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안 먹어.” 

아이를 키우다 보면 별별 생떼를 다 듣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는 떠나고 괴물이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오죠. 이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억지. 잘못은 전부 남의 탓. 귀찮다, 내버려 두라는 고함. 부모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눈빛. 잘못은 아이가 했지만, 그 애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 합니다. 밥 안 먹겠다는 말은 실소마저 나오죠. 화나죠. 슬프고 답답합니다. 한심해 실망스럽기도 하죠. 배 속에 다시 넣고 싶기도 하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당황한 부모는 책도 읽고 강연도 듣습니다. 여러 조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하고 크게 새롭지도 않죠. 신뢰와 사랑도 보여주어야 하며 대화의 끈을 놓지 말라는 충고도 빠지지 않습니다. 

자유한국당을 보면 딱 그런 사춘기 아이 같습니다. 생떼와 투정이 무서운 중2를 뺨치는 듯합니다. 국회 가출을 한 게 지난 4월. 거의 석 달이 다 되도록 아무 일도 안 하지만 목청과 기상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자기 당 의원조차 설득시키지 못한 채 “소외정치, 야합의 정치로 제1야당을 찍어 내리려 한다면 이제 국회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민망함을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민망할 수밖에 없는 게 이 논란의 원인 제공도 자유한국당이 했기 때문이죠. 국회가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바로 그 패스트트랙을 막고자, 즉 국회를 멈추기 위해 자유한국당은 폭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국회법 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고발되자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는 자기에게 불리할 선거법 개정을 막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좌파독재”라며 억지를 이어가고 있죠. 딱 사춘기 시작한 애들 꼴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버릴 수 없듯 자유한국당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 정치의 엄연한 한 축이니까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오냐오냐하며 내버려 둘 수도 없죠. 애들처럼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치권 내의 대화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원내대표 간 합의는 좌초됐고 청와대 회동도 무산됐죠. 자유한국당에 다른 정당과 청와대는 행패의 대상일 뿐 대화 상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 유권자가 나서야 합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선거개혁을 통해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는 선거제도 개편안은 충분치 않습니다. 비례대표의 의석수를 늘리고 비례성도 강화해야 합니다. 다양할 수밖에 없는 유권자 목소리를 대변할 여러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4년에 한 번 있는 국회의원 선거도 2년에 한 번씩, 의원 절반을 뽑아야 합니다. 선거가 자주 있어야 유권자 눈치를 더 볼 테니까요. 중앙당 공천이란 구시대적 제도도 끝을 내야 합니다. 후보도 당원과 시민 손으로 뽑아야죠.

동시에 단호해야 합니다. 대화를 원치 않는 아이들을 붙잡고 사정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합니다. 규칙을 정했으면 지키라고 요구하고 어기면 벌도 내려야죠.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법은 그간 국회폭력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이 법과 전통을 뻔뻔하게 파괴했습니다. 패스트트랙과 관련한 정치권의 고소·고발 사건은 엄격하게 판단하고 죄가 드러나면 단호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우습게 아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적폐를 놔두고 과거의 적폐청산은 불가능합니다. 힘, 돈, 연줄로 법 위에 군림한 이들을 끌어내려 우리와 같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국회의원의 갖가지 특권도 모두 공개하고 대폭 줄여야 합니다.

지난 몇 년 삼권분립의 두 축인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개혁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국회는 그 시작조차 없었죠. 여기엔 자유한국당의 분탕질이 큰 몫을 했습니다. 이제 자유한국당이 사춘기 정치를 멈추고 성숙할 수 있도록 검찰, 법원, 유권자 모두가 힘을 합쳐 도와야겠습니다. 밥 안 먹겠다는 아이, 밥 주지 맙시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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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이 되어 대학은 여름방학을 맞았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교는 그간의 과제들을 평가하고 기말고사 채점을 마감하여 성적을 입력하는 기간이다. 봄학기 내가 강의한 학부 과목은 젠더연구 관련 과목이었다. 

내가 2006년부터 매년 담당해온 이 젠더연구 수업에서 40명 남짓한 수강생 대다수는 여학생이다. 남학생은 때로 2~3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생들이 적었다. 이때는 ‘포스트 페미니즘’이나 ‘신보수주의’ 경향 속에서 여학생들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으로 발언을 시작하곤 하던 때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우리 문화 전반에서 다시 증가하였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이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라 명명했다.) 그런데 올해엔 학기 초부터 눈에 띄는 차이가 있었다. 넉넉히 50명으로 정해 두었던 정원을 훌쩍 넘기고 10여명이 추가로 수강신청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마도 2017년 가을 이래로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국내외의 미투 운동과 지난해 디지털 성폭력 및 불법촬영 반대운동 등이 성평등에 관한 관심을 부쩍 높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0명 이상이 빼곡히 앉은 강의실이 처음엔 낯설기까지 했다. 그중엔 남학생도 10여명 있었다. 이 학생들은 이 강의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궁금했고, 소통이 잘될지 실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는 수줍어하는 학생들도 따로 마련해 준 인터넷 토론실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질문과 코멘트를 올리며 의견을 표현하고 생각을 교환했다. 수업에서는 페미니즘을 배경으로 여성을 공부하면서도 학기의 절반가량은 남성성을 연구하는 글들을 읽었고 성소수자 관련 의제들을 다루었다. 문학작품과 이론서를 아우르며 읽은 내용들이 어려웠지만, 학생들은 읽은 책들 못지않게 수준 높은 언어로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표현했고 경험을 공유했다. 

남성성에 관한 논의는 조용했으나 뜨거웠다. 전통적, 제한적 남성성의 굴레인 이른바 ‘맨박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남학생들의 의견이 많았다. 남성들의 공고한 동성사회적 유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사회화의 관습이 그 굴레를 깨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대한 예리한 비판이 학생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남녀 학생들 모두 우리 사회에서 남성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좀 더 유연해져야 하며 남성성에 대한 남성의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었다. 남학생들이 반페미니즘적 입장이 아닌 차원에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을 반추하고 남성으로서의 목표와 지향을 기꺼이 재고할 공적인 기회를 반겨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여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거나 그래서 남자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은, 페미니즘이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룩했다는 전제하에 있다. 모두가 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그러한 현실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 역시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성평등은 ‘이미 이룬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목표다. 남녀의 불균형한 권력구도는 역사상 뒤집힌 적이 없으며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성평등은 한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늘 실천을 통해 유지해야만 하는 과정인 것이다. 법과 제도를 통해 특정 분야에서 형식적으로 명목상으로 성평등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유지되고 실행되도록 언제나 주의하고 평가해야 한다. 성평등을 위한 일상의 성찰적 실천이 언제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평등한 사회에 대한 지향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에 남성들의 인식과 참여가 없다면 성평등한 세상은 비현실적 꿈일 뿐이다.

예비군 훈련의 인권, 법률 교육시간에 성매매 시 처벌받지 않는 방법, 모르는 여성에게 강간죄로 무고당하지 않는 방법 등을 강의했다는 해군장교 이야기나, 경찰간부 승진 예정자들과 공공기관 공무원들이 성평등 교육 자체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불성실함으로 자리를 이탈하고 불평을 했다는 등의 소식은 듣는 이조차 부끄럽게 만든다. 하지만 때 이른 절망 또한 일종의 무책임일 수 있다. 기성세대의 의식변화에 현실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젊은이들의 삶은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깨어있는 남성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여러 건의 카톡방 사건들을 비롯하여 버닝썬 사건, 정준영 사건 등은 그 사태에 심대한 문제의식을 느낀 ‘내부자’ 혹은 목격자 남성이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남성들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촉구했기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남성성 연구와 남성 교육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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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가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 법정기한인 27일 6차 전원회의를 열었지만 사용자위원들의 불참으로 파행을 겪었다. 최저임금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도 못한 채 심의 시한을 넘기면서 2020년 최저임금 결정은 속절없이 늦어지게 됐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파행은 전날 5차회의 때 시작됐다. 사용자위원들이 최임위에서 ‘전업종 동일 최저임금’과 ‘최저임금 월 환산액 병기’가 표결로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회의를 보이콧한 게 발단이었다. 그러나 사용자위원들의 보이콧은 명분도 실리도 없다. 최저임금은 지난 30년간 모든 업종에 동일하게 적용돼 왔다. 또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상여금과 수당이 포함되는 것을 감안하면 최저임금을 시간급과 함께 월 환산액을 표기해 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사용자위원들은 표결에 참여해 놓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퇴장하는 비민주적인 태도마저 보였다.

최임위가 심의기한을 넘기고 파행으로 치달으면서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은 어느 해보다 어려워 보인다. 노사 양측은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일찍부터 신경전을 벌여왔다. 사용자 측은 2년 연속 두 자릿수 최저임금 인상을 들어 동결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노동자 측은 대통령 공약이기도 한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위해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맞서고 있다. 양측은 이를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논거와 통계 수치를 들이대고 있다. 현재로서는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최저임금은 노동자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수다. 최저임금 인상은 노동자의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임금 불평등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또 노동자 가구의 소득을 높여 사회양극화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많은 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노동시장 개선과 불평등 완화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면밀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들에 대한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이나 세제 혜택은 최저임금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

내년도 최저임금 고시 시한인 8월5일에 맞추기 위해서는 7월 중순까지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최임위의 파행은 볼썽사납다. 사용자위원들은 최저임금제의 엄중한 취지를 되새겨 회의에 복귀해야 한다. 노동자위원들도 최저임금의 단기적 인상에 급급하기보다는 장기적 전망을 갖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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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 수감된 지 6일 만에 풀려났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2부는 27일 구속적부심 심사 뒤 보증금 1억원을 납입하는 조건으로 특수공용물건손상·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된 김 위원장의 석방을 결정했다. 김 위원장의 석방이 악화된 노·정관계 회복을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고, 국가는 방어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법원의 이번 결정은 의미가 있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27일 오후 조건부 석방된 뒤 구로구 서울남부구치소 문을 나서고 있다. 권도현 기자

재판부는 김 위원장을 석방하면서 결정문에 이례적으로 “형사소송법 214조2의 제5항 단서 각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적시했다고 한다. 보증금납입조건 석방의 두 가지 예외 사항으로 증거인멸과 석방 이후 추가 피해 우려에 대한 내용이다. 재판부가 김 위원장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고 임의 출석한 점 등으로 미뤄 도주하거나 추가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다고 본 것이다. 김 위원장은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고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구속적부심 재판부의 결정은 여론 등에 밀려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청구를 한 경찰·검찰의 사법처리절차가 처음부터 무리였음을 방증한다. 이를 발부한 영장실질심사 재판부 결정 역시 마찬가지다. 석방 결정은 뒤늦게라도 이를 바로잡았다는 뜻이 된다.

김 위원장에 대한 혐의는 법정에서 유무죄가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국회 벽을 넘으면서까지 주장했던 문제는 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할 수 없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및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에 반대하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 보호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취지가 무색해지고, 임금이 줄거나 부당한 노동이 계속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역시 노동자의 기본권 확보라는 점에서 조속한 처리를 바라고 있다. 

정부는 노동계의 이런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최저임금 1만원 등은 정부의 공약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경제 사정 등이 악화됐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조차 외면하는 것은 ‘촛불정권’을 자임하는 정부의 태도가 아니다. 민주노총 역시 김 위원장 석방을 계기로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는 단안을 내리기 바란다. 노사정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현안들을 풀어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소할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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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옥(inferno). 

스페인 공영방송(RTVE)의 기상캐스터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이름으로 유럽의 때 이른 6월 폭염 소식을 트윗으로 전했다. 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에서 연일 40도를 오르내리며 ‘폭염경보’가 발령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번 주말에는 스페인 북동부와 프랑스 남부 지역의 낮 최고기온이 섭씨 45도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고되었다. 만일 이 온도가 현실이 된다면 프랑스에서 역대 최고 기록인 2003년 8월12일 44.1도를 경신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해에 프랑스인 1만5000명을 포함, 유럽에서 7만명이 사망하였다. 대부분 대책 없이 더위를 견뎌야 했던 노약자와 빈곤층들이었다. 

유럽이 이 정도인데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지난 6월17일 인도 동부의 비하르주에서는 섭씨 45도의 폭염으로 184명이 사망했다. CNN 보도에 따르면 인도 첸나이주에서는 폭염으로 36명이 사망하였고, 가뭄으로 물이 없어 호텔과 식당이 문을 닫기까지 하였다. 죽은 사람도 애통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견디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사이언스 어드밴스’지에 실린 영국 브리스틀대학의 기상학자 유니스 로 팀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온난화로 평균기온이 섭씨 3도 이상 상승하면 LA에서만 2500여명이, 뉴욕에서는 6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폭염으로 사망할 수 있다고 예측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폭염은 주로 노약자와 야외 노동자, 빈곤층에 큰 위협이 되며 특히 포장도로와 고층 빌딩들이 밀집된 대도시는 도심 열섬이 형성되는 탓에 폭염에 더욱 취약하다고 보고하였다. 

지난 25일 유엔에서 필립 알스턴 유엔 빈곤·인권 관련 특별보고관은 “부자들은 더위, 기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나머지 세계는 극심한 고통을 받는 ‘기후 아파르트헤이트’ 시나리오의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2012년 뉴욕시에 허리케인 샌디가 몰아쳤을 때 수천명의 저소득층이 며칠 동안 전기와 의료서비스 없이 방치되는 동안 뉴욕 맨해튼 골드만삭스 본사에서는 수만개의 모래주머니가 준비되고 사설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했던 사례를 들었다. 

폭염은 주차장의 자동차도 불붙게 하고, 타이어에도 펑크를 내며 열사병으로 즉각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미세먼지만큼 관심을 두지 않는 걸까? 우리나라도 벌써부터 연일 기록을 경신하며 폭염경보가 내려지고 있는데 폭염을 미세먼지만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에 살면 집, 자동차, 지하철, 백화점, 찻집, 서점 등등에서 즉각 더위를 날려줄 에어컨이 가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0년간 탄소연료에 과잉 의존한 탓에 지구가 뜨거워졌고 그 여파로 미세먼지도, 폭염도 심해지고 있는데 전기를 더 써서 더위를 막는 게 잘하는 일일까. 안 그래도 너무 값싼 전기요금을 여름에 한시적으로 내린다는데 옳은 결정일까. 

작년 여름 배달 노동자 박정훈씨(35)는 ‘폭염수당 100원을 달라’는 1인 시위를 했다. 한여름에 서 있기도 어려운 가운데 일하는 사람을 배려해 달라는 작은 요청이다. 서울 서초구청이 작년 ‘서리풀 원두막’이라는 이름으로 한여름 보행자를 위해 그늘막을 만들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폭염 발생 이후에 대해 실용적인 대책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폭염을 방지하기 위한 예비책에 대해 논의하는 곳은 잘 안 보인다. 아마도 정부와 국회에서 탄소에너지를 자연에너지로 대전환할 에너지기본계획과, 폭염도 재난으로 간주하여 폭염방지법 제정을 통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더위의 기세가 등등한데 국회는 아직도 개점휴업 중이다. 없는 사람은 기후재난 앞에서도 차별받는다. 열받은 유권자들이 폭염보다 더 뜨겁게 응징할 날, 얼마 안 남았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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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문재인’과 ‘문재인의 조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이른바 평행이론에 새로운 장이 추가될 판이다. 13년을 사이에 두고 민정수석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 물망에 오르면서다. 법무부 장관 기용설이 제기된 과정, 배경, 논란마저 닮은 구석이 적잖다. 

거슬러 2006년 8월, 새 법무부 장관에 석 달 전 청와대를 나온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에 여의도가 발칵 뒤집혔다. 도덕성이나 역량, 대통령과의 소통 등 하자가 별로 없는 ‘문재인 법무부 장관’을 비토한 건 야당만이 아니었다. 측근 인사, 선거 중립성 등을 문제 삼으며 “정신적 테러” “오만의 극치”라고 공세를 편 한나라당 못잖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 ‘불가론’이 터져나왔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본다. 하지만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당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오찬에서 “코드인사라고 비판하는데 솔직히 쓸 만한 사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격정을 토로했다. 곡절 끝에 ‘문재인 카드’는 접혔다.

13년이 흐른 지금, ‘조국 법무부 장관’ 기용설이 여의도를 흔들고 있다. 역시 사법개혁 명제와 대통령과의 신뢰 등이 적임의 이유로 지목된다.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이 “헌법 질서에 대한 모욕”이라며 반발하는 것도 기시감이 든다. 다른 것은 여당의 분위기다. “적임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적극 옹위 속에 반대·우려의 목소리는 희미하다. 다만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 권재진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직행 때 “군사독재 시설에도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반대했던 기억이 어른거린다. 도저한 ‘자기부정’이 될 수 있다는 게 정치적 부담일 터이다. 개각 시점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조국 법무부 장관설이 흘러나온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을 감안해 여론의 반향을 재보려는 것일 수 있다. 

13년 전 문재인 민정수석은 법무부 장관 대신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들어가 참여정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과연 조 수석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못했다”는 민정수석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직행하는 길을 열게 될까? ‘문재인-조국 평행이론’의 끝이 궁금하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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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에 자리하고 있는 발안 1호 근린공원에 가끔 가는 편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공원을 옴뿌리산공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무들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 주민이 즐겨 찾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도심 속에 이 같은 휴식공간이 있어 숨을 쉬고 길을 걷는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공원 일부는 내년 7월이 되면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의 허파, 공원이 사라진다”는 제목의 뉴스를 접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공원일몰제 때문이다. 공원일몰제란 무엇이고, 왜 최근 들어 뉴스에 자주 나오는 걸까? 

도로, 학교, 공원과 같은 기반시설을 도시계획시설이라고 한다. 시·도지사가 도시계획시설로 결정한 부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수 없다. 지자체가 그 부지를 매입해 시설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자체가 결정만 해놓고 시설을 만들지 않는다면? 토지 소유자 입장에서는 언제 내 땅을 사갈지도 알 수 없고 하염없이 재산권을 침해받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1999년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00년 7월 도시계획시설로 결정한 대로 20년 동안 시설을 만들지 않으면 그 결정이 효력을 잃는 것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즉 지자체가 공원으로 결정하고 20년간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그 효력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원일몰제다. 내년 7월이면 20년 넘게 집행 못한 공원 부지의 효력이 상실되는데, 전국적으로 그 면적이 축구장 5만개에 해당하는 340㎢에 달한다.

실제 동네 뒷동산이나 산책로도 알고 보면 미집행 공원 부지인 경우가 많다. 발안 공원도 이런 경우다. 공원 부지는 집행을 하지 않더라도 주민들이 사실상 공원처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공원 결정 효력이 사라지면 문제가 생길 우려가 크다. 토지 소유자가 더 이상 주민들을 출입할 수 없게 막을 수도 있고, 난개발로 인해 한여름 도시의 온도를 낮춰주고 소중한 산소를 제공해주는 녹지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공원일몰제에 대응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와 함께 지난달 ‘장기 미집행 공원 해소방안’을 발표했다. 대책의 목표는 내년 7월 이후에도 340㎢의 공원 부지를 최대한 지금처럼 공원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우선 반드시 공원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부지 130㎢를 우선관리지역으로 선별했다. 지자체는 내년 7월까지 남은 1년 안에 우선관리지역의 토지 소유자에게 보상을 통해 제값을 치르고 부지를 매입할 계획이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지자체가 공원 조성 목적으로 지방채를 발행하는 경우 그 이자를 최대 70%까지 지원하고, 지자체가 토지은행을 활용해 공원 조성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공원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지자체에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통해 공원을 만드는 방안도 마련했다. 90㎢에 달하는 국공유지는 내년 7월이 지나도 그대로 공원 부지로서 효력을 유지해 중장기적으로 공원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남은 120㎢는 공원의 효력을 상실하지만 다양한 관리수단을 통해 최대한 공원의 기능을 유지하도록 조치할 계획이다. 

이번 대책은 우리 당과 정부, 지자체 그리고 환경단체가 의견을 모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대책 내용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고, 이번 대책만으로 장기 미집행 공원 문제가 모두 해소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 미집행 공원은 개인의 사적재산권 보호와 공원 조성을 통한 공익 달성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가 충돌하는 문제다. 신중한 접근과 공론이 필요한 문제다. 이번 대책을 내오는 데 머리를 맞댄 국회와 정부는 물론 지자체, 공공기관, 시민·환경사회는 언제든 또 만나 논의해야 한다. 테이블에 도시 공원의 미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을 올려 놓고 대안을 도출해야 한다. 도시의 허파를 지켜 나가기 위한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해결 방안 마련을 위해 계속 논의해야 한다. 

한 자락 넓혀 나가지는 못할지라도 지금 있는 ‘도시 공원’을 지켜 나가는 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작고 단단한’ 의무다. 사람이 도시 공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공원이 우리를 지킨다. 우리를 살게 한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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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절대 웃으면 안된다, 알았지?”

조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던 진만과 정용에게 접수대 뒤에 앉아 있던 영걸이 마치 은밀한 지령이라도 전달하듯 말했다. 

영걸은 진만과 정용의 대학 동기였다. 대학교에 다닐 땐 함께 PC방도 다니고 축구도 하면서 꽤 친하게 지냈는데, 졸업 이후 연락이 뜸했다. 전해 들은 말로는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경기도 어디 의류상가에서 일한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입고 있는 와이셔츠도, 양복도 말끔해 보였다. 비록 장례식장 접수대 뒤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용과 진만은 늘 입고 다니는 하얀 면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뭔 소리야?” 정용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들 뒤로 바로 다른 조문객 두 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냥 빨리 절만 하고 나오라고.”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과 정용의 대학 동기인 형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형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기숙사 룸메이트로 2년 가까운 시간을 진만, 정용과 함께 보낸 친구였다. 

전남 무안에서 양파 농사를 짓는 집의 장남이자 대형 특수농기계 자격증 보유자이기도 했던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빨래 건조대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책상 뒤편을 말끔하게 정리한 것도 그였고, 진만이 부러뜨린 이층 침대 원목 사다리를 사감이 보기 전에 멀쩡하게 수리해낸 것도 형수였다. 기숙사 내에 그의 손재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문고리가 망가지거나 세탁기 호스가 빠졌을 때마다 ‘오공! 오공!’ 어김없이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는 때 이른 탈모 증상으로 인해 옆머리를 최대한 가운데로 끌어모으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만화 속 손오공의 모습을 빼닮았고, 그것이 그대로 그의 별명이 되었다. 진만과 정용은 ‘오공’ 대신 ‘햇양파’라고 불렀는데, 그거나 이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고향인 무안으로 내려갔다. 기숙사에서 같이 술을 마실 때도 몇 차례 자신이 경영학을 전공한 것은 양파 협동조합 운영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런 거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무안의 특별한 황토에 대해서 여러 번 얘기했었고, 그 땅에서 나는 양파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진만과 정용은 그럴 때마다 말없이 안주로 사 온 양파링만 깨지락깨지락 먹었다. 이거야 원, 황토 안 깔린 고향에서 자란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또 한편 해야 할 일이 확실한 그가 부럽기도 했다. 양파든 부추든 미나리든 어쨌든 무언가 정해져 있었으니까.

사실 진만과 정용은 장례식장에 오기 전 조의금 문제 때문에 잠깐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정용은 그래도 십만원은 해야 한다고 말했고, 진만은 오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럼 너는 오만원 하고 나는 십만원 하면 되겠네, 정용이 말하자 진만이 바로 발끈했다. 그럼 나는 뭐가 되냐, 뭐 누구는 십만원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목소리까지 높이며 화를 냈다. 그래도 우리가 걔한테 얻어 마신 양파즙이 얼마인데, 라고 정용이 말끝을 흐리자, 상황이 그렇잖아, 상황이, 하면서 진만이 더 크게 씩씩거렸다. 결국 그들은 조의금 봉투에 오만원씩만 넣었다.

신발을 벗고 빈소 안으로 들어가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향을 피우다가 진만과 정용은 슬쩍 형수의 아버지, 그러니까 돌아가신 고인의 영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진만은 저도 모르게 흡, 안간힘을 다해 숨을 참았는데, 그러지 않고선 곧바로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형수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고인이 된 구석민 어르신은, 형수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머리카락만 하얗게 셌을 뿐이었다. 평생을 양파 농사를 지은 분답게 영정 속 고인의 피부는 벌겋게 그을려 있었다. 그러니… 아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데, 그러면 안되는데도… 자꾸만 형수의 별명인 ‘햇양파’가 떠올랐던 것이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웃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진만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종아리에 힘을 주었다. 절을 하려고 섰는데 저도 모르게 상체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정용도 진만과 마찬가지로 숨을 참고 있는지 목과 이마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절을 하기 시작했다. 삼육구, 삼육구, 일, 이, 짝! 진만은 계속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칠레 수도는 산티아고, 콜롬비아 수도는 보고타, 대한민국 양파의 수도는 무안, 무안에서 나오는 햇양파… 아니다, 아니다, 참아야 한다… 진만은 겨우 두 번 절을 올렸는데 그사이 귀밑머리 아래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도 다행히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 잘 참았는데… 형수와 맞절을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 풉,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형수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상주인 형수의 머리가, 아마도 며칠 제대로 감지도 못한 게 뻔한 형수의 가운데 머리카락이, 더 뾰족하게 하늘로 솟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줘서 고맙다.” 육개장을 먹고 주차장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형수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조의금을 받던 영걸도 따라 나왔다. “네가 더 나빠, 이 새끼야!” 진만이 영걸의 배를 주먹으로 툭 쳤다. 자기가 웃음을 참지 못한 게 다 영걸 때문인 거 같았다. “양파값 많이 떨어졌다며?” 정용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 몇 해 걸러 한 번씩 꼭 그래.” 형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진만은 자신이 더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힘내, 햇양파.” 이번엔 진만이 웃지 않고 말했다. “그 좋은 황토, 어디 가겠냐?” 형수가 진만을 보며 슬쩍 웃었다. 형수의 나이는 올해 스물여덟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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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 장유(醬油)라는 것이 우리나라 간장을 동화시켜 가지고 소위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실현시켰다. (…) 고추장, 김칫국 몇 가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한구석에 박혀 있는 꼴이라고는 적막해서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3일자에 실린 김재은의 회고다. 7년 전이니 1916년이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터지기 3년 전이다. 기고자는 “사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썼다는데 고추장, 김칫국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조선 음식이 처량해진 내력을 돌아보매 이렇다. 일식 전골인 스키야키는 고급 조선요릿집에서 신선로를 진작에 “구축(驅逐)”했다. 스키야키가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일식 절임인 복신지(福神漬·후쿠진즈케)가 따라붙었다. 후쿠진즈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조선의 짠지를 “정복”했다. 후쿠진즈케는 일제 군대의 급양이 서양식으로 바뀐 가운데서도 지급된 일식 반찬이다. 또한 양과자는 다식을 대신하고, 정종은 조선의 소주를 “병합(倂合)”해 전횡을 다했다. 그러고는 장유, 곧 일식 간장인 쇼유가 맛 설계의 바탕인 조선의 간장을 동화함으로써 선일융화,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되었다.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세운 바다. 먹어 들어가는 쪽에서야 융화네, 한 몸(一體)이네 못할 소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절멸을 바라는 수작 아닌가. 1910년 나라 망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미각 상상력도, 음식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한 역사 공동체 절멸의 징후였다.

오늘날의 독자는 이 거친 민족주의 수사에 유치하다는 꼬리표를 망설임 없이 붙일 테다. 하지만 사랑, 근심, 구축, 정복, 병합, 일선융합 같은 엄중한 말의 행간을 더 살피고 싶다. 기고자는 조선인 일상의 사물이 쓰이지 않아서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쓰이지 않음’이 그저 조선식 일품요리, 반찬, 과자, 술, 장 사용의 빈도가 줄어든 현황만을 가리킬까. 가령 ‘들척지근함’은 산업화한 식품과 음식이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는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은 비결이다. 일본제국의 설탕, 세계 최초의 MSG 제품인 아지노모토(그 한국판이 미원이다), 왜간장 셋이 손잡으면 들척지근하기에 대체로 무난한 맛을 쉬이 낼 수 있다. 이때 아지노모토와 왜간장이야말로 일본의 일상 감각에다 일본적인 상상력을 잘 쓴 끝에 얻은 현대 일본의 발명이다.

1908년 일본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는 MSG 제조 기술의 특허를 받는다. 세계 최초로 ‘감칠맛(旨味·우마미)’을 규명한 성과가 발판이다. 이 조미료의 열쇠인 글루탐산은 1866년 독일 화학자 리트하우젠(Karl Heinrich Ritthausen)이 처음으로 발견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미지의 영역에 있던 단맛·신맛·쓴맛·짠맛에 이은 제5의 맛을 개관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이케다였다. 그는 회의했다. 일본인 일상의 식재료인 다시마, 가쓰오부시를 우린 맛, 그 맛이 음식과 어울린 일본적인 맛의 실체는 당시 화학 교과서로는 이해도 설명도 불가능했다. 그는 교과서 밖으로 치고 나갔다. 일본의 맛이 객관화되자 메이지시대까지도 일본인 스스로 구미 식품에 견주어 열등하다고 여긴 일식 간장과 된장을 세계화할 자신감이 붙었다. 1929년 이후 일본 산분해간장의 산업화 또한 이케다의 일본 미각 재발견의 연장에 있다. 깃코만(龜甲萬)으로 대표되는 일식 간장 산업의 세계화 또한 여기에 힘입었다. 일본 과학기술의 현대적 현현과 산업혁명에는 민족주의에 앞서는 ‘민족성’이 한가득이다. 오늘날 한식은 어떨까. 민족주의에 기댄 탄식을 넘은, 구체적인 내 유산과 일상 감각의 탐구에서는? 아직 드러내지 못한 가능성을 발현시킬 내 상상력에서는? 여전히 1923년식 탄식뿐이라면 섭섭하지 않은가. 아직 잘 써본 적이 없는 상상력. 쓰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상상력. 오늘도 설탕·MSG·왜간장으로 들척지근한 백반 한 상 앞에서 사무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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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쯤 유럽연합은 ‘미래를 위한 100대 급진적 혁신기술들’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약 33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는 방대한 과학기술 문헌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동 분석을 하고 전문가 패널들이 수단계에 걸쳐 검증한 기술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연구는 유럽연합의 과학기술 혁신역량을 강화하고 유럽 산업경쟁력을 높이며,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 중인 호라이즌(Horizon)  유럽과 호라이즌 2020 프로그램을 잘 추진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혁신기술 87개와 사회 혁신시스템 13개를 포함한 100가지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들 100가지 기술과는 별개로 22가지의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를 제시하여 이러한 기술들의 개발을 추진하기 전에 미래의 변화상에 따라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가치와 비전도 함께 제시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혁신기술 87개를 보면 모든 나라들이 집중 투자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은 역시 강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AI+X프로그램과 같이 특정 응용분야에 AI를 적용하는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이들 중에는 대화인식과 감정인식, 챗봇, 뇌기능 매핑, 인공시냅스, 뇌신경 모방칩, 자율주행, 하늘을 나는 차, 정밀농업 등이 있다. 유럽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 수확기술, 바이오플라스틱, 랩온어칩, 챗봇 등과 함께 유럽이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들, 즉 4D 프린팅, 그래핀 트랜지스터, 에너지 수확, 하이퍼루핑 등도 명시하였다. 이외에도 그래핀과 같은 이차원 물질들, 음식 3D 프린팅, 항생제 감수성 테스트, 인공광합성, 생분해성 센서, 유전체 편집, 집단 생물 지성, 메타물질, 미생물 연료전지, 식물 간 정보 교환, 플라스틱 분해, 퀀텀컴퓨터와 퀀텀암호기술, 재생의학, 자가치유 물질, 스마트 문신, 스마트 창, 폐수로부터 영양분 수거 등 많은 흥미로운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나의 경우도 지난 25년간 연구해 온 바이오플라스틱은 유럽의 다수 회사들이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직접 발효 생산, 단량체의 발효 생산 후 중합에 의한 플라스틱 생산, 전분 등 천연고분자의 활용 등이 복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음식 3D 프린팅은 재작년 미국의 샌타모니카 소재 미쉐린 별 두 개의 멜리세 식당에서 3D 프린팅으로 프렌치어니언 수프에 들어가는 크루통을 만든 것이 화제가 되면서 주목받았다. 앞으로는 3D 프린팅을 이용하여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뽀로로 형태의 밥과 반찬뿐 아니라 다양한 영양성분들이 개인 맞춤형으로 들어 있고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훌륭한 음식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시간에 따라 혹은 환경 변화에 따라 특성이나 형태가 변할 수 있도록 하는 4D 프린팅도 점점 더 발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 몸에 부착하여 여러 생체정보를 획득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스마트 문신, 우리 몸에 들어가 진단이나 치료를 하고 분해되어 없어지는 생분해성 센서 등도 비약적 기술 발전과 응용이 예측된다. 유럽연합에서 스웜 지능(swarm intelligence)이라고 부르는 기술은 개미들이나 군집비행을 하는 새들이 각자 행동을 하지만 다른 개체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모사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응용분야가 이동수단과 군사용으로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회혁신 시스템 리스트를 보면 접근경제(access economy)와 공유경제, 대체화폐기술, 기본소득, body 2.0 혹은 정량화된 자신, 자동차 없는 도시, 협력 혁신공간, 건강정보의 소유 및 공유, 교육시스템의 재발명 등이 포함되었다. 

이 중 교육시스템의 재발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금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대학원까지의 학습을 통해 개인 학습이 끝나지만 앞으로는 평생 학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평생학습 인프라, AI 등 다양한 혁신기술들을 이용한 학습, P2P 학습, 집단지성 학습 등이 가능하도록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혁신과 함께 ‘전 국민 평생학습 시스템’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구축을 제안한다. 접근경제와 공유경제의 경우에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급속한 발전으로 물건을 소유하기보다는 경험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음악이나 책을 소유하기보다는 원할 때 듣고 읽는 경험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제품이나 콘텐츠의 활용이 접근이나 공유 형태로 바뀔 것이다.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에는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전이 여럿 포함되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 억제, 지속 가능한 에너지, 물, 식량과 소재뿐 아니라 고령자들의 품위 있고 의미 있는 생활, 사회적 혁신역량, 사회안전망, 개인 맞춤형 제조, 사전행동적 자발적 건강관리, 인간과 기계의 원격 상호작용, 사용자 데이터 시장, 다수 참여 정보 및 지식 창출 등 다가오는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필요한 플랫폼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빅데이터 기반 정밀의료시대가 다가오면서 개개인의 유전정보와 생활 및 식습관 정보 등 데이터들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 전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정보로 활용될 것이다. 최근 유럽은 100만+게놈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 개개인의 데이터들의 소유권과 공유가치 등 생각할 것이 많다. 

이들 비전과 기술 중 다수는 우리나라 기업, 정부, 대학, 출연연구소 등에서도 이미 예측하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보고서에서 각 기술별 분석을 하면서 현재의 기술 성숙도,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인 2038년에 이 기술이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될지에 대한 예측, 그리고 유럽의 현 기술 수준과 위치 등 3가지 요소들을 함께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우리도 각 기술별로 우리나라 현황의 정확한 진단과 선도그룹 집중 지원, 중간그룹의 선도그룹화 전략, 미진한 그룹의 육성전략을 잘 추진하여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혁신 시대에 잘 대비해야 하겠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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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는 1998년 창단했다. 같은 해 창단한 애리조나가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것과 달리 창단 뒤 10년 동안 줄곧 꼴찌였다. 운도 나빴다. 하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부자팀’ 소굴이었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과 겨뤄야 했다. 162경기 시즌 100패가 거듭됐다. 

한국선수들도 많이 뛰었다. 서재응, 류제국이 모두 탬파베이를 거쳤다. 지금은 최지만이 뛰고 있다.

10년 동안 꼴찌를 하던 팀은 11년째인 2008년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이름을 데블레이스에서 ‘악마’를 뗀 레이스로 바꿨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오클랜드가 했던 전략이 ‘머니볼’이었다면 탬파베이가 2008년 이후 하고 있는 야구는 ‘데이터볼’이다. 월 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탬파베이의 새 구단주들은 데이터로 무장하고 팀을 변신시켰다. 첫번째 전략은 ‘시프트’였다. 야구장을 잘게 쪼개고, 각 영역에 따른 타구 확률을 계산했다. 내야수들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게 섰고 상대에게 안타를 덜 허용했다.

시프트를 둘러싼 시선은 차가웠다. 많은 이들이 “야구가 120년 넘도록 지금의 수비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각과 인상이 아니라, 숫자로 들여다본 야구는 달랐다. 10년 전 ‘파격’은 지금 ‘일상’이 됐다.

탬파베이의 전통 파괴 실험은 계속되는 중이다. 

지난해 탬파베이는 ‘오프너’라는 파격을 선보였다. 선발 투수가 나와 5이닝 이상 던지고, 나머지를 불펜 투수들이 나와 막는, 전통적 야구와 완전히 달랐다. 탬파베이는 수준급 선발 3명을 빼고, 나머지 2자리에 선발 투수 대신 ‘오프너’라 불리는 투수를 썼다. 선발 투수가 길어야 1~2이닝을 막는다. 때로 마무리가 먼저 나와 1회를 막았다. 어차피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거라면 앞에 3~6개를 확실하게 막는 게 승리 확률을 높인다는 계산이다. 계산은 정확했다. 탬파베이는 90승72패를 거뒀다. 아메리칸리그 15개팀 중 딱 6위여서 5팀이 나가는 가을야구에 못 갔다. 중부지구 1위 클리블랜드와의 승차는 1경기였다.

올해 탬파베이는 또 다른 파격을 선보이는 중이다. 선발 투수 오프너가 아니라 이번에는 타선의 오프너다. 전통적인 타선은 출루율이 높은 1~2번 타자에 장타력을 갖춘 3~4번 타자로 꾸려진다. 1~2번이 출루하면 3~5번 타자가 홈으로 불러들이는 식이다. 4번 타자는 팀에서 가장 강한 타자가 선다.

메이저리그는 최근 3~5번이 할 일을 2~4번으로 당기는 추세다. 강한 타자를 2번에 세워서,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들어서게 한다. 이른바 ‘강한 2번론’이다. 탬파베이는 한 발 더 나갔다. 굳이 2번을 강하게 할 게 아니라 아예 가장 잘 치는 타자를 1번에 세웠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1번 타순의 OPS는 0.758인데, 탬파베이 1번 타자들의 OPS는 무려 1.008이다. 1번 타자가 때린 홈런이 21개로 가장 많다. 탬파베이 4번 타자의 홈런은 겨우 9개다. 4번보다 훨씬 강한 1번 타자를 쓴다. 또 하나의 전통 파괴 혁신이다.

탬파베이의 올 시즌 연봉총액은 6300만달러로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다. 그런데도 뉴욕 양키스에 이은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다. 아메리칸리그 전체 4위여서 가을야구에 나설 수 있다. 과감하게 전통을 깬 결과다.

KBO리그에서도 벽 하나가 깨졌다. LG 투수 한선태는 25일 SK전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한선태는 프로야구 최초로 야구부를 거치지 않은 ‘비선수 출신’ 선수다. 탬파베이의 ‘오프너’는 막힌 길을 뚫었다. LG 한선태도 가로막던 벽을 부순 오프너였다. 벽이 하나 무너질 때 세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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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곧 분단 후 처음 민간에 개방된 DMZ(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를 탐방하게 됩니다.” 철원 ‘평화의 길’ 해설사의 말에 참가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철책 통문이 열리면서 버스가 ‘금단의 땅’으로 들어갔다. 버스는 역곡천의 배미교를 지나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탐방객들의 표정에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난 22일 ‘DMZ 평화의 길’ 탐방단의 일원으로 6·25 최대 격전지였던 철원의 백마고지 전적지와 화살머리고지 인근을 돌아봤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는 열흘간 고지쟁탈전이 이어지면서 국군과 중공군 등 1만8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는 미군과 프랑스군 100여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전사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전적비 일대를 돌아본 뒤 남방한계선 철조망 너머 DMZ의 백마고지 GP를 올려다봤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철책이 없었다면 유럽의 중세 고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DMZ에는 평화와 긴장이 함께 있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공작새능선까지 남방한계선 철책길 3.5㎞를 걸었다. 윤형 철조망을 올린 철책은 삼엄했다. 길 반대편에 펼쳐진 논은 여느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간혹 ‘무장공비 침투지역’ 표지판이 보였다. 경계 위의 전쟁과 평화다. 초병의 인솔로 찾아간 화살머리고지는 ‘평화의 길’ 철원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이곳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 한창이다. 국방부는 지난 4월 이후 유해 456점, 유품 3만2000여점을 수습했다. 유품 일부는 GP 벙커에 전시 중이다. 총탄구멍이 숭숭 뚫린 철모가 전쟁의 참혹상을 증언한다. 초소 아래에서는 유해 발굴을 위한 진입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내 유해발굴은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따른 조치다. 남북은 당초 공동유해발굴을 약속했으나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측 구간에서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북측의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분계선(MDL) 너머로 북측이 개설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남북정상은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통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4가지 이행조치를 내놓았다. GP 상호 철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남북공동유해발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이 그것이다. 이 중 GP 철수, JSA 비무장화는 순조로운 편이다. 공동유해발굴은 절반만 이행되고 있다. 9·19 군사합의 가운데 가장 뒤처진 분야는 역사유적 조사·발굴이다. 

남북은 9·19합의서에 비무장지대 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을 명시했다. DMZ 내 역사유적을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서울 면적 1.5배에 달하는 비무장지대에는 도성지, 고분, 산성, 사찰터, 천연기념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 중 전문가들이 꼽는 조사·발굴의 1순위는 궁예도성(철원도성)이다. 궁예도성은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905년 철원 풍천원 벌판에 세운 서울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의 둘레가 각각 12.5㎞와 7.7㎞로 당나라 장안성이나 발해 동경성보다 크다. 궁예도성터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DMZ 안에 푹 잠겨 있어 남북 공동 연구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일제식민 시기만 해도 이곳에는 석탑·석등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지고 유물들이 멸실됐지만, 성터 윤곽만큼은 항공사진이나 구글지도에 나타날 정도로 뚜렷하다. 남쪽의 철원 평화전망대에서는 성터를 조망할 수 있다.

궁예도성은 화살머리고지에서 동쪽으로 약 12㎞ 떨어져 있다. 두 곳이 ‘평화의 길’로 연결된다면 철원의 DMZ는 평화와 안보의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과 달리 궁예도성 조사는 남북 군사합의 10개월이 되도록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유적 조사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국방부는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의 우선조치로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을 꼽았다. 문화재청은 ‘남북문화재 교류사업단’을 꾸려 궁예도성 발굴·조사에 대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북한과 개성 만월대를 공동발굴한 경험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재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도 적극 검토 중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궁예도성 조사·연구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북한의 뜨뜻미지근한 자세다. 정부는 북측에 9·19합의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오는 29일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DMZ 인근 초소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DMZ 평화만들기의 전기가 되길 바란다. DMZ 유적 공동발굴만큼 확실한 문화교류는 없다. 그 출발점에 궁예도성이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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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땅 얘기책 성경을 읽고 자라선지 사막이 항상 궁금했다. 금모래 사장이 앞산만 하다는 말에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첫 사막은 사하라였다. 체 게바라도 걸었다는 알제리의 사하라. 이후론 자주 사막을 찾았다. 우리나라에도 섬마을에 사구사막이 몇 군데 있다. 사막이라고 하기엔 밋밋하긴 하지만서두. 이 정도 ‘열탕 날씨’라면 언젠가 사막 땅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사막에도 마을이 있다. 오아시스를 벗어나면 살 수가 없기에 계율이 매우 엄하지만 거기도 매한가지 사람 사는 동네. 사막에 가면 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아무리 낮에 햇살이 뜨겁더라도 밤이 되면 겨울만큼 춥다. 사막의 낙타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주인을 만나 다복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사막엔 적토마나 오토바이조차도 힘을 쓰지 못한다. 겨울왕국의 개들도 마찬가지. 사랑받는 주인 아래 충성스러운 명견이 나타나 앞장을 선다.

“힐난을 받고 자란 아이는 남을 헐뜯는다. 미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잘 다툰다. 놀림을 받고 자라면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 격려를 받고 자라면 자신감이 커진다. 칭찬을 받고 자라면 감사할 줄 안다. 인정을 받고 자라면 자신의 생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기강사 글렌 반 에케렌의 얘기. 사막의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만큼 서로 보살핌이 각별하다. 동물들도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안다. 목마른 여행자들도 먼저 물을 내민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듯이 극악한 환경에서 사랑과 배려가 훨씬 많아진다. 사막에서 인류의 성인들이 나고 자란 것을 생각해보라. 

인적이 드문 곳일수록 사람이 반갑고 소중하다. 사막에선 별이 하늘의 마을이나 되는 양 밝고 환하다. 인생 4막장, 그도 사막인가. 황량했던 인생도 사막에 가면 별빛의 조명과 축복을 받게 된다. 오만가지 음식과 물건들로 넘쳐나는 도심을 떠나서 조금은 춥고 외로운 사막을 찾아가는 여행을 권해주고 싶다. 평생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기회, 물 한 모금의 감사, 사람에 대한 그리움, 낙타처럼 선한 동물과의 조우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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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리오그란데 강가에서 숨진 한 부녀가 지구촌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다 변을 당한 엘살바도르 난민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25)와 딸 발레리아(2)가 그들이다. 멕시코 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이 부녀의 모습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의 머리를 자신의 티셔츠 안에 넣어 감싸고, 딸 역시 필사적으로 아빠의 목을 팔로 감고 있었다. 4년 전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숨진 3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 쿠르디를 연상시킨다. 당시 터키 관광지 해안가 모래밭에 천진난만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쿠르디의 모습에 전 세계인이 울었다. 

지난해 중남미 국가 난민(캐러밴)들이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로 몰린 이후 이들 부녀의 비극은 일상이 되고 있다. 전날에도 리오그란데강에서 어린아이 3명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한 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난민이 283명에 이른다. 여기에 멕시코는 이달 들어 갑자기 이민자 단속을 크게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가 국경에서 난민을 철저히 막지 않으면 멕시코산 수입품에 최고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한 탓이다. 최근에는 미국 남부의 이민자 수용시설에서 아이들이 수주일째 씻지도 못하는 비인도적 실태까지 드러났다. 미 언론들이 “IS와 해적들도 치약과 비누는 줬다”고 자국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다. 요행히 국경을 건너 미국에 안착한다 해도 난민들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쿠르디 사후 큰 반향에도 불구하고 난민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유럽 각국에서는 오히려 반이민·난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라미레스 부녀의 비극을 두고 ‘난민을 만든 위정자를 탓해야지 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비난하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에 공감하지 못하고 실리만을 들이대는 것은 비인도적이다. 트럼프는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4월 불법 이민자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고 국토안보부 장관을 경질하더니 세관국경보호국 국장까지 강성인물로 교체한다고 한다. 이민으로 성장한 미국의 역주행이 끝도 없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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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국가대표팀 내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으로 남녀 대표선수 전원이 25일 충북 진천 선수촌에서 퇴촌 조치됐다. 앞서 지난 17일 쇼트트랙 대표팀이 선수촌 내에서 암벽등반 훈련을 하다 남자대표팀 ㄱ선수가 남자 후배 ㄴ선수의 바지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자 선수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는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낀 ㄴ선수는 성희롱당했다며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두 선수는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스타급 선수들이다. 진천 선수촌은 쇼트트랙 대표팀 전체의 기강 해이를 문제 삼아 ‘1개월간 전원 퇴촌’이라는 초유의 조치를 내렸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다음달 스포츠 공정위원회를 열어 ㄱ선수 징계를 논의할 예정이다.

성폭력은 어떠한 집단 내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이성 간은 물론 동성 간에도 마찬가지다. 쇼트트랙 대표팀 사태는 성희롱 자체도 잘못이지만, 사후 대응은 더 부적절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최우선 과제는 피해자 보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사건 다음날부터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빙상연맹 측은 가해자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대신 화해를 권유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사건 이후에도 훈련에 계속 참여하다 25일에야 다른 선수들과 함께 선수촌을 떠났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가 명확한 사건임에도 피해자와 다른 선수들까지 불이익을 받게 된 부분이다. 선수촌에서 쫓겨난 대표선수들은 한 달 동안 훈련수당 등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선수촌 측은 이번 성희롱 사건뿐 아니라, 4개월 전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 숙소에 무단 출입한 사례 등 다른 사건도 고려해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자신은 물론 사건과 무관한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간다면 누가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조재범 전 코치 사건이 드러난 후 폭력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빙상계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ㄱ선수 성희롱 사건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음을 말해준다. 빙상연맹은 일벌백계 차원에서 ㄱ선수에게 강력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한다. ㄴ선수에게 화해를 압박하는 등 ‘2차 가해’를 한 관계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옳다. 또한 사건과 관계없이 불이익을 당한 선수들에 대해선 조기 재입촌 등의 조치를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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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나이 45억년. 고생인류의 출현은 300만년 전이고,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것은 5만년 전쯤이다. 인류 문명의 출현은 1만년도 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지구 나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그런데 매일 해가 뜨고,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나는 것, 그리고 비와 눈이 내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호모사피엔스의 눈에 세상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6600만년 전 하늘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졌다. 지름 10㎞의 물체는 200㎞에 이르는 충돌 구덩이를 남겼다. 칙술루브 크레이터다.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별이 뜨지 않는 암흑세계다. 많은 생명체가 멸종을 맞았다. 세상의 지배자였던 공룡도 같은 운명이었다. 대멸종 사태는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4차례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대멸종은 포유류, 나아가 인류가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너무 허황된 얘기라고? 불과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퉁구스카란 곳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동심원상으로 나무들이 바깥쪽을 향해 쓰러져 있는 화재현장은 의심을 증폭시켰다. 연구결과 지구로 돌진하던 물체가 지상에서 터지면서 흔적을 남긴 것으로 분석됐다. 물체의 지름은 60여m에 불과했지만 8000만 그루의 나무를 전소시켰다. 유럽 중심부에 떨어졌다면 수백만명의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천문연구원이 25일 지구 근처로 접근하는 지름 160m짜리 소행성을 발견했다. 2026년에 지구 근처 426만㎞까지 접근할 것이라고 한다. 지구 근처 750만㎞ 안쪽으로 들어오고 지름이 140m를 넘으면 ‘지구위협 소행성’이라고 부른다. 연구원은 이 소행성을 ‘PP29’로 이름 지었다. 지구 충돌확률은 28억분의 1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위협 소행성은 83개에 불과하다. 아직도 검은 천체에서 어느 물체가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지 다 알지 못한다. 퉁구스카에 떨어졌던 크기의 물체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다. 지구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행성이라는 생각은 접어야 하지 않을까.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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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억5175만원 규모의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시작한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이곳 출신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는 등 비리를 저지르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달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은 언론보도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밝혔고, 지난 1월 서울중앙지검이 제출한 증거목록 가장 앞에도 경향신문 기사들이 있다. 지난해 여름 경향신문 보도가 시작되자 김명수 대법원은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허위자료를 언론사에 돌렸다. 당시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이 지휘해 박진웅 공보관이 배포한 것으로 김흥준 윤리감사관의 부실감사와도 관련이 있다. 

허위자료를 만든 전산정보관리국 직원들은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 등을 선고받았다. 송인권 재판장은 “이 사건 범행이 (중략) 언론보도를 통해 불거지자 피고인은 진실을 숨기고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진술을 맞추려는 시도까지 하였고, 법원 자체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 계속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며, 이 법정에 이르러서도 최종 공판기일 직전까지 계속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범인 강한수 전산정보관리국 정보화지원과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손창우 사이버안전과장 등에게도 징역 10년과 벌금 5억2000만원 등을 선고했다.

전자법정 비리 탐사보도는 대법원 주류들과의 싸움이었다. 경향신문 보도가 한창이던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까지 속인 그들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오스트리아산 초고가 실물화상기가 불가피하다고) 시연회까지 했고, 당시 저도 꼭 필요하고 문제가 없다고 동의해줬는데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들을 징계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최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말했다. 비리가 저질러진 10년 동안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14명이다. 역대 국장은 이정석, 최창영, 이영훈, 정재헌 판사이고, 심의관은 기우종, 이정환, 원호신, 고범석, 이태웅, 이은상, 임영철, 이상엽, 장정환, 유동균 판사다.

사법권력보다 상대하기 힘든 상대는 전산지식을 가진 기술관료다.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경향신문 취재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답했다. 책임자의 변명치고는 구차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법원 기술관료들이 시민세금을 업체로 빼돌리고 이를 뇌물로 되받아먹는 동안 시비를 가리는 전문가인 판사들도 당하고 있었다(물론 이는 직무유기이며 형법 제122조가 정한 죄이다). 이러한 대법원 전자법정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고 법정에서 확인된 배경에는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자신과 가족의 불행까지 감수한 내부 제보자가 있다. 

제보는 지난해 초여름에 받았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에 내용을 이해하고 반론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보자를 두 차례 만나 설명을 들었고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내용이 진실한지 검증했다. 수많은 e메일과 전화로 제보자에게 내용을 묻고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제보자는 묵묵히 견뎠다. 기사화를 앞두고 그에게 말했다. “취재원 보호는 내 목숨과도 같다. 제보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묻지도 않겠다. 하지만 어떻게든 제보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제보 사실이 드러나고 업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신중히 생각하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이라는 첫 보도가 8월13일자에 나갔다. 김명수 대법원은 빤한 거짓말을 했다. “전자법정 사업을 수주한 드림아이씨티가 (중략) 전직 전산공무원이 관여되어 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음.”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 치적용 사업인 스마트법원 4.0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23년 완성을 목표로 국가예산 3054억원을 쓰려 했다. 이 사업 책임자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은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한 대법원장 복심이다. 그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데도 제보자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전자법정 비리는 대법원의 허위해명에 묻혔을 것이다. 

제보자는 징역 2년 실형을 지난 13일 선고받았다. 그는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저지른 업체의 직원이었다. “지시 내지 승인하에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른 측면은 없지 아니하나 (중략) 담당한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보면 (중략) 가담 정도는 절대 가볍지 아니하다”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전자법정 관련 법원 사업의 입찰비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론에 제보함으로써 이 사건 입찰비리 및 뇌물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일로 제보자를 포함해 1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는 단 한 사람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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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에 비해 수확이 적더라도 자투리땅이라도 있으면 농작물을 심으려는 게 농업인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키운 농작물을 팔 곳이 없을 때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우리 농촌을 살펴보면 농가의 70%가 경지면적 1㏊ 미만이고, 연간 농축산물 판매액이 500만원 미만인 농가가 절반(53.7%)을 넘는다고 하니, 이들 영세소농의 판로 확보를 통한 농가 간 소득양극화 해소가 절실한 상황이다.

중소 농업인의 소득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던 중, 지난 4월 농가 탐방 때 만난 원주의 한 농업인이 “하우스 600평에서 소량다품종 생산을 하면 과거에는 팔 곳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로컬푸드 직매장 덕분에 1년에 며칠을 제외하고 매일 통장에 돈이 들어와 행복하게 농사짓는다”며 만족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로컬푸드가 소득양극화를 해소할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로컬푸드 직매장은 소량다품종 생산 중소 농업인에게 안정적 판로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에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그 지역에서 소비함으로써 장거리 이동과 다단계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우선 생산자인 농업인이 행복하다. 정성껏 기른 농작물의 양이 적어도, 조금 못생겨도 신선하고 맛있으면 직매장에서는 잘 팔린다. 그만큼 소득도 늘어나고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존감과 성취감도 높다.

소비자는 매일 갓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에 따르면 로컬푸드 직매장을 방문하는 소비자의 약 66%가 월 5~10회 정기적으로 구입하고 로컬푸드의 신선함과 안전성, 저렴한 가격을 매력으로 꼽았다고 한다.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농산물 구매로 농업·농촌에 도움을 주고, 지역 내 소비로 푸드마일리지가 감축되어 환경 보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40년의 로컬푸드 역사를 가진 일본은 2016년 기준으로 2만3440개의 직매장이 있고 판매액이 1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로컬푸드를 통해 농가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단순한 직매장을 넘어 농가레스토랑, 가공공장, 체험공간 등이 결합된 6차 산업화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농협은 2012년 전북 완주 용진농협에서 첫 직매장을 개설한 이후 로컬푸드 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전국에 200개를 개설했다. 이를 통해 3만7000여농가가 농가당 연평균 83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약 3000억원의 소득 증대를 이룬 것이다. 직거래를 통해 소비자 구매비용을 연간 640억원 절감하고, 매장당 1.8명씩 360개의 지역일자리도 창출했다. 근래에는 농촌농협 조합원이 인근 도시농협 직매장에 출하하는 도농상생형이나 지자체와 협력해 문화공간 등을 결합한 복합센터, 은행 내부에 운영하는 숍인숍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에 올해 당초 100개를 신설하려던 목표를 2배인 200개로 확대하고 중앙회와 농축협이 4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로컬푸드는 단순한 농산물 판매장이 아니라 유통단계 축소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고 정(情)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이다. 로컬푸드 활성화로 농촌과 도시가 더욱 가까워지고, 5000만 국민이 농업·농촌의 가치를 공유하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김병원 | 농협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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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업주부다. 아내와 합의해 가사 노동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상은 여느 주부와 같다. 밥 짓고, 아내를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책 읽고 저녁엔 아내의 퇴근을 기다린다. 아내와 저녁 밥상에 앉아 온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러니 아내가 늦기라도 하면 절로 잔소리가 나온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내는 그를 생각해 되도록 일찍 귀가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서로에게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도 아내도 현재 삶에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간혹 얼굴 볼 적마다 언제까지 집에서 허송세월할 거냐고 책망한다. 집이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노동 공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집에 있는 그의 존재를 ‘無(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바란다. 그는 가족과 부딪칠 때마다 생각한다. 혹시 나도 전업주부인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낮에 슈퍼마켓에서 혼자 장을 볼 때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를 만나고 며칠 뒤, 두 아들을 키우는 친구를 만났다. 결혼한 뒤에도 꽤 오래 직장을 다녔고, 근래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는 얘기 끝에 이리 말했다.

“내 아들들이 잘 커서 처자식 잘 먹여 살려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지 뭐.”

엄마로서 아들이 제 몫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깃장이 생겼다. 왜 ‘처’는 아들이 잘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인가? 남자는 기필코 그래야 하는가?

며칠 전 한 설문 조사에서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8.8%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반가웠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다른 성이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역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니. 그러니 아들 있는 친구여, 아들의 얼굴 모를 처자식 걱정은 내려놓고 그저 아들이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자라길 바라시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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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초로 외국의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국제개발협력의 롤 모델 국가다. 해외 원조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중 인프라 지원·봉사단 파견 규모까지 최상위다. 나 또한 그 일환으로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협력사업(KOPIA)에 소속돼 ‘농업’ 공적개발원조(ODA) 업무를 담당 중이다. 11개월간 국내 면적의 10배 이상 되는 남미 볼리비아 전역을 누비며 알게 된 사실은 이곳 남미 최빈국이감자, 토마토, 퀴노아 같은 세계 주요 식량자원의 원산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유전자원의 보고(寶庫)인 볼리비아는 전례 없는 환경위기를 맞고 있다. 현지 337개 지자체의 67%가 지난 11년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9.2%(고원지대)는 서리와 강설 피해를 입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쉬운 6000m급 안데스 설산은 1980~2009년 사이에 빙하의 37.4%가 녹아 수자원도 잃고 지역 수입원인 스키장도 폐쇄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림·축산 분야 피해는 전체 사회·경제 섹터의 62%(약 2700억원)라 한다. 이 같은 기후변화 심화는 재래 유전자원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 자원을 채집하고 이를 중장기 보존할 시설이 미비한 볼리비아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그들의 농업 ODA 사업제안서에 기후변화·생물다양성 문구가 예외 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 또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동해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여 한류성 어류인 명태 등이 사라진 지 10년. 대구 특산물인 사과는 강원도에서 재배되고, 망고 등 동남아 열대작물은 충청지역까지 북상하는 등 한반도 식생 판도가 뒤집히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노르웨이에 이어 ‘제2의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세계 중복 종자보존소 설비를 갖췄기에 유전자원 멸종위기에 대응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 정부는 보존 중인 종자를 기후변화에 적응 가능한 신품종으로 개발하여 기후변화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노력 중이다.

농촌진흥청은 올해 KOPIA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총 22개 국 농업기관장(차관급)을 초빙해 지난 한 주간 워크숍을 진행했다. 볼리비아 농업산림혁신청장도 참석해 한·볼리비아 농업 ODA사업 성과와 발전방향을 공유했다. 마침 정부도 작년 제4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2019~2023년)을 통해 생물다양성 ODA 사업 비율을 기존 1.12%에서 4.10%로 올렸다. 해외자원부국 생물자원 정보화 지원을 통해 우수 유전자원을 교류·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OECD 회원국인 한국과 개도국 볼리비아의 지속 가능한 윈윈 전략이 이번 10주년 워크숍을 통해 마련된 것이다.

<김주영 | 농진청 코피아볼리비아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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