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플라스틱 의자, 싸지만 맛있는 국수, 차가운 하노이 맥주.”

2016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당시 현지 서민식당에 동행했던 스타셰프 고(故) 앤서니 보데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소탈한 행보에 베트남 국민들은 열광했다. 식사가 대중과 소통하는 좋은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실제로 식사는 문화권별로 다양한 사회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예로부터 식사 자리는 어린아이에게 ‘밥상머리 예절’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었고, 어르신께 식사를 했는지 여쭤보는 것은 공경심의 표현이었다.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돌봄과 소통의 매개체로 기능했던 것이다. 

어르신과 어린이를 배려하는 우리의 문화는 식생활과 관련한 트렌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1인 가구 증가,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 참여 등으로 외식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급식은 어린이집에서부터 학교를 거쳐 직장과 노인시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식생활 패턴을 반영해 식약처는 급식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부터 ‘어린이 급식관리 지원센터’를 통해 영양사가 없는 어린이집·유치원 등에 대한 급식관리 지원서비스를 제공해 어린이 급식의 영양과 위생을 개선하고, 우리 아이들의 올바른 식습관 형성을 지원하고 있다. 

이제 그동안의 경험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올해부터는 어르신의 급식까지 꼼꼼히 챙기고자 한다. 이미 2017년에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로 진입한 우리에게 어르신 급식에 대한 세심한 관리는 시급한 과제이다. 특히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요양시설이나 보호시설 등에서 장기요양서비스를 받는 어르신이 늘고 있다. 고령으로 인해 씹고 삼키는 기능이 떨어지거나 각종 만성질환의 가능성으로 인해 요구되는 영양적 특성이 다양하지만, 단체급식의 성격상 집밥처럼 개인 식습관을 고려한 식사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식약처는 우선 소규모 요양시설 등의 입소 어르신을 대상으로 급식관리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7월부터 서울, 인천 등 전국 7개 지자체에서 급식관리 시범서비스를 진행한다. 어르신 건강 특성을 고려한 식단 제공, 위생·영양관리 방문 지도, 조리·배식 지도 및 영양상담 등 영양관리 지도, 식생활 교육이 실시된다. 향후 시범사업에 대한 평가를 거쳐 지원 규모를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건강한 식사는 개인의 행복한 삶을 넘어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식약처는 급식관리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이를 통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린이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고 안전한 급식을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의경 | 식품의약품안전처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진실은 늘 거짓보다 어렵다. 거짓은 머릿속에서 상상하거나 지어내면 그만이지만, 진실은 이런저런 근거와 감춰진 사실의 파악과 심지어 용기까지 필요하니까. 나아가 우리는 뻔히 밝혀진 사실조차 진실과는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한 편의점주가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면서 그간의 임금을 몽땅 동전으로 지급해 큰 공분을 산 적이 있다. 편의점주에 대한 성토가 인터넷에서 들끓었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 아르바이트생이 불성실한 근무태도로 무던히도 속을 썩였고 해고과정에서도 상식 이하의 행태를 보여준 모양이다. 점주는 후에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은 잘못이라며 사과했지만,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지 공감이 가기는 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소란도 그러하다. 가장 직접적인 부담을 안게 된 자영업자의 불만이야 이해하지만, 최저임금과 무관한 가족 또는 나홀로 점포가 70%이고 자영업자들이 꼽은 어려움의 이유 중 인건비는 22%로 가장 후순위(7월4일자 ‘경향의 눈’ 인용)라는 사실 같은 건 가려져 있다.

주변에 과학자 친구들이 여럿이라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배운 바가 많다. 그중 하나가 “과학자들은 실패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과학자들은 실험에서 예측하거나 가정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험을 늘 하는 터라, 그때마다 생각을 수정하면서 차츰 과학적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은 의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드러난 사실에 대해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이는 설명일지라도 끝없이 의심함으로써 오류의 가능성을 줄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현 가능성, 즉 다른 실험 다른 환경에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가 과학적 진리의 중대한 기준이 된다.

사실에 대해 과학이 취하는 회의적 접근법은 삼단논법이라는 고대의 논리학에서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삼단논법의 하나인 ‘후건부정식’에서는 전건에서 도출한 후건이 반박되면 전건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기각된다. 칼 포퍼가 과학의 특성으로 든 ‘반증 가능성’이라는 기준이 바로 이 논리에 기준한 것이다.

최근 김탁환 소설가와 함께 그의 새 작품 <대소설의 시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18세기 말 ‘대소설’이란 이름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과 대하소설이 왕성하게 생산되던 시절, 그 이야기들을 짓고 읽는 여성 주체들과 실학파 등 젊은 지식인들을 그린 소설이다. 무척이나 흥미진진했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궁금증이 일어서 질문했다. “역사물을 쓸 때는 역사적 사실의 엄연한 틀 때문에 작가적 상상력이 제한받지 않나요?” 작가는 자주 받는 질문이라며 답했다. “상상력은 튼튼한 팩트에서 나옵니다. 치밀한 조사와 연구가 선행될수록 상상력에 자신이 생겨서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거죠.”

허구의 장르인 소설조차 사실의 신전에서 출발하고 과학도 자기부정을 본질로 삼는데, 그 어느 때보다 과학적이 된 이 시대에 왜 가짜뉴스와 거짓말들이 횡행하고,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짜뉴스와 거짓 발언들이 범람하는 이유들을 짚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는 현대 문화의 특성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 보드리야르는 ‘시뮐라크르’라는 개념을 통해, 처음에는 ‘팩트’라는 원본을 가리키던 기호가 원본에서 풀려나와 독자적 존재로 기능하는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원래 정보, 기호, 화폐는 사실에 대한 지시적 기능에서 출발은 했지만 유통 과정에서 다중의 승인이 없으면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들이다. 명품 가방을 누구나 명품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흔한 메이드인차이나 제품과 다를 게 없어진다. 가짜뉴스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한 뉴스의 자격을 갖는 이유다.

둘째는 긴 맥락을 가진 서사를 소화하는 대중의 능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긴 이야기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고 책도 그러하다. 재치가 넘치는 짧은 문장들과 선정적인 정보들만 선호를 받는다. 하지만 진실은 늘 길고 깊은 설명을 필요로 하고, 거짓보다 어려운 법이다.

셋째는 정보 권력의 이동이다. SNS나 단체대화방 같은 사적 채널이 전통적인 정보 생산의 권력을 빼앗았고, 정보의 속성이 그렇듯 가장 빠르게 많이 소비되는 정보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진실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런 세상을 되돌릴 수 있을까? 아무래도 회의적이지만 결국 대중이 달라져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려주는 말들은 달콤하다. 우리는 낯설고 불편한 말들에 먼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국 태도와 자각의 문제일 텐데, 이런 것을 또 말로 설득할 수밖에 없다는 게 회의감을 더한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모든 사람은 하늘에서 부여한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의 기초이다.” 세계인권선언 서문에 등장하는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것(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선언의 논리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아이가 태어날 때 삼신할머니의 실수로 꼭 챙겨 나와야 할 여러 권리들 중에 무엇인가 빼먹은 건 아닌지 확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선언의 외침은 강렬하지만, 그것만으로 개인에게 권리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권리는 계속 변화한다. 시간에 따라 없던 권리가 생겨나기도 하고, 생겨난 권리가 성장하거나 때론 후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존엄하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노동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토지에서 쫓겨나고 가난을 피해 도시로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할 현실은 ‘권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참혹한 것이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일터에 바쳐야 했고, 어린아이들도 노동현장에 내몰렸다. 열악하고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일해도 노동자에게는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돈이 허락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사업주에게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병들었다. 사실상 노동자의 생사를 쥐고 흔드는 사업주를 상대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된 노동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뭉쳐야 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만든 조직, 노동조합은 그렇게 탄생했다. 노동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아니다. 심판이 사라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고 자란 것이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각성제를 강제로 먹으며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일하던 청계천 피복 공장의 시다 소녀들의 노동현실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절규가 있었던 때가 불과 50년 전이다. ‘워어얼화아수목금퇼’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지금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주말, 일주일을 열심히 일했으면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은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된 것도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 노동권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최저임금 인상, 주휴수당 개편, 주52시간 적용 등은 기존의 근로기준법 틀에서의 논쟁”이라며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 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해서는 대체근로”를 허용해야 한다고도 했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합의해 온 노동 기준들을 없애고, 노동조건에 대해 사장과 직원이 서로 만나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내버려 두자는 것이다. 시계를 뒤로 돌리다 못해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발언이다. 경영계나 기업총수의 발언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인 정당 대표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권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법은 권리의 구체적 내용이며, 국회의원은 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알바를 해본 사람은 안다. 법에서 정해진 최저임금을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임대차보호법 법조문을 들이댈 수 있는 담력 있는 세입자는 많지 않다. 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현실의 논리가 채워질 뿐이다. 그리고 저런 구시대적인 노동관을 가진 사람이 야당의 원내대표라는 것이 2019년, 슬픈 우리의 현실이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세상에 이제 그런 시험까지 생긴답니까? 시험 공화국이네요.” “한 줄이라도 스펙을 더 써넣고 싶은 취준생들의 심정도 이해는 돼요.” “인문학 시험 자체가 반인문적입니다.” “인문학을 희화한 것이죠.”

오는 10월 개최 예정인 인문학 시험을 두고 시끌시끌하다. 인문학 시험은 한 언론사 주최로 서울을 비롯한 6개 도시에서 처음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주최 측은 ‘인문학진흥법이 제정될 정도로 인문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민들이 체계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고 향유하자는 취지에서 이번 시험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있다.

시험에선 객관식과 주관식을 합쳐 총 50문항이 제시될 예정이다. 철학과 역사에 대한 소양이 있는 응시생에게는 ‘중급’, 문예(미술·음악·문학)의 소양까지 있는 응시생에게는 ‘고급’ 인증서가 부여된다. 인문학 교육능력까지 갖춘 응시생은 ‘특급(인문학 지도사)’ 인증서가 나온다. 대학수학능력시험처럼 인문학에도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주최 측 관계자의 답은 이렇다. “사실 우리도 초급, 중급, 고급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직업능력개발원에 시험 등록을 하려면 이런 구분이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됐습니다. 일단 3회를 운영하면 국가공인시험으로 인정받기 위한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요. 국가공인시험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활용 방안이 확대될 것으로 봅니다.” 그는 “기업에 제출할 수 있는 인증시험이 토익 정도인 상황에서 자신의 인문학 실력도 입증할 수 있는 시험을 만들어 달라는 절박한 사람들의 수요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시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시험의 등장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설적으로 인문학 시험은 우리 사회에 위치한 현 인문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는 뜻에서 단칼에 무시할 것도 아니다. 인문학은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도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 신조어가 일상에서 통용될 정도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2019년 인문사회학 연구·개발(R&amp;D) 예산은 3009억원으로 5년 새 고작 0.3% 증가한 규모다. 최근 5년간 R&amp;D 예산에서 인문사회학이 차지한 비중은 1.5~1.6%에 불과하다. 그나마 연구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아 학계에선 원성이 잦다.

현실은 이러한데 한편에선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인공지능(AI)을 내세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는 시대에 인간,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편승한 ‘CEO 인문학’이나 자사의 브랜드와 기업 이미지에 인문학을 덧붙이려는 상업화 또한 만연하고 있다.

본질로 돌아가 질문해보자. 과연 우리시대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사회학자 노명우 아주대 교수는 “인문학이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 그 질문을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때문이지, 어떤 대답을 잘하는 능력이 인문학적 능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이란 결국 인간과 관련된 질문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핵심입니다. 질문 자체가 의미 있고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죠.”

‘거리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작은 도서관 ‘책고집’의 최준영 대표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고 간단히 말한다. 그는 노숙인 등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과 인문학을 통해 희망을 싹 틔우려 한 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인문학이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이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내치고 살면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책을 읽고 서로 내가 속한 사회와 역사를 말하면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소중한 거다’ 깨닫는 거죠. 그러면서 스스로를 보듬고,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고통의 내용을 알고…. 눈 뜨면 돈돈돈하는 세상이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나는 역사 속 어느 지점에 살고 있는가 고민하는 것이죠. ‘역사는 대양(大洋)을 마시고 한 줌의 오줌을 누는 것에 불과하다(구스타프 플로베르)’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역사에도, 인문학에도 정답이란 있을 수 없죠.”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유란, 역사란’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대의 고통은 왜 중요한가’…. 이 질문들의 정답은 과연 몇 번일까.

<김희연 문화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연못 속에 구름이 살고 있었다

자신이 쏟아부었던 분량의 소나기

그다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살았으면

소금쟁이가 됐을까

1초에 자기 몸길이 백배나 되는 거리의 물위를

가볍게 걸어다니는 소금쟁이가

물속에 사는 구름의 생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풀섶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종일 두 앞발을 비비며 우는 소리

흐르는 시냇물에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여름 한철 온 생을 빌고 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뙤약볕 시골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루나무 꼭대기

파란 연못에 내 전생이 환하게 보이다

까무룩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

너무 환한 생의 정면과 적막이 무서워 울었다


권대웅(1962~)


연못의 수면에 구름이 비치었다. 활발한 구름은 한 차례 소낙비를 뿌렸다. 연못의 수면에 소금쟁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연못의 수면과 연못의 수면에 비친 구름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도 소금쟁이도 지금의 시간 이전에는 무거운 생(生)을 짊어지고 살았다. 이제는 무게를 덜고 한결 경쾌해졌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수풀에서는 쓰르람쓰르람 쓰르라미가 울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대낮에 시인은 시골길을 걷다 하얀 적막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올려다본, 훤칠한 미루나무 끝 하늘에서 전생의 환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벽과도 같은, 깎아 세운 것 같은 적막과 딱 맞닥뜨리는 순간 생의 비의(秘義)를 보았다. 생명이 힘차고 왕성하게 자라지만 때때로 적막 산중 같기도 한 여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일반 칼럼 > 경향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순이 왔다  (0) 2019.07.22
동백숲길에서  (0) 2019.07.15
여름  (0) 2019.07.08
염천  (0) 2019.07.01
새벽 고요는  (0) 2019.06.24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0) 2019.06.1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0년대의 첫 10년을 보내면서 미국 국립해양청(NOAA)은 48개국 300여명의 과학자로부터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기후보고서를 발표했다. 명백히 인류에 의해 초래된 기후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지은 보고서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는 1880년대 이후 갈수록 더워져 2000년대가 가장 더웠던 10년으로 기록됐다. 당시 영국 기상청의 피터 손은 “보고서는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절규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 ‘절규’가 날로 강렬해지고 있다. 사상 최고의 폭염이 한국을 강타한 2018년 지구 평균기온은 14.69도를 기록, 20세기 전체 평균보다 0.79도나 높았다. 관측이 시작된 1880년 이후 4번째 높은 기온이다. 139년의 관측기간 동안 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16년이며 2017년, 2015년, 2018년 순이다. 2015년 이후 기록적인 더위의 계속이다. 2018년 한반도의 평균기온은 1973년 대비 6월은 1.3도, 7월은 1.1도, 8월은 0.9도 각각 상승했다. 폭염일수는 31.5일, 열대야는 17.7일을 기록했다. 공히 역대 최장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와 영국 사우샘프턴대 연구진은 지난해 8월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0년까지 이례적인 폭염의 지속”을 경고했다. 올해도 벌써 지구촌 곳곳에 폭염의 내습이다. 프랑스·스페인 등 유럽에서는 지난달 40도를 넘는 ‘이른 폭염’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인도는 기온이 50도를 넘어 100여명이 열사병으로 숨졌다. 북극해와 맞닿은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는 지난 5일 기온이 32.2도까지 치솟아 기상관측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울도 지난 6일 36도를 넘으면서 동기 기온으로는 80년 만에 가장 높았다. 폭염경보가 시행된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서울과 중부에 가장 먼저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역대 가장 긴 여름’ 예측도 나왔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필연적 현상이 폭염이다. 기상 이변이 아니라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 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기온이 45.9도를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프랑스 남부 마을의 시장은 “우리는 이러한 기후를 견뎌내야만 한다”고 했다고 한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 이제 견뎌내는 것 빼고는 달리 길이 없는 것일까.

<양권모 논설실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8일 열린다. 이번 청문회는 윤 후보자의 도덕성과 검찰개혁에 대한 소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의 관계 등으로 역대 어느 때보다 여야 간 대립이 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가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장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우선 도덕성 검증에서 제기된 의혹은 윤 후보자가 자신과 가까운 윤대진 법무부 검찰국장의 친형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 뇌물 사건에 관여했는지 여부다. 야당은 윤 전 세무서장이 2013년 경찰 수사 도중 해외로 도피했다가 강제 송환돼 혐의 없음 처분을 받는 과정에 윤 후보자가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야당은 윤 후보자가 법규를 어기고 변호사를 소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윤 후보자는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수사 과정에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윤 후보자가 검찰의 수장으로 공평한 수사를 실현할 인물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만큼 진실 여부를 규명해야 한다. 반면 여당은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팀장이었던 윤 후보자가 수사에서 배제된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윤 후보자는 검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체포·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다 수사팀에서 배제되고 정직 1개월의 처분까지 받았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 황교안 현 자유한국당 대표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질의가 집중될 경우 ‘황교안 청문회’가 될 수 있다. 청문위원으로 나서는 여상규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한국당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과정에서 고발돼 수사 선상에 오른 것도 문제이다. 이들이 청문위원의 지위를 수사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청문회는 후보자가 공직을 수행할 능력과 도덕성을 갖췄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장치이다. 그중에서도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일이 먼저다. 도덕성 검증도 해야겠지만, 이를 빙자한 정치 공방으로 얼룩져 윤 후보자의 자질과 검찰개혁 의지 검증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윤 후보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해 “국회 결정을 존중하겠다”면서도 경찰에 구속영장 청구권을 주는 것에는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로 검찰의 역할이 위축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도 비쳤다. 시민들은 ‘강골 검사’ 윤석열이 검찰을 공정한 수사기관으로 개혁할 수 있을지를 기대하면서도 검찰 조직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검찰 지상주의’로 흐르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청문위원들은 이 점에 유의해 검증에 나서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이 남편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영상이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상에는 30대 남편이 베트남 출신 부인을 주먹과 발, 소주병으로 마구 때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옆에는 두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피해 여성은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로 평소에도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해당 영상을 올린 누리꾼은 베트남어로 “한국 남편은 미쳤다”고 적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다.

우리나라에서 국제결혼은 매년 전체 혼인의 7~11%를 차지한다. 대부분 여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외국 출신 부인의 국적은 베트남이 27.7%로 가장 많았고, 중국(25.0%), 태국(4.7%) 순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결혼이주여성을 마주치는 게 낯설지 않다. 농촌 남성 열 명 중 네 명꼴로 외국 여성과 결혼한다는 통계도 있다. 덕분에 해체 위기에 있던 농촌 사회가 다시 활력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도 우리 의식과 정책은 이에 발맞춰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부인인 베트남 이주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남성

결혼이주여성들에 대한 가정폭력 등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 해 전에도 베트남·중국 출신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된 비극이 있었다. 2017년 국가인권위 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 10명 중 4명이 가정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이주여성들은 남편에게 종속적인 처지를 느끼거나 가부장적 문화를 강요당할 때가 많다고 호소한다. 이들은 국내에 특별한 연고 없이 좁은 사회관계망 속에 갇혀 있어 가정폭력 등이 외부로 알려지기 어려운 구조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반짝 관심을 갖고 말 게 아니라 조기 발견, 지원 시스템 구축 같은 근본적 대책이 시급하다. 의지할 데 없는 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은 더 엄하게 처벌할 필요도 있다.

외국인 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의 자녀는 엄연히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된 지 오래다. 국적과 인종, 피부색에 따라 인권이 달라질 수는 없다. 저출산 고령화로 외국인 노동자는 더 늘어나고 국제결혼 증가로 인한 이주여성도 더 많아질 것이다. 1960~1970년대 한국인들은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등으로 나가 일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해 살고 있다. 2018년 기준 해외동포의 수가 734만명이다. 우리 동포들이 해외에서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 생각하고, 그대로 하면 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화해·치유재단이 마침내 해산되었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교부 장관 합의(이하 2015 한·일 합의)에 따른 후속조치로 2016년 7월28일 설립되었으니 3년여 만이다. 절차와 내용은 물론 형식적 정당성마저 결여한 2015 한·일 합의의 부산물,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진상규명, 법적배상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본 스스로 “잃은 것은 10억엔뿐”이라던 그 치졸한 돈을 ‘치유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아 만든 재단, 그리하여 피해당사자는 물론 활동가, 양식 있는 세계 시민들을 공분시켰던 재단, 고(故) 김복동 할머니가 암 투병 중에도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감행했던 바로 그 재단이다.  

작년 11월 재단 해산 방침이 공식 발표된 후, 여성가족부는 올해 6월17일 화해·치유재단의 등기부상 해산 절차를 신청했고, 7월3일 완료 통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채권·채무 관계, 고용관계와 사무실 계약 종료 등 최종 청산 절차를 걸쳐 등기까지 말소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터이고 남은 재단 잔여기금 처리 또한 과제로 남았지만, 어쨌든 법적 성격이 청산법인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재단법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재단 해산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7월5일, 대한민국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화해·치유재단 해산, 일본 경제보복 확대 방아쇠 되나”, “ ‘화해·치유재단 해산’ 한·일 갈등 새 ‘뇌관’으로”, “이 와중에 ‘위안부재단’ 해산 절차 시작…日 ‘수용 못한다’ 반발”, “벼랑 끝 한·일관계 새 뇌관…‘화해·치유재단 해산’ 日 반발”, “ ‘朴정부 때 설립한 화해·치유재단’…韓, ‘日에 통보 없이 정식해산’ ”, “갈등 속에 나온 ‘화해·치유재단’ 해산 소식…日 발끈”, “日, 화해·치유재단 해산에 보복 준비…‘수출규제 버금’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25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화해·치유재단을 사실상 해산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환영 일색으로 나왔던 당시 언론의 태도와는 너무도 상반된다. 집단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이들 간에 관통하는 공통점은 첫째, 한·일 경제충돌, 혹은 일본의 경제보복이란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부정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화해·치유재단은 갑자기 갈등 해소를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해산은 ‘양국 간 갈등에 기름을 붓는 뇌관’이 된다. 둘째, 기사의 주요 관심사는 일본 정부의 반응이다. 시작도 끝도 일본 정부다. 화해·치유재단과 2015 한·일 합의의 근본적인 문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노력은 안중에도 없다. 한국 정부는 수세적 위치에 잠깐 등장한다. 셋째, 대부분 기사의 모태는 연합뉴스 일본 특파원의 아사히신문을 인용한 단신 기사다. 주장의 주요 근거는 아사히신문 보도와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관방부 부장관의 정례브리핑이다. 소수의 언론사를 제외하곤 일본 정부의 협박성 발언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대신 대한민국 시민사회, 당사자의 반응이 소거된 이유다. 이들은 모두 일본의 시점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짐짓 한국 경제를 염려하며 재단 해산의 시의성을 따지는 기사들의 최종 과녁은 화해·치유재단이 아니다. 국가 간 신의를 깨고 2015 한·일 합의를 어긴 것은 한국의 문재인 정부다. 공교로운 시점에 ‘확전의 방아쇠’를 당긴 주체도 한국 정부다. 불필요한 행동, 혹은 ‘통보’도 없는 무례한 행동으로 일본 정부의 심기를 건드려 경제보복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한국 정부다. 트러블 메이커다.

2015 한·일 합의를 지지하고 문재인 정권을 공격함으로써 무슨 이익을 직접적으로 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거나 숨겨진 의도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화해·치유재단 해산이 한·일관계 악화에 기름을 부었다”던 한 학자의 발언이나, “어려운 합의를 도출해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뒤집어서 지금 이렇게 한·일 간 국교가 굉장히 어려워졌다”던 김무성 의원의 최근 발언을 상기해 보자. 한·일관계 악화라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무의식적’으로 가리는 사이, 식민지 지배 책임은 희미해진다. 식민 지배국의 거만한 위치는 포스트식민 공간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겨우 2015년 12월28일 이전으로 시계를 돌렸을 뿐이다. 1910년 아니, 1945년이 결과한 무게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다. 식민지 유령은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 곁을 맴돌거늘, ‘일부’ 한국의 위정자와 언론은 어느 시공간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며, 누구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