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TV에서는 저녁 일일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보려고 보는 건 아닌데도 잠깐잠깐 눈을 돌릴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볼 때마다 ‘막장’의 요소가 기다렸다는 듯 나왔기 때문이다. 회상장면에서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아이를 잘사는 집 앞에 놓는다든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인의 시어머니가 졸도한다든가, 그 여인과 또 다른 여인이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고 있다든가 하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려고 보는 게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온통 그랬다.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기에 말로만 들었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욕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는가, 직관적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야구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약속이 없는 날 저녁 6시반이 되면 나는 반사적으로 TV를 켠다. 그리고 3~4시간을 오직 야구를 보는 데 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다행히 리그 상위권에 있어서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많지만 그렇다해도 저녁 내내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실책이 나온다든가, 주자를 잔뜩 쌓아놓고 올라온 타자가 병살타로 이닝을 종료시킨다든가 하면 어김없이 욕이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가장 화나는 상황은 순탄하게 잘 흘러가던 시합이 막판에 뒤집힐 때다. 그것도 상대방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선수의 어이없는 플레이로 분위기를 헌납할 때는 평소 잘 쓰지 않던 극단적인 표현이 혀끝에서 맴돈다. 팀이 이기고 있을 때 나오는 필승조 투수들을 모두 올린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시합이 끝난 후에도 ‘오늘의 역적’을 원망하게 된다. 감정 동요 없이 볼 수 있는 시합은 1회부터 9회까지 모두가 무난하게 잘해서 쉽게 승기를 잡거나 반대로 초장부터 경기가 터져 나가서 기대가 힘든 경우밖에 없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시합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이런저런 야구 커뮤니티마다 그날 부진했던 선수를 능지처참할 기세로 달려들고, 이해할 수 없는 운용을 한 감독의 부모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다. 잘하건 못하건 모든 감독들의 성이 강제로 ‘돌’로 바뀌는 일은 프로야구 감독이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늘 하위권에 있는 팀의 팬들은 제발 해체하라고 울부짖는다. 일희일비야말로 스포츠 열혈팬들의 공통점이라지만 일주일에 여섯번 시합을 하는 야구의 특성상 일희일비의 정도도 심하다. 모든 순간들이 점으로 연결되는 까닭에 모든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간제한도 없으니 고통의 시간도 길다. 분노의 레저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막장 드라마가 나은 것 같다. 어쨌든 그런 드라마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쯤 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포츠를 본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게 백배 천배 나을 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야구를, 스포츠를 보는 것일까. 영국의 작가이자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열혈 팬인 닉 혼비는 그의 데뷔작 <피버 피치>에서 이렇게 썼다. “축구는 또 하나의 우주로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것이며, 염려와 희망과 실망을, 그리고 이따금씩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내가 축구를 보러 가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락을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주위에 모여 앉은 침울한 얼굴들을 보면, 남들도 나와 같은 기분임을 알 수 있다. 충성스러운 축구팬에게, 보기 즐거운 축구의 존재는 정글 한가운데서 쓰러지는 나무의 존재와 같다. 우리는 그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왜 쓰러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패배한 경기의 허탈함, 이긴 경기 안에서의 실책으로 인한 분노 등을 걷어내고 복기하자면 한 경기 한 경기가 인생과 같다. 삶에서의 어이없던 실수를 대입해보고, 승부가 필요했던 때 과감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러니 모든 스포츠 팬들이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종목을 인생이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냥 좋기만 한 인생이 없듯, 마냥 좋기만 한 경기도 없으니. 승부를 예상할 수 없기에, 나는 저녁에 TV를 켠다. 야구장을 찾는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모습  (0) 2019.06.07
그럼에도 나는 왜 야구를 볼까  (0) 2019.05.23
괜찮아요  (0) 2019.05.09
성수동의 재발견  (0) 2019.04.25
관용어  (0) 2019.02.14
양심  (0) 2019.01.1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고 법과 제도의 개선을 추진키로 했다. ‘선 입법, 후 비준’을 고수하며 관망하던 정부가 입법과 비준을 병행 추진하는 쪽으로 적극 나선 것이다. 이는 지난 20일 경사노위의 ILO 핵심협약 논의가 성과 없이 종료된 데다 ILO 100주년 총회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나왔다. 궁여지책이지만 노동존중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은 긍정적이다. 

ILO 핵심협약은 전체 189개 협약의 기본이 되는 8개 협약으로 ‘결사의 자유·강제노동 금지·아동노동 금지·차별 금지’를 담고 있다. 현재 ILO 187개 회원국 중 144개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의 대다수가 핵심협약 전체를 비준했다. 그러나 한국은 1991년 ILO 회원으로 가입하고도 28년째 핵심협약을 지키지 않고 있다. 한국은 8개 핵심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제87호·제98호)’와 ‘강제노동 금지(제29호·제105호)’에 관한 4개 핵심협약을 이행하지 않아 지속적으로 비준을 요구받아왔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2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비준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핵심협약은 미비준 4개 제87호·제98호·제29호 등 3개 협약이다. 제105호는 국내 형벌체계, 분단 상황을 고려해 일단 제외했다. ILO 핵심협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노동권과 인권 분야에서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가 없다. 또 기본협약 비준은 무역협정 체결 시 노동기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유럽연합(EU)이 ILO 핵심협약 비준에 노력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을 압박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내적으로도 대통령 공약사항인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정부가 나선 만큼 이제 국회가 호응해야 한다. 정부는 올가을 정기국회에서 입법과 비준 동의안이 처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회에는 현재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보완이 필요하면 10개월간의 경사노위 논의 과정을 참고하면 된다. 국회의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는 경영계의 반대가 거세고 자유한국당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정부는 자체 입법을 하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내 노동인권을 국제적인 기구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 비준이 이뤄지면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전교조 해직교사의 단결권 등 노동자의 권리 신장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황망히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다. 2009년 이래로 10년 동안 근 1000만명이 봉하마을을 찾았다. ‘바보 노무현’을 그리고, 그가 품었던 이상에 공감하며, 그가 남긴 뜻을 계승하려는 열망은 강산이 변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오히려 강렬해지고 있다. 이름 석자보다 ‘노무현정신’ ‘노무현가치’로 끝없이 현재에 소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추구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여전히 시대정신으로 살아있다는 의미일 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하루 앞둔 22일 노 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였던 장철영씨가 청와대 안팎 공식·비공식 일정을 촬영한 미공개 사진 30여점을 경향신문에 단독 공개했다. 사진은 200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친 다음날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무등산 등산 도중 휴식을 취하며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과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의 미공개 사진들은 경향닷컴(kyunghyang.com)에서 볼 수 있다. 사진가 장철영씨 제공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은 참여정부 3대 국정방침에 집약돼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모두가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가 그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정부 수립 이후 70년 동안 이어온 시대적 과제다. 그랬기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평화가 위협받을 때 ‘노무현정신’이 재조명된 것이다.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극성을 부리고 반동의 기운마저 스멀거리는 2019년, 노 전 대통령의 ‘통합’ 정신이 주목받는 것 역시 시대적 요청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노 대통령은 여러 분열과 갈등을 해소해 국민을 통합하는 걸 필생의 과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악질적 분열의 토양인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정치생명을 걸었고, ‘너 죽고 나 살기 식’ 정치를 바꾸려 대통령의 권력까지 내놓는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통합의 길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 갈등 봉합 수단과는 거리가 멀다. 새로운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을 마련해 ‘공존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선거제 개혁안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결정치를 부추기고 지역구도를 재생산해내는 구조를 완화시킨다. ‘대연정’ 제안의 핵심인 선거제 개혁이 이제야 불완전하나마 이뤄질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5·18 망언과 ‘좌파독재’ 타령에서 보듯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퇴행적 행태는 아직 청산되지 않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던진 마지막 메시지가 된 검찰개혁은 관련 입법이 가까스로 패스트트랙에 올랐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흔들리고 있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를 위해 기득권과 온몸으로 맞섰던 ‘바보 노무현’이 더욱 절실해지는 까닭이다.

노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이 내건 화두는 ‘새로운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을 계승한 우리 모두가 ‘새로운 노무현’이 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이어가겠다”는 취지다. 10주기 23일, 봉하마을이 깨어 있는 시민들의 ‘새로운 노무현’ 다짐으로 가없이 빛나길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청와대 인사와 정부 관료 사이에 경제정책을 놓고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늘 있어왔다. 전자는 이상에, 후자는 현실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교수 출신의 청와대 인사들은 ‘새로운 세상’을 말했지만, 경제관료들은 이를 ‘현실성 없는 무지개’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전 경북대 교수는 “경제관료들은 시야가 좁다”고 비판했다. 당시 경제부총리는 김진표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갈등 끝에 이들은 1년 만에 모두 교체됐다. 

이번에는 적극적인 확대재정을 놓고 청와대와 기획재정부의 의견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기재부가 건전재정을 이유로 확대재정에 난색을 표한 데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불만을 표한 것이다. 지난 16일 세종에서 열린 ‘2019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문 대통령에게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40% 초반대에서 관리하겠다”고 보고했다. 올해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39.5%로 추산되는 만큼 과감한 재정지출 확대는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국제기구 권고에 따르면 국가채무 비율 60% 정도를 재정건전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며 홍 부총리가 제시한 40%의 근거를 따졌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2015년 야당 대표 시절에는 40% 고수를 주장했다가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지금 돈을 쓰지 않으면 파국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기재부는 ‘정부지출의 확대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맞선다. 청와대는 심각한 노인빈곤 및 고령화 대응, 국제기구의 확장재정 권고 등을 논거로 삼는다. 그리고 국채이자율이 성장률보다 낮기 때문에 지금 국채를 발행해 돈을 조달하는 것이 지출이 적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재부는 고령화·통일 등 향후 재정소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재정지출 확대에 부정적이다. 2011~2016년 300조원대였던 정부지출 규모가 2017년 400조원을 넘고 내년에는 500조원으로 점프해 재정 확대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기재부 어느 쪽이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현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길이냐는 것이다.

건전한 재정의 유지는 안정적인 국가경제 운용의 출발점이다. 과도한 채무가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서 경험한 바 있다. 경제대국이나 대규모 경제권에 속한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외풍에 흔들릴 취약한 구조다. 건전재정은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이겨낼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복지비용을 포함해 정부가 지출해야 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복지비용은 한번 늘면 줄지 않는다. 또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빠르고, 저출산은 심각하다. 쓸 돈은 많은데, 돈 버는 사람은 부족하게 될 것이다. 또 부채가 짐이 되지 않으려면 경제성장률이 이자율보다 높아야 한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성숙 단계에 있는 국가들처럼 한국도 성장률이 하락할 것이다. 부채가 쌓이면, 이자 상환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야 하는 처지까지 올 수 있다. 그리고 공기업부채까지 감안하면 한국의 국가채무가 60%를 넘었다는 말도 나온다. 적극재정을 하지 않아도 돈 쓸 일이 많고, 국가채무 비율도 안심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의 성쇠에 천착한 글렌 허버드는 <강대국의 경제학>에서 “지난 수십년간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재정불균형이 심화됐다”면서 “이는 대통령과 의원들의 목표가 장기적인 국가성장이라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재선이었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선거는 정치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법을 무시하고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가 하면, 돈을 풀어 전 국토를 공사판화하는 게 현실이다.

적극적으로 재정을 확대하겠다면, 그만큼 재정건전성 확보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빚은 언젠가 청구서로 날아오기 때문이다. 재정 투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이 되지 않아야 한다. 먼저 건전재정을 위협하는 연금 개혁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경제·노동 분야에 고착화된 비능률과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구조개선도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증세 카드도 적극적으로 내밀어야 한다. 

유권자들은 세금은 덜 내고 복지혜택은 많이 받으려고 한다. 정치인들은 ‘우리는 과거 정부와 다르기 때문에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래를 담보로 한 과도한 지출에 따른 짐은 누가 질 것인가. 세상엔 공짜가 없다.

<박종성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인터넷 은어 중 ‘어그로’라는 말이 있다. 대개 ‘어그로를 끈다’는 관용구로 사용된다. 영어 단어 aggravation에서 왔다는 게 정설이다. 도발, 약올리기의 뜻을 가졌다. 

어그로를 끈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슈를 내세워 관심을 모은다는 뜻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막말’은 ‘어그로를 끄는 관종’의 짓이다. 현실 정치의 어그로는 실보다 득이 많다. 어그로의 수위만큼 자신의 지명도가 높아진다. 점점 더 자극적인 어그로가 유혹하는 어그로의 악순환이다. 

정치 관종의 어그로는 잃을 게 별로 없다. 막말과 망언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정치판을 지저분하게 오염시킨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동시에 일부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정치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니 완벽한 플러스다. 정치판이 오염될수록 새로운 ‘유망주’가 유입될 가능성도 낮다. 새 얼굴이 없으니 자신의 자리는 더욱 탄탄해진다. 

지나치다 싶으면 사과를 하면 된다. 요즘 말로 ‘영혼 없는’ 사과는 다시 한번 어그로를 끄는 데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공개적으로 한 뒤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썼다”고 해명했다. 

‘어그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단어지만 출발은 달랐다. 원래 ‘어그로’는 ‘팀을 위한 희생’을 뜻하는, 말하자면 ‘숭고미’를 가진 단어였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에서 이 말이 나왔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온라인 역할 게임이다. ‘파티’를 구성해 괴물(몬스터)을 사냥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게이머의 역할은 크게 탱커, 딜러, 힐러의 3가지로 나뉜다. 딜러는 원거리 공격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를 공격해 에너지를 떨어뜨린다. 인터넷 은어 중 ‘상대를 극도로 괴롭힌다’는 뜻의 ‘극딜’이 여기서 나왔다. ‘딜링’은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다.

힐러는 힐링(healing)을 맡는다. 전투 도중 피해를 입은 팀원들을 치료해 회복시켜주는 역할이다. 마지막 하나, 탱커가 바로 ‘어그로’의 주인공이다. 탱커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낸다. 탱커가 두들겨 맞으면서 버티는 동안 딜러가 몬스터를 공격하고, 힐러가 탱커 또는 딜러를 치료하면서 팀 전력을 높인다. 3가지 캐릭터의 호흡이 맞아야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다. 

몬스터의 공격이 딜러나 힐러를 향하면 파티 전력에 큰 손실을 입는다. 탱커는 몬스터가 계속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어그로’다. 탱커는 몬스터를 향해 도발을 계속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어그로를 끄는’ 것은 대중들에게(혹은 지지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희생적 행동이다. ‘내 친구들 말고 나를 때려라’라고 외치는 행동이다. 내가 두들겨 맞는 동안 내 동료들이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 권아솔은 ‘어그로’ 전문이었다. 로드FC 소속으로 거침없이 막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트래시 토크’ 수준을 넘기도 했다. 지난 18일 제주에서 열린 굽네몰 로드FC 053 메인이벤트에서 만수르 바르나위에게 1라운드 초반 리어네이키드초크를 당해 졌다. 팬들의 비난이 거셌다. 권아솔은 SNS에 이렇게 적었다.

“선수가 시합을 못했다면 욕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은 지켜달라. 나라의 지원도 못 받는 한국 종합격투기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다. 이런 게 아니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용균 스포츠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우리가 쓰는 말을 ‘모국어’라 한다. 아버지의 말 부국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 모국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뭔 쓰잘데없는 말을 하려고 하면 어머니가 무안을 주면서 입을 딱 다물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머니가 이기고 산다. 아버지가 이기고 사는 집은 희귀하다. 집에서 이기지 못해 밖에 나가 억지 대장노릇을 하려 들면 부작용이 생긴다. 지고 사는 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현명한 처세일 텐데. 

수가 많다는 말을 경상도 사람들은 ‘쎄삐릿다, 억수로 많다, 항 거석 있다, 수두룩 빽빽하다, 천지삐까리 많다’고 한다. 전라도 사람들은 ‘솔찬하다, 겁나다, 허벌나다, 오살나게 쎄뿌렀다, 시꺼멓다’ 그런다. 오월 하루, 역사의 현장 광주에 시민들이 많이 모였다. 내가 관장으로 있는 메이홀에선 민중미술가 김봉준 화백의 신작전 ‘오월 붓굿’이 열렸다. 김샘과 내가 맺어온 인연의 결실로 광주에선 첫번째 전시였다. 그간 한번쯤 전시할 만도 했을 텐데, 우리나라는 이만큼 지역 장벽, 경계가 높고 두껍다. 하루는 메이홀 앞이 충장로와 민주광장인데 ‘태극기 부대’가 지나면서 야구장에서나 들었던 ‘부산 갈매기’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다. 오늘 야구하는 날인가? 야구장에 부산 팬들이 와서 부르면 따라서 불러주던 노래. 어머니 말을 징하게 안 듣는 사내들이 억수로 모여들더니 민주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에 조롱 삼아 ‘부산 갈매기’를 열창한다. 반응은 분노할 것도 없고 그냥 조용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부산 인물을 찍어준 광주 시민들.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줘서 다행이네 뭐.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파도치는 부둣가에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지금은 그 어디서 내 모습 잊었는가” 부산 갈매기야! 전라도 친구들을 잊으면 되겠는가. 잊지 말아다오. 좋은 뜻으로 해석하마. 노래가 무슨 죄냐.

언론에 거론되는 유망 정치인들이 죄다 저쪽 분들인 것은 어떤 구조악에 빠진 듯하다. 갈매기는 삼면이 바다인 이 나라, 어디라도 사는데 말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린 강  (0) 2019.06.07
블라디보스토크  (0) 2019.05.30
부산 갈매기  (0) 2019.05.23
가면 올빼미  (0) 2019.05.16
망명객  (0) 2019.05.09
중국 영화  (0) 2019.04.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윤태웅의 <떨리는 게 정상이다>, 존경하는 두 저자가 작년에 낸 멋진 책이다. 둘 다, 제목에 ‘떨림’이 등장한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필자는, 김상욱의 ‘떨림’은 물리학의 ‘진동(振動)’, 윤태웅의 ‘떨림’은 물리학의 ‘요동(搖動)’으로 읽었다.(이유가 궁금하면 두 책을 꼭 읽어 보라. 둘 다 좋은 책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떤다. 추운 날에는 몸도 떨고 이도 떤다. 어렵게 통과한 서류 심사 후, 취업 면접을 앞둔 대기실의 떨림도 있다. 사랑하는 이가 이제나저제나 오기를 기다릴 때, 설렘도 떨림이다. 큰 변화의 와중에는 사회도 떤다. 사람들이 들썩들썩 가만있지 못한다. 통계물리학에서도 ‘떨림’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렇다.

온도가 높이 오르면 막대자석의 자성이 없어진다. 얼음은 녹아 물이 되고, 물은 끓어 수증기가 된다. 물질의 거시적인 상태가 급격히 변하는 것이 통계물리학의 상전이다. 액체인 물속 물 분자나, 기체인 수증기 안 물 분자나, 똑같은 물 분자다. 비록 우리가 스냅사진을 찍어 볼 수 있다 해도, 독사진만으로는 사진 찍힌 물 분자가 물속에 있는 친군지, 수증기 속 친군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른 여러 친구 물 분자가 함께한 단체사진을 찍어봐야 안다. 물인지, 수증기인지는 물 분자 하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물 분자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만드는 거시적인 구성(혹은 짜임)에 대한 얘기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는 난데, 어느 날 아침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 격변의 경험이 우리 현대사에 여러 번 있었다.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이라면, 우리 한 사람은 강물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는 나뭇잎이 아니다. 연약하기로는 나뭇잎과 다를 것 하나 없어도, 큰 강물을 이루는 작은 물방울이 바로 우리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이 작아도, 모여서 함께 큰 강물로 흘러 세상을 바꾼다. 우리가 역사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막대자석도 마찬가지다. 큰 자석 안에는 ‘스핀’이라 부르는 엄청나게 많은 작은 원자자석이 들어 있다. 원자자석 하나는 강물의 물방울을 닮았다. 모든 물방울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움직여 강물의 큰 흐름을 만들 듯, 작은 원자자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팔을 뻗어 앞으로나란히를 하면, 큰 자석 전체가 강한 자성을 갖게 된다. 한편, 작은 원자자석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을 뒤죽박죽 가리키면 막대자석은 거시적인 크기의 자성을 갖지 못한다. 낮은 온도에서 시작해 온도가 점점 오르면, 낮은 온도에서는 컸던 막대자석의 자성이 특정한 임계온도에서 사라져 0이 되는 상전이가 일어난다. 이때 관찰되는 흥미로운 임계현상(고비현상)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떨림’의 크기가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거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자성은 한 값으로 딱 정해지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큰 폭으로 격렬하게 요동한다. 격변의 상전이를 겪을 때 사회도 이처럼 몸살을 앓는다. 엄청난 떨림을 겪는다. 물리나 사회나, 커다란 변화는 엄청난 떨림과 함께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윤동주 ‘서시’의 문장이다. 시인은 이처럼 외부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가슴으로 삶을 앓는다. 우리가 시인들을 탄광의 민감한 카나리아로 비유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통계물리학에서도 민감도를 얘기한다(물리학 용어는 감수율(susceptibility)이지만 쉽게 바꿔 불러봤다). 외부의 작은 자극에 얼마나 크게 반응하는지를 잰다. 막대자석의 경우라면, 외부에서 작은 자기장을 걸어주었을 때, 막대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재서, 그 비를 구하면 그 값이 민감도다. 이렇게 정의하고는 ‘서시’의 문장으로 시인의 민감도를 측정하면, 그 값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시인의 가슴속 큰 괴로움을 잎새에 이는 약한 바람의 세기로 나누니, 그 값이 아주 클 수밖에. 

통계물리학에 ‘요동-흩어지기 정리’라는 것이 있다. 막대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크게 요동하고 있는지, 즉 ‘떨림’의 정도를 자성값(M)의 분산(제곱의 평균에서 평균의 제곱을 뺀 값)을 이용해 정량적으로 잴 수 있다. 또, 외부에서 걸어주는 자기장의 변화량에 따라 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구해 그 비를 재면, 그 값이 바로 민감도다. ‘요동-흩어지기 정리’는 바로, 떨림의 크기가 민감도에 비례한다는 통계물리학의 아름다운 이론이다. 오늘 필자가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면 ‘떨림-민감 정리’라 할 수도 있겠다. 크게 떨 때 민감하고, 둔감하면 떨림도 없다. 

윤태웅의 <떨리는 게 정상이야>에 유명한 지남철 얘기가 있다. 떨지 않아 한 방향만을 꼼짝 않고 가리키는 지남철로는 북쪽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지남철이 떨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지남철이 향하는 방향을 북쪽으로 신뢰할 수 있다. 통계물리학도 마찬가지 얘기를 한다. 크게 떨고 있을 때에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우리 사회에서, 떨리는 게 정상이니, 민감해야 정상이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자석의 자성은 큰 떨림을 보여준다. 떨림의 크기가 무한대로 발산한다. 위에서 소개한 ‘떨림-민감 정리’를 이용하면, 민감도가 떨림의 크기에 비례하니, 상전이가 일어날 때 민감도도 함께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전이의 격변기에 떨림의 크기와 민감도는 함께 무한대가 된다. 우연히 발견된 작은 태블릿 하나가 민감한 불씨가 되어, 큰 분노의 떨림을 만들어 결국 세상을 바꿨다. 혼자서 따로 떤 것이 아니었다. 연결된 여럿의 민감한 떨림이 강물로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 번이라도 인사불성 상태의 취객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과도한 알코올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고 대책 없는 존재로 만드는지 알 것이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취객을 손쉽게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최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논평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대응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동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그럼에도 논란’이라는 식의 보도를 지속하는 언론들이 논평의 대상일 수는 있을 것이다. 여경 폐지라는 억지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장을 계속해서 사회적 여론인 것처럼 다루며 의미 없는 수선을 피워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너무 많은 영화와 매체들이 경찰의 업무를 극적이고 폭력적으로 연출해왔다. 하지만 경찰의 일상이 도심을 가르는 추격전과, 목숨을 건 혈투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표창원 의원에 의하면 세계 각국의 경찰 업무 중 물리력을 사용하는 업무의 비중은 많게 잡아야 30%가량이고 나머지 70%는 대민 업무를 비롯한 소통 업무다. 만약 경찰이 빈번하게 물리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경찰일수록 인권감수성, 합법성, 소통능력이 더욱 중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공권력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물리력을 행사할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만약 경찰의 폭력이 두려워서 그들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라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대하는 이들이 언제나 험상궂은 덩치들뿐인 것도 아니다. 경찰은 조폭도 상대하지만, 지능범이나 교통사고를 낸 사람도 상대하고, 그게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대수롭지 않게 범법을 행한 사람도 상대한다. 서로 언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상대하고, 각종 시위대도 상대하며, 범죄의 피해자들도 상대한다. 그러므로 푸시업을 더 잘하는 사람에게 경찰 업무를 모조리 맡겨야 한다는 발상은 단순함을 떠나 지극히 위험하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여성 경찰은 무용하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그리고 이 논의들은 여성 경찰의 현실적 필요와 역할을 재차 확인해주었다. 여성 경찰들은 통상적인 경찰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흉악범죄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므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나 조사 과정에서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고, 일상적인 업무에서 불필요한 물리력 행사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런 실용성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논의는 치안이라는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으로 구성하고 통제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경찰의 중요한 권한 중 하나는 누가 범죄자인지를 식별하는 것이다. 가령 지난 정권에서 경찰은 민간인 및 반(비)정부 세력에 대한 감시를 벌이고 여론조작을 하는 등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다. 또 최근 버닝썬 사태에 대한 조사를 통해 유착 의혹이 제기된 경찰과 성매매 및 약취강간을 벌였다고 의심되는 연예인과 ‘VIP’들 대신에 제보자를 유일한 범죄 용의자로 선정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경찰의 가장 큰 문제는 취객을 한손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여성 경찰이 아니라, 그릇된 조직 보위 논리와 권력욕에 빠져 공권력의 정당성 자체를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는 조직의 전·현직 결정권자들이다. 경찰청의 중요한 사안을 무술대회를 열어 결정한다고 해도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이 여경 폐지를 외치는 남자 경찰공무원 지망생들도 마찬가지다.

경찰의 무장과 폭력 사용이 공권력에 대한 존중을 높여주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공권력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복이지 몽둥이가 아니다. 제복 속에 사람의 성별과 피부색과 성 정체성과 장애 여부는 더더욱 아니다. 경찰과 경찰 지망생들께서는 업무에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  (0) 2019.05.30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0) 2019.05.28
치안의 정치  (0) 2019.05.23
우먼 온 톱  (0) 2019.05.21
스승의날을 맞이했을 스승들에게  (0) 2019.05.16
나의 스승  (0) 2019.05.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