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2세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호상이라면 호상이었다. 1년가량 알츠하이머를 앓았으며 마지막 두어 달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고요히 앉아 지냈고 열흘쯤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 열흘 동안 담당의는 매번 오늘밤이나 내일이 될 거라 일렀고, 그래서 우리는 보호자대기실 의자에 대기상태로 앉아 30분으로 제한된 하루 두 번의 면회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매일 새로운 시신이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면회시간 외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그래서 눈물부터 새어나오며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정을 막 넘어선 시간 그녀의 이름이 불렸고, 우리는 진짜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침상 주변으로 황급히 커튼이 둘러쳐졌다. 죽음을 목전에 둔 다른 환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우리는 최대한 숨죽여 울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함께 살아야만 했던 내 오라비는, 엄마 대신 할머니의 젖꼭지를 만지며 영·유아기를 보냈는데, 대문과 초인종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할머니 젖꼭지를 초인종 삼아 누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딩동, 문 열어주세요 함니, 저 왔어요 함니, 딩동딩동. 나는 그 젖꼭지가 분홍빛으로 아주 조그마하고 어여뻤다고 기억한다. 그녀와 때때로 목욕탕을 다니며 서로 때를 밀어주곤 했는데, 나는 할매 젖꼭지가 어쩜 이렇게 아가 젖꼭지 같냐 물으며, 아가 볼을 쥐듯 장난스럽게 꼬집기도 했더랬다. 그녀의 젖을 빨아먹고 자란 내 어머니는 그걸 팥 알갱이라 불렀다. 너무 작아 물고 빨기 힘들어서인지 젖먹이 때 꽤나 신경질을 부렸다는 말은 그녀가 기억한 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자식에서 손주새끼에게까지 이어진 그녀의 젖꼭지. 우리는 그렇게 망자의 젖꼭지를 추억하며 키득키득 울컥울컥 장례를 치렀다. 불경스럽지만 따스해지는, 작고 어여쁜 팥 알갱이였다. 

장례는 고즈넉했다.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슬픔을 나눴다. 그렇게 고요한 애도를 하고 있던 중, 저 입구에서부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렁차고도 요란한 곡소리와 함께 이윽고 도착한 한 여인. 신발은 벗는 둥 마는 둥 제단 앞으로 달려가더니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땅을 치며 곡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님 여기냐 저기냐 어디 계시오. 누구누구가 왔는데 형님은 왜 거기 그러고 계시오. 아이고 아이고 형님은 나한테 이리저리 잘해줬는데, 나는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잘못한 죄인이요. 형님 없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요 아이고 아이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오 나도 곧 따라가겠소.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슬프기로야 어미 잃은 자식만 하겠느냐 그만하라 누군가 만류해도 여인은 곡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말릴수록 곡소리는 더욱 과격해졌다. 어느 순간 고모할머니 되시는 분이 합류해 서로 끌어안고 밀쳐가며 곡을 보태고 나니, 완벽한 중창의 화음을 가진 리드미컬한 곡소리로 완성되었다. 그들은 기진맥진할 때까지 울었다. 말린다고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닌 듯했다. 들어가는 인사말부터 나오는 다짐말까지, 아이고 아이고 끝을 봐야만 끝낼 수 있는, 한 편의 서사시. 곡소리라기보다는 남도의 창을 듣는 느낌이었다. 두 여인의 화음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완벽하게 조화로웠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곡을 마친 두 여인의 눈에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물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여인들은 듣고 배운 바대로 예를 갖춰 최대한의 애도절차를 밟았을 뿐이다. 

그런 곡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 때였다. 30여년 전이었고, 어린아이였던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할머니의 곡소리가 더 무서웠다. 울음소리는 기괴하고 가락은 지나치게 곡진했으므로.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땅을 치며 온몸을 흔들며 발작 같기도 발악 같기도 한풀이 같기도 생떼 같기도 한 울음을 이어갈 때, 슬픔을 나누는 느낌보다는 요상한 반감이 들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도 제사 때마다 꼭 그와 같은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로 시작해 부르고 찾고 대화하고 인사하고 다시 아이고 아이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그것이 그녀들이 배운 애도의 예법이었을 것이다.

그날 할머니를 보내며 그 곡진한 곡소리를 들려준 여인이 누구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곡소리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여인이 고마웠다. 내 할머니가 해왔던 방식 그대로 곡소리를 완성해줄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자식도 손주도 해줄 수 없었던 그 일. 그 소리는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이다. 살아 있는 육성으로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현실이 묘하게 슬프게 다가왔다. 그 여인이 죽으면 누가 곡을 해주려나. 아이고 아이고. 어쩐지 그 소리가 초인종 소리 같았다. 저 왔어요 딩동, 문 열어주세요 딩동, 저도 언젠가 갈게요 딩동. 할머니 젖꼭지를 누르며 좋아라하던 내 오라비처럼. 젖꼭지의 기억을 공유하는 내 가족처럼. 저 세상의 문을 두들기는, 딩동 아이고 아이고 딩동.

<천운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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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0일, 검찰과거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조사 및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의 사건 제목은 ‘장자연 리스트 사건’이었고 결론은 ‘리스트 없다’였다. 제목은 과거사위의 관점을 반영하고, 관점은 사건 및 결과에 대한 해석을 지배한다. ‘리스트’가 핵심인데 핵심이 없으니 김빠진다. 자연스레 사건은 축소되고, ‘리스트’ 관련 논란 당사자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1차 조사대상에서 제외된 ‘장자연 사건’을 국민청원으로 대상 사건에 포함시키며 국민들이 밝히려 했던 것은 ‘고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2009년 당시 수사검사의 부당한 불기소처분 및 주요 대상자에 대한 수사 미진, ‘조선일보 방 사장’ 관련 의혹에 대한 결과적 은폐, 주요 증거 확보 및 보존 과정의 부실 수사,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경찰에 대한 압력과 협박 등을 확인했다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다시 사건을 덮었다. ‘리스트 유무’에 집중한 심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충분한 사실과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리스트’에 대한 논쟁만을 남긴 채 검찰권 남용에 대해 면죄부를 주며 끝을 맺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시민단체 관계자들이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고 장자연씨 사건’ 등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장자연 사건’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 검찰 셀프 조사의 한계와 철저한 제 식구 감싸기의 ‘무소불위 권력기관’ 검찰의 실체를 확인했으니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단체들이 대검찰청 기습시위를 한 이유다. 이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길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국회가 받아 안아야 한다. 특검을 통해 철저하게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은폐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사위 발표 이후 악의적인 흐름이 포착된다. 조선일보의 윤지오에 대한 공격이 그것이다. 지난 5월22일 “윤지오가 퍼뜨린 의혹…검증 없이 확성기 노릇 한 방송사들” 기사를 시작으로 24일 “장자연 전 남자친구 ‘윤지오 이름 한 번도 못 들어…고인에 치명적인 주장 잔인하다’”, 이어 6월5일엔 “윤지오의 ‘먹잇감’”이란 제목의 부국장 칼럼을 통해 “유명해지고 싶은”, “영악한”, “먹잇감” 등의 단어를 사용해 이전부터 있었던 여러 논란으로 인해 확산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이후 윤지오에 대한 후원금 반환 집단소송과 사기혐의 고소, 홍준표 명예훼손 피소, 신변보호비용 사기 혐의 고발 등 각종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23일 (출처:경향신문DB)

나는 윤지오를 모른다. 그러나 ‘장자연 사건’이 ‘윤지오 사건’으로 옮겨갈 때의 위험성은 안다. 규명되지 않은 사건의 핵심 증인에 대한 도덕적 손상은 결국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데 악용된다. 증언에 대한 진위는 다른 증언이나 정황증거 등을 통해 수사기관이 판단할 몫이지 여론재판의 대상이 아니다. 재조사에서 핵심 증인 채택과 그에 따른 경비 지불은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그래서 6월12일 “윤지오, 또 고발돼…‘국가와 국민 속이고 호텔비 900만원 지원받아’”란 조선일보 보도와 같은 이유로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민갑룡 경찰청장을 고발한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박민식 변호사의 행보는 악의적이라 느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국회가 나서서 ‘장자연 죽음의 진실’과 사건 은폐 이유를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윤지오’를 이유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국회의원들을 압박해서는 안된다. 윤지오로 장자연을 지우지 마라.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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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에는 우리가 앓는 두 겹의 고통이 들어 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상처로 인한 생리적 고통만이 아니라 그런 상처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한 해석적 고통도 앓는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끼고, 장애인은 손상된 몸이 주는 고통 이상의 고통을 사람들의 편견에서 느낀다. 몸의 멍에 더해 마음의 멍이 생기는 것이다. 

흔히 고통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치통처럼 간단한 것조차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앓던 치통을 떠올려볼 뿐이다. 그래도 생리적 고통은 해석적 고통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해석적 고통의 경우, 특히 그 고통이 자신이 사회적 척도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경우, 고통의 호소는 부적합한 존재로서 자신을 확증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 고통스럽다. 상대방은 내 호소를 내가 비정상적이고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공감 대신 선고를 받는다. 네가 아픈 이유는 네가 아픈 존재이기 때문이야.

그러다보니 소위 소수자들은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 폭력을 고발하는 경우에도 마치 고발당한 사람처럼 변명의 언어를 쓴다. 내가 당한 폭력, 내가 느끼는 고통을 내 존재의 본래적 성격 탓으로 돌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들의 호소를 곧잘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네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폭력을 유발한 건 아닌지. 너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너무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닌지.

이것이 사람을 구차하게 만든다. 이때 나의 말은 한없이 구질구질해진다. 내 고통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삶의 멍든 곳을 다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 멍은 폭력의 증거가 아니라 내 허약 체질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자꾸 실패하다보면 설득의 고통이나마 줄이기 위해 나는 결국 나를 설득해버린다. 그래,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너무 민감하고 너무 신경질적이고, 한마디로 나는 이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체질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만성적으로 우울한, 그러면서 이따금씩 까닭 모를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간다.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이 문구는 최근 출간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목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픈 사람이 미안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픈 몸으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미안하지만 회의가 너무 길어지는데 좀 쉬었다가 할까요?” “미안하지만 이번 주 일정을 더 잡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는 왜 미안한가. 일주일에 5일씩, 하루 8시간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 2시간 넘게 회의를 계속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아픈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허약함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한다.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자고 해도 펄쩍 뛰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시키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정도는 해야 ‘정상’이라고 하니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미안하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장애인들도 그렇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미안하지만 엘리베이터 버튼 좀 눌러주세요. 손이 닿지 않아서요. 미안하지만 빨대 좀 가져다주세요. 손을 쓸 수가 없어서요. 혼자서 옷을 입을 수 없어서 미안하고, 혼자서 밥을 떠먹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장애인들은 한없이 구차해진다. 자신은 이런 것도 못하는 존재라는 걸 계속 고해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낮은 곳에 설치만 했어도, 음료를 서빙할 때 빨대 달린 컵을 제공만 했어도 미안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사회가 미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미안해진다.

이런 일이 나타나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질병의 개인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문제 원인을 고통의 당사자에게 찾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잘못된 습관, 타고난 체질, 불운한 운명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장애화하는 환경은 철저히 덮어버린다. 그러면 피해자가 오히려 사회 전체에 돌봄의 짐을 안긴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상의 몸’을 상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딘가 조금씩은 아프고 근본적으로는 어딘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자립의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 수는 있으나(돈이나 권력을 쓰면 돌봄을 받는 자가 돌봄을 베푸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사실 인간 삶의 의존성은 자립이 아니라 함께 살기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우리는 의존에서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적절한 의존 방식을 찾음으로써 자율적 삶을 누릴 수 있다. 활동보조인과 함께할 때 장애인이 자율적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저마다 조금 다른 의존 방식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런데 특정한 의존 방식만을 정상과 자립으로 규정하다보니 우리 중 누군가는 양해를 구하며 계속해서 고통과 결핍의 구차한 언어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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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는 ‘솔전’을 부쳐 먹고, 경상도에서는 ‘정구지찌짐’을 구워 먹고, 제주에서는 ‘세우리적’을 지져 먹는다. 음식 재료도, 조리 방법도 다른 것 같은데, 실상은 모두 ‘부추전’을 부쳐 먹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말 방언은 다양한 형태로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방언의 지역적 분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지도에 옮긴 게 언어지도(言語地圖)이다. 그런데 한 어휘의 언어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의 방언을 모두 알아야 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다니며, 지역 고유의 방언을 잘 사용하는 제보자를 찾아 방언을 녹음하고, 음성을 글로 옮기는 일이 선행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언어지도를 만드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달 27일자 ‘이지누 칼럼’의 “오롯하게 우리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워지는 지금, 정부 차원에서 나랏말의 다양성과 분포를 정리해 우리말에 대한 언어지도를 발표할 시기가 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사라져 가는 방언을 보존하기 위해 2004년부터 지역어 조사를 실시하여 약 20만 항목의 방언 자료를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100장의 언어지도를 작성 중이다. 지역 방언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80대 이상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방언 음성을 채록하고, 이를 전사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다. 현재 전국 162개 시·군 중에서 111개 시·군의 방언을 조사하였고, 올해에 20개 시·군의 방언을 추가 조사하고 있다.

이 사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0년대에 시작한 한국 방언 조사의 계보를 이었다. 한국 방언 조사의 질문지를 확대하여 조사함으로써 1980년대의 방언과 2000년대의 방언을 비교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지역어 조사 결과는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언어적으로는 표준어화가 급속히 진행된 2000년대의 방언을 기록한 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방언조사자료집>과 비교하면 20년 동안의 언어 변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립국어원의 지역어 조사 결과와 언어지도는 2019년 12월 말 ‘지역어 종합 정보 시스템’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방언 정보를 쉽게 검색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약 14만 항목의 방언과 대응 표준어, 뜻풀이, 음성 자료 등을 제공한다. 그리고 방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100개 어휘의 언어지도와 전문가 해설을 싣고, 국민들도 자신만의 언어지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언어지도 작성 프로그램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소멸 위기에 처한 방언이라 하면 제주 방언이나 전라 방언, 경상 방언, 강원 방언을 떠올린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은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이야말로 진정 소멸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말이다.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에는 방언사전조차 없다. 지역어 보존을 위한 노력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은 언어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언어 다양성은 점점 사라져가는 방언을 보존하여 활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방언에는 지역 고유의 언어문화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 방언을 전국적으로 균형 있게 보존하고, 그것을 확산시킬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다.

<위진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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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희호 여사님의 생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다. 

지난 2018년,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주최하는 ‘김대중 노벨평화영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이희호 여사님께서 “올해는 특별히 여성감독에게 이 상을 수여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상식장에 직접 오셔서 시상을 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하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여사님을 추후에라도 뵙고 싶다는 의견을 재단 측에 전달하니 여사님을 뵈러 갈 때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여사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되시지 않아 여사님과의 만남이 계속 좌절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비보를 들었다. 

이후 며칠간, 나는 여사님의 삶의 행적에 관한 기사들을 SNS를 통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나는 그분의 빈소를 찾았다. 비록 돌아가신 후였지만 여사님과의 첫 만남이라는 생각에 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슬프고도 설레었다. 그리고 영정 속, 여사님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이토록 삶으로, 죽음으로, 평화를 증거한 위대한 여성이 또 있을까.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진 '故이희호 여사 추모식’에서 영정이 올려져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영정 앞에 서서, 여사님의 삶의 궤적을 잠시 그려보았다. 

전쟁 통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고통을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내고,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 당당히 맞서라 독려하면서도 남편과 자녀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에는 피멍이 들고, 고난으로 단련된 심장은 영부인이 된 후에도 정의를 향한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을, 정의에 대한 차가운 감각과 고통당하는 약자에 대한 뜨거운 심장을 동시에 지니고 사셨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평생 간직하셨던 ‘평화’라는 선물을, 대한민국의 두 손에 유품으로 쥐여주셨다. 여사님의 생애는 고난과 기도로 점철된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평화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셨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12일 (출처:경향신문DB)

이 여사님은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 (중략)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희호 여사님의 죽음으로, 분열이 극에 달해 있던 한국 정치권에도 요 며칠 잠시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잠시 평화가 깃든다. 가정에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평화가 깃든다. 대한민국을 가르고 있는 모든 분리된 선들이 잠시 사라진다. 

여사님의 영정 앞에 서서 나는 그렇게 몽상에 빠져들었다. 한낱 꿈일지 모르지만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평화의 사람’이 주는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명료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런 분이 우리의 곁에서 호흡하시며 그 모든 역사의 풍파를 지켜보시며 아픔의 시대를 자식처럼 품고 기도하고 계셨구나, 우리는 그렇게 여사님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도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겠다는 이희호 여사님의 마지막 유언이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자 거룩한 부담으로 남았다.

<추상미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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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요즘 여권이 돌아가는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다. 국정의 주요 축인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이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는 여당을 대신해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권을 공격하며 정치 전면에 섰다. 대통령 최측근의 행보는 여당 대표보다 도드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에 열린 공간은 넓지 않아 보인다. 막말과 퇴행적 행태로 일관하는 한국당은 논외로 치더라도, 최근 여권을 지켜본 단상은 이렇다. 

청와대는 최근 작심하고 한국당과 대립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야당 상대는 여당의 몫인데도, 국회를 담당하는 청와대 정무라인이 연이틀 전면에 섰다. 강기정 정무수석은 12일 민주당·한국당 정당해산 청구를 요구한 국민청원에 “총선까지 기다리기 답답하다는 국민의 질책”이라고 했고, 복기왕 정무비서관은 13일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을 요구한 국민청원에 대해 “국회의원만 견제받지 않는 나라가 특권이 없는 나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인가”라고 했다.    

국회 파행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일 수 있지만, 청와대의 잇단 발언은 국회 정상화 협상을 주도하는 여당 지도부에 타격을 입혔다. 강 수석은 14일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찾아 “소통이 부족했다면 더 노력하겠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야당을 궤멸 대상, 심판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한국당 심증은 더 굳어졌다. 한국당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정무감각이 결여된 것이다. 만약 한국당 주장대로, 두 사람이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 선 것이라면 그건 더 심각하다. 고위 공직자가 국정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행보는 여당 내부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있다. 그는 지난 5월14일 첫 출근길에 문 대통령과 연락했느냐는 물음에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면서도 “이심전심”이라고 했다. 이전 정권의 대통령 측근이라면 속사정이야 어떻든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에서 말을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양 원장은 굳이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후 민주당 지도부의 언행보다 ‘대통령 최측근 양정철’의 일거수일투족에 여권 안팎의 시선이 쏠리는 상황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28일 (출처:경향신문DB)

행보도 거침이 없다. 그는 국가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과 공개 회동했고, 전국을 돌며 유력 주자인 광역단체장들을 만나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민주연구원과 전국 광역지자체 연구원의 업무협약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여권에서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서훈 국정원장과도 만났다. 사적 만남이라는 해명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의 행보 탓에 이 만남은 실체보다 더 큰 논란을 초래했다. 민주연구원을 ‘총선병참기지’로 만들겠다는 그의 일성은 ‘연구원 주도의 물갈이’가 있을 거라는 여권 내부 웅성거림을 키웠다.   

작금의 상황들이 반복되는 한 여당 위상은 갈수록 작아질 수밖에 없다. 설사 국회가 정상화되더라도, 민주당 원내지도부의 권위와 신뢰성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야당은 국회가 교착될 때마다 청와대만 바라볼 것이다. 여당 지도부가 대통령 측근의 그림자에 묻히는 상황도 심상치 않다. 이해찬 대표의 발언은 이전처럼 정치적 파급력이 없고, 오로지 독한 말로 한국당을 공격할 때 인용될 뿐이다. 의원들은 사석에서 이 대표의 말이 아닌 양 원장이 던진 발언들에 대한 독해를 시도할 정도다.   

물론 이런 상황은 민주당이 자초했다. 대통령 지지율에 업혀가느라,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다. 청와대 심기만 살폈다. 개각 참사에 청와대의 안일한 현실인식에도 용기 있게 직언한 사람은 없었다. 양 원장 행보에 대해서도 뒤에서 수군거릴 뿐 누구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못한다. 여당 관계자는 “누가 지금 양비(양 원장)를 말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수 의원들은 한국당의 비정상적 행태만 조롱하면 총선까지 문제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현실인식에 젖어 있다.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를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여당의 왜소화는 간과할 수 없다. 여권의 신경은 여당의 비정상적 상황이 내년 총선에 미칠 영향에만 온통 쏠려 있겠지만, 이는 부차적인 문제다. 입법활동으로 청와대·정부를 뒷받침해야 할 여당이 제구실을 못한다면 국정은 흔들리게 되고, 그 피해는 정권을 넘어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게 된다. 

지금 여권의 시급한 과제는 여당의 위상 재정립을 고민하는 것이다. 청와대는 정치의 영역에서 여당을 더 존중해야 하며, 양 원장은 대통령 최측근의 무게를 새겨야 할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와 의원들에게 지금의 모습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칠지 깊이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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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눈을 지고도 끄떡없는,

더 새파란 그늘을 펼친 주목 옆에

고사목 하나


모가지 부서지고

어깨가 깨졌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죽음 속에서

죽음을 넘어

마지막 큰 가지를 북대 쪽으로

가라, 

너는 네 길을 가라

혼자서 가라, 거기에 아무것 없을지라도


굶주린 멧돼지와

피투성이 삵과

통곡하듯 번쩍이는 빙벽들의 그믐밤을 부르며


전동균(196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잣눈은 척설(尺雪)과 같은 뜻이다. 많이 쌓인 눈을 일컫는다. 말라서 죽은 나무 위에 눈이 한가득 쌓였다. 그러나 나무는 꿋꿋하게 섰다. 이 가지 저 가지가 군데군데 꺾였으나 위를 향해 곧게 섰다. 의연한 기품으로. 새파랗게 그늘을 펼치며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때보다 더 흔들림이 없이 반듯하게 섰다. 시인은 이 고사목으로부터 기개를 본다. 굽히지 않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립하는 지조를 본다. ‘북대’는 신성하고 고고한 정신의 거처일 테다. 울음과 허기와 피투성이의 계곡 너머에 있는, 차디찬 빙산 그 너머에 우뚝 솟아 있는, 영적인 그런 곳일 테다. 무엇에도 기죽지 말고, 비록 종국에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 일을 생각해본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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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정상화를 위한 여야 협상이 최종 단계에서 좀처럼 타결되지 못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지난주 이른바 ‘경제청문회’ 개최를 국회 정상화 조건으로 내놓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은 그 전주엔 정치개혁특위와 사법개혁특위 재구성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다 양 특위의 활동기한 연장 여부가 국회 정상화 이후 추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선(先) 경제청문회, 후(後) 추경 심사’를 고집하는 것이다. 협상 타결을 위한 진지한 접근으로 보기 어렵다. 이쯤 되면 한국당이 정말로 국회 정상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16일 국회에서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자신이 있다면 경제청문회부터 먼저 국민들에게 보여드리고, 그다음에 추경 심사에 돌입하자”고 했다. 국회가 청문회를 열어 현안을 따지는 건 필요한 일이다. 최근의 경제현실은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대외 여건 악화와 국내 투자·소비 위축 등으로 심상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국회가 열리면 기획재정위 등 관련 상임위를 중심으로 부처 보고와 현안 질의를 통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그게 국회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다. 한데도 한시가 급한 추경 논의를 뒤로 제쳐 두고 난데없이 경제정책의 공과를 살펴보자는 건 누가 보더라도 엉뚱한 정치공세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운데)가 16일 오전 국회에서 경제청문회를 요구하는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는 4월에 이어 5월에도 단 한번 열리지 못한 채 6월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 이 정도면 휴업이 아니라 사실상 폐업 상태다. 20대 국회 법안처리율은 28.9%에 불과하다. 최악의 국회로 불린 19대 국회 처리율이 34.2%였던 것에 비교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부끄러운 성적표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말로는 민생을 챙기겠다면서 국회 문을 걸어 잠근 채 장외에서 정부 비판만 하고 있다. 시민들의 인내도 한계를 넘어섰다. 성난 민심은 부적격한 국회의원을 임기 중 소환해 파면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소환제에 80% 넘게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야당의 투쟁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반대할 건 반대하더라도 국가적 위기 앞에 힘을 모아야 할 때도 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경제와 민생을 살리기 위해 지금 여야가 힘을 합쳐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이번 주말까지 국회가 문을 열지 못하면 한국당을 빼고 여야 4당으로만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했다.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는 국회 중앙홀에서 단독 소집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 여야 4당은 한국당을 빼고라도 국회를 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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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나빴다. 2019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 나선 한국 대표팀은 예선 첫 경기 포르투갈전에서 패하면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물리쳤으나 본선 진출은 장담할 수 없었다. 3차전 상대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였다. 이기기 어려울 것 같던 이날 경기에서 대표팀은 승리해 16강에 올랐다. 지난달 31일에 전해진 16강 진출 낭보는 하루 전 발생한 헝가리 다뉴브강의 참사로 슬픔에 잠긴 국민들에겐 더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이강인(가운데) 등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16일 폴란드 우치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 U-20 월드컵 우크라이나와의 결승전을 마친 후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우치 _ 연합뉴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죽음의 조’에서 벗어난 대표팀은 “애국가를 크게 불러달라”던 16강전에서 숙적 일본을 꺾었고, 세네갈과의 8강전에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혈전 끝에 역전승을 거두고 4강에 올랐다. 이어 재치가 빛을 발한 에콰도르전을 기어코 승리로 장식하며 남자축구 사상 첫 월드컵 결승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그리고 16일 새벽, 우크라이나와의 결승전이 열렸다. 대한민국은 대낮처럼 밝았다. 전국의 도심 광장과 주요 월드컵경기장은 ‘붉은 악마’들의 함성으로 뜨거웠다. 전 국민의 43%가 TV 앞에서 열띤 응원을 펼쳤다. 막말과 망언으로 싸워왔던 정치권마저 하나로 뭉치게 했다. 대표팀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기에 아쉬운 역전패에도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정정용 감독(왼쪽)이 16일 폴란드 우치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 U-20 월드컵 우크라이나와의 결승전에서 패한 뒤 이재익을 위로하고 있다. 우치 _ AP연합뉴스

폴란드에서 열린 축구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한국 대표팀 정정용 감독과 이강인 등 선수들이 17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2017년 5월 출범한 ‘정정용호’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강인을 제외하면 알 만한 선수도 코치진도 없었다. 그들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선수권, 프랑스 툴롱컵, 미얀마 알파인컵 등을 거치면서 그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단단한 ‘원팀’(One Team)이 되어갔다. 그리고 월드컵 결승 진출이라는 감동을 국민들에게 선물했다. 골든볼을 수상한 이강인과 베스트 골에 빛나는 조영욱과 최준, 선방쇼를 펼친 이광연이라는 스타플레이어도 탄생시켰다. 원팀이 국민에게 준 선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희망’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청년들의 도전이 가져온 결과다. 그들은 자율 속에서도 규칙과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선수를 위로하고, 동료를 탓하는 대신 다독인다. 좌절하지 않고 두려움을 모르고 끊임없이 승리를 위해 두드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확인한 것이다. ‘멋지게 놀 줄 아는 그들’ 덕에 국민들은 지난 20여일간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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