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얼마나 신기했으면 원거리(tele)에서 들리는 소리(phone)라는 뜻에서 텔레폰(telephone)이라 불렀겠는가. 1876년 알렉산더 벨이 세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전화는 세계인의 일상을 바꾸었고 최근 40년 동안 놀랍도록 변화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무선전화의 등장이 있다. 

북유럽에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까지 유선전화를 설치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일찍부터 무선전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무선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카폰에 이용되었는데 벽돌 모양처럼 큰 형태여서 불편했지만, 부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993년 IBM에서 최초의 스마트폰 ‘사이먼(Simon)’을 선보이면서 무선전화에 혁신이 일어났다. 무선 휴대전화는 다목적 컴퓨터 장치를 탑재해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으로 진화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초기 스마트폰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방된 기술 경쟁과 융·복합을 통해 최첨단 기술제품으로 등장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내부 자원만으로 혁신을 지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경제 환경의 변화는 빠르고 광범위하다. 기업도 개방을 통한 혁신을 하지 않고서는 이 파고에 좌초하기 십상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1990년대까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품화하지 못한 채 사장시켰던 실패 경험을 거울 삼아 지금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개방형 혁신을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장착하고 있다. 만약 개방형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전화기가 유선에서 무선으로, 나아가 스마트폰으로 발전하는 혁신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캘리포니아(버클리)대 체스브로 교수는 저서 <개방형 혁신>(2003년)에서 폐쇄적 생산구조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방형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기업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아이디어와 연구·개발 자원을 함께 활용해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혁신 이론이다. 이 책에서 그는 IBM이 과거 ‘폐쇄형 혁신(Closed Innovation)’을 추구했으나,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 내부와 외부의 집단지성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혁신을 만들었다며 그 예로 들고 있다.

종전에는 기업들이 기업 내부에 최고의 인재를 모아 연구·개발과 판로까지 결정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제품화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경쟁의 심화, 이노베이션의 불확실성, 연구·개발비의 급증, 단기적 성과 요구 등으로 인해 이러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개방형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체스브로 교수는 외부의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 때 지속적인 경쟁력 유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방형 혁신>에 이어 <개방형 비즈니스 모델>(2006년), <개방형 서비스 혁신>(2011년) 등 일련의 저서를 통해 제조업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도 개방형 혁신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최근까지도 일부 대기업은 혁신이나 품질 개선을 위한 노력보다는 가격을 낮추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에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기업생태계가 수직적인 분업 관계에 머물게 되었다. 이처럼 수직관계가 형성되면서 협력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지시나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전속거래라는 폐쇄적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혁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 중소기업에 고통을 전담시키는 이른바 수직적인 분업 관계에 의한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최근 개방형 혁신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으로도 확산되면서 혁신적인 프로세스로 변화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혁신은 기업과 다른 기업 간, 그리고 기업과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와의 교감을 통해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일부 대기업은 아직도 개방형 혁신보다는 수직적 생산구조의 낡은 틀 속에 갇혀 혁신을 이루기 힘든 구조를 고집하고 있다. 국내 일부 주력산업이 급속하게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도 개방형 혁신에 머뭇거리는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구조에서 우리는 지금 획기적인 발명은 고사하고 작은 혁신도 어려워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우리 경제 성장모델의 한 축으로 혁신성장을 강조한다. 혁신은 원래 기업 경영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경영환경이 만드는 기회와 위협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지속 성장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을 채택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 경쟁이 날로 심화하면서 혁신의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기업 단위의 혁신이 국가 경제 발전으로도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바로 여기에 혁신성장의 필요성과 성장이론의 골자가 담겨 있다.

2010년 OECD에서 ‘혁신성장을 위한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혁신적 경제문화 조성’ ‘경쟁적이고 역동적인 기업활동 장려’ ‘공공부문의 혁신 추진’ ‘사회적 문제 해결에 혁신 적용’ 등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처럼 경제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혁신성장을 이루려면 근본적으로 기업생태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먼저, 수평적으로는 산업영역에서 산업 간 칸막이가 제거될 수 있도록 규제 합리화가 이뤄져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을 융합하고 활용하는 데 불필요한 규제(red tape)가 없도록 세심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폐쇄적 전속거래에서 탈피해 혁신이 일어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개방형 혁신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선 폐쇄적 의사결정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기업, 기술 개발자, 소비자들이 상호 소통하는 가운데 혁신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정교한 혁신 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혁신은 외부의 전문 지식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내부의 생산 능력과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산업 융·복합화와 수직적 개방형 혁신은 결국 동반성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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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행정 면책제도를 종합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인사혁신처가 ‘적극행정운영규정’ 제정안(대통령령)을 지난달 21일부터 입법예고하고 있다. 적극행정 면책제도는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절차 위반과 예산 낭비 등을 한 경우 징계책임을 감면하는 제도다. 감사원이 감사원 훈령으로 운영규정을 마련하여 2009년 1월부터 시행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하지만 10년간의 제도 운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정의 소극적 행태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국민 일반은 적극행정으로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개혁마냥 도돌이표 국정과제의 하나인 셈이다.

사후면책에 초점을 맞추는 이상, 그 성과는 국소적일 수밖에 없다. 행정이 터 잡은 현행 법제의 현주소를 도외시하고, 공무원의 개인적 행태의 차원에서만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국민의 불만 대상이 되는 소극행정 및 방어행정을 낳는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적극행정 역시 법치국가 원리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적극행정이라 하여 초법적 행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고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모델에 멈춘 현행 행정법제가 소극행정의 근원이다. 국민의 사적 영역과 관련이 있는 인·허가와 같은 대민 법제는 일본식 관헌국가적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가령 독일 약사법은 의약품 제조 허가 신청에 대해 행정청은 일정한 사유에 해당할 경우에만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반면, 우리 약사법은 의약품 제조자가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할 뿐이어서, 허가 여부가 행정청의 의무인지 재량인지 불분명하다. 국민은 인·허가와 같은 행정처분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관헌국가적 전통에서 국민을 공권력 행사의 객체로 보는 그릇된 사고를 제도적으로 타파하지 않고선 적극행정은 구두선에 그칠 수 있다. 

이런 대민 행정법제의 구조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행정법제를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기본 매뉴얼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른 법집행을 위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는 이상, 일선 공무원이 법집행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이 법적 매뉴얼에 의거하여 법집행의 위법성을 강하게 질타하기가 쉽지 않은 이상, 일선 공무원이 국민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다. 또한 법집행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없기에, 국민 역시 자신의 희망과 다른 법집행의 결과에 대해 애써 수긍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관헌국가적 전통에 기반한 행정법제가 여전하고 바른 법집행을 구현하는 기본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어서, 국민 친화적인 적극행정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법제도의 바른 운영과 적극행정을 가능케 하는 기초 토대의 마련보다는 공무원 개인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다. 언제까지 적극적인 법집행이 공무원 개인의 품성에 좌우되게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독일 연방정부의 2016년 규제개혁 보고서 서문에서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안정과 경제적 힘의 바탕은 훌륭한 법적 틀과 신뢰할 수 있고 효율적인 행정이라고 하였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보다 앞서 1976년 행정작용 전반의 매뉴얼을 규정한 행정기본법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독일 행정절차법을 마련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 이후에 행정의 간소화와 규제개혁을 과감하게 실천해 유럽연합을 선도하고 있다. 행정작용의 기본 매뉴얼에 해당하는 행정기본법의 제정이 적극행정을 위한 진정한 출발이다.

<김중권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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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경기장은 로마의 영광과 질병을 동시에 드러내는 징후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수도 로마의 콜로세움이며, 비운의 폼페이에도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다. 여흥과 오락의 장소인 그곳에서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고, 전차경주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에는 기독교인의 처형장이기도 했지만, 원형경기장은 무엇보다도 검투사 시합을 연상케 한다. 주로 포로나 노예가 동원된 검투사 시합은 민중을 열광시켰기에, 정치가의 선전을 위한 이벤트로 변질되기도 했다. 카이사르도 대규모 시합을 열었고, 로마 근교의 광장에 연못을 만들고 군함을 띄워 모의해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에서 반란군들은 반대로 로마병 포로에게 검투사 시합을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어느 역사학자는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원형경기장은 점차 폐쇄되었고 최고의 오락거리인 검투사 시합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소멸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로스포츠는 철저히 규칙화되고 안전이 보장된 현대판 검투사 시합이다. 문명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제전을 건전하고 신사적인 스포츠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프로스포츠의 세계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검투사 시합이 펼쳐지는 현대판 원형경기장이 존재한다. 인터넷에 접속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포털은 우리를 검색어 순위로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세상사에 심드렁한 도인이 아니라면 순위에 오른 이름들을 무심히 누르게 된다. 그 이름들은 자주 사건, 사고와 연루되어 있고, 우리는 클릭과 함께 그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원형경기장에 입장한다.

범죄의 혐의나 추문의 진위가 논란이 된다. 관심이 고조되고, 소셜미디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보도가 쏟아지고, 당사자는 입장을 표명한다. 더러는 고발을 당하고, 더러는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반격에 나선다. 수사기관이 개입하고, 영장이 청구되며, 정치인이 가세한다. 당사자들이 사활을 걸고 싸우는 이 과정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하고, 본격적인 사법절차로 이어지기도 한다. 며칠이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이 비슷한 패턴으로 되풀이된다. 이 시합들은 우리가 일용하는 양식이고, 우리의 불안과 선망과 분노와 공포가 투사된다. 패배한 사람들은 직업세계에서 퇴출되고, 불명예를 당한다. 자유를 잃고 감옥에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목숨을 버린다. 스포츠와 달리 실제로 살고 죽는 진정한 검투사 시합이기에 시민들은 경멸하면서도 빠져든다.

로마의 자유민 중에 돈과 명성을 좇아 스스로 검투사가 된 사람들이 있듯, 현대판 원형경기장에도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인지도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변환될 수 있는 일종의 화폐다. 그 화폐를 모으기 위해 많은 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한다. 자신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불러일으켜 인지도를 높이고, 그 인지도를 돈과 권력으로 바꾸는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마저 있다. 이들은 누가 내몰지 않아도 스스로 칼을 들고 경기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시합을 벌이고 싶은 사람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불러낸다. 대중의 지지를 돈이나 권력으로 변환해야 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은 언제든지 자의든 타의든 원형경기장에 나설 각오를 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정치인들은 각자의 무예를 선보이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 나선 검투사로서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다워야 생존한다. 반대로 연예인은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다워야 살아남는다. 정직해야 하고, 선행을 해야 하며, 자신과 무관한 가족의 빚조차 말끔히 해결해야 한다. 언행일치의 높은 윤리를 갖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버려진다. 정치는 연예화되고, 연예는 정치화된다. 

네트워크와 접속된 민주주의는 소수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관리했던 시대보다 분명히 나아졌다. 언론에 의해 부당하게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국가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스러지던 시대가 있었다. 음습한 범죄가 돈과 권력의 비호 아래 횡행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이 시대는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열린 시대다. 그런데, 언론과 지식인과 국가의 역할이 쇠퇴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자발적인 검투사들, 관전하며 훈수를 두는 수많은 개인 그리고 클릭 수에 목마르고 덜 진지한 매체들이 채우고 있다. 민주주의가 만개할 줄 알았던 광장이 반지성주의로 점철된 원형경기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민의 알 권리에 크게 기여한 인사청문회조차 검투사 시합처럼 치러진다. 이것은 이 시대가 앓는 어떤 질병의 징후다. 아니, 마오쩌둥은 어디에서인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증상이고, 우리가 질병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터무니없는 공격과 거짓 변명으로 어수선한 이 시대의 원형경기장은 과연 괜찮은가. 모든 시민이 언제 어디서나 작은 크기의 세로로 긴 사각형과 큰 크기의 가로로 긴 사각형 모양의 단말기를 통해 원형경기장에 입장하는 이 시대는 이대로 흘러가도 좋은 것일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야수성이 온라인 원형경기장에 표출되는 것에는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중요한 의제나 무고한 이들의 운명마저 검투사 시합처럼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운 것이지만, 이대로 초연결사회로 나아간다면 미래는 비관적이다. 원형경기장을 보다 인간화하기 위한 문화적 변화와 새로운 제도적 설계가 절실하다. 프라이버시와 명예가 어떤 경우에 포기되고, 어떤 경우에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하는지, 확증편향과 은밀한 조작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증명이 어떻게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와 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

원형경기장이 없는 지루한 사회는 반대한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마저 강제로 끌려나와 맹수의 밥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난투극에 최적화된 자발적 검투사에 의해 사회의 중요한 의제가 줄곧 표류하고 실종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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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는 친구지만 마냥 반가웠다. 친구도 어떤 감정이 물밀었던 모양이다.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친구는 물었다. “어떻게 먹고사니?” 친구의 말은 우리를 둘 다 기쁨과 당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친구는 아마도 “잘 지내지?”나 “어떻게 지내?”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길 위에서 한바탕 사이좋게 웃었다.

집에 오는 길에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요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크게 네 가지다. 대학교에서 학인들과 배움을 나누는 일, 격주마다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일, 매일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사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두세 차례 출연하는 일, 그리고 읽고 쓰는 일. 어떤 일은 나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이고 또 다른 어떤 일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 일을 할 때 비로소 내가 나로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 모든 일이 어색하다는 점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어색한 일도 있고 여전히 어색한 일도 있다. 몸담은 지 얼마 안된 일은 늘 어색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에 있다. 남들 앞에서 말하고 의견을 피력하고 어떤 물음에 답하는 일, 답하면서 다음에 내가 던질 질문을 헤아리는 일, 이 일 앞에서 나는 보통 작은 상태로 존재한다. 종종 위축되는 것은 물론 겉으로 웃고 있을 때조차 속은 땀범벅이다. 대학에서의 강의,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 그리고 JTBC <시사토크 세대공감> 출연 등은 신출내기의 어색함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처음 같은 일도 있다. 바로 읽고 쓰는 일이다. 이 일 앞에서 나는 때때로 묻는다. 실력이 늘지도 않고 적응이 되지도 않는데,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왜 읽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까. 20여년 가까이 썼는데 왜 아직도 백지는 나를 새하얗게 질리게 만드는가. 어색함은 으레 어려움을 동반한다. 이 어려움은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얼어붙게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나를 생생하게 한다.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 머릿속에서 떠올린 문장대로 쓰지 못하고 있구나.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거나 너무 늦게 흐르는 것 같다. 그 시간에는 내가 없는 것 같다.

어색한 일은 맞지 않는 옷처럼 몸을 쭈뼛하게 만든다. 평소의 여유로운 내 모습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날 수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몰입이 필요하다. 신문을 애써 가까이해야 하고, 평소라면 지나쳤을 법한 기사에도 따뜻한 눈길을 주어야 한다. 한국문학사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책을 읽고 해당 저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궁금증을 발휘해야 한다. 백지 앞에서 초연해지는 일도 필요하다. 그래야 나는 비로소 어떤 상태에 다다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방송에 익숙해지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조리 있게 말하고 여유로운 나머지 방송용 미소로 씩 웃기도 할 때, 나는 아마 스튜디오에 없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 앞에서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팟캐스트를 들을 때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특정 발음을 뭉개버리기 일쑤다. 매번 출연하는 게스트가 다르니 그에 맞춰 나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돋보이게, 빛나게 해주는 일은 기꺼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가끔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감각이다. 이 감각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깨어 있게 해준다. 나는 편한 쪽에서 불편한 쪽으로 한 발짝 움직인다. 날숨 상태에서 들숨 상태로 기꺼이 몸 상태를 바꾼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공부하겠다는 태도다. 나를 최대한 투명하게 만들고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어색함에 익숙해지겠다는 다짐이다.

삶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나에게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어색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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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수업을 한다. 짧은 글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 후 주제를 잡아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이번 주에는 20대 남성이 쓴 글을 읽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기록한 글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스스로 알아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통탄하는 글을 읽고, 아이들은 삶에 꼭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대화의 기술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가 서로 대화하다가 말문 막히면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게 너무 싫어요.” “알바하다가 월급 떼이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년부터 알바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몰라요.” “계좌이체, 무통장 입금 이런 거 너무 어려워요.” “싫은데도 말 못하고 참기만 하다가 친구들 사이에 호구가 된 적이 있어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내 감정을 정확히 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저는 연애만 하면 꼭 안 좋게 끝나요. 잘 헤어지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맞아 맞아, 서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아이들이 나열한 이 배움의 목록들은 생생한 삶의 기술이다.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죽어 있는 교과 지식을 넘어 ‘삶의 배움’을 표방하는 대안학교에서는 비형식적 교육과정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룬다. 심각한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면 예정되어 있던 수업을 멈추고라도 모두 둘러앉는다. 매뉴얼도 안 통하고 똑 부러지는 해결책도 얻기 힘든 이 지난한 과정에 때론 ‘질리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교사도 아이들도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미결 과제로 남는 일들도 많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수업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아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교사의 훈계나 학교폭력위원회의 징계로는 결코 도출해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도 종종 연출된다. 

얼마 전 받은 우편물에 작은 책자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시와 같은 삶을 살 줄 알았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낸 시집이라고, 중·고 통합 대안학교에서 6년을 함께 보낸 제자가 쓴 거였다. 입학식 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아이가 들어서는데 작은 분노 덩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폭력을 쓰는 그 아이로 인해 우리는 자주 둘러앉았다. 얻어맞은 아이도 안쓰럽고, 그렇게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 녀석도 가여웠다. 때로 벌을 받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도 하면서 시간은 흘렀다. 다가갈 방법을 몰라 애가 탈 때마다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주먹을 휘두르고 나서 혼자 숨어 우는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소년이 서른 살 가까운 청년이 되어 “시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니, 인간은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다. 교육이 그 아이를 변화시킨 게 아니라, 본디 그러한 내면을 가진 아이였다. 본연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아파하며 기다려준 덕이 클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교육 담론으로 떠들썩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이 알고 싶다는, 그러나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기술’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갈망하는 그 배움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 어쩌면 그게 교육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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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키 재기’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일본에도 ‘도토리 키 견주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어느 쪽에서 흘러든 것인지 아직 모릅니다).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잘났다고 다툰다는 말이죠. 도토리는 참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참나무는 몇 종류가 있는데 수종마다 열리는 도토리가 길이도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 도토리는 동글동글하고, 떡갈나무와 졸참나무와 갈참나무 도토리는 다소 기름합니다. 그리고 신갈나무 도토리는 동글납작하죠. 제일 짜리몽땅합니다. 또한 한 나무 한 나무초리에 서넛씩 뭉쳐 달린 도토리 사이에도 크고 작음이 있습니다. 

도토리끼리 희비로 경쟁해봐야 자기들 사이에서나 먹히는 메이저리그 저 밑자락 ‘동네리그’입니다. 동글납작 신갈나무 도토리들 사이에서 으쓱한들 떡갈나무 도토리 옆에 서면 올려다봐야 합니다. 갈참나무 도토리가 껑충하고 날씬한 허리춤에 양손 짚고 고개 세운들 상수리나무 도토리 앞에서는 실한 걸로 깨갱입니다. 이 모두를 피식 웃으며 ‘우리가 왕중왕이군’ 하는 굴참나무 도토리들도 투실한 밤톨 앞에선 올망졸망입니다.

치졸하다는 말에 딱 맞는 게 도토리 키 재기일 겁니다. 생각 유치한 채 큰 사람은 “너넨 이런 거 없지? 이거 못하지?” 애처럼 으스댑니다. 경험과 반경이 좁을수록 ‘내가 왕’입니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성냥갑이요 도토리만 한 성공입니다. 나 좀 대단하다 안달하며 성적과 직장, 연봉과 평수 내비쳐봐야 ‘쥐뿔! 그래, 네 똥 더럽게 굵다’ 주먹감자로 내지르는 팔뚝 세리머니만 받을 뿐입니다. 잘난 도토리는 먹히고 못난 도토리가 참나무로 우렁우렁 클지, 인생사 부침(浮沈)은 도톨도톨 안에선 그 누구도 끝내 알지 못합니다. 비교우위질은 아직 고만고만한 도토리니까 하는 겁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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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는 언제부터 있었나. 그건 내가 언제 이 세상에 왔을까와 똑같은 물음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계로 미끄러져 나올 때 그림자도 함께 태어났다고 해야 정확하다. 울음보다도 먼저 그림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란, 태양이 너희들은 모두 언젠가 녹여먹을 사탕이야, 라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찍어놓은 불도장 같은 것!  참 시시한 질문 같았는데 말하고 보니 감히 <논어>의 한 대목, 절문근사(切問近思)를 들먹일 수도 있겠다는 궁리와 함께 발밑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그림자를 관찰해 본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그림자. 그 그림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들었던 한마디로 귀결된다. 직진하는 햇빛은 너무나 멀리에서 오기에 지구에 평행하게 도착하고, 그래서 그림자가 생긴다! 이상하게 그 말이 참 마음에 오래 남아 그 이후 그림자에 대한 관심을 간단없이 이어지게 하는 한 이유가 되었다.

낯선 고장에 저물 무렵에 도착하는 건 사소한 축복이다. 뉘엿뉘엿 석양에 반사되는 밀양(密陽) 이정표를 보면서 네이버 옥편을 뒤적였다. 빽빽한 햇빛 혹은 비밀의 햇빛, 밀양. 낮에는 지푸라기처럼 빽빽했다가 밤이면 비밀스럽게 변하는 햇빛인가. 그래서 비밀은 햇빛 속에 다 드러난다는 것인가.

밤이란 지구의 짙은 그림자. 그 그림자에 폭 파묻혀 밀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유명한 얼음골을 지나 천황산 오르는 길. 볼 게 많았다. 여름임에도 너덜겅의 돌 밑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했다는 동의굴의 서늘한 바위에는 짙은 분홍의 설앵초. 얼음골과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꽃도 꽃이지만 오늘은 그림자에 특히 유념하기로 했다.

산에서 나무 한 그루의 사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쟁반 같은 나뭇잎에 담긴 꽃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별 모양의 흰 꽃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덜꿩나무. 잎은 물론 가지, 줄기에 털이 밀생하는 덜꿩나무. 모양이 반듯해야 그림자도 반듯하다. 이 세계를 두껍고 깊게 복사하는 꽃과 그림자를 찰칵, 찍었다. 덜꿩나무, 산분꽃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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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을 수 있었기에 편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며 얻게 된 두 손의 잉여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며 꾸준히 뭔가를 창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내가 치는 음표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음표 사이의 정지, 그렇다. 바로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걷기란 제 삶에서 쉼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사건과 분쟁이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실의 입은 너무 커서 사실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손들이 그 입안으로 들락거립니다. 그사이에서 판사는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그 무게감이 숙명보다 무거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는 걷습니다. 걷다 보면 사건과 단절되고, 그 단절이 오히려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걸으면서 풀어갔던 경험을 꽤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인 셈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보다 더 심오한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 역할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사설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입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고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걷기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세포는 계속 만들어지는데, 걷기 같은 운동이 그 생성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암 사망의 3분의 1은 조기검진으로, 또 3분의 1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한데, 주 5회 이상 꾸준히 걷기만 해도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암세포는 소멸한다고 합니다(EBS 라디오 캠페인). 

걷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체 활동이자, 다양한 두뇌 활동이 덤으로 따라오는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대 도시 생활에 걷기처럼 간편하고 효율적인 신체 활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생계 활동으로 따로 걸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 누군가의 조언, 연구 결과가 알려주듯이, 사람은 걸으면서 현명해졌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속에 인간이 만든 건축이 얼마나 볼만한지, 내 앞을 사뿐히 지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걷다 보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뒀던 저녁 거리마다, 어릴 적 뛰놀던 종로 골목마다, 뽀얀 우윳빛 숲속에, 그리고 북녘 땅 천지와 명사십리에 여러분의 발길이 닿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 나라와 기업 모두 현명해집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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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20개국(G20)이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의 조세도피 행태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지난 9일 폐막한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참가국들은 거대 IT 기업들의 세금회피 목적 편법행위를 막기 위해 2020년까지 새로운 조세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아마존과 같은 거대 디지털기업들이 대상이며 골자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재화·서비스의 판매가 이뤄지는 나라에서 과세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세도피처를 이용하는 관행이 지속되면 여러 나라가 합의해 세계 최저 세율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요 국가들이 IT 기업에 대한 조세징수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거대 IT 기업의 조세도피 행태는 신산업의 출현과 관계가 있다. 디지털 비즈니스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전에 과세체계는 본사나 공장 등 물리적인 사업장을 기준으로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점이 없이 인터넷을 통해 세계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출현하면서 기존 과세체계에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여기에다 거대 IT 기업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법인세율이 낮은 조세도피처에 본사를 두는 편법을 동원했다. 이들 기업이 큰돈을 벌면서도 나라에 내는 세금은 쥐꼬리만도 못했다. 이에 유럽의 국가들 중심으로 국경을 넘는 비즈니스를 하는 IT 기업에 대한 과세 움직임을 보여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구글은 작년에만 구글플레이 앱 판매로 5조409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 최대의 포털인 네이버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세율이 높은 법인세를 거의 내지 않는다. 내는 것은 부가가치세 등 비교적 세율이 낮은 세금뿐이다. 구글의 전체 세금 납부액은 연간 2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네이버가 내는 세금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한국 매출은 아시아 본사가 있는 싱가포르 매출로 잡힌다는 이유로 공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G20이 거대 IT 기업 과세에 동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걸림돌이 없지 않다. 정작 시행에 나서면 미국의 반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과세 대상이 미국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돈을 벌고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국제사회는 공동으로 과세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도 한국에 진출한 거대 IT 기업의 조세도피를 좌시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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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는 매월 초 정례 모임을 갖는다. 10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달에 이어 이달에도 일정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이날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는 6·10민주항쟁 제3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황 대표는 이자리에도 불참했다. 대신 오전 10시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표현의 자유’ 억압 실태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에겐 국회 정상화를 위한 협의나 민주화의 전기를 이뤄낸 시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보다 자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는 게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언론과 야당이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향해 저주와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낸 적이 또 있었을까 생각하면 이른바 ‘표현의 자유’ 토론회는 그다지 시급한 자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1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황 대표는 지난달 ‘민생투쟁 대장정’을 마무리한데 이어 민생투쟁 시즌2 행보를 시작했다. 지난번에 중도층 외연 확장에 실패했다고 보고, 이번엔 여성·청년층을 주 공략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말이 민생투쟁이지, 오로지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뿐이다. 의미 있는 대안을 내놓고, 어떻게 예산을 뒷받침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다. 황 대표는 지난 주말 “정부가 민생을 팽개치고 정치 놀음할 때 우리가 민생을 챙겼다. 민생대장정을 누가 했는데 이제 와서 민생을 팽개친 사람들이 들어와서 민생을 챙기라고 한다”고 했다. 황 대표가 장외투쟁을 통해 무슨 민생을 어떻게 챙겼다는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국회는 국회법이 규정한 ‘매 짝수월 임시국회 개회’도 지키지 못한 채 공전하고 있다. 추가경정예산안은 47일째 심사조차 못하고 방치돼 있다. 그밖에 민생안정과 경제활력을 위한 법안도 산적해 있다. 헝가리 유람선 사고 대응, 아프리카돼지열병 차단, 대북 식량지원 등 시급한 현안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데도 3월 임시국회 이후 본회의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입법부 부재 상태가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안팎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빨갱이’ ‘천렵질’ 같은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당 말대로 정부 정책이나 추경안에 문제가 있다면 야당이 이를 따지고 고치는 건 당연하다. 국회는 그러라고 있는 장(場)이다. 국회법에 명시된 회의조차 거부하며 바깥에서 민생을 거론하는 건 위선이요, 기만이다. 이도저도 다 하지 않겠다면 제1야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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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 민주연구원장을 글감으로 하느냐 하겠지만, “대통령과 연관되는 상징성과 영향성, 상관관계가 너무 커서” 그(양정철 민주연구원장)에 대해 쓴다.

돌이켜보면 그의 퇴장은 강렬했다. 그의 “숨을 콱콱 막히게 하는” 복심, 왕의 남자, 실세, 최측근 같은 권력의 수식이 무엇이든 변치 않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측근이라는 사실이다. 결코 정치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떠밀어 호랑이 등에 태워,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을 있게 한 주역이다. 그런 그가 정권 출범과 동시에 조건 없이 퇴장을 선언한 것은 신선했고 아름다웠다. 정권마다 비극으로 점철된 측근정치의 사슬을 끊어내는 용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된 지 이레가 되는 날 새벽 기자들에게 발송한 ‘제 역할은 여기까지 입니다’라는 문자메시지의 진정성을 제척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잊혀질 권리를 달라”며 떠나 2년 동안 대통령 근방에도 얼씬거리지 않고 해외를 떠돌며 “모질게 권력과 거리를 두어온” 처신으로 입증해 보였다.

왜 그리 모질게 권력과 거리를 두려 했을까. 세 가지 이유를 자기 언어로 정리한 적이 있다. 오래 모셨던 사람들이 곁을 내줘서 새 사람들이 끊임없이 수혈될 수 있는 인적 구조를 만들고, ‘친노 패권’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대통령과 가깝고 특별하게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는 내가 비록 덜 중요하고 덜 높은 자리를 맡아도 결국은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부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2018년 1월 한겨레신문 인터뷰). 집권 전반기 친노 패권, 측근정치, 비선, 인의 장막 프레임이나 논란이 등장하지 않은 건 그와 이호철 등 최측근들의 희생적 퇴장에 힘입었다.

그의 복귀 역시 강렬했다. “5년 백수” 다짐을 거두고, “정권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라는 출사표를 앞세워 민주연구원 사령탑으로 돌아온 그가 일으킨 정치적 소용돌이가 세차다. 야인 양정철의 일거수일투족도 뉴스거리였는데, 정치 무대로 돌아온 그에게 각광이 쏟아지는 건 필연이다. “지인과 함께한 오래전 약속인” 국정원장과의 만남이 사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그이기 때문일 터이다. “총선 병참기지” 민주연구원장 양정철이 한 달 새 보여준 행보는 실로 광폭이다. 

압축하면 이렇다. 민주연구원장 취임 이틀 만에 국회의장을 독대했다. 그 이틀 뒤엔 광화문 시민문화제에 참석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직접 차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그 사흘 뒤엔 서훈 국정원장과의 만남이 있었다. 지난 3일에는 민주연구원과 광역지자체 연구원들과의 업무협약 행사를 계기 삼아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를 따로 만났다. 10일에는 경남 창원을 찾아 ‘이심전심의 동지’ 김경수 경남지사와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지자체 연구원과의 정책협약이 민주연구원의 역할을 벗어난다고 보지는 않는다. 업무협약 자체가 아니라 ‘민주당의 정치 참모’(이재명 경기지사) 양정철이 대선 예비주자들과 줄지어 만나는 것이 자극적이다. 인사치레일지라도 박원순 시장에게 “우리 민주당의 주요 자산”이라고 대놓고 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분명 권력은 ‘크기’가 아니라 ‘거리’에서 나온다. 정치적 존재감과 위상을 이토록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보이기도 힘들다. ‘원외대표’라는 별칭이 단지 비난과 시샘의 산물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해외 유랑 시절 자신의 존재가 문 대통령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 문재인의 ‘곁’을 지켰지만 대통령 문재인과는 ‘거리’를 지켰던 양정철은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청와대만이 곁이 아닐 게다. “정권교체의 완성인 총선 승리를 위해 피하고 싶은 자리를 맡았다”고 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자리였다는 건 그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당장에 그가 물러남으로써 죽였던 패권, 측근정치 프레임을 회생시킬 수 있다. 국정원장과의 만남을 위시해 일련의 대선주자 줄만남이 과도한 시비를 일으키는 게 함의하는 바가 있다. ‘양정철’이라는 존재만으로 “비정상적 시선”이 쏠리고,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주의하는 것일 수 있다. 그의 동선과 행보에 대통령이 대입되고, 연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가 말한 대로 대통령 측근의 팔자다. 측근정치에서 위세와 충정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모질게 두어온 권력과의 거리를 접고, 대통령 곁으로 돌아온 ‘양날의 칼’은 경계가 무디어지는 순간 내부를 베기 십상이다. 본디 권력이란 칼에는 날이 있을 뿐 손잡이가 없는 법이다. 끝내 돌아온 지금이야말로 “이전 정부와 대통령 측근들을 보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글에서 큰따옴표로 인용한 것은 모두 인터뷰 등에서 나온 양정철 원장의 말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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