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선생이 훌륭한 학생을 길러낸다. 대학원 학생이 뛰어난 학자이자 선생으로 성장해야 우수하고 경쟁력 있는 고등교육기관이 생긴다. 고등교육 혁신에서 연구자 지원책이 필수적인 이유이다.

교육부는 고등교육 혁신방안을 6월 안에 발표할 계획이지만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첫째, 학문사회가 하나의 집단으로서 새로운 기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강사법 논란에서 드러나듯, 대학이 망가지고 있지만 전임교수가 비정규교수와 알차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과거의 정책 실패에 관한 뼈저린 자기비판이 부족한 교육부가 주도하는 한, 학문사회가 그나마 지닌 혁신 의지와 역량도 죽이기 십상이다. 셋째, 상당한 재정투입이 따라와야 하지만, 현재 정부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문사회과학은 공부하려는 이가 점점 줄고 이미 배출된 박사들은 자리가 없어 말 그대로 붕괴 직전이다. 자연과학 등 이공계도 어렵기는 매일반이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공계 박사과정생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통해 등록금 면제와 생활장학금 혜택을 받지만, 인문사회계는 대개 자기 돈을 내고 공부한다. 장차 전임교수가 될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에서 이처럼 어려운 환경은 젊은이가 자신있게 공부길을 택하는 것을 막는다.

인문사회과학을 택한 박사 신입생에게 등록금 면제와 최소 5년간 월 150만원의 생활장학금을 줘야 엄정한 학사관리 속에 학생을 신명나게 키울 수 있다. 자연스럽게 탁월한 신진 학자가 우수한 학위논문과 함께 배출될 것이다. 물론 전국 인문사회계 대학원 정원 조정과 네트워크화 등의 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

대학원 혁신을 전제로 매년 박사과정생 1만명에게 생활장학금을 줄 때 재정 부담은 얼마일까? 등록금을 연 800만원으로 잡고 1인당 2600만원, 연 2600억원이 든다. 현지조사나 해외연수 등 논문준비와 집필을 지원할 재정으로 400억원을 더한다면 연 3000억원이 필요하다.

당장 과도한 부담이라는 반발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박사를 따는 것이 외국 유학보다 비용과 시간이 더 든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수한 한국 학생이 외국 대학에 가면 생활장학금까지 받고 공부한다. 언제까지 고급의 인재 양성을 해외 대학에 의존하는 식민지적 학문 풍토를 방치할 셈인가. 압도적으로 미국 위주인 유학에서 돌아와 교수 자리를 잡는 경로는 진지한 학문의 길이 아니라 안정된 직장을 위한 투자의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학자는 됐고, 교수가 꿈!”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캠퍼스에서 오갈까.(유학 무용론으로 오해 말기 바란다. 유학이나 해외연수가 필수인 분야도 많고,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한 한국에서 여성에게는 아직 국내 수학보다 유학이 현명한 선택이기 쉽다.)

어렵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전임박사들을 돌아보자. 전국의 인문사회계 미취업 박사는 3만명을 훌쩍 넘지만, 한국연구재단의 비전임박사 대상 각종 사업 지원자는 지난 3년간 놀랍게도 평균 4300여명에 불과하다. 이는 비전임 연구인력 전체의 15% 미만이며, 이들의 실정이 사업 응모에 필요한 연구실적을 채우지 못할 만큼 열악하다는 방증이다.(물론 부실한 국내 대학원에서 허술하게 배출되는 박사도 많다.)

지난 4월 교육부는 비전임박사 대책으로 ‘인문사회 학술연구교수’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연 3000명을 지원하겠다는 비교적 진전된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단일 유형으로 통합하고 지원자를 1000명만 늘려 연 4000명으로 한다면, 현행의 지원자격을 충족하는 박사를 거의 모두 선발하는 획기적인 강점이 있다. 수혜자에게 직접 혜택이 가니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 지원금 증액보다 효과적이며, 부실대학 지원 시비와도 무관하다. 이들의 소속도 다변화하여 대학에서 연구하며 강의를 맡거나 각종 연구기관에서 원하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고, ‘고등인문사회과학원’의 실험에 뛰어들 수도 있다. 4000명의 학술연구교수에게 1인당 연 4000만원의 급여를 주되, 지원 인원을 매년 600명씩 늘려 10년 후 최종적으로 1만명을 지원한다면 연 4000억원이 필요하다.(늘리기만 하면 600명보다 적어도 좋다.)

인문사회 분야의 박사생활장학금 도입과 비전임박사를 위한 학술연구교수라는 새 직군의 정착에 드는 재정은 당장은 2000억원 미만이며, 점차 늘어나 10년 후 최종적으로 연 7000억원(+물가 인상분) 이하가 든다. 물론 큰돈이며, 투자의 타당성 확보를 위해 준비하고 개혁할 일도 많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정을 감당치 못할 만큼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취약한가? 이 돈이 아까울 만큼 인문사회 분야 학문연구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가?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뇌물수수 및 성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9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김 전 차관이 검찰에 나온 것은 2013년 11월 1차 수사 이후 5년6개월 만이다. 당시 소환조사가 비공개로 진행된 만큼 언론의 포토라인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전 차관은 성범죄 혐의와 관련해 두 차례 수사를 받았으나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세 번째 수사가 이뤄지는 사실 자체가 과거 수사의 부실을 입증한다. 

2005~2012년 건설업자 윤중천(58)씨로부터 수천만원 상당의 금품과 향응을 받고, 여성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김학의(62) 전 법무부 차관이 9일 오전 ‘김학의 의혹 관련 수사단’이 있는 동부지검으로 출석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김 전 차관이 받고 있는 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건설업자 윤중천씨로부터 거액의 금품과 골프 접대 등 향응을 받았다는 뇌물수수 혐의다. 검찰은 윤씨 조사 과정에서 “김 전 차관이 ‘목동 재개발사업을 도와줄 테니 사업이 성공하면 집을 싸게 달라’고 요구했다”는 등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관건은 공소시효다. 김 전 차관이 수뢰 혐의로 기소되려면 총 뇌물액수가 1억원 이상이어야 한다. 이 경우 시효가 15년으로 늘어난다. 김 전 차관은 특수강간 또는 불법촬영 혐의도 받고 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10일 (출처:경향신문DB)

‘김학의사건’이 오랫동안 공분의 대상이 된 것은 혐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시민은 1·2차 수사 때 검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했고 이 과정에 ‘박근혜 청와대’가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더 주목한다. 이번 수사를 앞두고도 김 전 차관이 ‘도피성 출국’을 시도하기 전 자신이 출국금지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소속 법무관 2명이 김 전 차관의 출금 여부를 조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아직도 검찰 내부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수사단은 그럼에도 부실수사 규명 부분에 대해선 뚜렷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만약 검찰이 김 전 차관의 비리를 밝혀내 재판에 넘긴다 해도 과거 수사의 잘잘못은 가리지 않은 채 넘어간다면 시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이다. 검찰은 제 살을 도려낸다는 각오로 수사하는 것만이 오욕을 씻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저녁 취임 2주년을 맞아 KBS와 특집 대담을 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KBS 기자와 인터뷰 형식의 일대일 대담을 통해 경제 사회 외교안보 등 현안에 대한 입장과 집권 3년차 국정운영 방향을 밝혔다. 소통 방식으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택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집권 3년을 맞아 여전히 숙제로 대두된 협치와 관련, 문 대통령은 여야의 ‘패스트트랙 대치’에 답답함을 토로하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가동을 강조했다. 하지만 공전되고 있는 협의체를 어떻게 가동하고, 이를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할 것인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구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북 식량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여야 대표 회동 제안도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다만 문 대통령은 최근 사회원로와의 간담회에서 ‘선 적폐청산 후 협치’ 원칙을 밝혔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한 사실이 없다”고 정리했다.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는 만큼 협치의 복원을 위해 문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인사 문제에 대해 문 대통령은 “인사실패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임명한 장관들이 일을 잘하고 있고,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장관에도 좋은 평이 많다고도 했다. 각종 도덕적 흠결이 논란이 되어 낙마한 고위공직 후보자들이 이미 과거 정부를 추월한 상황을 감안할 때 현실과 유리된 인식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검증 단계에서 흠결을 밝히지 못했거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고 “검증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도 했다. 이러한 판단하에서는 문 대통령이 제안한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책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KBS가 생방송으로 진행한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대통령에게 묻는다>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경제에 대한 인식도 국민들이 체감하는 것과는 온도차가 컸다. 1분기에 마이너스 0.3% 역성장한 상황에 대해 “2분기 이후 나아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고용도 “2, 3월에 각각 25만명 가까이 늘면서 개선되고 있다”며 “올해 일자리 목표를 당초 15만명에서 20만명으로 늘려잡았다고”까지 했다. “청년실업률도 나아지면서 고용의 질도 개선됐다”고 강조했다. 수출도 3월부터는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이후 수출은 5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 중이다. 1분기 경상수지 흑자도 6년9개월 만에 최저다. 국내 제조업 경쟁력이 낮아지고 미·중 무역갈등에 따른 세계교역량 축소로 수출 부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문 대통령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했으나 사회와 경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는 시민의 관심사나 애환을 가감 없이 전하고 대통령의 생생한 답변을 듣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내용에서도 현실과 괴리가 없지 않았다. 이참에 소통 방식을 개선하고, 국정 쇄신을 위한 깊이 있는 성찰이 요구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 우리 사회 주요 화두는 ‘청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졸자의 절반 이상이 취업을 하지 못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이나 불안정한 일자리들이 대부분인 현실이 15년 이상 지속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찾는 데 11개월 정도 소요된다. 1년 이상 장기 미취업 청년도 22만명이 넘는다. 이 시간 동안 청년들은 생계와 취업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일자리를 상실했거나 일 경험이 없는 청년은 실업급여와 같은 소득지원도 받지 못한다. 그사이 신용불량, 건강이상, 사회단절 같은 문제들이 깊어지고 있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정부정책으로 등장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시기였다. 2003년 ‘청년실업 종합대책’ 발표 때부터다. 약 15년이 흐른 지금까지 정부정책은 고용 문제 중심이었다. 2004년 제정된 ‘청년실업해소 특별법’과 2023년까지 연장된 ‘청년고용촉진 특별법’ 또한 고용과 실업에 초점을 둔 법률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2018·3·15)도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10여곳의 지자체에서 시작한 청년수당이 ‘청년구직활동지원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4월1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서 엄창환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는 경실련, 참여연대,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소비자연맹 등 진보, 보수, 중립성향 단체와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100여명이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의 청년정책은 어떤가. 미취업 청년들에게 정부는 40여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많다. 이행기 청년 노동시장의 특성이나 삶의 조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취준생, 자발적 이직, 불안정 고용, 니트(NEET)까지 매우 다양한 위치에 있는 것이 청년이다. 실제로 2019년 서울지역 2000명의 청년들에게 ‘개인의 행복한 삶의 중요도’를 물었더니 다양한 가치관과 상상력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인간관계를 통한 안정감’이나 ‘건강한 정치문화와 시민으로서의 참여’ 그리고 ‘사회적 지위 등 사회로부터 얻는 안정’이 5위 안에 들었다. 이는 청년들의 가치관이 경제적 가치와 휴식과 문화 이외에도 다양하게 확장되어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 당·정·청은 청년대책을 발표했다.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을 추진하고, 총리실 산하에 ‘청년정책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청와대는 ‘청년정책관실’을 신설한다고 한다. 앞으로 245개 지자체에 청년 관련 행정조직이 만들어지고 지역에서 청년 욕구에 부합한 정책이 마련될 것 같다. 이제 우리 사회가 청년정책 제도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만 과거 정부가 발표한 청년정책들이 왜 실패했는지부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의 수많은 보고서들이 왜 청년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는지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앞으로 청년의 삶에 다가가는 정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 과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청년정책은 청년 당사자들이 정책을 발굴·제안·결정하고 이에 대한 예산 편성과 집행까지 설계할 수 있도록 정책과정이 혁신적으로 변화해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있다. 아마도 정책방향과 제도는 유럽연합(EU)에서 2013년부터 권고한 ‘청년보장제도(youth guarantee)’가 참고할 만하다. 청년보장제는 청년의 삶과 여정에 초점을 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정책이다. 물론 정책운영 모델은 서울시의 청년청, 청년의회, 청년정책네트워크, 지원조직 사례 등을 통해 보다 더 진전되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난 3월 서울시 ‘청년시민회의’ 모임이 열린다기에 찾아가 봤다. 40개 분야별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0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엇이 그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을까.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일까. 국제노동기구(ILO)는 청년의 즉각적인 구직활동을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취지는 국가가 개인적 배경과 관련 없이 모든 청년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청년. 이제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사회 주체로 미래를 설계하는 모습에 중앙과 지방정부 그리고 국회가 답을 할 때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미국 백악관 사무실이 등장한다. 노회한 공화당 정치인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세상을 삼킬 듯한 기세로 상대방을 응시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보좌관에게 3가지 사항을 지시한다. “입을 다물 것, 시키는 대로 할 것, 충직할 것.” 영화 <바이스>에 나오는 장면이다. 정치인의 이름은 도널드 럼즈펠드, 그의 신임 보좌관은 딕 체니. 시대적 배경은 닉슨 대통령의 집권기다. 

이후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에 사임을 선택한다. 정치생명이 막을 내린 닉슨과 달리 딕 체니는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 와이오밍주 하원의원, 공화당 원내총무, 국방부 장관, 미국 석유시추회사 대표이사라는 직책을 차례로 맡는다. 

부와 권력을 모두 움켜쥔 야심가. 정치인 부부모임에 참석한 아내가 그에게 귓속말을 한다. “절반은 우리를 좋게 보고, 절반은 우리를 경계해”라고.  

미국 공화당 현대정치사를 시간순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조지 W 부시가 등장한다. 대선후보로 나오려는 그는 딕 체니에게 부통령직을 거듭 제안한다. 조지 W 부시는 디테일에 약한 자신의 구멍을 채워줄 2인자가 필요했다. 딕 체니를 향한 아내의 충고가 이어진다. 그녀는 정치계로 재입성하려는 남편에게 부통령이란 대통령이 죽는 날만 기다리는 자리라고 폄하한다. 순간 딕 체니는 2인자의 딜레마에 빠진다. 

예스맨의 기질을 방패 삼아 정치계에 입문한 딕 체니. 그는 발톱을 숨기고 권력의 갈림길에서 2인자의 태도를 고수한다. 침묵, 순종, 충성이라는 가부장적 정치관을 밑천 삼아 딕 체니는 내로라하는 권력자의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아남는다. 고민 끝에 그는 조지 W 부시에게 흥미로운 역제안을 내놓는다. 곰과 여우의 중간지점을 오가던 거물 정치인의 선택은 대통령 권한의 나눠먹기였다. 

영화 <바이스>에서 배우 크리스찬 베일(왼쪽 소파에 앉은 사람)은 딕 체니를 완벽하게 연기한다. 콘텐츠판다 제공

부통령직을 승낙하되 군사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길 법적 근거를 달라는 요구가 2인자의 승부수였다. 대통령직 외에는 다른 계산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지 W 부시는 정치8단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인다. 러닝메이트의 제안에는 자신이 대표직을 맡았던 핼리버튼이라는 기업과의 유착이 깔려 있었다. 2인자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파로 알려진 정치 선배 럼즈펠드를 진영에 끌어들인다. 

딕 체니는 2인자보다 낮은 위치에 있던 부통령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다. 군사권을 움켜쥔 부통령에게 9·11사태는 전쟁을 벌일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럼즈펠드를 비롯한 매파가 포진하고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아들 부시는 부통령의 대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당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까지 합세한 이라크전은 60여만명에 달하는 이라크인의 생명을 앗아간다. 

전쟁 이후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 핼리버튼의 주식은 500%를 상회하고, 현직 부통령이 벌어들인 스톡옵션은 무려 113억원에 이른다. 영악스러운 2인자의 최종 목표는 부의 축적이었다. 그의 질긴 정치수명은 여기까지였다.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라크전의 설계자가 바로 딕 체니와 측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공화당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당 출신의 오바마가 당선된다. 

2인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1인자의 자리를 넘보지 말아야 하며, 1인자의 약점을 최소화해주는 동시에 강점을 극대화할 것. 2인자의 공을 감추고 1인자에게 공을 넘겨줄 것. 나열한 교과서적인 조건에는 변수가 도사린다. 영원한 1인자가 없듯이 영원한 2인자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아닌 권력에 충성하는 2인자는 1인자의 수하에서 호시탐탐 자신만의 권력을 펼칠 기회를 노린다.  

권력 앞에서는 여우의 가면을, 국민 앞에서는 곰의 가면을 택했던 정치인 딕 체니. 그는 2인자의 자리를 이용해 1인자의 권력을 향유했던 인물이다. 딕 체니는 무려 8년간 부통령의 자리를 사수한다. 미국만의 안보를 미끼로 안락한 권력을 누렸던 2인자의 배후에는 꼭두각시 대통령이라는 그늘막이 존재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연말에 꼽는 올해의 10대 이슈 중에 ‘미세먼지’가 있지 않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굵직한 사건이 터지는 나라에 살아 웬만한 것엔 무감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확인하는 건 미세먼지 농도다. 미세먼지야말로 우리 삶의 지배자다. 하지만 대책은 보건 마스크를 착용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라는 것 정도다. 그런데 이 권고를 염장 지르는 일로 받아들일 이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바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인 말이다. 논밭이 직장인 농민들도 대표적인 옥외 노동자다. 미세먼지 피해를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농민들은 법률상 ‘근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산업재해법령에 농어업인을 추가해야 한다는 법안도 최근에야 발의됐다. 

농촌은 미세먼지의 주요 피해 지역이다. 일단 밖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건강 문제가 있다. 농민들이 고령이기도 해서 도시 기준으로 보면 노약자이지만 농업 노동을 감당한다. 마스크를 쓰라 하지만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일하기가 번거롭고 결정적으로 마스크 값도 부담이다. 그래도 조심하시라 했더니 “어차피 죽을 날 받아놓은 인생” “농민은 빚으로 죽으나 먼지로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서늘한 대답이 돌아온다. 가축들도 미세먼지를 그대로 마셔야 한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가축들 눈에 눈곱이 끼고 콧물이 흐른다. 작물들은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아 품질이 떨어지고 수확량이 줄어든다. 미세먼지 때문에 야외활동이 줄어들면 고기 소비도 줄고, 그만큼 상추를 비롯한 쌈채 소비도 부진하다. 머리카락 굵기보다 더 얇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미세먼지의 위력이 도시와 농촌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태세다.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농촌 자체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 오염원도 적지 않다. 축산분뇨에서 나오는 암모니아 가스나 노후 농기계 매연, 영농 폐부산물 소각도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제대로 쓰레기 수거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소각을 하는 일이 많다. 또 워낙 고가인 농기계는 아무리 낡아도 손쉽게 교체할 수 없다. 게다가 농기계는 휘발유가 아닌 경유로 움직이다 보니 영농철에 농기계가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도시 못지않다. 미세먼지 주요 대책으로 내세우는 대중교통 이용도 대중교통체계가 열악한 농촌에선 별 소용이 없다. 자가용 없이는 생활이 곤란한 곳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미세먼지를 마시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 지금의 농촌이다. 

농촌 미세먼지 대책도 이제야 조금씩 마련되고 있다. 정부는 우선 영농 폐기물의 소각이라도 막기 위해 6월 한 달간 영농 폐기물을 직접 수거하겠다고 밝혔다. 농기계 배출가스 저감장치 부착을 지원하고, 노후 농기계의 단계적 폐기도 계획 중이다. 무엇보다 축산분뇨 처리시설의 고도화를 추진하겠다는 ‘결심’도 밝혔으나 이는 축산업의 현실과 충돌하기 때문에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언가라도 해보는 것이 낫지만 농어촌 지역 81곳에는 미세먼지 측정소조차 없어 먼 지역의 미세먼지 농도로 상황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소비자들의 90% 정도는 농촌의 미세먼지가 걱정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혹시 미세먼지가 농작물에 흡수되는 건 아닌지, 노지 재배 채소와 과일은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답했다. 동시에 몸속의 미세먼지 배출에는 어떤 농산물이 좋은지가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세상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가 ‘성찰’을 잃어버리면 퇴행밖에 없다. 성찰은 ‘더 나아지겠다’는 의지와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찰은 ‘염치’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과거를 ‘객관의 거울’ 속에 넣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일인 까닭이다.

자유한국당이 선거제 개편안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국회를 처음 점거한 지난달 25일 그들은 “독재 타도, 헌법 수호”를 구호로 외쳤다. 인간띠를 두르고 국회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자못 비장했다. 아수라장이었던 ‘동물국회’ 내내 그들은 여야 4당의 선거제 합의를 ‘좌파 독재’로 몰아세웠다. 그 내용의 황당함은 물론이거니와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정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45년 전인 1974년 4월25일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으로 시작되는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트렸다. ‘10월 유신독재’를 한창 강화하던 때였다. 8명의 무고한 시민들은 1년 뒤인 1975년 4월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시사 2판4판]독재를 찾습니다 _ 성덕환 기자

한국당은 이처럼 과거 ‘독재를 수호(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했으며, ‘헌법을 파괴(10월유신)’했고, ‘국민을 학살(5·18 민주화운동)’한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유린한 과거사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지금도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 “5·18 폭동을 뒤집을 때” 같은 독재의 망령을 공공연히 불러낸다. 그래서 그들의 ‘민주주의 수호’는 늘 위선적으로 들린다. 인혁당 사건이 오랜 옛일이기에 모두 잊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한국당 해산 청원에 “북한이 하라는 대로 일어나는 일”(나경원 원내대표)이라는 식 대응을 보면 그들이 45년 전 수법을 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당의 ‘좌파 독재 타도’ 구호에 과거 암흑기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견뎌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 이상이다. 존재의 부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독재는 곧 ‘공포’다. 독재의 시간은 그래서 ‘선연한 피의 흔적’들로 새겨져 있다. 4월만 해도 김세진·이재호 열사, 인혁당 재건위 8인의 흩뿌려진 피의 무늬가 선연하다. 민주주의라는 ‘타는 목마름’(김지하 시인)으로 피의 공포에 맞섰던 이들에겐 한국당의 ‘독재 타도’ 운운은 인간 정신과 용기에 대한 모독으로 들린다. 한국당이 독재의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친일’의 역사를 흐지부지 무마하려는 그들의 오랜 양심(?)의 뿌리도 알 것 같다.

‘좌파 독재 타도’를 주도하는 게, 과거 독재정권의 주구였던 ‘공안’의 피가 흐르는 황교안 대표라는 게 더욱 아이러니하다. ‘검사 황교안’의 정체성은 ‘반독재’였던 모양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이병호 국정원장 후보자조차 “법률적으로 학술적으로 쿠데타”라고 했던 5·16 군사정변에 대해 “역사적·정치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진행 중”이라며 답변을 피했다.

한국당의 “독재 타도, 헌법 수호”는 소위 ‘프레임’을 다투는 정치전략일 테지만, 그 역시 금도가 있어야 한다. 당장의 작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교묘한 거짓이 궁극적으로는 정치 자체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모든 변화의 근본적 어려움은 구시대에 발 딛고 새 시대를 지향해야 하는 조건에 있다. 그 사회의 기준과 눈은 이미 미래로 맞춰져 있으나, 실현할 기반은 여전히 구시대의 제도와 관행·세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변혁은 그래서 ‘반동’을 만난다. 적폐와 ‘동거’하면서, 적폐를 ‘소거’해야 하는 운명의 가혹함이다.

지금 우리 사회 구시대의 상징은 결국 ‘탄핵(헌법적 실패)’으로 몰락한 제1야당 정치 세력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용기 있는 성찰과 개혁으로 과거와 절연하지 못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오명이다. 패스트트랙 정국 속 그들의 ‘무성찰·몰염치’를 보면 그 오명을 지울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한국당의 몰이성 속에는 “정치란 그런 것”이란 물귀신과도 같은 자기 합리화가 깔려 있다. 정치의 주체이면서도 정치를 ‘비하’하는 의식이다. 정치 혐오야말로 낡고 부패한 정치가 기득권을 유지해온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지금 한국당은 과거와 미래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한 듯하다. 미래·통합의 소명을 향한 새로운 보수정치의 ‘답’을 기대했지만, “나라(정치)가 망해가는지도 모르고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는 ‘퇴행의 거처’로 돌아간 것 같다. 그 선택으로 총선 1년을 남기고 지지율 상승의 단맛도 봤으니,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버린 그들 선택의 결과를 예단하긴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결과가 ‘후회’에 가까운 것이 될 때 과거 어떤 경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실패’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치를 대가도 크다.

<김광호 정치 에디터>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활 곳곳에 스며 있는 일회용품 사용, 이젠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야기 하나. 얼마 전, 딸아이가 족발이 먹고 싶다고 했다. 집에서 족발 만들 실력은 못 되니 외식을 해야 했다. 예전에 배달시켰을 때 일회용 플라스틱이 너무 많이 나와서 후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직접 가서 먹자는데 한사코 집에서 먹겠단다. 하는 수 없이 전화로 주문하면서 그릇을 가져갈 테니 포장하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무려 열 개나 되는, 크고 작은 그릇을 가방 둘에 넣어 가게로 갔다. 

가게에선 규격화된 플라스틱 용기가 아니라 집에서 가져간 그릇에 음식을 담는 게 더 품이 들어 보였다. 번거롭단 내색 없이 까다로운 손님 비위 맞추느라 수고하는 가게 분들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뜩이나 일하느라 바쁜데 성가시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플라스틱 쓰레기 하나라도 줄여야지 싶어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렀다. 웬걸, 가게 주인이 덕분에 1회용품 사용을 줄일 수 있게 되어 고맙다며 음료 하나를 건넸다. 집에서 음식을 펼쳐 놓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냥 배달시켰다면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겼을지 생각해보라고.

이야기 둘. 이제 나이가 들어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잦다. 재작년엔 상을 치르기도 했다. 문상을 가면서, 또 조문객을 맞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용기와 컵 등 1회용품 때문이었다. 상에는 아예 비닐 커버 수십 장을 깔아두고 손님이 한 차례씩 바뀔 때마다 비닐 커버를 하나씩 벗겨낸다. 심지어 비닐 커버를 보자기처럼 사용해서 상 위에 놓여 있던 일회용기들을 싸서는 한꺼번에 버리기도 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걸 1회용품으로 하게 된 걸까? 어디서나 마주하게 되는 이런 장례문화,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걸까?

플라스틱·목재 등 쓰레기들이 4월28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주 더반 항구 주변에 쌓여 있다. 이 지역에 최근 홍수가 나면서 해안을 따라 쓰레기들이 흘러들었다. 당국은 쓰레기 제거를 위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에 나섰다. 더반 _ AFP연합뉴스

환경부 추산으로 장례식장 한 곳에서 한 해 평균 밥그릇과 국그릇 72만 개, 접시류 144만 개 이상의 1회용품을 쓴다 한다. 전국 장례식장에서 쓰이는 접시류만 연 2억1600만개, 756t으로, 국내 유통 1회용 합성수지 접시의 20%에 해당한단다. 정부는 2014년 3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개정, 조리·세척시설이 있는 장례식장의 일회용품 사용은 금지했지만 유족이 장례용품을 사거나 상조회사의 제공을 받을 때는 예외로 해서 실제 별 효과가 없다.

이야기 셋. 지난해 10월 어느 날, 통영 앞바다를 방문했다. 첫날 한국환경사회학회 가을학술대회를 한 후 이튿날 학회 회원들과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에 속한 마을 분들이 함께 해양 쓰레기 수거활동에 나섰다. 일부는 뭍에서 작업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방화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배를 매복시켜 둔 섬이란다. 현재 무인도인 그 역사적인 섬에 내려보니, 해안이 온통 플라스틱 쓰레기 범벅이었다. 더 놀라운 건 발을 디딜 때 해안가 모래밭이 푹신푹신하게 느껴졌다. 양식할 때 사용한 스티로폼 부표가 파도와 바람, 햇살을 받아 부서진 것이 태풍 때 파도를 타고 섬의 해안에 쌓인 탓이었다. 값싸게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해산물 양식이 이런 해양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싸게, 더 편리하게. 우리가 지금 알게 모르게 지향하는 가치, 우리 삶에 배어 있는 가치가 아닌지. 그래서 생산과 유통, 소비의 전 단계에서 이렇게나 많은 1회용품, 특히 플라스틱 1회용품 남용의 시대가 온 게 아닌지. 세상의 모든 것은 어디론가 가게 되어 있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공짜 점심을 부담 없이 즐기는 소비문화 속에 살고 있다.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소비문화,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삶을 옥죌 것이다. 성찰과 변화가 필요한 때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주제별 > 녹색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핵폐기물 재검토위  (0) 2019.05.24
디젤엔진을 줄여라  (0) 2019.05.17
소비문화와 이별하자  (0) 2019.05.10
플라스틱 중독  (0) 2019.05.03
DMZ, 부활의 땅  (0) 2019.04.26
침묵의 숲  (0) 2019.04.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검경 수사권 조정법안에 대한 검찰의 반발이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해외 순방 중 급거 귀국한 문무일 검찰총장은 수사권 조정안이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민주주의 원리의 핵심은 몽테스키외가 말한 권력분립에 있다. ‘권력의 분산과 균형’을 통해 권력의 남용을 막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민주주의 원리에서 볼 때 가장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조직이 검찰이다. 검찰은 직접수사권, 경찰 수사에 대한 지휘권, 독점적 영장청구권, 독점적 기소권 등 막강한 권한을 틀어쥐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어떤 외부의 견제도 허용치 않는다. 다른 민주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의 집중이다. 이런 구조하에서 검찰조직의 부패와 검찰권의 남용은 필연이다. 수차례 불거졌던 검찰발 부패 스캔들과 검찰권 남용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조직의 수장이 기득권 수호를 위해 민주주의 원리를 언급한 사실이 놀랍다. 민주주의 원칙을 신봉한다면 검찰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고 민의에 부합하는 개혁의 길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10일 (출처:경향신문DB)

현재 수사권 조정안에 대한 검찰의 비판은 경찰에 1차 수사종결권을 부여한 지점에 집중되고 있다. 경찰이 사건 수사를 자의적으로 종결하여 사건을 축소·은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미국가에서 보듯 수사를 하는 기관이 책임지고 종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다만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행사하는 한 사건 은폐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법안은 여럿 검사의 통제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우선 영장청구 단계에서 검사는 경찰 수사를 인지·통제할 수 있다. 고소인·고발인·피조사자 등 사건관계인이 경찰 수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 사건은 자동적으로 검찰에 송치된다. 경찰이 수사결과를 불송치 결정할 경우에는 반드시 불송치결정문과 수사기록을 검찰에 보내 60일 동안 사후검증을 받도록 되어 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인권침해 시비가 불거지면 검사는 수사중단과 송치를 요구할 수 있다. 사실상 전건송치에 가까운 통제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통제하에서 경찰 수사가 검찰 모르게 완전히 은폐되는 일은 실제 벌어지기 어렵다. 검찰의 요란한 지적은 침소봉대에 가깝다.

반면 검찰이 입을 닫고 있는 진짜 문제 영역은 따로 있다. 바로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이다. 검찰 수사는 기소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다. 기소검사가 같은 식구인 수사검사의 위법행위나 권한남용, 인권침해를 사실상 견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공약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약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수사권 조정안은 검찰에 광범위한 직접수사권을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부패범죄·경제범죄·공직자범죄·선거범죄·방위사업 비리 등 중요범죄에 대한 직접수사권을 인정한 것이다. 향후 공수처가 설치되어도 규모가 작기 때문에(25명의 검사, 30명의 수사관)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에서 검찰을 대신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그동안 검찰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고 수사권·기소권 남용의 폐해가 가장 심했던 영역이 바로 이 특수수사 분야였던 점을 상기하면 이번 조정안은 검찰의 핵심 권한을 건드리지 못한 반보의 개혁에 불과한 것이다. 

직접수사 영역에서 검찰은 사건 수사를 독자적으로 진행·종결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반면 경찰 수사와는 달리 검찰 수사에 대한 감시·통제는 거의 없다. 사건을 만들고 왜곡하고 은폐해도 방지하기 어렵다. 검찰의 강압 수사, 무리한 기소에 의한 국민기본권 침해도 막기 어렵다. 기본권 보호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향후 국회 논의는 오히려 이 분야에서 검찰권의 남용을 막기 위한 감시·통제장치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최선의 방안은 검찰의 직접수사를 최대한 제한하는 것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시민들이 적폐청산 1호로 꼽은 검찰의 선의를 믿고 견제받지 않는 권한을 행사토록 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국민기본권의 빈틈없는 보호는 더 철저한 권력의 분산과 권력에 대한 감시·통제를 강화할 때만 가능하다.

<서보학 경희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