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경제정책이 논란거리지만, 길게 보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성장률은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사이에 정권교체도 여러 번 있었고, 경제정책도 수없이 바뀌었다. 그래도 백약이 무효로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러니 경제정책 가지고 논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논쟁으로는 답이 안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운 좋게도 제조업 시대의 성장모델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제1, 제2 금융권과 국민투자기금 등 국내의 가용한 자금이란 자금은 죄다 끌어다 썼고,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얻은 자원은 물론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외채 대국이 되었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일대 도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도박에 ‘올인’했는데, 기적적으로 그 판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그 기적을 뒷받침한 정치사회적 기반은 유신이라는 암흑이었다. 아예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도박을 벌인 셈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1987년 이후 유신이라는 암흑은 제거되었지만 그 대가는 성장을 뒷받침할 정치사회적 기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정치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합의가 있어야 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나갈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불행히도 임금인상 투쟁에 매몰되었고, 1997년의 경험과 그 후의 정치상황은 그들을 비타협의 좁은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장기적 성장동력은 꺼져감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아직도 높은 편이니 정부와 정치권은 근본적 합의를 만들기보다는 정책에 대한 불신만 번갈아 부추기며 정권 싸움에 몰두해왔다. 그렇게 40년이 지났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온 국민이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제조업 시대 성공의 열매를 나눠 먹는 지대추구만 해온 세월이다. 모두가 공범이다.

최근 모빌리티산업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과 그러거나 말거나 벌어지는 정치권의 무의미한 소동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착잡할 따름이다. 택시산업이 지금까지처럼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카카오 카풀과 타다가 퇴출되면 택시는 무사할 수 있을까? 우버는? 리프트는? 이지 택시는? 커브는? 디디는? 마치 한국만 스마트폰 안 쓴다는 얘기처럼 말도 안되지만, 이들 모두가 한국 시장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고 치자. 그럼 자율주행 자동차는? 택시업계를 위해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지 못하게 해야 하나? 다른 한편으로 택시기사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 산업구조 변화가 연착륙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지난 40년간 우려먹은 제조업 부문의 성공은 이제 제로성장을 바라보는 지경에 와있다. 누누이 강조하거니와, 4차 산업혁명은 사회혁신 프로그램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의 일자리를 업그레이드하는 기술로 사용할 것인지를 디자인하는 것이 대규모 기술변동의 시기를 맞아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정책을 만들기에 따라서는 택시도 얼마든지 새로운 모빌리티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다. 소비자가 택시를 가장 신뢰할 수 있도록 안전점검을 강화하고, 택시만의 앱을 만들어 카풀보다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공공데이터를 제공하고, 개별 소비자의 동선에 맞추어 대중교통과 택시를 연계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신규 사업자의 진입 덕분에 모빌리티산업의 시장규모는 더 커지고, 택시기사들은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더 많은 승객을 태우고, 승객은 경쟁의 효율을 누리며, 관련 산업은 발전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막상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인들은 지역구 이해관계에 따라 관련 법안에 의견을 달리하고, 그나마 간신히 면피만 해놓은 채 국민들이 호응하지도 않는 집회를 이어간다며 가는 곳마다 소동을 벌인다. 여의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합의의 정치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도 합의이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만이라도 장기적 설계를 하고, 누가 무엇을 부담하고 무엇을 양보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초당파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에 오늘의 합의는 못한다 치더라도, 합의의 미래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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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가 ‘장자연 사건’ 재수사는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2009년 3월 유력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강요당했다는 문건을 남기고 숨진 배우 장자연씨 사건이 과거사위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지 13개월 만이다. 과거사위는 20일 이 사건 조사·심의결과를 발표하고, 장씨가 친필로 피해 사례를 언급한 문건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만 가해 남성 이름을 목록화했다는 별도 리스트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죽음으로써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장씨의 외침은 10년 후에도 응답받지 못했다. 피해자는 목숨을 잃었는데 가해자는 심판대에도 세우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과거사위는 지난해 4월 장자연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후 관련자 80여명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술접대는 이뤄진 것으로 판단했으나 구체적 가해자와 범죄 일시·장소 등을 특정할 수 없어 성범죄 재수사 권고에 이르지 못했다. 강제수사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한계에다 공소시효의 장벽까지 겹친 탓이다. 과거사위의 실무기구인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강제수사권이 없다 보니 압수수색이나 참고인 강제소환 등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10년 전 사건의 공소시효를 연장할 만한 추가적 증거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21일 (출처:경향신문DB)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조선일보 사주 일가에 대한 부실수사 의혹이 상당부분 규명됐다. 장씨가 남긴 문건에는 ‘조선일보 방 사장’ ‘조선일보 방 사장님 아들’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과거사위 조사결과를 보면, 검경은 ‘호텔 대표이사 방모씨가 장씨와 식사를 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추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검경은 또 ‘조선일보 대표이사 아들 방모씨’가 장씨와의 술자리에 동석한 사실도 파악했으나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사위는 사건 당시 이모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경찰청장과 경기경찰청장을 찾아가 외압을 행사한 정황도 확인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측은 “단정적으로 발표한 과거사위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며 “법적 대응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의 진상규명이 한국 사회의 윤리적 새 출발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버닝썬 수사가 성과 없이 끝난 데 이어 장자연 사건은 재수사마저 불발됐다. ‘지연된 정의’조차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다. 장자연 사건이 재수사에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부실수사와 관련된 검경 간부들에 대해선 징계 등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조선일보도 책임있는 언론사라면 자성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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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의 사회적 대화가 종결됐다. 경사노위는 20일 운영위원회 회의를 열고 지난달 산하 분과위원회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의제를 다시 꺼내 대화의 불씨를 살리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해당사자 간 대화를 통해 합의하지 못한 대목은 매우 아쉽다. 

경사노위는 지난해 7월 이후 노사관계제도·관행위원회를 발족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법제도 개선 방안을 집중 논의해 왔다. 노사정 대표들은 10개월간 40여차례나 회의를 열었지만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공익위원들이 지난달 15일 최종 중재안을 제시했으나 이마저 노사 양측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경사노위 운영위는 논의 결과를 차기 본위원회에 보고하겠다고 밝혔으나 파행 중인 본위원회가 언제 열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상태다.

김대환 노동부 국제정책관이 4월17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비준 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동부는 노동자 단결권 강화를 포함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서는 관련법 개정이나 국회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ILO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보장, 강제노동 금지, 균등 대우 등 민주주의 핵심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협약이다. 1991년 ILO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회원국 의무 사항인 핵심협약을 절반만 비준한 상태다. 경사노위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다음달 ILO 창립 100주년 총회에 앞서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는 정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사노위가 ILO 협약 비준을 위한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이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경사노위는 합의기구가 아닌 대화기구다. 협약 비준 여부는 경사노위의 결정사항이 아니다. 경사노위는 지난 10개월간 노사정 대화를 통해 ILO 핵심협약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사회의제화한 점만으로도 제 역할을 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다. 또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의 의무조항이기도 하다. 비준이 늦어질수록 정부는 대내외적으로는 대통령 공약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비난과 FTA 노동조항을 위반한 국가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정부의 몫이자 권한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ILO 비준을 위한 행정조치를 단행하고 후입법 조치에 들어갈 것을 권고한다. 정부는 조만간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입장 정리는 빠를수록 좋다. 다음달 10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ILO 100주년 총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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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강원랜드로 하여금 강원도 태백시가 대주주였던 ‘오투리조트’에 150억원을 지원토록 한 이사회 결정에 찬성한 강원랜드 사외이사 6명 등 7명에 대해 3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원을 해봐야 손실이 날 것이 뻔한데도 지원안을 통과시켰으니 강원랜드가 입은 피해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기업의 기부금이 공익 목적으로 지원됐다 하더라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면 이를 결정한 이사회 구성원들이 회사가 입은 손실을 직접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대법원 판결문 등을 보면, 강원랜드는 2012년 오투리조트에 ‘폐광지역 협력사업비’ 명목으로 150억원을 지원했다. 강원랜드는 낙후된 폐광지역 경제를 진흥시켜 지역 발전과 주민생활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러다보니 당시 이사회 15명 중 6명이 강원도와 지역 내 자치단체 추천 인사로 채워졌다. 오투리조트 지원안도 당시 태백시가 추천한 김모 사외이사가 태백시 부탁으로 발의했고, 이들 6명과 비상임이사 1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문제는 이사회 의결 당시 오투리조트의 경영상태는 회복불능이었다는 점이다. 부채 비율은 2000%가 넘었고 “지원을 해도 회생 가능성이 적다”는 법무법인 경고도 있었다. 강원랜드는 오투리조트 전환사채 150억원어치를 인수했다가 2년여 만에 모두 손실 처리한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외이사가 지원안을 발의했고, 6명이나 찬성표를 던졌다. 김 전 이사는 “강원랜드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투리조트는 문을 닫았을 것이고, 태백시는 3000여억원의 빚 때문에 파산했을 것”이라며 “기부는 강원랜드 설립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지원금 150억원은 인건비 등으로 소진됐고, 오투리조트는 계속된 경영 악화로 2016년 부영그룹에 매각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1년간 대기업 상장사 169곳의 이사회 안건 4361건을 분석한 결과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이 가결되지 않은 경우는 17건에 불과했다. 기업의 경영 건전성에 기여해야 할 사외이사들이 외풍을 막아주는 ‘방패막이’나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잘못된 투자 결정을 한 사외이사들에게 배상까지 하도록 함으로써 책임 한계를 크게 넓혔다는 의미가 있다. 사외이사들이 기업경영의 진정한 감시자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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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시의회에서 발주한 연구용역의 제안요청서가 놓여 있었다. 미션은 ‘사회적 경제 주체가 청년층의 주거빈곤을 개선할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청년의 주거와 빈곤만 다뤄야 할 이유가 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을 강조하되 전반적인 주거빈곤을 다룬다고 문제 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회적 경제를 강조하는 새 시장이 당선된 것도 좋은 기회였다. 아주 단순하게 보면 주거빈곤은 소득이 주거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즉 주거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거비용을 높이는 유력한 용의자는 주택에 끼어있는 불로소득이다. 불로소득을 걷어낸 비영리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면 문제의 호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적 경제와 비영리는 궁합이 잘 맞는 한 쌍이 아니던가.

많은 연구가 쏟아지지만 당장 정책으로 구현되는 경우를 많이 보진 못했다. 이 연구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사회주택’이라는 개념의 논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딱히 요구사항에 없었던 조례안을 만들어서 보고서에 넣었다. 

놀랍게도 ‘사회주택 활성화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에 관심을 둔 의원들이 있었고, 얼마 동안 논의와 수정을 거친 후 덜커덕 조례안이 통과되었다. 고마웠지만 걱정스럽기도 했다. 실제로 그간 조례의 쓰임을 돌아보니 고쳤으면 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현재 조례는 사회주택이란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주거관련 사회적 경제 주체에 의해 공급되는 임대주택 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보고서가 사회적 경제 주체의 참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너무 소심했던 것 같다. 기왕 일을 키웠으니 눈치 보지 말고 ‘사회주택이란 서민이 부담 가능한 저렴한 수준으로 30년 이상 장기임대사업에 활용되는 주택’이라고 못을 박는 게 학술적인 개념에 좀 더 부합했을 것이다. 반대 의견도 있었겠지만 15년 정도에서 타협점을 찾지 않았을까.

그동안 주택과 관련된 제도가 바뀐 것도 반영해야 하는데, 사회주택에 해당하는 주택을 세부적으로 짚어줄 필요가 있다. 장기임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공주택 특별법’에 따라 공급되는 공공임대주택도 당연히 사회주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공급되는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도 저렴하게 장기간 임대된다면 사회주택으로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민간이 공급하는 임대주택이 저렴하게 장기간 임대된다면 사회주택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사회주택을 규정하면 지방자치단체와 그 산하의 공기업이 사회주택을 공급하는 주체로 당연히 포함된다.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주택을 공공에서 담당하고, 그 외 서민을 위한 사회주택을 사회적 경제 주체가 담당하는 분업구조가 될 것이다.

한편 ‘공공주택 특별법’에는 공공과 민간이 공동사업을 벌여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회주택의 공급이 공동사업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공공과 사회적 경제 주체가 공동으로 출자하는 사업, 공공은 택지를 제공하고 사회적 경제 주체가 주택을 건설하여 운영하는 분담형 사업, 공공임대주택의 운영을 사회적 경제 주체에 위탁하는 사업 등을 조례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사례를 보면, 주택의 계획부터 운영단계까지 입주자의 참여가 이뤄질 때 주택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공동체 활성화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거나 매입하는 과정에 지역사회주체를 참여시키거나 공공과 공동사업을 진행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전언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사회주택 활성화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고, 조례의 개정도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짚어본 사안들도 충분히 검토되고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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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사는 거리는 좀 유별난 역사를 담고 있다. 탐스러운 수국(水菊)꽃의 이름을 딴 거리지만 독일 현대사의 암울했던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히틀러를 제거하고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려고 비밀리에 움직였던 ‘크라이스아우(Kreisau)’ 서클의 주요 인물들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근처에 살았다. 이 비밀조직에 가입했던 프러시아 귀족의 후손이나 시민계급 출신의 다양한 인물들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 1944년 7월20일 시도한 히틀러 암살이 실패로 끝나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톰 크루즈가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역을 맡았던 영화 &lt;발키리&gt;가 있었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페터 요크 폰 바르텐부르크 백작이 살았던 집의 벽에는 지금 그를 기리는 동판이 붙어 있다. 역시 이 거리에 살았던 개신교 목사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후에 서독의 하원의장을 지냈다. 그의 이름을 딴 조그만 광장도 이 거리에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나치 때 유대인과 동성애자에게 무거운 형을 구형해서 악명이 높았던 베를린 검사장이 살았다. 20여년 전 어느 날 바로 이웃집 앞의 보도에 놋쇠로 만든 조그만 포석(鋪石) 3개가 박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집에 살았던 세 여성의 이름 밑에 생년과 함께 지금은 독립국 라트비아의 수도지만, 한때 나치독일이 점령했던 리가(Riga)의 강제수용소로 압송된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유대인과 동성애자를 증오했던 나치 검사와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만 했던 유대계 여성이 이렇게 서로 이웃하며 살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독일의 예술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의 ‘걸림돌’(Stolpersteine)은 1992년부터 나치 때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그들이 살았던 집 앞의 보도에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가 약 10㎝인 놋쇠로 만든 포석을 까는 작업을 시작했다. 독일만 아니라 유럽 23개국에서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작업은 어떤 장소 하나를 대형의 기념공간으로 만들지 않고, 유럽의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던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재정도 주로 성금으로 충당하고 있어 시민의 참여도가 아주 높은 기념물 조성작업이다. 일상에 묻혀 빠른 발걸음을 재촉하는 많은 사람들의 망각을 깨우는, 작지만 그러나 큰 울림을 주는 예술작업이다.

2005년 5월 조성돼 ‘홀로코스트 경고기념물’(Holocaust Mahnmal)이라고도 불리는 베를린 중심에 세워진 ‘유럽에서 살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유대계의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맨(Peter Eisenman)이 설계한 이 기념물은 1만9000㎡의 부지에 크기가 서로 다른 검은 입방체형의 콘크리트 건조물 2711개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밀밭을 형상화했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장소를 통해 새로운 기억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아이젠맨은 설명했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이라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동시에 프라하에 있는 오래된 유대인 공동묘지도 연상되었다. 나치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이른바 ‘집시’로 불리는 신티와 로마족, 정신박약자와 불구자 등 무수히 많았는데 이들이 기억 밖으로 밀려나간 것도 문제라고 느꼈다.

집단적 기억 속에 함께 들어 있는 슬픔, 죄의식, 수치감, 공포, 후회 등 복잡한 감정을 담은 기록과 전시물, 그리고 기념물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정체성을 부정한다는 이유에서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나의 예로 10여년 전부터 당세를 급격하게 확장하고 있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자랑할 수 있는 역사도 아주 많은 독일인데 하필이면 부정적인 것만을 애써 들추어내느냐고 비판하면서 이 홀로코스트 경고기념물의 철거도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서훈 문제나 ‘4·3’과 ‘5·18’을 둘러싼 논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억문화와 관련된 심한 갈등이 있다. 심지어는 ‘세월호’의 유족을 향해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먹는다”는 전직 국회의원의 망발이 나올 정도다. 이렇게 희생자를 ‘빨갱이’나 ‘앵벌이’로 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떤 건강한 기억정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물론 기억의 내용과 형식을 담은 문화나 정치가 권력의 유지나 탈취에 선택적으로 동원되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래 함께 살면서 같이 보고 느끼고, 또 이를 기억해서 보다 인간적인 공동체의 건강한 기초를 다져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흥미있는 시대에 살고 싶습니까’라는 역설적인 주제 아래 5월11일부터 열리고 있는 58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된 한 설치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아주 뜨겁다. 스위스 출신 크리스토프 뷔헬(Christoph Buchel)은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섬 근처에서 아프리카 난민을 싣고 가다가 침몰했던, ‘우리들의 배’를 뜻하는 바르카 노스트라(Barca Nostra)호를 인양해서 베니스 항구에 전시했다. 작품설명서에는 ‘난파선, 2015년 4월18일’이라고 적혀 있다. 길이가 고작 22m인 이 조그만 낡은 배에 의지해서 희망의 땅을 찾아나섰던 800여명이 졸지에 생명을 잃었다. 전시 기획자는 시체를 담고 있는 거대한 관처럼 보이는 이 난파선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로 경건하게 대할 것을 주문한다. 비엔날레가 끝나면 배를 지금 조성 중인 시칠리아섬에 있는 ‘기억의 정원’으로 옮길 것인지에 대해 논의 중이다. 그러나 유럽연합에 매우 비판적인 이탈리아의 현 총리 마테오 렌치는 배를 오히려 ‘난민 스캔들’을 낳은 장본인인 유럽연합의 본부 브뤼셀로 보내라고 하고, 또 극우세력은 이를 아예 철거하라고 항의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양되어 목포의 신항부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세월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배가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으니 제발 모두가 힘을 합쳐 자신을 좀 일으켜달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집단적인 무책임이 불러온 참사였기에 이에 대한 기억 역시 집단의 성찰 속에 오래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람은 아무도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을 때 정말로 죽는다는 말처럼 희생자들이 기억될 때만 그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보내는 애절한 호소와 절규도 지속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재앙과 불행의 망각을 경고하고 이를 기억하는 문화는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물론 쓰라린 기억을 그저 박제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희미해지는 집단적인 기억을 순간에 일깨우고 이를 지속적으로 응축시키는 훌륭한 작품도 많이 있다. 1933년 5월10일 나치에 의해 비독일적이라고 지목된 책들이 불속에 던져졌던 베를린 베벨광장의 지하에는, 휑하게 빈 서가(書架)와 함께 “이것은 서막일 뿐이다. 책을 불태운 곳에서는 사람도 결국 불태운다”는 혁명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구가 새겨진 작은 청동판이 있다. 이스라엘 출신의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작품이다. 이 작품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걸림돌’ 작업이 베를린에서 내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기억문화를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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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는 새 제국(帝國)을 선포한 고종은 2년 뒤인 1899년 8월17일, 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공포했다. 명칭을 국제(國制)라고 한 것은, 입법기관이 따로 없는 상태에서 황제 ‘마음대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총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국제의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되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였고, 제2조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항만년(恒萬年)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였다. 나머지 7개 조항은 모두 황제의 권리만 제시했다. 황제의 의무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규정한 조항은 없었다. 황제는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할 권리, 즉 입법권을 가지니 이를 자정율례(自定律例)라 했고, 행정 전권을 장악하니 이를 자치행리(自治行理)라 했으며, 아무런 제약 없이 인사권을 행사하니 이를 자선신공(自選臣工)이라 했고, 조약의 체결 비준 등 외교 문제를 전결(專決)하니 이를 자견사신(自遣使臣)이라 했다. 여기에 육·해군을 통솔하고 계엄과 해엄을 명할 권리까지 가졌으니, 국가 운영과 관련한 모든 권리가 고종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체제를 정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변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군 상태에서 홀로 푸른 잎을 뽐내는 것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 기관과도 권력을 나누지 않고 혼자 다 갖는 것이 독재(獨裁)다. ‘대한국국제’는 황제 1인 독재체제의 본질을 명료히 드러낸 ‘모범적’인 문서였다. 조선시대 내내 불문율로 유지되던 ‘무한한 군권’을 이때 굳이 명문화한 것은, 한편으로는 독립협회가 시도했던 ‘군주권의 침손’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갓 형성된 세계체제에서 문명국의 일원(一員)이라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0세기를 목전에 둔 당시 시점에서 ‘명문화한 독재권’이 국제적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1910년 10월1일, 일본 칙령 제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되었다. 제1조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총독을 둔다. 총독은 조선을 관할한다’였다. 조선총독의 관할권에는 어떤 제약도, 단서조항도 없었다. 조선 내 행정·입법·사법의 전권과 군 통수권까지 장악한 조선총독은 ‘조선에 관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독재자’였다. 그는 오직 임명권자인 일본 천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조선 땅에 거주하는 자는 누구도 총독의 권한을 침손(侵損)하거나 침손할 의도를 가져서는 안되었다. 조선인들의 의사를 통치에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설치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그 의원들을 총독이 임명했을 뿐 아니라 하는 일도 총독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국가라는 단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이래 천명(天命)을 받은 자가 지상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독재는 너무나 당연한 정치 행태였다. 그들은 독재가 아니라 독재권이 침해되는 것을 문제로 여겼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공적(公的) 교육기관에서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도라고 주장했고,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한국 지식인들이 일부나마 민주주의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부터였다. 한국인들이 3·1운동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민국(民國)을 수립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사적으로도 경이로운 정치의식의 발전이다. 그러나 대중의 정치의식 일반이 비약하지는 못했다. 1948년 제헌국회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설계했으나, 이승만은 곧 이 설계도를 찢어버렸다. ‘마름의 권리’를 얻으려 한 자들과 왕이나 총독을 섬기는 데 익숙했던 자들이 이승만의 독재를 뒷받침했다. 이승만은 정치깡패를 동원하는 등의 우격다짐으로 헌법을 개정해 영구집권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이는 ‘대한국국제’가 정한 ‘자정율례’와 다를 바 없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도 이승만의 전례를 따랐다. 애초에 자기 뜻대로 만든 헌법이었지만, 그는 종신집권을 위해 그 헌법조차 내팽개쳤다. 1969년 여당 국회의원들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삼선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야당 국회의원 회유 또는 매수, 관제 데모대 동원 등 ‘고전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1972년에는 국회를 해산하고 민국(民國)을 독재국가로 만드는 헌법 쿠데타를 자행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어 입법권을 장악했고, 압력과 회유를 통해 사법부를 장악해 ‘사법살인’에 협조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명문화해 왕조시대 절대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박정희 개인이나 그의 통치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죄로 규정되었다. 박정희 사후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도 살인·고문·폭력으로 통치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이해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독재 치하에서 살아왔다. 한국인에게 독재는 머리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문제다. 그런데 정작 독재 치하에서는 그에 협력하거나 순종했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보통사람이 느끼는 걸 느끼지 못하면서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독재의 망령도 계속 이승을 떠돌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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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아센터가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코피아(Korea Program on International Agriculture)센터는 농촌진흥청이 개발도상국에서 농업기술 개발사업을 펼치면서 각국에 개소한 사무소를 말한다. 한국에서 직선거리로 1만2000㎞ 떨어진 짐바브웨에도 2016년 12월 코피아센터가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짐바브웨는 한반도의 2배에 가까운 면적, 약 1700만명에 불과한 인구, 농업에 적합한 일조량과 온화한 기후로 한때 아프리카의 ‘빵 바구니(breadbasket)’로 불릴 정도의 대표적인 농업 국가였다. 짐바브웨의 대표 부족인 쇼나족은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농경민족이며, 농업은 짐바브웨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이자 자부심으로 자리 잡아 왔다. 

하지만 1980년 독립 이후 무가베 대통령의 37년 집권기간, 특히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단행된 백인 소유 농장 몰수와 이 과정에서의 농업 생산성 감소, 경제위기 등이 이어지면서 옥수수와 밀 등 필수 곡물마저 수입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와 비능률적인 구조는 농업 분야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짐바브웨인들의 농업과 ‘토지’에 대한 애착은 강하다. ‘국민가수’로 불리는 알릭 마체소도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자신의 농장을 돌본다고 한다. 짐바브웨 인구 60~70%의 고용과 소득이 농업과 관계되어 있다는 통계도 있다. 

37년간의 무가베 체제를 종식하고 지난해 대선을 거쳐 출범한 음낭가과 정부는 2030년까지 국가발전 목표를 의미하는 ‘비전 2030’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농업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짐바브웨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못지않게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받는 데 관심이 많다. 

짐바브웨 코피아센터는 3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무병씨감자 사업, 토종버섯 재배, 소립종 곡물의 수확 후 관리, 토종닭 사업 등을 짐바브웨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 진행하면서 우리 농업기술을 전파하고 있다. 인적 교류도 활발하다. 매년 짐바브웨 농업연구원들이 한국을 방문해 우리 영농기술을 습득하고 있고, 우리 농업의 미래를 밝혀줄 젊은이들도 코피아센터에 파견되어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올해는 한국이 짐바브웨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25년이 되는 해이다. 짐바브웨 코피아센터가 양국 국민을 잇고 우리 농산업 진출에도 기여하길 기대한다.

<조재철 | 주짐바브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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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산 것도 아닌데 별나게 손이 작고 제 욕심부터 차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왕 쓰는 선심일 텐데 자기 다 쓰고 유행 지난 거 주며 생색내거나, 밥 먹으러 가면 김치찌개에 돼지고기만 골라 먹고 젓가락질하며 슬금슬금 반찬 그릇 끌어가며, 한턱낸다더니 예닐곱 명에 치킨 두 마리 시키곤 쿠폰은 또 얼마나 눈독 들여 챙기던지…. 한번은 자기 부모 임종이 코앞이자 안 오던 경조사에 얼굴도장 찍으러 왔더이다. 그리고 그 자리서 어떤 일로 푸념합디다. “인복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몰라, 난.”

그런가 하면 점쟁이가 ‘주위에 귀인이 많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겹거나 괴로울 때면 신기하게도 누군가 손을 척 내밉니다. “여기 사람 구한다네. 너 생각나더라.” “괜찮은 사람 있는데 만나봐. 너 놓치면 손해라고 아주 쐐기를 박아놨어.” 그는 늘 순위 앞쪽에 있습니다. “뮤지컬 표 생겼어. 나랑 가자. 같이 가자!” 주위에 귀인이 많다는 건 아마 자신도 언젠가 그 귀인들에게 모종의 귀인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좁쌀만큼 아끼다 담 돌만큼 해(害)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이익을 보려다 더 큰 손해를 본다는 뜻으로, ‘담 돌(石)’과 ‘담 돌(徊)다’를 이용한 속담입니다. 평소 아쉬운 이웃에게 좁쌀 한 톨도 아까워했는데 어느 때인가 자기네 곡식이 바닥나니 막막합니다. 별 수 있나요, 안 죽자면 꾸러 가야죠. 그런데 인색했던 자기 짓이 떠올라 선뜻 못 들어가고 울타리만 뱅뱅, 담 돌만큼 돌아(해) 보다 결국 쭈뼛쭈뼛 들어갑니다. 퇴직하는 날 누가 불러 옥상 갔더니 타 부서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선물을 주더군요. 컴퓨터 SOS 치면 바쁠 텐데도 선뜻 와줘서 늘 고마웠다고요. 잡아달란 손을 부담스러운 손(損)으로 떨떠름해하면 인복은 손사래 치며 떨어져 나가고, 귀인인 척 돈 잡아먹을 귀신만 들러붙는 게 인생 귀결 같습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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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이 채 되기 전에 TV에서 본 개그 프로그램의 콩트가 아직도 기억난다. 아니, “기억난다”기보다는 “잊혀지지 않는다”에 가까울 것 같다. 내용은 이랬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한 마을의 돈 많기로 유명한 부잣집의 딸내미가 덩치가 크고 못나기가 그지없는데, 그게 또 외동인지라 오냐오냐 자라 버릇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니 혼기가 차도록 데려가겠다는 남자 하나가 나서지를 않아 부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석꾼은 누구든 딸을 데려가기만 하면 큰돈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한다. 이에 가난하지만 영민한 총각이 찾아와 그 천방지축을 기꺼이 아내로 맞는다.

이 정도였다면 아직까지 잊히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혼기가 찬 딸을 치워버리려는 부모들의 이야기’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린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그래서 실제로는 겁먹게 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청년이 말괄량이 뚱보를 신부로 맞아들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친구들이 그를 놀려먹기 위해 신혼집으로 찾아온다. 기도 못 펴고 살고 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면서 낄낄거린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신혼집에서 마주친 새신부가 어찌나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는지, 놀랄 노자다. 심지어 행실이 고아지니 추하기 그지없던 얼굴도 어딘가 고와 보인다.

친구들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새신랑에게 묻는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 새신랑은 빙글빙글 웃으며 답한다. “첫날밤에 술을 진탕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이불에 물을 엎어버렸지.” 신혼 첫날에 이불에 오줌을 지린 줄 안 신부는 부끄러움에 바들바들 떨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다고 설치는 신랑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평생 하늘처럼 받들며 순종하겠어요.”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뚱뚱하고 거침없는 여자아이였던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세계에서 여자의 활기는 부덕이 되고, 남자의 야료는 재기(才氣)가 된다는 것을.

과거에는 이런 종류의 민담이 각종 판본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판본에서는 “박색인 주제에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것까지는 참았는데, 여성 상위 체위(woman on top)로 하늘 같은 남편을 짓누르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친구를 시켜 아내를 유혹하게 한 뒤 불륜 현장을 덮쳐 몽둥이로 두들겨 버릇을 고쳤다고 자랑한다.

배우 라미란과 이성경이 출연한 영화 <걸캅스>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뭐가 되었든 ‘제멋대로인 여자’를 길들이는 이야기에서 여자들은 뚱뚱하고, 시끄럽고, 많이 먹고, 욕심 사납고, 음탕하며, 움직임이 크다. ‘여성 상위 체위’가 상징하는 것처럼 허락되지 않은 자리로 기어 올라가 남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

이 여자들은 성적 위계를 뒤집기 때문에 무질서를 초래하고, 스스로 중성성을 드러내면서 사회의 젠더 이분법을 비웃는다. 절제와 순종의 미덕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않으며, 걸걸한 입담을 자랑하고 스스로 농담이 된다. 자유롭게 나이 들었기 때문에 때때로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지혜를 지녔다. 그들은 좁은 공간을 깨고 자신을 기꺼이 확장시킨다. 큰 몸, 큰 입, 큰 목소리, 큰 성기는 그 확장성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미 위협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여자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들을 ‘길들이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상상한다. 그렇게 그들을 낄낄거림의 소재로 격하시킴으로써 힘을 빼앗아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나는 그 콩트에서 사지를 흔들며 무대를 활보하던 ‘위풍당당한 못난이’가 남편의 거짓말에 속아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종종 거리며 걷는 ‘온순한 새신부’가 되었을 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좁아졌는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 건 <걸캅스> 때문이었다. 이 영화 속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은 타협과 도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스스로 농담이 된다. 그리고 웃음이 쌓여갈 수록 그들이 활보하는 공간은 넓어지고,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게감을 더해간다. 그야말로 ‘우먼 온 톱’의 활개 덕분에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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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은 스승을 존경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고, 교권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1982년에 기념일로 제정된 날이다. 

나는 올해 스승의날에 여러 학생, 학부모들에게서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받았다. 직접 쓴 손편지와 카드, 작은 꽃다발을 받았고, 한참 전에 졸업한 제자들은 내가 여름마다 고생하는 것을 기억했는지 땀방지제, 손수건도 보내주었다. 

물론 이렇게 스승의날 선물을 거리낌 없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신분이 ‘강사’이기 때문이다.

보통 초·중등교육법, 고등교육법, 유아교육법 등에 따른 교원을 ‘교사’라고 하고, 또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이기 때문에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주 스승의날에 선물을 받은 선생들은 ‘강사’, 못 받은 사람들은 ‘교사’라고 구분하면 된다. 

출처_ 경향신문DB

스승의날에 선물을 받아도 되는 강사들의 유형도 무척 다양하다. 학교 밖 사설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강사들과 학교에서 가르치더라도 단기 강사계약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강사라고 하는데,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계약직 교과 강사들과 학교생활기록부 기록과는 상관없는 방과후 비교과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들은 사실상 또 다른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비정규직 강사들은 대학에서도 전체 강의 중 26.9%(2015년 1학기)를 담당할 정도다. 이들의 신분 또한 초·중등 강사들의 입장과 비슷하게 위태로운 상태라서 조만간 대학 강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사들의 처우를 규정한 고등교육법개정안이 시행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량 해고가 진행되고 있어서 강사들을 대우해 주자는 것인지 아니면 몰아내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국어사전에서도 교사의 뜻을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등에서 소정의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선생의 뜻을 ‘남을 가르치는 사람,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아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하는 또 다른 이름인 ‘교수’는 사람들이 일종의 계급적 의미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이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일반적인 호칭을 ‘선생’이라고 하자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선생들을 위한 기념일의 이름이 ‘스승의날’이다. 인하대 국문학과 김문창 교수는 ‘스승’이라는 말의 어원이 자기보다 ‘높은’ 승려를 일컫는 단어인 ‘사(스승 師)승(스님 僧)’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고, 스승의날에 축하 케이크를 자를 수는 있어도 한 조각도 먹어서는 안되는 날이라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기념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스승의날은 왜 존재하는가? 또 이날에 감사와 축하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스승의 의미는 무엇인가? 최소한 이런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어야 스승의날을 제대로 기념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단체인 실천교육교사모임에서는 2년째 스승의날을 ‘교육의날’로 변경하자는 청원을 내고 있으니 그들에게 귀 기울여 보자. 선생님들이 쓸데없는 청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한왕근 청소년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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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강렬하다. 화려한 음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식당 한쪽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을 먹노라면 그곳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먹어본 적은 없어도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음식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보면 ‘쿠바 샌드위치’ 맛이 궁금해진다. 음식평론가와 설전을 벌인 후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셰프 칼이 푸드트럭에서 버터를 듬뿍 발라 구워내는 쿠바 샌드위치는 입맛을 다시게 한다. 사정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쿠바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말이다. 칼은 아들에게 ‘카페 드 몽’의 설탕 파우더를 탈탈 뿌린 프랑스식 도넛 ‘베녜’를 맛보게 하기 위해 미국 뉴올리언스에 푸드트럭을 세운다. “천천히 먹어. 생의 첫 베녜는 다신 못 먹어. 세계 어디서도 이 맛은 못 내”라는 영화 속 대사 덕에 이곳의 베녜는 전 세계에 입소문이 났다.

나만 해도 10여년도 더 지났지만 베트남 휴양지 달랏에서 화덕에 구운 바게트와 함께 먹은 치즈 맛이 지금도 또렷하다. 홍콩 센트럴 뒷골목의 완탕면은 어떤가. 주인 할머니가 손짓으로 일러준 대로 그 집의 비법 소스를 한 숟갈 넣으니 놀라울 정도로 맛이 달라졌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완탕면에 반해 수없이 완탕면을 먹으러 다녔지만, 서울에서 그 맛을 내는 집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음식에는 그곳만의 맛이 담겨 있을 터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한 장면.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 거기에도 음식이 있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위대한 극장들보다는 위대한 식당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도시를 살리는 요인 중 하나가 ‘음식’이란 얘기다. 

음식에 대해 ‘피시 앤드 칩스’ 말고는 없다는 지독한 조롱을 받는 영국이지만, 런던에는 세계적인 셰프들과 유명 식당들이 많다. 이달 초 출장길에 잠깐 들른 런던에서 만난 한 업체 사장은 요즘 뜨는 음식으로 한식을 꼽았다. 런던 킹스크로스에 있는 한식당 ‘kimchee’(김치)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 먹을 정도로 핫플레이스라고 한다. 한국 여행객들이 현지 음식이 맞지 않아 찾는 한식당과는 외양부터 다른 이곳은 종업원들도 한국인은 고용하지 않는 현지화 전략을 썼다. 잉카 유적지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던 페루 역시 매년 9월 리마에서 열리는 ‘미스투라’라는 남미 대륙 최대의 음식 축제가 사람들을 모은다.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이 한마디에 4·27 남북정상회담 당일 점심에는 평양냉면집마다 긴 줄을 선 풍경과 냉면 인증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도 도시 공동체를 위해 음식에 주목한다. 지난해부터 서울역 일대에 ‘요리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요리인류> 등 요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KBS 이욱정 PD가 음식을 통한 도시재생이라는 주제로 기획을 맡았다. 올해는 식재료 공동구매, 공동손질, 공동배분을 하는 마을공동체 ‘우리마을 쿠킹박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음식을 매개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건강하게 먹기 위한 노력만으로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에서 잃어버린 연대의식을 되찾을 수도 있다. 2008년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온 것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광우병’ 때문이었다. <식탁 위의 세상>에는 1967년 마틴 루서 킹의 우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연설이 나온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지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말은 상관없어 보이는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지 못할 거라는 우려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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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2년이 흘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여전히 박근혜 정부가 씌운 법외노조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수십명의 해직 교사들은 아직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집권하면 우선적으로 (법외노조를) 철회하겠다”(2017년 2월)는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약속은 간데없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 때와 똑같은 ‘법외’ 처지다.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 국민의나라위원회와 민주연구원이 공동으로 작성한 국정운영 보고서(2017년 5월17일)에는 임기 초반 즉시 시행 가능한 ‘10대 촛불 개혁 과제’가 제시됐다. 대통령의 결단이나 행정부의 처분만으로 시행할 수 있는 개혁과 적폐청산의 목록이다.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자 인정, 교원노조 재합법화 선언, 세월호 선체 조사위 인력·재정 추가 지원, 4대강 복원 대책기구 구성,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재수사, 최저임금 공약 준수 의지 천명 및 근로감독 강화, 노동개악 4대 행정지침 폐기, 개성공단 입주업체 긴급지원, 박근혜 정부 언론탄압 진상조사,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금지 선언 등이다. 아직껏 유일하게 미시행된 게 교원노조 재합법화이다. 분명해진 건, 전교조 재합법화는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국 시민·사회단체 원로와 단체대표들이 20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결정을 취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박근혜 정부는 취임 첫해인 2013년 10월 팩스 공문 한 장으로 전교조를 법 바깥으로 쫓아냈다. 노동조합법 시행령(9조2항)을 앞세워 조합원 중 해직자 9명이 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고 통보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인권위조차 “조합원 자격 때문에 노동조합 자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단결권과 결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2010년)고 삭제를 권고했던 시행령을 들어 법외노조화를 밀어붙였다. 법률도 아니고 행정부 명령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박탈한 꼴이다. 이게 법정에서 바로잡히지 않은 까닭도 뒤늦게 드러났다. 전교조가 제기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 효력 정지 신청’과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거래’ 대상이 되어 박근혜 청와대에 ‘선물’로 바쳐졌다. 전교조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맹렬한 적의를 감안할 때 그만한 진상품이 없었을 터이다.

박근혜 정부의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해 정부가 나서 이전에 내렸던 처분을 직권으로 취소하는 것은 하등에 문제될 게 없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에 위반되고, ‘재판거래’마저 드러난 상황에서 명분도 충분하다. 

지난해 지방선거 직후 고용노동부 장관이 전교조와 만나 ‘직권 취소’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피력하자, 청와대 대변인이 나서 “정부가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고용노동부의 적폐청산위원회 격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는 지난해 7월 ‘법외노조 처분 직권 취소’와 ‘노조법 시행령 삭제’를 권고했다. 전교조 법외노조화 과정에서 ‘외압’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직권 취소를 미룰 명분이 없어졌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직권 취소를 통한 법외노조 해결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대신 (3년 넘게 계류 중인) 대법원 판결을 지켜보고, ILO 핵심협약 비준에 맞춰 국회에서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하자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형식논리일 뿐 실은 ‘하지 말자’는 얘기다. 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선거법’보다 전교조 재합법화를 위한 법에 더 결사 반대할 것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왜 전교조 앞에서 멈춰서는 걸까. 진즉 답이 나왔다.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2018년 11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국정감사 답변) 사회적 약자 여부와 법외노조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전교조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전교조 재합법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그림자를 짚어볼 뿐이다.

5월28일은 전교조 결성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30년 동안 체벌과 촌지가 일상이던 학교의 풍경을 바꾼 데는 전교조의 역할이 컸다. 혹독한 시절 ‘참교육’을 위한 전교조 교사들의 용기와 희생, 눈물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는 참 남루했을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전교조 결성 계기가 된 1986년 중3 소녀의 유서) 입시에 매이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학생들의 삶을 위한 교육, ‘참교육’의 꿈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30주년 교사대회는 ‘참교육’이 걸어온 길을 성찰하고 미래 교육의 비전을 세우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한데 30년 전과 같이 다시 ‘전교조 합법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설 판이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가 학교 현장에서 참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교사들을 부정한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교육개혁을 이뤄나갈 수 있을까.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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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불석권(手不釋卷), 잠시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머리에 철들 무렵 부친한테 참 많이도 들었던 사자성어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와 접촉하는 첨병이었던 손. 그 손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무엇일까. 아무리 열중한다 해도 손바닥에서의 일은 잠깐이었다. 본래 인생은 잡는 데 있지 않다는 걸 암시하면서 그곳은 늘 텅 비어 있었다. 한동안 열망했던 너는 잡힐 듯하다가 그냥 스쳐가고 말았지. 끝내 나의 손을 외면하고 말았지. 

요즘 식당에 가면 빈자리는 많아도 빈손은 없다. 모두들 그것을 들고 그것에 빠져 있다. 음식이 나와 젓가락을 잡기까지의 자투리 시간도 그냥 두지 못한다. 배꼽 없는 이가 없듯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손을 장악하였다. 스카이, 갤럭시, 안드로이드, 구글 등 하늘과 관련된 용어를 주로 사용하는 그것들. 이 짝퉁하늘에 고개를 박고 사느라 고개 들 겨를이 없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손바닥 안의 그것! 손안을 만지작거리다가 급기야 몸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과 그것을 치환해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여러 현상들과 똑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이내 책의 죽음, 하늘의 죽음, 대화의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그것의 바탕화면 캘린더에는 생일과 더불어 나의 기일도 분명히 들어 있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의 척후병이 미리 이렇게 구체적으로 현현한 게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짐작하다시피 그것은 휴대폰이다. 이번 주말에도 나는 잠시 생활에서 이탈하는 방법으로 산을 택했다. 카메라를 메고 휴대폰도 챙겨서 홍천의 어느 깊숙한 계곡을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꽃도 많지만 떠오르는 궁리도 많다. 어느 나무의 겨드랑이에 숨어 있었던가. 집이라면 짐작조차 못했던 문장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적, 인적 드문 자갈밭 귀퉁이에서 노랑무늬붓꽃을 만났다. 보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저의 자리를 지키며 정갈하게 피어난 노랑무늬붓꽃. 품안의 거울 꺼내 보듯 그것도 한번 생각해보면서 꽃동무의 그것에 찍힌 노오란 노랑무늬붓꽃을 찍어보았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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