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100만명의 홍콩 시민이 나오고 이어서 200만명이 나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결국 사과했고, 문제의 송환법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제 행정장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위의 배경에 대해 많은 분석과 설명이 나왔다. 또 수많은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홍콩과 한국의 민주화운동 혹은 촛불집회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시위대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광둥어 버전을 노래했다는 뉴스도 화제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국경을 넘어서 연대하는 모습은 꽤 감격적이다. 또 이유가 어찌 되었든 폭력과 통제로 체제를 존속하려는 권력들의 불의함도 이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홍콩 시민들이 16일 도심에서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어졌다. 악법을 철회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범죄인 인도 조례’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홍콩 _ AP연합뉴스

그런데 우연히 본 한 문장에 약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홍콩의 상황이 '87년 광주항쟁'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오타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상당한 사람들이 그 게시글을 공유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에 가깝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가령 촛불집회를 외국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어떨까?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입장에 따라 설명 역시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홍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이런저런 뉴스들을 찾아본다고 해도, 그 맥락들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가 홍콩과 ‘비슷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의 민주화는 또 어떤가? 우리는 과연 우리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설명할 언어들과 기준들을 충분히 갖고 있을까? 결국 둘을 비교하고 그것을 통해 유사성을 판단할 정확한 근거가 우리에게도 딱히 없는 셈인 것은 아닐까에 생각이 닿았다. 

물론 안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단순히 무언가를 지지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뿐만이 아니다. 가깝게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싸움들에서 정확한 상황 진단과 이념적 선명성 같은 것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최초의 한정된 문제의식들에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이 붙어가는 과정 속에서 투쟁은 커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각자가 갖고 있는 상이한 불만들이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만나 용광로처럼 녹아드는 과정이 반드시 끼어들었다.

이 불만의 용광로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되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던 미국인들, 프랑스의 노란조끼들, 어쩌면 한국의 촛불 등등. 이들은 때로는 상이하다 못해 양립할 수 없는 입장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각자의 불만을 안고 녹아들었다. 하지만 이 용광로의 열기와 불빛에만 현혹되어서는 정작 그것이 제련해 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기도 한다. 부당한 권력을 몰아내고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그 소수자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심지어 이 두 개의 목소리가 같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일도 적지 않다. 우리가 보았던 대부분의 흐름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고,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상황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홍콩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분노하는 것과, 드러난 현상에 대하여 조금 더 사려 깊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를 배척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 동안 변화에 대한 열망과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왔다. 당장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굴다가, 음울한 목소리로 ‘그래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홍콩의 시민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도래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이 우리에게도 길을 보여주기를, 무엇보다 무사하기를 빈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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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말이다. ‘척도’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잣대’다. 한자로 ‘척(尺)’인 ‘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길이 단위다. 포목점에서는 폭이 일정한 긴 천을 둘둘 말아 두루마리로 보관하다, 손님이 원하는 만큼, 눈금이 표시된 막대로 길이를 재서 끊어 팔았다. 자를 재는 이 막대기가 바로 ‘잣대’다. 한 자가 약 30㎝니 삼척동자의 키는 1m에 미치지 못하고, <삼국지> 구척장신 관우는 2.7m로 세계 신기록이다. 기네스북 감이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말에서 ‘인간’이 제각각 다른 개별적 존재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컫는다면, 사람마다 잣대가 다르니 나에게 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한 자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르니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의미다. 프로타고라스의 말에서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모두를 가리킨다면, 사람에게 맞는 얘기라 해서 강아지에게도 맞는 얘기는 아니라는, 강아지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주장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은, 모든 것을 인간의 시각에서 보겠다는, 인간중심주의 선언으로 볼 수도 있다.

왼쪽 발을 한 줄로 이어 붙여 여럿이 나란히 선 후 발 크기의 평균으로 1피트(ft)를 정했음을 보여주는 중세 유럽의 그림. 위키피디아

한국사 공부할 때 등장하는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은, 길이(度)와 부피(量), 그리고 무게(衡)를 재는 표준(잣대)을 하나로 정했다는 뜻이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부피는 가로, 세로, 높이 세 방향의 길이를 곱해 얻으니, 부피의 단위를 길이 단위와 별도로 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안에 가득 담긴 양으로 부피를 재는 됫박을 따로 만들어, 길이를 재는 잣대와 함께 쓰는 것이 현실에서는 훨씬 더 편했으리라. 무게는 돌림힘의 평형을 이용해 저울로 쟀다. 길이를 재는 잣대, 부피를 재는 됫박, 무게를 재는 저울을 국가에서 정한 것이 바로 도량형의 통일이다.

시간의 길이를 재는 잣대는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밤에 달을 보면 알고, 하루 중 지금이 언제인지는 낮에 해를 보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해의 길이는 나라 안 어디나 별 차이 없지만 계절에 따라서는 크게 변한다. 낼모레 하짓날, 서울에서 해는 오후 7시57분에 져서 다음날 오전 5시11분에 뜬다. 밤의 길이가 9시간14분으로 짧다. 동짓날은 거꾸로다. 무려 14시간26분이 밤이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 사람들에게 야간 통행금지 시간의 시작은 종을 28번 쳐서(인정), 끝은 다음날 새벽 북을 33번 쳐서 알렸다(파루). 밤 시간을 5등분한 것이 ‘경’이고 ‘경’을 다시 5등분한 것이 ‘점’인데, 일경에 해당하는 시간이 하짓날에는 111분, 동짓날에는 173분으로 무려 1시간의 차이가 난다. 사시사철 들쭉날쭉 변하는 잣대로 밤 시간을 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정은 이경에, 파루는 오경삼점에 쳤으니, 하짓날에는 오후 9시48분에서 다음날 오전 4시27분, 동짓날에는 오후 8시10분에서 다음날 오전 6시34분까지가 통행금지 시간이었던 셈이다. 성문을 열며 동트는 새벽을 알려주는 것이 파루다. 우리 조상들은, 곡식이 빨리 성장해 부지런히 일해야 할 여름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일했고, 추수가 끝나 한가한 겨울에는 느지막이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여름밤과 겨울밤에 다를 수 없다. 뉴턴 역학과 칸트 철학의 시간은 관찰 대상의 변화를 측정하는 순수한 형식이다.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지만, 무얼 담아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빈 그릇이다. 과거, 동양의 시간 개념은 고전물리학과는 무척 달랐다. 우리 선조들에게 시간은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의 리듬에 맞춰져 있어 계절과 밤낮에 따라 함께 변했다. 해 뜨는 시간이 매일 다른데도 일출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던 선조들이 우리 눈에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조들이 오늘 아침 우리를 봤다면, 해 뜬 지가 언젠데 여전히 잠자리에서 꾸물대는 후손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과학에도 잣대가 있다. 거리, 시간, 질량뿐만이 아니다. 전류, 온도, 물질의 양, 빛의 세기를 재는 잣대도 있다. 한국의 1m가 미국에서는 10m라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잣대에 대한 합의는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다. 모든 나라가 합의한 여러 표준잣대의 모음이 국제표준단위계다. 얼마 전까지도 질량 1㎏의 표준은 파리에 보관된 합금 덩어리였다. 외계인이 지구인의 1㎏이 얼마인지 알려면 굳이 파리를 방문해야 했다는 뜻이다. 이제 1㎏은 물리학의 기본상수인 플랑크 상수에 기반해 정해졌다. 외계인과 통신을 하게 되면, 1㎏이 얼마인지 이제 드디어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물리학의 잣대들이 우주적 규모의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면에서, 최근 발표된 국제표준단위계는 과학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foot(unit)’을 검색해보라. 1피트(ft)를 어떻게 정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중세 유럽 그림을 볼 수 있다. 왼쪽 발을 한 줄로 이어 붙여 여럿이 나란히 서고는, 발 크기의 평균으로 1피트를 정하는 모습이 담겼다. 사람마다 발 크기가 모두 다른데, 내 발만 특별하다고 우기면 우리는 공통의 잣대에 합의할 수 없다. 필자는 이 그림을 보며, 현대의 민주주의를 떠올렸다.

삶에도 잣대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 남의 잣대가 나와 다르면,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내 잣대를 먼저 의심해보는 성찰적 회의도 중요하다. 서로의 잣대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많은 이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 잣대를 찾아가는 지난한 노력의 이름이 민주주의다. 또, 민주적인 방법으로 숙의를 거쳐 합의한 결과라면 내 잣대와 달라도 그 결과를 존중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다. 내 발만 발이 아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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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후배가 지난주 결혼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14년을 연애하고 드디어 식장에 들어섰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정말 예쁘더라, 들떠서 이야기하는데 듣던 이는 시큰둥하게 “결혼하기 전에 평균 3~4명은 만난다는데 한 사람이라니 손해 아니냐”고 대꾸했다.

마치 ‘표준’처럼 통용되는 ‘평균 3~4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 결혼정보업체가 과거 결혼적령기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미혼 남녀의 이성교제 평균 횟수는 ‘남성 4.7회, 여성 4.3회’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숫자는 교제경험이 없다(13.3%)부터 10회 이상(8.3%)이라는 답변을 모아서 나눈 것이다. 이 같은 부류의 설문조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평균은 ‘특정 집단의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푯값’으로 추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 그 자체가 ‘표준’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평균’은 ‘표준’을 넘어 ‘정상’의 자리까지 종종 넘본다. 서울 거주 25~29세 남성의 평균 키는 175.6㎝이고, 고3 여학생 평균 몸무게는 57.8㎏이고, 아기는 평균 생후 6개월이면 뒤집기를 한다는 등의 통계 수치를 접하면 사고는 자동회로처럼 ‘평균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경우를 놓고 가늠하기 일쑤다.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그 같은 ‘평균’이란 숫자는 별 도움이 안된다. 발달심리학자인 토드 로즈 하버드대 교수가 <평균의 종말>에서 소개한 ‘노르마(Norma)’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르마는 미국의 한 부인과 의사가 젊은 여성 1만5000명으로부터 수집한 신체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조각가 에이브럼 벨스키가 1942년 만든 조각상이다. 노르마의 뜻이 ‘정상’인 것처럼 이 ‘표준모델’은 “평균값이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1945년에는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까지 열렸다. 그런데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엇나갔다. 대회에 참가한 3864명의 여성 중에서 9개 항목의 ‘평균’ 치수에 딱 들어맞는 ‘노르마’의 몸을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균=표준=정상’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전문가들은 당황한 나머지 ‘여성들이 건강하지 않아서 빚어진 문제’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극도로 다양한 인간은 ‘평균’이라는 ‘납작한 숫자’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납작한 말’도 마찬가지다. 명쾌한 진실 같지만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예로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가 있다. 해부학적 특징 때문에 타 인종보다 물에 덜 떠서 그렇다는 건데, 미국의 시몬 마누엘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 여자 자유형 1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 흑인들이 수영을 못하는 것은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던 백인들이 오랫동안 이들의 출입을 금지한 인종차별 문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시험 점수가 좋으면 똑똑하다”도 비슷한 예다. 로즈 교수에 따르면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SAT 점수와 출신학교의 명성이 재능을 예견케 하는 지표가 되지 못하고, 학부 성적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유효하다고 본다. 각 인재가 가진 재능이 들쭉날쭉해서 어느 하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 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맹점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납작한 숫자의 눈치를 보거나, 납작한 말에 가두기엔 삶이 넘치도록 다양하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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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들은 사고뭉치였다. 나 어렸을 땐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땠는데, 아랫목 말고는 달달 떨다가 잠을 설쳤다. 이후 등장한 연탄 시대. 더러 연탄가스를 마시기도 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것은? 연탄가스. 취해서 해롱해롱하면 동치미를 떠다 먹었다. 어이없는 치료법. 국회는 국회의원들이 머리를 맞대는 집일 텐데, 요샌 농땡이 치는 재미가 좋은가. 마을회관은 노인들이 모여 점당 100원 화투를 치다 싸우는 집. 교회는 신도들이 모여 복 달라고 떼쓰다가 뜻대로 안되면 애먼 대통령을 욕하는 집. 대부분 가정집은 뿔뿔이 방에 들어가 휴대폰을 보다가 잠드는 집. 

언젠가 북유럽에 갔다가 한 숙소에서 오로라를 보았다. 내 기억 속 오로라 빌라.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소설에도 ‘오로라의 집’이 등장한다. “빌라 오로라라는 이름과 관목숲 가운데로 흘긋 보이는 집의 진주 빛깔과 그리고 무척 넓지만 전혀 다듬어지지 않아 새와 들고양이가 많이 살고 있는 정원 때문에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모험심으로 두근거렸다. … 고양이들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에서 마치 빌라 오로라 여주인의 피조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집 입구에 적혀 있는 ‘우라노스’라는 그리스어는 ‘하늘’이라는 뜻.” 

하늘이 훤히 보이는 집은 얼마나 감사한가. 서울 살 때 반지하에서 잠깐 지내기도 했다. 하늘이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새마을기차를 타고 올라온 어머니는 캄캄한 방에 웅크리고 앉아 퍽퍽 한숨을 내쉬셨다. 책냄새뿐인 그 반지하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자연을 찬미하는 책들을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창문을 열자 오로라가 반기던 밤에 나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문득 났다. 하얀색 구름을 피어올리고 싶었다. 담배를 좋아하는 신부님 친구가 있는데, 공기 좋은 데 가면 항상 담배를 피우자고 한다. 얻어서 피우는 담배는 제법 맛이 있지. 내가 피어올린 하얀 색깔까지, 오로라는 다양한 빛깔을 서로 품었다. 그래서 아름답게 밤하늘을 물들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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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주인공(르네 젤위거)은 새해맞이 파티를 망친 뒤 자신의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레드 와인을 마시면서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를 온몸으로 따라 부른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드럼 치는 흉내까지 내는 주인공의 연기에 보는 이들은 긴장감에서 해방되고 속 시원함마저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집에서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엔터테인먼트그룹 SM C&C가 만 20~59세 2400여명을 대상으로 ‘여가시간에 어디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라고 물었더니 67%가 “집에 머문다”고 답했다. 이들 중 70%는 “집이 제일 편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들어 집에서 운동을 즐기는 ‘홈트(홈+트레이닝)’, 맛집 요리와 가벼운 술을 즐기는 ‘홈술’ 등 오로지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홈족’이 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빗댄 홈 루덴스(Home Ludens)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홈 루덴스가 갑작스럽게 생긴 문화는 아니다. 덴마크는 휘게(Hygge)의 나라다.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한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며, 촛불 켠 방 안에서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게 바로 휘게다. 핀란드에는 팬츠드렁크(PantsDrunk)가 있다. 텅 빈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음악 등과 함께 혼술을 즐기는 것이 팬츠드렁크다. 우리의 조상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내린 뒤 바람에 온몸을 맡기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겼다고 한다.

미스카 란타넨이 쓴 <팬츠드렁크>에는 팬츠드렁크를 해야 하는 100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니까”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어서”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은 금요일(요일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이니까” 등인데 100번째 이유가 “늘 핑계는 있는 법이니까”이다. 팬츠드렁크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물은 5가지다. 뭘 해도 괜찮은 텅 빈 공간(집이 가장 좋다), 적당한 양의 술, 편한 옷, 디지털 기기 하나, 그리고 가벼운 먹거리 등이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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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북한 주민 4명을 태운 채 강원 삼척에서 발견된 북한 어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북한 어선은 당초 발표한 대로 삼척 인근 해상이 아니라 삼척항 부두에 접안했다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는 것이다. 군 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 어선은 지난 12일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뒤 14일 밤 삼척 동쪽 5㎞ 해상에서 엔진을 끄고 기다리다 해가 뜨자 삼척항으로 진입했다. 이어 북한 주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리려다 112에 신고됐다. 4년 전 북한군 1명이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 초소까지 다가와 귀순한 일명 ‘대기 귀순’ 사건과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 어선이 NLL을 넘어 3일간 돌아다녔는데도 감시망이 전혀 포착하지 못한 점이다. 당시 경비함과 P-3C 대잠초계기가 정상적으로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NLL 130㎞ 이남까지 내려온 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삼척항 인근에 있는 영상감시체계가 이 선박을 1초간 2번 포착했지만 감시병들은 이를 지나쳤다. 해양수산청과 해경도 CCTV로 이 선박을 관측하기는 했으나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측 어선으로 오인했다.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군과 해경의 해상·해안 3중 감시망이 한꺼번에 모두 뚫린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초 군 당국은 조사 결과 해상 및 해안 감시에 허점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어선이 길이 10m, 폭 2.5m밖에 되지 않은 작은 목선인 데다 파도에 반사돼 관측할 수 없었다며 노후화한 관측 장비 탓을 했다. 또 선박이 움직이지 않아 다른 물체로 오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 선박은 28마력 엔진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사건을 축소, 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19일 “경계작전 실태를 되짚어보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 긴장완화 조치로 가뜩이나 경계 태세에 우려가 큰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유감스럽다. 진상을 조사해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해상·해안 경비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노후화된 관측 장비를 교체하고, 장병들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감시 능력도 키워야 한다. 허물을 덮으려는 군의 고질적인 병폐도 차제에 뿌리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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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과 관련, 한국과 일본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했다고 19일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소송 당사자인 일본 기업을 포함한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함으로써 당사자들 간의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일본이 이를 수용할 경우 일본 정부가 요청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 1항 협의절차의 수용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일본에 전달했다”고 했다. 이를 일본 정부가 수용하면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강제동원 일본 기업과 포스코 등 한국 기업이 함께 출연해 만들어진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제공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0월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가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당시 법원행정처는 일제 강제징용 재판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정부의 이번 제안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을 지우기 어렵다. 대법원이 지난해 10월31일 신일철주금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정부는 지난해 11월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외교부·법무부 등이 참여하는 차관급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한·일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여러 의견이 쏟아졌고, 이번 제안도 진작에 거론돼온 방안 중 하나다. 딱히 새로운 내용도 아닌 방안을 내놓는 데 8개월 가까이 걸린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최근 한·일관계는 전방위로 파열음이 일고 있지만, 핵심 원인은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판결이다. 물론 이 문제는 사법부와 행정부의 입장이 엇갈린 사안인 만큼 대응하기가 까다롭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정리한 공식입장에 배치되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게 미온적이었다. 한·일 간 국장급 회담을 몇번 여는 시늉만 냈을 뿐 답을 미루면서 일본이 중재위원회 회부를 요구하는 사태에 이르도록 한 것은 유감스럽다.

이를 일본이 수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도 벌써부터 나온다. 하지만 한국이 처한 제반 여건들을 감안한다면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추가소송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반발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내놓은 제안인 만큼 일본도 대승적 견지에서 검토할 것을 당부한다. 이번 제안이 악화된 한·일관계 복원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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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국회의장이 여야 3당 원내대표에게 국회 정상화의 걸림돌이 돼온 ‘경제청문회’ 대신 토론회 형태의 ‘경제원탁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문 의장은 지난 18일 여야 3당 원내대표와 회동한 자리에서 “각당 경제통 의원들과 민간 경제 전문가들이 참여해 경제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원탁회의를 해볼 수 있지 않느냐”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경제청문회 개최를 국회 정상화 조건으로 내건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자유한국당에 복귀 명분을 주는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두 원내대표는 찬성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일단 국회를 정상화한 다음에 논의할 문제”라는 이유에서다. 그간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한시가 급하다고 비명을 질러온 여당이 이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문희상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오른쪽),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9 경향포럼 행사에 앞선 차담회에서 환담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금 우리 경제는 벼랑 끝으로 몰린 상태다. 대외 경제여건은 악화되고 있고, 투자와 소비는 계속 위축되고 있다. 미·중 간의 무역전쟁이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경제의 하방 위험이 커졌다는 건 모두가 인식하는 바다. 이 마당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경제상황을 진단하고 해법을 찾자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굳이 국회 정상화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현인(賢人)회의’를 해야 할 현안들이 넘쳐나고, 여당이 앞장서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해도 모자랄 판이다. 아마 원탁회의가 성사되면 정부를 공격하며 정치공세를 펼치려는 야당에 멍석을 깔아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겠지만, 너무 경직된 생각이다. 여당은 지금 그렇게 시시콜콜 앞뒤를 잴 만큼 한가하지 않다. 

마지막 국회 본회의가 열린 지 75일째다. 이 정도면 휴업이 아니라 사실상 폐업 상태다. 정부는 4월 하순에 추경안을 국회로 넘겼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심사는커녕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최저임금, 주 52시간 근무제 등 국회에서 다뤄야 할 다른 민생법안도 수두룩하다.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라고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국회 문을 걸어 잠근 채 말로만 민생을 챙기겠다는 건 위선이요, 기만이다.

정국을 풀 책임은 여당에 있다. 그래서 여권의 국정 책임은 무한대라고 하지 않는가. 때로는 마음에 차지 않아도 먼저 양보하고 포용하는 게 여당다운 태도이다. 대국적 차원에서 여당은 경제원탁회의를 수용하고, 한국당은 조건 없이 등원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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