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를 들었다. 지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서 커피를 볶는다고 했다. 봉지 커피를 끊은 다음, 맛있다는 커피집을 찾아다니다가, 볶은 콩을 사서 갈아 마시고, 지금은 생커피콩을 들여서 볶고 있다고. 처음에는 다 같은 커피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이태 전부터 주로 마시는 것은 한 커피 농장의 것을 정해 놓고 마신다고 했다. 그는 그 농장의 커피가 올해 것, 작년 것, 재작년 것이 또 다르다고도 했다. 이야기는 같은 원두를 볶을 때마다 커피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그걸 갈아서 내리는 순간에 맛은 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하는 데에 이르렀다.

커피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줄기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잎을 내고 나중에는 잎맥을 따라 가장자리 톱니 하나하나에 맺혀 모두 다 다름에 이르는 것이었다. 모든 과정에 갈림길이 있고, 어느 갈래에서 갈라지건 둘은 서로 다른 커피가 된다. 듣고 있으니 그 모든 걸 ‘퉁쳐서’ 커피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날마다 다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늘 바쁘고, 일할 때는 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어쩌다 가끔, 자신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에는 쉬는 법이 없었다. 커피를 볶아서 마시기는 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여유도 없었고. 그가 자신의 사랑스러운 커피들을 칸칸이 다른 서랍에 하나씩 넣어두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시골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은 한 해 한 해가 떠올랐다.

볍씨 종자를 고르는 것부터, 거름을 어떻게 마련할지, 못자리에 물은 얼마나 대야 하는지, 풀은 어떻게 매고, 타작을 해서 갈무리할 곳간을 관리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마다 서로 다른 방법이 놓여 있었다. 일머리가 다른 이웃들마다 일을 해내는 방식도 다르고. 게다가 남들 하는 것하고는 다르게 농약이나 화학 비료는 쓰지 않겠다고 시작했으니, 하는 일마다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른 것이 넘쳤다. 당연히 해마다 밥맛도 달랐다. 논은 겨우 두 ‘도가리’(토막)였는데, 심지어 같은 해 타작한 것도 위쪽 논 다르고 아래쪽 논 다르고 그랬다.

그런데 커피든 다른 농사든, 대규모로 생산되고 판매되는 것들은 이런 차이를 지워서 뭉개는 방식으로 제품을 만든다. 언제 먹든, 어디에서 사서 먹든 늘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도록. 쌀이나 밀가루를 아주 하얗게 깎아서 백미, 백밀가루로 만드는 것도 이런 까닭이 있다. 그가 커피를 막 볶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떤 기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잘못하거나, 놓쳤던 무언가를 채우면 한결같은 맛을 낼 수 있으리라고. 그러던 것이 해가 가고, 날마다 다른 커피라고 여기게 되고부터는 맛이 다른 것을 즐기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쓰지 않겠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옳고, 건강에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농사가 늘어 밭에서 여러 채소들을 가꾸고, 한 그루씩 과일나무를 심고, 닭을 키우기도 하고, 차도 만들면서, 유기농이나 자연재배와 같은 방법을 좇아 농사를 짓는다. 맛이 좋기 때문이다. 해마다 다르지만, 늘 감격하게 되는 맛.

다음에 다시 그를 만나면 우리집 농사 얘기를 좀 늘어놔야지. 그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농사짓는 것부터 따져서 재료를 구하고 손수 해 먹었다면, 커피를 맛보는 입맛이 열리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겠지. 그러면 농사와 또 거기에서 나오는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더 잘 알아들을 것이다.

우리집은 논에 이모작 농사를 해서, 지금은 토종밀이 자라고 있다. 며칠 지나면 타작을 한다. 볕에 널어 말리고 밀가루를 빻으면, 해마다 씨를 받아서 심는 것이지만, 여느 해와는 또 다른 밀가루가 나오겠지. 햇밀로 빵을 구워서 아이들과 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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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봄이 가고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려 한다. 해마다 봄이 오고 또 여름이 되면 한두 번 스쳐지나가듯 떠오르는 이가 있다. 2010년 4월, 만난 사람인데 그 후로도 그는 뉴스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몇시간 얘기를 나눈 것은 9년 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계절이 봄이라 마침 하얀 목련이 탐스럽게 피어나 있었다. 그는 목련꽃을 보며 “꼭 삶은 달걀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꽃을 먹는 것에 비유해 재밌었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목련꽃을 올려다보니 정말 하얀 꽃봉오리가 삶은 달걀 같았다. 시간이 늦어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기차 안에서 먹으라며 까만 비닐봉지 안에 삶은 달걀 3~4개를 싸주었다. 그가 단식농성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이젠 좀 편히 지내시라” 인사를 건네고 왔었는데…. 이듬해 그는 추운 겨울날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높디높은 크레인에 올라갔고 100일, 200일도 아닌 309일을 하늘에서 살았다.

지난달 그가 아프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진숙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올해 쉰아홉 살 된 사람, <소금꽃 나무>의 저자, 1982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첫 여성용접사, 해고자, 노동운동가, 그냥 한 사람….

지난해 말부터 암투병을 해왔지만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서 주위의 안타까움만 컸다고 한다. 지난해 3월까지도 그는 크고 작은 노동운동 현장이나 노조원 교육현장에 섰다. 이후에도 현장에서 요청이 이어졌지만 거절하며 마땅한 핑계가 없자 주위에서 이유를 설명하다보니 노동현장에선 투병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그가 속해 있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동료들은 마냥 손놓고 있을 수가 없어 궁리 끝에 오는 6일까지 작은 모금활동과 함께 ‘김지도(김진숙 지도위원)의 쾌유를 비는 손편지를 보내주시면 전달하겠다’며 외부에 이를 알렸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를 불편해하며 지금도 알려지는 것을 꺼려 주위에선 무척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동료들은 절대안정을 위해 문자 등 개인적인 연락은 삼가기를 바라고 있다.)

많은 이들이 손편지를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그와 노동현장에서 인연을 맺었던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들, 2011년 크레인 고공농성 당시 희망버스를 타고 응원하러 왔던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들, 노동의 참됨에 대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까지 이들이 보내온 편지들은 ‘정말 고마웠고 어려운 시기, 당신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 쾌유를 기원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김진숙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노동계에만 머문 사람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고 한다.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해온 한 노동자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좀 변하기도 하는데 김지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물러서지 않아야 할 때는 격렬했고 비타협적이었다. 연설문 한두 장이나 작은 자리의 강의라도 본인이 깊이 고민해 완전히 준비되지 않으면 응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철저했다. 무엇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데 애썼다”고 했다.

우리 나이로는 올해 환갑. 그 자신이 해고노동자였으면서 30년 넘게 노동자들을 위해 투옥되고 단식하고 고공농성을 하며 싸웠던 그는 어찌보면 인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노동현장으로 돌아가 평범한 한 용접사로 은퇴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잘 마무리하고 한적한 시골로 돌아가 좋아하는 나무와 꽃을 가꾸고, 글을 쓰며 살기 바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소금꽃 나무>를 펴내자는 출판사 직원에게 ‘(자신의 글을) 책으로 만들어 내자고 나무를 베어 내도 되는 거냐’며 한사코 거절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의 글이 탐이나 원고청탁을 해본 적 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과 글과 행동은 언제나 노동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기에. 그래서 핏물처럼 살아 있었고 뜨거웠고, 아팠고, 강했다.

지금은 노동자, 운동가가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건강을 회복해 몸이 편안해지기만을 모두와 함께 바랄 뿐이다. 당시 인터뷰를 하며 ‘고생스러운 노동현장에 왜 그렇게 돌아가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현장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러워서인지 모르겠어요. 착하고 우직하게 일하면서 인간답게 살기를 소망한, 몸으로 소금꽃을 피우던 사람들이오.” 올 무더위에도 노동자들의 값진 땀으로 만들어진 소금꽃이 사방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의 소원대로 노동의 존엄도 반드시 함께 피어나야 한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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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

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

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

내가 들여다보면

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

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

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이태수(194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맑고 차고 푸른 우물물을 길어 올리던 때가 있었다. 어릴 적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면에 내 작고 동그란 얼굴이 비치던 우물이다. 윤동주 시인이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고 노래한 그 우물이다. 시인은 옛 우물에 나무 그림자와 작은 새의 그림자와 희미한 낮달이 비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며 옛 우물을 들여다본다. 과거의 시간과 존재와 옛일이 수면에서 지금의 시인을 올려다본다. 나무 그림자와 새 그림자와 낮달도 시인을 쳐다본다. 우물은 거울과도 같다. 나의 내면을 비춰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 비춰지는 물거울이기도 하다. 시인이 기억하는 옛 그 물맛이 우물의 고요함과 괴괴함을 흔들어 깨운다. 잠에서 깨어나듯 우물이 깨어난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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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빈부격차로 인한 계층 간 갈등이 기본 얼개다. 영화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를 겨냥한다. 가난한 ‘기택’(송강호)은 치킨집과 카스텔라가게를 운영하다 망한 실업자 신세다. 대학에 실패한 아들, 딸을 포함해 가족 전원이 백수인 그는 가난한 동네의 반지하방에서 산다. 반면 잘나가는 벤처기업의 대표 ‘박 사장’(이선균)의 집은 언덕 위 대저택이다. 계단을 올라가야 현관문이 나오고 또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거실이 나온다. 거실 밖으로는 너른 잔디 정원이 펼쳐진다. 영화는 빈부격차를 수직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높은 곳에서 유유자적하는 부자와 낮은 곳에서 바둥대는 빈자의 대비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네는 식구들이 모두 ‘백수’로 피자 박스 접기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아들 기우(최우식)와 아빠 기택(송강호), 엄마 충숙(장혜진), 딸 기정(박소담·왼쪽부터)이 반지하집에 함께 있는 영화 중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기택의 반지하방에 걸려 있는 액자 글씨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가난에 순응하던 기택은 자신을 포함한 백수 가족 전원이 박 사장집에 취업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눈을 뜬다. 박 사장은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고, 기사나 가정부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회사 CEO다. 그런 그가 ‘지하철 냄새’가 난다며 무심코 내뱉는 말에 ‘반지하 생활자’ 기택은 계급적 정체성을 인식한다. 

계급 갈등 또는 계층 간 충돌은 평상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동선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냄새를 맡을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자들은 높은 저택, 기사 딸린 자가용, 퍼스트클래스 등을 이용하며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만의 리그’란 없다. 세상은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망’이기 때문이다. 부자는 빈자의 거울이고 빈자 역시 부자의 거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일 발표한 사회갈등 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5%는 ‘한국의 소득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80%는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부유한 집안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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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다들 환갑이라며?” 국어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원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네”라고 답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던 모범생의 목소리도, 그렇다고 번번이 학칙을 어기던 문제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질문 아닌 질문에는 제자들을 대견해하는 마음이 묻어났고 우리들의 어색한 대답에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사제지간의 저 짧은 문답에는 저마다 지나온 40여년의 우여곡절이 녹아들어 있을 터였다. 

지난 5월 하순,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의 한 음식점.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국어 선생님과 은퇴하고 인천에서 살고 계신 영어 선생님을 모신 조촐한 자리였다. 중학교 때 은사 두 분이 이제 막 육십 줄에 들어선 제자 여덟 명과 빙 둘러앉았다. 우리들은 앞다투어 열서너 살 중학생으로 돌아갔고 팔순에 가까운 국어 선생님과 칠순에 접어드는 영어 선생님은 경기도 김포(현 인천 서구)의 남녀공학 중학교의 젊은 여교사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동창회처럼 은사와 함께하는 자리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서로 근황을 나누고, 참석하지 못한 선생님과 동창생의 안부를 묻고 나면 이른바 팩트 체크(사실 확인)에 들어간다. 주로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는 구도인데 묻는 자가 승리할 때가 많다. ‘선생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라고 제자가 물으면 선생님은 ‘내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라며 머쓱해하신다. 

1970년대 초반 삼십대 초반이던 국어 선생님은 까칠하셨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찬바람이 부는 듯했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들이 “선생님, 너무 깐깐하셨어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몇 년 전 서간문 형식으로 쓰기도 했지만 내게 국어 선생님은 각별하다. 여름방학 때 평생 잊지 못할 숙제, 훗날 나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이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 외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숙제를 다 해간 사람은 반에서 나 혼자였다. 

20여년 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왜 그런 숙제를 내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약간 섭섭했지만, 그건 선생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부터 강의를 했다면 선생님의 답변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뒤늦게 대학 강단에 서고 보니 ‘교사의 기억상실증’은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나도 졸업생들로부터 ‘그때 왜 그러셨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때마다 답을 내놓지 못해 쩔쩔맨다. 

이런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지하철 승강장 벽에 걸린 액자에서 어느 철학과 교수님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가끔 연구실로 졸업생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당신이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친 철학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대신 교수님한테서 들은 농담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원로 철학자의 회고담 앞에서 새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내 앞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단편소설 한 편을 다 외우라는 국어 선생님과 평생 철학을 강의한 교수님은 교육자로서 서로 다르지 않다. 자신의 교육철학에 따라 자신의 방식으로 가르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이다. 만일 내가 여름방학 숙제를 하지 않았다면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발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철학과 졸업생에게는 플라톤의 통찰보다 교수님의 농담 한마디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교육은 이 대목에서 난감해진다. 교수자와 학습자, 교육 목표와 학습 효과 사이의 이 불일치를 어찌할 것인가.

나는 교육과 학습 사이의 간극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가 임계점에 도달해야, 다시 말해 학교·교수·학생 사이의 불일치가 극에 달해야 교육의 자발적 전환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반세기 전 우리 선생님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심각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압도적인 시대정신이었을 때 누가 지구 온난화와 과학기술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 설령 누군가 나섰더라도 다들 외면했을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요즘 내가 붙잡고 있는 화두다. 우리는 윗세대, 특히 근대교육으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왔다. 하지만 풍요와 편리를 과도하게 추구한 결과, 경제 성장이 유일한 미래라고 믿어온 결과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있다. 지구 생태계는 교란되고 인간 내면은 황폐해지고 있다. 물려받은 것을 그대로 물려줄 수 없는 ‘거대한 단절’이다. 좋은 삶, 공정한 사회, 지속 가능한 문명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미래세대에게 자신 있게 말해줄 수가 없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두 분 은사를 뵙고 나서 누군가의 은사일 나는 더욱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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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은 올해 8월,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시행을 앞두고 전쟁터가 되고 있다. 일방적인 싸움이기에 현장은 더 처참하다. 2010년 5월 한 시간강사의 자살 이후, 시간강사의 지위 보장과 처우 개선을 위해 시작된 사회적 논의가 가져온 아이러니한 결과다. 대학마다 전임교수 강의시수 늘리기와 대형 강의 권고, 2년치 강의 개설안 제출, 학문별 특수성을 무시한 채 대학본부가 직접 강사를 임용하거나 4대 보험 가입자로 겸임 혹은 객원교수 채용을 종용하면서, 젊은 강사들이 대량 해고된 것이다. 실제 대학교육연구소가 4년제 사립대학 152개교를 대상으로 전체 교원 대비 전임교원 비율을 분석한 결과, 강사법 유예 기간인 지난 7년 동안 시간강사 수가 37.2% 줄어들었다고 한다. 반면 비전임교원, 기타 교원과 초빙교원 수는 76.8%가 증가했다.

이런 상황이 가져올 부정적 파급력은 심각하다. 첫째, 학문후속세대 죽이기다. 어느 교수나 강사시절을 경험했고 절망이 지배하는 시기에도 미래를 상상하고 버텼을 것이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버팀목 삼았을 것이다. 강의는 좋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 교수법 훈련이자 경력 쌓기 과정이다. 그러므로 강사 대량 해고 사태는 개인의 생존권 위협이자 교육자 양성 과정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학문후속세대의 싹은 트기도 전에 말라 죽을 것이다.

둘째,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 패기 있고 연구역량에 막 물이 오른 젊은 연구자가 강의도 잘한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혹은 한창 진행 중인 연구에 자극받아 새로운 이론과 세상의 변화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학습자와 세대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어 상호이해의 폭도 넓다. 이런 분들이 대거 해고되고, 은퇴교수, 외부 기업이나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나 강의를 취미로 하는 분들로 대체되면 교육 전반의 질적 하락과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심각해질 것이다. 인식 차이가 크고, 역동적·사회적 현상에도 무지한 비전공자들에 의해 진행될 대형 강의실의 강의를 상상해 보라. 

셋째, 학문 죽이기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연구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일수록 대학원 진학을 꺼리게 될 것이다. 돈벌이도 안되고 장래도 보장되지 않는데 직업으로 공부를 선택하겠다는 건 망상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기왕에 박사학위 소지자들도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학기별로 강의 개설이 보장되지 않는 소수 학문 분야, 간학제적 성격을 가지거나 탄탄한 학제 구조를 가지지 않은 연구 분야들은 더욱 축소되어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융·복합 학문 육성이라는 허구적 울림에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 강좌도 열리지 않는 학문 분야에 매진하는 연구자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한국 대학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넷째, 차별의 공고화와 대학경쟁력의 하락이다. 한국 대학이 신자유주의체제에 함락되었다는 진단은 일면적이다. 누적된 봉건가부장의 적폐가 뿌리 뽑히지 않은 채 성과주의가 착목된 기이한 생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학벌구조, 학연과 연고주의, 남성중심적 위계질서가 내적 공정성과 민주성을 근본부터 흔드는 곳이다. 남성이란 성별이 가진 특권과 공고화된 학연주의가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 강사법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소수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한 언론사의 보도에 의하면(시사저널, 2019년 1월23일자), 한국 대학의 여성 교원 중 71.32%는 비전임교원이며, 시간강사가 50%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 전임교원이 46.41%이고 시간강사 비율은 25.26%라고 한다. 실제 주변의 많은 여자 박사들은 이 같은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학문생태계에 절망하고 있다. 비정규직 연구원, 강사로 갖은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결혼과 임신, 육아와 가사노동 등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경력단절을 겪다가 마침내 강사법 시행으로 해고되고 있는 현상에 분노하고 있다. 대학진학률 면에서 이미 앞서고 있고 탁월한 학력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학문 현장에서 사라지고 ‘학문하기’ 자체를 포기할 때 한국 대학 전반의 연구역량 하락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  

한국 대학은 더 이상 예리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가며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가치를 습득하고 민주주의를 실습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곳이 아니다. 그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거쳐가는 학원 수준으로 몰락했다. 강사법 시행을 대비하는 한국 대학의 자세는 이런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학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성장은 불가능하기에 미래는 더 암울하다는 점이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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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정년연장 논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홍남기 부총리는 2일 KBS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현재의 인구구조 변화 추세를 볼 때 정년연장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인구구조 대응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정년연장 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회적 논의와 정부 입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2월 육체노동자 정년을 만 60세에서 65세로 올렸고, 최근 서울시 버스노사는 현재 61세인 정년을 63세로 늘리는 내용에 합의했다. 정부는 인구구조와 사회인식 변화에 따라 정년연장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령화와 저출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재작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급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간 베이비붐 세대가 빠져나가는 자리를 10대가 메우지 못해 매년 30만~40만명씩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국가경제를 돌리는 ‘엔진’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정년연장 논의에 뛰어든 것은 생산가능인구를 늘려 경제활력 제고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정년이 연장되면 고령인구에 대한 사회적인 부양부담도 줄일 수 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노인 빈곤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국의 현실에서 정년연장의 의미는 작지 않다.

(출처:경향신문DB)

하지만 정년연장은 장점만 고려할 일이 아니다. 우선 정년연장이 청년 일자리와 상충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이 무한정 고용인력을 늘릴 수 없는 현실에서 정년연장은 청년 일자리의 감소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심각한 청년실업을 가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 근무연한에 따라 임금이 높아지는 연공서열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정년을 연장하는 것은 당장 기업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기업이 출혈을 하면서까지 자발적으로 정년연장에 나서기는 힘들 것이다. 연공서열형 임금구조에 대한 재설계 논의가 선행돼야 하는 것이다. 일단 고용이 되면 퇴출하기 어려운 ‘평생직장’의 고용문화도 검토 대상이다.

정부가 신호탄을 쏘아올림으로써 사회적으로 정년연장 논의를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일본은 정년 65세를 넘어 70세 정년을 추진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도 정년연장을 장기과제로 넘겨둘 수 없는 상황이다. 정년연장 문제는 양극화된 노동시장, 경직된 고용형태, 연금제도, 노인복지 등과 어우러질 때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 핵심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한국 사회가 수용 가능한 방안을 도출해내는 일일 것이다. 사회적 논의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대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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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두 국방부 장관과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이 지난 1일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열어 냉각된 국방교류의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측은 ‘초계기 위협비행-레이더 조사’ 갈등 이후 얼어붙은 국방협력을 정상화하는 데 뜻을 모았고, 양국 간 해상 군사갈등의 재발방지가 중요하다는 점에 합의했다. 

양국 국방장관의 만남은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확대국방장관회의 이후 8개월 만이다. 지난해 10월 제주 관함식에 참가할 예정이던 일본 자위대 호위함의 욱일기 게양 문제가 불거지고 12월엔 ‘초계기 위협비행’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양국의 안보협력 관계는 얼어붙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담은 안보협력 복원의 물꼬를 트는 의미가 있다.  

물론 이번 회담을 통해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양국 장관은 ‘초계기-레이더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평행선을 달렸다. 정 장관은 한국 구축함이 일본 초계기에 추적레이더를 비추지 않았으며 일본 초계기의 위협비행이 당시 사태의 본질이라고 했다. 이와야 방위상은 한국 군함이 초계기에 레이더를 겨냥했으며 초계기의 위협비행은 없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의 유감표명이나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갈등 고조를 막기 위한 재발방지다. 따라서 양국이 이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한 것은 회담의 가장 큰 성과다. 양국관계가 전방위적으로 악화돼 있다고 해도 군사분야만큼은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황관리에 각별히 유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와야 방위상은 지난달 18일 “한국과 여러 문제가 일어났지만 한국 국방장관과 만나 원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며 관계 복원의지를 비쳤다. 이 발언이 이번 회담이 성사되는 데 탄력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험악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한순간에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것이 외교가 갖는 힘이다. 이를 지난해 남북·북미 관계가 보여준 바 있다.  

이번 국방장관 간 만남이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은 최고지도자들의 의지가 중요한 시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말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나기를 바란다며 관계개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아베 총리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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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헝가리 다뉴브강에서 발생한 유람선 참사와 관련해 “골든타임은 기껏해야 3분”이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파문이 일자 그는 “중요한 건 속도라는 대통령의 말은 도대체 누가 코치를 한 말인가”라는 글을 덧붙였다. 그의 글은 헝가리 사고현장으로 구조대를 급파하며 ‘신속 대응’을 주문한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실종자 수색작업이 한창인 상황에서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다. 그럼 해외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사고를 당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손 놓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정용기 한국당 정책위의장은 국회의원·당협위원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야만성을 뺀다면 어떤 면에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보다 지도자로서 더 낫다”고 했다. 일당독재 국가인 북한 지도자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보다 낫다니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망언이다. 황교안 대표가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사과한 뒤에도 정작 당사자는 “무슨 문제냐”고 항변했다니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 페이스북.

도 넘은 막말이 끊이지 않는 건 지지층 결집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 지도부에 충성도와 투쟁성을 보이면서 대중에겐 정치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유혹도 있다. 정치인들의 막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당에 막말과 설화가 빈번한 건 이 당에선 무슨 말을 해도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망언’을 한 전·현직 의원은 하나마나한 솜방망이 징계를 받는 데 그치고, “5·18은 폭동”이라고 주장한 의원에 대한 제명은 지금까지 유야무야 상태다. 대표와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까지 걸핏하면 막말 퍼레이드에 가세하는 판이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없는 분위기도 있을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한데도 국회는 일손을 놓은 지 두 달이 됐다. 그러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막말을 쏟아내니 정치혐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품격의 ‘품(品)’자는 ‘입 구(口)’자 세 개로 이뤄져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그 사람의 품격이 된다는 뜻이다. 정치권의 언어는 공공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기본적 품위를 갖추고 절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정치인을 가려내는 게 다음 선거에서 최우선으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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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미 육군 정보요원이라며 5·18 관련 남아있는 모든 의문들을 단숨에 답해버린 김용장. 그러나 이 꿈 같은 증인은 그가 주장한 것처럼 501 군사정보단의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으로 근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했고, 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

지난 3월 언론에 처음 나온 이후, 김씨는 501 정보단의 직책을 물증으로 밝힌 적이 없다. 5월 21일 전두환 명예훼손 소송 참고인으로서 검찰에 제출한 증명은 김씨가 20년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일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한다. 첫 증거는 우연히 드러났다. 5월 16일자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잠시 비친 김씨의 부대 표창은 그가 민간인 통역관임을 적시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에 잠시 비친 김용장씨의 표창장 사진. 확대해서 보면 그의 직책이 ‘언어전문가(통역관)’로 돼있다. 출처: JTBC

나는 미군 당국에 몇 차례 정보공개 요청을 통해 INSCOM에는 김씨가 작성했다던 보고가 존재하지 않고 민간군속이었던 그의 인사 기록은 세월이 지나, 타 기관에 이첩된 가능성을 확인했다. 

김씨의 근무기간과 주장을 전해들은 INSCOM 공보국은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씨의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는 나와 전화 통화에서 김씨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부대 활동에 대해 일절 함구했지만,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냐는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

반면, 김씨는 나와 통화에서 501 부대가 필요에 따라, 통역(I/T), 언어전문가(linguist), 또는 군사정보관(MIS)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썼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사무실 고유코드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미군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에 미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가 INSCOM에는 민간군속이었던 김용장씨의 인사 기록이 없고, 어쩌면 세월이 지나 타 기관에 이첩된 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해온 서한. 설갑수씨 제공

김씨가 자신의 신분을 속였다고 해서 미군 정보기관에서 통역으로 일한 이상 그의 증언을 모두 위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언론에 나올수록 그의 위증도 드러났다.

김씨는 전두환이 80년 5월 21일 광주 기지에 왔다는 것은 자신의 정보원이 전해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러 차례 말하며 당시 비행계획을 찾아보라고 강조했다. 당시 광주 공군기지는 한미 공군의 공동관할로 미군 정보조직은 한국 측 조력자 없이도, 광주 기지의 비행계획과 탑승객명단을 쉽게 확인할 위치에 있었다.

김씨의 주장이 나오기 전부터, 전두환은 80년 5월 21일 오전 11시2분 용산 미군기지에서 헬기에 탑승, 광주 기지에 오후 12시55분 도착했다고 의심 받아왔다. 새로운 주장이 아닌 것이다. 국회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전두환이 탑승한 헬기의 비행계획을 확인했냐고 묻자, 김씨는 확인 여부에 대해 확답을 피하고 비행계획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수송기로 광주기에 도착한 편의대를 목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비행계획을 확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살 명령을 내린 전두환의 광주 비밀 방문과 시위대를 선동할 편의대 출현의 물증 확인 여부에 대해 얼버무린 셈이다. 

광주 기자회견에서 김씨는 계엄군이 발포가 아닌, 사살 명령을 받았다고 자신의 보고가 80년 5월21일자 DIA 문건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민감한 부분을 공개한 것은 DIA의 실수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DIA는 실수하지 않았다. 김씨가 언급한 DIA 보고서는 사살 명령이 아니라, 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후 계엄사가 뒤늦게 발동한 자위권에 관한 것이었다. 계엄사의 공식 동향을 DIA가 검열 삭제할 이유는 없다.

김용장씨가 광주 방문 중이던 지난 5월21일 전두환 명예훼손 소송 참고인으로서 광주지검에 제출한 미국 정부 20년 근속 확인증서. 뉴시스

또 다른 위증은 다름 아닌 5월18일에 나왔다. 그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광주는 신군부의 시나리오였고, 미국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5·18 항쟁 사나흘 전 미 국방성 명령으로 광주에서 미국 민간인을 철수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5월 항쟁 이전과 항쟁 기간 열흘 내내 미국은 소개 명령이나 계획을 실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10세 막내딸과 광주에 남았던 미국 선교사의 증언이다. 그녀는 시위가 격화될 즈음 대사관에서 광주를 떠나라는 전화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5월22일 유혈사태를 염려한 미 공군 상사가 양림동 외국인 마을에서 선교사와 가족들을 헬기로 공군기지로 소개하려는 계획을 타진했으나, 선교사들은 거부했다.

그런데 5월20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김씨는 80년 5월22일에 소개 계획이 있었다고 별 다른 설명 없이 말을 바꿨다. 동석한 80년 당시 보안사 특명부장이자 김씨의 학교 후배라는 허장환은 5·18 사나흘 전에 외국인을 소개시키라는 명령을 보안사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뒤집은 주장을 허씨가 되살린 꼴이었다.

김씨는 당시 광주에 미 문화원 원장이 남아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3개월동안 그가 줄곧 해왔던 미 국무성 직원이 광주에 없었다는 주장을 해명없이 뒤집는 순간이었다. 문화원(USIS)이 국무성 소속이라는 것을 미 정보부대에서 일한 김씨가 모를 리 없다.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

5월16일자 방송이 인터뷰한 80년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자 DIA 요원인 제임스 영은 김씨의 주장을 줄곧 부정했다. 김씨 주장과 달리 영은 광주 공군기지에 4명이 아닌, 2명의 요원이 있었고, 501 정보단이 전국에 11개가 아닌 약간(several)의 필드오피스(field office)를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은 또한 항쟁 기간동안 501 부대가 기지 내에 한정돼 있었고, 몇몇 짧은 상황보고(Spot Report)만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당히 얼버무린 자막과 내레이션만 좇다 보면 이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영이 김씨를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을 확인한 나조차도, 16일자 방송만 보자면 영이 김씨를 안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얼토당토 않은 번역과 분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80년 5월8일자 DIA 문건을 비추며, 머리 기른 특전부대가 학생시위 진압에 동원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은 특전대가 한 대학 근처에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살 명령부터 편의대까지 김씨의 위증은 ‘5·18은 전두환 집권을 위한 신군부의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보안사 상사 허씨의 주장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불과 수백명의 전두환 편의대의 선동에 휘둘려 방송국을 불 지르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편의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뒤쫓아 관공서나 점거한 한 무리의 몰지각한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류의 주장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침투설의 뒤틀린 거울상에 불과하다. 항쟁이 600명 북한 특수부대가 벌인 게릴라전에 ‘광주인’들이 부화뇌동한 사건이라는 왜곡이나, 5·18을 사전 시나리오라고 보는 시각 모두 80년 5월 닷새 동안 계엄군의 폭력과 싸우고, 또다른 닷새 동안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며 버틴 광주시민의 자발성과 양립할 수 없다. 

내년이면 광주 항쟁 40주년. 수많은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증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증언과 증거들은 쇠락해 간다. 더 이상 검증 없는 주장과 거짓에 5·18 진상규명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안될 것이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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