 탈·불법이 없었는지 등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이번 일로 인해 국내 바이오산업이 후퇴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더욱 시급한 것은 이미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건강이다. 정부와 코오롱은 이들이 후유증 등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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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최근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 직원의 집에서 회사 공용서버를 압수했다. 삼성에피스 팀장급 직원 ㄱ씨는 삼성바이오 수사가 임박했던 지난해 5~6월 회사 재경팀이 사용하던 공용서버 본체를 떼어내 집에 숨겨왔다고 검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검찰은 회사 핵심 정보가 담긴 공용서버를 빼돌린 것은 삼성에피스의 증거인멸이 ‘윗선’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의 검찰 고발로 시작된 삼성바이오 수사가 중대 분수령을 맞은 형국이다.


삼성바이오와 미국 제약회사 바이오젠의 합작사인 삼성에피스는 ‘일개’ 자회사가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증권선물위원회는 삼성바이오가 2015년 삼성에피스의 지위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변경하면서 4조5000억원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삼성에피스 회계처리 기준 변경을 출발점으로 삼성바이오,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를 차례로 높인 뒤 삼성물산까지 합병함으로써 그룹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만약 삼성에피스의 회계처리에서 실정법 위반 사실이 확인될 경우 이 모든 연결고리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 검찰이 삼성에피스 증거인멸 과정에 그룹 차원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7~8월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소속 임원이 삼성에피스 임직원들의 휴대전화와 컴퓨터에서 분식회계 관련 자료를 삭제하도록 지휘한 정황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해당 임원과 함께 증거인멸 작업을 주도했던 삼성에피스 양모 상무(구속) 등은 이 부회장을 뜻하는 ‘JY’나 ‘합병’ 등의 단어를 검색해 문건을 삭제했다고 한다.


회계부정은 그 자체로 자본시장 질서를 뒤흔들고 수많은 투자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중대 범죄다. 더욱이 이번 사안은 한국 최대 기업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법적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검찰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사실과 증거에 따라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 신속하고도 치밀한 수사를 통해 한 점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수사 외적 요소를 고려했다가는 시민의 불신만 깊어질 것이다. 삼성 측도 검찰 수사에 협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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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중국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귀국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곳 공항 출국심사대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 여권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여권과 비자 부정 발급과 매매가 이슈가 되던 때였다. 심사관은 내 여권을 한동안 들여다보고, 또 한동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권의 사진과 내가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여권이 가짜거나 내가 가짜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나. 증명서 사진이라는 게 대개 형편없기 마련이니 굳이 실물보다 잘 나온 사진이 아니었고, 또 완전히 그 반대였던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냥 내 얼굴인 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그 얼굴이 내 얼굴이고 그 여권의 내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증명하나. 

들고 있던 가방에 다행히 다른 신분증이 있었다. 그래봤자 학교 어학코스에서 발급한 학생증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중국에서 발급한 신분증이라는 게 소용에 닿았다. 심사관이 두 신분증의 사진을 비교하고, 또 내 얼굴을 분석하듯이 날카롭게 바라보는 동안, 나는 기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기막힌 것은 어이가 없어서였고, 우스운 것은 이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확대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숨기는 것이 없으니 당당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들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믿음이 아니겠나. 그러니 무서웠던 것은 뭐가 잘못될까 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였을 뿐이다.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나는, 당신은, 누군가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

최근에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카산드라>를 읽었다. 예언의 능력을 가졌으나 동시에 그 예언을 누구도 믿지 않는 저주를 함께 받은, 그리스 신화의 바로 그 카산드라다. 지식백과식으로 잠깐만 설명을 덧붙이면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빼앗겼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러니 이 여인에게 예언의 능력은 축복이었을까, 고통이었을까. 그녀의 가장 불행한 예언은 조국인 트로이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았다.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절규는 무시되었다.

문득 드는 의문이다. 고통은 누구에게 있나. 진실을 말하였음에도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있나, 아니면 그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당면한 현실과 다가올 미래로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있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믿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거 당신이잖아 묻는 질문에 절대로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명백한 사실, 확고부동한 증거, 혹은 증언, 그 어떤 것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눈물로 호소하는 사람들.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는 거짓의 폭은 그야말로 위협적이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는 너무나 어렵지만,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어렵지만,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이토록 쉽다는 사실은 기가 막히다가 우습다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실은 통째로 무섭기만 한 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니까. 권력과 돈과 커넥션의 문제니까. 그러니 그 앞에서는 동영상도 소용없고 증거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소용에 닿는 것일까. 죽어도 나는 내가 아니라는 사람에게 당신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진실은 힘이 세다. 아니다. 사실 어떤 진실은 매우 무력하고, 슬프기까지 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카산드라의 불행으로부터 비롯된 ‘카산드라 신드롬’이라는 말도 있다. 명백한 진실이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때를 말하는 이 용어는 종종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세상을 앞서 나왔을 때 사용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빨라 이제 와서는 그 속도를 앞질러가는 어떤 아이디어를 상상하기도 힘든데, 반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자리에서 용도폐기된 예언을 거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걸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색깔론은 구태의연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다. 카산드라의 예언이 저주가 되었던 것은 아폴론의 신탁 때문이 아니다. 진실과 거짓보다 힘과 진영의 논리가 더 기본이 되는 세상이 오히려 그 이유다.

소설 <카산드라>의 작가 크리스타 볼프도 논쟁에 휩쓸렸던 인물이다. 동독 출신 작가로서 비밀경찰에 협력했던 기록으로 인해 그녀의 문학 자체에 대해서도 무수한 논쟁이 따라붙게 되었다. 크리스타 볼프는 아마도 카산드라처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귀를 기울이되, 잘 기울여야겠다. 논쟁과는 상관없이, 크리스타 볼프의 문장은 한 줄 한 줄 씹어 먹어야 하는 문장들이다. 귀 기울이듯이 읽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말들 역시, 그렇게 한 줄 한 줄 들어야 할 것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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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선택권과 생명권 둘 다 논의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국가 인구정책의 폭력과 차별의 실체는 드러나지 못했다. 실제로 여성이 선택 가능한 사회적 조건은 마련된 적이 없다. 낙태죄 때문에 안전하게 임신 중단에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했고, ‘죄’라는 규범은 성교육에서 피임과 임신 중단 교육을 통제했다. 이제 국가가 임신과 출산의 허용 가능한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번 결정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이 모자보건법이다. 14조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 한계’ 1항 1호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으로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한다고 규정한다. 낙태죄는 정상가족, 성별 규범, 성역할과 같은 규범 안에서 출산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압박한다. 반면 모자보건법은 장애와 질병을 낙태 허용 사유로 둠으로써 태어날 가치가 있는 생명에 위계를 두고 차별한다. 의학적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국민으로서 부적격한 자를 선별하는 것으로 장애인의 생명권은 위협받는다. 이 위치에 장애인뿐만 아니라 재생산 부적격자로 10대,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빈곤층 등 사회적 소수자가 놓인다. 낙태죄로 억압하는 출산의 정상성과 모자보건법의 허용 사유가 드러내는 출산의 비정상성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재생산권을 통제해 왔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선 강제 불임, 낙태 시술이 동의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중증·정신장애인 시설 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 비자발적 입소가 67.9%나 됐고, ‘다른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고’(38.3%), ‘목욕을 다른 사람과 해야 하는’(55.2%) 등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각했다. 성적 실천은 문제행동으로 낙인화되고 자위, 연애 금지라는 규율은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성폭력은 외부에 드러나기 어렵다.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이 인권 침해를 정당화해 온 것이다. 

또한 14조 3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구조에서 이러한 조항은 장애인의 의사 확인을 무시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의 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모든 장애 유형에 맞게 동의를 표시할 방법을 마련하고, 동의를 확인하는 사람의 책임을 지정하고, 지키지 않을 때 제재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장애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재생산권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 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이나, 출산비용 100만원 지원으론 재생산 권리 전반을 보장할 수 없다. 

“골형성부전증 장애가 있는 할머니 본 적 있어?” 장애 여성의 질문이다. 어느 시대, 어디서나 살았을, 또 현재를 살아갈 장애인을 상상한다. 장애와 살아갈 삶에 대한 걱정은 필요없다.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고 성과 재생산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보장하면 된다. 우선 강제 불임 실태조사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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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마침 시간이 나 선뜻 따라나섰다. 친구가 남쪽에서 하룻밤 묵고 오자는 것이었다. 도시를 벗어나야 춘곤증으로 찌뿌둥한 몸이며 미세먼지로 따가운 두 눈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연초록이 초록으로 번지느라 숨이 가쁠 남녘의 산과 들이 아른거렸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얼마 전 책에서 마주친 문구가 떠올랐다. ‘잘 쓴 시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잘 쓴 시간이라니. 내게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시간이다. 전에 비슷한 시간을 들어본 적은 있다. 이십여 년 전 직장생활을 할 때 존경하는 선배가 있었다. 업무 장악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성격 또한 남달랐다. 말 그대로 ‘칼 같았다’. 자기 기준에 어긋나면 참지 않고 바로 사표를 던졌다. 그러다가 정말 회사를 그만뒀다. 선배가 자발적 백수가 된 뒤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게 던진 한마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간이 참 달다.”

선배가 떠나고 5년 뒤 나도 사표를 냈다. 그리고 4년 가까이 비정규직으로 지냈다. 하지만 선배처럼 ‘시간의 단맛’은 맛보지 못했다. 달기는커녕 시간에서 단내가 났다. 시간에서 신트림이 올라오곤 했다. 시간에서 쓴맛, 신맛, 매운맛, 싱거운 맛을 두루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시간을 앞서가거나 최소한 동행해야 시간의 단맛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앎과 함의 거리는 아득했으니 나는 여전히 시간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남행길의 목적지는 전남 장흥. 올 초 서울생활을 접고 귀촌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삼십 년 넘게 허겁지겁 시간에 쫓기며 살던 친구가 한달살이를 해보겠다며 짐을 꾸린 것이었다. 내게 한달살이는 여행과 정주(定住)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직선(일상적 시간)과 점선(탈일상적 시간)을 포괄하는 일점쇄선, 즉 중성적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행이 관광으로 전락한 이때, 여행이 익숙한 상품으로 소비되는 이때, 한달살이는 새로운 삶을 열어나가는 ‘즐거운 실험’으로 보였다. 

연휴 첫날, 예상은 했지만 고속도로는 수시로 막혔다. 일곱 시간 반 만에 장흥 터미널에 도착했다. 친구가 둥지를 튼 집은 오래된 마을 한가운데, 지은 지 50년이 넘는 농가였다. 내려와서 첫 한 달은 집을 수선하느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담장을 없애고, 시멘트 마당을 갈아엎고, 도배장판을 새로 하고, 나무를 심고…. 내가 알던 한달살이, 즉 방 한 칸을 얻어 잠시 머무는 방식이 아니었다. 친구는 말끔하게 집을 고친 김에 아예 한 일 년 더 머물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고샅으로 나섰다. 제비 몇 마리가 낮게 날았다. 얼마 만에 보는 제비인가. 개구리 소리도 자욱했다. 고샅을 벗어나자 바로 논이었다. 물 댄 논. 모내기를 앞둔 저녁 논이 건너편 낮은 산을 비치며 빛났다.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소쩍새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을 둘러싼 느린 능선이 어두워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땅거미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잘 쓰는 시간, 다디단 시간의 초입이었다.

장흥 친구는 처음 염려한 것과 달리 사나흘 지나자 ‘시골 시간’에 적응했다.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 해가 뜨면 눈이 떠졌다. 마을 할머니들과도 이내 친해졌다. 틈틈이 둘러보니 귀촌, 귀농한 젊은이들도 제법 있었다. 녹색 가치를 중심으로 지역 운동에 투신하는 주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장흥은 귀농자뿐 아니라 시민운동가, 문화예술인이 모여드는 ‘핫 플레이스’였다.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등지를 거쳐 장흥에 터를 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장작불로 데운 온돌방. 눕자마자 꿈 없는 잠에 들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에 관한 우화가 생각났다. 시계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대포(오포)를 쏴 시각을 알렸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대포를 관리하는 군인에게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포 쏘는 시간을 어떻게 아시나요?” 군인은 시계방 괘종시계를 보고 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괘종시계는 어떻게 시간을 맞출까. 시계방 주인에게 물어보니 대포 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춘다고 말했다. 매 순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도시의 시간’이 혹시 저런 웃지 못할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저런 시간에 맞춘다면 잘 쓰는 시간이란, 단맛 나는 시간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잘 쓴 시간’은 구글 출신의 기술철학자 트리스탄 해리스가 내놓은 새로운 시간 계량법으로, 필요할 때만 온라인을 이용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신의 몸과 감각에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제안이다. 나는 잘 쓴 시간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세 가지 핵심 요소, 즉 지금(시간), 여기(장소), 나(주체)가 일치할 때가 바로 잘 쓰는 시간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쓴 시간의 주인이다. 아마 그 답에는 성장, 속도, 소유, 접속, 개인보다는 지속, 방향, 존재, 결속, 공동체와 같은 단어가 들어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저절로 눈이 떠졌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창호지를 새로 바른 동창으로 햇살이 들이쳤다. 새소리가 들렸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낯설면서도 낯익은 봄날 이른 시간이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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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공기업 경영평가를 위해 중부내륙 관광의 거점인 단양과 영월에 다녀왔다. 지난달 마지막 주 목요일 단양으로 이동하며 충주호 상류에 산재한 비경들을 감상했다. 북한강 수계의 소양강댐과 마찬가지로 남한강 수계의 충주댐은 상류지역인 단양과 영월의 발전을 제약해 왔다. 한강수계관리기금이라는 당근책에도 수도권의 물안보를 위해 희생해 왔다는 지역정서가 여전하다.

목요일 저녁 숙소에서 목격한 기다란 줄은 금요일 오전 관광특수에 힘입어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단양관광관리공단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해가 되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동남권 제조업 도시들의 쇠퇴를 보완하는 중부내륙권 서비스업 도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양의 부상은 군청과 주민들이 헌신한 결과이다. 수도권을 위해 조절되던 댐수위가 단양수중보 건설로 안정되자 유람선과 마리나 사업도 가능하게 되었다. 열악한 지방재정에도 단양군청이 투자한 만천하스카이워크나 다누리아쿠아리움은 고수동굴이나 단양 8경으로 대표되는 자연경관과 시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체류형 관광을 담보하는 자연휴양림이 각광받고 있다. 얼마 전 개장한 소백산자연휴양림은 특유의 자연경관에 너와집, 십승지, 북카페, 승마장 등과 같은 테마를 구비했다. 청정한 휴양단지 어디서나 소백산을 병풍 삼아 영춘면 벌판과 남한강 물길을 조망할 수 있다. 더불어 지역 명소인 구인사와 온달관광지가 지척인 점도 매력적이다.

단양 일정을 마치고 영월로 이동했다. 물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보았다. 단양보다 먼저 지역특화발전을 표방한 영월은 이미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된 상태이다. 영월 발전을 위한 관민의 헌신은 김삿갓계곡, 한반도면, 단종제, 박물관 고을, 별마로천문대 등과 같은 네이밍이나 시설 유치에서 잘 드러난다.

소백산맥 능선을 경계로 단양은 물론 영주, 봉화, 정선, 평창 등과 접한 영월은 오지의 길목이자 광산업의 보고였다. 1980년대 이후 석탄산업 합리화에 따른 지역경제의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지역공동체가 결속했던 것이다. 영월군 곳곳에 산재한 역사문화와 자연지리를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재창조한 열정이 당시의 성공 비결이다.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일본의 지방 창생과 마찬가지로 영월의 분투는 우리나라 자치분권의 개막을 알리는 청신호였다.

하지만 인구 4만명이 무너진 영월군의 장기 침체는 미래를 향한 열정까지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영월군시설관리공단 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광수지가 계속 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시설의 보수나 신규 사업의 발굴도 부진하다. 

영월이 슬로시티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조연이 필요하다. 우선 인프라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인접 자치단체들과 협업하거나 중앙의 지원을 유도해야 한다. 또한 동강시스타의 경우처럼 새로운 민간 투자자를 유인해 고갈된 활력을 보충해야 한다. 

약자로 전락한 지방의 도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치분권의 유용성에 대한 중앙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약탈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산업사회의 논리다.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지만 갈수록 심화될 복잡성의 무게를 감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시민이나 소비자의 감동은 다원적인 서비스 경쟁을 통해 도달 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김정렬 | 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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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안 읽기 시작하면 책과 끝내 가까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종종 책에 눈이 간다. 이것이 독서의 관성이고 책의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독서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눈으로 여러 대목을 살피며 읽어내고 요점만 잘도 골라낸다. 이에 따라 필요한 대목을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독서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책을 가까이하면 그런 능력이 자연히 는다는 말이겠다.

책 읽기를 강조해도 독서율이 빈한한 현실에서 정부가 제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19~2023년에 공공기금으로 지역의 독서에 대한 관심과 독서 활동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눈에 띄는 것은 개인 차원이던 독서가 겹쳐 읽고 공유하는 사회적 독서로 넓어졌다는 점, 무엇을 읽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읽었는가가 화두라는 점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작년에 29개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해 발족한 ‘책읽는도시협의회’의 활동에 관심이 가는 것도 그러한 독서 방식 변화에 대응하는 공공기관의 지원이 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서 동아리는 늘고 있는데 독서율은 왜 떨어질까, 책이 소외되지 않게 하는 데 공공기관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남는다.

10여일 전 개관한 송파 ‘책박물관’은  ‘책’을 주제로 한 한국 최초의 공립 박물관이다. 도서관, 서점이 아닌 박물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전시하고 활용할지 궁금했다. ‘박물관’이니까 혹시 책이 으레 과거의 기록물로서 박제되지는 않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다녀왔다.

6211㎡(약 1815평) 규모의 ‘책박물관’에 들어서자 보고 싶었던 풍경이 펼쳐졌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넓은 홀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자 편한 자세로 공간을 차지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 계단식 서가에 꽂힌 1만권의 책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단순히 책을 읽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책과 놀고 즐기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취학 전의 아이들도 1층의 별도 공간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책박물관’의 책을 완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을 만지고 들추며 책과 거리를 좁히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닳는 만큼 살가워지는 책. 출판이 손에 만져지는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2층의 상설전시장, 미디어라이브러리, 야외 정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방’이나 ‘출판편집자의 방’ 같은 공간은 책이 쓰이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책을 만드는 나도 궁금한 속 이야기가 많았다. 무엇을 어떤 필기구로 어떤 종이에 적고 지우며 그 다발을 어떻게 엮는지, 책의 여러 전 단계가 그곳에 있었다. 같은 제조업이어도 출판은 이 점이 다른 것 같다. 사라진 글자, 단어, 문장조차 이야기로 남아 책을 거든다. 이 사정을 알자 책이 한결 생물스러웠다.

책에 몰두한 방문객을 관찰하면서, 책이 개인의 인생에 어떤 이익을 금세 남겨주지는 않아도 책의 메시지와 좋은 문장을 읽은 시간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의 어떤 고양감이며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들은 마음의 근육으로 남을 것이다.

독학으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스스로 새로운 길을 낸 안도 다다오가 떠오른다. 그는 ‘책과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했다고 고백했다. 씹어 먹듯이 읽은 책과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던 여행이 그를 키웠다고. 그의 말마따나 외부의 어떤 힘이 자신에게 들이치는 것보다 스스로 씹고 맛보고 이해하는 주체적인 수용이 오래 남는다. 이 덕목을 키우는 데 책만큼 간단하고 확실한 게 있을까.

작가 프루스트는 말했다.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읽는 것이다. 적어도 책만큼은 마음 놓고 빠져들어도 되는 이유다.

‘책박물관’ 같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계층을 떠나 누구나 책을 가까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책 안팎의 자료를 열람하면서 책을, 나아가 자신을 읽고 삶의 결을 다듬을 수 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주체적일 수 있는 권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러니 공공의 책 공간이 늘어야 한다. 복지란 개인에게 수렴할 때 완성되는 게 아닌가. 

책은 가까이에 두면 읽게 된다. 읽고 공유하면 책의 세계는 넓어진다. 이같은 믿음으로 독서문화의 진흥은 시작될 수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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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는 이제 집집이 씻나락을 꺼내 담그고, 논 못자리에 물을 대고 있다. 밭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 두고 나면 논일이 시작된다. 이 무렵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 뒷간 거름을 내는 것. 뒷간은 처음 지을 때부터, 어떻게 지어야 조금이라도 쉽게 똥오줌을 모으고, 거름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었다. 집이 마을 한복판이라 뒷간에서 냄새가 나거나, 벌레가 끓는 것도 안될 일이고, 뒷간에서 꽤 시간을 끌기도 하니까 안에서도 좀 그럴듯해 보이면 좋겠고. 다행히, 십 년 동안 별다른 문제 없이 그럭저럭 뒷간을 쓰고 있다.

똥오줌을 누는 걸 두고 ‘눈다’고도 하고, ‘싼다’고도 한다. 요즘은 어감의 차이 정도로만 둘을 나눈다. 사전에도 ‘싼다’는 ‘눈다’의 속된 표현이라고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둘을 가르는 것에 대해 김수업 선생은 다스림의 차이라고 했다. 스스로 잘 다스려서 내보내는 것이 ‘누다’라면, ‘싸다’는 아이가 바지에 ‘싸’ 버리는 것처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뒷간을 지어 똥오줌을 모으고 거름으로 내면서 지내는 동안, 동네 할매들이 ‘누다’와 ‘싸다’를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 전에도 들었겠지만, 거름을 내면서야 들리게 되었을 테지. 할매들 기준에는 다스림 말고 ‘쓰임’도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싸는 것은 ‘싸 버리는’ 쪽이라면, 누는 것은 ‘누어서 모아 놓는’ 쪽 같았다. “옛날은 집이 멀어도 남의 집서 안 싸고, (거름하려고) 집에 와 (똥을) 눴어” 하는 식으로. 할매 말에 따르면 시골에 와서야 똥을 ‘누는’ 삶을 살게 된 셈이다.

식구가 다섯이니, 뒷간 거름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적지는 않다. 여기에 풀 거름, 재 거름을 더한 것이 거름의 전부. 늘 그것으로 기른 채소와 곡식을 먹고 지내서인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고(실제로 통마다 쌀겨만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양새다.) 모자라지는 않을까만 헤아린다. 아이들도 이 거름으로 밭에서 키운 게 맛이 좋다는 걸 알아서, 뒷간을 쓰고, 오줌통에 따로 오줌을 모으고 하는 일에 익숙하다. 먹는 것은 즐겁고, 누는 것은 개운하다고.

처음에는 그동안 살면서 익혔던 습관하고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뒷간을 만들어서 그걸 쓰고, 거름을 모으고, 다시 논밭에 내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한 고개, 한 고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집에는 양변기도 있었는데. 의무감으로 쓰던 뒷간은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냥저냥 일상이 되었다. 뒷간에 앉으면 개울 건너 감나무 밭이 보이는 것도 더없이 익숙한 나날의 풍경이고. 물론 그걸 오래 보고 있지는 않는다. 누는 것은 찰나일수록 좋고, 그래야만 하니까. 시간이 짧을수록 상쾌한 기분도 더 들고, 몸에 병도 생기지 않는다. 온몸으로 겪은 사람의 이야기니까 새겨듣는 게 좋다. 이 대목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글을 하나 따로 써야 할 텐데.

거름을 내는 것은 그리 일이 많지는 않아서, 왕겨가 수북이 쌓인 통을 여남은 개 꺼내어 옮기기만 하면 된다. 뒷간을 쓰면서 때마다 왕겨를 붓고, 통이 차면 그걸 바꿔 준다. 그러면 통을 가져가서 ‘거름간’에 쏟아붓는 것으로 일이 끝난다. 오줌통도 따로 모으고. 이게 제법 간단해진 것은 최근에 나오는 캠핑용품 덕이다. 캠핑장에서 쓰이는 변기들이 적당히 똥오줌을 가리고, 재어 놓고, 옮기고 하는 데에 쓰기 좋게끔 나와 있어서다. 변기 말고도, 캠핑 바람이 불면서 새로 쏟아져 나오는 캠핑용품 가운데 시골 생활에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꽤 있다. 이런 것은 도시에서도 쓸 수 있겠다 싶은 것도 있고.

예전에 서정홍 선생이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도시 텃밭 모임에 갔더니 다들 오줌통을 줄줄이 들고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시골에서야 집 생긴 모양새나, 가까이에서 농사짓는 것이나 어떻게든 똥오줌을 모아서 거름 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아파트에 살면서도 그렇게 애쓰는 분들이 있다니. 그렇게 가꾼 텃밭 채소들, 얼마나 맛이 좋을까.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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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마치 1980~1990년대 어디쯤 와 있는 건가, 놀랄 때가 많다.

집들이 간 집에서는 음료로 참기름 병에 담긴 밀크티를 내온다. 예전에 엄마가 성남 모란시장에서 방금 짠 거라며 사오시던 그 플라스틱 빨간 뚜껑의 투박한 참기름 병이다. 20대 딸은 청재킷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디스코 머리로 양 갈래 길게 땋아줘, 힙하게”라며 머리를 내민다. 그날 디스코 머리 사진을 올린 딸아이의 인스타그램에선 친구들이 예쁘다고 난리가 났다. 음원차트에서는 인디밴드 잔나비의 1980~90년대풍 노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빌보드 어워즈에 빛나는 방탄소년단(BTS)의 신곡 ‘작은 것들을 위한 시’와 1, 2위를 나란히 한다. 이게 뭐지, 어리둥절하다. 시대적 감성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감성이 ‘핵인싸’란 말인가.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의 유행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라거나 ‘디지털에 지친 아날로그’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최근 전방위적으로 나타나는 레트로의 열풍이 과거보다 더욱 강력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즘옛날’을 살아가는 기분이다. ‘노인들의 홍대’로 불리던 서울 동묘 벼룩시장엔 주말이면 패셔니스타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핫아이템을 찾으려고 몰려든다. 젊은이가 주고객층인 편의점업계에서도 ‘경양식 치즈함박도시락’ 등 옛 입맛을 살린 신제품 경쟁이 치열하다. 레트로는 아이러니하게도 IT산업에서도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앱) ‘구닥’의 성공은 흥미롭다. 이 앱은 필름카메라처럼 24장을 찍고 나면 한 시간 동안 더 사진을 찍을 수가 없고, 찍은 사진을 확인하려면 무려 3일을 기다려야 한다. 수십 수백장을 몇 초 만에 찍은 후 바로 저장하고 삭제해 버리는 시대에 ‘느린 불편함’의 경험을 돈 주고들 산다.

‘요즘옛날’이란 표현은 지난해 말 2019년 트렌드를 소개하며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썼던 말이다. 김 교수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핵심인 ‘레트로(복고)’가 아니라 젊은 세대들이 옛것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요즘옛날, 뉴트로(Going New-tro)’가 소비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트로’가 과거의 재현이라면 새로운 과거, ‘뉴트로’는 과거의 새로운 해석으로 앞으로 브랜드 헤리티지와 아카이빙(archiving)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했다.

“기술의 편의성과 반비례해 자기 통제권을 잃어가며 무력감에 찌든 N포세대에게 과거에 대한 동경심은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80년대를 겪지 않은 1020세대가 그 시절을 동경하는 것은 장밋빛 미래가 없는 현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팍팍한 현실 탓인지 배부른 투정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즘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유명한 것보다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뉴트로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이다.”(트렌드 코리아 2019) 기성세대에겐 ‘추억’ ‘향수’로 정의될 수 있지만 젊은 세대의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면서 ‘설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변에 요즘의 ‘레트로’ 혹은 ‘뉴트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봤다. “요즘 애들, 무조건 재밌고 희귀한 거 좋아하니까 유행하는 거 아닐까요”(50대 직장인), “불황기에는 원래 복고가 유행합니다”(60대 은퇴자), “마케팅의 주요 포인트이죠”(30대 마케터), “세대차가 덜 느껴져요”(40대 직장인), “그때를 한번 살아보고(경험하고) 싶은 거예요”(90년대생 학생)…. 어떤 이는 일종의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 연관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는 게 갈수록 팍팍해지면서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추억만을 기억하려는 기억왜곡 심리현상이 일부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

여러 대답 중 가장 귀에 들어온 것은 ‘그때를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젊은이의 말이었다. 이유는 우리가 짐작하는 그대로다. 속으로는 ‘나도(우리도) 그때 참 힘들었어. 모든 게 불확실하고 얼마나 모순됐는 줄 알아. 정말 개판이었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때는 장밋빛, 청사진,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 나아갔으니까, 지금과는 달랐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마지막 저서인 <레트로토피아>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말하며 레트로토피아는 “분통 터질 정도로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 원천”이라고 했다. 유토피아를 말하지 않는 시대, 나부터 ‘요즘옛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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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중엽 에티오피아. 한 목동이 염소가 딸기 종류의 식물을 먹은 뒤 기분이 좋아 들뜨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이 내려주신 것’이라면서 근처 수도원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사제장은 ‘악마의 음식’이라고 저주한 뒤 불구덩이에 집어던졌다. 그런데 식물은 불에 타면서 감미로운 향기를 냈다. 이에 매료된 한 수도승은 불 속에서 꺼내 물에 타서 먹기 시작했고, 수도승 사이에 퍼졌다. 최초의 바리스타라고 할 수도승이 없었다면 커피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한다. 여기에는 프란츠 조지 콜시츠키라는 폴란드 출신 터키 통역관의 영웅담과 관련이 있다. 그는 1683년 터키군이 빈을 포위했을 때 포위망을 뚫고 폴란드군과 연락해 폴란드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터키군이 서둘러 도망가면서 버린 콩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낙타에 먹일 사료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콜시츠키는 아랍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어 이것이 커피 원두임을 알았다. 그는 빈 시장으로부터 받은 사례금으로 이 콩을 사고 커피 전문점 블루 보틀을 세웠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다. 

미국 커피전문점 브랜드 블루보틀이 서울 성수동에 국내 1호점 문을 연 3일 오전 가게 일대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미국의 프리랜서 클라리넷 연주자인 제임스 프리먼은 2002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원예창고를 빌려 커피콩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커피 하우스를 블루 보틀이라고 이름 지었다. 유럽에 처음으로 커피를 전파했듯이, 새로운 커피를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뜻에서다. 블루 보틀은 커피업계의 애플로 불린다. 가장 중점을 두는 감성 마케팅이 애플과 유사해서다. 매장 분위기도 애플의 콘셉트를 따라서 단순화를 표방한다.

지난 3일 서울 성수동에 한국 블루 보틀 1호점이 개장했다. 미국 이외의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개장 소식이 알려지면서 입장에만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고객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새 가게가 문을 열면 호기심에 많은 사람이 몰린다. 이것을 이른바 ‘오픈발’이라는 것이다. 블루 보틀은 장점도 있지만 맛이 별로고, 서비스가 느린 데다, 가격이 비싸며, 와이파이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등 지적도 많다. 한국시장 정착 여부는 초기 열풍이 식은 뒤에 가능할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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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김용택(1948~) 


우리의 살림은 산 아래 혹은 물가에서 이뤄진다. 그 공간에서 세간을 갖추고 한집안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다. 기쁜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다. 보람이 있어서 여한이 없다고 여길 때도 있고, 회한이 남을 때도 있다.

시인은 그 옛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산처럼 물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산등성이가 부드럽게 뻗어 내리는 산처럼 온순하게 살고자 바라고, 스스로 낮추면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물처럼 선하게 살고자 바란다. 그리고 쓴 시(詩)들이 바람처럼 쉬웠으면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불어오고 불어가는 줄을 느낄 수 있는 한 줄기 맑고 시원한 바람 같았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자연과 더불어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 크고 너그러운 안목을 오늘은 오래 생각해보아야겠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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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의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자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직장인이다. 전업주부인 어머니는 평생 알뜰히 살림을 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갔으며 아이들 교육에 헌신했다. 명희는 덕분에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했고 겉보기에 구김살 하나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자살을 시도하고 우울증 진단을 받기까지 명희는 ‘문제없는’ 젊은이였다. 알고 보니 명희의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가족을 통치했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폭언을 일삼았으며, 간혹 여자 문제로 어머니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교회 봉사 이외 모든 시간을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학업을 강력히 통제·관리하는 데 몰두했다. 어린 시절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명희에게 딸의 행동거지를 꾸지람하며 입막음을 강요한 사람도 어머니였다. 명희는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갈등적 상황에는 최대한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학습했다. 한 번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심지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부모의 위선을 지켜보며 공부하는 기계로 키워졌다. 

질문되거나 해석되지 않은 채 봉합된 경험은 성인이 되자 비로소 균열을 일으키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학교에서 인권 수업을 수강하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어렴풋이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명희는 스스로 가족의 희생자라 여기며 부모에 대한 복수의 방안으로 자살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명희의 부모도 다른 결의 ‘가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명석한 두뇌와 남다른 성실함으로 서울의 명문대학에 합격했고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대기업의 이사로 승승장구하며 온 가족의 자랑이자 대들보가 되었다. 돈 버는 기계로 살아가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폭음과 폭력적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5남매의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는 별로 똑똑하지 못한 남자 형제들의 학비를 대느라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남자가 최고라는 생각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낮은 자존감은 물질적인 보상 심리로 더욱더 강화되고 못다 한 공부에의 한은 자식들에게 투사되었다. 개인적 원망과 울분은 교회를 통해 해소해 왔다. 두 사람은 모두 가족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고 ‘가족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했다고 여긴다. 

사실 명희네 가족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가족과 가족 간 거래이자 이성애 남녀의 법적 계약이며, 성별 고정관념이 가족통치의 핵심 가치로 작동하고, 물질적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편견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일면 희생자가 되어 왔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적’ 가족과 사회의 모습을 구현시키는 도구로 충실할 때 칭찬을 받았고 남다른 질문을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면 꾸지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좋을 말,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행동을 체득하기 위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지 못했다. 행복한 삶이라 여겨지는 행동과 물건을 갖추는 일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배웠다. 남 보기에 그럴싸한 모습 이면에 긴장과 갈등, 모순과 위선이 가득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거짓 자아와 진정한 자아 사이의 균열을 체득했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고립감을 경험하지만 정작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알지 못하고, 억눌린 감정은 때때로 폭력적인 행동으로 폭발하기도 했다. 

5월은 가정의달이다. 껍질만 남은 허망한 구호가 아니라 ‘이상적 가족의 신화’를 성찰하고 허물어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각자 어떤 가족에서 자랐으며 어떤 가족을 상상하고 가꾸어 왔는가. ‘이상적 남편’ ‘이상적 아내’ ‘이상적 자녀’라는 명분에 매달려 정작 개인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남의 눈을 의식해 겉모습을 꾸미고 위장하며 가면이 벗겨질까 전전긍긍하는 사이 나의 자아는 파괴되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였지만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 부모가 되는 일은 선택일 수 있음부터 인정하자. 독립된 개인과 개인의 관계 안에 사랑을 위치 짓고, 함께 살아가고 성장하는 친밀성의 잠정적 결사체로 가족을 다시 상상하자. 비로소 영롱히 빛나는 자아들이 연결된 평등한 ‘가족들’의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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