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매키는 이름난 병원의 잘나가는 외과의사다. 행복한 가정과 고급저택을 가지고 있다. 유능하지만 환자의 고통에 냉담한 그가 어느 날 후두암에 걸렸다.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환자로 신분이 바뀌자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검사를 시행하는 의사는 불친절하고 일방통행이다. 병원은 방사선 치료 시간을 지키지 않고, 간호사에게 따져보지만 여의치 않다. 무신경, 무성의, 무대응에 분노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병원 관계자는 없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병원에,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의사가 절망한다. 1991년에 나온 미국 영화 <더 닥터>의 줄거리다.

어떤 전문가는 그의 전문지식을 구하는 소비자의 말에 둔감하다. 아예 외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직업적 판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쁜 태도는 냉소와 비웃음이다. 입원 전의 잭 매키는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레지던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외과의사가 남의 살을 찢는데 무슨 감정을 갖나?”

나는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 출마 예정자가 됐던 일이 있다. 판사 재직 중이던 1995년 어느 일간신문에 내가 집권여당 소속으로 모 지역구에 출마하려 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다른 신문이 인용하면서 근 한 달간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지인들로부터는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도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답만 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해당 정당의 조직국에서 자료가 나왔다는 거였다. 책임자인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자료를 흘린 일이 없다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판사님, 참 이상하시네요. 남들은 그런 데 이름을 못 올려 안달인데, 왜 그걸 싫어하세요?”였다.

생각다 못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다. 사무원의 퉁명스러운 응대는 그렇다 치고, 변호사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이거, 사건이 됩니까?”였다. 된다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변호사가 “판사가 된다면 되겠지…”라고 하더니, 그 정당 대표자의 대표권을 어찌 증명할 것인지 물었다. 정당은 법인이 아니라서 등기소에서는 증명서를 받을 수 없다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글쎄,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본 일이 없으나 한번 신청서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소송이란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다음날 더욱 기막힌 일이 생겼다.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와, 요즘 이런 사건을 하다가는 바로 세무조사로 보복당할 수 있다고들 하니 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직 판사가 되어서도 법적 구제를 받기가 이리 힘든데 보통 사람은 어떨까 싶었다. 

의사, 성직자, 법률가, 교직 등 전문직 종사자가 환자, 신자, 소송 당사자나 의뢰인, 학생 등을 상대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공감해 줄 마음을 갖지 않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가 상대하는 이들은 자기의 고충을 호소하면서 때로 떼를 쓰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엉터리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를 이르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나 교과서에서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윤리칙이 중요한지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답안에 옮겨 점수를 따고, 그 점수로 자리와 밥을 얻어 안온한 일상에 들어가고 심지어 높은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다 보니, 어느덧 바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 재미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직업적 소명에 대한 자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제는 내면화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망각하면, 즉 역지사지라는 이름의 위대한 상상력을 잃으면, 그 순간 전문직 종사자는 본래의 책무를 저버리고 사회적 사명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전문직이 적어도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권력자라고 함에 동의한다면, 모든 권력자에 대한 경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권력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 볼 줄 아는 것이다.

법정에서 가장 힘이 빠지는 순간은 담당 판사의 태도가 냉담할 때다. 변호사 된 지 얼마 안돼 형사사건 법정에 처음 들어가서 겪은 일이다. 항소심 재판장이 심리에 앞서 다들 들으라면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신청할 수 있으며 아무튼 1심 법원에서 못했던 주장이나 입증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끝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나중에 피고인 측 주장이 허위거나 증거조사가 불필요했다고 밝혀지면 형이 가중될 테니 그건 각오하라. 순간 법정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싸였다.

전직 판사였던 어느 변호사가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이 된 후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몸소 피의자, 피고인이 되어 보고 나서야 적법절차, 무죄추정원칙, 증거재판주의, 피의사실 공표 처벌 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왜 이제야 뼈가 저린가. 뼈가 저리기 전에 마음가짐을 점검했어야 할 일 아닌가. 높은 법대에 앉은 이들이여, 간절히 비노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선언을 진실로, 진실로 가슴에 새겨 보라. 시간이 없다. 어느 날 법대에서 내려오면 늦다. 그때 당신은 이미 판사가 아니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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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미세먼지가 온 나라를 뒤덮었을 때 이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나라의 안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에서 각종 대책을 준비하고 있지만 솔직히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국제기구를 만들어 국제공조를 강화하겠다는 발상은 의미가 있지만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은 아닐 겁니다.

교통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노후차량 교체, 혼잡통행료 부과, 대중교통 확충 등의 정책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노후차량 교체’는 적게는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필요합니다. 혼잡통행료 부과는 서울시가 전문가와 수십년간 논의했지만 시행상의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대중교통 확충 또한 많은 정부 재원과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미세먼지 저감 나부터 시민실천활동 자전거 홍보 캠페인' 기자회견에서 녹색자전거봉사단연합 회원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당장에 할 수 있는 효과적 정책은 무엇일까요? 자전거 이용률을 확 늘리는 것이 큰 재원 부담 없이 당장에 할 수 있는 미세먼지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네덜란드는 자전거 천국입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시민의 40~50%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합니다. 보통의 북유럽 도시들의 직장인 중 20~30%는 자전거로 출퇴근합니다. 우리나라 도시의 교통시스템을 이들 나라처럼 자전거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교통으로 인한 미세먼지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획기적인 자전거 정책의 출발점을 세종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자전거 인프라를 갖추었고 정부 기관이 많아 협조를 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퇴근 시 세종시 자전거 이용률은 2%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미 가구당 1.2대의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고 주차장도 무료입니다. 이것 외에도 날씨가 변덕스럽고 미세먼지까지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니 굳이 승용차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전거 인프라를 대폭 확충한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 정책이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는 ‘자전거 출퇴근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국민 세금으로 인센티브를 줄 수 없으니 세종시의 모든 공공기관 주차장을 유료화하여 인센티브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무료이던 공공기관 주차장을 유료화하면 승용차 이용 의지가 꺾일 것이고 인센티브를 주면 자전거 이용에 대한 의지가 훨씬 강해질 겁니다. 실제 분석 결과, 월 6만~7만원 정도의 자전거 인센티브를 주는 것만으로도 승용차 이용자의 20~30%를 자전거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정책의 시행입니다. 세종시의 중앙부처 중 힘 있는 기관이 반대하면 추진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총리님이 나서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범적인 행정수도를 지향하는 세종시를 자전거 메카로 만들어 모범을 보이겠다”는 총리님의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세종시를 자전거 중심도시로 성공시킨다면 다른 도시로의 전파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세먼지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쉬운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낙문 | 한국교통연구원 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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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희미한 이름으로 전화가 왔다. 15년간 휴대폰에 저장만 돼 있었지 안부도 몰랐던 그는 내가 고시원에 살 때 옆방 사람이었다. 창문이 있을 리 없는 지하, 방 가운데서 양팔을 벌리면 손끝에 벽이 닿는 공간을 마주하며 살던 우리는 내가 바퀴벌레 살충제를 빌려주면서 잠시나마 친밀했었다. 그는 영화 <기생충>을 보고 옛날 생각에 사무쳤단다. 우리는 장마철에 하수구가 역류하면 지하로 똥물이 뚝뚝 떨어졌을 때의 참담함과 그걸 욕하면서 아껴뒀던 컵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던 애처로움을 떠올리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그 시절의 나는 바닥에서 버티기 위해 바닥 이야기를 자주 했다. 사람이 자신의 고충을 외부에 알리는 건 사회가 좋아지기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무리들 앞에서만 한숨의 강도를 높였다. 누가 하숙집 월세 내기가 버겁다고 하면, 혹은 누가 춥고 더운 옥탑방의 고충을 꺼내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끝판왕은 창문 없는 지하 고시원 방 아니겠어?” 특히 그 작은 방에 얼마나 많은 짐이 수납될 수 있는지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때의 상대 표정들이 압권이었다. 참담하고 애처로울수록 나는 극한 상황을 더 안쓰럽게 포장했다. ‘내가 더 힘들다! 너는 이런 삶을 모르지?’라는 분위기를 풍길수록 주변이 입을 다무는 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빨리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배달을 한창 할 때, 열아홉 살 동료가 있었다. 역시나 고시원에 사는 그에게 나는 위로는커녕 격려를 가장한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도시락 가게에서 제일 싼 반찬 하나를 사서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밥으로 두 끼를 먹는다, 남은 라면 국물을 얼려놓으면 한 끼 해결이 가능하다는 둥의 밑바닥 인생 자랑하기는 그 친구의 한마디로 제동이 걸렸다. “반찬이 없어서요. 저는 그냥 밥을 간장에만 비벼 먹어요.” 

진짜 가난이 묻혀 버리는 시대다. 가짜 가난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고통은 중요하다. 한 대라도 맞으면 아픈 거지, 두 대 맞은 사람 옆에 있다고 참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너도나도 분출하는 ‘괴로웠던 지난날’은 가난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무리 분투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지만 여전히 불굴의 인생역전 이야기가 부유하는 세상이다. 이때 극복기 작성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내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옥에 있었다는 포석을 까는 것이 그나마 절망의 수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이 맞은 한 대가 강펀치였음을 집요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이유다. 모두가 힘든 사회에서 ‘더’ 힘든 고지를 선점하려는 역설이다.

그래서 간장만이 유일한 반찬인 사람이 목에 힘주고 떳떳하게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실제는 두 대, 아니 열 대를 맞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상황인지를 모르고 그저 ‘요즘 사람들 다 힘든데 나만 유난 떨 수 없잖아’라면서 공손하기까지 하다. “너만 힘든 줄 아냐”는 주변의 빈정거림에 몇 차례 머쓱해진 상황을 경험한 자기 검열이다. 겸손의 끝에 열매가 맺어질 가능성도 매우 낮다. 어떻게든 삶이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한 대만 맞은 사람이 마치 모두가 같은 구렁텅이에 있었던 것처럼 ‘그 시절’을 운운할수록 ‘그런 삶이 영속적인’ 사람들은 더 비난받을 것이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것이다.

사람들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면 될 터인데 더 자주 입 밖에 내뱉는다. 강자가 될 수 없는 빌어먹을 양극화 시대를 버텨나가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해서다. 그래서 나는 아직 &lt;기생충&gt;을 못 보고 있다. 지하 고시원 방에서 보았던 거대한 바퀴벌레가 생각나서 슬퍼질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걸 나를 포장하는 서사로 활용하여 타인의 겸연쩍은 시선을 보는 걸 즐길까 봐서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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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그릇이 아니어서 물에 헹구거나 부실 일도 없다


다만 바람이 들어 와

그의 등짝을 어루만지고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추썩거리기도 한다.


또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와 들썩들썩 들쑤시지만 꼼짝을 않는다.


일체가 변하지만 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할 리 없다고 

시름이 홀로 깨어 먹 갈고

반야경이나 베껴 쓰는


그 곁에

이 새벽녘 고요는 뼈나 근육도 없이

그냥 그대로 그린 듯 앉아 있다.


홍신선(194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인은 새벽녘에 깨어 홀로 고요와 마주한다. 고요는 한 사람처럼 시인의 방에 앉아 있다. 물론 고요는 조용하고 잠잠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만.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개 짖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고요는 고요를 유지한다. 그것들이 고요를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은 새벽녘의 이 고요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고요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시인은 고요 곁에서 경전을 베껴 쓴다. 스스로 고요한 심경에 이르기 위해서. 시인은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고요를 앞에 하다 보면 마치 비 갠 아침 녘 사물처럼 내가, 내 둘레가 한결 선명하게 보인다”라고 썼다. 큰 바람과도 같은 소란이 잦아들도록 하는 것이, 내면의 평온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팔풍(八風)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유리하고 불리한 것,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 칭찬을 받음, 속임을 당함, 고통을 겪음, 즐거운 일 등에 흔들리지 않을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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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에는 뭘 하세요?” “재활요.”

‘국가대표 발레리나’ 김지영의 답변은 솔직했다.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2017년 12월8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국립현대무용단이 기획한 ‘댄서하우스’ 시리즈에 출연한 김지영이 ‘40대, 나이 든 무용가’를 주제로 발레리노 김용걸과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은 1998년 세계적 권위의 파리국제무용콩쿠르에서 파드되(2인무) 부문 1위를 차지했던 ‘전설의 단짝’이다. 발레리나로서 환갑에 가까운 ‘1978년생 김지영’은 “예전에는 쉬는 날 영화도 보고 했는데, 요새는 재활만 열심히 한다”며 웃었다.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선 “일 년 중 안 아픈 날이 한 30일밖에 안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지영의 춤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국립발레단 ‘스파르타쿠스’에서였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97년 최연소(19세)로 입단한 뒤 종횡무진 활약할 무렵이다.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역을 맡은 김지영은 타고난 신체조건과 뛰어난 테크닉, 섬세한 연기력과 우아한 기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곧바로 ‘덕질’(좋아하는 대상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고 모으는 일)에 돌입했다. 2006년 암스테르담 여행 중에도 당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소속이던 김지영을 보러 갔다.

김지영(41)이 23일 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서 마지막 무대에 섰다. 낭만발레의 대표작 ‘지젤’의 주역이었다. 22년 만에 국립발레단을 떠나는 그는 올가을부터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로 강단에 선다. 현역 은퇴는 아니고 틈나는 대로 무대에도 오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형 공연장에서 펼치는 전막 발레에서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발레리나는 뼈를 깎지 않고 뼈를 재조립한다. 거기에 붙은 살과 근육도 재구성한다. 몸으로 혼(魂)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발레리나는 무용에 인신공양을 하는 수도승이다.” 

시인 김중식이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2003년에 쓴 기사다. 발레리나라는 업(業)을 이보다 적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란 어려우리라. 스무 해 넘도록 뼈를 재조립하고 살과 근육을 재구성해가며 춤춰온 김지영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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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 수감됐다. 민주노총의 4차례 국회 앞 집회에서 참가자들의 경찰관 폭행, 장비 파손, 국회 진입을 지시했다는 것이 그에게 적용된 혐의들(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 5가지)이다. 김 위원장의 구속은 불법 행동에 대한 법원의 당연한 결정일 수 있다. 국민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민주노총 위원장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만큼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에게 발부된 영장에 적시된 구속사유는 ‘도망할 우려가 있다’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고 영장실질심사에서는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소환 불응이나 잠적 등 도망의 낌새조차 없었다. 국가가 방어권 등 국민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최소한의 침해인지’ 등을 살펴야 한다는 헌법 정신(과잉금지원칙)에 부합하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21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김 위원장의 구속으로 노·정관계는 격랑에 휩싸인 분위기다. 연합뉴스

더 큰 우려는 그의 구속으로 노·정관계가 회복을 장담키 어려운 상태로 악화됐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250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양대 노총을 이끄는 수장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대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중요시했다. 그런 인물이 구속되면서 정부와 경영계는 중요한 대화 파트너를 잃었고, 정상적인 사회적 대화는 요원해졌다. 이번 사태는 정부 책임이 작지 않다. 탄력근로제 단위시간 확대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등 중요 현안 때마다 사회적 합의만을 고집한 것은 정부다. 그러는 사이 개혁안은 후퇴했고, 늦어졌다. 최저임금제 등은 정부·여당이 대놓고 ‘속도조절’ ‘동결’ 등을 주문했다. 민주노총으로선 노동 개악을 우려했고, 몸으로라도 막으려다 위원장 구속이라는 사태까지 빚어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를 지키려면 그에 걸맞은 정책을 추진하고, 시행해야 한다. 뒷짐만 진 채 사회적 합의만을 기다려서는 노동존중은 이뤄지지 않는다. 당장 노동자들이 왜 국회 진입을 시도했는지부터 살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민주노총도 강경 대외투쟁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는 노사정이 함께 풀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 첫걸음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사회적 기구의 참여를 통해 대화를 시작하는 일이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장외투쟁만 고집하는 것은 ‘누군가’가 바라는 일일 수 있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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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공감 능력 자체를 의구해야 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아들 스펙 발언’은 청년 문제에 대한 천박한 인식과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황 대표는 지난 20일 숙명여대 특강에서 ‘내가 아는 어떤 청년’의 취업 성공담을 소개했다. “학점도 3점이 안되고 토익은 800점 정도 되고 다른 스펙은 없는데” 큰 기업 다섯 군데에 합격했다는 그 청년은 바로 황 대표의 아들이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취업전략이 문제인 것처럼 훈계하면서 자기 자식을 성공 모델로 자랑한 꼴이다. 죽어라 스펙을 쌓아도 취업의 문턱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스펙 없이 신의 직장에 취업한 사례는 애초 염장 지르기에 그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그 사례의 주인공이 ‘KT 취업비리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제1야당 대표의 아들이라니. 스펙도 없고 학점·토익점수도 별로인데 대기업 5곳에 합격한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황교안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스펙이 그 기적의 배경일지 모른다.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라며 특혜를 받았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다를 게 없다는 힐난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6월 24일 (출처:경향신문DB)

황 대표는 해명에 나섰지만 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황 대표는 “스펙 쌓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해명하면서, 아들의 스펙도 슬쩍 정정했다. “1학년 때 점수가 좋지 않은 아들은 그 후 학점 3.29, 토익은 925점으로 취업하게 됐다”고 했다. 아마도 ‘무스펙 아들’의 KT 취업이 의도와 달리 ‘특혜 의혹’을 방증하는 걸로 비화되자 스펙을 바로잡고 나선 모양이다. 특혜 의혹이야 수사로 규명돼야겠지만, 결국은 아들의 학점과 토익점수까지 속여가며 취업 과정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우롱한 셈이다. 

황 대표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하다. 장관과 총리까지 지낸 제1야당 대표 아들의 취업 성공기를 스펙 극복 모범 사례로 든 것 자체가 취업난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상처를 후벼판 것이다. 오죽하면 보수정당인 바른미래당조차 “청년에 대한 이해 수준이 참담하고 소통도 공감도 제로”라며 “강의를 할 게 아니라 아들의 특혜 의혹부터 밝히는 게 먼저”라고 힐책했을까 싶다. 이토록 청년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정당과 정치인이 입으로는 ‘청년, 청년’을 외쳐대니 진정성이 느껴질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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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점점 신문을 믿지 않게 되었다. 방송 뉴스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열흘 전 발표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핀란드(62%)나 포르투갈(62%) 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에도 꼴찌였다.

우리나라 뉴스가 오보투성이여서 못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가짜뉴스의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비율은 61%로 나타났는데, 이는 브라질(85%), 포르투갈(71%) 등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불신과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뉴스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심보다는 그 뉴스를 만든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언론사의 정파적 위치나 경제적 이해관계, 심지어 기자 개인의 불순한 사적 목적이 기사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뉴스가 설령 거짓은 아니더라도 일부만을 보여주는 반쪽짜리 거울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가 안 보거나 못 보는 세상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는 현상이나 사람을 관찰하고 취재하고 분석해서 기사를 쓴다. 잘못 볼 수도 있고 전문성이 떨어져서 꼼꼼한 분석에 실패할 수도 있다. 당연히 비판받을 일이지만, 용인할 만한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관찰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보아도, 내리깐 눈에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뉴스 신뢰도 조사결과가 발표된 같은 날, 조선일보는 “느닷없는 부산~헬싱키 노선…국내 항공사들 뿔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에서 항공 노선 신설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분석’ 기사였다. 국내 항공사들과 인천국제공항이 큰 손실을 입을 테지만 국익 대신 영남권 유권자를 염두에 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기사에 부산 지역 주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이 ‘더 뿔났다’.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인천공항을 거쳐야 하는 지역민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편향된 기사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를 ‘가짜뉴스’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보도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언론사라서 문제인가?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 또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언론사가 혹은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의 대기업 옥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관찰하면 수도권 바깥은 보이지 않으며, 거대한 비행기에 가려 정작 그 안의 승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한 취재원은 “항공업계 관계자”, “한 대형 항공사 임원”, 그리고 항공산업을 연구하는 경영학과 교수였다. 인천공항까지 힘들게 가야 했던 연간 300만명의 동남권 지역 여행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서울시는 4개 버스 노선의 새벽 시간대 배차를 늘렸다. 새벽 노동자들을 꽉꽉 채워서 운행하던 노선들이다. 몇몇 기자들이 마치 새로운 사건이 생긴 듯 이 새벽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의 애환과 사연을 취재했다. 수십년 동안 거기에 있었으나 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기자들도 거의 매일 이들과 같은 버스를 탔다. 기자들이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을 하던 그 시절에는 버스 노선의 문제, 기사들의 난폭운전, 버스회사 비리 등이 심심치 않게 사회면을 장식했었다. 기자 월급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생활수준이 오르자 승용차의 성능, 교통 체증, 휘발유 가격 같은 주제가 만원버스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의 중견 기자들은 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파적으로는 다양할지 몰라도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배경이 비슷하다. 대기업과 노동자가 대립할 때 많은 언론이 은근슬쩍 기업 편을 드는 듯 보이는 것도 반드시 광고 수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업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탓이 크다. 기자들 주변에는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보다는 기업 임원이 더 많다. 수도권 밖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서 있는 위치가 거의 거기서 거기다. 바라보는 지점도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이 언론을 외면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언론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간지나 텔레비전 뉴스 대신 유튜브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이상한 정보를 카톡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뉴스 신뢰도를 단박에 회복시키는 비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들이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 서 있는 자리를 옮겨야 달리 보인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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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역술인들을 찾아가 대통령의 운세를 수집했다. 대통령 이명박에게는 “지산겸(地山謙) 지풍승(地風昇)의 운을 갖고 있어 국운 상승을 이끌어나갈 것”, 박근혜에게는 “청와대가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인 형세이듯이 혼란스러운 기운을 여성 대통령님의 덕으로 감싸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지금 두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정치는 살아있고 권력은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정치인들은 점괘나 술수에 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날 대권에 가까이 갔던 거물들은 거의가 조상 묘를 옮겼거나 새롭게 다독거렸다.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뜻을 펼 수 있다’는 속설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질을 부풀리며 어딘가에 음덕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누군가는 운명에 금칠을 하려고 점을 보거나 명당을 찾아 헤맬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하늘이 놀랄 일을 벌였다. 명당을 차지하려 사찰을 불태우고 탑을 허물었다. 당대의 지식인 황현은 이런 사실을 <매천야록>에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남연군은 아들 넷을 두었고 막내가 흥선군이었다. 흥선군은 세도가 김씨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면서 ‘상가의 개’처럼 굴러다녔다. 아버지 남연군이 죽자 세상을 바꿀 비책으로 명당을 찾아 나섰다.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대덕사)에 이르러 오래된 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은 큰 길지이니 얼마나 귀하게 될지 모르오.” 흥선군은 주지에게 거금을 쥐여주며 가야사를 불태우게 했다. 부친 묘를 이장하는 날, 형들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나는 탑신이다. 어찌 너희가 내 사는 곳을 뺏으려 하는가. 장례를 치른다면 너희 형제는 죽을 것이다.”

신기하게 형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겁에 질린 형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흥선군이 소리쳤다. “귀신이 나타났다면 명당이 분명하오. 날마다 장동 김씨 문전에서 옷자락을 끌며 빌어먹는 것보다 한 번에 통쾌해짐이 좋지 않겠습니까.” 결국 석탑을 해체하고 남연군을 묻었다. 꿩이 엎드린 복치형(伏雉形)의 천하명당이었다. 이장을 마치고 가야사 주지와 함께 귀경길에 올랐다. 막 수원 대포진(大浦津)을 건너는데 주지가 배 안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머리를 휘저으며 “불을 꺼 달라”고 악을 쓰다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14년 후 흥선군이 사내아이를 얻었다. 훗날 고종이었다.

얘기가 황당해서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고승들 행적을 기록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보다가 흥선군이 탑과 절을 불태운 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덕산(충남 예산군) 상왕산에 있는 일명 ‘가야산 보덕사(保德寺)’를 ‘생왕산 보덕사(報德寺)’로 고쳤다. 새 터를 잡아 새 절을 짓고 옛 절터에는 남연군의 묘를 면례(緬禮·이장)한 뒤 벽담대사가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게 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은 후환이 두려웠다. 불타버린 천년고찰 가야사 음지에 새 절을 지었다.

나라가 어렵고 왕이 실정을 할 때마다 백성들은 ‘명당의 저주’를 떠올렸을 것이다. 고종은 무능했고 최악의 군주였다. 대원군에 업혀 있다가, 부인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다가, 외세를 끌어들여 더부살이를 했다. 고종이 아니었더라도 나라는 망했겠지만 고종이 왕이라서 더 남루하고 비참했다. 고종과 아들 순종은 굴욕의 역사에 박혀있는 허수아비들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면 황현이 정색하고 명당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펴보면 권력의 명당은 민심이다.

땅에는 나름 임자가 있다. 땅은 거짓도 없고 그렇다고 용서도 없다. 임자 아닌 자가 차지하면 땅도 사람도 편치 않다. 그래서 명당은 찾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던 전직 대통령이 오색토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고단한 몸을 가장 좋은 흙이 품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아무리 용한 지관이라도 어찌 흙속을 꿰뚫어보겠는가. 아마도 그는 국민들 마음속에 묻혔고, 민심이 지관의 눈을 밝게 했을 것이다.

“좋은 땅이란 좋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풍수의 원칙이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선덕(善德)이 좋은 땅이라는 응보(應報)로 주어진다. (…) 명당은 인간 세상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 존재하는 땅이 아니다. 이미 하늘이 알아 천복을 내리며, 땅이 그것을 집행한다.”(최창조)

총선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정치인생의 길흉을 물을 것이다. 조상의 음택을 살필 것이다. 하지만 명당을 찾아 산야를 헤맬 일이 아니다. 저자에 내려가 민초들을 보듬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명당은 국민의 마음속에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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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하늘길은? 서울~제주노선이다. 지난 4월 영국의 항공교통시장 조사기관 OAG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 2월까지 이 구간 운항 횟수는 7만9460회였다. 매일 219편이 이 구간을 오간 셈인데, 심야와 새벽을 제외하면 5~10분마다 비행기들이 두 공항에서 뜨고 내렸다. 2위인 호주의 멜버른~시드니 구간이 5만400회인 것에 비교하면 그 빈도를 짐작할 만하다. 실제 오산 공군작전사령부의 레이더 화면을 보면 서울과 제주 상공에 점으로 표시되는 비행기들이 착륙하기 위해 꼬리를 문 채 선회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이륙 풍경 역시 다를 게 없다. 지난해 설을 쇠고 귀경할 때 비행기가 뜨는 데만 40분 넘게 걸렸다. 앞뒤로 비행기 7대가 줄지어 기다리다 활주로로 들어서는 진풍경이 연출돼 동영상에 담은 적이 있다. 공항에 도착한 뒤 청사를 한 바퀴를 빙 돌아 밖으로 나가노라면 여행지에 도착한 흥분은 이미 반감된다. 최근 방문한 공항 중 가장 번잡한 곳이 바로 내 고향 제주 공항이다. 

포화에 따른 불편은 차치하고 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비바람이 강하게 분다 싶으면 결항에 연발착이 이어진다. 해안에 접해 있는 데다 동서 방향으로 이착륙하는 비행기 옆에서 직각으로 부는 바람이 위험도를 높인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 안에서도 현 제주공항을 확대하는 안과 새로운 공항을 짓는 안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내 신공항 건설로 방침이 기운 것은 이런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결과였다. 그리고 2015년 11월 사전타당성 용역 결과 성산이 신공항 예정지로 발표되었다. 제주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공항을 추가로 확보해 위험과 불편을 분산하자는 뜻이다. 제주도의 균형 발전을 꾀한다는 취지도 들어 있다.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직후, 서울에서 열린 한 시민단체의 제2공항건설 토론회에 참석했다. 혹시 신공항 사업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본류가 아닌 이유로 신공항 건설에 반대한다는 결론을 내려 약간 놀랐지만 합리적 토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고, 이 단체는 신공항 반대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반대론자들의 닫힌 자세였다. 신공항 반대론의 초점은 끊임없이 옮아갔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한 기업이 낸 보고서가 왜 타당성 검토에 반영되지 않았느냐는 데로 가 있다. 내용은 현 제주공항의 활주로를 동서 방향에 이어 남북으로 교차해 이용하면 새로 공항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도의 관제 능력 확보 등 19개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조건을 현실적으로 충족하기 어렵다고 보고 국토부가 보고서를 배제하자 맹비난하고 있다. 2년 전에는 신공항이 공군 기지가 된다는 주장으로 시끄러웠다. 정경두 당시 합참의장이 신공항에 공군 탐색구조대를 두겠다고 언급한 것이 발단이었다. 국토부와 제주도가 협의되지 않은 안이라고 확인해 넘어갔지만, 반대론자들은 틈만 나면 이 문제를 거론한다.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해소되면 곧이어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상대방의 설명이 타당하면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태도가 아니다. 

최근 주변에서 신공항 건설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인한 피로감이 커진 탓이다. 새로 공항을 지으면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한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도 맞지 않는다. 2017년 이후 중국인 관광객이 오지 않아도 제주 관광객은 큰 변동이 없다. 국내 관광객들이 그 공백을 메운 덕분이다. 결국 미래의 항공 수요자가 외국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외국인 관광객으로 발생하는 불편을 공항건설을 막아 해결하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제주 난개발의 주범은 신공항이 아니라 주민들의 개발 욕망이다. 주민들이 개발 이익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방치하면서 신공항을 막으면 제주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무엇보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제주도민들이 새 관문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다. 

지난 19일 국토교통부가 제2공항 기본계획 수립 용역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반대론자들의 주장대로 신공항 건설 입지를 처음부터 재검토한 끝에 그래도 (성산에 새 공항을 짓는) 원안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반대론자들은 이번에도 주민설명회를 막아섰다. 최종보고서 내용을 설명하러 온 용역진에게 밀가루를 뿌려 쫓아냈다. 이대로 가면 결론은 뻔하다. 제2의 강정기지처럼 정부는 안대로 추진하고, 반대론자들은 막아서게 돼 있다. 신공항은 강정기지가 아니다. 폐쇄적인 군사 기지가 아닌 데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도 않다. 반대론자들은 열린 자세로 신공항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한 후 찬반을 결정해야 한다. 침묵하는 사람들은 반대론자들 편이 아니다. 이게 지난 10년간 관찰해온 결론이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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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상산고등학교와 경기 안산동산고등학교가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지정 심사에서 탈락했다. 전북교육청은 20일 “상산고가 재지정 평가에서 79.61점을 받아 기준점수(80점)에 미달했다”며 자사고 지정취소 절차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경기교육청도 안산동산고가 기준점수(70점)에 미달했다며 지정취소 방침을 발표했다. 

자사고 지정취소는 학교 관계자 청문과 교육부 장관 동의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교육부 장관이 동의하면 이들 학교는 내년 3월 일반고로 전환된다. 과거 자사고 지정이 취소돼 일반고로 전환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산고의 경우 신입생을 전국단위로 모집하는 소위 ‘입시 명문고’라는 점에서 교육현장에 미치는 파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서울 자율형사립고 학부모 연합회 회원들이 전북 상산고의 자사고 취소 결정이 내려진 20일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자사고 폐지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명박 정부는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고 교육의 수월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고교 다양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도입·확대된 자사고·외국어고·국제고는 고교 서열화의 온상으로 지목돼왔다. 이들 학교가 성적 우수학생을 선점하면서 일반고 황폐화는 가속화했다.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편성할 수 있는 권리는 국·영·수 위주의 입시교육 수단으로 변질됐다. 상산고의 경우 전국의 중학생 가운데 수학·과학 우수자들을 모아 다수의 의대 합격자를 배출해왔다. 일반고 2~3배에 달하는 등록금은 계층 간 위화감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에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포함시킨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상산고 측은 평가 결과가 형평성과 공정성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전북교육청이 재지정 기준점을 타 시·도(70점)보다 높은 80점으로 잡은 데다, 자신들이 받은 점수가 기준점에 불과 0.39점 모자란다는 게 이유다. 기준점 설정은 교육감의 고유 권한이다. 그럼에도 학교와 학부모들이 불만이 있다면 청문 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하면 된다. 

단추를 잘못 끼웠음을 발견했다면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는 게 해결책이다. 출발부터 잘못된 자사고체제를 그대로 놓아둔 채 공교육 정상화를 논하기는 어렵다. 전북과 경기 외 다른 지역도 재지정 심사 대상에 오른 자사고에 대해 엄격한 기준으로 공정하고 치밀하게 평가해야 한다. 일반고로 전환하는 자사고에 대해선 다양한 지원책을 모색하는 한편 기존 일반고 육성책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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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20일 ‘외국인 노동자 임금 차별’ 발언 논란에 “터무니없는 비난”이라고 항변했지만, 그는 전날 분명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은 우리나라에 그동안 기여해온 바가 없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똑같이 임금 수준을 유지해주어야 한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기본 가치는 옳지만, 형평에 맞지 않는 차별 금지가 돼선 안된다. 한국당이 법 개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외국인 근로자 임금의 문제점을 개선하겠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21일 (출처:경향신문DB)

뭐라 변명해도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사실 왜곡이며 인종차별을 담은 혐오발언이다. 첫째, 명백히 외국인 노동자, 즉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현행법과 국제 협약에 배치된다. ‘국적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근로기준법 및 국적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황 대표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이주노동자를 표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며 반사이득을 취하려 한 극우 포퓰리즘의 본색을 드러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둘째, 경제적 사실관계도 틀렸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 경제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부터 사실 왜곡이자 명백한 혐오표현이다. 2018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들이 낸 소득세는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주노동자는 내국인이 일하지 않는 최하층의 3D업종에서 주로 일하며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오고 있다. 이민정책연구원의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이주노동자의 경제유발 효과는 86조7000억원에 달했다.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해서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주노동자를 불러들이고 고용한 것인데, 황 대표의 이러한 발언은 열악한 이주노동자의 최저임금마저 강탈하려는 인종차별적 발상이다. 더욱이 외국인 노동자 임금을 인위적으로 낮추면 오히려 내국인 저소득층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이러니 ‘경알못(경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형평을 빙자한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 조장이라는 점이다. 반이민 정서를 등에 업고 집권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유럽의 극우 정당을 흉내낼 요량이면 잘못 짚었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내 일자리를 뺏고 있다는 인식은 보편적이지 않다. 결국 황 대표의 발언은 박약한 인권·노동 감수성에 인종차별적 인식, 거기에 경제적 무지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꼴이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반인권적 발언을 철회하고, 상처받은 이주노동자들에게 먼저 정중히 사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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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8일로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발표한 지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4대강사업에 실시한 수차례의 감사원 감사 결과는 ‘총체적 부실’ ‘입찰 비리’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 같은 말로 요약된다. 4대강사업은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결론이지만 16개의 보는 4대강을 가로막은 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보 해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지난 2월 환경부의 4대강 조사평가기획위원회가 내놓은 ‘금강·영산강 보 2개 해체, 1개 부분해체, 2개 상시개방’이라는 처리방안도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보 해체 반대를 떠받들고 있는 강력한 논리 중 하나는 ‘돈’이다. 잘못된 사업이라고 해도 기왕 엄청난 돈을 들여 지어놓은 걸 어떻게 할 것이냐, 다시 비용을 들여 해체하느니 잘 사용하자는 것이다. 복원을 전제로 가리왕산에 알파인스키 경기장을 만들어놓고도 복원 약속을 가볍게 무시하고 버티는 강원도가 믿는 구석도 결국은 돈의 논리다. 

돈타령은 법원에서도 잘 먹힌다. 지난 2월14일 서울행정법원은 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는 위법이지만, 취소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건설허가 취소로 예상되는 1조원의 손실이 판결의 주된 근거였다. 2017년 공론화에서 ‘탈원전,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라는 묘한 결론의 배경에도 수조 원으로 추정되는 매몰비용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돈의 승리다. 일단 일을 크게만 벌여놓으면 법과 규정을 어겨도 사업은 가게 되어 있다는 인식이 퍼질 수밖에 없다. 돈 앞에서 법과 규정은 점점 무력해진다. 얼마 전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고준위핵폐기물 처리 논의는 이런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년에 강원 삼척포스파워 석탄화력발전소 1·2호기 건설부지에서 지질학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는 천연동굴 2개가 발견되었다. 환경영향평가에서는 천연동굴 발견 가능성이 없다고 했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부실한 평가와 조사로 볼 수밖에 없다. 사업자의 의뢰로 작성된 ‘기초조사 의견서’는 동굴 내부에서 인위적인 요인일 수 있는 균열과 훼손을 확인했지만,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도 ‘기왕’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환경부와 문화재청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지난달 16일 양양군은 설악산 오색케이블카사업에 관한 환경영향평가 본안 보완서를 원주지방환경청에 제출했다. 이미 조작과 부실 판정을 받았던 엉터리 환경영향평가서다. 설악산 보전의 필요성과 케이블카사업 진행 과정의 부당함은 이미 차고도 넘치게 밝혀졌다. 보완이 가능할 수 없는 사안이고, 환경영향평가서 부동의만이 답이다. 설악산 케이블카사업의 시행은 전국의 산지관광 개발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기필코 산에서 4대강사업의 재현을 막고 개발의 탐욕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국립공원에 케이블카 설치가 가능하도록 노선 길이를 2㎞에서 5㎞로 늘려놓은 자연공원법의 수상한 시행령도 반드시 없애야 한다.

법은 머릿속이 아니라 누군가를, 무언가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생겨난 것이다. 규정은 그것이 없으면 피해를 입게 되는 존재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살피고 법과 규정을 적용할 때의 마음가짐으로는 ‘기왕 돈이 들어갔으니’가 아니라 ‘설사 돈이 들어갔더라도’가 맞다. 4대강 보 해체에는 돈이 든다. 하지만 ‘이런’ 돈은 ‘그런’ 돈과는 다르다. 그럴 가치가 충분한 사회적 비용이다. 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점점 더 지배한다. 새로움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현실에 대한 복종과 순응만 남는다. 이런 현실에서 4대강 재자연화를 위한 보 해체와 설악산 케이블카사업 폐기는 이제는 돈타령이 아니라 돈으로 파괴되는 생명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겠다는 사회적 반성이다. 체념과 무기력으로 죽어가는 사회를 살리겠다는 결단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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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혼밥’을 할 때면 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만 꺼내 먹기도 하고 싱크대 앞에 서서 먹기도 한다. 혼자 먹자고 지지고 볶는 일도 번거롭거니와 요리의 필수 과정인 설거지가 귀찮아서다. 최대한 설거지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그나마 식구들과 함께 먹을 때나 찌개라도 끓이고 계란말이라도 부친다. 

도시보다 농촌이 더 빨리 혼밥시대를 맞이했다. 자녀들은 진즉에 대처로 나갔고, 배우자 사망(주로 남편) 이후 홀로 지내는 노인들이 많아서다.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차지하면 초고령 사회라 한다. 농촌은 65세 이상 고령 농민이 40%를 넘어섰고 해마다 사망인구가 늘어 농촌 마을은 빠르게 비어 간다. 농촌 노인 문제는 빈곤과 장애 문제가 중첩돼 있는 데다 여성화 경향도 뚜렷하다. 이는 홀로 사는 할머니들이 아픈 몸을 끌어안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촌 노인들의 생활비 중 식료품비 지출이 80%에 육박한다. 소득이 빈곤선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만큼 엥겔지수가 높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농촌 노인들이 식사에서 느끼는 고충은 양은 물론 질도 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농촌에는 먹을 것이 지천일 것 같지만 이는 도시인들의 착각이다. 채소는 텃밭에서 조금 지어 먹더라도 과일과 생선, 고기, 가공식품은 현금으로 사야 한다. 심지어 쌀도 산다. 그래서 돈이 부족하면 식단은 부실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혼자 차려 먹기까지 하니 밥상은 스산하기 마련이다. 

다행인 것은 몇 년 전부터 ‘농촌마을 공동급식 지원사업’이 실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회관이나 노인정에 모여서 주민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다. 2012년부터 일부 지자체에서 농번기인 모내기철에 취사 도우미 인건비를 지원했는데, 반응이 좋아 전국 지자체로 확산 중이다. 5월 즈음은 하곡을 추수하고 과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철이기도 해서 한시적인 지원이지만 주민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다. 농번기에 가사노동 부담이 줄고 좀 더 풍성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주민들은 의외로 함께 먹는 재미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 충남연구원 박경철 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마을 공동급식의 좋은 점으로 ‘마을 주민 간 공동체성 회복’과 ‘혼자 먹는 외로움의 해소’를 꼽은 응답 비율이 도합 60%를 넘는다. 

하지만 역시 많이 아쉽다. 요즘 농촌에서는 시설재배와 축산업이 확산되면서 농번기가 따로 없을 정도다. 사시사철이 농번기다. 수도작의 경우에는 가을 추수기도 농번기다. 지자체들도 마을 공동급식 사업의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는 있지만 빠듯한 재정 때문에 충분한 예산 지원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 공동급식을 신청한 마을의 절반 정도도 지원하지 못하는 지자체가 많다. 게다가 인건비만 지원되고 부식비는 마을에서 자체 조달하는 경우가 많아 식단의 질적 측면에서도 부족하다. 거동이 불편해 마을회관까지 나오지 못하는 주민들은 이 사업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직접 집에 가져다주는 것은 마을회관에 모이는 주민들도 보행기 없이는 움직이기 어려운 노인들이어서 힘들다. 그래서 집에서도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반조리식품이나 도시락 배달 같은 사업을 병행했으면 한다. 학교급식이나 거점 조리시설과 연계할 수 있다면, 식재료가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이디어는 늘 넘쳐난다. 아쉬운 것은 돈과 사람이고 이는 곧 정치의 문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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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100만명의 홍콩 시민이 나오고 이어서 200만명이 나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결국 사과했고, 문제의 송환법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제 행정장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위의 배경에 대해 많은 분석과 설명이 나왔다. 또 수많은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홍콩과 한국의 민주화운동 혹은 촛불집회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시위대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광둥어 버전을 노래했다는 뉴스도 화제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국경을 넘어서 연대하는 모습은 꽤 감격적이다. 또 이유가 어찌 되었든 폭력과 통제로 체제를 존속하려는 권력들의 불의함도 이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홍콩 시민들이 16일 도심에서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어졌다. 악법을 철회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범죄인 인도 조례’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홍콩 _ AP연합뉴스

그런데 우연히 본 한 문장에 약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홍콩의 상황이 '87년 광주항쟁'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오타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상당한 사람들이 그 게시글을 공유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에 가깝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가령 촛불집회를 외국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어떨까?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입장에 따라 설명 역시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홍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이런저런 뉴스들을 찾아본다고 해도, 그 맥락들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가 홍콩과 ‘비슷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의 민주화는 또 어떤가? 우리는 과연 우리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설명할 언어들과 기준들을 충분히 갖고 있을까? 결국 둘을 비교하고 그것을 통해 유사성을 판단할 정확한 근거가 우리에게도 딱히 없는 셈인 것은 아닐까에 생각이 닿았다. 

물론 안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단순히 무언가를 지지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뿐만이 아니다. 가깝게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싸움들에서 정확한 상황 진단과 이념적 선명성 같은 것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최초의 한정된 문제의식들에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이 붙어가는 과정 속에서 투쟁은 커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각자가 갖고 있는 상이한 불만들이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만나 용광로처럼 녹아드는 과정이 반드시 끼어들었다.

이 불만의 용광로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되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던 미국인들, 프랑스의 노란조끼들, 어쩌면 한국의 촛불 등등. 이들은 때로는 상이하다 못해 양립할 수 없는 입장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각자의 불만을 안고 녹아들었다. 하지만 이 용광로의 열기와 불빛에만 현혹되어서는 정작 그것이 제련해 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기도 한다. 부당한 권력을 몰아내고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그 소수자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심지어 이 두 개의 목소리가 같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일도 적지 않다. 우리가 보았던 대부분의 흐름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고,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상황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홍콩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분노하는 것과, 드러난 현상에 대하여 조금 더 사려 깊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를 배척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 동안 변화에 대한 열망과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왔다. 당장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굴다가, 음울한 목소리로 ‘그래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홍콩의 시민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도래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이 우리에게도 길을 보여주기를, 무엇보다 무사하기를 빈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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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말이다. ‘척도’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잣대’다. 한자로 ‘척(尺)’인 ‘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길이 단위다. 포목점에서는 폭이 일정한 긴 천을 둘둘 말아 두루마리로 보관하다, 손님이 원하는 만큼, 눈금이 표시된 막대로 길이를 재서 끊어 팔았다. 자를 재는 이 막대기가 바로 ‘잣대’다. 한 자가 약 30㎝니 삼척동자의 키는 1m에 미치지 못하고, <삼국지> 구척장신 관우는 2.7m로 세계 신기록이다. 기네스북 감이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말에서 ‘인간’이 제각각 다른 개별적 존재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컫는다면, 사람마다 잣대가 다르니 나에게 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한 자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르니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의미다. 프로타고라스의 말에서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모두를 가리킨다면, 사람에게 맞는 얘기라 해서 강아지에게도 맞는 얘기는 아니라는, 강아지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주장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은, 모든 것을 인간의 시각에서 보겠다는, 인간중심주의 선언으로 볼 수도 있다.

왼쪽 발을 한 줄로 이어 붙여 여럿이 나란히 선 후 발 크기의 평균으로 1피트(ft)를 정했음을 보여주는 중세 유럽의 그림. 위키피디아

한국사 공부할 때 등장하는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은, 길이(度)와 부피(量), 그리고 무게(衡)를 재는 표준(잣대)을 하나로 정했다는 뜻이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부피는 가로, 세로, 높이 세 방향의 길이를 곱해 얻으니, 부피의 단위를 길이 단위와 별도로 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안에 가득 담긴 양으로 부피를 재는 됫박을 따로 만들어, 길이를 재는 잣대와 함께 쓰는 것이 현실에서는 훨씬 더 편했으리라. 무게는 돌림힘의 평형을 이용해 저울로 쟀다. 길이를 재는 잣대, 부피를 재는 됫박, 무게를 재는 저울을 국가에서 정한 것이 바로 도량형의 통일이다.

시간의 길이를 재는 잣대는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밤에 달을 보면 알고, 하루 중 지금이 언제인지는 낮에 해를 보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해의 길이는 나라 안 어디나 별 차이 없지만 계절에 따라서는 크게 변한다. 낼모레 하짓날, 서울에서 해는 오후 7시57분에 져서 다음날 오전 5시11분에 뜬다. 밤의 길이가 9시간14분으로 짧다. 동짓날은 거꾸로다. 무려 14시간26분이 밤이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 사람들에게 야간 통행금지 시간의 시작은 종을 28번 쳐서(인정), 끝은 다음날 새벽 북을 33번 쳐서 알렸다(파루). 밤 시간을 5등분한 것이 ‘경’이고 ‘경’을 다시 5등분한 것이 ‘점’인데, 일경에 해당하는 시간이 하짓날에는 111분, 동짓날에는 173분으로 무려 1시간의 차이가 난다. 사시사철 들쭉날쭉 변하는 잣대로 밤 시간을 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정은 이경에, 파루는 오경삼점에 쳤으니, 하짓날에는 오후 9시48분에서 다음날 오전 4시27분, 동짓날에는 오후 8시10분에서 다음날 오전 6시34분까지가 통행금지 시간이었던 셈이다. 성문을 열며 동트는 새벽을 알려주는 것이 파루다. 우리 조상들은, 곡식이 빨리 성장해 부지런히 일해야 할 여름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일했고, 추수가 끝나 한가한 겨울에는 느지막이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여름밤과 겨울밤에 다를 수 없다. 뉴턴 역학과 칸트 철학의 시간은 관찰 대상의 변화를 측정하는 순수한 형식이다.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지만, 무얼 담아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빈 그릇이다. 과거, 동양의 시간 개념은 고전물리학과는 무척 달랐다. 우리 선조들에게 시간은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의 리듬에 맞춰져 있어 계절과 밤낮에 따라 함께 변했다. 해 뜨는 시간이 매일 다른데도 일출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던 선조들이 우리 눈에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조들이 오늘 아침 우리를 봤다면, 해 뜬 지가 언젠데 여전히 잠자리에서 꾸물대는 후손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과학에도 잣대가 있다. 거리, 시간, 질량뿐만이 아니다. 전류, 온도, 물질의 양, 빛의 세기를 재는 잣대도 있다. 한국의 1m가 미국에서는 10m라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잣대에 대한 합의는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다. 모든 나라가 합의한 여러 표준잣대의 모음이 국제표준단위계다. 얼마 전까지도 질량 1㎏의 표준은 파리에 보관된 합금 덩어리였다. 외계인이 지구인의 1㎏이 얼마인지 알려면 굳이 파리를 방문해야 했다는 뜻이다. 이제 1㎏은 물리학의 기본상수인 플랑크 상수에 기반해 정해졌다. 외계인과 통신을 하게 되면, 1㎏이 얼마인지 이제 드디어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물리학의 잣대들이 우주적 규모의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면에서, 최근 발표된 국제표준단위계는 과학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foot(unit)’을 검색해보라. 1피트(ft)를 어떻게 정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중세 유럽 그림을 볼 수 있다. 왼쪽 발을 한 줄로 이어 붙여 여럿이 나란히 서고는, 발 크기의 평균으로 1피트를 정하는 모습이 담겼다. 사람마다 발 크기가 모두 다른데, 내 발만 특별하다고 우기면 우리는 공통의 잣대에 합의할 수 없다. 필자는 이 그림을 보며, 현대의 민주주의를 떠올렸다.

삶에도 잣대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 남의 잣대가 나와 다르면,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내 잣대를 먼저 의심해보는 성찰적 회의도 중요하다. 서로의 잣대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많은 이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 잣대를 찾아가는 지난한 노력의 이름이 민주주의다. 또, 민주적인 방법으로 숙의를 거쳐 합의한 결과라면 내 잣대와 달라도 그 결과를 존중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다. 내 발만 발이 아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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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후배가 지난주 결혼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14년을 연애하고 드디어 식장에 들어섰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정말 예쁘더라, 들떠서 이야기하는데 듣던 이는 시큰둥하게 “결혼하기 전에 평균 3~4명은 만난다는데 한 사람이라니 손해 아니냐”고 대꾸했다.

마치 ‘표준’처럼 통용되는 ‘평균 3~4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 결혼정보업체가 과거 결혼적령기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미혼 남녀의 이성교제 평균 횟수는 ‘남성 4.7회, 여성 4.3회’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숫자는 교제경험이 없다(13.3%)부터 10회 이상(8.3%)이라는 답변을 모아서 나눈 것이다. 이 같은 부류의 설문조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평균은 ‘특정 집단의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푯값’으로 추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 그 자체가 ‘표준’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평균’은 ‘표준’을 넘어 ‘정상’의 자리까지 종종 넘본다. 서울 거주 25~29세 남성의 평균 키는 175.6㎝이고, 고3 여학생 평균 몸무게는 57.8㎏이고, 아기는 평균 생후 6개월이면 뒤집기를 한다는 등의 통계 수치를 접하면 사고는 자동회로처럼 ‘평균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경우를 놓고 가늠하기 일쑤다.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그 같은 ‘평균’이란 숫자는 별 도움이 안된다. 발달심리학자인 토드 로즈 하버드대 교수가 <평균의 종말>에서 소개한 ‘노르마(Norma)’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르마는 미국의 한 부인과 의사가 젊은 여성 1만5000명으로부터 수집한 신체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조각가 에이브럼 벨스키가 1942년 만든 조각상이다. 노르마의 뜻이 ‘정상’인 것처럼 이 ‘표준모델’은 “평균값이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1945년에는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까지 열렸다. 그런데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엇나갔다. 대회에 참가한 3864명의 여성 중에서 9개 항목의 ‘평균’ 치수에 딱 들어맞는 ‘노르마’의 몸을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균=표준=정상’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전문가들은 당황한 나머지 ‘여성들이 건강하지 않아서 빚어진 문제’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극도로 다양한 인간은 ‘평균’이라는 ‘납작한 숫자’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납작한 말’도 마찬가지다. 명쾌한 진실 같지만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예로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가 있다. 해부학적 특징 때문에 타 인종보다 물에 덜 떠서 그렇다는 건데, 미국의 시몬 마누엘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 여자 자유형 1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 흑인들이 수영을 못하는 것은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던 백인들이 오랫동안 이들의 출입을 금지한 인종차별 문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시험 점수가 좋으면 똑똑하다”도 비슷한 예다. 로즈 교수에 따르면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SAT 점수와 출신학교의 명성이 재능을 예견케 하는 지표가 되지 못하고, 학부 성적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유효하다고 본다. 각 인재가 가진 재능이 들쭉날쭉해서 어느 하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 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맹점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납작한 숫자의 눈치를 보거나, 납작한 말에 가두기엔 삶이 넘치도록 다양하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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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들은 사고뭉치였다. 나 어렸을 땐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땠는데, 아랫목 말고는 달달 떨다가 잠을 설쳤다. 이후 등장한 연탄 시대. 더러 연탄가스를 마시기도 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것은? 연탄가스. 취해서 해롱해롱하면 동치미를 떠다 먹었다. 어이없는 치료법. 국회는 국회의원들이 머리를 맞대는 집일 텐데, 요샌 농땡이 치는 재미가 좋은가. 마을회관은 노인들이 모여 점당 100원 화투를 치다 싸우는 집. 교회는 신도들이 모여 복 달라고 떼쓰다가 뜻대로 안되면 애먼 대통령을 욕하는 집. 대부분 가정집은 뿔뿔이 방에 들어가 휴대폰을 보다가 잠드는 집. 

언젠가 북유럽에 갔다가 한 숙소에서 오로라를 보았다. 내 기억 속 오로라 빌라.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소설에도 ‘오로라의 집’이 등장한다. “빌라 오로라라는 이름과 관목숲 가운데로 흘긋 보이는 집의 진주 빛깔과 그리고 무척 넓지만 전혀 다듬어지지 않아 새와 들고양이가 많이 살고 있는 정원 때문에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모험심으로 두근거렸다. … 고양이들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에서 마치 빌라 오로라 여주인의 피조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집 입구에 적혀 있는 ‘우라노스’라는 그리스어는 ‘하늘’이라는 뜻.” 

하늘이 훤히 보이는 집은 얼마나 감사한가. 서울 살 때 반지하에서 잠깐 지내기도 했다. 하늘이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새마을기차를 타고 올라온 어머니는 캄캄한 방에 웅크리고 앉아 퍽퍽 한숨을 내쉬셨다. 책냄새뿐인 그 반지하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자연을 찬미하는 책들을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창문을 열자 오로라가 반기던 밤에 나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문득 났다. 하얀색 구름을 피어올리고 싶었다. 담배를 좋아하는 신부님 친구가 있는데, 공기 좋은 데 가면 항상 담배를 피우자고 한다. 얻어서 피우는 담배는 제법 맛이 있지. 내가 피어올린 하얀 색깔까지, 오로라는 다양한 빛깔을 서로 품었다. 그래서 아름답게 밤하늘을 물들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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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주인공(르네 젤위거)은 새해맞이 파티를 망친 뒤 자신의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레드 와인을 마시면서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를 온몸으로 따라 부른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드럼 치는 흉내까지 내는 주인공의 연기에 보는 이들은 긴장감에서 해방되고 속 시원함마저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집에서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엔터테인먼트그룹 SM C&C가 만 20~59세 2400여명을 대상으로 ‘여가시간에 어디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라고 물었더니 67%가 “집에 머문다”고 답했다. 이들 중 70%는 “집이 제일 편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들어 집에서 운동을 즐기는 ‘홈트(홈+트레이닝)’, 맛집 요리와 가벼운 술을 즐기는 ‘홈술’ 등 오로지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홈족’이 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빗댄 홈 루덴스(Home Ludens)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홈 루덴스가 갑작스럽게 생긴 문화는 아니다. 덴마크는 휘게(Hygge)의 나라다.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한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며, 촛불 켠 방 안에서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게 바로 휘게다. 핀란드에는 팬츠드렁크(PantsDrunk)가 있다. 텅 빈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음악 등과 함께 혼술을 즐기는 것이 팬츠드렁크다. 우리의 조상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내린 뒤 바람에 온몸을 맡기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겼다고 한다.

미스카 란타넨이 쓴 <팬츠드렁크>에는 팬츠드렁크를 해야 하는 100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니까”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어서”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은 금요일(요일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이니까” 등인데 100번째 이유가 “늘 핑계는 있는 법이니까”이다. 팬츠드렁크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물은 5가지다. 뭘 해도 괜찮은 텅 빈 공간(집이 가장 좋다), 적당한 양의 술, 편한 옷, 디지털 기기 하나, 그리고 가벼운 먹거리 등이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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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북한 주민 4명을 태운 채 강원 삼척에서 발견된 북한 어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북한 어선은 당초 발표한 대로 삼척 인근 해상이 아니라 삼척항 부두에 접안했다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는 것이다. 군 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 어선은 지난 12일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뒤 14일 밤 삼척 동쪽 5㎞ 해상에서 엔진을 끄고 기다리다 해가 뜨자 삼척항으로 진입했다. 이어 북한 주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리려다 112에 신고됐다. 4년 전 북한군 1명이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 초소까지 다가와 귀순한 일명 ‘대기 귀순’ 사건과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 어선이 NLL을 넘어 3일간 돌아다녔는데도 감시망이 전혀 포착하지 못한 점이다. 당시 경비함과 P-3C 대잠초계기가 정상적으로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NLL 130㎞ 이남까지 내려온 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삼척항 인근에 있는 영상감시체계가 이 선박을 1초간 2번 포착했지만 감시병들은 이를 지나쳤다. 해양수산청과 해경도 CCTV로 이 선박을 관측하기는 했으나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측 어선으로 오인했다.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군과 해경의 해상·해안 3중 감시망이 한꺼번에 모두 뚫린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초 군 당국은 조사 결과 해상 및 해안 감시에 허점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어선이 길이 10m, 폭 2.5m밖에 되지 않은 작은 목선인 데다 파도에 반사돼 관측할 수 없었다며 노후화한 관측 장비 탓을 했다. 또 선박이 움직이지 않아 다른 물체로 오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 선박은 28마력 엔진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사건을 축소, 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19일 “경계작전 실태를 되짚어보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 긴장완화 조치로 가뜩이나 경계 태세에 우려가 큰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유감스럽다. 진상을 조사해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해상·해안 경비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노후화된 관측 장비를 교체하고, 장병들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감시 능력도 키워야 한다. 허물을 덮으려는 군의 고질적인 병폐도 차제에 뿌리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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