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에 따라다니는 단어가 ‘규제’다. 여기에 신산업·신기술 관련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도 더해진다. 규제와 갈등으로 선진국에 한참 뒤처졌다고 아우성이다. 핀테크, 공유경제, 바이오헬스, 블록체인, 빅데이터, AI 등 신산업발전에 규제 족쇄가 장애물이라는 주장이다. 규제 없는 나라에서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혁신 스타트업이나 규제 없는 목장에 방목했더니 쑥쑥 성장했다는 외국 공유경제를 예로 든다. 한국 기업은 첩첩산중의 규제 속에서 전전긍긍하다가 세계시장을 앞서갈 기회를 잃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오헬스 국가비전을 선포하면서 바이오헬스산업 육성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포기할 수 없는 미래 산업을 ‘사람중심 혁신성장’의 동력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다. 여기에는 글로벌 수준의 인허가 규제 합리화가 들어 있다. 안전관리 강화도 포함되어 있지만 규제개선의 기조는 규제완화다. 규제샌드박스와 규제자유특구가 그 예다. 

줄기세포 논문조작의 황우석 사태 이후에 촘촘해진 바이오산업의 규제를 풀어가겠다는 것으로 제약바이오 산업계에서는 반기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악재가 연이어 터져 잔뜩 움츠러든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와 계획적 증거인멸이 그렇고, 코오롱생명과학이 개발한 골관절염 유전자치료제 ‘인보사’의 주성분 사기가 그렇다. 글로벌 바이오기업으로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경영승계를 위해 벌인 고의적 분식회계는 국민의 안전·생명과는 관계없다지만 수사대상이 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서 신뢰도는 추락하고 말았다. 가짜 성분이 포함된 관절염 유전자 치료제를 투약한 환자들의 생명과 안전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작·은폐가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과학사기로 개발기업은 소액주주와 환자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을 얻었다.

그런데 ‘제2의 황우석 사태’나 ‘제2의 인보사 사태’가 염려되는 상황에서도 바이오산업계는 규제강화를 걱정한다. 재발방지를 위한 규제일변도를 우려하면서 기업의 국내 신약 개발 의지가 꺾일 수 있다고 겁을 준다. 신성장 산업의 위축을 걱정하기도 한다. 혁신기업의 최대 관심사는 규제완화다. 시장은 경쟁원리로 작동하는데 여기에 국가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관여하면 안된다는 논리다. 혁신성장을 위해서는 과감한 규제완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신기술을 도입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규제에 갇혀 기술발전이 뒤처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규제 장벽을 허물고 시장을 자유롭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유니콘 기업도 나오고 혁신성장이 이루어져 새로운 먹거리산업들이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정부가 개발자의 편의를 맞춰주는 맞춤형 심사나 다른 의약품보다 먼저 인허가를 심사하는 우선 심사, 조건부 허가 등의 신속처리를 진행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에 관한 법률’을 빨리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한다. 경제 활성화로 포장된 규제완화정책을 시행하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산업계는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을 요구하고 규제지체현상을 지적하기 전에 기업의 윤리경영과 인권경영을 말해야 한다.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고, 산업진흥보다 환자의 안전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윤리도덕이 밥 먹여 주냐고 비아냥거릴지 모르지만 규제완화와 기업의 비윤리적 경영이 겹쳐지면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산업 분야에서는 과학과 경영에서의 윤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이오헬스산업 발전으로 ‘사람중심 혁신성장’을 실현하겠다는 정부정책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먼저다’라고 읽어야 한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좌우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바이오산업의 경우 윤리경영과 신뢰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첨단·혁신’으로 포장해 하루빨리 시장에 내놓을 생각보다는 윤리경영, 인권 존중,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수한다는 다짐이 우선이어야 한다.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한 인보사 사태나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서 윤리의식의 실종을 드러낸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혈액 진단 키트로 상당수 질병을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다고 선언했던 미국 메디컬 생명공학기업 ‘테라노스’의 사기극과 몰락도 본보기다. 

규제의 유연화와 규제의 글로벌화를 말하기 전에 글로벌기업의 윤리경영부터 배우라. 그래야 경쟁력도 높아지고 지속 가능한 성장이 보장될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국가전략의 부재 또는 빈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했지만 5년 단임 정권을 책임진 주체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법 87조에 따라 제정된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을 포함한 어느 법령에도 ‘국가안전보장’ 및 ‘국가안보’의 정의는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벤치마킹하여 2004년 처음으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발간, 국가이익(국가목표)을 “국가의 생존, 번영과 발전 등 어떠한 안보환경하에서도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정의했을 뿐이다. 

이후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국가이익(목표)은 온데간데없이 정권의 이익과 전략이 마치 국가이익과 전략인 양 호도됐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태생 탓에 강대국들이 내뿜는 세력정치 자장(磁場)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음에도 5년마다 나타났다 사라진 역대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안보의 한 축인 외교정책을 지지층만을 의식한 국내정치 공학적 관점에서만 다루면서 국가이익과 국가전략의 본래 의미가 실종되는 데 한 요인을 제공했다. 그사이 외교가 차지하는 공간은 눈에 띄게 축소됐다. 더군다나 ‘청와대 정부’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에서 외교부가 독자적으로 공간을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불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됐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외교부에)그렇게 훌륭한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있는데도 우리 외교역량이 우리나라의 어떤 국력이나 국가적 위상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문 대통령은 외무고시 출신에다 특정 학맥 중심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외교부에 대해 유사한 지적들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서도 외교부의 뼈를 깎는 환골탈태는 없었던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사에 외교직 공무원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외교수장에 외교부 주류와는 거리가 먼 외부 인사를 임명했다. 이때만 해도 외교부의 ‘워싱턴 스쿨’ ‘저팬 스쿨’ ‘차이나 스쿨’처럼 폐쇄적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로 해석됐다. 

그러나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혁신이 실패를 넘어 자칫 외교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위법행위, 깐풍기 대사, 명칭 오기, 그리고 구겨진 태극기 게양에서 드러난 일부 외교부 직원들의 기강해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독 회담 2분’이 상징하는 한·미관계의 불편한 진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무산 등이야말로 한국 외교의 위기를 알리는 대표지표이다. 

이처럼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한국 외교 위기의 본질은 국가이익 전략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래서 묻는다. 임기 중반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는 정권을 넘어서는 국가이익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로드맵 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북한 비핵화가 국가목표 중 하나라면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대상으로 양자 간 국익을 정하고 이에 따른 전술이 아닌 전략을 마련했는가? ‘늘공’들을 의전과 현안으로 내몰고 ‘어공’들 위주로 냉엄한 강대국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 국가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야인시절 쓴 책에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전략실 제2차장 관련 일화가 소개돼 있다. 김 차장이 오래전 외교통상부 외교통상교섭본부장직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장교 요원을 뽑아 사병으로 쓴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 차관 역시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은 관료집단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국가이익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유연한, 창의적 외교전략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산업통상자원부가 3일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토론회’를 열고 3가지 개편 방안을 내놓았다. 전기를 많이 쓸수록 단가가 높아지는 누진제를 완화하는 것부터 아예 누진제를 폐지하는 방안까지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지난해 임시할인처럼 현행 3단계 누진제를 유지하되 구간을 늘리거나, 2단계로 줄이는 방안, 누진제를 폐지하는 방안 등이다. 정부는 누진제 개편에 따라 가구당 월평균 전기요금이 9951~17864원 내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부는 공청회 등 여론 수렴을 거쳐 최종개편안을 이달 중 확정할 계획이다.

정부의 이번 전기요금 개편은 요금 인하에 방점을 두고 있다. 개편안 가운데 현행 3단계 누진제를 유지하는 방안은 누진제 구간이 늘어나면서 현재와 똑같은 전기를 사용하고도 가구가 내는 전기료는 줄어들게 된다. 또 누진 단계를 줄이거나 아예 폐지하는 경우 다소비 가구는 전기요금이 큰 폭으로 감소한다. 방안에 따라 전기요금이 오르는 경우가 있으나 대체로 요금을 내리는 쪽이다. 더욱이 전기 과소비를 부추기는 방안까지 들어있다. 에너지 소비량 감축기조에 역행하는 것이다. 과연 지속 가능한 에너지 대책이 될지 의문이다.

한국의 에너지 과소비는 누누이 지적돼 왔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켠 채 출입구를 열고 영업하는 일은 일상이 됐다. 전기료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기료는 주요 국가의 2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전기소비는 2배가 넘는다. 1인당 연간 전기소비량이 영국은 4800kWh인데 한국은 1만kWh다. 문제는 공공성을 이유로 제조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공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료가 낮으니 에너지효율 혁신이나 에너지 사용 절감의 노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기료를 올리면 그만큼 전기사용이 줄고, 추가로 발전소를 짓는 것만큼의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에너지 절감에는 눈감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욱이 전기료 인하로 인해 늘어난 한전의 적자는 고스란히 국민의 짐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난해 폭염에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한 개편요구가 폭발하자 근본적인 개편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정부 개편안은 근본적인 처방과는 거리가 멀다. 에너지 문제의 한 축은 값싼 전기요금 때문에 발생한다. 정부는 이 사실을 외면해선 안된다. 물론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부담은 크지만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미세먼지를 줄이고 방사능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에너지빈곤층을 위한 대책은 별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차제에 가정용보다 더 낮게 책정된 산업용 전기료 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회법상 짝수 달인 6월에는 임시국회가 자동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대치가 풀리지 않으면서 국회는 개회조차 못하고 있다. 국회 파행을 끝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양당은 국회 정상화 조건을 놓고 기싸움만 벌이고 있다. 한국당은 ‘패스트트랙 법안의 합의 처리’를 못 박아야 국회 복귀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민주당은 패스트트랙 무효화를 뜻하는 ‘합의 처리’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설상가상 한국당발 막말이 연일 쏟아지고, 여당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갈등의 골만 깊게 패는 양상이다. 두달 가까운 국회공전도 모자라 6월 국회마저 개점휴업에 빠질 목전이다.

올 들어 국회는 온전히 열려 본 적이 없다. 3월 중순에야 첫 본회의가 열렸을 정도다. 4월 국회를 빈손으로 보낸 데 이어 5월 국회는 아예 열리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의 입법기능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20대 국회(2016년 5월30일~2020년 6월2일)에 접수된 법률안·예산안·결의안 등 의안의 본회의 처리율은 29%에 불과하다.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로 불렸던 19대 국회(42%)에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국회 휴업이 길어지면서 시급한 추가경정예산안과 민생경제 법안들은 먼지만 쌓이고 있다. 당장 강원 산불과 포항지진, 미세먼지 등과 경기 대응을 위한 추경안은 40일째 국회에 묶여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보완 입법, 택시·카풀 관련 법안, ‘유치원 3법’ 등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단독 국회 소집’을 일단 유보하고 협상을 계속할 방침이다. 사실 여당 단독이나 여야 4당이 국회를 소집해도 제1야당이 응하지 않으면 국회의 정상 가동이 어렵다. 진정 민생을 걱정한다면 여야가 한발씩 물러나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한국당이 상대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패스트트랙 철회’ 조건부터 거둬들이는 게 먼저다. 패스트트랙은 민주당 단독이 아닌 여야 4당 간 합의로 적법하게 이뤄진 것이다. 민주당이 ‘유감 표명’과 ‘패스트트랙 법안의 합의 처리 노력’을 수용한 만큼, 보다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국회 등원에 무슨 특별한 명분이 필요한가. “민생을 위해” “국민을 위해”보다 더 큰 명분은 없을 터이다. 국회를 정상화할 일차적 책임은 집권여당에 있다. 지도부 회담 등 야당을 설득하는 데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원내대표 등 지도부의 ‘통 큰 정치’가 절실한 시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며칠 전 마석 모란공원을 안내할 일이 있어 다녀왔다. 종종 마석 모란공원을 안내할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운 일은 소개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문익환, 박종철 열사 등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분들도 있고, 김근태, 노회찬과 같은 유명 정치인들도 있고, 용산참사 때 돌아가신 철거민들도 있지만, 여기에는 전태일, 김진수, 김경숙 등 1970년대와 그 이후 돌아가신 노동열사들이 많이 모셔져 있다. 

1970년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 그리고 아들과 한 약속을 평생 이루려던 이소선 어머님, 그리고 그 옆에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묘가 있다. 이 묘 앞에서 지난 4월28일 조형물 제막식을 했다. 평장 형태에 흰 돌을 깔아서 마무리한 무덤 위에 자전거를 탄 노란색 조형물, 그가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그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열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들아, 너한테 꼭 맹세할게. 꼭 해낼게, (다른 노동자들이) 너처럼 죽지 않게 이 무덤 앞에서 맹세할게.”

외아들을 잃고 장례 전에 ‘또 다른 김용균’을 막자고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위해 눈물로 호소하고 다녔던 엄마는 다시 다짐을 했다. 1970년 300만 노동자의 대표였던 전태일이 노동부를 찾아가 근로감독을 요청했다가 묵살당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처참한 노동현실을 고발했던 전태일 앞에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이 약속했던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말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내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구라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보편적 적용의 법 개정취지는, 그리고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겠다고 개정된 법률은 여러 가지로 부족했지만, 28년 만의 법 개정을 두고 큰 걸음을 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4월22일 발표한 그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시행령안에서는 “도급 승인의 대상 범위를 황산, 불산, 질산, 염산을 취급하는 설비를 개조·분해·해체·철거하는 작업으로 국한”하려고 한다.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작업에 대한 도급을 제한하자고 한 법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또 원청의 책임도 모호해졌고, 특수고용노동자 50개 직종 중에 9개 직종에만 적용하도록 하고, 노동자들이 작업중지권도 무력화하고 있다. 하위법령인 시행령과 시행규칙으로 법률을 무력화해온,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해온 상투적인 수법이 사람의 목숨과 관련한 법률의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버렸다. 오히려 하위법령에서 개정 법률이 못 담았던 부분들까지 적극적으로 보장하도록 나아가면서 향후 법률 개정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법률 조항들을 좁게 해석하고, 무력화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조문을 만들어 버리는 이 오래된 버릇이 여기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위험의 외주화 근절은 대통령의 약속이다. 노동부도 지난해 산재 사망률을 4년 안에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미흡한 산안법으로, 이리저리 기업들이 산업안전을 소홀히 할 길을 터놓은 엉터리 시행령으로 그게 가능할까? 

노동부는 “활력 있고 안전하며 든든한 일터 조성”을 기관이 미션으로 제시하고 있고, 산업안전분야에서는 “무사고, 쾌적한 일터”를 약속하고 있다. 이런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회의하던 터였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노동조합을 깨는 일에 국가정보원, 검찰, 검찰 등과 함께 적극성을 보여온 부처가 노동부였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노동부의 체질이 저절로 개선될 리가 없다. 

지난해 노동부가 산재 사망률을 4년 안에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고 발표하게 된 배경은 우리 사회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드러냈던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김봉환 사망 30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OECD 1위의 산재사망률을 기록하는 한국의 민낯을 개선하기는 해야겠으니 구체적인 대책 없이 구호 차원에 제시했던 것은 아닌가. 한 해 2400명이 산업현장에서 죽어나가고, 건설 노동자들만 1년에 500명이 죽어나가는, 그래서 김훈 소설가가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져 죽는다고 개탄한 이런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노동부에 기대할 수는 있을까? 

전태일과 김용균의 묘에서 능선 끝으로 올라 공원묘지의 끝단을 오른편으로 올라가 걸어가다 보면 문송면의 무덤을 만난다. 응달이라서 볕도 많이 안 드는 곳에 떼도 많이 나지 않는 낮은 무덤이 있다. 1988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문송면은 서울 양평동의 온도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수은중독에 걸려서 사망했다. 만 열다섯 살이었다. 문송면의 묘 대각선 건너편에는 김봉환의 무덤이 있다.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900명 넘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이황화탄소에 중독이 되었고, 죽은 뒤에도 137일 동안을 공장 정문 앞에서 버티다가 장례를 치렀다. 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본 뒤에야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없게 하겠다고 이 나라에서는 비로소 산업재해 추방운동이 벌어졌다. 그런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일터는 안전하지 않다. 

네 가지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설비를 다루는 작업에 대해 도급승인을 제한할 때 31년 전의 문송면과 김봉환의 작업장은 산업안전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의 이 법과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으로 그게 가능한지 묻고 싶다. 노동부 장관은 문송면과 김봉환의 무덤 앞에서, 김용균의 무덤 앞에서 대답할 자신이 있을까? 

기업의 이윤 앞에 알아서 기는 노동부가 아니라 노동자의 목숨을 보편적으로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부는 언제 볼 수 있을까? 이제 입법예고 기간도 끝났다. 지금의 시행령안, 시행규칙안은 당장 폐기하고 새롭게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다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목숨마저 이윤 앞에 내놓는, 그리고 차별하는 반인권적 입법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아이들은 자주 쓴다. 일단은 자신이 주어인 문장으로 글쓰기를 배워나간다. 재작년에 열다섯 살이었던 김서현이라는 아이는 원고지에 이렇게 적어서 들고 왔다.

‘나는 모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 또 나는 친구와 먼 산으로 가는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한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고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느낌이 든다.’

고작 세 문장이지만 나는 이 글의 화자가 조금 좋아지고 말았다. 누군가와 한참을 말하고 듣다가 해 지는 줄도 몰라봤던 사람만이 ‘먼 산으로 가는 수다’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다. 만약 친구가 된다면 그로부터 경쾌한 여유를 나눠 받을 게 분명했다. 위의 글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 김찬영이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김찬영이다. 김찬영은 나랑 세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인데 게임과 노래를 좋아한다. 찬영이 가수가 되면 좋겠다.’ 

‘나’였던 주어가 남으로 슬쩍 넘어갔다. 그 대상은 애증의 남동생이다. 가장 싫어하는 남이자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라니. 이 간극에서 관계의 탄력을 본다. 언제까지나 너와 가까운 친구일 거라는, 흔들리지 않는 전제 위의 다툼은 금세 회복되기 마련이다. 한껏 팽팽하게 늘어났다가도 빠르게 돌아오는 고무줄 같은 탄력이 남매 사이에 있는 듯하다. 김서현은 세 살 어린 남동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간단히 적은 뒤 가벼운 소망을 덧붙인다. 화자에 비해 동생이라는 인물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이름과 피상적인 정보만으로는 원고지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기 어렵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며 몇 개의 계절을 통과하다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다른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숨을 불어넣는 방식 중 하나는 큰따옴표다. 아이들이 주어를 남으로 설정한 뒤 큰따옴표를 쓰는 순간을 나는 눈여겨보게 된다. 그건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외워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했던 말만 기억해가지고는 큰따옴표를 잘 사용하기 어렵다. 같은 해에 김서현은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제목은 ‘이사’다.

‘다음주면 이사를 간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신이 났다. 하지만 엄마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안방에 있는 침대를 들고 갈까, 두고 갈까? 들고 가기엔 이사 갈 집 안방이 너무 작은데. 이 침대가 푹신해서 좋긴 좋지만 두고 가야겠다. 애들 침대만 가져가야겠어.” 그다음에 엄마는 소파를 생각했다. “이 소파는 어떡하지? 가죽도 다 벗겨지고 오래됐는데. 가서 새로 사든지 해야겠다. 냉장고는 어쩌지? 거의 고장이 났는데. 새로 사기엔 돈이 너무 아까운데…. 그나저나 서현이 방 책상은 어떡할까? 새 집에 들어가려나? 들어가겠다! 에어컨은 가져갈까? 집이 작아서 잠깐만 켜도 시원해질 테니까 가져가야지. 찬영이 인형들은 짐 되니까 그냥 버릴까? 아니야. 자기 돈으로 열심히 모은 건데 챙겨가자. 냄새 나는 저 햄스터들은 누구한테 줘 버릴까? 에이, 그냥 데려가자. 커튼은 삶아서 가져갈까? 그냥 이사 간 다음에 세탁해야겠다.” 엄마는 혼잣말을 마친 뒤 우리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엄마 이제 이사박스에 물건 챙길 테니까 너희도 정리 시작해!” 이삿날이 오자 나랑 동생은 아침부터 새집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았다. 짜장면도 먹었다. 옆집에 사는 아림이 언니랑도 놀았다. 이 집에서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물건들은 빠진 것 없이 무사히 옮겨졌다. 엄마의 잔소리와 혼잣말은 중요하다.’

이사를 앞둔 어른의 혼잣말은 길고도 길다. 신경 써서 챙겨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집도 마음도 어수선해 보인다. 김서현과 김찬영은 이사의 고단한 부분에는 참여하지 않는 듯하다. 짜장면을 먹고 ‘혼신의 힘을 다해’ 놀기만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가 노는 와중에도 엄마의 혼잣말을 죄다 적었다는 점이다. 일하고 살림하고 이사라는 거사를 치러내는 한 어른의 흔적이 아이의 글에 적혀 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문득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하며 엄마의 대사를 되살렸을 것이다. 틀리게 옮기지 않으려 과거를 유심히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지나친 남의 혼잣말조차도 다시 기억하는 것. 나 아닌 사람의 고민도 새삼 곱씹는 것. 아이들이 주어를 타인으로 늘려나가며 잠깐씩 확장되고 연결되는 모습을 수업에서 목격하곤 한다.

<이슬아 |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색한 일과 익숙한 일  (0) 2019.06.11
인생 ‘즐겜’을 위하여  (0) 2019.06.07
주어가 남이 될 때  (0) 2019.06.04
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  (0) 2019.05.30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0) 2019.05.28
치안의 정치  (0) 2019.05.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청해부대 파병 임무를 마치고 ‘최영함’ 입항 행사 중 밧줄 사고로 순직한 최종근 하사에 관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군의 순직심사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사안의 경우 군 직무수행과의 인과관계가 워낙 명백해 신속한 순직 결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GOP부대 폐유류고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면서 촉발된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인 허모 일병 사건, 판문점 인근 비무장지대 경계초소에서 의문의 총상을 입고 숨진 김모 중위사건, 군에 입대한 지 120여일 만에 선임병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한 윤모 일병 사건 등 많은 군부대 내 사망사건·사고들이 사회적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순직결정을 받았다. 

군 사망사고 피해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지키고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선순직심사를 신속·명확하게 처리하고 심사대상도 확대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2018년 2월 ‘군인사법시행령’ 개정으로 구체적인 사망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른바 ‘진상규명 불능’ 사망자도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과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경우 순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현행 ‘군인사법’에 따라 ‘현역에 복무하는’ 군인이 사망하거나 상이를 입은 경우에만 순직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과제로 남아있다. 

얼마 전 탄약정비병으로 군 복무 중에 악성림프종이 발병한 이가 치료를 받다 사망한 사건을 접했다. 그는 해당 질병으로 사망한 시점이 전역 이후라는 이유로 ‘순직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상자 본인의 사망 원인이 된 부상 또는 질병이 군 직무수행과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나 우연한 사정에 의해 좌우되는 사망 시기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평등원칙에도 어긋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입법·행정상의 전향적 조치가 필요하다.

순직심사 업무의 ‘공정성·전문성 확보’를 위한 꾸준한 개선작업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엄격한 통제와 격리,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특유의 비밀주의문화 등으로 인해 군대 내에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피해자와 가족 등의 참여나 감시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내부의 수사가 이뤄지고 그 증거자료 등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 보니 일반 국민들은 군의 결정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0대 국회 출범 후 ‘전공사상심사위원회’의 운영과 관련하여 전문성과 공정성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학계와 시민단체의 다양한 개선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군에서 발생한 사건·사고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이에 대한 적절한 위로와 보상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군 복무 중 발생한 각종 사망사고 중 사망 원인에 의문이 제기된 사건에 대하여 그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2018년 9월~2021년 9월 운영)가 발족돼 과거 군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에 기인한 사망 원인 불분명자들에 대하여 전향적인 순직 처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 최근 ‘군인연금법’ 개정에 따라 급여 청구의 시효 기산일이 ‘사망일’에서 ‘순직 결정일’로 변경돼 뒤늦게 순직으로 결정되었지만 급여 청구권의 시효가 지나 유족의 권리가 소멸하기도 했던 불합리한 점이 개선되기도 했다. 앞으로도 유족의 고통과 좌절을 방치하지 않고 군과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는 국가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진화 | 예비역 육군 대령>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에 근무하던 지역에서 학교폭력갈등조정단으로 활동할 때 지원요청이 들어왔던 사안이 있었다. 피해진술은 구체적인데 신고된 학생은 그런 일이 없었다며 며칠째 부인하고 있었다. 학부모는 담당교사가 면담과정에서 아이를 협박했다며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고 맞서고 있어서 학폭조치가 내려져도 양쪽 모두 결과를 수용하지 못하고 소송으로 이어지면서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지속적인 손상을 입게 될 상황이었다.

이 손상을 중단하려면 학생들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온전히 성찰하여 자기 책임을 배우고 변화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마음에 이르도록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학생과 만나 첫 질문을 했다. “지금 심정이 어때?” 사실이 아니며 억울하다는 학생의 대답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선생님은 이번 일로 너의 학교 생활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흙구덩이에 넘어졌더라도 잘 털고 일어나서 네가 가려고 했던 길을 계속 잘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일이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사실을 밝히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해서 그 점은 상대가 용서해주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학생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대화의 목적지를 찾았고 이제 그 방향을 잃지 않고 가면 되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선생님하고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찾아볼까?” 그 후 대화과정을 통해 학생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되짚어보면서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하나씩 천천히 펼쳐졌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존귀한 존재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진정한 회복과 성장은 이 선한 의지를 불러오고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능하다. 대화가 끝났을 때 학생은 지금 당장이라도 사과하고 싶다고 하였고 상대 측에서 동의하여 부모들까지 참여한 대화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고된 학생은 자신의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상대가 무엇을 알아주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으로 마음속에 남아있는 감정과 의혹을 충분히 말하고 듣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신고한 학생도 몇가지 미안했던 점을 말하게 되었다. 이후 온전한 학교생활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는지 함께 약속을 정하면서 부모들의 안도와 감사 속에 모임을 마쳤다. 2주 후에 다시 만났을때 두 학생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좋았으며 지금처럼 지낸다면 추가적 약속이나 처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사가 “누가 그랬어?”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제가 안 그랬는데요”라고 답한다. “왜 그랬어?”라고 물으면 “저만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잘못을 가려내어 교실의 정의를 세우려 한 이 질문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진실의 뒤에 숨도록 가르친다. 배움의 기회를 빼앗는 이 슬픈 질문은 오랫동안 교육현장에서 되풀이되어 왔다. 교육이란 사법적 행위가 아니라 배움과 성장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학생들이 넘어지고 실패하는 그곳에서 배움과 성장을 창조할 때 교육은 비로소 자기 전문성을 갖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함께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서로 마주 앉을 수 있는 용기이다. 이 용기가 학교폭력의 고통으로부터 아이들을 회복하고 배움과 성장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다.

<조춘애 | 광명고 교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광고에서 깨작거리는 사람에게 “고기는 씹어야 맛이지~” 하며 잇몸 약을 추천합니다. 그 약 먹고 나서 고기 씹으며 외칩니다. “씹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흔히 쓰는 말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속담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가 줄어든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 고기 먹을 귀한 수가 생긴다면 행여 뺏길세라 허겁지겁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켰겠지요. 그렇게 먹으면 육즙도 그 귀한 고기 맛도 모르는데.

“저기…” “응? 뭐.” “어…” “뭔데?” “그게…” “뭔데 그래.” “아니야.” “어휴, 속 터져! 말할 거면 하고 아님 말든가!” “미안, 나중에.” 이쯤 되면 애써 귀 열어준 사람은 속으로 가슴 쾅쾅, 미치고 팔짝 뜁니다. 입술 옴질거리지 말고 고기 씹듯 팍팍 입 운동 좀 해줬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네요. 할 말이든 못할 말이든, 일단 한마디라도 툭 내뱉어주면 미적지근한 시작이라도 말길은 터줄 텐데 말이죠. 심각한 표정으로 운 띄워놓고 “아냐 됐어” 해버리면 이건 갑갑해서 죽을 맛 아닌가요? 그럴 거면 말부리나 떼지 말 것이지 귓구멍 감질나게 해놓고 목구멍 닫아버리면 어쩌란 건가요. 고민이면 고민, 비밀이면 비밀, 서운하면 서운하다, 싫으면 싫다, 운 하나에 기본 한 소절씩은 읊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꾸 말 흐리면 다른 데서 상상과 오해와 밥맛으로 씹힙니다. 말 꺼내고 도로 삼킬 거면 상대방 복장 터지게 말고 혼자 답답하세요. 말하기 힘들면 종잇장 깔고 낙서하십시오. 썼다 지웠다 붓방아에 손톱 씹고 한숨으로 가위표 북북 긋든 말든, 일단 손톱만큼이라도 말거리 마련하고 운 떼십시오. 말 꺼내려다 목구멍 막히는 건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입니다. 자기가 못 낸 답은 누구한테 말하든, 결론은 어차피 랜덤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맥주를 기어이 구독 리스트에 올리고 말았다. 술 사랑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그 구독 사이트는 술 말고도 다른 것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하얀 고래 한 마리다. 이 업체는 지구온난화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멸종위기에 근접한 벨루가 고래 한 마리를 세계자연기금으로부터 입양했다고 한다. 물론 진짜 입양은 아니다. 멸종위기 근접종 또는 멸종위기종의 개체 유지 및 보호 활동에 후원금을 내는 방식이다. 한주 전쯤 맥주와 함께 벨루가 한 마리가 활짝 웃는 모양의 스티커가 배송돼 왔다. ‘고래야, 미안해!’

아이를 키우면서 겁이 많아졌다. 우리 아이가 살아가야 할 환경이 더 나빠질 일만 남은 것인지 두렵다. 거북이가 빨대의 바다를 헤엄치고,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는 곳. 미세먼지를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하고 마스크가 필수품이 된 곳. 그런 지구에서 아이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게 화가 난다. ‘얘들아, 미안해!’

두렵다면, 미안하다면 바꿔야 한다. 많은 이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지난달 25일 서울 홍대 일대에선 ‘플라스틱 컵 어택’이 열렸다. 온라인 커뮤니티 ‘쓰레기덕질’이 중심이 된 행사로 홍대 인근에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줍고 이를 해당 매장에 돌려주는 환경활동이다. 지난해 전 세계적 운동이 된 ‘플라스틱 어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에선 쇼핑을 하고 나서 과대포장된 비닐, 플라스틱 포장지를 해당 매장 카트에 쌓아두는 방식으로 ‘어택’이 이뤄진다. 같은 날 한강에선 플로깅(plogging) 행사도 개최됐다. 플로깅이란 영어 조깅(Jogging)과 줍다라는 뜻의 스웨덴어 ‘플로카 업(Plokka Upp)’의 합성어로, 달리면서 쓰레기를 줍는 행동을 말한다. ‘나와 지구의 건강을 동시에 지킨다’는 주최 측의 슬로건이 인상적이다. 그보다 앞서 ‘전지적 바다거북이 시점’이라는 행사에선 참가자가 ‘거북이’가 되어 빨대로 가득 찬 바다를 헤엄쳐보는 체험행사도 열렸다. 청년 비영리 단체 ‘통감’은 이 행사를 시작으로 매월 11일엔 빨대를 사용하지 말자는 플라스틱 빨대 퇴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4월 14일(현지시간) 스톡홀름의 한 기차역 플랫폼에서‘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그레타 툰베리 페이스북 캡처

쓰레기 덕후들과 플로거들, 청년 활동가들이 유난스러운 것 같다고, ‘프로불편러’ 아니냐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프로불편러가 되어야만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들 수 있다. 비닐봉지 대신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정육점이나 김밥집에 가보기, 텀블러에 커피 담아보기, 물티슈가 아니라 손수건 사용해보기…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쉽지 않은 항목들이다. 텀블러를 깜빡해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사서 나온 경험, 장바구니를 챙기지 못해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사본 적이 있을 거다.

기후변화 대책을 촉구하는 등교 거부 운동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스웨덴의 16세 그레타 툰베리는 지난해 11월 공개된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78년에 저는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게 될 거예요. 자녀나 손주가 있다면 함께 생일을 보내겠지요. 아마 2018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묻겠지요. 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고요. (중략) 우리가 지금 당장 한 일들 또는 하지 않은 일들은 저와 제 세대가 미래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점점 불편해지려고 한다.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능하면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에코백과 장바구니를 챙기고, 공정무역 상품에 관심이 간다. 빨대를 다회용으로 바꿨고,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친환경적 마인드를 갖고 있거나 환경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업의 제품에 손이 간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행동은 힘이 세다. 툰베리는 말한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해요. 하지만 희망보다 필요한 건 행동입니다. 행동하기 시작하면 희망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병원에 가서 통증을 호소하면 의사가 묻습니다. “통증 강도를 1에서 10까지라고 할 때, 어느 정도 아프세요?” 이른바 ‘통증척도’입니다. 환자의 주관적 느낌이지만, 의사는 이를 통해 진단·치료를 위한 기본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귀가하는 여성을 뒤쫓아가 집에 침입하려 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을 보며 ‘불안척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남성 중심 사회가 체감하지 못하는 듯해서요. 피해자는 처음 출동한 경찰에게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지만, 경찰은 ‘건물주에게 연락해 영상을 확보하라’고 한 뒤 3분 만에 돌아갑니다. 결국 피해자가 직접 영상을 확보해 2차 신고를 하게 되지요. 피의자가 자수하자 경찰은 주거침입 혐의로 체포합니다. 시민의 분노가 커지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작되자 성폭력처벌법 위반(주거침입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합니다. 

‘신림동 강간미수 영상’ 속 30대 남성이 5월31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_ 연합뉴스

경찰만 문제일까요. 관련 기사에는 “(피의자가) 호감이 있어 따라간 것 아니냐” “(피해자의) 새벽 귀가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최악의 공포를 조롱거리로 삼거나, 2차 가해를 합니다.

통증척도가 의료행위에 활용되는 까닭은 환자의 주관적 평가가 엄살이 아니라 실제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겠지요.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강력범죄에서 여성 피해자 비율은 89%에 이릅니다. 2017년 강지현 울산대 교수가 발표한 ‘1인 가구의 범죄 피해에 관한 연구’를 보면, 33세 이하 여성 1인 가구는 남성 1인 가구보다 범죄 피해를 볼 가능성이 2.3배 높습니다. 특히 주거침입 피해를 당할 가능성은 남성의 11.2배에 달합니다. 

불안한 여성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섭니다. 비혼여성 커뮤니티 ‘반달’ 회원 중 1인 가구주들에게 주거안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사올 때 안전비용으로 20만원은 쓴 것 같다. 문이 열리거나 닫힐 때 알려주는 홈 IoT, 창문이 밖에서 힘으로 깨지지 않게 하는 방범필름, 누르면 경찰에 신고가 가는 SOS 버튼등등….”(회사원 ㄱ씨·빌라 안 원룸 거주) “건물 현관은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지만, 실제로는 2층의 음식점을 위해 밤 10시까지 열려 있다. 밤길이 무서워 한 정거장 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한다.”(회사원 ㄴ씨·오피스텔 거주) 이들뿐이 아닙니다. 혼자 사는 20~30대 여성들은 배달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택배는 근처 편의점을 중간다리로 삼아 나중에 가져옵니다. 남자 신발을 현관에 놔두고, 방범용 남성 목소리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습니다. 비밀번호 누른 흔적을 안 남기려고 도어록에 랩을 씌우기도 합니다.

형법상 주거침입죄의 최대 형량은 징역 3년이지만, 실형이 나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최근 서울북부지법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여성에게 상습적으로 협박성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주거침입을 시도한 남성에게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주거침입죄에만 관대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달 31일 부산지법은 여자기숙사에 침입해 여학생을 때리고 성폭행하려 한 남학생을 집행유예로 풀어줬습니다. ‘블랙아웃’ 상태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검찰 구형은 징역 10년이었습니다. 

환자(여성)는 통증을 호소하는데, 의사(형사사법체계)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반달’ 회원 ㄷ씨(파트타이머)는 “경찰·검찰·법원 등의 구성원 성비와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이미 만들어둔 법 규정조차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습니다.

2016년 5월17일 서울지하철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했습니다. 보름 후 박근혜 정부는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여성 대상 강력범죄 종합대책’을 확정했습니다. CCTV 확충, 신축 건물의 남·여 화장실 분리, 여성 상대 범죄자에 대한 법정 최고형 구형 등이 포함됐습니다. 젠더폭력의 배경인 성차별적 사회구조·인식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은 없었습니다. ‘강남역 사건’ 당시 근본 해법을 찾지 못했기에 ‘신림동 사건’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이제는 법정 최고형 구형 수준의 대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식의 전환, 파격적 발상이 절실합니다. 과거 청와대에는 경찰 수사와 첩보 수집을 관리하던 치안비서관(사회안전비서관)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청와대’는 정보경찰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 이를 폐지했습니다. 저는 치안비서관직의 부활을 희망합니다. 선거개입하는 치안비서관 말고, 여성을 비롯한 약자·소수자의 안전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여성치안비서관’ 신설을 바랍니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라면 남성에겐 더 안전한 사회가 될 겁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일월화수목금토. 일주일을 한 묶음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세속도시의 일상이다. 요일마다 얼굴은 다 달라진다. 웃음과 울음이 번갈아 찾아오기도 하지만 표정은 돌처럼 딱딱해진 지 오래다. 

주중에도 고개가 있는가. 수요일을 기점으로 어디론가 내려가는 느낌이다. 금요일. 얼굴이 마구 뜯겨나가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귀가하다가 흑석동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광고판을 보았다.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영월 창령사터 오백 나한(사진).’ 큼지막한 돌덩이의 울먹이려는 표정이 목석같던 나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공간에서 단연 돋보였기에 휴대폰에 찰칵, 담았다. 그리고 몇 바퀴가 굴렀다.  

지난주 경향신문의 칼럼 ‘래여애반다라’(조운찬)를 읽은 아침, 뜻밖에도 춘천 출신의 아내가 창령사터 나한 이야기를 꺼냈다.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정밀한 고독과 숨막히는 고요가 밀물처럼 들어찼다. “마치 허공을 나는 새가 걸림 없이 멀리 가는 것처럼”(법구경) 컴컴한 공중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있어 이름을 문의했지만 아는 이 아무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이들의 불성을 깨우쳐주시는 나한은 좌대에 앉아서 나와 어깨를 견주었다. 시골 뒷산에서 흔히 보았던 질감의 돌이다. 전시장의 나한은 보는 이들과 분리되지 않았다. 싸늘한 유리로 격리되지도 않았다. 나는 자유로이 나한 사이에 섞인다. 어쩌면 이 순간은 나도 이 공간에 전시된 작품이다. 나한들도 나를 구경하고 있는 중이겠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얼굴을 가져가는 듯했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나오는 길. “단단한 돌덩이 오래됐단 말 말게. 무생(無生)에 견주어 보면 찰나간인 걸.”(청허 휴정) 박물관에 입장할 때 왼편으로 본 나무는 오른편에서 여전히 피어 있다. 요즘은 산에 가도 봄과 가을의 사이에서 꽃이 잠깐 주춤하는 시기. 그 허전한 간극을 감당하듯 홀로 핀 산딸나무다. 관상수로 심었지만 용산을 후원하는 저 남산의 기운이 흠뻑 배었다. 다음 산에서 만나면 보리수 아래 정등각을 깨친 부처처럼 창령사터 오백 나한을 떠올려야지! 산딸나무, 층층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