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이신가요?”(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아니요, 취재 나온 기자입니다.”(김훈 한겨레신문 기자) 

신문과 방송에서만 보던 두 유명인사를 실제 처음 봤던 곳은 무수한 죽음의 참사 현장이었다. 월드컵 분위기가 무르익던 2002년 4월15일. 승객과 승무원 166명을 싣고 베이징에서 이륙한 중국 민항기가 김해공항 인근 돗대산에 추락했다. 당시 사건·사고를 주로 취재하는 사회부 사건팀 기자였던 필자는 현장에 급파됐다. 이곳에 소설 <칼의 노래>의 김훈 작가도 사회부 기자로 왔다. 그해 1월, 화려한 언론 경력의 54세 베스트셀러 작가는 사건기자로 변신해 화제가 됐다. 한 일간지는 “그의 <칼의 노래> 주인공 이순신 장군처럼 ‘백의종군’한 셈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이부영, 정동영 등 다른 유력 정치인들처럼 현장을 찾아 사고수습 지원을 약속했다.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뜻을 전하는 중 머리 희끗한 중년의 기자를 유족으로 알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짧고 어색한 만남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갔다.

‘김훈 기자’는 다음날 ‘정치인들의 위로방문’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유족들이 방문한 정치인들을 향해 격렬하게 항의하면서도 한결같이 “도와 달라”며 절규하는 현장을 담았다. 글은 “유족들은 18일부터 제가끔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러 병원을 뒤지고 있다. 그들은 나라를 믿기 어려운 국민들처럼 보였다”로 끝맺었다. 부연하자면 사고 발생 이틀이 지나도록 신원이 확인되는 사망자는 3명에 불과할 정도로 당국의 대처는 더뎠다.

노무현 후보는 시민들의 열정과 참여 속에 민주당 경선을 통과했고 겨울 본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꿈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개혁은 기득권의 저항에 시달리고 가로막혔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 바꾸고자 했던 현실은 친구 문재인 대통령의 과제이기도 하다.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섰고, 우리 생활 곳곳에 4차산업 혁명의 물결이 치고 있다. 하지만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힘들고 억울한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일터에서 삶을 마치는 이 어이없음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일하다 병든 경우를 빼고도) 971명으로, 전년보다 7명 늘었다. 2001년부터 따지면 일터에서 숨진 노동자는 연평균 2200명을 넘는다.

주로 건설 일용직, 하청업체 직원, 비정규직, 현장실습생들이었다. 발전소 하청 노동자로 새벽에 홀로 일하던 스물네 살의 김용균씨는 기계에 끼여 죽임을 당했다. 이민호군은 특성화고 3학년 현장실습 중 장비에 깔려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서른다섯 살의 비정규직 집배노동자 이은장씨가 돌연사했다. 스물다섯 살의 건설 노동자 김태규씨는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해 숨졌다.

‘나라를 믿지 못하는 국민처럼’ 유족들의 몸부림도 여전하다. 사고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비슷한 사고의 재발을 막을 제도를 마련해 달라는 너무나 기본적인 요구들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오랜 아우성 끝에 산업재해를 막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김용균법)이 마련됐지만 정부의 하위 법령에 그 위력은 떨어졌다. ‘김용균법에 김용균이 없다’는 탄식에도 재계는 물론 정부와 국회는 너무나 무덤덤하다. 산재 발생 사업장의 업주 처벌을 규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실현은 기약이 없다.

그래서일까, 김훈 작가가 생명안전 시민넷의 공동대표로 지난 14일 발표한 기자회견문은 그의 17년 전 칼럼과 비교해 시간적·공간적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들은 다만 통계 숫자로만 인식되었을 뿐, 아무런 대책도 반성도 없이 방치되어 왔습니다. 어째서 우리나라 대통령과 국회와 행정부는 날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무수한 죽음을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까.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차별 없이 단결권을 보장하고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이 지체 없이 비준되길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까. 국제사회의 눈총과 압박이 높지만, 한국적 특수성이나 경제성장을 위해 고려할 게 많다는 논리는 강고하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파이의 크기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앞서 말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열다섯 살 노동자) 문송면군 사건, 이만하면 중대한 과실이 될 만도 합니다. 왜 구속하지 않습니까? …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초선 의원 때인 1988년 7월 첫 대정부질문에서 쏟아낸 울림 역시 세월의 공백을 느낄 수 없다.

<박재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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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 안이 소란스러웠다. 강릉에 놀러 가는 노인들이 서울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술판을 벌였다. 아마도 아침 대신 막걸리 한 잔씩 나눠 먹는 모양이었다. 노인들은 오랜만에 기차 여행을 하는 흥까지 더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기차는 녹음이 짙어진 산을 에둘러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은 고요한데, 차 안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노인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그래도 차마 조용히 하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옛날 강릉으로 놀러 가던 청년들이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틀고 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생각하면서 참는데 결국 차장이 와서 주의를 줬다.

노인들은 미안하다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도란도란 사는 얘기를 했다. 그들 중 몇이 한참 동안 한 사람을 흉봤는데, 그때 굵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 느긋하게 말했다.

“젊어서는 안 그랬어. 참, 사람 괜찮았어. 나이 들고 좀 이상해졌는데, 자식들 결혼시키고 혼자 오래 있어서 그럴 거야. 서운한 거 있으면 내가 말해 볼게.”

친구 편을 들어주는 그의 말에 괜히 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한참 동안 산길을 달려간 곳에는 전교생이 11명인 중학교가 있었다. 1학년 교실에는 칠판 앞에 달랑 책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같이 학교에 다녔다는 아이들은 마치 형제 같았다.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게 있다면 뭐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옆에 앉은 친구를 가리켰다.

“친구요.”

말한 아이의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그 아이의 복숭앗빛 얼굴을 보면서 기차 안에서 만난 노인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자라 마음 따뜻한 노인이 될 테고, 아마 그 노인은 어린 시절 이 아이처럼 따뜻하지 않았을까.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풍광보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잔상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험한 뉴스와 천박한 말들이 휩쓰는 세상에서 마음 따뜻한 이들과의 만남은 큰 위안이 되었다. 분명, 세상에는 따뜻한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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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들이 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지 궁금해. 너희들 국민연금 내기만 하고 못 받잖아. 40년 뒤에 기금 고갈된다잖아. 뭐? 적립식을 부과식으로 바꾸면 된다고? 그러니까 세금으로 노인세대를 부양하면 된다고? 2020년엔 청장년 100명이 40명을 부양해. 2060년엔 청장년 100명이 100명을 부양해.(15~64세 인구 대비 14세 이하+65세 이상 인구비율) 세금으로 국민연금 주려면 세율 엄청 높아져. 그때의 젊은 세대가 제정신이라면, 부과식을 거부하고 국민연금 파산시킬걸. 그러니까 지금 청년들은 국민연금 못 받을 거야. 

40년이나 남지 않았냐고? 아냐, 25년밖에 안 남았어. 그때까지는 기금을 쌓아가는데, 그때부터는 기금을 팔아야 하거든. 국민연금을 주식시장에서 빼내야 하거든. 저성장만 예약된 게 아닌 거지. 금융공황도 예약되어 있는 거지. 그런데도 소득대체율 높이자는 사람이 있더라고. 국민연금 혜택 늘리자는 얘기지. 주장이야 제 맘대로지. 그런데 그러려면 적어도 ‘진보’라는 간판은 떼고 말해야지. 염치가 없잖아.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15년에 민주당, 정의당이 임금피크제 반대했잖아. 2013년에 정년연장을 법제화하면서,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정년 전 몇년간 임금을 깎기로 했었거든. 이게 임금피크제거든. 그런데 민주당은 임금피크제 법제화에 반대하면서 노사 자율로 맡기자며 우물쭈물했고, 정의당은 거세게 반발했지. 심상정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사자후를 토했고. 그런데 그때 청년 대상 여론조사를 해보니 임금피크제 찬성률이 얼마였는지 알아? 70%(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조사)였어. 계산이 뻔하거든. 정년이 연장되면 임금피크제라도 해야 청년고용을 조금이라도 늘릴 여지가 생기거든. 

요새 다시 정년연장하자는 주장이 나오더라고. 그런데 어차피 사오정 오륙도 인생인데, 누가 혜택 보겠냐고? 정년이 보장된 분들 있잖아. 은퇴를 앞둔 586세대들, 아니, 그중에서도 운 좋은 사람들. 이미 보호받지만, 더 보호받고 싶은 분들. 정년연장되면 인건비 부담이 커지겠지. 신규고용 줄이겠지. 청년들 일자리가 줄어들겠지. 주장이야 제 맘대로지. 그런데 그러려면 적어도 ‘진보’라는 간판은 떼고 말해야지. 염치가 없잖아. 

요새 추경을 앞두고 정부 재정을 조이자, 풀자 말이 많더라고. 조이자는 분들, 더 조여서 저출산 더 심해지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대들이 몇십년 뒤에 제 인생 대신 살아줄 건가요? 풀자는 분들, 아동수당 찔끔 주는 식으로 뭐가 달라지나요. 신혼부부한테 집 한 채씩 팍팍 안겨주시죠? 몇 년 전에 법안도 냈으면서 왜 이리 졸보처럼 구시나. 국공립 어린이집·유치원 팍팍 늘리고, 도시 과밀지역 학교 더 짓고, 대학 평준화도 하세요. 서울·수도권 사립대는 통째로 사기 어려우니까, 재정지원하는 대가로 입학권을 사세요. 그리고 말로만 찔끔거리는 호봉제 개혁 빨리 하시고. 공무원연금 개혁 빨리 하시고. 이쯤 되어야 ‘진보’라는 간판을 달 만한 거 아닌가요. 염치도 없으셔라. 

현충일에 대통령이 한 말씀 하셨더라고요. “애국 앞에 진보와 보수가 없다.” 와 정말 좋아요. ‘애국보수’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애국진보’도 있나 보네요. 그런데 제가 바로 ‘미래의 대한민국’이걸랑요. 애국하는 셈치고 저희를 위해 양보 좀 해주세요. 싫다고요? 애국의 이름으로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가치와 명분 앞에서 양보할 건가요?

결국 저출산이 문제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은행,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이구동성이더라고. 저출산 지속되면 2030년대 경제성장률 1%대,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 국민연금 유지 어려움, 심지어 건강보험도 유지 어려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유지되기 어려움. 북한? 개방돼서 북한 투자 늘어나면, 남한 출산율은 더 낮아질 수도 있어. 

방법은 한 가지. 단기적으로는 대규모 사회투자를 통해 저출산을 역전시키면서, 장기적으로는 인구구조의 보릿고개를 견딜 준비를 해야지. 이를 위해서 사회 곳곳의 양보를 조직해야지. 뭘 가치로? ‘애국’을 가치로. 이런 플랜에 반대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거야. 미래 생각 안 하는 사람이거나, 나라 생각 안 하는 사람. 아니면 둘 다이거나. 

무엇보다 외치고 싶어. 한국의 청년들이여, 단결하라! 일베도 워마드도 탈조선 이외에는 이 방법밖에 없다! 사회를 갈아엎어라! 

싫어요. 우리는 결혼 같은 거 먼 나라 얘기고요. 그리고 여자는 아기 낳는 도구가 아니에요.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이라니깐요. 

아, 잠깐. 당신 자꾸 ‘나라’ 찾는 걸 보니 꼰대 아니면 국뽕 아냐?

<이범 |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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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국가 수호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민주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더불어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수많은 국민들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은 의료와 복지사업을 통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들에게 보훈하는 공공의료복지기관이다. 전국 6개 보훈병원과 317개 위탁병원, 보훈요양원, 보훈원과 재활센터, 휴양원을 운영하고, ‘나라사랑 행복한 집’ 주거환경개선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나라사랑 행복한 집’ 사업은 공단이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열악한 주거환경에 살고 있는 국가유공자의 주택을 개선하는 것으로, 2009년부터 수행해 왔다. 

지난 5월 4300번째 준공식을 가졌다. 4300번째 주인공은 충북 제천에 사시는 신금순 어르신이다. 1907년 정미의병 때 제천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신광묵 애국지사의 친손녀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50년이 넘은 노후한 좁은 주택에서 홀로 거주해온 어르신을 위해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령친화 주거환경’으로 신축해 드렸다.

보훈병원과 보훈요양원 등을 이용하는 유공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70대에서 80대이다. 보훈병원의 입원환자 중 고혈압과 당뇨 등 11개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비율이 40%를 웃돌고, 고령의 보훈대상자 중 노인 단독가구는 무려 80% 이상이다. 공단이 ‘나라사랑 행복한 집’이라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하게 된 이유이다. 초고령화에 접어든 국가유공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주는 이 사업은 보훈처와 보훈공단, 지자체의 재가서비스와 사회적기업 등과 연계한 서비스망 구축으로 소외된 지역 없이 대상자를 발굴해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

공단은 전국에 구축되어 있는 인프라를 기반으로 1차 진료기능을 재정립하고, 지방보훈병원에 요양병원을 확충하여 만성의료 공급역량을 강화할 예정이다. 나아가 원격 진료를 통하여 유공자들의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관리하며 공공의료복지 전반에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보훈요양병원과 부속의원의 건립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급성기 치료-요양병원-의원-요양원-재가복지-주거 개선’의 전 생애 의료복지 서비스가 체계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국권 상실의 아픔과 그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한편, 국가유공자들의 ‘나라 위한 헌신’이 존경받고 그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확산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따뜻한 보훈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양봉민 |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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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인은 자신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 판단의 근거가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 아니면, 다수결 원칙? 주기적인 공직 선거?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지 도전해보자. 

대한항공 사례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조현민은 대한항공에서 고함치고 욕하며 물컵을 던질 자유를 누렸다. 그런 자유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된다면 조현민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 자유를 구가한 사람은 단 한 명이다. 그만이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었다. 

이 유일한 자유인이 전무로 복귀하자 직원들 사이에는 고통과 절망이 퍼져나갔다. 계열사인 진에어의 직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가 없는 사이 조씨 일가가 망가뜨린 회사를 깁고 꿰매느라 백방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의 복귀로 정부가 제재를 풀 수도 있다는 전망이 흐려지면서 그들의 헌신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자기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 생활이 곧 그들의 삶이다. 이들에게 고통을 피할 길은 없다.

[장도리]2019년 6월 19일 (출처:경향신문DB)

미국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불만이 있는 사람의 선택지가 세 가지라고 했다. 이탈, 항의, 충성. 대한항공 직원은 이탈하지 못했다. 사표 던지고 다른 일자리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항의는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현민에게 충성하며 사는 수밖에 없는 건가? 대한항공 조종사노조가 발표한 것처럼 그건 ‘수치심’ ‘자괴감’ ‘불안감’ 속에서 사는 길이다. 문제는 이런 삶이 대한항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재벌·중소기업도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에서 삼성전자 직원의 말을 인용했다. “출근하면서 영혼을 사물함에 넣어두고, 퇴근하면서 영혼을 다시 꺼내오는 것 같다.” 사실 한국인 거의 다 그렇게 산다. 회사 들어갈 때 시민권을 맡기고 대신 사원증, 즉 노예문서를 목에 건다. 물론 고위간부가 돼 부하 직원을 부리며 살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삼성 사건이 말해주듯 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란,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봉건 영주 이재용의 세습을 뒷받침하거나 그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것이다. 그들도 주체로서 당당한 삶을 살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원리에 기반한다. 자기를 구속하는 결정은 자신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져야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로버트 달은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에서 그 논리를 기업으로 확장한다. 국가가 그러듯이 기업도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고, 국가처럼 기업에도 통치자·피통치자 관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기업에도 민주주의를 적용해야 한다. 자기통치권은 천부적 권리지만, 재산권은 아니다. 그러므로 둘이 충돌하면 자기통치권이 우선이다. 재벌 설립자의 자녀 혹은 손자라는 혈연이 수많은 남의 가족의 삶을 난폭하게 지배할 근거는 없다. 

때로는 군대 같고, 때로는 조폭 같은 한국 기업에서 자기통치의 권리는 언감생심일지 모른다. 층층시하 위계적이고 봉건적인 질서로 짜인 조직문화를 바로잡기만 해도 한국인의 삶에는 숨통이 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다. 역사는 꿈쩍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무너진 기록으로 넘쳐난다. 19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캔자스주가 노조가입을 금지하는 계약을 불법으로 규정하자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재산권을 신성불가침으로 본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기업에는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바뀔 수 있다. 기업이 차지하는 공간은 영원히 민주주의 예외지대라고 생각해보라. 다수는 영영 민주주의 없이 살아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 정부, 초국가적 기업, 금융자본이 국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 미·중은 우리에게 특정 상품을 쓰라 말라 강요한다. 그들은 우리를 구속하는 결정을 내리지만, 우리는 그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다수결? 아무 쓸모 없다. 국경에 갇힌 민주주의로는 속수무책이다.

그동안 민주주의가 확장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민주주의는 자기 영토를 안에서 빼앗기고 밖에 내주면서 축소됐다. 유명무실한 시민권이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섬에 갇혔고, 우리 삶은 민주주의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뭔가 해야 한다. 이게 대한항공 직원들이 고통으로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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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 것이 올바를까? 사람은 습지에 오래 살면 반신불수가 되고 나무 꼭대기에 머물면 벌벌 떨지만 미꾸라지나 원숭이는 그런 곳이 더 편안하다. 사슴은 풀을 뜯어먹고 지네는 뱀을 먹어치우며 솔개는 쥐를 잡아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만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널리 알려진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올바름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그렇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미인이라 해도 물고기나 새, 사슴에게는 그저 도망쳐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두고 장자는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아름다운지 묻는다.

창의와 융합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양하게 개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는 기반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획일성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역이 많다. 이념을 내세운 분단과 대립의 시대로부터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의 과도기를 거치면서는 물론, 민주화의 역정에서조차 단일한 기치 아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이어져 왔다.

우리 교육이 당면한 문제들이 많지만, 학생 개개인이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오히려 더 좁아진다는 점이야말로 정말 심각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내신 반영 여부도 불확실한 일부 탐구영역이나 제2외국어 및 한문 등의 교과목들은 중등교육 현장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개별 과목의 존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접해 보지 않고는 무엇이 더 좋은지, 어떤 분야가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대학 입시에 비중이 높은 교과만 공부하고 남들이 선호하는 전공이 자신에게도 목표가 되는 분위기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창의와 융합의 원석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지금은 한두 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오늘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머지않은 미래에도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진학도 취업도 지금의 우열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짜인 틀에 맞추기를 강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장을 마련해야 할 시대다. 미꾸라지와 원숭이의 올바름마저 인정할 때 창의와 융합이 가능하지 않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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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은 배우다. 데뷔 25년의 중견 스타 배우다. 지난달 개최된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정우성은 영화부문 대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정우성은 오랜 시간 주목도 높은 삶을 살면서도 이를 긍정적 방향으로 표출하는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다.” 정우성의 또 하나의 얼굴은 ‘난민 활동가’다. 그는 5년째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일하고 있다. 

2014년 5월, 정우성은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와 명예사절 임명협약을 맺었다. 덜컥 명예사절을 수락한 것은 그의 삶에 스민 ‘난민’ 유전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서울 달동네에 살던 정우성은 중학생 시절, 포클레인으로 집이 헐려나가는 걸 목격했다. ‘경관 정화 사업’으로 밀려난 그의 가족은 옮겨간 곳에서 또다시 포클레인을 만났다. ‘무기력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기억은 그를 꿈꾸게 했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그는 ‘나누며 돕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간직했다. 우리말의 ‘어린아이’, 영어의 ‘나(I)’, 중국어의 ‘아이(愛·사랑)’에서 이름을 딴 ‘아이재단’ 구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2018년 11월20일(현지시간) 지부티 오복의 마르카지 예멘 난민촌에서 만난 로자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유엔난민기구 제공

정우성은 유엔난민기구 명예사절 자격으로 네팔과 남수단의 난민캠프를 다녀온 뒤 2015년 6월 친선대사로 공식 임명됐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에는 정우성을 비롯해 앤젤리나 졸리 등 세계적인 배우·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친선대사 정우성의 역할은 난민캠프를 방문해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다. 그는 매년 한 차례 이상 해외 난민촌을 찾으며 인스타그램·유튜브 등 SNS를 통해 난민 실태·인권 보호를 호소하고 있다. 현재 세계 난민은 약 6800만명. 미얀마, 베네수엘라, 예멘, 남수단의 내전과 위기가 이어지면서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정우성씨가 2017년 6월 이라크 북부 함다니야의 국내 실향민 캠프 하산샴U3에서 만난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우리도 난민 예외지역이 아니다. 2017년까지 국내에 들어온 해외 난민은 3만여명으로 이 중 2000여명이 난민으로 인정받거나 체류를 허가받았다. 지난해에는 예멘 난민 500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했다. 정우성은 방송·토론회 등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세계난민의날(20일)을 앞두고는 난민 이야기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을 출간했다. 이날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난민을 주제로 북토크도 개최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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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주제에 대해 도전해 보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6월 초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뇌물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건설업자 윤중천은 강간치상과 사기 등 혐의로 각각 구속 기소되었다. 유력 검사와 건설업자 간의 불법 커넥션, 김학의 이외 고위층 남성들의 리스트를 거머쥔 ‘윤중천 리스트’, 호화 별장과 성접대, 2013년 검찰수사와 재수사에서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논란, 마약류를 먹인 후 성폭력을 했고 불법촬영으로 협박했다는 증언까지, 이른바 별장 성접대 사건에는 한국 사회의 비리와 음험한 권력의 결탁이 파노라마처럼 담겨 있다. 

김학의, 윤중천의 구속 기소는 사건을 공개하고 증언한 피해여성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두 차례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검찰이 김씨가 여성들을 성폭행한 것이 아니라 성접대를 받았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폭행·협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도리]2019년 6월 6일 (출처:경향신문DB)

첫째, 성폭력이란 폭행·협박을 사용했을 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지는 것일 때임을 입법부, 사법부, 경찰이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기본권으로 선언한 나라에서 마땅한 법의 해석이다. 최근 미투 운동은 폭행·협박이 행사되지 않은 강요된 성폭력이 만연했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입법부는 성폭력 법제를 대대적으로 구조 개혁해야 한다. 

둘째, 성접대를 ‘한’ 사람은 피해여성이 아니라 윤씨이다. 굳이 여성을 주어로 쓰고자 하면 ‘여성이 성접대의 매개 혹은 대상’이 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성접대라는 용어 자체가 남성과 남성 간의 교류·결탁·형제애 등을 나타내고 여성은 철저히 소외·배제·타자(他者)가 된다. 제3자가 성접대를 ‘했다면’ 그 매개가 된 여성은 무엇을 했던 것인가. 이 사건의 피해여성이나 다른 피해여성들이 이후 어떤 대가를 받았건, 그렇지 않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지속적으로 해야 했고, 이에 대해 거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면 그것은 폭행과 협박을 동반한 일회성 성폭력보다 훨씬 더 중대한 성적 유린이자 인권 침해이다. 이것을 성접대라고 이름 붙인다면 피해여성들은 피해자가 아니게 되어 그녀들에게 자행된 폭력·마약·불법촬영·협박 등 행위의 불법성을 따질 수 없게 된다. 법원과 검찰은 이 사건을 다시 보라. 

셋째, 이런 사건의 지독함은 그 체계적 성격에도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와 피해자(들)라는 2자관계를 상정하는 우리 형법의 성폭력 범죄와 달리 현실의 많은 성폭력은 제3자가 계획하고 조정하고 촉진하는 양상을 띤다. 김학의 사건이나 ‘버닝썬’, 장자연 사건에서처럼 말이다. 예컨대 독일형법 제177조 제2항에는 “타인에 대해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그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하거나 그로 하여금 제3자에 대해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제3자의 성적 행위를 수인하도록 만드는 자는, 범죄행위자가 타인이 반대의사를 형성하거나 표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음을 이용하는 경우, 범죄행위자가 타인으로 하여금 성적 행위를 실행하거나 수인하도록 느낄 수 있을 만한 해악으로 위협함으로써 강요한 경우”에도 처벌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독일형법의 성폭력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피해자는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우 취약하여 문제된 성적 행위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할 수 없거나 그 성적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받을 해악으로 위협받는 경우 등을 상정한다. 또 제3자에게 성적 행위를 실행하게 하거나 그의 행위를 수인하도록 하는 입체적 관계를 상정한다. 이는 전시(戰時) 성폭력을 통해 본 법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윤중천과 김학의 간의 결탁, 이것이 다시 김학의와 다른 동료 검사 간의 유착관계로 확대된다면 이 성폭력의 발생과 지속, 은폐는 매우 체계적인 성질을 가진다. 

넷째, 성접대라는 표현은 적어도 법의 언어로 쓰여서는 안된다. ‘위안부’라는 표현처럼 가공할 폭력을 ‘위안’으로 덧씌우고 피해여성들의 위엄을 우롱하기 때문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민의 인권보호에 흠결이 생길 수 있다’ 하였다. 검찰과 경찰이 범죄 증거를 가지고도 그저 성접대쯤으로 호도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남성들의 리그로 만든다면 여성국민의 인권이야말로 흠결 속에 남을 것이다. 존엄한 여성들을 기껏 교환대상으로 삼은 최근의 성폭력 사건들을 검경 수사권 문제로 몰고 가거나 이용하지 마라.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권력은 여성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니며, 여성들이 당한 피해는 법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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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문화재거리 부동산 매입으로 투기 의혹을 받아온 손혜원 무소속 의원이 법정에 서게 됐다. 서울남부지검은 손 의원을 부패방지권익위법 및 부동산실명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손 의원이 목포시청 관계자로부터 비공개 자료를 사전에 입수한 뒤 이를 활용해 부동산을 사들인 것으로 봤다. 지난 1월 의혹이 불거진 뒤 손 의원은 이를 부인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관련 보도를 한 언론사를 고소했다. 검찰은 그러나 일부 의혹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손혜원 의원이 지난 1월23일 목포 역사문화거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검찰에 따르면 손 의원은 2017년 5월과 9월 목포시의 ‘도시재생 사업계획’ 자료를 확보한 뒤 이를 토대로 남편 명의의 문화재단과 지인으로 하여금 14억원 상당 부동산을 매입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들 부동산 가운데 7200만원 상당 토지·건물은 손 의원이 조카 명의를 빌려 차명 보유한 것으로 판단했다. 손 의원과 관련된 부동산은 국토교통부가 지난 4월 확정한 ‘1897 개항문화거리’ 도시재생 뉴딜사업 구역에 모두 포함돼 있다. 검찰은 같은 자료를 활용해 부동산을 사들인 손 의원 보좌관, 문제의 자료를 빼돌려 부동산 투자에 이용한 지역 인사도 함께 재판에 넘겼다. 다만 손 의원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당 간사로서 문화재청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은 무혐의 처분했다.

18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손혜원 의원 사무실에 출입문이 닫혀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기소된 후 손 의원은 페이스북에 “다소 억지스러운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납득하기 어렵다”며 “재판을 통해 목포 부동산에 대한 차명 건이 하나라도 밝혀지면 전 재산 기부는 물론 국회의원직도 사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소가 곧 유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명확한 사실관계는 향후 재판을 통해 가려질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손 의원의 입장 표명은 책임 있는 정치인답지 않다고 본다. 검찰 수사 결과의 핵심은 ‘업무상 취득한 비공개 정보’를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부분이다. 손 의원은 그러나 여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5개월 내내 강도 높게 조사받은 분들, 고생 많으셨다”고 위로하면서 정작 주권자를 향한 유감 표명은 없었다.

손 의원은 재판 과정에서 무죄를 주장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정치도의적 책임은 분명히 해야 한다. 국회도 손 의원 기소를 계기로, 국회의원을 포함한 공직자들의 이해충돌 방지를 위한 입법에 나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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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가 18일 인천 서구, 영종, 강화 일대에서 발생한 ‘붉은 수돗물’ 사태의 원인에 대한 정부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사건은 인천 서구 공촌정수장이 서울 풍납취수장 대신 인근 수산·남동정수장의 물을 끌어와 공급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수도의 공급 경로를 바꿀 때는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을 빼내고 물의 속도를 줄여 관로 내부에 있는 물때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민이 먹는 물을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했다니 어이가 없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왼쪽)과 박남춘 인천시장(왼쪽에서 세번째)이 지난 17일 인천 서구 청라배수지에서 수돗물의 수질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환경부 제공 <연합뉴스>

조사 결과를 보면 인천시는 초동 대처는 물론 사후 대응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인천시 상수도본부는 연일 붉은 수돗물이 나오는데도 “수질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물이 일시적으로 혼탁해졌다가 다시 맑아졌다는 이전 사례만 믿고 일주일 동안 손을 놓은 것이다. 지하관망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오염된 물을 빼내지 못했다. 심지어 보름이 다 되도록 탁도계가 고장나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 결과 정수 탁도가 먹는 물 수질 기준을 넘은 오염된 물도 일시적으로 시민들에게 공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인천시 담당자들은 매뉴얼도 지키지 않았다”며 “거의 100% 인재”라고 비판한 것은 당연하다. 박남춘 인천시장이 전날 인천시의 대응이 안이했다고 사과했지만 이것으로 그칠 상황이 아니다. 조 장관도 “인천시가 충분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인천시는 오는 22일부터 시작해 29일까지 전 지역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완전히 정상화하려면 한 달 정도가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당장 시민 1만여명이 밥을 해먹기는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있다. 빵과 우유로 급식을 대체하는 학교가 150여곳이나 되며, 생수로 샤워하는 주민도 많다. 깨끗한 수돗물 공급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 책무다. 정부와 인천시는 최대한 일찍 원상 복구해야 한다. 그리고 20일 동안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물관리 시스템 전반을 혁신해야 한다. 정수장뿐 아니라 급수와 배수관망까지 총망라해 관리하는 시스템을 새로 마련하고, 상수관도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 오염된 수돗물 공급은 인천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정부는 경각심을 갖고 전국적으로 수질 관리 실태를 점검한 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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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비행시간만 20시간을 넘는다. 도착지의 계절이 겨울이라, 두꺼운 옷들을 꺼내어 트렁크에 담는다. 노트북컴퓨터와 휴대전화기, 이 기계들을 충전하는 데 필요한 케이블과 충전기, 가져가야 할 자료들…. 꼭 필요한 짐들만 늘어놓았는데도 헝클어진 머릿속이 마룻바닥에 나앉은 것 같다. 

이 와중에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책들이다. 휴대전화기의 상태를 비행모드로 바꾸고 강제적 오프라인 상태로 돌입하는 시간을 위한 것이다. 기내에서 인터넷이 가능한 항공기들이 늘어간다지만 반갑지 않다. 나와 접속하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변명하지 않고도 ‘부재’할 수 있는 이 짧은 시간의 자유를 뺏기고 싶지 않아서다. 

쌓아둔 책들을 한꺼번에 다 읽어치울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만, 결국 가져갈 수 있는 책은 한두 권이다. 짐을 줄이려고 휴대전화기에 전자책을 다운로드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몇 시간만이라도 모니터에서 눈을 뗀 채 종이로 된 책장을 넘기고 싶다.  

동행할 책 선택의 첫 단계는 주제 분류. 비타협적으로 주저없이, 일이나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고른다. 삶의 틈새에 주어진 시간을 익숙한 것들과 지내고 싶지 않다. 그다음은 무게다. 책의 내용, 완성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어쩌면 그와 반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무거운 책들은 탈락이다. 그들은 내가 땅에 발붙이고 있는 시간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이 관문마저 통과한 후보군에는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아무 페이지나 열어본다. 흘깃 보는 그 순간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문장이 있어야 한다. 인지신경학자 메리언 울프가 <다시, 책으로>에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인용해 말한 것처럼 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고 믿는다. 누구와도 접속하지 않을 수 있는 지상 1만미터 상공의 몇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와 아주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폭력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내가 말들의 여백을 곰곰이 헤아리고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누군가와…. 

인터넷 공간과 광장에서 왕왕거리는 사납고 영혼 없는 말들로 하루가 가득 채워져 몸도 정신도 넝마가 된 듯한 밤이면, 나는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꺼내 펼쳤다. <열하일기>로 시작해서, 스피노자의 자취를 따라가는 21세기 뇌과학자의 지적 모험을 좇아가다가, 외계생명체와 인간의 대화를 그린 SF소설에 머무는 식의 방향도, 목적도 없는 독서다. 책이 열어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기갈 들린 듯이 빨려 들어가는 그런 시간이라도 없다면, 지금 이곳의 시궁창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국인이 가진 말들 중 극히 적은 몇 개의 조악한 단어만이 공격과 혐오와 타자 부정을 위해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되는 시간을 살다보면 인간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싶어진다. 그러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청년시절 “카프카의 <변신>을 다 읽고 났을 때 그 낯선 천국에서 살고 싶다는 거부할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인간의 말들이 이루는 더 높고 어려우나 귀한 세계도 있다. 그런 세계를 엿보다 보면 내가 혹은 우리가 이보다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고, 그렇게 살고 싶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23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다. 퀴어소설을 쓰는 작가가,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고정된 젠더를 벗어나 ‘나’라는 고유한 젠더로 시를 읽는 시인이, 삼시세끼를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 공유하는 세상에서 요리하는 인류를 탐구하는 PD가, 100년을 살아본 노철학자가 무르익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것이다. 

그 치유의 말들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지만, 나는 동행할 책과 길을 떠난다. 파일럿으로서 <비행의 발견>이라는 책을 낸 저자는 이 한 문장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날개’라는 말에는 아직도 신의 자취가 남아있다. 어쩌면 날개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날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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