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 어느 집에서 아이들과 어른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조금 식구가 많아 보이는 여느 가정의 모습과 같다. 다만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 가지가 다르다. 아이들이 어른을 이모 혹은 삼촌이라 부른다. 사실 친이모, 친삼촌은 아니다. 여기는 아동공동생활가정, 보통 그룹홈으로 불리는 집이다. 

어느 사회건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날 수 있고, 부모의 학대로부터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도 있다. 이렇게 부모의 사망이나 가출, 혹은 학대와 방임으로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사회가 돌봐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는 보호 필요 아동들을 주로 대형 양육시설에 보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런데 다르게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아픔과 상처를 지닌 아이들이기에 더욱 ‘시설’ 대신 ‘가정’에서 키워야 한다며 스스로 부모 역할을 자임한 사람들이다. 가정 돌봄 영역에서 입양이나 위탁이 기존 가정에 아이들이 들어가는 거라면, 그룹홈은 아이 5~7명과 부모 역할을 하는 사회복지사들이 함께 사는 새로운 가정이다. 특별한 문패도 없는 우리 동네 보통 집이다. 

처음에 그룹홈은 정부 정책 밖에 있었다. 이모, 삼촌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주변의 후원으로 전셋집을 얻어 아이들을 돌보았다. 사실상 교대로 숙식까지 하는 전일제 보육사 역할을 하건만 월급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식당 식판 대신 가정 식탁을 주고 싶었다”는 어느 이모의 말처럼, 오로지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운영되는 집이다. 

뒤늦게 정부가 이들을 주목했다. 1997년부터 시범사업으로 그룹홈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IMF 외환위기를 맞아 가정해체가 늘어나자 2004년에는 아동복지법에 ‘공동생활가정’을 추가해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이후 그룹홈은 꾸준히 늘어나 2017년 기준으로 533개 집에서 2811명이 살고 있다. 아이들은 중간에 친부모와 다시 결합해서 원가정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18세 때까지 살다가 그룹홈을 나가 자립한다.

최근 복지국가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돌봄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커뮤니티케어, 마을복지 생태계 등 자신이 사는 생활 기반이 강조된다. 불가피하게 시설에서 거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일상 공간에서 돌봄이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깨달음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예전에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착한 사업 정도로 여겨졌던 그룹홈이 일찍부터 돌봄의 핵심 가치를 구현하는 선구적인 복지였던 셈이다.

근래 그룹홈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동 학대와 방임으로 돌봐야 하는 아이들은 계속 늘어나고, 일상생활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그룹홈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건만 정작 부모 역할을 대신할 이모와 삼촌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회복지사 신분인 이들에 대한 처우가 너무 낮다. 그룹홈에서 일하기를 차마 제안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룹홈은 중앙정부 소관의 공동생활가정으로 시설장 1명과 보육사 2명이 일한다. 올해 이들이 받는 월급 총액은 185만원이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정한 사회복지시설 인건비 가이드라인의 80% 수준이다. 추가수당도 없이 잠자리에 들기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호봉제도 없다. 15년 경력의 시설장이나 새내기 보육사나 월급이 같다.

올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가 공동생활가정 종사자에게 일반 사회복지사와 다른 임금을 적용하는 건 ‘차별행위’라며 시정을 권고했다. 보건복지부가 이달에 답변서를 낸다지만 이모와 삼촌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이다.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실행하지 않는 정부에 익숙해진 탓이다. 특히 기획재정부라는 높은 장벽을 알기 때문이다. 

현재 그룹홈 지원은 복권기금이 주관하는 ‘공익사업’ 중 하나이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편성하고 국회에선 기획재정위원회가 의결한다. 박근혜 정부가 부족한 복지재원을 확보한다며 ‘입양아동 가족지원’ ‘아동복지시설 기능보강’ 사업과 함께 그룹홈 지원 사업을 기획재정부로 전출시킨 결과이다. 

지난달 정부는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고 ‘아동에 대한 국가 책임’을 선언했다. 장밋빛 청사진을 보며 이모, 삼촌들은 말한다. 기획재정부로 넘어간 아동복지의 필수사업들을 보건복지부로 전환하지 않으면서, 또한 오랫동안 방치한 차별을 해결하지 않으면서 어찌 국가 책임을 이야기하느냐, 복권이 잘 팔리기만을 기대하란 말인가?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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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전국 어디든 동네마다 서점 하나쯤은 있던 시절. 그때 지방에서 서점을 했다는 이의 추억은 흥미진진하다. 인기작가의 책이 나오면 서울에서 책을 실은 트럭이 밤새 달려와 미리 고지한 학교 운동장에서 배급했다고. 새벽부터 운동장에서 줄 서서 기다린 서점 주인들은 한 권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아우성쳤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시절이 올 줄 몰랐다고. 그는 방구석에 앉아서 책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클릭만 하면 이튿날 대문 앞까지 종이책을 배달해 주고,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만 연결되면 전자 북을 사서 보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평생 책 냄새를 맡으며 작가 이름 하나하나를 익히고, 손님들이 들뜬 얼굴로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본 그는 차마 세상이 좋아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예언했다. 곧 서점은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그곳에는 서점이 멀쩡히 살아남아 있었다. 번화가 한복판에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책 냄새를 품은 채 건재했다. 대개 요즘 서점은 학습지를 꽂아놓은 책장이 절반 넘게 차지하지만, 그 서점의 중심부에는 인문학과 철학과 문학이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가판대에는 지역 작가들의 책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지역 풍습과 문화를 알리는 책부터 수필집, 고등학생 문학 동아리 학생들이 묶은 문집까지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학생들 문집은 다른 지역에서는 인터넷으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몇 년 전에 폭우 때문에 서점이 물바다였어요. 그때 시민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 서점을 살렸어요.”

서점 수필 동아리에서 글공부한다는 이는 서점이 이 지역의 자부심이라고 했다. 서점에서는 일 년 내내 문화 행사가 열리고, 도서관과 연계해 도서 대출도 가능하다고 했다. 서점이 저절로 자부심이 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서점은 썰렁했다. 그곳에서 옛 서점 주인이었던 이의 말이 생각났다. 책을 사러 온 이가 과연 무슨 책을 고를까 보는 것도, 오랫동안 눈인사만 하고 지낸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참 좋았다는. 그러고 보면 서점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 게 아니라, 책이 사람을 잇던 시절이 끝나는 게 못내 헛헛한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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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완벽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흠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람에게 키스하려던 순간 깨달았다. 완벽한 그 사람이 연못 표면에 반사된 자신이었음을. 그의 이름은 나르키소스다. 한 시인이 우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시인은 돌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심정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그는 시인 윤동주다. 어떤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22살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63살이 될 때까지 그렸다. 그는 자화상으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남긴 자화상은 무려 100점이 넘는다. 그 사람은 렘브란트다. 

퓨 리서치가 2019년 세계 27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95%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기능 중 사랑받기로는 셀피(selfie), 즉 셀카 찍기가 으뜸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셀피를 찍는 데 1주일에 평균 1시간을 소비한다고 한다. 이 추세라면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한 명당 2만5700개의 셀피를 찍을 거라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셀피를 찍기 위해선 렘브란트의 예술적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동화 &lt;백설공주&gt;에 등장하는 왕비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거울에게 묻고 또 묻는다. 셀피를 찍는 사람은 거울에게 묻지 않고 얼짱 각도를 연구해 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찍고 또 찍다보면 언젠가는 납득 가능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삐죽 입을 내밀어도 보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어도 보고, 찍는 각도를 바꾸어도 보고 자아를 연출할 수 있는 온갖 테크닉의 도움으로 납득할 만한 셀피를 결국은 얻고 만다. 만약 자아연출의 각종 테크닉으로도 원하는 셀피를 얻지 못하면 셀피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다 잡티와 주름살을 발견해서 우울한 사람에게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은 인스턴트 항우울제이다.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성형수술 없이도 성형수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렘브란트가 그리고 또 그린 자화상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찍고 또 찍어 만들어진 디지털 자화상 셀피에서 시간은 실종된다. 아니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얼굴엔 잡티가 없다. 주름살도 없다. 셀피가 된 각자의 얼굴은 초현실이다. 스마트폰의 카메라 렌즈는 주름살 다리미나 마찬가지다. 어느새 쫙 펴진 내 얼굴, 통통해진 내 얼굴, 마음에 드는 혈색을 지닌 내 얼굴, 눈을 더 키운 내 얼굴, 코를 좀 높게 한 내 얼굴 무엇이든 가능하다. <백설공주>의 왕비는 거울에게 말을 건네지만, 애플리케이션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넌 어떤 얼굴을 원해? 신선한 얼굴? 매혹적인 얼굴? 애기 피부 같은 얼굴? 갸름한 얼굴? 고상한 얼굴? 말만 해. 내가 다 만들어줄게. 원하면 컬러 렌즈를 낀 얼굴도 만들어줄 수 있어. 팔자주름을 싫어하는구나? 내가 없애줄게. 애교살을 갖고 싶다고? 문제없어. 내가 만들어줄게.”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관찰했다. 윤동주는 내면에 묻어 있는 티끌을 찾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봤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에 세월을 기록했다. 셀피를 찍는 사람은 나르키소스도 윤동주도 렘브란트도 아니다. 셀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스마트폰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은 봉인된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다. 셀피는 전시되기 위해 만들어진 자아이자, SNS의 ‘좋아요’를 수집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진이란 자고로 기념사진이며, 추억의 도구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셀피에서 윤동주와 렘브란트의 고뇌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투덜댈 수 있다. 셀피에 빠진 사람을 디지털 나르키소스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사실 셀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털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셀피는 사진처럼 보여도 사진이 아니다. 셀피는 예외적인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수단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하고 자란 사람에게 셀피는 일상의 픽 스피치(Pic Speech)다. 

그들은 셀피를 때로는 감탄사로, 때로는 의미 없는 허사(虛詞)로 사용한다. 셀피는 심심하다는 자기고백이기도 하고, 나와 함께 놀아달라는 칭얼거림이기도 하고, 새로 산 이 옷이 어떠냐는 질문이기도 하고, 오늘 좋은 곳에 왔다는 자랑의 기호이기도 하다. SNS에 전시된 셀피는 나의 안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인사말이자 내가 세계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SOS 신호이기도 하다. 셀피는 어떤 때는 독백이고 어떤 때는 방백이고 대화이다. 셀피는 사람의 얼굴로 메시지를 전하는 21세기의 디지털 상형문자이다. 셀피를 언어로 이해하는 사람은 열심히 셀피를 찍고, 셀피를 사진이라 이해하는 사람은 셀피 찍는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셀피의 시대,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셀피를 언어로 이해하는 사람과 셀피를 쓸모없는 사진으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노명우 |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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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셀피

세계보건기구(WHO)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72회 총회에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선언했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은 2022년부터 WHO 회원국에 도입된다. 보건복지부 역시 WHO의 결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문화체육관광부와 게임업계에서는 새로운 ICD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게임을 질병예방 차원에서 접근하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게임산업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체부와 복지부의 입장이 맞서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부처 간 이견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산업논리든 보건논리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 실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청소년 게임중독은 사춘기 시절 치러야 하는 ‘홍역’을 넘어 사회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심각한 문제다. 단적으로 청소년 게임중독은 대부분 도박으로 발전한다. 게임중독과 관련된 학교폭력을 조사하다보면 그 안에 고리사채 협박, 절도 등 범죄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식 보고자료보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청소년 도박 문제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학부모 폴리스 회원이 “경위님, 우리 아이들 어떡해요. 게임으로 인한 도박이 얼마나 심각한 줄 몰라요”라며 하소연을 해왔다. 살펴보니 처음에는 사다리 게임 등 소액으로 유인한 후 점차 거액의 빚을 지게 만드는 불법게임 도박이었다.

출처:경향신문DB

최근에는 동네 선후배 사이인 청소년들이 페이스북에 “급전, 문의 주세요”라는 광고를 내고 돈이 필요한 또래 청소년들을 유인한 사건이 있었다. 30만원, 50만원을 대출해주고 7일 후에 원금을 포함해 55만원과 95만원을 갚는 조건이었다. 이들은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피해 다니는 청소년들을 찾아내 공동으로 감금하고 상해를 가하기도 했다. 무등록대부업을 하면서 또래 친구들을 상대로 협박하고 상해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들의 범죄는 청소년들이 벌인 행동으로 보기엔 성인 사회의 그늘진 모습을 그대로 담은 판박이 범죄였다.

게임산업의 발전도 좋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것은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좀 더 세심한 면까지 관찰하고 고심하는 일이다. 게임산업의 콘텐츠 개발 이전에 건전한 게임문화를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도록 불법게임이 기생할 수 없는 이중 삼중의 여과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도박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이나 가족을 치유할 수 있는 적절한 상담과 치료여건 마련도 중요하다. 그것이 ICD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질병을 예방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김미희 | 안산상록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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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는 황달은 간염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담즙 색소의 하나인 빌리루빈이 간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리루빈이 과다하게 쌓이면 청력 장애나 뇌성마비 등의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루빈을 완전히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적당량의 빌리루빈은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암과 치매 등 치명적인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이 유해산소 역시 체내의 세균 대사를 위해 소량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비밀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몸뿐만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와 의미를 지닌다. 미생물부터 포유류까지 수많은 먹이사슬이 그물처럼 얽힌 구조에서 어느 한 종의 멸절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곤 한다. 인간의 눈에 약육강식은 잔인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생태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

관건은 균형이다.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적정량을 유지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문제는 일방의 입장을 기준으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 혹은 없애야 할 것을 함부로 구분하고 강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仁)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서(恕)’였다. ‘서’는 상대 역시 나와 다름없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넘어 적극적인 공감과 존중의 자세다. 그럴 때 모든 존재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 자신에게 마땅한 자리를 얻어 공생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다.

공감과 상생은커녕 상대의 존재 자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극혐’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연과 역사를 지니지 않은 존재는 없다. 물론 생태계와 달라서 인간사에는 선악과 시비의 판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인정도 없이,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존재로 상대를 규정한 위에서 과연 온당한 판단이 가능할까? 최상의 균형을 이루는 중용에는 고정불변의 답이 없다. 공감과 존중의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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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이라고는 일주일에 하루 영어학원만 다니던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마저도 그만두기로 했다. 결심을 한 날 바로 수강 철회 신청을 하고 학원 교사에게 인사를 전하고 마지막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아이의 등·하원 시 차량 탑승을 도왔던 보조 선생님께 연락을 했다. 혹여 아이가 학원에 등록하지 않은 사실을 전달받지 못해 헛걸음을 하실까봐 바뀐 사정을 알려드리고 그동안 감사했노라 문자를 드렸는데,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공부 열심히 하는 예쁜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당신이 더 행복했다며, 잊지 않고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몇 문장에 담긴 진심이 어찌나 따뜻하고 뭉클하던지 하마터면 차량선생님 때문에 재등록하러 갈 뻔했다. 

오래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네 살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두던 마지막 날, 쇼핑봉투 가득 담긴 자잘한 짐을 대신 들고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온 건, 담임교사도 보조교사도 아닌 1년 동안 아이를 태우고 다녔던 유치원 버스 기사님이었다. 과장되게 웃고 친절하던 유치원 관계자들은 내가 재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비리유치원의 전형 같은 곳이라 이미 나는 아무 미련도 없고, 그래서 떠나기로 했던 거였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혼자 쇼핑백 여러 개의 짐을 들려 보내며 그런 내색을 보인다는 게 못마땅했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얼른 아이를 챙겨준 기사님 덕분에 그래도 그 시절의 어느 한 기억과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이별할 수 있었다.   

그보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출산을 앞두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 회사에서 임신한 직장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모멸은 거의 다 겪었다. 내가 퇴사를 결정한 다음에야 차례로 찾아와 사과를 하는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직장인으로서 마지막 내 예의와 매너를 갖추기 위해 온갖 의례적인 인사에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나는 내 책상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한 장 때문에 몰래 울었다. 아침마다 음료를 배달해주던 아주머니의 편지였다. 날마다 종류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는데, 임신부에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특정 과일 음료만 넣지 않는 배려를 해주던 분이었다. 예쁜 아기 건강하게 낳으라는 축복이 담긴 쪽지. 짐작도 못했던 편지로 인해 나는 그 암울하고 이기적인 공간에 따뜻한 편지 한 장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런 비슷한 기억의 가장 먼 끝에는 지금은 사라진 버스 승차보조원도 있다. 오래전 시내버스에 안내양이라는 이름의 승차보조원이 있던 시절, 멀미하는 열 살 남짓 어린 나를 안내양 전용의 접이의자에 앉혀놓고 하얀 손수건으로 부채를 쳐주던 그이의 이름은 기억 못하고, 그 먼 길을 가는 버스에 왜 나만 혼자 남아 있게 됐는지 그 이유만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지만, 그건 몹시 서글프고 무서운 이유였지만 안내양 언니의 하얗고 차분하고 다정한 미소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졸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은 중앙으로 향하고, 욕망은 상단에서 춤을 추는데, 그러다 떨어지면 위로는 늘 내가 돌아보지 않던 자리에서 찾아온다. 일상에서 나랑 무관하다고 지나쳤던 사람들에게,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 내내 함께였다고 믿은 누구도 건네지 않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사를 받게 될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그들을 보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부린 허세를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도 옛날에는…”으로 시작하는 가난 인증 감상을 늘어놓는 것이 요즘 SNS의 유행이라는 농담을 듣고 웃었다. 영화를 못 보아서 그 속에 가난이 어떤 가난인지는 모르겠는데, 소설의 서사로, 산문의 주제로 줄곧 가난을 팔아먹은지라 마음 한편이 뜨끔하다. 동시에 ‘옛날에는…’이라고 다 지난 이야기처럼 말하는 나는, 그래서 지금 어디에 어떻게 서 있나 새삼 궁금해지는 것이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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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검찰은 직접수사권과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막강한 권한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다. 다른 권한은 행사할 때만 그 위력을 드러낸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검찰이 4일 발표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수사 결과는 이를 유감없이 입증했다. 검찰은 이미 구속된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씨만 재판에 넘겼을 뿐, 봐주기 수사·외압·유착 등의 의혹을 받고 있는 다른 전·현직 검사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줬다. 과거 부실수사를 반성하고 바로잡으라 했더니 또 다른 부실수사로 덮은 꼴이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이하 수사단)은 김 전 차관을 윤씨와 다른 사업가로부터 1억7000만원 상당의 뇌물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그러나 사건의 본류인 김 전 차관의 성범죄 의혹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에게 성접대를 제공한 윤씨를 여성 이모씨에 대한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하면서도, 함께 성관계를 맺은 김 전 차관은 공범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해 여성 이씨가 김 전 차관에게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성관계’임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피해 여성 진술이 사실이라 해도, 김 전 차관과 윤씨의 유착관계에 비춰볼 때 여성이 강요받는다는 정황을 김 전 차관이 몰랐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5일 (출처:경향신문DB)

수사단은 2013~2014년 진행된 검경 수사가 부실했는지, 그 과정에 ‘박근혜 청와대’의 외압이 작용했는지도 규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과거사위가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를 권고한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이중희 전 민정비서관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최근 과거사위가 수사를 촉구한 한상대 전 검찰총장 등 ‘윤중천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할 단서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 수사가 부실하지도, 외압이 작용하지도 않았다면 왜 6년이 지나고도 재판에 넘길 수 있는 김 전 차관을 증거가 흘러넘쳤을 당시에는 기소하지 못했는가. 수사단은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할 텐가.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핵심 의혹 규명 없이 또다시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나고 말았다. 모욕당하고 착취당한 여성들에게는 ‘지연된 정의’마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관과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에 대해 기소권을 갖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필요성을 검찰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과거 잘못을 교정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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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가 4일 한국형 실업부조의 세부내용을 담은 ‘국민취업지원제도’를 내년 7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고용안전망 밖에 있는 저소득층·폐업 영세자영업자·청년 등 취업취약계층 누구나 취업지원서비스와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목표다. 정부는 98곳인 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70곳 더 늘리기로 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근로빈곤층이 이 제도에 참여하면 취업률은 17%포인트 오르고, 빈곤층은 36만명이 줄며, 빈부격차가 개선될 것으로 예측했다. 고용안전망이 더욱 두꺼워지고 일자리도 늘어난다니 주목할 일이다. 

고용안전망 제도의 사각 해소는 노동계는 물론 국민 모두가 바랐던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전체 취업자 2700만명 중 1200만명이 고용보험제도 밖에 있다. 정부의 생계급여 대상이 되는 기초생활수급자격도 중위소득 30%(4인 가구 기준 138만여원) 이하로 엄격하다. 이 때문에 소득이 많지 않으면서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가 막막했다. 정부가 내놓은 국민취업지원제도 대상은 이들 중 구직의사가 있는 저소득층 223만명과 새롭게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청년 74만명 등 297만명이다. 정부는 내년 35만명, 2021년 50만명, 2022년 60만명에게 취업 지원과 구직촉진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다. 제도가 안착되면 고용안전망은 ‘생계급여(중위소득 30% 이하)-국민취업지원제도(중위소득 30~50%)-실업급여(고용보험가입자)’ 등으로 튼실해질 것으로 정부는 내다봤다. ‘한국형 고용안전망’인 셈이다.

이 제도는 이제 첫발을 뗐다. 사회 일각에서 ‘세금 퍼주기’라고 비난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국민취업지원제도의 지원 수준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낮다. 월 지원금 50만원에 따른 임금 대체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수준이지만 지급기간 6개월은 OECD 주요 국가 중 가장 짧다. 영국·독일·호주·핀란드 등은 기간 제한이 없다. 정부는 지원 대상을 중위소득 60% 이하까지 확대한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진국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국민취업지원제도는 헐거운 고용안전망을 촘촘하게 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첫걸음이다. 정부와 국회는 차질 없는 시행은 물론 사각의 완전한 해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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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4일 국무회의에서 ‘고등교육법(강사법) 시행령’을 심의·의결했다. 이와 함께 대학 강사제도 운영 지침을 담은 매뉴얼을 내놓았다. 이로써 2011년 첫 개정 이후 4차례나 시행이 유예됐던 강사법은 8년 만에 본격 시행되게 됐다. 강사제도 운영매뉴얼은 강사법 시행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마련돼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부·대학·강사 등 3자 대표가 합의를 통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새 강사제도가 역점을 둔 분야는 강사의 고용안정이다. 교육부는 정기적으로 강사 고용현황을 조사해 강사 자리를 줄이는 대학에는 재정상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 재정지원 카드를 통해 대학의 강사 해고를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또 겸임·초빙교원의 고용변동을 집중 관리해 대학 측의 자의적인 임용을 감시키로 했다. 이와 함께 강의에서 배제된 강사에게 평생학습 프로그램에서 강의 기회를 우선 제공하고, 시간강사 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자들이 단절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마련키로 했다. 

정부의 강사제도 운영방안은 강사법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강사해고법’이라며 강사법 개정을 반대해온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미흡하지만 환영한다”고 논평할 정도다. 특히 강사의 고용안정과 함께 박사학위 취득자 등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인문사회학술 연구교수’ 지원사업 계획을 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강사의 건강보험 가입과 퇴직금 지급 보장 방안이 빠지고, 방학 중 임금에 대한 예산 지원이 일부에 그치는 등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오는 8월이면 개정된 강사법이 본격 시행된다. 고려대 등에서는 이미 강사 공채에 들어갔다. 새 강사제도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대학 현장의 협조와 노력이 절대적이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올 들어 벌써 1만개의 강의 자리가 줄었다고 한다. 강사법이 시행되면 더 늘어날 것이다. 등록금 동결, 학령 인구 감소로 대학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대학이 꼼수로 강사 수를 줄여서는 안된다. 대학 재정에서 강사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정부 역시 강사 운용을 대학 자체에 맡겨서는 안된다. 강사제도가 안착하도록 다각적이고 지속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강사제도 개선에는 강사의 신분 안정뿐 아니라 대학교육을 정상화하자는 뜻도 담겨 있다. 정부 역시 필요한 분야에는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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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라면 지켜야 할 핵심 가치가 있다. 자유, 시장경제, 법질서 등이다. 경합할 수 없는 원칙으로는 국익과 국가안보, 한·미동맹이 꼽힌다. 그런데 강효상 의원의 대통령 통화내용 무단공개 사건은 자유한국당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당은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나. 

강 의원이 공개한 통화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방문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3급 비밀이다. 논란의 여지 없이 국가기밀을 누설한 형사 사건(형법 제113조 외교상기밀누설 조항 위반)이다. 그러니 정치공방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릴 문제다. 그러나 한국당은 굴욕외교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국민에게 알려야 하며, 강 의원은 그것을 위해 정상적인 의정활동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에게 한 번 와달라, 방한을 구걸한 굴욕외교 아니었나”(나경원 원내대표), “정부의 외교 무능과 국민의 알권리를 숨기기 급급한 행태를 지적하기 위해 하신 일”(황교안 대표). 언어 왜곡과 핵심 돌리기는 말 그대로 ‘한국당스럽다.’

의혹을 제기하려면 합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일국의 정상이 외국의 정상에게 자국 방문을 요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외교 행위다. 더구나 두 정상의 통화 어디에도 굴욕으로 해석할 만한 구석이 없다. 트럼프의 한국 방문에 원칙 합의하고 시기와 일정을 논의한 것이 전부다. 동맹 간에도 동맹 파트너끼리의 게임이 있는 법이다. 이 과정에서 국익을 실현하기 위한 권유와 설득, 요청, 항의는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저자세라는 문제제기는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당은 인정하지 않는다. 보수 내부에서 쏟아지는 비판도 신경쓰지 않는다. “한국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국가로 만든 행위”(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국익을 해치는 무책임한 행위”(윤상현 한국당 의원). 성찰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발된) 강 의원을 (검찰에) 내주지 않겠다”며 방탄국회까지 예고했다.

사실 굴욕외교, 구걸외교라면 한국당이 원조라는 말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측에서는 사과가 아니지만 남측에서는 사과로 해석되는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북한이 발표한 적도 있다. 이 말대로라면 남북정상회담 욕심에 ‘천안함’은 물론 국가 자존심까지 판, 구걸외교의 전형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치다가 벙커에서 넘어지는 민망한 모습이 공개되자 지도자의 참모습이라며 높이 평가한 것은 또 어떤가. 걸핏하면 문 대통령이 트럼프와 통화도, 만나지도 잘 못한다면서 코리아 패싱, 한·미동맹 균열이라고 비판하던 한국당이 정상통화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전화를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는 식이니 어쩌란 말인가.

강 의원의 기밀 누설이 국민 알권리란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국가안보·외교관계 사안으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를 유예’(정보공개법 9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황 대표의 변신은 놀랍다. 불과 2년 전 ‘세월호 7시간’ 기록을 30년간 공개되지 않도록 지정해 국민 알권리를 봉인한 당사자가 이제 와서 알권리를 기밀보다 더 중시하고 있으니 믿기 어렵다.

국가기밀제도의 피 맺힌 역사를 안다면 한국당이 이럴 수는 없다.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이 비판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8군사령부 소재지는 용산’이라고 말했다가 간첩죄로 처벌받고, 면장 이름과 주소를 알려줬다가 감옥 간 시민이 부지기수다. 숱한 고통과 혼란 끝에야 국가기밀은 “누설되면 국가 안전에 위험성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기밀로 보호할 실질적 가치를 갖춘 것”으로 엄격히 제한됐다. 독재 정권의 맥을 이어받은 한국당이 이제는 국가기밀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으니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다. 한국당은 이 제도에 대해 무겁게 성찰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당은 정당이라기보다 이익공동체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했다. 필요하다면 보수의 핵심가치를 서슴없이 내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국가기밀제도 무력화를 통해 법질서를 외면했고, 안보나 국익은 아예 당리당략의 하위가치로 전락시켰다. 심지어는 한·미동맹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수의 오랜 경구인 “당리당략이 아니라 국익에 봉사하라”(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니스벳)나 “보수의 가치는 법질서”(미국 정치이론가 러셀 커크의 ‘보수주의 10계명’)는 한국의 제1야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당의 자세는 진짜 보수와 가짜 보수를 판별하는 바로미터다. 그리고 한국당은 이미 선택한 것 같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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