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7월 첫 주는 산업안전보건강조주간으로 관련 행사가 열린다. 특히 50회를 맞은 2017년 행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행사 중 대통령이 그해 5월 거제와 남양주에서 발생한 크레인 사망 사고를 언급하며 열악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위험의 외주화를 비판하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겠다는 메시지를 영상을 통해 전달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당시 산업안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고, 정부가 제도는 물론 관행까지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산업현장의 위험을 유발하는 원청과 발주자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여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외주화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안전의 대상이 되도록 하고, 파견이나 용역이라는 이유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또한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사업장은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모든’ 작업을 중지하도록 하고 안전이 확보되었는지 반드시 현장 노동자의 의견을 듣고 확인하겠다고 했다.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산업안전 패러다임의 변화도, 관행의 혁신도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 개선방안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2017년 대통령의 메시지 이후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의 대상을 ‘일하는 사람’ 모두로 하겠다는 야심찬 의지를 보이며 법의 전부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법안은 국회에서 잠잤고, 노동자들의 손상과 죽음은 이어졌다. 결국 2018년 겨울 화력발전소의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의 갈가리 찢긴 죽음에 이르러서야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모든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취지 역시 갈가리 찢긴 채로…. 좋다, 졸속한 법 개정은 지금껏 파행하고 있는 이전투구 국회의 탓이라고 치자.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당연히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몫이다. 법이 제대로 갖추어 챙기지 못한 대통령의 약속을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의 수준에서 촘촘히 구성해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원청의 책임강화,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도급승인 대상 위험작업과 위험업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확대하여 재하도급을 막아야 한다. 원청 책임대상의 범위를 협소화하는 적용제외 규정을 재검토하고 건설기계에 대한 책임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안전 대상이 되도록 하자면 에어컨 설치, 통신설치 수리 등 다양한 방문서비스 및 이동노동자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도급인의 지정·제공하는 장소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화물운송 노동자, 예술관련 노동자, 학원 어린이집 통학버스 운전자 등 특수고용노동자 보호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사업장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 ‘모든’ 작업을 중지하겠다는 의지는 작업 중지 대상에 대한 폭넓고 적극적인 해석과 작업 중지 명령해제 시에 노동자들의 의견 반영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를 구성해야 한다.

최소한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두고 한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은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것은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대통령령)과 시행규칙(고용노동부령)의 개정과정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류현철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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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천동설이 주장했던 태양계 행성들의 궤도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어떤 글을 발견했다. 그 글은 아직도 천동설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지구평평설의 어리석음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천동설과 지구평평설을 모두 믿었더라면 차라리 일관성이 있다고 느꼈을 텐데, 하나만 믿으면서 다른 하나에 대해 통탄하는 것이 무척 기이해 보였다.

“어떤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 주장을 넘어서 증명된 것으로 보는가” 하는 점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그 사회의 중요한 지적, 문화적 지표다. 개인의 경우에도 그렇다. “무엇을 증명된 것으로 보고, 무엇을 아직 의심하는가”는 어떤 개인의 판단력, 성숙함, 기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징후다. 나는 어떤 사람의 ‘증명에 대한 감각’이 이례적이면 다른 자질이 훌륭해도 높게 평가하기가 망설여진다. 온갖 정보가 쓰나미처럼 우리의 전두엽으로 몰려오는 이 시대에는 어떤 정보가 ‘증명된 사실’인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며, 나름의 ‘증명에 대한 태도와 감각’으로 잘 여과하지 않으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온갖 학문과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고 있지만, 무엇이 증명된 것으로서 믿을 만한 사실인지 가리는 것은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정보의 폭발이라고 할 만큼 많은 정보가 유통되지만,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려는 소음이 심각하고,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국가, 지식인 사회, 매체의 권위가 붕괴됨으로써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대가 된 것이다. 즉 경제적 의미와 다른 의미에서 정보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나라에서 각 정당과 그 열성지지자들의 당파적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부의 말도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엄청난 소문이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는 얼마나 허다한가. 소셜미디어에 떠도는 어떤 상품에 대한 칭찬이 기업의 은밀한 마케팅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정치적 함의가 있는 보도 중에서 매체의 정치적 포지셔닝을 고려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거대한 정보의 태평양에 뗏목을 타고 표류하면서, 소금물이 아닌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하지 못해 탈수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복적 사고의 총아인 철학자 니체는 “진리란 그것 없이는 특정한 종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할, 그런 오류의 한 양식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알쏭달쏭한 그의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어차피 객관적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삶에 대한 유용성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비록 그의 말이 영감을 주기는 하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런데 사회에 만연한 진실과 증명에 대한 무감각, 증명 따위는 개에게나 요구하라는 식의 세태를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니체의 수제자가 된 것 같다.

학문을 제외했을 때, 증명이 가장 첨예하게 문제되는 영역은 사법과 언론이다. 사법에는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 발전하고 제도화된 ‘증명의 원칙’들이 있다. 주장과 입증을 엄격히 구별하고,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증거는 배제하며, 편파적일 가능성이 있는 판사는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증거가 채택되는 체계적인 절차가 있고, 신빙성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관한 여러 원리가 확립되어 있다. 일의 특성상 다른 어느 분야보다 증명의 원리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도 인간의 일인지라 판사의 자유로운 심증과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회색지대가 있다. 그 부분이 지혜롭게 운용되었으면 국민의 신뢰를 더 얻었겠지만,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이 있었고, 게다가 정치와 계층이 양극화된 시기에는 안간힘을 다해도 결코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은 좁게 말하면 ‘팩트체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증명의 문제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매체마다의 정치적 지향, 극심한 보도경쟁, 매체의 난립, 시간의 압박 따위가 증명의 원칙을 통과하지 못한 글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증명의 엄격성’이라는 사회의 무형적 자산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분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에 대해 가장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정치사회의 증명에 대한 무책임과 허언증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증명에 대한 감각과 태도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 단계와 건강성에 대한 핵심 지표다. 개인이 그리고 사회가 증명의 원리를 엄격하고 뚜렷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과 가치, 주장과 증명을 변별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입장이 자신도 모르는 새, 더러는 느슨하게 더러는 과도하게 증명을 요구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개인 또는 공동체의 정신의학적 문제가 진실의 수용을 방해하고 망상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자각해야 한다. 

한국은 양적 지표가 보여주듯이 놀라운 성취를 이룬 나라다. 구성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즐거워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지표와 별개로 심각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위기의 신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고,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긴요한 것이 ‘증명에 대한 감각과 태도’다. 우리는 이에 관한 한 미성숙한 젊은이가 겪는 불안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직도 거치고 있다. 

개인이 증명에 대한 통찰이 부족해 진실을 제대로 못 가린다면 앞날을 위해 필요한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공동체가 현실에 대해 엄밀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과도하고 피로한 당파성을 극복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과 세력이 끊임없이 퍼뜨리는 소음을 최대한 걸러내며, 엄격한 증명을 바탕으로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절실하다.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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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한 통 받았다. “귀하의 노력에 힘입어…”로 시작되는 메일이었다. 의례적으로 보내는 것이었겠지만, 다 읽고 나니 유독 한 단어가 입에 남았다. 바로 ‘힘입다’였다. 활자로는 간간이 접했지만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단어였다. 힘 있는 상태일 때는 굳이 다른 힘이 필요치 않다. 내 기세로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반면, 힘없는 상태일 때는 힘이 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빌리거나 합칠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아마도 ‘힘입다’의 첫 번째 뜻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다. “어떤 힘의 도움을 받다.” 간절하게 부탁할 때의 마음은 아마도 이와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 때 힘을 보탠 사람도 힘을 입은 사람도 행복할 것이다. 직접적인 도움과 맞닿아 있는 첫 번째 뜻은 주로 긴박한 상황과 함께 쓰인다. 수해 지역에 성금을 보내고 복구 현장에 가서 이런저런 일을 할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은 힘입는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다. 가시적인 힘이다.

현장성이 두드러지고 전후의 상황 변화가 확연한 첫 번째 뜻과 달리, ‘힘입다’의 두 번째 뜻은 육안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어떤 행동이나 말 따위에 용기를 얻다”라는 의미처럼, 힘을 입었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이 힘이 되는지조차 현장에서 가늠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해나 응원이 그렇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그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삶의 다음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힘은 다시 살아야 할 마음을,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는 힘이다.

‘힘입다’의 세 번째 뜻은 “어떤 것의 영향을 받다”다. 행사에 가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 주로 사회자가 그 역할을 맡곤 하는데, 사회자의 역량에 따라 주인공의 매력이 한껏 발산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사회자가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열중한다면, 주인공이 힘입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보색 대비처럼 말이다. 보색을 서로 섞으면 무채색이 되지만, 하나를 배경으로 다른 색이 놓이면 더 뚜렷이 보인다. 빨간색과 청록색, 남색과 노란색, 녹색과 주황색처럼 말이다. 이는 누군가를 힘입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힘을 내려놓아야 함을 뜻한다. 북돋우는 힘이다.

그날 밤,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일에 ‘힘입다’라는 단어를 썼다. 고마움을 전하려 쓰기 시작한 메일이었는데, 저 단어를 사용하니 그 사람이 내게 써준 마음이 좀 더 선명해졌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많은 존재들에게 힘입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님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부족함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 이때껏 글을 쓸 수 있었다.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몇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지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신문사에서 내게 내어준 지면에 힘입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음날 아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택배 왔습니다.” 주문한 책들이 온 모양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4층 건물의 4층이다. 승강기도 없고 계단도 제법 가파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 기사님의 이마에는 아침부터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번번이 고맙습니다. 주스 한 잔 드시고 가세요.” 갈증이 심했는지 기사님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힘입는 몸과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미소에 힘입어 하루를 상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입는 것처럼, 나는 매일 힘입는다. 철에 맞는 옷이 따로 있는 것처럼, 사는 데는 알록달록한 힘이 필요하다. 꼭 커다랗지 않아도 된다. 자잘해도,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아도 그 힘은 공기처럼 나를 감싼다. ‘힙입다’라고 소리 내어 발음해본다. 무엇보다 힘을 옷처럼 입을 수 있다니, 꼭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슈트처럼 근사하지 않은가.

자주 입고 자주 입히고 싶은 말이다, 힘입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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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school)의 어원인 스콜라(schola)에는 ‘프리타임, 레저, 토론’이라는 뜻이 있다. 단어의 의미로 보면 본래 학교라는 곳은 일상을 넘어서 자유롭게 삶의 의미와 기쁨을 추구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 내면에는 존재와 삶의 원대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근원적인 열망이 있으며 이 열망으로 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정신과 물질세계의 진보를 이루어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금 우리의 학교는 이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입시교육은 존재와 세상을 폭넓게 탐구할 기회를 가로막고 있고 경쟁과 통제의 교육 방식은 여전히 학생들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통제는 필연적으로 저항과 힘겨루기를 불러오기 때문에 수시로 배움의 공간을 위협한다. 교사가 엄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학생이 웃으며 “야, 졸라 무섭다!”고 말하는 순간 교사의 내면은 참혹한 상처를 입는다. “교직생활 그렇게 하시면 안되죠.” “정년까지 안 하고 싶으신 모양이네.”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을 꾸짖다가 울분을 못 이겨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면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는 학부모 항의를 받게 되고 잘못된 지도 방식에 대해 사과할 수밖에 없다. 심한 경우, 학생에게 한 대 얻어맞을 수도 있는데 교직의 어려움은 이 모든 수모를 어린 아이들 앞에서 겪고도 다음날 다시 교단에 서야 한다는 점이다. 

교사들은 갈수록 움츠러들고 점점 아이들에게서 물러나 문제가 생기면 지도하기보다는 교권보호위원회에 신고해 행패를 부린 학생에게 최소한의 벌을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실제로 교사는 학생을 교권침해로 신고하고, 학생은 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하며 학생들은 서로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학부모들까지 가세하여 변호사를 동원하고, 교실 참관을 요구하기도 하며 심지어 시험문제와 생활기록부 내용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면서 수업과 평가 영역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학생과 교사를 믿지 않으면서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잊어버린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벌일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으면 교단을 떠나라고 하지만 이 같은 교육풍토에서는 누가 와도 사람만 바뀔 뿐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육당국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절차와 규정을 더 세밀하게 만들어 내려보내고 교사들은 매뉴얼 몇 쪽 몇 줄에 나오는 문구에 교사 자신의 지혜와 영혼을 내맡겨버린다. 이렇게 교육은 점점 가르침과 배움에서 멀어져 행정업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다시 우리 안에 있다. 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정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교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모든 교사들 또한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좋은 교육을 위한 충분한 힘을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두려움을 내려놓고 상대를 초대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지금이라도 교사와 학생들을 믿고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역할, 권한과 책임을 주어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을 향한 그들의 선한 열망을 초대하여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지 대화를 함께 시작할 때 좋은 교육의 씨앗은 다시 싹틀 수 있다. 이제 곧 방학이다. 숨 가빴던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어 함석헌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가만있자. 이것이 과연 내가 할 일이었던가?”

<조춘애 |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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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과 시간 싸움으로 마음 졸이며 초조해할 때 ‘조바심을 한다’고 합니다. ‘조바심을 친다’고도 하죠. 흔히 알려져 있는 조바심의 어원은 ‘조는 힘들여 비벼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 초조하고 급해지기 일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뭔가 많이 궁색한 설명 같습니다. 생각대로 얼른 되지 않아 초조하게 만들 일은 세상천지에 넘쳐나는데 말이죠. 딱딱하게 말라붙은 밥풀은 불릴 시간도 없는 급한 설거지를 짜증나게 하고 찢어져라 힘줘도 안 나오는 똥은 식은땀으로 궁둥이에 깔판 자국 만드는데, 굳이 ‘조’를 넣어 만든 이 말만 오래도록 쓰이는 이유란 뭘까요?

‘조바심’에서 ‘바심’은 타작 또는 탈곡의 순우리말입니다. 타작은 마당에서 마당질(타작)하는 것입니다. 돌이나 통나무에 내려쳐 떨구거나 바닥에 깔아놓고 도리깨질로 내려쳤지요. 그러니 때릴 타, 타작(打作) 맞습니다. 또는 홀태, 훌태, 그네라 불리는 큰 빗을 비스듬히 거꾸로 세워 거기에 이삭 걸어 당겨 이 잡듯이 훑어 냈습니다. 근대에는 발판 연신 밟아 와릉와릉 돌리는 ‘와릉’이라는 통돌이에 대고 떨었지요(요즘엔 촘촘한 망에 조 이삭 깔고 차 타이어로 지르밟은 뒤 체 치듯 알곡을 거르더군요).

조를 바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조 이삭을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비비는 것입니다. 어라? 초조할 때 우리가 하는 행동과 같군요. 그래서 저는 ‘조바심하다’를 조를 바심하는 동작과 우리가 초조할 때 생각 없이 하는 똑같은 행동을 가지고 만든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속담으로 ‘조 비비듯 하다’도 있으니까요(물론 국어사전에는 아직 ‘조 낟알이 생각대로 비벼 떨어지지 않아 조급해지는 마음’ 정도로 조바심을 설명합니다). 어쨌거나 맨손바닥 비비며 무심결의 몸짓으로 어쩌지 못할 초조한 마음을 몇 톨이나마 떨궈보자는 그 몸짓이 조바심인 건 맞습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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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석에 앉아 노자를 배운다. 이제껏 귀동냥한 것과는 사뭇 다른 전복적 해석에 머릿속이 반짝거린다. 무유(無有)를 비롯해 부쟁, 무위는 노자가 말하는 주요한 개념들이다. 그런 총중에 경향신문의 한 인터뷰 제목에 눈길이 머물렀다. “판문점 회동 핵심은 분단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보여준 것.” 심화학습을 위해 읽은 ‘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의 머리말에 맞춤한 내용이 있다. “70, 80년대는 군사정치의 극성기로 학교는 이에 항거하는 반정시위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군경들의 침입으로 영일이 없었다. (…) 그때 학생들이 내건 반정권 구호들에 불이병강천하와 같은 노자의 글귀들이 등장했다.”

일찍이 김구는 우리나라가 문화국이 되는 것을 소원했거니와 당시 학생들이 불이병강천하(不以兵强天下: 무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를 내세운 건 되새길 만한 안목이 아닐 수 없겠다. 결국 학생들은 군사정치를 물리쳤고, 그제 판문점에서의 저 만남도 결국은 부쟁(不爭)으로 가는 한 이정표가 되리라.

천하통일은 있어도 천지통일이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천지는 진즉에 통일되어 있다. 꽃에 입문하고 북방계 식물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어 백두산 탐사에 종종 따라붙는다. 얼마 전 이도백하로 가는 길목을 둘러보는 길. 우리나라 웬만한 산 아래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벌깨덩굴이 ‘천지삐까리’로 피어 있다. 수형이 익숙한 나무들은 객지에서도 나의 눈을 안심케 함은 물론 인정이 묻어나던 기억 속의 고향을 떠올리게도 하였다. 꽃과 나무는 이미 스스로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중!

어느 숲으로 들어가니 발을 디디기 송구할 만큼 왕죽대아재비가 잔뜩 피어 있었다. 설악산을 위시해서 높고 깊은 산에서나 발견된다지만 아직 내 눈으로 입장하지 못했던 귀한 꽃이다. 아재비라니, 이름에서 그 어떤 인위적인 냄새를 풍기지만 이런 인위라면 얼마든지 좋다. 따지고 보면 인간인 나하고 식물인 왕죽대아재비는 물과 흙, 바람과 천둥으로 차곡차곡 연결되어 있는 것. 생김새에서 누님을 떠올리게 하는 국화처럼 이름에서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왕죽대아재비.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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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시를 걷다보면 ‘함께 손잡고 문명의 도시를 만들자(携手共建文明城市)’는 벽보나 포스터를 보게 된다. 남자 화장실에는 ‘한 발 더 내디디면 문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向前一步 踏入文明)는 글귀도 있다. 1970년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 구호들이다. 거창하게 ‘문명’을 들먹이지만, 중국인들에게 문명은 교양이나 도덕예절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구호와 선전 문구가 넘쳐나는 현실은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방증일까.

실제 중국에서는 거리에서 침 뱉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새치기, 쓰레기 투기, 교통신호 위반도 다반사다. ‘시끄럽게 떠들기로 말하면 중국인은 금메달감’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름철에는 중국인 특유의 생활습관을 목격할 수 있다. 여성들의 ‘파자마 패션’과 남성들의 배 노출 행동이다. 파자마 패션은 중국 여성들이 파자마를 신분 과시를 위해 외출복으로 입고 다닌 데서 유행했다고 한다. 이 풍속은 작가 조정래가 <정글만리>에서 ‘시안 같은 도시에 가서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소개할 정도다. 중국 정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파자마 금지령’을 시행했지만, 지금도 밤중에 파자마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있다고 한다.

웃통을 드러내는 노출 패션은 중국 남성들의 오랜 피서법이다. 공사장은 물론 거리, 식당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상반신 노출 패션도 있지만, 셔츠 아래를 말아올려 배만 드러낸 경우도 있다. 서양 언론은 이를 여성 비키니에 빗대어 ‘베이징 비키니’라고 부른다. 또 배통을 드러냈다고 해서 ‘베이징 벨리 비키니’라고도 한다. 올해부터 중국 일부 도시에서 ‘베이징 비키니’ 단속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톈진시는 ‘공공장소 웃통 금지’ 규정을 마련하고 위반자에게 벌금을 물렸는가 하면 허베이성 한단시는 교육용 동영상을 제작해 계도에 나섰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신문화는 물질의 성장에 못미친다. ‘베이징 비키니’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시진핑 정부는 물질과 문화를 함께 누리는 ‘샤오캉(小康)사회’를 약속했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관자>)고 했다. 이제 중국은 예절을 논할 때가 됐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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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상(四不像)’이란 동물이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야생에서 사라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서방 세계에 19세기 무렵에 알려졌고, 그 직후 야생에서 멸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서울동물원에서 사불상을 처음 봤습니다. 

‘사불상.’ 이름이 참 독특합니다. 꼬리는 당나귀, 발굽은 소, 머리는 말, 뿔은 사슴과 비슷한데, 가만히 보면 이 네 가지 동물 중에 어느 것도 닮지 않았다고 해서 결국 이름이 ‘사불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서울동물원에서 봤던 ‘사불상’의 소개 내용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인 Armand David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본국인 중국에서는 ‘milu’라고 알려져 있다. 야생에서는 2000년 전쯤에 멸종되었고, 오직 중국 왕의 사냥을 위한 장소에만 남아있었다. 후에 유럽의 사립동물원으로 이동되었다. 사불상의 발굽은 크고 넓은데 움직일 때마다 딸깍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불상은 습지에서 수생식물을 주로 먹어서 반수생동물(semi-aquatic)로 불리기도 한다. 사불상의 털은 곱슬곱슬한데, 겨울이 되면 칙칙하고 윤기 없는 회색으로 변한다. 지금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인데, 아주 적은 개체가 중국에 재도입되기도 했다.”

서울동물원 표지 설명에는 2000년 전쯤 멸종했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1900년까지 중국 야생에 소수가 살아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의화단의 난’ 때 이들의 마지막 서식지가 군대 주둔지가 되면서 사람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사불상은 그 직전에 영국으로 밀반출되었던 종자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방송으로 영국 동물원에서 사불상을 관리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사불상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큼지막한 사슴 같았습니다. 덩치가 꽤 큽니다. 동물원 관리인의 설명으로는 사불상이 민첩하고 예민해서 마취 총도 잘 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멸종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신만이 알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사라져가는 동식물들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이 동물을 보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겼습니다. 먼저 이름부터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름에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을 담은 ‘불(不)’자를 넣다니, 그것도 네 번이나. 부정이 이들의 부정을 낳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정의 말을 빼고 이름을 다시 지으면 어떨까. ‘닮지 않았다’는 부정의 말을 걷어내고 긍정의 언어를 생각해봤습니다. 모두를 닮았다는 뜻으로, ‘사함상(四咸像)’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긍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 실체와 윤곽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인식의 대상이 뚜렷해지면서 공감하게 되고, 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변해갑니다. 사불상의 이름을 모두 닮았다는 긍정의 이름으로 지어주고 그 실체를 바라봤다면 지금도 야생에서 이 동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탓할 때에 사불상 생각을 합니다. 내가 먼저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부정은 결국 나에 대한 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긍정하는 눈으로 인정하며 바라볼 때에 아이도 바뀌고, 동물도 바뀌고, 나도 바뀝니다. 부정의 나비 효과를 긍정의 날갯짓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나의 몫입니다. 

역사와 인권을 부정하고, 그것도 세 번, 네 번이나 부정하고, 외교와 경제를 등에 업고 정부가 나서서 기업을 몰아세우며 또 부정하는 태도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역사의 굴레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국가권력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라고 독촉하면 안됩니다. 아픔을 긍정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나라가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부정은 결국 지금의 우리, 우리 미래 세대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닮은 것은 닮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때입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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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등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이 8일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풀기 위해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초당적 방일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긴급 제안에 3당 원내대표들이 동의했다. 3당 원내대표들은 또 일본의 수출통상 보복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도 각당의 의견을 모은 뒤 오는 18일 또는 19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일본의 통상보복 조치에 대해 초당적으로 우리의 결의를 모아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여야의 초당적 대응을 환영한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가 8일 국회의장실에서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 문 의장, 자유한국당 나경원·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 이준헌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1차적 대응은 정부가 주도하게 돼 있다. 하지만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힘을 실어주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일본 의존도를 줄이는 중장기 산업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국회 역할이 긴요하다. 시민들이 반일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도 정치권의 몫이다. 이런 때에 한국당과 다른 야당들이 국회 차원에서 한목소리로 대응하기로 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한국 경제의 앞길을 막겠다는 일본 정부의 터무니없는 공세에 정치권이 앞장서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이날 “여당에서 부랴부랴 특별위원회를 만든다 하는데 의병을 일으키자는 식의 감정적 주장을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나 원내대표도 “초강경 대응책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상 반일감정 부추기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이 초강경 대응책을 내놓고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초당적 외교를 약속한 입으로 정반대 이야기를 한 것은 맞지 않다. 진정 초당적 외교를 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정치권은 그동안 말로만 초당적 외교를 외쳤지 실천에 옮긴 적이 없다. 이런 사안에서조차 초당적 외교를 구현하지 못한다면 정치권은 존재 이유가 없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일본 정부의 반도체 수출규제와 한반도 평화 문제 등을 의제로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간 회동을 제안했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은 이 방안도 적극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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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가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검경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윤 후보자는 검찰의 직접수사권은 점진적으로 축소·폐지하되, 경찰 수사를 통제하는 권한은 일정 부분 유지돼야 한다고 했다. 현재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라있는 수사권 조정 법안은 검찰의 직접수사 기능은 일부 유지하면서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 기능을 폐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윤 후보자는 패스트트랙에 함께 오른 공수처 설치 법안에 대해선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가 8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청문위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윤 후보자는 이날 “강자 앞에 엎드리지 않았고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사건과 선거 사건에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논리를 따르거나 타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호욱 기자 biggun@kyunghyang.com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윤 후보자 입장은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일선 검사 시절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등 검찰권 축소·분산 방안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온 터다. 윤 후보자는 “검찰의 본질적 운용은 소추(공소제기) 기능에서 비롯된다”면서 “수사지휘라는 것은 검경 간 소통인데, 지휘 개념보다 상호 협력 관계로 갈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검경 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개선하는 선에서 수사지휘권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발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통제받지 않는 경찰’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검찰 구성원의 의사를 대변함으로써 확고한 리더십을 구축하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조직의 사기를 고려하기엔 검찰을 향한 시민의 분노가 너무도 크다. 검찰 스스로 성찰과 쇄신의 기회를 저버린 탓이다. 윤 후보자는 검찰개혁을 갈망하는 시민의 목소리부터 깊이 새겨야 옳다.

‘검사 윤석열’은 수사 능력이 탁월했다. 정의감과 헌신성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검찰총장 윤석열’은 이 정도 자질과 덕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검찰의 이해를 넘어 전체 주권자의 요구에 입각해 검찰을 이끌어야 한다. 문무일 현 총장처럼 조직이기주의에 매몰돼선 곤란하다. 다행히 윤 후보자는 “전문가로서 의견을 개진할 뿐, 국회에 제출되거나 성안이 거의 다 된 법안을 폄훼하거나 저항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 약속을 지키면 된다. 검찰은 개혁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다. 윤 후보자는 총장에 오르는 순간 ‘뼛속까지 검사’이던 과거를 지워야 한다. 한 사람의 공복(公僕)으로서 주권자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세만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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