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1987년 준공되었으니, 30년이 넘었다. 이곳에서 용광로 안전밸브를 통해 중금속이 포함된 분진과 유독가스가 일상적으로 배출되었다. 한 세대 이상 쉬쉬했던 환경오염사고가 내부 제보로 지난 3월 밝혀진 것이다. 최근 해당 지자체는 광양제철소에 조업정지 10일 처분을 통지했다. 고의적인 안전밸브 개방에 대해 내려진 30년 만에 최초의 조업정지 조치였다. 환경부도 입장을 내고 대기환경보전법 등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라고 못 박는다.  

포스코는 경제손실이 막대하다며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걸겠다고 반발했다. 포스코가 제공한 데이터로 몇몇 언론이 조업정지를 ‘제정신으로 한 일인가’라며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회사는 뒤로 빠지고 ‘경제 파탄’ ‘포스코 죽이기’라며 포스코 협력사를 동원했다.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굴지의 대기업이라면, 30년 넘게 벌어진 건강피해와 환경오염 논란에 머리를 숙이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주민건강영향조사 실시, 환경오염시설 개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광양제철소는 5기 설비에 연간 2500만t의 철 생산능력을 갖춘,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포스코에너지는 맹방 해안과 안정산 일대에 삼척석탄화력발전소 1, 2호기 건설 공사를 진행한다. 최근 공사 현장에서 길이 1.3㎞ 이상의 ‘지정 문화재급’ 석회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사업시행자인 포스코에너지가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 어느 곳에도 동굴의 존재는 없다. 부지 전체의 지반 조사, 철저한 문헌 조사와 현장 검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자는 ‘거짓’ 보고서를 제출했고 환경부와 문화재청은 검증 없이 믿었다. 지금이라도, 원주지방환경청은 환경영향평가법에 따라 현황조사를 실시하고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공사 중단 명령을 내려야 한다.

서울그린캠퍼스 홍보대사 대학생들이 4일 서울광장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촉구하며 노란우산으로 ‘1.5도C’를 표현하고 있다. 세계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해야 한다고 지난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에서 요청했다.울그린캠퍼스 홍보대사 대학생들이 4일 서울광장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촉구하며 노란우산으로 ‘1.5도C’를 표현하고 있다. 세계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해야 한다고 지난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에서 요청했다. 김영민 기자

한국 온실가스 배출량의 37%는 발전부문에서 기인하며, 발전부문의 80%는 석탄발전 때문이다. 미세먼지 배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현재 가동 중인 60기의 석탄발전 배출량은 경유차 930만대보다 많다. 환경비용만 고려해도, 석탄발전은 경제적으로도 최적 전원이 아니다. 삼척석탄화력발전소도 미세먼지 연평균 농도가 우리나라 관리 기준을 초과할 것이다. 비소, 벤젠, 카드뮴, 6가크롬 등 발암물질도 배출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고스란히 심각한 건강 피해로 이어진다. 맹방 해안에 매립 중인 석탄 하역부두의 경관 훼손과 생태계 파괴, 비산먼지 등도 문제다. 포스코에너지는 ‘삼척시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고용창출 등 지역사회와 동반성장’을 홍보하고 있다. 사적 이윤을 볼모로 주민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은 광양제철소와 똑같다.

국민의 건강권과 알 권리가 경제 때문에 희생되는 개발 맹신 시대는 지났다. 경제냐 환경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케케묵은 이분법적 논쟁도 적절하지 않다. 2015년 유엔 총회는 글로벌 공동 추진 목표로 ‘지속 가능 발전 목표’를 채택했다. 슬로건은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속성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주민의 건강을 외면하지 않고, 경제와 동시에 환경을, 분배의 정의를,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광양제철소와 삼척화력발전소에 대한 포스코의 겸손한 사과와 전향적인 조치를 바란다.

<윤상훈 |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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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매키는 이름난 병원의 잘나가는 외과의사다. 행복한 가정과 고급저택을 가지고 있다. 유능하지만 환자의 고통에 냉담한 그가 어느 날 후두암에 걸렸다.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환자로 신분이 바뀌자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검사를 시행하는 의사는 불친절하고 일방통행이다. 병원은 방사선 치료 시간을 지키지 않고, 간호사에게 따져보지만 여의치 않다. 무신경, 무성의, 무대응에 분노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병원 관계자는 없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병원에,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의사가 절망한다. 1991년에 나온 미국 영화 <더 닥터>의 줄거리다.

어떤 전문가는 그의 전문지식을 구하는 소비자의 말에 둔감하다. 아예 외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직업적 판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쁜 태도는 냉소와 비웃음이다. 입원 전의 잭 매키는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레지던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외과의사가 남의 살을 찢는데 무슨 감정을 갖나?”

나는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 출마 예정자가 됐던 일이 있다. 판사 재직 중이던 1995년 어느 일간신문에 내가 집권여당 소속으로 모 지역구에 출마하려 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다른 신문이 인용하면서 근 한 달간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지인들로부터는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도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답만 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해당 정당의 조직국에서 자료가 나왔다는 거였다. 책임자인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자료를 흘린 일이 없다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판사님, 참 이상하시네요. 남들은 그런 데 이름을 못 올려 안달인데, 왜 그걸 싫어하세요?”였다.

생각다 못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다. 사무원의 퉁명스러운 응대는 그렇다 치고, 변호사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이거, 사건이 됩니까?”였다. 된다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변호사가 “판사가 된다면 되겠지…”라고 하더니, 그 정당 대표자의 대표권을 어찌 증명할 것인지 물었다. 정당은 법인이 아니라서 등기소에서는 증명서를 받을 수 없다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글쎄,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본 일이 없으나 한번 신청서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소송이란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다음날 더욱 기막힌 일이 생겼다.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와, 요즘 이런 사건을 하다가는 바로 세무조사로 보복당할 수 있다고들 하니 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직 판사가 되어서도 법적 구제를 받기가 이리 힘든데 보통 사람은 어떨까 싶었다. 

의사, 성직자, 법률가, 교직 등 전문직 종사자가 환자, 신자, 소송 당사자나 의뢰인, 학생 등을 상대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공감해 줄 마음을 갖지 않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가 상대하는 이들은 자기의 고충을 호소하면서 때로 떼를 쓰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엉터리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를 이르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나 교과서에서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윤리칙이 중요한지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답안에 옮겨 점수를 따고, 그 점수로 자리와 밥을 얻어 안온한 일상에 들어가고 심지어 높은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다 보니, 어느덧 바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 재미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직업적 소명에 대한 자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제는 내면화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망각하면, 즉 역지사지라는 이름의 위대한 상상력을 잃으면, 그 순간 전문직 종사자는 본래의 책무를 저버리고 사회적 사명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전문직이 적어도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권력자라고 함에 동의한다면, 모든 권력자에 대한 경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권력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 볼 줄 아는 것이다.

법정에서 가장 힘이 빠지는 순간은 담당 판사의 태도가 냉담할 때다. 변호사 된 지 얼마 안돼 형사사건 법정에 처음 들어가서 겪은 일이다. 항소심 재판장이 심리에 앞서 다들 들으라면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신청할 수 있으며 아무튼 1심 법원에서 못했던 주장이나 입증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끝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나중에 피고인 측 주장이 허위거나 증거조사가 불필요했다고 밝혀지면 형이 가중될 테니 그건 각오하라. 순간 법정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싸였다.

전직 판사였던 어느 변호사가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이 된 후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몸소 피의자, 피고인이 되어 보고 나서야 적법절차, 무죄추정원칙, 증거재판주의, 피의사실 공표 처벌 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왜 이제야 뼈가 저린가. 뼈가 저리기 전에 마음가짐을 점검했어야 할 일 아닌가. 높은 법대에 앉은 이들이여, 간절히 비노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선언을 진실로, 진실로 가슴에 새겨 보라. 시간이 없다. 어느 날 법대에서 내려오면 늦다. 그때 당신은 이미 판사가 아니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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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미세먼지가 온 나라를 뒤덮었을 때 이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나라의 안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에서 각종 대책을 준비하고 있지만 솔직히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국제기구를 만들어 국제공조를 강화하겠다는 발상은 의미가 있지만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은 아닐 겁니다.

교통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노후차량 교체, 혼잡통행료 부과, 대중교통 확충 등의 정책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노후차량 교체’는 적게는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필요합니다. 혼잡통행료 부과는 서울시가 전문가와 수십년간 논의했지만 시행상의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대중교통 확충 또한 많은 정부 재원과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미세먼지 저감 나부터 시민실천활동 자전거 홍보 캠페인' 기자회견에서 녹색자전거봉사단연합 회원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당장에 할 수 있는 효과적 정책은 무엇일까요? 자전거 이용률을 확 늘리는 것이 큰 재원 부담 없이 당장에 할 수 있는 미세먼지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네덜란드는 자전거 천국입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시민의 40~50%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합니다. 보통의 북유럽 도시들의 직장인 중 20~30%는 자전거로 출퇴근합니다. 우리나라 도시의 교통시스템을 이들 나라처럼 자전거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교통으로 인한 미세먼지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획기적인 자전거 정책의 출발점을 세종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자전거 인프라를 갖추었고 정부 기관이 많아 협조를 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퇴근 시 세종시 자전거 이용률은 2%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미 가구당 1.2대의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고 주차장도 무료입니다. 이것 외에도 날씨가 변덕스럽고 미세먼지까지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니 굳이 승용차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전거 인프라를 대폭 확충한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 정책이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는 ‘자전거 출퇴근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국민 세금으로 인센티브를 줄 수 없으니 세종시의 모든 공공기관 주차장을 유료화하여 인센티브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무료이던 공공기관 주차장을 유료화하면 승용차 이용 의지가 꺾일 것이고 인센티브를 주면 자전거 이용에 대한 의지가 훨씬 강해질 겁니다. 실제 분석 결과, 월 6만~7만원 정도의 자전거 인센티브를 주는 것만으로도 승용차 이용자의 20~30%를 자전거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정책의 시행입니다. 세종시의 중앙부처 중 힘 있는 기관이 반대하면 추진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총리님이 나서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범적인 행정수도를 지향하는 세종시를 자전거 메카로 만들어 모범을 보이겠다”는 총리님의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세종시를 자전거 중심도시로 성공시킨다면 다른 도시로의 전파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세먼지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쉬운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낙문 | 한국교통연구원 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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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희미한 이름으로 전화가 왔다. 15년간 휴대폰에 저장만 돼 있었지 안부도 몰랐던 그는 내가 고시원에 살 때 옆방 사람이었다. 창문이 있을 리 없는 지하, 방 가운데서 양팔을 벌리면 손끝에 벽이 닿는 공간을 마주하며 살던 우리는 내가 바퀴벌레 살충제를 빌려주면서 잠시나마 친밀했었다. 그는 영화 <기생충>을 보고 옛날 생각에 사무쳤단다. 우리는 장마철에 하수구가 역류하면 지하로 똥물이 뚝뚝 떨어졌을 때의 참담함과 그걸 욕하면서 아껴뒀던 컵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던 애처로움을 떠올리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그 시절의 나는 바닥에서 버티기 위해 바닥 이야기를 자주 했다. 사람이 자신의 고충을 외부에 알리는 건 사회가 좋아지기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무리들 앞에서만 한숨의 강도를 높였다. 누가 하숙집 월세 내기가 버겁다고 하면, 혹은 누가 춥고 더운 옥탑방의 고충을 꺼내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끝판왕은 창문 없는 지하 고시원 방 아니겠어?” 특히 그 작은 방에 얼마나 많은 짐이 수납될 수 있는지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때의 상대 표정들이 압권이었다. 참담하고 애처로울수록 나는 극한 상황을 더 안쓰럽게 포장했다. ‘내가 더 힘들다! 너는 이런 삶을 모르지?’라는 분위기를 풍길수록 주변이 입을 다무는 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빨리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배달을 한창 할 때, 열아홉 살 동료가 있었다. 역시나 고시원에 사는 그에게 나는 위로는커녕 격려를 가장한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도시락 가게에서 제일 싼 반찬 하나를 사서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밥으로 두 끼를 먹는다, 남은 라면 국물을 얼려놓으면 한 끼 해결이 가능하다는 둥의 밑바닥 인생 자랑하기는 그 친구의 한마디로 제동이 걸렸다. “반찬이 없어서요. 저는 그냥 밥을 간장에만 비벼 먹어요.” 

진짜 가난이 묻혀 버리는 시대다. 가짜 가난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고통은 중요하다. 한 대라도 맞으면 아픈 거지, 두 대 맞은 사람 옆에 있다고 참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너도나도 분출하는 ‘괴로웠던 지난날’은 가난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무리 분투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지만 여전히 불굴의 인생역전 이야기가 부유하는 세상이다. 이때 극복기 작성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내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옥에 있었다는 포석을 까는 것이 그나마 절망의 수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이 맞은 한 대가 강펀치였음을 집요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이유다. 모두가 힘든 사회에서 ‘더’ 힘든 고지를 선점하려는 역설이다.

그래서 간장만이 유일한 반찬인 사람이 목에 힘주고 떳떳하게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실제는 두 대, 아니 열 대를 맞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상황인지를 모르고 그저 ‘요즘 사람들 다 힘든데 나만 유난 떨 수 없잖아’라면서 공손하기까지 하다. “너만 힘든 줄 아냐”는 주변의 빈정거림에 몇 차례 머쓱해진 상황을 경험한 자기 검열이다. 겸손의 끝에 열매가 맺어질 가능성도 매우 낮다. 어떻게든 삶이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한 대만 맞은 사람이 마치 모두가 같은 구렁텅이에 있었던 것처럼 ‘그 시절’을 운운할수록 ‘그런 삶이 영속적인’ 사람들은 더 비난받을 것이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것이다.

사람들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면 될 터인데 더 자주 입 밖에 내뱉는다. 강자가 될 수 없는 빌어먹을 양극화 시대를 버텨나가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해서다. 그래서 나는 아직 &lt;기생충&gt;을 못 보고 있다. 지하 고시원 방에서 보았던 거대한 바퀴벌레가 생각나서 슬퍼질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걸 나를 포장하는 서사로 활용하여 타인의 겸연쩍은 시선을 보는 걸 즐길까 봐서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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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그릇이 아니어서 물에 헹구거나 부실 일도 없다


다만 바람이 들어 와

그의 등짝을 어루만지고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추썩거리기도 한다.


또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와 들썩들썩 들쑤시지만 꼼짝을 않는다.


일체가 변하지만 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할 리 없다고 

시름이 홀로 깨어 먹 갈고

반야경이나 베껴 쓰는


그 곁에

이 새벽녘 고요는 뼈나 근육도 없이

그냥 그대로 그린 듯 앉아 있다.


홍신선(194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인은 새벽녘에 깨어 홀로 고요와 마주한다. 고요는 한 사람처럼 시인의 방에 앉아 있다. 물론 고요는 조용하고 잠잠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만.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개 짖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고요는 고요를 유지한다. 그것들이 고요를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은 새벽녘의 이 고요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고요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시인은 고요 곁에서 경전을 베껴 쓴다. 스스로 고요한 심경에 이르기 위해서. 시인은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고요를 앞에 하다 보면 마치 비 갠 아침 녘 사물처럼 내가, 내 둘레가 한결 선명하게 보인다”라고 썼다. 큰 바람과도 같은 소란이 잦아들도록 하는 것이, 내면의 평온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팔풍(八風)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유리하고 불리한 것,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 칭찬을 받음, 속임을 당함, 고통을 겪음, 즐거운 일 등에 흔들리지 않을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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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에는 뭘 하세요?” “재활요.”

‘국가대표 발레리나’ 김지영의 답변은 솔직했다.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2017년 12월8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국립현대무용단이 기획한 ‘댄서하우스’ 시리즈에 출연한 김지영이 ‘40대, 나이 든 무용가’를 주제로 발레리노 김용걸과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은 1998년 세계적 권위의 파리국제무용콩쿠르에서 파드되(2인무) 부문 1위를 차지했던 ‘전설의 단짝’이다. 발레리나로서 환갑에 가까운 ‘1978년생 김지영’은 “예전에는 쉬는 날 영화도 보고 했는데, 요새는 재활만 열심히 한다”며 웃었다.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선 “일 년 중 안 아픈 날이 한 30일밖에 안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지영의 춤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국립발레단 ‘스파르타쿠스’에서였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97년 최연소(19세)로 입단한 뒤 종횡무진 활약할 무렵이다.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역을 맡은 김지영은 타고난 신체조건과 뛰어난 테크닉, 섬세한 연기력과 우아한 기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곧바로 ‘덕질’(좋아하는 대상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고 모으는 일)에 돌입했다. 2006년 암스테르담 여행 중에도 당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소속이던 김지영을 보러 갔다.

김지영(41)이 23일 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서 마지막 무대에 섰다. 낭만발레의 대표작 ‘지젤’의 주역이었다. 22년 만에 국립발레단을 떠나는 그는 올가을부터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로 강단에 선다. 현역 은퇴는 아니고 틈나는 대로 무대에도 오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형 공연장에서 펼치는 전막 발레에서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발레리나는 뼈를 깎지 않고 뼈를 재조립한다. 거기에 붙은 살과 근육도 재구성한다. 몸으로 혼(魂)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발레리나는 무용에 인신공양을 하는 수도승이다.” 

시인 김중식이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2003년에 쓴 기사다. 발레리나라는 업(業)을 이보다 적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란 어려우리라. 스무 해 넘도록 뼈를 재조립하고 살과 근육을 재구성해가며 춤춰온 김지영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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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 수감됐다. 민주노총의 4차례 국회 앞 집회에서 참가자들의 경찰관 폭행, 장비 파손, 국회 진입을 지시했다는 것이 그에게 적용된 혐의들(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 5가지)이다. 김 위원장의 구속은 불법 행동에 대한 법원의 당연한 결정일 수 있다. 국민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민주노총 위원장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만큼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에게 발부된 영장에 적시된 구속사유는 ‘도망할 우려가 있다’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고 영장실질심사에서는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소환 불응이나 잠적 등 도망의 낌새조차 없었다. 국가가 방어권 등 국민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최소한의 침해인지’ 등을 살펴야 한다는 헌법 정신(과잉금지원칙)에 부합하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21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김 위원장의 구속으로 노·정관계는 격랑에 휩싸인 분위기다. 연합뉴스

더 큰 우려는 그의 구속으로 노·정관계가 회복을 장담키 어려운 상태로 악화됐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250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양대 노총을 이끄는 수장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대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중요시했다. 그런 인물이 구속되면서 정부와 경영계는 중요한 대화 파트너를 잃었고, 정상적인 사회적 대화는 요원해졌다. 이번 사태는 정부 책임이 작지 않다. 탄력근로제 단위시간 확대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등 중요 현안 때마다 사회적 합의만을 고집한 것은 정부다. 그러는 사이 개혁안은 후퇴했고, 늦어졌다. 최저임금제 등은 정부·여당이 대놓고 ‘속도조절’ ‘동결’ 등을 주문했다. 민주노총으로선 노동 개악을 우려했고, 몸으로라도 막으려다 위원장 구속이라는 사태까지 빚어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를 지키려면 그에 걸맞은 정책을 추진하고, 시행해야 한다. 뒷짐만 진 채 사회적 합의만을 기다려서는 노동존중은 이뤄지지 않는다. 당장 노동자들이 왜 국회 진입을 시도했는지부터 살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민주노총도 강경 대외투쟁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는 노사정이 함께 풀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 첫걸음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사회적 기구의 참여를 통해 대화를 시작하는 일이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장외투쟁만 고집하는 것은 ‘누군가’가 바라는 일일 수 있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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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공감 능력 자체를 의구해야 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아들 스펙 발언’은 청년 문제에 대한 천박한 인식과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황 대표는 지난 20일 숙명여대 특강에서 ‘내가 아는 어떤 청년’의 취업 성공담을 소개했다. “학점도 3점이 안되고 토익은 800점 정도 되고 다른 스펙은 없는데” 큰 기업 다섯 군데에 합격했다는 그 청년은 바로 황 대표의 아들이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취업전략이 문제인 것처럼 훈계하면서 자기 자식을 성공 모델로 자랑한 꼴이다. 죽어라 스펙을 쌓아도 취업의 문턱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스펙 없이 신의 직장에 취업한 사례는 애초 염장 지르기에 그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그 사례의 주인공이 ‘KT 취업비리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제1야당 대표의 아들이라니. 스펙도 없고 학점·토익점수도 별로인데 대기업 5곳에 합격한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황교안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스펙이 그 기적의 배경일지 모른다.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라며 특혜를 받았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다를 게 없다는 힐난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6월 24일 (출처:경향신문DB)

황 대표는 해명에 나섰지만 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황 대표는 “스펙 쌓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해명하면서, 아들의 스펙도 슬쩍 정정했다. “1학년 때 점수가 좋지 않은 아들은 그 후 학점 3.29, 토익은 925점으로 취업하게 됐다”고 했다. 아마도 ‘무스펙 아들’의 KT 취업이 의도와 달리 ‘특혜 의혹’을 방증하는 걸로 비화되자 스펙을 바로잡고 나선 모양이다. 특혜 의혹이야 수사로 규명돼야겠지만, 결국은 아들의 학점과 토익점수까지 속여가며 취업 과정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우롱한 셈이다. 

황 대표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하다. 장관과 총리까지 지낸 제1야당 대표 아들의 취업 성공기를 스펙 극복 모범 사례로 든 것 자체가 취업난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상처를 후벼판 것이다. 오죽하면 보수정당인 바른미래당조차 “청년에 대한 이해 수준이 참담하고 소통도 공감도 제로”라며 “강의를 할 게 아니라 아들의 특혜 의혹부터 밝히는 게 먼저”라고 힐책했을까 싶다. 이토록 청년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정당과 정치인이 입으로는 ‘청년, 청년’을 외쳐대니 진정성이 느껴질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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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점점 신문을 믿지 않게 되었다. 방송 뉴스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열흘 전 발표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핀란드(62%)나 포르투갈(62%) 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에도 꼴찌였다.

우리나라 뉴스가 오보투성이여서 못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가짜뉴스의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비율은 61%로 나타났는데, 이는 브라질(85%), 포르투갈(71%) 등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불신과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뉴스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심보다는 그 뉴스를 만든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언론사의 정파적 위치나 경제적 이해관계, 심지어 기자 개인의 불순한 사적 목적이 기사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뉴스가 설령 거짓은 아니더라도 일부만을 보여주는 반쪽짜리 거울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가 안 보거나 못 보는 세상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는 현상이나 사람을 관찰하고 취재하고 분석해서 기사를 쓴다. 잘못 볼 수도 있고 전문성이 떨어져서 꼼꼼한 분석에 실패할 수도 있다. 당연히 비판받을 일이지만, 용인할 만한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관찰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보아도, 내리깐 눈에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뉴스 신뢰도 조사결과가 발표된 같은 날, 조선일보는 “느닷없는 부산~헬싱키 노선…국내 항공사들 뿔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에서 항공 노선 신설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분석’ 기사였다. 국내 항공사들과 인천국제공항이 큰 손실을 입을 테지만 국익 대신 영남권 유권자를 염두에 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기사에 부산 지역 주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이 ‘더 뿔났다’.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인천공항을 거쳐야 하는 지역민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편향된 기사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를 ‘가짜뉴스’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보도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언론사라서 문제인가?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 또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언론사가 혹은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의 대기업 옥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관찰하면 수도권 바깥은 보이지 않으며, 거대한 비행기에 가려 정작 그 안의 승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한 취재원은 “항공업계 관계자”, “한 대형 항공사 임원”, 그리고 항공산업을 연구하는 경영학과 교수였다. 인천공항까지 힘들게 가야 했던 연간 300만명의 동남권 지역 여행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서울시는 4개 버스 노선의 새벽 시간대 배차를 늘렸다. 새벽 노동자들을 꽉꽉 채워서 운행하던 노선들이다. 몇몇 기자들이 마치 새로운 사건이 생긴 듯 이 새벽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의 애환과 사연을 취재했다. 수십년 동안 거기에 있었으나 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기자들도 거의 매일 이들과 같은 버스를 탔다. 기자들이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을 하던 그 시절에는 버스 노선의 문제, 기사들의 난폭운전, 버스회사 비리 등이 심심치 않게 사회면을 장식했었다. 기자 월급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생활수준이 오르자 승용차의 성능, 교통 체증, 휘발유 가격 같은 주제가 만원버스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의 중견 기자들은 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파적으로는 다양할지 몰라도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배경이 비슷하다. 대기업과 노동자가 대립할 때 많은 언론이 은근슬쩍 기업 편을 드는 듯 보이는 것도 반드시 광고 수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업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탓이 크다. 기자들 주변에는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보다는 기업 임원이 더 많다. 수도권 밖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서 있는 위치가 거의 거기서 거기다. 바라보는 지점도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이 언론을 외면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언론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간지나 텔레비전 뉴스 대신 유튜브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이상한 정보를 카톡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뉴스 신뢰도를 단박에 회복시키는 비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들이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 서 있는 자리를 옮겨야 달리 보인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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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역술인들을 찾아가 대통령의 운세를 수집했다. 대통령 이명박에게는 “지산겸(地山謙) 지풍승(地風昇)의 운을 갖고 있어 국운 상승을 이끌어나갈 것”, 박근혜에게는 “청와대가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인 형세이듯이 혼란스러운 기운을 여성 대통령님의 덕으로 감싸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지금 두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정치는 살아있고 권력은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정치인들은 점괘나 술수에 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날 대권에 가까이 갔던 거물들은 거의가 조상 묘를 옮겼거나 새롭게 다독거렸다.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뜻을 펼 수 있다’는 속설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질을 부풀리며 어딘가에 음덕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누군가는 운명에 금칠을 하려고 점을 보거나 명당을 찾아 헤맬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하늘이 놀랄 일을 벌였다. 명당을 차지하려 사찰을 불태우고 탑을 허물었다. 당대의 지식인 황현은 이런 사실을 <매천야록>에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남연군은 아들 넷을 두었고 막내가 흥선군이었다. 흥선군은 세도가 김씨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면서 ‘상가의 개’처럼 굴러다녔다. 아버지 남연군이 죽자 세상을 바꿀 비책으로 명당을 찾아 나섰다.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대덕사)에 이르러 오래된 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은 큰 길지이니 얼마나 귀하게 될지 모르오.” 흥선군은 주지에게 거금을 쥐여주며 가야사를 불태우게 했다. 부친 묘를 이장하는 날, 형들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나는 탑신이다. 어찌 너희가 내 사는 곳을 뺏으려 하는가. 장례를 치른다면 너희 형제는 죽을 것이다.”

신기하게 형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겁에 질린 형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흥선군이 소리쳤다. “귀신이 나타났다면 명당이 분명하오. 날마다 장동 김씨 문전에서 옷자락을 끌며 빌어먹는 것보다 한 번에 통쾌해짐이 좋지 않겠습니까.” 결국 석탑을 해체하고 남연군을 묻었다. 꿩이 엎드린 복치형(伏雉形)의 천하명당이었다. 이장을 마치고 가야사 주지와 함께 귀경길에 올랐다. 막 수원 대포진(大浦津)을 건너는데 주지가 배 안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머리를 휘저으며 “불을 꺼 달라”고 악을 쓰다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14년 후 흥선군이 사내아이를 얻었다. 훗날 고종이었다.

얘기가 황당해서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고승들 행적을 기록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보다가 흥선군이 탑과 절을 불태운 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덕산(충남 예산군) 상왕산에 있는 일명 ‘가야산 보덕사(保德寺)’를 ‘생왕산 보덕사(報德寺)’로 고쳤다. 새 터를 잡아 새 절을 짓고 옛 절터에는 남연군의 묘를 면례(緬禮·이장)한 뒤 벽담대사가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게 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은 후환이 두려웠다. 불타버린 천년고찰 가야사 음지에 새 절을 지었다.

나라가 어렵고 왕이 실정을 할 때마다 백성들은 ‘명당의 저주’를 떠올렸을 것이다. 고종은 무능했고 최악의 군주였다. 대원군에 업혀 있다가, 부인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다가, 외세를 끌어들여 더부살이를 했다. 고종이 아니었더라도 나라는 망했겠지만 고종이 왕이라서 더 남루하고 비참했다. 고종과 아들 순종은 굴욕의 역사에 박혀있는 허수아비들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면 황현이 정색하고 명당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펴보면 권력의 명당은 민심이다.

땅에는 나름 임자가 있다. 땅은 거짓도 없고 그렇다고 용서도 없다. 임자 아닌 자가 차지하면 땅도 사람도 편치 않다. 그래서 명당은 찾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던 전직 대통령이 오색토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고단한 몸을 가장 좋은 흙이 품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아무리 용한 지관이라도 어찌 흙속을 꿰뚫어보겠는가. 아마도 그는 국민들 마음속에 묻혔고, 민심이 지관의 눈을 밝게 했을 것이다.

“좋은 땅이란 좋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풍수의 원칙이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선덕(善德)이 좋은 땅이라는 응보(應報)로 주어진다. (…) 명당은 인간 세상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 존재하는 땅이 아니다. 이미 하늘이 알아 천복을 내리며, 땅이 그것을 집행한다.”(최창조)

총선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정치인생의 길흉을 물을 것이다. 조상의 음택을 살필 것이다. 하지만 명당을 찾아 산야를 헤맬 일이 아니다. 저자에 내려가 민초들을 보듬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명당은 국민의 마음속에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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